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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25 장 기막힌 안배(按排)
[1]
"불영관음수(佛影觀音手)!"
"혈폭섬(血暴閃)!"
"택일개천장(擇日開天掌)!"
꽈우우우우…… 츄츄츄츄!
정신없이 몰아쳐오는 세 명의 합공은 황자강을 궁지로 몰아넣기 충분했다.
황자강은 급급히 반격을 퍼부어 보았지만 그 어느 것도 소용이 없었다.
금사검(金獅劍)을 뽑아들어 대항하고, 좌장으로 온 힘을 다 짜내 장경을 펼치고, 두 다리는 발바닥에서 연기가 날 정도로 미리신법(迷裏身法)을 펼쳤지만 그들의 합공을 받아내기는 커녕 피하는 것도 어려웠다.
'빌어먹! 제기럴!'
속으로 나오는 대로 지껄이고 중얼거렸지만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피하기에 전력추구할 뿐 아무 것도 할 것이 없었다.
천음성모가 합세하지 않았기에 망정이지 만약 그녀까지 합세했다면 황자강은 벌써 바닥에 쓰러져 나뒹굴었을 터였다.
꽈꽈꽈!
다시 한 차례 위맹한 장풍이 황자강의 옆구리를 파고들었다.
'이거 장난이 아니네. 빌어먹을!'
보법을 신랄하게 펼쳐내 가까스로 장풍을 피해낸 황자강은 더 이상 펼칠 무공이 없었다.
그가 아는 무공은 하나같이 초절정의 신공들이었다. 그러나 이미 그것도 바닥이 드러나버린 것이었다.
상대방은 무림의 초강자들이 아닌가?
그들은 한두 번도 아니고 매번 펼쳐내는 황자강의 무공 속에 담긴 허실(虛實)을 환하게 꿰뚫고 있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자강이 아직도 살아있는 것은 그들이 손속에 자그마한 자비를 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놈의 늙은이들은 지금 나를 시험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살황독후나 무영신투의 무공을 쓸 수는 없다. 제길! 가는 데까지 가보자. 설마 내가 죽을 위기에 처하면 천음성모가 가만히 있지는 않겠지. 그랬다가는 이 소설도 여기서 막을 내려야 할테니까!'
황자강은 역시 눈치가 뛰어난 자였다.
어쨌거나 그는 최후까지 살황독후와 무영신투의 무공을 사용치 않겠다고 다짐했다.
만약 그것을 펼치게 되면 그땐 돌이킬 수 없는 일이 발생하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였다.
돌연 그의 귓전으로 구지신개의 음성이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젊은이, 검은 호구로 들고 있나?
'으잉?'
황자강은 대경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구지신개의 음성이 이어졌다.
-검으로 우릴 공격해 봐야 밑천이 다 떨어진 공격! 해보나마나니 대신 우리 세 사람이 펼치는 공격을 그것으로 재주껏 막아보게. 단 이 말은 내가 했다고 떠들지는 말게나. 크크크!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을 탐하며 짓쳐들던 구지신개가 뜻밖에도 이번에는 우군이 되어주고 있는 것이 아닌가?
'저 늙은이가 벌써 노망이 들었나? 무슨 헛소릴 지껄이고 있는 거야?'
그러나 황자강으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까짓것, 이래도 박살나고 저래도 박살나긴 마찬가지다. 좋아, 해보는 거다!'
휘이이이잉!
황자강은 금사검으로 세 사람의 공격을 막아갔다.
파파팍! 탕! 탕!
그들의 공격을 수 차례 막아갔을 때였다. 돌연 황자강의 얼굴에 경악이 어렸다.
'엇! 세 사람의 공격 속에 어떤 규칙이 있다!'
휘이이이잉…… 팟팟팟!
'좌로 꺾이는 듯하면서도 우로 돌고, 다시 뒤로 밀려났다가 앞으로 몸을 숙이며 달려드는 이 발놀림이란……!'
황자강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세 사람의 공격을 피하다보니 자연스럽게 황자강의 몸 또한 물러났다가 뛰어들기를 거듭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그 몸놀림이 반복적으로 계속된다는 것이었다.
마치 옆에서 보고 있노라면 보법(步法)을 연마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손에 든 금사검으로 상대방의 공격을 막자면 자연 팔의 움직임이 있어야만 했다. 꺾고, 찌르고, 휘두르고, 때리고, 후려치고, 올려막고, 옆으로 긋고, 튕겨내는 방법이 기이하게도 연속적으로 연결이 되었다.
'이게 뭔 지랄이냐?'
황자강은 무의식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자신의 몸놀림에 스스로 놀랐다.
발은 발대로, 손은 손대로 이젠 그의 의지와는 달리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 사람의 공격을 동시에 막아내야 한다는 생각에서 일어나는 몸의 변화였다.
이때였다.
정신없는 황자강의 귓전으로 천음성모의 전음이 들려왔다.
그녀의 음성은 사부가 제자를 훈계하듯 준엄했다.
-뭐하는 거요, 젊은이. 어서 발의 움직임과 손의 움직임에 정기신(精氣身)을 일치시키지 않고!
'정씨 귀신이 어떻다고?'
황자강은 그 와중에서도 말꼬리를 잡고 늘어졌다. 정말이지 타고난 천성은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천음성모의 전음이 이어졌다.
-지금 세 분은 젊은이에게 무공을 전수해 주고 있는 것이오.
'제기럴! 가르쳐 줄려면 그냥 가르쳐주지 왜 힘들게 이따위 방법을 쓰고 지랄이야? 늙으려면 곱게 늙을 것이지 모조리 노망이 들었나?
황자강의 그런 마음을 읽어내기라도 한 것일까?
-강호인은 자신의 절기를 함부로 남에게 전수하지 않는 법이오. 세 분이 이런 방법을 택한 것도 다 그 때문이니 어서 정신을 차리고 받아들이시오."
하지만 황자강은 여전히 투덜거리며 공격과 수비를 연속해 펼쳤다.
'늙은이들이 강호 고수라는 것은 인정하지만 자기들 절기에 금칠이라도 했나? 이거 배워라 하고 비급을 주면 될 거 아냐! 힘들어 죽겠네!'
-젊은이가 움직이는 발놀림은 풍각비종의 절기 중 하나인 팔보간선추운식(八步稈禪追雲式)이라는 절기요. 그리고 검으로 막아내는 일련의 동작은 개방의 타구봉법 가운데 단연 으뜸인 천승만기봉술(天乘萬技棒術)이고, 젊은이에게 전개하는 개벽장존의 손놀림을 자세히 보면 그것이 그의 자랑인 잠룡인(潛龍印)임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절대 놓치지 마시오.
'빌어먹을! 막기도 바빠 죽겠는데 그걸 어떻게 다 기억해?'
마음 속으로나마 그렇게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황자강은 그 순간 발놀림, 손놀림, 개벽장존의 손놀림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머리에 새기고 있었다.
"놈, 오른발에 쥐라도 났느냐?"
"카카카! 이번 동작을 놓치면 잠룡인(潛龍印)이 아니라 토룡인(土龍印:지렁이)이 된다."
"히히히, 그러다가는 개를 때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개에게 물리겠네."
꽈우우우우!
세 노인네들의 잔소리는 시간이 지날 수록 그 도를 더해갔다.
이렇게 해라, 저렇게 해라, 어디가 잘못되었다, 그건 그게 아니다, 너무 빠르다, 느리게 해라, 굼벵이를 잡아먹었느냐 왜 이리 더디냐…….
세 사람은 황자강이 펼치는 몸 동작 하나하나마다 꼬투리를 잡고 잔소리를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러면서도 손을 멈추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전보다 더 강하고 빠르게 그를 핍박해 들어왔다.
헌데 차츰 시간이 지날 수록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땀을 비오듯 찔찔 흘리며 허둥거리던 황자강이 벙글벙글 웃으며 아예 놀 듯이 그들의 공격을 피해내는 것이 아닌가?
"핫핫핫, 좀더 쎄게 해주시면 어떻겠습니까? 세 분 어르신, 이거 너무 싱겁군요."
파파팍!
그의 몸이 바람에 흩날리는 낙엽처럼 부드럽게 움직였다. 그것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새 손에 들려진 금사검에서는 태산도 뭉갤 듯한 기세가 연속적으로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어느 한순간 세 사람이 동시에 뒤로 물러났다.
"크핫핫핫! 좋아!"
"하하하! 어느 정도 짐작은 했지만 이토록 빨리 우리의 심득을 받아들이다니!"
"기분 괜찮은데……!"
구지신개 등은 황자강을 중심으로 품자(品字)를 이루며 서 있었다.
그들은 무엇이 그리 기분 좋은지 입을 크게 벌리며 호탕하게 웃었다.
황자강은 검을 곧추세우며 그들에게 포권을 취했다.
"세 분 노선배님의 가르침에 후배 감읍하옵니다."
이때 천음성모가 황자강에게 다가왔다.
"젊은이, 노신은 이분들과 함께 급히 가야할 곳이 있네. 어려운 부탁이지만 초초(草草)를 무당산까지 데려다 줄 수 있겠나?"
'이를 말이냐? 혼자 여행하느니 옆에 계집 하나 있으면 그야말로 왔다지! 거기다가 이미 저 계집과 난 몸까지 섞었으니 또 달라고 해도 줄게 아니냐? 돈 안들어가고 매일 그 짓을 할 수 있는데 누가 싫어해?'
황자강은 쾌히 승낙했다.
"어려워 마십시오. 마침 소생도 무당산에 가야할 일이 있습니다. 초초낭자는 소생의 생명의 은인인데 어찌 소홀히 대하겠습니까."
"고마우이."
"당연한 일입니다. 헌데 무당산에는 무슨 일로……?"
황자강은 양초초를 돌아보며 물었다.
"그건……."
천음성모는 말 끝을 흐리며 양초초를 바라보았다. 양초초는 고개를 숙였다.
'불쌍한 것…….'
이윽고 천음성모는 양초초가 무당에 가는 이유와 그녀가 삼음절맥에 걸려 있다는 것을 말해 주었다.
황자강의 얼굴이 급변했다.
'으잉? 이거 가다가 시체 치우는 것 아냐?'
그러나 그는 곧 슬픈 얼굴을 했다.
"저토록 아름답고 마음씨 고운 초초낭자께서 그런 병에 걸리시다니…… 소생, 어떤 일이 있어도 무당파에서 태극화정환(太極火精丸)을 구해 초초낭자의 삶을 구하겠습니다. 감히 도사들이 어사대인의 명을 거역하겠습니까? 하하하핫!"
"그렇게만 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네."
천음성모는 눈시울을 붉혔다. 황자강의 내심을 알 리 없는 그녀는 그저 황자강이 고마울 뿐이었다.
이때 구지신개가 황자강을 향해 입을 열었다.
"이보게, 강호를 주유하다가 혹시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거렁뱅이 아무나 붙잡고 이 늙은 거지 이름을 팔게. 그럼 그들이 기꺼이 자네를 도울 것이네."
'미쳤냐? 거지들에게 굽신거리게……?'
마음 속은 이랬지만 황자강의 입에서 새어나온 말은 지극히도 겸손했다.
"감사합니다. 도움을 받을 일 있으면 염치불구하고 받겠습니다."
그 순간 구지신개가 호탕하게 웃었다.
"껄껄껄! 거지라고 너무 무시하지 마시게."
'이크! 저 거지노인네가 독심술(讀心術)을 익혔나? 그럼 시체를 치우게 생겼다고 생각한 내 마음도 읽은 것 아냐?'
황자강은 왠지 머리가 쭈삣해졌다.
잠시 후 구지신개를 비롯한 네 명의 초강자들은 석보사를 떠났다.
고집을 부리는 풍뢰철창 독고기를 강호로 데리고 나오기 위해서였다.
황자강은 그들의 뒷모습을 망연히 바라보았다.
'뜻하지 않게 계집도 얻고 무공도 배웠구나.'
그렇다.
그것은 정녕 뜻밖의 기연(奇緣)이었다.
문득 황자강은 옆에 다소곳이 서 있는 양초초를 바라보았다.
"……!"
얼굴을 붉힌 채 다소곳이 서 있는 양초초의 모습은 막 터오는 여명 빛을 받아 더욱 아름다웠다.
'흐이구! 고거…… 보면 볼 수록 예쁘다. 당장 이층을 쌓아? 아니지, 아직 시간은 많다.'
그는 생각을 바꾸었다.
"초초낭자, 날도 밝았으니 길을 떠납시다. 이 산을 넘으면 마을이 있을 것이오. 그곳에서 식사를 합시다."
"예."
양초초는 다소곳이 고개를 숙였다.
'오호! 이제부터 내 밤(夜)은 확실하게 보장되었다!'
황자강은 한껏 예의를 차리며 길을 떠났다. 그의 발걸음은 구름 위를 걷는 것처럼 가벼웠다.
[2]
무당파(武當派).
무당파는 악성(岳城) 균현(均縣)에 위치한 무당산(武當山)에 위치해 있다.
도합 이십칠봉(二十七峰), 삼십육암(參十六庵), 이십사연(二十四淵), 오정(五亭), 오대(五臺), 삼당(三堂), 육원(六院), 팔궁(八宮), 이십사암(二十四岩), 칠십이장(七十二場)으로 구성된 도관(道館)들이 무당산 전역에 자리해 있었다.
옛부터 천하사대도지(天下四大道地) 가운데 한 곳으로 불리워지는 무당산은 중원도종의 본산(本山)이기도 했다.
장삼풍(張三豊)이 이곳에 도종을 내리면서부터 알려지기 시작한 무당파(武當派)는 예로부터 검의 대행명가(大行名家)로 꼽혀왔다.
허나 당금 강호무림에 있어서 더욱 무당파를 빛내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바로 무당파가 십정맹(十正盟)의 수좌(首座)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십정맹(十正盟).
백도무림의 유구한 전통과 역사를 지니고 있는 구대문파(九大門派)와 개방( 幇). 그들 열 개의 백도세가를 일컬어 강호인들은 십정맹이라 칭했던 것이다.
그런 십정맹의 당금 맹주가 무당파였다.
청수재(淸水齋).
청수재는 무당파의 후원에 자리잡은 운치있는 도관의 이름이었다.
이곳은 바로 무당파 장문인인 불회진인(不懷眞人)이 거처로 삼고 있는 곳으로 늘 묵향(墨香)에 젖어 있는 곳이기도 했다.
수백여 권의 고서와 수묵화 등이 배치된 실내에는 회색도포를 걸친 칠순의 노인이 단정히 무릎을 꿇고 앉아 서도삼매경(書道三昧境)에 빠져 있었다.
학 같은 풍모가 느껴지는 백미에 백염의 이 도인이 바로 불회진인이었다.
스슥!
불회진인의 뒷편엔 제자로 보이는 스무 살 가량의 청년도인이 무릎을 꿇고 앉아 엄숙히 먹을 갈고 있었다.
불회진인의 앞엔 큼직한 붓과 빈 두루마리가 놓여 있었다.
이윽고 청년도인은 공손히 먹을 놓고 벼루를 갖다 놓았다.
"……."
불회진인은 호흡을 가다듬고는 붓을 들어 먹을 듬뿍 찍었다.
절제된 동작과 품격있는 태도로 이미 그의 서도가 신인지경에 이르렀음을 증명했다.
스스슥!
힘차게 움직이는 붓놀림에 따라 빈 두루마리에 일필휘지가 휘갈겨졌다.
그의 붓놀림은 실로 유연하면서도 힘찼다.
"……!"
숨을 죽이고 붓 끝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청년도인의 눈에 감탄지색이 어렸다.
<일심지도(一心之道).>
불회진인의 붓 끝에 청학이 춤추듯 쓰여진 네 글자였다.
'한 호흡으로 포효하는 맹호(猛虎)의 기상과 구름 속을 노니는 신룡(神龍)의 움직임을 창출하시는 필력(筆力)……!'
붓놀림에 뒤이어 장엄한 필치를 견식하는 청년도인의 표정은 감탄으로 물들었다.
'사부님의 서도는 이미 인간의 경지를 벗어나 신인지도(神人之道)에 이르셨다!'
맞는 말이었다.
불회진인의 필력은 당대 제일의 명필(名筆)로도 유명했다.
"음!"
불회진인이 나직이 신음성을 흘리며 붓을 들어 막 먹을 다시 묻히려는 찰나였다.
문득 방문 밖으로부터 낭낭한 젊은 도장의 음성이 들려왔다.
"제자 청목(靑木)이옵니다."
그 말에 청년도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장문인께서는 지금 수양중이시니 급한 용무가 아니면 후에 찾아뵙도록 하라, 청목."
그러나 방문 밖의 무당제자는 물러나기는 커녕 더욱 다급한 음성으로 말했다.
"장문방장께 아룁니다. 지금 상청관(上靑館)으로 귀빈이 찾아오셨습니다."
"……?"
불회진인과 청년도장의 얼굴에 의아함이 물들었다.
상청관은 무당파의 중지(重地) 가운데서도 중지에 속하는 곳이었다. 제 아무리 명문대파의 지존이 방문했다 하더라도 상청관으로 모시지는 않았던 것이다.
불회진인은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끼며 입을 열었다.
"어느 분께서 방문하셨느냐?"
"아뢰옵니다. 방문하신 귀빈께서는 황명을 받들고 오신 어사대인(御使大人)이시옵니다."
"어사대인!"
불회진인의 하얀 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 모습에 청년도인은 흠칫 놀랐다. 그는 불회진인의 이마에 굵은 땀방울이 송글송글 맺혀지는 것을 보았다. 청년도인은 의아해했다.
'대체 무슨 일로 평정심을 잃지 않으시던 사부님께서 이리도 격동하신단 말인가?'
"……."
다음 순간 불회진인의 눈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무량수불……."
나직이 도호를 ㅇ조린 불회진인은 붓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낮았으나 위엄있는 음성으로 말했다.
"청목은 그 분을 이곳 청수재로 모시어라."
"예."
방문 밖으로부터 총망히 떠나는 제자의 발걸음 소리를 듣던 불회진인은 옆에 앉아있는 청년도장에게 말했다.
"백양(白陽)아."
"예, 사부님."
"넌 문 앞에 나가 귀빈을 영접하고 그 누구도 청수재에 들지 못하도록 제자들에게 일러라."
"알겠사옵니다."
청년도장 백양은 일어서며 내심 의구심을 일으켰다.
'대체 무슨 일인가? 사부님께서 이토록 격동하신 일은 없었는데…… 천지마교가 발호했을 때도 이보다 더 놀라지 않으셨다. 아니 오히려 마침내 올 것이 왔다는 양 조용히 받아들이셨던 분이시다. 그런데 조정대신 한 사람이 왔다고 저런 모습을 보이다니……?'
그러나 백양은 차마 자신의 의구심을 입 밖에 내뱉지 못했다.
지그시 눈을 감는 사부 불회진인의 모습이 너무나도 무거웠기 때문이었다.
[3]
휘이이잉……!
산사(山寺)로 부는 바람은 서늘하고 쓸쓸했다.
때는 만물에 물이 올라 싱그러운 계절이건만 바람은 때 아니게 쓸쓸함만 몰고왔다.
불회진인의 걸음은 놀랍게 빨랐다.
도포자락을 흔들며 걷는 모습은 매우 여유가 있어 보였으나 그의 발은 땅에 닿지도 않는 것처럼 보였다.
그는 좌우로 눈길을 돌리는 법도 없었다. 전면만 응시한 채 빠른 걸음으로 내려갔다.
그들은 순식간에 산문을 내려가 다시 옆으로 난 산길로 접어들었다.
"……."
황자강은 이들 무당파에 말못할 비밀이 얽혀 있다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사문의 비밀을 함부로 캐물을 수도 없는 것이어서 묵묵히 불회진인의 뒤만 따랐다.
그들은 모두 강호 절정의 고수들인지라 산길을 타고 가는 모습은 시위를 떠난 화살같이 빨랐다.
그로부터 반 시진 후였다.
구우우우우…… 구우우우…….
그들은 깎아지른 듯 날카로운 낭떠러지 위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주위는 울창한 숲과 잡초들로 가려져 있었다. 게다가 발 밑에는 자욱한 운무(雲霧)가 깔려 있어 깊이를 헤아릴 수도 없었다.
"……."
불회진인은 약간 구부정한 몸으로 서서 한참동안이나 절벽 밑을 굽어 보았다. 그의 입은 굳게 다물려져 있었다.
발 밑의 운무는 점차 위로 거품처럼 솟아오르는 것처럼 보였다. 그러다 눈 한 번 깜빡이는 사이에 다시 바닥 저 깊은 곳으로 쑥 가라앉는 것 같았다.
하지만 그것은 환시에 불과했다.
운무는 흔들리는 법도 없고 짙어지거나 흐려지는 법도 없이 그대로 절벽 아래 고여있었다.
황자강은 절벽 아래 고여있는 운무를 내려다보며 내심 신음했다.
'으음…… 이곳이 바로 무당파로 침입해 들어왔다던 신행도수가 잡혀있는 곳인가 보구나!'
그렇다.
황자강은 불회진인과 독대하는 순간 구룡패를 꺼내보이며 신행도수를 만나게 해 달라고 청했던 것이었다.
그러자 불회진인은 가타부타 이유도 대지 않고 이곳으로 그를 안내해 온 것이었다.
"……."
황자강은 불회진인의 뒷모습만 쳐다보았다.
저 벼랑 속의 짙은 운무보다 더한 신비로운 비밀이 그의 마른 몸 어딘가에 깃들어 있는 것만 같았다.
갑자기 불회진인의 입에서 위엄있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대인께서는 빈도의 뒤를 잘 따르시오."
"……?'
황자강이 미처 정신을 차리기도 전이었다.
휘익!
불회진인이 한 마리 야조처럼 아득한 낭떠러지 아래로 몸을 날리는 것이 아닌가? 그의 몸은 순식간에 십여 장 아래로 떨어져 갔다.
황자강은 아찔했다.
'너무 깊다! 아래로 떨어졌다가 뼈도 못추리는 게 아냐? 도대체 밑도 헤아리기 어려운 낭떠러지 속으로 어떻게 뛰어든단 말인가?'
그러나 황자강은 곧 용기를 냈다.
'나에게도 무공이 있다. 바람 따라 흘러 다니는 깃털처럼 몸을 가볍게 하여 펼치는 세류신법(細流身法)이 있지 않은가? 그거면 충분할 거다!'
황자강은 곧 호흡으로 심기를 조절하고는 불회진인이 섰던 곳으로 다가갔다.
발 밑을 굽어보니 눈 앞이 아득하다.
절벽을 가득 메우고 있는 뿌연 안개 속에서 음습한 찬기운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사방 절벽 쪽에는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검푸른 이끼와 잡풀들이 운무에 가려져 있었다.
불회진인의 모습은 벌써 까마득했다. 다만 운무 속에 그의 회의자락만이 언뜻 보이다 사라졌다.
'에잇! 늙은이도 하는데 나라고 못할 소냐?'
황자강은 호신강기로 몸을 보호하고 아래로 몸을 날렸다.
후리리릭!
그의 몸이 깃털인 양 천천히 아래로 떨어졌다.
[4]
'부운연신(浮雲煙身)의 경지! 실로 놀랍군. 이제 약관의 나이에 저런 공력이라니…… 허긴 그만한 실력이니 그 나이에 어사대인이 되었을 것이다.'
불회진인은 가볍게 땅으로 내려서는 황자강의 신법에 적지 않게 놀랐다.
하지만 그는 곧 아무 말없이 따라오라는 듯 몸을 돌렸다.
불회진인은 양쪽 벽면이 접해지는 사이로 만들어진 작은 동굴 속으로 들어갔다.
동굴 입구엔 허연 석순(石筍)들이 길게 자라나 괴물의 이빨처럼 늘어져 있었다. 상벽(上壁)에선 뚝뚝 물방울이 맺혀 떨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바닥엔 발등이 빠질 정도로 물이 고여 있었다. 불회진인은 그 속으로 소리도 없이 유령처럼 걸어 들어갔다.
"……."
황자강은 말없이 불회진인의 뒤를 따랐다.
대량 삼십여 장 정도 들어갔을 때였다.
불회진인이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그곳은 꽤 넓은 석실 안이었다. 퀴퀴한 곰팡이냄새와 함께 흙냄새가 진동하는 사방 삼 장여 정도의 넓은 석실이었다.
오랫동안 사람의 발자국이 끊긴 듯 석실 안에는 두터운 먼지가 층을 이루며 쌓여 있었다.
우우웅!
석실은 황자강과 불회진인이 들어서자 살아 있는 생명체처럼 미세하게 진동했다.
뒤이어 마치 벽이 무너지기라도 하려는 듯 벽면을 덮었던 먼지들이 어지럽게 흩날리며 떨어져 내렸다.
"……."
황자강은 무거운 눈빛으로 석실 안을 둘러보았다.
아무런 장식이나 장치도 보이지 않았다. 다만 작은 석상 하나만이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석실 중앙에 덩그러니 놓여 있을 뿐이었다.
황자강은 주위를 둘러보던 시선을 거두며 불회진인을 향해 물었다.
"장문인께서 본 대인을 이곳에 데려온 까닭이 무엇이오?"
그의 음성이 석실 안에서 웅웅거리며 울렸다.
불회진인은 벽면 한 쪽을 착잡한 표정으로 응시하고 있다가 황자강을 향해 얼굴을 돌렸다. 그리고는 말문을 열었다.
"여기가 바로 본파의 금지구역인 조사동(祖師洞)이오."
"으음!"
황자강은 신음성을 흘렸다.
불회진인은 황자강의 굳어진 얼굴을 주시하며 부드럽게 말을 이어갔다.
"이곳은 본래 본파의 개파조사이신 장삼봉 조사의 연공실이었소."
"여기가 바로……!"
황자강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그는 석실을 둘러보았다. 그러나 장삼봉조사를 떠올릴 만큼 신기하거나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그저 평범한 석실일 뿐이었다.
불회진인은 벽면을 응시한 채로 말을 계속했다.
"예로부터 이곳에는 조사께서 남기신 신공절예가 어딘가 숨겨져 있다고 전해졌소."
황자강은 충분히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때문에 본문의 장문인이 될 사람은 반드시 이곳에서 한 달 동안 머물면서 그 인연을 기다려 왔소."
"어찌 되었소? 정말 무공이 있었소?"
"그러나 그 비밀은 우리 앞에 나타나지 않았소."
"그렇다면 장문인께서 본 대인을 이리로 데려온 까닭이 있지 않겠소?"
"음!"
불회진인은 무겁게 탄식하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한동안 황자강을 응시했다.
"……."
불회진인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황자강은 그의 그윽한 눈길 속으로 빠져들어가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참선(參禪)의 깊은 경지에 이르면 저런 눈빛이 되는 것일까?
눈빛 뿐만이 아니었다. 불회진인의 얼굴 표정 또한 더할 수 없이 평온해 보였다.
평범한 사람들 같으면 그런 불회진인의 모습을 대하는 순간 지극히 평화로운 기분을 느낄 터였다.
하지만 황자강은 달랐다. 그는 거울같이 맑은 불회진인의 눈빛을 대하는 순간 이상하게도 절로 몸이 얼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던 것이다.
정말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때였다.
불회진인의 단정한 입술이 열렸다.
"오 년 전 본파에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소이다. 신행도수(迅行盜帥), 도계(盜界)의 신투가 이곳 조사동에 잠입해 들어왔소이다."
"음……."
황자강은 고개를 끄덕였다.
자운공주에게 대충 그 이야기를 들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확실한 내막은 알지 못했다. 황자강은 잠자코 불회진인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불회진인은 말을 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무엇인가를 찾고 있었소. 그러던 찰나에 마침 차기 장문인으로 내정된 백양(白陽)을 조사님들께 배례코자 빈도와 사제들이 이곳에 왔는데…… 그를 발견하게 된 것이오."
황자강은 내심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그랬었군. 마음만 먹으면 황제의 속옷이라도 훔친다는 신행도수가 어쩐지 너무 쉽게 발각되었다 했더니…… 그런 사연이 있었구나.'
그렇다.
신행도수는 지금으로부터 일백 년 전에 활동했던 천하제일수(天下第一手)이자 신투술의 황제인 무영신투에 버금가는 대도(大盜)였다.
도계에 이름을 걸고 있던 황자강이 그런 신행도수의 전설적인 신투술을 모를 리 없었다.
황자강은 짐짓 모른 척을 하면서 물었다.
"신행도수가 이곳에 있다는 말을 듣긴 들었지만 그가 감히 무당파의 진산비기를 훔치려고 들어왔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구려. 그래서 어찌 되었소?"
불회진인의 말이 이어졌다.
"신행도수는 사태가 극히 불리하자 조사동 안에다가 폭탄을 매설하고는 한 사람이라도 들어온다면 즉시 조사동을 폭파해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소이다. 무량수불……."
"저런!"
황자강은 혀를 끌끌 찼다. 하지만 마음 속으로는 내심 고소해하고 있었다.
'잘한다. 말코 도사들 코가 납작해졌겠군.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똥줄깨나 탔겠구나!'
황자강은 재차 물었다.
"그럼 오 년 동안 이곳을 그대로 방비해 두었단 말이오?"
"그렇소이다."
"음…… 신행도수가 도망치지 못하고 이곳에서 꼼짝도 못했다면 그 사이 그가 장삼봉조사의 무공이라도 찾아 익혔다면 어쩔려고 그랬소?"
불회진인은 고개를 저었다.
"무량수불…… 신행도수가 무영신투 이래 천하제일의 신투술을 익혔다고는 하지만 조사님의 유공(遺功)을 찾았다고는 보지 않소."
"그건 또 왜요?"
황자강은 의아한 듯 물었다.
"그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오지 않았소. 만약 그가 유공을 찾았다면 나가려고 시도를 했을 것이 아니겠소?"
"일리 있는 말이군. 헌데 말이오……."
황자강은 말꼬리를 흐리며 불회진인을 직시했다.
"나야 황명을 받고 왔지만 장문인께서는 구룡패를 보자마자 선뜻 날 이곳으로 안내한 이유가 무엇이오?"
불회진인은 눈을 감으며 무거운 음성으로 도호를 외었다.
"무량수불……! 그건 이유가 있소. 무슨 연유인지 신행도수는 어사대인이 언젠가는 올 것이니 그때 그 분을 자기 쪽으로 보내달라고 했소. 그 분을 만나면 즉시 폭발물을 제거하겠다고 했기 때문에…… 무량수불……."
"헛! 그가 내가 올 줄을 알고 있었다 이거요?"
황자강은 흠칫했다.
'공주 계집이 한 얘기와 좀 다르잖아? 공주는 신행도수가 감옥에 갇혀 있다고 했는데?'
그러다가 황자강은 문득 깨달았다. 감옥이나 조사동이나 갇혀있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을.
'그러나 오 년 전부터…… 신행도수는 내가 올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이 아닌가? 그때라면 공주가 고작 열 서너 살밖에 안되었을 때인데…… 어떻게 내가 올 줄 신행도수가 알고 있었단 얘기지?'
아무리 뇌리를 굴려도 해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렇다면 방법은 한 가지 뿐이었다.
'만나면 알게 될 것이다!'
황자강은 복잡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곧 불회진인에게 말했다.
"안내해 주시오. 그를 만나겠소."
"무량수불……."
불회진인은 도호를 조용히 뇌까리고는 앞장을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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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
잼 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