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새의 하루
유기섭
모처럼 들른 밭 가운데를 헤매던 한 무리의 작은 새들이 나무 위에서 지저귄다. 눈 덮인 들판에 무리를 지어 날아다니는 작은 새들이 황량한 밭 이곳저곳을 분주히 종종걸음으로 먹이를 찾는다. 가녀린 맨발가락이 어는 줄도 모르고 땅을 파보지만 헛고생만 했다고 아우성치는 울음소리가 들판의 고요를 깬다. 눈 위에 작은 발자국을 남긴 채 불청객의 인기척에 일제히 날아올라 큰 나무 위로 몸을 피한다. 눈 쌓인 밭에서 먹이를 찾기란 호락호락한 일이 아님을 그들도 알아차렸는지 어느새 소란이 잠잠해진다.
사실 논에서는 수확할 때 낱알이 떨어져 있어 그들의 겨울 양식이 될 수 있지만 밭에서는 그것을 기대할 수 없다. 기껏해야 콩 종류가 좀 떨어져 있지만 작은 새들이 좋아하는 먹이는 되지 못한다. 몇 십 년 전만 하더라도 가을 수확기에는 동네 사람들이 품앗이로 여러 사람들이 일손을 합쳤지만 지금은 넓은 논을 한 사람이 트랙터로 벼 수확을 다 해낸다. 벼를 베고 타작하고 낟알을 마대에 담는 것까지 전 과정을 기계가 정교하게 다 함으로써 바닥에 곡식 낱알이 떨어지지 않는다. 사람의 손에서는 빈틈이 생겨서 낱알이 땅에 떨어지게 될 뿐 아니라 옛날 어른들은 바닥에 떨어진 낟알을 줍지 않았다. 일손이 모자란 탓도 있었겠지만 들짐승들의 먹이로 남겨두기도 했다. 옛사람들은 씨앗을 뿌릴 때도 삼배수로 하여 땅속짐승과 하늘의 짐승 몫으로 준비하고 나머지로 사람의 몫으로 하기위하여 여유를 두었다고 한다. 그래서 들녘의 새들은 느긋하게 먹이를 구하고 겨울나기를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떨어진 곡식 낱알이 없어 새들은 세상의 인심변화에 당황해하고 어찌할바를 몰라한다.
지난 여름 새들은 말썽꾸러기였다. 봄에는 땅을 파서 뒤지면 벌레들이 나오기 때문에 사람 뒤를 졸졸 따라다니기도 했다. 그러나 여름이 가까이 오고 씨를 뿌려 놓거나 모종을 내어놓으면 새들이 내려와서 그들을 헤집어서 엉망을 만들고 만다. 훠이훠이 소리 내어 쫓으면 전깃줄 위로 피신했다가 뒤돌아서면 이내 땅에 내려앉아서 밭을 뒤지고 다닌다. 그때는 순간적으로 그들에게 더 센 방법을 써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들을 쫓을 새총을 구입하기로 마음먹었다. 어렸을 때 동네아이들과 가지고 놀던 장난감 새총과 같은 나무로 된 Y자형 새총을 구입하여 새들이 밭에 내리기를 기다렸다. 잔뜩 기회를 엿보며 기다리다 작은 돌멩이를 장전하여 겨누는 순간 그들은 일제히 날아올라 산속으로 사라져버린다. 이게 웬일일까. 새총을 구입한 것은 그들에게 겁을 주기 위함이지 그들의 생명을 해치고자함이 아닌데도 휑하니 사라져버린다. 마치 말을 듣지 않는 말썽꾸러기의 행동 같아서 한동안 그들이 날아간 먼 하늘을 따라가 보지만 자주 겪은 일이라는 듯이 뒤를 보지도 않는다. 예전과는 많이 달라진 들판의 풍경이다. 평소 허수아비나 돌팔매에는 속지 않고 꿈적도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겁을 주기 위함이라는 주인의 마음을 꿰뚫고 있다는 듯이 비웃는다. 새들의 영악스러움에 손을 들 때가 많았는데 오늘은 아니다. 찬바람이 귓불을 스치는 휑한 눈밭을 총총걸음으로 먹이를 찾아다니는 작은 새들이 측은하게 다가온다. 당장 그들은 살을 에는 추위에 작은 몸 하나 의지할 곳이라도 마련하였을까.
시골집 초가라면 처마나 지붕 속에 보금자리를 꾸릴 수 있지만 시멘트로 된 도시의 집에는 그들이 의지할 틈을 주지 않는다. 잡목들로 무성하던 숲속도 앙상하게 속이 드러나고 삭풍이 그들을 편히 잠들게 하지 않는다. 겨울새의 낭떠러지 삶.
아주 오래전 시골집 마당에 어린아이를 앞세운 걸인 부부가 동냥을 얻으러 왔었다. 어머니는 여유롭지 않은 살림임에도 그들을 맨손으로 보내지는 않았다. 밥과 반찬이나 쌀보리 한사발이라도 보태주는 것이었다. 까맣고 찌그러진 깡통 밥그릇에 밥과 찬을 버무려서 한 끼의 식사로 때우던 모습이 떠오른다. 그들 일가족이 그때 어려운 시기를 잘 넘겼을까.
작고 연약한 몸 부지하기 위하여 나선 겨울들판의 새들. 그들이 무사히 이 겨울을 날 수 있을지. 사람 사는 세상에서도 차가운 겨울 절벽에 내몰려있는 어려운 이웃에 온정이 쏠리고 있다. 황량한 들에서 허기를 채울 수 있게 겨울새들에게도 작은 행운이 함께하였으면. 눈발이 드세어진다. 머물 집과 먹이를 구하지 못하여 애타하는 연약한 겨울새들도 따뜻한 봄을 함께 맞이하기를 기원해본다.
-월간 문학세계 게재수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