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5일 대구에 있는 무쌍직전영신류 거합검도 한국본부이자 합
기도 정기관 본관을 방문하였습니다.
평소 대구에는 최용술선생의 무술이 비교적 원형 그대로 보전되
어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품고 있었는데 이날의 방문은 그를
확인하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하지만 평소 거합검도 본부도장은 대구에 들리면 한 번쯤 방문
할만한곳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저 자신이 검도에 대한 지식이
일천한 탓에 두 번째의 방문지로만 남겨두고 우선은 최용술선
생의 손자가 한다는 도장을 찾아갈 참이었습니다. 그곳엘 가면
뭔가 할아버지의 대를 잇겠다는 젊은이의 장한 모습과 그래서
다른 그 어떤곳 보다도 원형의 모습과 진실한 얘기가 기다리고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갖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우누린가
어디서 메모해 두었던 그 도장의 전화 번호로 전화를 했을땐
무술도장이 아니라는 실망스런 답변이 흘러나왔습니다. 아마도
내가 잘못알았나 보다, 다른 도장엘 가면 그곳 정보를 알 수
있지 않을까, 그러면 거합검도장 먼저 가보자 하고 들렸던 것
이 바로 그날의 방문이었습니다.
합기도 정기관 본관은 대구시내 중심가에서 비교적 가까운 곳
에 위치해 있어서 그 전날의 시내구경도중 쉽게 눈에 띄었습니
다. 그런데 4층의 도장문을 들어서기 전에 선전물을 전시한 벽
보판에서 최용술선생과 함께한 관장님의 사진이 있길래 뭔가
예사롭지 않은 마음으로 신발을 벗었습니다.
정기관의 관장님 함자는 임자 현자 수자 되는 분이셨습니다.
한눈에도 무골의 상을 지녔다는 인상을 주는 분이셨지만 표정
은 온화하시고 방문자를 친절히 맞아 주셨습니다.
간단히 제 인사와 찾아뵙게된 경위를 말씀 드리자 자리를 내 주
시고 제가 드리는 질문에 대해 성실히 답변해 주셨습니다.
그런데 제 나름대로 질문거리를 준비해 갔지만 너무나도 솔직
한 답변을 해 주시는 바람에 제가 여쭤보기도 전에 제가 듣고
싶었던 말씀들이 흘러 나왔고 덕분에 대담은 준비해간대로가
아닌 임기응변식으로 되고 말았습니다.
대체로 알고 있던 사실의 재확인이 많았고 한두가지 새롭게 알
게된 사실들도 있었습니다. 지금부터는 임관장님의 말씀을 요
약하되 인상적인 부분은 대화체로 기록하도록 하겠습니다.
우선 임현수관장님과 최용술선생과의 관계에 대해 언급하자
면 임관장님은 최용술선생으로 부터 직접 9단을 받은 분이십
니다. 1964년 최용술 선생의 제자가 되신 이후로 1976년 선생
께서 본인의 도장을 문닫으신 이후론 그 이삿짐을 고스란히
임관장님 도장으로 옮기고 1981년까지 모셨다고 합니다.
우선 최용술선생의 손자에 대해 여쭤 보았습니다.
"가가(그 애가)아마 작년엔가 문닫았지?"
"........"
"금산에서 한 맷달 배았다 카등가 그럴끼라. 가는 내가 잘 알
지. 우리가 한창 운동할 때 똥 싸고 돌아 댕ㄱ그등. 그런데
운동은 마이 못했어."
요약하자면 할아버지의 대를 잇겠다는 거창한 명분과는 달리
체계적으로 수련을 오래하지는 못했다는 얘깁니다. 대구에 내
려가기 전부터 주위의 많은 분들이 손자한테 가봐야 별거 없을
거라는 충고들을 해 주셨는데 그것이 사실로 들어 나는 순간이
었습니다.
일본아이기도와 늘 문제의 소지가 되는 명칭문제에 대해.
"선생님께선 그냥 야와라라고 불렀지. 그분은 어릴 때 한국
을 떠나 한국말이 서툰분이셨어. 평상시엔 거의 일본말 반 한
국말 반이였지. 게다가 선생께선 글을 모르는 분이어서 합기
유권술이니 합기도니 하는건 그분의 말을 듣고 그 뜻을 풀어
낸 제자들의 작품이야. 그이상도 그이하도 아니야."
"최용술 선생께선 합기도의 도주로 알려져 있으면서도 체계적
인 무술을 남기지 못했다는 비판이 있습니다만..."
"맞아. 그분께선 행정적인 능력 같은 것이 전혀 없는 분이셨
지. 도장에서 무술을 가르칠때도 도장 한쪽엔 커텐이 쳐져
있었어. 그리고 일반 수련생과는 달리 비싼 수강료를 지불하
는 사람들에게만 일대일로 가르치시곤 했어"
그래서 발생한 현상이 합기도의 수많은 유파며 각기 다른 형
태의 기술적 발전입니다.
"생각해봐. 선생님께선 해방이후 대구에 정착하셔서 평생을
여기서 머무신 분이야. 그런데 지한재씨나 서인혁씨가 대구
에 머물렀던 기간이 얼마인지 아나? (그들의 출신학교를 오
목조목 지적하시며) 기껏해야 고등학교시절 전후해서 삼사년
에 지나지 않아. 그들이 배웠던 수란게 이삼십수에 지나지
않았을거야. 그래서 합기도가 손목빼기, 손목꺽기등만 같고
나머진 다 다르게 변해간거야."
"그럼 이곳 대구에선 비교적 최용술선생의 무술이 원형그대
로 보전되고 있다고 볼수 있는겁니까?"
"그렇다고 봐야지. 나만해도 선생님을 모신 기간이 그들에
비하면 몇밴가? 하지만 요즘은 여기도 많이 변했어. 예전 같
지 않아."
"그당시 수련풍경 좀 말씀해 주시죠."
"선생님께선 늘 목에 수건을 걸고 제자를 가르치셨지. 그런데
그 운동이 상당히 하드트레이닝이었어. 나만해도 어깨가 두어
번 부러졌으니까.(빠졌다는 것을 잘못 말씀하신건지 내가 잘
못 들은건지 모르겠음)"
다시 말해 아이기도에서처럼 상대가 낙법을 하기쉽게 던진다
거나 하는식의 배려는 전혀없이 팍팍 꺽었다는 얘깁니다.
"무술이란 단 일수에 끝난다는 것이 그분 말씀이었어. 그래서
요즘 세상엔 그분의 운동이 잘 맞지 않아. 아무도 그런 수련
을 견뎌내지 못해."
관장님께선 이와 관련한 일화를 들려 주셨는데 미국에서 한 사
범이 최용술선생에 관해 듣고 대구까지 찾아 왔답니다. 이 미국
인 사범은 소위 스페셜 세미나를 받고 갔는데 선생께 배운대로
팍팍꺽으며 가르치다가 몇 달만에 도장문을 닫았다고 하는군요.
"저희가 늘 의문을 갖는 것은 최용술선생께선 다꾸다 소오가꾸
의 직전제자라고 말씀하시는데도 저희들이 소장한 일본 대동류
합기유술의 자료와 비교해 많은 차이를 보인다는 겁니다. 현재
그분의 무술을 원형그대로 보전하고 있다는 한풀이나 금산의
용술관에선 발차기가 존재한다는데 일본의 대동류에선 보조적인
발차기가 있을뿐 사실상 발을 거의 쓰지 않는 것 같던데... (말
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솔직히 말할게. 선생님께선 제자들이 발차기를 하면 아주
혼을 내셨어. 이놈의 자식들 어디서 개발 차냐고. 선생님께서
가르치신 무술에선 발차기래야 중단이하를 찬다기보단 지른다
는 정도였고 유일하게 이렇게 턱을 올려차는(택견의 째차기 비
슷하게)게 있을 뿐이었지. 그런데 왜 합기도에 발 茱珦?있느냐
우리가 운동을 배우던 시절엔 지금 젊은 사람들이 생각하기 힘
들 만큼 싸움을 많이 했어. 그것도 요즘 깡패들처럼 무기를 들
고 싸운다거나 하는게 아니라 일대일로 신사적으로 맞붙었지.
특히 운동을 배운 젊은이들은 다른 운동을 배운 젊은이들과
시험삼아 싸우기도 많이 했다고. 그런데 선생님께 배운 무술은
완전히 익히면 더없이 좋은 무술이지만 그저 한 일이년 해갖
곤 싸움에서 쓸수 있는게 아니야. 그래서 우리가 가장 부족한
게 무언가. 바로 발차기다 해서 제자들이 스스로 갖다 붙인거
야. 특히 김정윤선배가 발차기를 참 잘했지."
"금산의 용술관 관장님은 잘 아시는 사입니까?"
"아니, 그분은 잘몰라. 하지만 선생님께선 말년에 금산에 심사
보러 가는데 같이 안가겠냐고 여러번 말씀하셨지. 그런데 공
교롭게도 그날이 우리도장 심사와 겹쳐서 내가 수행하지는
못했지. 아마 선생님께선 고향이 그 근처라 금산에 애착을
많이 가지셨던 것 같애."
관장님 말씀대로라면 최용술선생 특유의 스페셜 세미나 탓에
사형사제간에도 서로 모르는 경우가 많은 모양입니다.
"올초 블랙벨트라는 미국 무술잡지에 최용술 선생에 관한 기사
가 실린적이 있습니다.(여담이지만 저는 이 자료를 이 주현님
에게 넘겼습니다. 홍철님이나 두분중 한분이 대신 번역해서
올려주기로 하셨는데 이 자리를 빌어 번역을 촉구합니다)
거기엔 임종배라는 분과 장진일이라는 국내에선 낯선 무술인
이 두분 등장하시더군요. 그런데 양측에선 서로가 최용술선생
의 후계자라고 주장하시는 모양인데 혹시 아시는바 있습니까?"
"두분다 잘 알지. 얼마전 미국에 세미나가서 임종배씨를 만났
는데 나이는 나보다 많지만 따져보니 후배더군. 사실 그분의
운동경력으로 보면 그럴자격은 없다고 생각해. 그리고 합기도
도주 계승문제는 나자신이 최봉열(최용술 선생의 아들)씨와
더불어서 장진일씨로 추대한 장본인이니 누구보다 잘알지. 장
진일씨는 좋은 집안 출신으로 당시 유엔빌딩내에서 합기도를
보급하고 있었거든. 그래서 그분이 이대 도주가 되면 합기도
의 보급이 훨씬 용이하리라고 생각했는데 사실 요즘 활동이
너무 미미해서 아쉬워"
그러니까 최용술도주로 부터 직접 이대 도주로 지명받은이는 지
한재씨나 명재남씨가 아닌 장진일씨라는 얘깁니다.
"최용술선생의 아드님께서도 무술을 배우셨나요?"
"그럼, 배웠지. 하지만 너무 어린나이에 하드트레이닝을 해서인
지 일찍 염증을 내고 사업을 시작했어."
"우에시바 모리헤이의 아이기도에 대해서 선생님께서 언급하시
는걸 들으신적이 있으십니까?"
"물론. 우에시바 모리헤이가 북해도를 여행하다 다꾸다 선생을
만나 배우기를 청했다고 하더군. 그때 그를 가르친 사범이 열
아홉 살의 소년 최용술이었어. 우에시바 모리헤이는 서른 두 살
인가 그랬고. 그런데 선생님이 우에시바를 하도 심하게 다루어
서 나중엔 살살좀 해달라며 고기를 사주더라는 얘기를 들었지"
"그럼 최용술선생께선 아이기도를 어떻게 평하셨나요?"
"물론 낮게 평가하셨지."
"아이기도는 흔히 검의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얘기하는데 최용
술선생의 무술에도 검의 수련이 중요한 부분을 차지했습니까?"
"아니, 선생님께선 검에 대해선 별로 일가견이 없는 분이셨어."
"예? 다꾸다선생은 검의 천재였다고 하는데 최용술선생께서 검
을 잘 못 다루셨다는 말씀입니까? 그럼 체술위주로 배웠다는
말씀인가요?"
"(뭔가 말씀하시려다 마는듯)어쨌건 확실한건 선생님은 검에 관
한한은 전문가가 아니셨지. 그저 중도를 조금 쓰시는 정도였고,
무기술은 낫같은걸 가르치기도 하셨어."
이부분이 그날의 인터뷰중 가장 인상적인 부분이었습니다. 최용
술선생이 검에는 별 재주가 없으셨다? 그러면서도 다께다 소오
가꾸의 유일한 직전제자다? 낫은 오끼나와인들이나 닌자들이 쓰
는걸로 알았는데. 하여간 궁금증을 자아내는 부분이었습니다.
제가 어중간한 시간에 찾아간 탓에 관장님께선 잠시후에 오면
거합시범연무를 보여주시겠다고 하셨습니다. 연무 감상후기는
검도, 거합란에 따로 올리기로 하겠습니다만 어쨌든 커피한잔을
마시고 다시 찾아가 연무를 보고나서 마지막 몇 말씀을 나누었
습니다.
"혹시 서울지역에서 추천해 주실만한 도장이 있다면 어디를 드
시겠습니까?"
"난 무조건 김정윤선생한테 가야한다고 생각해. 물론 그분의 무
술중 삼각권이니 하는 것은 도주선생님의 기술이 아니야. 하
지만 그분만큼 선생님의 무술에 대해 정통한 분도 없어."
끝으로 오늘의 말씀중 오프더 레코드로 하실부분이 있느냐고 여
쭙자 고개를 가로 저으시며
"난 그저 선생님에 대해 좋지않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두려울
뿐이야. 그분에 대해 해가 되는 일은 없었으면하고 바랄뿐 그
이상 아무것도 없어."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상으로 그날의 대화를 두서없이 적어보았습니다. 그분의 도장
을 나설 때 저는 조금 감상적인 기분이었습니다. 있는 것을 있는
그대로 얘기하는 것이 한국무술 풍토에선 몹시 어려운 모양인
데 더함도 덜함도 없이 말씀해 주시는 임관장님의 태도에 참으
로 고마움을 느꼈습니다. 임관장님에 대해선 검도란에 거합검연
무시범 후기를 따로 올릴 예정이니 지켜봐 주셨으면 좋겠습니다.
흔히 서울사람들만이 문화 권리를 향유한다고 하지만 합기도에
있어서 만큼은, 그리고 거합검에 있어서만큼은 그렇지도 않은 모
양입니다. 대구에 계시는 분들의 각별한 관심을 부탁 드리며 이
자리를 빌어 다시 한 번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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