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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천정
울주군 두동면 봉계에서 언양 쪽으로 막 벗어나면 두서면 활천리로 들어가는 다리를 지나 200미터 쯤에 두북초등학교가 있다.
학교 뒤편 나저막한 산 아래, 아늑하고 양지바른 남향으로 아담하고 고풍스런 한옥 3칸의 정자가 활천정이다.
활천정(活川亭)은 울주군 두서면 활천내와로 34-7[활천리 339]에 위치한다.
정자 앞으로는 복안천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 또한 조선 선비의 고고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정자는 선비의 처소답게 아담하고 정갈하면 고졸한 품격이 어우러져 울산에서 보기 드물게 옛 정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 배산임수형 정자이다.
형태는 정면 3칸, 측면 2칸[1.5칸] 규모의 팔작 홑처마 지붕 건물이다. 다만 부연이 없는데도 알추녀 형태를 가진 이중 구조의 추녀를 가지고 있으며, 추녀 끝에는 모두 귀면와가 있다. 중앙에는 대청이 있고, 좌우에 방이 있으며 방 뒷면 좌우에는 반침(半寢)[큰 방에 딸린 조그만 방을 달았다. 기둥은 앞 열만 원주를 사용하였고 초익공이다. 정자에 오르기 위해서는 서쪽 쪽마루를 이용하는 특이한 구조를 갖추었다. 기단은 외벌대이고, 초석은 자연석을 사용하였고, 흙과 돌을 섞어 담을 만들고 기와를 얹었다. 모든 부재에 오일스테인을 바른 흔적이 보이고 창방, 도리의 뺄목과 서까래 마구리에는 부재 보호를 위해 흰색 칠을 하였다.
이 정자는 매헌공 겸익(謙益)의 9세손 규현(奎現1855-1934)공을 위한 정자다. 동쪽 방은 역열재(亦悅齋)-학이시습불역열호(學以時習不亦悅乎)-서쪽 방은 이회암(以會庵)-이문회우(以文會友)라 하여 공부하는 방,친구와 담소하는 방으로, 이름을 구별하여 놓았다.
공은 농소 천곡에서 출생하여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자식의 공부를 위하여 부모가 경주 내남 현동으로 이사하였다. 이조의 최성암(崔惺巖)에게 사사 학문을 익혔고, 중년에는 두서면 복안으로 이사하여 후학을 가르치심에 전력하여 제자가 162명이나 되었으며, 제자들이 짓기 시작한 활천정의 완공을 보지 못하고 80세의 일기로 졸(卒)하였다.
후일 제자들이 이회계를 조직하여 매년 음력 3월 5일 모여 스승을 기리며, 정을 나누고 시를 읊고 글을 짓는 문우(文友)가 되었다.
공은 울산울주 향토사 (1978년 울산문화원 간) 인물편에 공의 자(字)는 학여(學汝)이고 호는 소헌(小軒)이며 겸익의 후손으로 성격이 소박 후덕하고 면학하여 백발이 되도록 학문에 정진하여 높은 석학(碩學)이 되어 그의 문인들이 스승을 위하여 활천정을 세우고 여생을 즐기게 하였으며 문집 3권을 저술하였다.
특히 예절에 조예가 깊어 경주, 울산 지역의 예에 관하여 찬반 의견이 있을 경우 공께서 시비(是非)를 가렸다는 글이 문집에 기록되어 있다.
유림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옥산서원(玉山書院) 원장(院長)을 비롯하여 경주지방의 여러 원장(院長), 단장(壇長) 소임 맡고 오문(門)의 문사(門事)에도 관여하여 석계단장(石溪壇長), 고산재장(高山齋長)을 역임하였다. 활천정은 1933년(癸酉)에 짓기 시작하여 이듬해인 1934년(甲戌) 8월에 낙성하였다. 지금까지 두 차례 중수를 하였고, 정자에 창건기와 중수기(重修記) 2편이 있다.
창건기는 최현필(崔鉉弼)이 지었고, 1976년(丙辰) 중수기는 유석우(柳奭佑)가 찬(撰)하였으며, 2006년에 중수하고 후손 동필의 글이 편액(扁額)되어 있다.
-. 활천정 중수
活川亭 重修記 終
水自咽薄 逶迤而北來國東都 四十里而爲活川沿流而村亦曰 活川自蠻倭竊柄折屬于蔚州之斗西面 臨流而 亭亦扁以 活川蓋有取於紫陽夫子一鑑有源之義乃故處士小軒李公 晩年蒐裘之 營其園林 雲物之勝 有公之友故脩軒崔公所記 尙揭于楣 夫公生丁前韓之末種學績文而値世板蕩奄見搰夏無以施諸攸爲遯世旡憫於是焉誦先王之法言遵先民之懿訓以詔後進焉 公旣歿無復下惟者亭亦爲風雨所漂搖久而將圯曾孫東苾 病之圖所以堂構之道其姑夫崔君在林聞而樂爲之相其役旣落復爲之請記其顚末于不佞不佞記昔嘗侍隅於先王考或先外王考庭下得竊瞯公儀度於座上者有幾次時甚稚少若夢中記夢不能細得 領會而今所依俙者其雅飭之容儀規矩之律度復其所說多應 是心性之微奧今古之序列居然爲六七十星霜人事異昔感慨隨之 遂樂其能繼述不自揆其淺劣敢書之如右云
大韓復國之 三十二年 丙辰 陽月 日
豊山 柳 奭 佑 記
활천정 중수기 번역
물이 열박재로부터 굽이굽이 북쪽으로 가다가 나라의 동도(東都, 경주)에서 40리에 이르러 활천(活川)이 되는데, 시내를 따라 있는 마을 또 ‘활천’이라고 부른다. 오랑캐 왜놈이 권력을 빼앗으면서 울주군 두서면에 잘라서 속하도록 하였다.
시냇물에 닿은 곳에 정자를 세우고, 또 활천이라고 편액을 달았으니, 무릇 자양(紫陽) 선생께서 한번 살피시고 연원이 있다고 한 데서 뜻을 취한 것으로서, 곧 돌아가신 처사(處士) 소헌(小軒) 이공(李公)이 늘그막에 모아서 덮은 것이다. 그 원림(園林)과 경물(景物)의 빼어남에 대한 것으로는 공(公)의 벗 수헌(修軒) 최공(崔公, 崔鉉弼을 가리킴)이 지어서 일찍이 문설주에 걸어 놓은 기문(記文)이 있다.
무른 공은 태어나서 옛 한말(韓末)을 맞이하였는데, 학문을 하고 글을 쌓다가 어지러운 세상을 맞게 되자 문득 나라를 위해 힘써도 펼친 만한 것이 없음을 보고, 세상에서 벗어나서 걱정이 없고자 하였다. 이에 선왕의 바른 말씀을 외우고, 선민(先民)의 아름다운 교훈을 좇아서 후진을 가르치고자 하였다.
공이 돌아가시고 나서 휘장을 내릴 이가 없어지게 되니, 정자 또한 비바람에 흔들리게 되고 오래 되어서 장차 무너질 지경이 되었다. 그의 증손(曾孫) 동필(東苾)이 그것을 걱정하고 집을 얽을 방도를 모색하니, 그 고모부 최재림(崔在林) 군이 듣고 좋게 여겼다. 그래서 그를 위하여 공역을 서로 도와서 완성하고 나서, 다시 그를 위하여 나에게 전말(顚末)을 기록해 달라고 청하였다. 내가 기억하기로 옛날에 돌아가신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를 댁의 한 모퉁이에 앉아서 모시면서 좌상에 앉으신 분들 중에서 공의 거동과 풍도(風度)를 몰래 엿볼 수 있었던 것이 몇 차례였다. 그때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마치 꿈속과 같다. 꿈을 기억해 보건대 자세하게 깨닫고 이해할 수 없어서 이제 흐릿하기만 하다. 그 단아하고 조심스러운 모습과 거동, 법도 있는 태도는 다시 그 전해지는 말에 부합됨이 많으니, 이것은 심성의 미묘함이요 고금의 서열인 것이다. 어느덧 6,70년이 되었으니 사람의 일은 옛날과 다르고 감개가 그것을 따르게 된다. 마침내 그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감을 즐거워하여, 스스로 천박하고 열등함을 헤아리지 않고 감히 이상과 같은 글을 쓰게 되었다.
대한민국의 국권을 회복한 지 32년(1976년) 병진년(丙辰年) 시월(十月) 일 풍산(豊山) 유석우(柳奭佑)가 기록하다
活川亭 重修紀
伏 惟
公의 諱는 奎現 字는 學汝 號는 소헌(小軒)이다.
어려웠던 朝鮮末蔚山泉谷에서
呱呱聲을 올리셨네.
志學에 李奎龍에게 勉學하시고
弱冠에 慶州 旺洞으로 移徙하여
惺巖에게 私師하시니
學問의 境地가 深海같도다.
中年에 斗西面 伏安으로 移住하시어 後學
가르침에 專念하셨네
平生을 讀書精進과 筆墨을 벗하시고
禮儀 凡節과 孝行 삶의 德目삼아
궁행(躬行)하시니
家門과 고유의 밝은 등이 되셨고,
고매(高邁)하신 人品과 깊으신 학문의 結實을
文集 三卷에 담았으니
後孫의 自負心이요 家門의 榮光이도다.
晚年에 活川亭 지어
一生 業積 더욱 빛나다.
癸酉年에 準備하여 甲戌年 仲秋에 完工하나 그 莊嚴한 모습 보시고 八旬의 甲戌 元月에 仙하시니 哀悼하는 弟子 知人 人山人海 이루었고, 後日에 弟子들은 以食契를 만들어서 推仰하고 追慕하는 儒生들이 年年이 모여들어 시를 읆고 글 지으며 文友가 되었도다.
為先의 精誠으로 偉業을 길이 保存하고자 금年에 管理舍와 亭子를 重修함에 後便 기와 反瓦하고 마당에 자갈 깔고 정자기둥 대들보 마장의 쌓인 때 벗겨내어 번듯하게 重修하니 尊靈께서 洋洋 歌格하옵소서
二千五年 乙酉 桂月 日 曾孫 東苾삼가 쓰다
活川亭記
東都之南四十里 有村曰箭川 或曰活川 若永州之冉溪愚溪之類 是也 邱園窃廓 樹林蒙密 正合碩人藏修之所 而天慳地秘 迄未有人地相淂之日
友人小軒李奎現學汝甫 觀地于川上 構一小亭 因以活川 名其扁 役旣訖 子若弟請以記實 翁曰 是亭也 吾雖自愛 有難自記 又不欲乞文於鉅筆以自夸 耀知吾心者 崔正字也 必無溢辭你們 其啚之未及聞知於余 而不幸嗣胤辭庭 翁亦宿疴添燉 竟至不起
旣葬 其弟奎元 走人於不佞 道當日治命 屬以一言志之 噫嘻悲哉 余何忍辭 念翁年長我五指 而少小相許六十載 而至今日矣 見其平日猷 爲口無捧言 步不踰矩 工策以治家 六行以撿身 交華固餘事 爾亦嘗從事公車 而竽瑟殊好 烟霞成痼 讀書朮志 衡泌自樂 朝暮問業者 多逡巡雅飭之士 斯亭之起 實爲後生肄業之訪 而兼以爲登眺暢舒之意也
嗚乎 亭己成而人怱 故撫念平昔 益不禁松塵樑月之感 且其子姓不熾 嗣孫旺洛 過房而持衰 自後繼述之責 皆旺洛事也 果能維持而鞏固 有書則講誦焉 有事則會集焉 有毁則修葺焉 毋負乃祖建築之意 用副知舊期待之望 則源頭活水 混混不舍 是乃顧名思義之道也 旺洛 其勉之 亭之址 今爲沿革所拘 分屬于蔚州斗西面云
歲 閼逢閹茂 暮春下浣 地上故人 通仕郞承文院副正字 月城 崔鉉弼
활천정기 번역
동도(東都, 경주)의 남쪽 40리에 마을이 있으니 ‘활천(箭川, 활 내)’ 혹은 ‘활천(活川, 살아 있는 내)’이라고 부르니, 마치 영주(永州)의 ‘염계(冉溪)’를 ‘우계(愚溪)’라고 부른 것과 같다. 언덕과 동산은 그윽하고 넓으며 나무숲은 우거져서 빽빽하다. 참으로 큰 인물이 글을 읽으며 공부하는데 알맞지만,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서 거의 사람이 들어와서 서로 마주치게 된 날이 없었다.
벗 소헌(小軒) 이규현(李奎現, 字는 學汝)이 시냇가에서 지세를 살피고 작은 정자 하나를 지어서 ‘활천정(活川亭)’이라고 그 편액(扁額)에 이름을 붙였다. 공역(工役)을 다 마치고 나서 아들과 동생이 그에게 사실을 기록하기를 청하였더니 노인은, “이 정자는 내가 비록 아끼지만 스스로 기록하기에는 어려움이 있고, 또 큰 문필가에서 글을 빌어서 스스로 자랑하고 싶지도 않다. 내 마음을 밝게 아는 사람은 최정자(崔正字)이니, 반드시 말에 지나침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 의도가 나에게 알려지기도 전에 불행히 그 맏아들이 부모 곁을 떠났고 노인도 오래 앓던 병이 점점 깊어져서 마침내 일어나지 못한 지경에 이르렀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 그 아우 규원(奎元)이 나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 날의 유언을 전하는데, 한 마디 말로 그것을 기록해 달라는 것이었다. 아! 슬프다. 내 어찌 차마 사양할 수 있으랴? 생각건대 노인은 나보다 다섯 살이 많지만 어린 시절부터 서로 허통(許通)한 지가 60년이 되어 지금까지 이르렀다. 그 평소의 계책을 보면, 구복(口腹)을 위하여 말을 받들어 높이지 않았으나 행보(行步)는 법도를 넘지 않았고, 공교(工巧)한 계책으로 집안을 다스렸으나 육행(六行)으로써 자신을 단속하였으니, 사귐과 화려함은 실로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은 일이었다.
그대 또한 일찍이 공거(公車)에 종사하였으나 피리와 거문고를 매우 좋아하고, 안개와 놀을 고질병처럼 사랑하여, 독서하고 뜻을 밝히며 은거하는 곳에서 스스로 즐겼으니, 아침저녁으로 일을 물었던 자들 중에는 멈칫멈칫 하지만 단아하고 조심스러운 사람이 많았다. 이 정자를 지은 것은 실로 후생(後生)이 일을 익히도록 하기 위함이고, 아울러 올라와서 조감하면서 마음을 탁 트이게 하고자 함에 있다.
아! 정자는 완성되었으나 사람은 바쁘게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날을 생각하노라니 더욱 소나무 아래의 티끌이 되고 들보 위에 걸린 달이 된 감회를 금할 수 없다. 또 그 손자들이 흥성하지 못하여, 사손(嗣孫)인 왕락(旺洛)을 양자로 삼아 온갖 행실에 근신하였으니, 이로부터 선조의 뜻과 사업을 이어가는 책무는 모두 왕락의 일이 되었다. 과연 잘 유지하고 견고히 할 수 있을 것이니, 글이 있으면 두루 외우면 되고 일이 있으면 모이면 되고 훼손되면 수리하면 될 것이다. 네 할아버지가 건축한 뜻을 저버리지 맒으로써 오랜 친구가 기대했던 바람에 부응하게 될 것이니, 이것은 샘에서 살아있는 물이 끊임없이 솟아 나오는 격이다. 이것이 곧 (활천이라는) 이름을 돌아보며 그 뜻을 생각하는 길이다. 왕락은 그렇게 힘써야 하리라. 정자 가의 터는 지금 연혁에 얽매여서 울주(蔚州)의 두서면에 나누어 속하게 되었다고 한다.
갑술년(甲戌年, 1934년) 3월 하순
지상(地上)의 친구 통사랑(通仕郞) 승문원부정자(承文院副正字)
월성(月城) 최현필(崔鉉弼) 씀
-. 소헌 이규현 소개
농소면 천곡서 1855년 태어나 경주 성암 최세학의 개인교습 받고 벼슬 대신 두서면 복안리로 돌아와 서당 열고 제자들 150여명 길러내고밭 소작줘서 추수 때 소출 나눠주고 가난한 선비에게도 베푸는 등 덕행을 배풀었으며, ‘소헌 유집’ 통해 조선 풍습을 기록하고, 활천정은 1933년 착공하였으며 소헌공은 완공 보지 못하고 타계했으나 이듬해 제자들이 매년 모여 발자취 기리고 있다.
조선시대 울산은 학성이씨를 비롯한 울산박씨, 달성서씨 등 수많은 향족이 정자를 건립해 풍류를 즐겼고 조상 숭배를 위해 재실을 지었다. 또 후학양성을 위해 서당을 세우면서 학문을 중시하는 유교 문화의 전통을 잇기 위해 노력했다.
울산 고을에는 두동·두서만 해도 학성이씨 활천정, 김해김씨 모오정, 경주김씨 감은정, 나주정씨 우모정 등 각종 정자가 많다. 이 중에서도 가장 아담하고 고졸한 미를 갖추고 있는 정자가 활천정(活川亭)이다. 활천정은 소헌(小軒) 이규현(李奎現) 제자들이 스승을 추모하기 위해 건립했다. 조선 조 말에 태어났던 소헌은 배우고 익히기를 즐겼고 가르침에 열성을 다했다. 또 평생을 안분지족하면서 살았다.
활천정은 일반 정자처럼 산세가 빼어난 곳에 건립된 것도 아니고 좋은 목재로 화려하게 짓지도 않았다. 대신 이 건물은 아담하면서도 주위 풍광과 어울려 평생 근면·겸손한 자세로 후학 양성에 힘썼던 수헌의 심성을 잘 보여준다. 이 건물의 특징은 이수원 울주문화원 부원장이 집필한 <학성세고>에 잘 나타나 있다.
“정자는 두서면 활천리 339번지에 있다. 정자 앞으로는 복안천이 흐르고 뒤로는 야트막한 산이 병풍처럼 둘러싸고 있어 주변 경치가 아름답고 정자 또한 조선 선비의 고고함을 느끼게 한다. 특히 이 정자는 선비의 처소답게 아담하고 정갈하면 고졸한 품격이 어우러져 울산에서 보기 드물게 옛 정자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다.”
소헌은 학성이씨 시조 이예(李藝)의 14세로 울주군 농소면 천곡리에서 1855년 출생했다. 소헌의 부친 헌찬(憲燦)은 소헌이 어릴 때 글을 익힐 수 있도록 경주에 있던 성암(惺巖) 최세학(崔世鶴)에게 데리고 갔다.
자식에 대한 헌찬의 공부 열망이 얼마나 컸나 하는 것은 소헌에게 특별히 개인교습을 해 주도록 성암에게 부탁한 것에서 알 수 있다.
헌찬은 아들 셋을 두었는데 이중 장남인 소헌은 공부를 열심히 해 유학자가 되기를 원했다. 다행히 소헌은 이런 부친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열심히 공부해 경주와 울산 일원에서 명성을 얻었다.
소헌이 성암 아래서 높은 학문을 쌓자 부친은 소헌이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오를 것을 원했지만 소헌은 이를 거절하고 대신 두서면 복안리로 돌아와 후학 양성에 몰두했다. 소헌의 명성이 얼마나 높았던지 소헌이 후학 양성을 위해 서당을 연다는 소문이 나자 울산과 경주에서 150여 명이나 되는 학동이 모여들었다.
소헌은 학문이 뛰어났고 이 학문을 바탕으로 제자들을 잘 가르쳤지만, 노후는 편치 못했던 것 같다. 그의 말년은 최현필(崔鉉弼)이 쓴 ‘활천정기’에 잘 나타나 있다.
“소헌은 불행히도 그 맏아들이 부모 곁을 떠났고 그도 오래 앓던 병이 점점 깊어져 마침내 일어나지 못할 지경에 이르렀다. 장사를 지내고 나서 그의 아우 규원(奎元)이 나에게 사람을 보내어 그날의 유언을 전하는데 한마디 말로 그것을 기록해 달라는 것이었다.”
여기서 유언은 소헌이 타계할 무렵 활천정 편액을 최현필에게 부탁한 것이었다. 애초 소헌 주위 사람들은 활천정 편액을 명성이 뛰어난 문필가에게 부탁할 계획으로 누구에게 부탁할지를 소헌에게 물었다.
그러나 소헌은 자신의 삶을 가장 잘 아는 인물이 최옹이라면서 그에게 부탁할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최옹은 수운 최재우 집안으로 대과에 합격해 벼슬을 했다. 정자가 건립되기 전 눈을 감은 소헌을 아쉬워하는 최옹의 글은 계속된다.
“아! 정자는 완성되었으나 사람은 바쁘게 떠나고 말았다. 그래서 지난날을 생각하노라니 더욱 소나무 아래의 티끌이 되고 들보위에 걸린 달이 된 감회를 금할 수 없다. 또 그 손자들이 흥성하지 못해 사손인 왕락을 양자로 삼아 온갖 행실에 근신했으니 이로부터 선조의 뜻을 이어가는 책무는 모두 왕락의 일이 되었다.” 당시만 해도 자식으로 선비가 해야 할 가장 큰 책무가 대를 이어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외동아들이 먼저 타계해 대를 이어갈 후손이 없어졌을 때 소헌이 느꼈을 절망감은 말을 하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다. 소헌은 이런 불행 속에서도 절망하지 않고 안빈낙도를 실천하면서 살다가 눈을 감았다. ‘사물을 접할 때 욕심을 내지 않아야 한다’는 뜻을 담고 있는 그의 호 소헌이 이런 그의 삶을 보여준다. 그가 후학을 위해 복안에 지은 재실 역시 ‘안안재(安安齋)’로 이와 비슷한 의미를 담고 있다. ‘안안’은 ‘빈궁하고 현달(顯達) 하는 것이 모두 운명이고 세상에 나가 벼슬을 하느냐 초야에 묻혀 사느냐 하는 것도 때가 있다. 세상에 나가야 할 때 억지로 묻혀 살면 분수에 편안치 못하고 이미 빈궁한 운명을 타고났는데도 억지로 현달을 찾는 것은 분수에 편안한 바가 아니다’는 뜻을 담고 있다.
소헌은 제자들에게 세상에 나가서는 욕심을 버리고 안분지족하면서 살아야 한다는 것을 늘 강조하면서 가르쳤다. 이처럼 높은 학문과 덕행을 실천했던 소헌 집에는 선비 방문이 끊이지 않았지만, 그는 빈객을 소홀히 대접해 보내지 않았다.
학문에만 전념했던 그에게 재산이라고는 몇 마지기 밭뿐이었지만 이 밭도 소작을 주어 추수 때면 소작인의 뜻에 따라 소출을 나누었다고 한다. 이마저 문중에 가난한 선비가 있으면 이 소출을 나누어 가졌다고 한다. 활천정은 그가 돌아가기 한해 전인 1933년 건립에 착수해 이듬해인 1934년 8월에 완공했다. 정자 3칸 중 가운데는 마루이고 동쪽 방은 역열재(亦悅齋), 서쪽 방은 이회암(以會菴)이라는 현판을 걸었다.
‘역열재’는 <논어> ‘학이편’에 나오는 ‘學而時習之 不亦說乎(배우고 때때로 그것을 익히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에서 따온 글로 공부방이다. 서편 ‘이회암’은 ‘以文會友’에서 가져온 글로 친구와 담소하는 방을 말한다. 소헌은 불행히도 이 정자가 완공되는 것을 못 보고 타계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회계를 만들어 매년 음력 3월5일 정자에 모여 스승을 추모하는 행사를 가졌다. 제자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자 인근 논밭을 구입해 이 논밭에서 나오는 소출로 행사 비용을 마련하고 정자를 보수·관리하는 비용도 이 돈에서 염출했다.
세월은 흘렀지만, 이 논밭은 아직 남아 있어 지금도 재실 옆에는 이 논밭을 소작하면서 정자를 관리·보수하는 관리인이 살고 있다. 정자를 방문하면 먼저 반가이 맞아주는 사람이 이 관리인이다.
소헌은 생전에 <소헌 유집>(小軒 遺集) 3권을 남겼다. 필사본을 책으로 묶은 이 문집 속에는 시와 행장 그리고 묘갈명 등 당시 조선 사회의 풍습을 글로 잘 기술해 놓아 사료적 가치가 높다. 이 유집은 현재 소헌의 증손 동필(東苾)이 소장하고 있다.
울산 향교 제25대 전교를 지냈던 동필은 전교 재임 동안 유생을 상대로 유학을 지속적으로 가르쳐 사라져가는 유교 학풍을 울산에서 다시 일으켰다는 평가를 받는다. 아울러 스스로 전교를 단임으로 물러나 이후 전교들이 모두 단임만 하는 전통을 확립했다.
활천정기(活川亭記) 옆에는 활천정중수기((活川亭重修記)도 있다. 이 글은 풍산 유석우(柳奭佑)가 1987년 쓴 글이다. 유씨는 당대 명필로 노무현 대통령 때 보사부 장관을 지냈던 유시민의 큰아버지다. 이 현판 옆에는 증손 동필이 쓴 중수기도 볼 수 있다.
‘公(공)의 諱(휘)는 奎現 字는 學汝, 號는 小軒이시다
어려웠던 朝鮮 末 蔚山 泉谷에서 呱呱聲(고고성)을 울리셨네
志學(지학)에 奎龍(규룡)에게 勉學(면학)하시고
弱冠(약관)에 慶州 玄洞으로 移徙하여 惺巖에게 私師하시니
學問(학문)의 境地(경지)가 深海(심해) 같도다
中年(중년)에 斗西面 伏安(두서면 복안)으로 移住(이주)하시어
後學(후학) 가르침에 專念(전념)하셨네.
平生(평생)을 讀書精進(독서정진)과 筆墨(필묵)을 벗하시고
禮儀凡節과 孝行을 삶의 德目삼아 實踐躬行(실천궁행)하시니
家門과 고을의 밝은 등불이 되셨고
高邁(고매)하신 人品(인품)과 깊으신 學問境地(학문경지)는
文集 三卷(문집 삼권)에 담았으니
後孫(후손)의 自尊心(자존심)이요 家門(가문)의 榮光(영광)이도다.
晩年(만년)에 活川亭(활천정)지어 一生 業績 더욱 빛나도다
癸酉年(계유년)에 준비하여 甲戌年 仲秋에 完工하나
그 莊嚴(장엄)한 모습 못 보시고
八旬(팔순)의 甲戌 元月(갑술 원월)에 仙(선)하시니
哀悼(애도)하는 弟子 知人 人山人海 이루었고
後日(후일)에 弟子(제자)들은 以會契(이회계) 만들어서
推仰(추앙)하고 追慕(추모)하는 儒生(유생)들이 年年(연연)히 모여들어
詩(시)를 읊고 글 지으며 文友(문우)가 되었도다.
참고: 울주원사정재-두동·두서면편(울주문화원 부설 울주향토사연구소,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