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야 되잖아요. 아이 아빠잖아요. 아이들에게 아빠를 뺏을 수 없잖아요. 그렇잖아요?
그런데 저보고 폭행한 남편을 처벌할거냐고 물으면 제가 뭐라고 대답해야 하나요?
제 의사 같은 것 묻지 말고 그 때 처벌했다면 이런 일 안 생겼을지도 모르잖아요.”
지난해 잠자는 남편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안산의 모 주부가 여성긴급전화 1366경기센터 변현주 센터장과 면담을 하면서 했던 말이라고 하네요. 결혼 후 20여년 간 상습 폭행을 해온 남편이 그날도 만취 상태로 집에 들어와 시비를 걸다가 “내일 아침에 술 깨면 가만 안 둔다”고 하면서 잠이 들었는데 주부는 정말 두려웠다고 합니다. 그래서 순간적으로 칼을 들고, 잠자는 남편을 16차례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합니다.
혹시 요즘도 가정 내에 야만적인 상습폭력이 있을까, 의문을 가지시는 분도 계시지요? 그런데 10년 전이나 지금이나 남편들의 폭력은 여전하다고 하네요. 오히려 신고사례는 늘었다고 합니다. 은폐되었던 남편폭력이 사회변화와 함께 수면위로 올라온 때문이기도 하고요.
지난해 여성가족부의 조사에 따르면 “최근 1년 동안에 남편의 폭력이 있었는가?” 하는 설문조사에서 50%의 주부들이 ‘그렇다’고 응답했다고 합니다. 정말 놀랍지 않으세요? 그처럼 평온해 보이는 가족들에게, 은폐된 채 진행되고 있는 폭력이, 2가구 중 1가구꼴로 발생한다는 사실 말입니다.
남편의 폭력은 어느 정도 사회문화적으로 용인되기도 하거니와, 남편이며, 아이 아빠라는 점 때문에 신고나 처벌을 하기가 여성입장에서는 쉽지 않아서 가정폭력을 부추긴다고 합니다. 여성긴급전화 1366경기센터의 지난 한 해 동안 가정폭력 상담건수는 2만 2천여 건으로, 한 달에 약 1800건이 접수된다고 합니다.
“폭력에 자주 노출되다 보면 주부들도 훈련이 된답니다. 대응할 수 있는 힘을 잃어가는 거지요. 하지만 조기에 잘 대처하면 재발을 막을 수 있답니다. 또 이미 누적된 경우라도 빨리 신고를 해서 사회적으로 도움을 받고 믿을 만한 사람에게 알려서 밖으로 드러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현행 가정폭력방지법은 친고죄의 성격이 강해서 피해자인 아내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처벌할 수 없는 것이 맹점이라고 하는데요. “아이에게 아빠가 있어야 하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쉽게 결정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가정폭력이 있는 경우 남편을 ‘처벌해야 한다’고 변현주 경기센터장은 말합니다. 이 벌은 전과를 남기거나 낙인을 찍는 여타 법과 달라서 폭력남편이 ‘상담명령’을 받아들일 경우 처벌을 하지 않는다고 하네요.
남편이 상담을 받게 되면, 남편들 자신도 불우한 성장기라든가, 아물지 않은 상처가 있었고, 사회생활에서의 긴장감과 부담감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적절히 ‘화’를 해소하는 법을 익히게 된다고 합니다.
알코올중독이나 심한 정신적인 문제가 있는 경우 전문상담을 통해 남편들이 건강하게 마음의 치유를 받게 된다고요. 즉 지역사회와 연계해서 알코올중독이나 도박, 의처증 등등의 심리적 문제를 치유하는 프로그램이 마련되어 있다고요. 그래서 남편이 건강한 모습을 회복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 가정 경제적으로 어려움이 있는 경우 경기도의 경우 무한돌봄서비스와 연계해서 경제적인 도움도 주고 있으니, 쉬쉬 하지 말고 적극적으로 여성긴급전화 1366을 이용하라고 주문하시네요.
여성가족부는 최근 1366 여성긴급전화를 경기북부 지역에도 새로 개소했다고 합니다. 현재 여성긴급전화 1366은 전국 광역시·도에 17개가 운영되고 있는데 24시간 이용할 수 있다고 합니다. 신고를 하면 112지구대와 연계해서 남편으로부터 아내를 떼어내 긴급히 피할 수 있는 피난처를 제공합니다. 또 피해 여성이 원할 경우 6개월에서 1년 정도 아이들을 데리고 생활할 수 있는 보호시설(쉼터)을 각 지역마다 모처에서 운영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가봤는데 남편들이 추적을 해서 아내를 찾아내 살해한 사건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가 있어서, 비밀리에 운영되기 때문에 사진촬영이나 위치 안내 등이 안 된다고 하네요.
이 쉼터에 오면 의식주 모든 것이 제공될 뿐 아니라, 피해여성과 아이의 치료프로그램도 있고요. 직업훈련 교육도 하고 자유롭게 사회활동이나 일상생활을 할 수 있다고 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여성들이 심각한 폭력을 당하고도 며칠 후엔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작정 집으로 돌아가기보다, 몸과 마음을 추스르고, 남편이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응력을 키우기를 주문하시네요. 또 집으로 돌아갈 경우에도 지역상담소로 연결해 주어서 지속적인 도움을 받을 수 있다고 합니다.
가정폭력방지법은 ‘처벌법’이라기보다 ‘패자부활전’같은 법이기에 건강한 가정을 만들려면, 폭력이 발생한 초기에 신고를 하고 남편이 전문가상담과 부부상담 등으로 변화되도록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합니다.
남편을 살해한 안산 모 주부의 경우, 상습적인 폭행을 목격한 이웃이 3~4차례나 신고를 했음에도 주부가 ‘아이 아빠며 가정을 지키고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지구대경찰을 돌려보냈다고 하네요. 그 주부는 당시에 자신의 의사를 묻지 말고 남편을 경찰이 데려갔으면, 남편을 죽이는 사태를 맞지 않았을 거라고 통곡했다고 합니다.
폭력을 참고 지내던 부인이 거꾸로 남편을 살해하는 사건은 종종 언론에 보도된 적이 있었지요. 지난해 12월에도 인천에 사는 모 주부가 집에서 잠자는 남편(42)을 흉기로 찔러 숨지게 했다는 뉴스가 보도되기도 했는데요. 이 사건 역시 10여년 남편의 잦은 폭행을 견디다 못한 주부가 결국 범행을 저지른 것이지요.
그래서 여성긴급전화 1366에서는 피해주부들에게 부탁하시네요.
폭력이 발생하면 초기에 신고해서 도움을 받으면 ‘폭력의 악순환’ 고리를 끊을 수 있고 건강한 가정으로 거듭나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요. 가정폭력 문제가 해결되면 사회전반적인 문제가 해결된다고요. 예컨대 아동성폭력, 학교폭력, 노인학대 등이 모두 큰 맥락에서는 가정폭력에서 출발한다고 합니다.
매 맞는 엄마를 보고 자란 자녀들이 분노조절이 안 돼 학교폭력을 저지르고, 거꾸로 이젠 그 자녀가 늙은 부모를 폭행하고 학대하기도 한다고요. 그래서 가정폭력을 잡아내어 가정이 건강해지면 여타 부분의 문제가 많이 해결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한 주부는 상담소에 이렇게 하소연했다고 합니다.
“우리 가정에 약간의 폭력이 있었어요. 남편 처벌을 원하는 것은 아니고요. 아이들과 제가 늘 불안에 떨어요. 폭력을 행사한 후 얼마간은 잘해주다가, 하루 이틀 지나면 점점 잔소리가가 심해지고, 아이들에게 화를 내고, 집안 청소상태를 트집 잡다가 어느 순간 폭발하면 너무 무서워요. 폭행은 예사고 집안에 시너를 뿌리고 불 지른다고 협박하고... 다음 날은 멀쩡하게 다시 회사에 출근합니다. 그리고 잠시 동안 다시 가족들에게 잘해줍니다. 불안해서 살 수가 없어요.”
변 센터장은 폭력은 나 혼자의 문제가 아니라며 ‘내가 참고 말지’ 하는 순간 내가 멍들고, 내 아이들이 골병들고, 문제아가 될 수 있다며 신속한 초기개입이 이루어지도록 1336 전화를 이용하라고 당부하시네요.
폭력을 휘두른 후에는 잘못했다고 싹싹 빌고 잘해주니까, 한번 또 한번 속아주다 보면 어느 날 심각한 상황이 올 수 있다고 합니다. 앞서 말씀드렸듯이 폭력남편을 교정하는 프로그램이 잘 돼 있어서 남편이 감옥 가지 않고, 자신을 돌아보고 회복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합니다. 다시 말해 남편이 전과자 되는 것이 아니라는군요. 그리고 자녀를 키울 때도 자녀에게 잘난 남자 만나 팔자 편하게 살 것을 주문할 것이 아니고 독립적인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격려하라고 강조하시네요.
“가정폭력으로 매년 약 70~100여명의 여성이 죽어갑니다. 또 맞다가 오히려 남편을 죽이기도 하지요.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요? 요즘은 사회시스템이 좋아져서 상담전화하시면 적절한 도움을 받을 수 있답니다.”
변센터장은 가정폭력은 남편도 피해자라고 강조합니다. 폭력은 유전처럼 세대 간에 전이되는 것이라고요. 이 악순환을 끊기 위해서는 ‘결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