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 Thief's Diary2 : 양치기소년-
32.귀신의 집
암울한 하늘, 어두운 땅, 자신을 노려보는 강렬한 시선, 거대한 날개, 지도자의 심판으로 내리쳐지는 자신의 뿔. 그리고 추방, 추방, 추방……!
“헉……!”
묘한 달빛만이 내리는 숲 속, 반딧불이 소곤거리고 풀벌레가 우는 이 시간에 누군가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리네였다. 악몽이라도 꾼 듯 주변을 정신없이 둘러보던 그는 악몽의 그들이 더 이상 자신의 주위에 없다는 것을 깨닫고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꿈이었구나. 다행이다.
‘……징역형 이후 68번째…….’
이제는 숫자마저 세기 시작한 악몽의 횟수. 시리네는 어디까지나 꿈이라고 생각하면서도 그 때의 기억이 떠올라 몸서리치는 자신을 발견했다. 죽음이었을까, 아니. 고향 땅에 묻힐 수 있는 시체라면 차라리 좋을 것이다. 죽지 못하고 인간계를 떠도는 유령과 같은 삶. 언제쯤…….
‘이 징역형이 끝나는 걸까?’
그는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다시 누웠다.
이튿날 아침 자리서 일어난 일행은 매번 그랬듯 아침식사를 끝낸 뒤 다시금 여행을 시작했다. 이라를 향한 여행, 그러나 한편으로 그들을 위한 여행은 점심때가 지나고 저녁 직전쯤 되어서야 어느 마을에 도착함으로써 하루의 끝을 맺었다. 물론 모든 여행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내일 있을 또 다른 하루를 위해 재충전의 의식을 갖는 것일 뿐이다.
마을은 생각만큼 크진 않았지만 그렇다고 작은 것도 아니었다. 깔끔한 보도블록이 깔린 마을에는 있을 만한 시설은 전부 구비되어 있었고, 사람들도 이 곳 저곳 바삐 움직이는 것이 생긴 지는 그리 오래 되어 보이지 않는 계획도시인 듯 했다.
일행은 여느 때나 그랬듯 여관을 찾고 길드를 찾았다. 이젠 관록이 붙어 여관 보는 눈도 생겨난 그들은 싸고 좋은 여관이 짐을 풀고 근처가 아닌 뒷골목에서 길드의 위치를 물었다.
그런 그들이 길드에 들어섰을 때였다.
“아저씨~. 제발요. 네?”
“안된다니까! 이런 돈도 안 되는 걸 누가 하겠어. 앙?”
의뢰 접수 창구서 들려오는 앙칼진 목소리에 일행은 고개를 돌렸다. 소녀 하나와 창구직원 남자 하나가 뭔가를 사이에 두고 요란하게 다투고 있었다. 의문이 든 일행은 그들에게 좀 더 가까이 다가갔다. 소녀의 손에 들린 것은 1세르씩 저축해 온 저금통이었고, 남자는 그 저금통을 내밀며 의뢰를 맡기려는 소녀에게 안 된다고 소리 지르고 있었다. 의문이 든 그들은 두 사람에게 다가가 말을 건넸다.
“저기, 무슨 일이에요?” “글쎄 이 애가…….자네들은 누군가?”
막 흥분된 목소리로 말을 이으려던 길드원이 고개를 돌려 일행을 바라보았다. 일행은 잠시 벌줌 서 있다가 자신들을 ‘셰퍼드’라는 도둑들이라고 소개하곤 그의 말을 물었다.
“아, 이 꼬마가 말이야, 얼마 되지 않는 돈 가지고 저 폐 요새에 들러 달라고 하는 게 아니겠어? 거기는 일반 유령부터 시작해서 가지각색의 녀석들이 쫙 깔려 있다고. 심지어 리치까지 있다는 소문이 돌던데 말이야.”
“하지만 거기엔 귀중한 게 있단 말에요!”
“그 귀중한 게 뭔데? 금덩이? 보물 상자?” “이, 인형……이요.” “것 봐. 그런 걸 해 줄 사람이 있겠냐? 어딜 가도 없을걸.”
소녀는 계속된 그의 질타에 거의 울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길드원은 그 의뢰를 받을 생각이 별로 없는 듯 했다.
그러던 그녀가 안타까워 보였던 것일까.
“그럼 저희가 할까요?” “응? 뭐?”
“저희가 할게요, 그 일.”시리네가 나서자 일행은 무슨 소리냐며 그를 쏘아보았다. 그러나 그는 뻔뻔함이 가득 묻어나오는 얼굴로 마냥 길드원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저희가 하면 그 아이한테도 좋고 당신에게도 좋지 않나요?”
“뭐, 그건 그렇지만…….” “그럼 얘기가 끝난 거네요. 저희가 합니다.” “야, 시리네, 우린…….”
“뭐 어때. 우리가 선심 쓰듯 하자고.” 그는 싱긋 웃으며 소녀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시리네의 얼굴을 보며 마주 웃어주었다.
황혼이 반짝이는 늦은 오후.
“여긴가?” 우여곡절 끝에 가까스로 요새에 도착한 일행. 그들은 마을 주변의 산 정상에 있는 요새를 바라보았다. 요새는 정문부터 삐거덕거리는, 헤지고 썩은 나무문과 여기저기 푸른 이끼가 난 성벽 덕택에 괴기스런 빛을 내뿜고 있었다.
소녀가 구해 달라고 한 것은 단순한 고양이 인형. 크기는 보통 고양이와 똑같은 키에 검은색이고 목에는 리본이 하나 묶여 있는데, 대강의 내력이라면 돌아가신 아버지의 선물이란다. 그리고 요새는 3층 높이의 건물로 규모는 저 마을의 절반가량. 이런 데를 다 돌아다니려면 한 나절은 넉넉히 걸리겠군.
그러나 길드원이 경고했던 ‘리치’가 마음에 걸렷다. 단순히 없겠지, 하고 갔는데 분위기도 그렇고 기분도 그렇고, 정말 뭔가가 튀어나올 듯한 느낌. 실제로 유령을 많이 접해 본 시리네, 그리고 카르텔의 세 유령은 이미 어떤 영적 존재가 저 안에 있음을 실감하고 있었다.
“와, 이거 완전 폐허네.” “오죽하면 귀신이 돌아다닌다는 소문까지 돌겠냐.”
테드의 말을 ㄷ아연하다는 듯이 대답하는 데르크는 못 알아차리는 모양이었지만.
이곳저곳 썩은 창 자루와 녹슨 화살촉이 널려 있는 요새 바깥을 지나 그들은 요새 안으로 향하는 문에 다다랐다. 문이 닫혀 있는 데다 자물쇠까지 채워져 있어 시리네는 검은 롱소드를 꺼내 그것을 깨부수어야 했다. 그가 검을 휘두르자 기괴한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불빛 하나 없는 안은 더 괴기스러웠다. 저투라도 벌여졌었는지 바닥이고 벽이고 말라붙은 핏덩이들로 얼룩져 있었고, 그 위에는 횃불을 매달았던 듯한 걸쇠 하나와 그 횃불에 벽이 그을린 자국만이 남겨져 있었다. 그리고 앞으로 죽 복도 하나가 놓여 있는 그 끝에는 또 다른 문 하나가 굳게 닫혀 있었다. 일행은 시리네가 만들어 낸 광구에 의지해 안으로 발을 들여놓았다.
쿠웅
“……?”
갑자기 뭔가가 닫히는 소리와 함께 뒤가 어두워졌다. 문이 저절로 닫혔다? 불안감을 느낀 테드가 문을 열기 위해 아무리 용을 써 보았으나 그것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우씨, 이따 나가야 하는데…….”
“나중에 와서 깨부수자.”
시리네는 중얼거리며 자신의 광구를 높이 들어 앞으로 나아갔다. 그리고 맞은편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거대한 홀이 등장했다.
이 곳은 입구부터의 긴 복도보다는 깔끔했지만 그래도 여기저기 묻은 핏자국이 여전히 남겨져 있었다. 천장엔 이제 빛을 잃어버린 샹들리에가 하나 놓여 있었고, 그 좌우에도 조그만 전등이 달려 있었으며, 길은 총 네 갈래로 갈라져 각각 정면, 양쪽 계단, 그리고 2층 정면을 향하고 있었다.
시리네는 잠시 머리를 굴리더니 일단 서로 흩어져 인형을 찾자고 말하기 위해 일행을 돌아보았다. 그러나 곧 한숨을 쉬었다. 세 ‘인간’들은 서로 헤어지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내가 서로 흩어져서 찾자고 하면……. 다 반대할 거지?” 맹렬히 고개를 끄덕이는 셋. 결국 그들은 바로 앞부터 들어갈지 그 2층 쪽 길로 갈 건지, 아니면 양쪽 계단으로 갈지 의견을 나누다가 일단 왼쪽 계단부터 시작해 요새를 한 바퀴 빙 돌아보기로 했다.
계단에 올라서자 다시금 긴 복도가 이어졌다. 창문도 없이 빛 하나 새어 들어오지 못하는 요새. 그 길 중간 중간엔 복도가 이어져 있었고, 일행은 그 앞으로 천천히 나아갔다.
‘으, 정말 불안한데.’
일행의 뒤를 쫓으며 주변을 살피던 테드는 겁에 질려 벌벌 떨었다. 그는 이유를 막론하고 무서운 걸 가장 싫어했다. 예컨대 유령이라든가 좀비라든가 어두운 길이라든가. 물론 저번에 스켈레톤들과 싸웠을 때엔 그냥 움직이는 뼈다귀라 생각하며 마구 깨부수었지만 좀비만큼은 달랐다. 깔끔한 스켈레톤과, 여기저기 구더기가 스멀스멀 움직이는 좀비를 가져다 놓고 누가 더 괜찮아 보이냐고 하면 누구라도 스켈레톤을 선택할 것처럼, 그 역시 스켈레톤보다 좀비를 더 무서워하는 편이었던 것이다.
‘얼른 끝내놓고 나갔으면…….’
그는 그런 생각을 하며 고개를 들었다.
순간 일행이 보이지 않았다.
테드는 갑자기 사라져 버린 일행 탓에 당황하다 바로 옆 복도에 불빛이 새어나오는 걸 보고 그 쪽으로 달려갔다. 일행이 있었다. 가까스로 일행을 따라잡은 그는 자신이 이 곳을 무서워한다는 걸 들키고 싶지 않았는지 그들에게 말했다.
“하아, 깜짝 놀랐네. 갑자기 사라지면 어떡해요. 다 귀신 무서워하면서.”
그러나 한 순간, 고개를 돌린 그들의 얼굴은…….
“어라?” “왜 그래?” 한편, 시리네의 불빛을 따라 앞으로 향하던 일행. 그 중 데르크는 잠시 뒤를 돌아보더니 고개를 갸웃거렸고, 시리네는 왜 그러는지 몰라 데르크를 돌아보았으나 곧 자신도 궁금증을 하나 머금어야 했다. 맨 뒤에서 잘만 따라오던 테드가 온데간데없이 사라진 까닭이었다.
“테드가 없어졌어.”
“갑자기 어디로 사라졌지?” “흥미로운 기계를 발견해 그것을 만지작거리는 중이라 생각.” 두 명의 물음표를 간단하게 카르텔이 일축해 버렸지만 그것으로는 부족하다는 게 데르크와 시리네의 표정이었다. 순간 불안한 느낌이 든 데르크가 심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저기, 혹시 유령한테 끌려간 건……?” “조, 조용히 할 것.” 별안간 카르텔이 싸늘한 눈초리로 데르크를 얼어붙게 했다. 그러나 시리네는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에서 느껴지는 묘한 이질감의 정체를 알아냈는지 느끼한 웃음을 흘리며 그녀에게 말했다.
“오호~. 이거 천하의 카르텔님이 설마 귀신을 무서워하는 건?”
“침묵은 금.” 그녀는 말을 더듬는 와중에도 시리네에게 카리스마를 선보이며 그를 석고상처럼 굳어 버리게 만들었다. 말 속에도 날카로운 비수가 숨어 있었다. 침묵은 금, 그러니까 조용히 안 있으면 때려죽이겠다는(…….) 무언의 협박. 물론 그 반대의 해석 -말하고 싶지 않다-도 가능했지만 낮고 음침하고 차가운 그녀의 억양으로 보건대 그럴 일은 결코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정말 어디 갔지?”
“한 번 돌아가 볼까?”
“괜찮은 생각이라 판단.”
셋은 아까 오던 길을 되짚어 갔다. 그러나 중간에 있는 복도를 지나쳐 다시 홀에 도착할 때까지도 테드는 보이지 않았다. 투덜대던 그들은 가운데 복도로 방향을 틀었다. 가운데 복도는 길게 뻗어 있을 뿐 중간에 어떤 방이나 갈림길도 존재하지 않았다. 시리네를 앞세운 그들은 앞으로 죽 걸어갔다. 그들은 끝이 양쪽으로 갈라진 복도가 나올 때까지도 테드의 그림자나 발자국조차 발견할 수 없었다.
“아 진짜 어디 있는 거야. 잡히기만 해 봐라. 가만 두나 안 놔두나.”
그들은 갈림길을 사이에 두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데르크와 시리네는 곧 둘 중에 어디로 갈까 하는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기 시작했다. 카르텔은 잠시 그들의 대화를 듣고 있다가 갈림길 중앙의 벽에 등을 기대 보았다.
그때였다.
“그러니까 저쪽은 정문으로 향하는 길이라고.”
“하지만 테드가 가운데로 향했을 것 같지 않아?”
“야, 데르크. 차라리 그럴 거면, 나 같음 얼른 오던 길 되짚었을 거다.”
“문제는 테드가 그럴 만한 위인이 못 된다는 거지.”
“……카르텔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어볼까?”
“좋아, 카르텔. 넌 어느 쪽으로 가는 게…….”
“……어라?”
옥신각신 다투던 그들은 카르텔이 사라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디 갔을까. 다급한 마음에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역시 나타나지 않았다. 일행은 테드를 부르던 그 입으로 이번엔 카르텔을 부르는 데 목청을 돋웠다. 그러나 대답 없기는 그녀 역시 마찬가지였다. 왜 둘 다 사라진 걸가. 왜 그들은 대답을 하지 않는 것일까.
“카르테에엘~! 어딨어~!”
“틀렸어. 대답하지 않아. 젠장……. 정말 유령이라도 있는 건가.”
카르텔을 부르던 데르크는 시리네의 말에 고개를 돌려 그에게 물었다.
“너 혹시 유령을 볼 수 있는 거야?”
“보기도 하고 듣기도 하고 말하기도 하고 만지기도 하지. 그렇지만 이 요새 전체에 영력이 퍼져 있어 이 곳 어딘가에 유령이 있다는 짐작만 할 뿐 정말 어디에 있는지까진……. 데르크?”
잠시 고민에 빠져 있던 그가 고개를 돌렸을 때 이미 데르크는 그 자리에 없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마찬가지였다. 저 멀리서 음산한 느낌이 들 뿐 데르크나 카르텔, 테드의 모습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간 거야.”
시리네는 홀로 중얼거렸다.
그때 뒤에서 슬그머니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머리를 돌렸다.
“하악, 하악.”
어두운 요새, 불빛 하나 없는 그 어두운 곳을 한 사람이 달려가고 있었다. 땀에 젖은 안경, 뚱뚱한 몸집, 그저 그런 얼굴 위로 가득 두려움을 싣고 달려오는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테드였다.
‘어, 어, 얼굴이 없어……!’
그는 방금 있었던 일을 떠올리며 몸서리를 쳤다. 일제히 돌아본 세 명의 얼굴. 그것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있을 그것이 없는, 차가운 맨 얼굴이었다. 역시 이 곳엔 귀신이 살고 있었던 것……!
‘이, 이쯤이면 안 오겠지?’
그는 중간에 멈춰 서서 호흡을 가다듬었다. 한시도 이 곳에 있고 싶진 않았지만 무작정 뛰어온 상태라 길을 잃어버리고 말았기 때문에, 제대로 출구를 찾으려면 지금은 몸을 안정시키고 방도를 모색하는 것이 급선무였다. 어떻게 하면 좋을까……. 미로 찾는 것처럼 벽을 짚으며 걸어가 볼까? 아니면 감으로? 그냥 일행이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봐?
‘……감으로 가자.’
결국 제일 현실적인 두 선택을 놔두고 가장 비현실적이고 도박 같은 선택을 하고 마는 테드였다. 그는 자리서 일어나 마냥 걷기 시작했다. 차츰 눈이 어둠에 적응되어 길 찾기는 아까보다 훨씬 수월했다.
잠시 후 그는 방 하나를 발견했다. 바깥에서 보았던 것과 같은 오래된 무기들이었다. 금방이라도 깨질 듯한 녹슨 검, 자신을 잡아주었던 주인을 기다리는 낡은 창, 이제는 박힐 것 같지도 않은 화살. 더 이상 불을 내뿜을 수 없는 MSD 라이플들.
“MSD라……. 총 번호 N4201107-0018이라면, 80년이나 된 골동품이잖아.”
MSD-1의 초기 모델인 MSD는 현재의 MSD-1보다 위력이라든가 정확도 면에서 좋았지만 장탄수가 적었고, 무엇보다 잼(Jam; 잔 고장. 혹은, 빈 탄피를 사출하는 도중 탄피가 다 빠져나오지 못하고 탄피배출구에 끼어 버리는 것.)이 많아 전투 시에 무척 위험했다. 그래서 그 계량으로 만들어진 것이 MSD-1이었고, 초기 모델 MSD는 이제 골동품 상인이나 MSD의 손맛을 잊지 못하는 노병들에게서만 찾아볼 수 있는 골동품이 되어 있었다.
테드는 제조날짜를 표시한 총 번호(N4201107=네이브 420년 11월 07일)를 보며 한 차례 중얼거리곤 다른 총을 살펴보았다. 전부 뒤의 제조순서 번호(N4201107-0018의 0018)만 다를 뿐 날짜는 거의 똑같았고, MSD를 놓은 곳 끝엔 권총이나 구식 스카우트 저격 라이플이 뽀얀 먼지 속에서도 꿋꿋이 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것들은 모두 기계 광 테드의 눈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가 한참 스카우트를 뒤지고 있을 무렵이었다.
달칵
“…….”
별안간 뒤쪽에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들려오자 테드는 찬 물을 끼얹은 듯 온몸이 오싹해지는 것을 느꼈다. 내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가 뒤에 서 있다. 테드는 아무것도 아니길 빌며, 아니 일행이 서 있기를 빌며 심호흡을 한 뒤 뒤를 돌아보았다.
“…….”
그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며 세세하게 뒤를 살폈다. 소리의 주인공은 없었다. 아무리 살펴봐도 보이는 것은 깊은 어둠뿐이었고, 소리 역시 언제 있었냐는 듯 고요할 뿐이었다. 한참 눈망울을 굴리던 그는 아무 탈 없겠지, 하고 생각하며 다시금 앞을 바라보았다.
그때 그의 앞엔 얼굴 없는 카르텔이 서 있었다.
“으, 으아악!!”
테드는 깜짝 놀라 서둘러 뒤로 도망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뛰다 뒤를 돌아본다. 히익, 쫓아온다! 따돌릴 요량으로 왼쪽 복도에 접어든다. 그 순간 얼굴 없는 데르크가 그를 향해 다가왔다. 소스라쳐 다시 앞으로 달린다. 그러나 이번엔 얼굴 없는 시리네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뒤에는 카르텔과 데르크의 유령, 앞에는 시리네의 유령이 점차 그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테드는 극도의 공포에 빠져 온 몸을 떨었다.
한편.
“쳇, 시리네까지 사라져 버렸나.”
요새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데르크는 자기를 내버려두고 사라져 버린 시리네에게 악담을 퍼부었다. 자신이 시리네에게 유령을 볼 줄 아냐고 물었을 때 그는 그 자리서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버렸던 것이다. 물론 그가 들고 있던 광구까지 함께.
“시리네~! 카르텔~! 테드~!”
어둠 속에서 데르크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러나 언제까지나 메아리였다. 누구에게도 닿지 못한 소리는 대상을 찾지 못하고 데르크를 향해 돌아왔다. 다시 한 번 데르크의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도대체 어디 있는 것일까. 어디로 가서 자기를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닐까.
이라도 만나지 못하고 여기서 죽는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자 데르크는 도리질을 치며 자신을 꾸짖었다. 이 바보 같은 녀석, 그녀를 보지 못한다고 생각하는 너 자체가 인간이냐. 반성 좀 해라. 긍정적으로 생각하라고. 그는 벽을 짚으며 이동하다가 갈림길을 만나 오른쪽으로 향했다.
그때였다.
“으아악!”
별안간 들려온 비명이 데르크의 귀를 때렸다. 테드다. 그는 재빨리 블리스를 뽑아들고 테드가 소리친 곳으로 달려갔다. 맞은편 갈림길에서 왼쪽으로 돌아간 데르크는 세 개의 이상한 존재에게 둘러싸인 데르크를 발견하고 그에게 소리쳤다.
“테드! 고개 숙여!”
테드는 정신없는 와중에도 어디선가 흘러들어온 목소리에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 사이 데르크가 블리스를 쏘자 그 탄환은 얼굴 없는 데르크의 뒤통수에 적중하였다. 피가 쏟아졌다. 그와 동시에 카르텔, 데르크, 시리네의 몸을 이루고 있던 키 작은 코볼트들이 날카로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테드보다도 한층 더 요란하게 소리치던 그들은 데르크가 다시 한 번 내 쏜 몇 발의 총에 맞아 쓰러졌고, 나머지 녀석들은 요새 가지각색의 방향으로 도망쳐 요새에 침묵을 가져다주었다. 코볼트들이 사라졌다는 걸 안 데르크는 테드에게 서둘러 달려가 그의 몸 여기저기를 살피며 물었다.
“괜찮아, 테드?”
“으, 으악! 다가오지 마!!”
“정신 차려! 난 데르크야! 정신 차리란 말이야!”
“사람 살려~! 사람 살……. 데, 데르크?”
간신히 테드가 공포에서부터 깨어나자 데르크는 한숨을 내쉬었다. 자신도 지금이 조금은 무서운 상태였지만 테드는 오히려 자기보다도 훨씬 두려움을 잘 타는 모양이었다. 테드는 데르크가 쏜 코볼트와 데르크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갈색 머리칼과 빵모자, 아무것도 없는 맨 얼굴 가면이 코볼트의 피에 조금씩 젖어가고 있었다.
“귀, 귀신이 아니었어요?”
“어딜 봐서 귀신이야? 척 봐도 키 작은 몬스터들이구만. 아마도 요새에서 미리 여행자의 정보를 알아내 변장을 하고 그들을 이런 식으로 잡아먹고 살았던 것 같아.”
양치기를 할 때, 양의 가죽을 뒤집어써서 자신을 잡아먹으려던 코볼트를 모르고 살펴보다 호되게 당해 본 기억이 있는 데르크가 테드에게 말했지만 도시 소년인 테드는 그것을 처음 본 까닭에 그저 아직도 떨리는 손을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근데 시리네와 카르텔 봤어?”
데르크는 테드에게 물었다. 그러나 그는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아뇨. 저도 그 두 사람을 찾고 있었어요.”
“흠. 어디 간 거지?”
그는 정말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흠, 어디 간 거지?”
복도 한 구석에서 하얀 빛이 점점 다가오더니 이윽고 밝게 빛을 발했다. 시리네가 들고 있던 광구에서부터 비치는 빛이었다. 사라졌다고 생각했었던 카르텔이 품에 조그만 고양이 인형을 든 채 그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사실 카르텔은 체르의 저승사자를 통해 인형이 있는 곳을 알아냈고, 그 곳에 갔다 오느라 잠시 그들과 헤어져 있어야 했던 것이다. 그것은 데르크를 놓쳐 버리는 결과를 만들고 말았지만.
“이젠 인형보다 사람을 찾아야 하는 꼴이로군.”
복도를 나오며 중얼거리던 시리네는 고개를 돌려 카르텔을 바라보았다. 마침 카르텔의 팔지가 파란색으로 빛나고 있다는 걸 안 시리네는 한편으론 저승사자에게 신경을 집중하고 있던 체르에게 말을 건넸다.
“힘들지, 체르?”
“예? 아, 아녜요. 유를 쓸 수 있는 건 저 밖에 없는데요, 뭘.”
“미안해. 우리 일행이 좀 멍청해서.”
시리네가 생글 미소를 보여주자 체르는 새빨개진 얼굴로 그의 시선을 피했다. 시리네가 체르에게 말할 때마다 그녀가 이런 행동을 취하곤 해서 시리네는 그녀를 다소 어려워하는 편이었다. 대개 인간 모습일 때의 자신이 말 한 마디만 하면 기뻐하며 따라오거나 수줍어하는 게 대부분인데, 체르 이 애는 좋다는 건지 싫다는 건지. 물론 체르 본인은 수줍음을 타는 건지도 몰랐지만 워낙에 무뚝뚝한 카르텔의 탈을 쓴 수줍음이기에 알아차리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었다. 아마 체르가 자신의 마음을 밝힐 때까지 그로선 그녀의 마음을 알아낼 수 없을지도 몰랐다.
그러나 체르 본인은 행복하기도 하고 조급하기도 한 이 기분에 돌아가실 지경이었다. 더구나 오늘은 이름을 불러주지 않았는가.
“…….”
“…….”
둘은 어색한 침묵을 안은 채 마냥 앞으로 나아갔다.
어느 정도 앞으로 나아가자 큰 방 하나가 나타났다. 여기저기 철창이 이 있고 그 안에는 깨진 수갑과 군데군데 마른 핏자국, 말라붙은 뼈다귀가 널브러져 있는 것이 포로나 죄수를 수용했던 감옥인 모양이었다.
“으으, 무서워…….”
“괜찮아. 나만 잘 따라와.”
시리네는 광구를 들어 주변을 환히 비추며 체르에게 안심하라는 듯 말했고, 체르는 조금 주저거리면서도 그에게 찰싹 달라붙어 좌우를 바라보았다. 금방이라도 해골이 일어나 자신을 향해 달려들 것만 같았다.
그때 갑자기 시리네가 그 자리서 멈춰 섰다. 체르는 딴 데를 쳐다보다 그의 몸에 부딪치고 나서야 겨우 그 자리서 멈춰 섰다. 체르는 왜 그러냐는 듯 시리네를 바라보았으나 그는 경계심 어린 목소리로 사방을 둘러보며 말했다.
“누군가 있어. 아무래도……. 이 곳 주인인 모양이군.”
체르는 자신은 못 느끼겠다는 듯 주의 깊게 주변을 살폈다. 그때였다. 사방에서 스산한 기운이 돌던 그것이 한 덩어리로 뭉쳐 하나하나의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섰으나 시리네는 허공에 손을 뻗어 검은 롱소드를 들었다. 체르도 서둘러 유를 불러들였다. 다 헤진 검은 로브와 함께 유는 사이스를 들고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형체들을 노려보았다. 그것들은 마치 좀비를 투명하게 만든 것 같은 유령으로 변모했고, 그 두 사람의 영혼을 잡아먹기라도 할 듯 천천히 다가왔다. 체르가 유를 보내는 것과 함께 시리네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체르! 뒤에서 가만히 있어! 핫!”
시리네가 검을 휘둘러 한 녀석을 베었다. 유령이라 안 먹힐 줄 알았던 롱소드는 시리네가 약간의 마나를 주입하는 정도로도 금방 먹혀들었고, 녀석은 두 동강이 나 꾸물거리다 점점 빛이 옅어지더니 아예 사라져 버렸다. 시리네는 가운데로 뛰어 들어가 두 명을 베어 넘기고 바로 앞쪽 녀석에게 검을 휘둘렀다. 그러자 유령은 시리네가 했던 것처럼 한 차례 손을 뻗더니 그것을 이용하여 시리네의 롱소드를 막아내었다. 보기에도 무거워 보이는 투 핸드 소드였다.
“큽, 이 자식…….”
시리네는 유령의 힘이 전혀 약하지만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잠시 뒤로 물러났다. 그리고 녀석의 팔을 향해 가로로 검을 그었다. 역시 막겠지. 하지만 내가 노린 건 그거다!
“핫!”
검이 투 핸드 소드에 부딪치는 반동을 이용해 시리네는 한 바퀴 몸을 돌리며 빠르게 그의 반대쪽으로 검을 그었다. 투 핸드 소드의 유령도 그에 대응하기 위해 재빨리 검을 가져대 막으려 했지만 원체 무거운 투핸드 소드로 그 갑작스럽고도 빠른 롱소드의 진로를 막아내긴 어려웠고, 유령은 허망하게 바닥으로 쓰러졌다.
그러나 산 넘어 산이라고 했던가.
“젠장.”
투 핸드 소드의 녀석에게서 무기의 필요성을 느꼈는지 그들은 손에 롱소드니 라운드 실드니 하는 것들을 들고 있었다. 시리네는 숫자적으로도 장비로도 자신이 밀린다는 걸 깨닫고 유령에게 잘 들어맞는 마법을 시전하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가 마법을 시전 하는 타이밍을 노려 재빠르게 다가왔다.
그때 누군가가 시리네와 유령들 사이를 가로막았다. 유령들이 다가오는 걸 보고 서둘러 마법 시전을 완료하려던 시리네는 자기와 유령 사이를 가로막은 존재에게 눈을 돌렸다. 체르의 저승사자, 유였다. 유령들은 난데없이 등장한 저승사자에게 막연한 두려움을 느껴 서둘러 뒤로 물러났으나 저승사자는 그들의 영혼 하나하나를 유령이란 껍데기에서 끌어내듯 큰 사이스로 그들의 목을 베어 나갔다. 그 사이 시리네가 흑마법을 완성하자 그는 주저 없이 그것을 시전 했다. 흑마법표 파이어 볼이었다.
“엘레프렌나일카빈, 프카유마즈유펄가델토르나일, 프루스 데트라 드루, 파이어 볼.”
한순간 그의 손에서 뻗어 나온 흑마법은 순식간에 50여 개의 붉은 구체를 만들어 내었다. 그것들은 유가 물러나는 것과 동시에 화려하게 터져 올랐다. 불덩이를 맞은 유령들은 붉은색이 아닌 파란 불기둥에 휩싸였고, 나머지 빗나간 구체들은 주변의 오래된 물건들을 부수는 것으로 아쉬움을 풀었다.
“헷, 이제 좀 괜찮을라나?”
시리네는 비웃음을 흘리며 유령들을 바라보았다. 전부가 몸 여기저기서 크고 작은 부상을 입었다. 물론 쪽수로 밀고 나오면 위험해지겠지만 여전히 승산은 시리네ㅔ쪽에 있었다.
그때 별안간 그들은 모든 행동을 멈추었다. 시리네와 유도 유령들을 공격하려다 갑작스런 그들의 행동에 우뚝 섰다. 유령들은 아예 공격할 의욕을 잃어버렸는지 라운드 쉴드와 롱소드도 버리고 처음 이 곳에 모습을 나타 냈떤 때처럼 다시금 스산한 기운이 되어 사방으로 퍼져나갔다. 순식간에 감옥엔 침묵만이 남겨졌지만…….
“……끝난 건가요?”
“아니, 아직 안 끝났어.”
시리네는 그들이 결코 포기한 게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었다. 스산한 기운들은 아직 완전히 흩어지지 못하고 일행의 주위를 에워싸고 있었다.
유령들에게서 이상한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도 그 즈음이었다.
“……?”
시리네는 스산한 기운들이 다시 뭉치는 과정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오싹한 기분이 드는 덩어리 하나하나가 유령을 만든다는 것. 그것까진 좋았다. 그러나 그 직후, 유령들은 아까 덩어리들이 했던 것처럼 다시 한 데 뭉쳐 큰 형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시리네는 검을 든 손에 꽈악 힘을 주었다.
잠시 후 그것은 오우거 크기의 우락부락한 인간 하나를 만들어 내었다. 그 크기는 머리가 천장에 닿을 정도였고, 덩치는 복도를 가로막아 도저히 빠져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것을 두려워해야 할 체르의 얼굴 한 곳엔 이유모를 자신감이 떠올랐다. 자신감 어린 표정으로 그것을 지켜보는 체르를 시리네는 불안에 겨워 쳐다보았으나 그녀는 신이 나서 시리네에게 말했다.
“시리네 오빠, 저건 제가 처리할게요! 유, 가자!”
“엇?, 야, 잠깐만……!”
시리네가 말렸지만 유는 그 큰 사이스를 든 채 거대 유령에게 달려갈 뿐이었다. 한 번에 이 녀석을 잡아 버릴 심산이었던 걸까. 물론 녀석에게 닿는 과정은 험난했다. 녀석은 몸 여기저기서 무수한 손을 불쑥 끄집어내더니 각 손마다 무기를 들고 유를 향해 휘둘렀다. 죽음과 종말의 상징인 저승사자도 무지막지한 힘 앞에선 사방에서 날아오는 그물망을 피해 도망 다니는 물고기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그러나 가까스로 녀석에게 다가간 유는 재빨리 사이스를 그어 녀석의 목을 따 버렸다.
“성공이다!”
체르가 어린애처럼 기뻐했다. 그러나 시리네는 오히려 불안하단 느낌이었다. 녀석에게선 여전히 막강한 영력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생각대로…….
부우웅
……머리가 새로 생겨난 녀석은 유를 향해 몽둥이를 휘둘렀다.
“유! 피해!”
시리네가 다급하게 소리치자 유는 깜짝 놀라 뒤를 돌아보다 재빨리 사이스를 들어 몽둥이를 막았다. 그러나 현격한 힘의 차이 때문에 유는 사이스를 들어 막은 그 모습 그대로 날아가 체르의 앞에 힘없이 떨어졌다. 깜짝 놀란 체르가 유에게 달려갔따. 유는 체르의 괜찮냐는 말에 힘없이 빙그레 미소지을 뿐이었다.
체르는 저승사자의 즉석 저승행 티켓도 받지 못하는 거대 유령을 어떻게 하냐는 듯 시리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까와는 달리 싱긋 웃으며 말했다.
“그래도 효과는 있어나 봐. 한 사람 분의 영력이 빠져나갔군.”
“하지만 이 큰 거인에게서 몇 명의 영혼이 더 있는지도 모르는데...”
“다 잡으면 되지.”
“네?”
체르는 무슨 소리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러나 그의 미소에 머무른 잔혹한 표정을 보곤 바로 입을 다물었다. 저 미소, 언젠가 본 적이 있었다. 그의 속에 있는 악마가 깨어나는 미소, 검은 날개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 유령인 자신들도 두려워할 정도의 파괴력.
팟
어느 순간 시리네의 곁으로 동그랗고 검은 막이 피어올랐다. 그 안에서는 악마 특유의 검은 기운이 뒤엉켰고, 잠시 후 그 안에선 전혀 다른 형체가 튀어나왔다. 파란 머리, 파란 피부, 파란 눈동자, 파란 날개, 그리고 토막 나 버린 뿔.
“……!”
그것을 본 거대 유령은 잠시 놀라다가 ‘아직은 자신에게 승산이 있다’고 생각했는지 몽둥이를 휘둘렀다. 그와 동시에 다른 쪽 팔에 있던 검도 같이 휘둘렀다. 그러나 그것이 살육의 시작이었음은 당사자를 제외한 누구도 알아차리지 못했다. 재빠르게 날개를 이용해 공격을 피한 그는 검을 들어 녀석의 어깻죽지에 검을 꽂았고, 거기서 유령 하나가 빠져나오자 시리네는 그를 벽으로 밀친 뒤 목에다 검을 꽂아 버렸다. 영혼은 승천도 유령도 되지 못한 채 그 자리서 소멸해 버렸다. 시리네는 다시 한 번 느껴지는 검의 예기에 공중으로 높이 떠올랐다. 그의 얼굴엔 여전히 미소가 걸려 있었다.
체르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엄청난 속도로 영혼을 그 자리서 사장시켜 버리는 악마. 검을 꽂으면 어김없이 꿰여 나오는 것은 영혼이었고, 그것을 베어버린 그는 또 다른 사냥감을 찾기 위해 날아올라 또 다른 영혼을 사멸시켰다. 그의 앞에선 거대 유령도 별다른 힘을 보이지 못했다. 죽이면 죽일수록 거대유령은 끊임없이 되살아났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시리네의 사냥감에 불과했다. 죽이면 죽일수록 그의 눈은 광기에 물들어 갔다.
그걸 바라보던 체르는 고민했다. 자신이 좋아하는 시리네의 실체는 과연 이런 것일까…….
‘읏……. 더 이상은……!’
시리네는 가차 없이 영혼들을 사멸시켜 버리면서 생각했다. 이대로 살육을 계속했다간 잠재된 파괴본능이 깨어나 자기 마음껏 폭주하다 죽어버리게 될 거란 점은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멈출 수도 없었다. 하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자꾸만 하게 되는 달콤한 늪에 빠져 버린 기분이었다. 계속 할까. 계속 하자. 죽이고, 죽이고, 또 죽이면 되는 거야. 한 명씩, 한 명씩……. 아냐. 이건 아냐. 천사들과 함께 하는 동안 너는 할 수 있다고 믿어 왔잖아. 이대로 미친 듯 날뛰다 죽을 셈이냐!
슈욱
어느 순간 시리네가 날개를 퍼덕거리며 바닥에 내려서자 그는 평상시와 같은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시리네는 마지막으로 남아 자신을 두렵다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두 셋의 영혼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체르를 돌아보며 미소 지었다. 하지만 체르로서는 그가 두려울 뿐이었다.
남아 있던 녀석들을 유가 처리하고 나자 시리네는 지친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어느새 보통 몸으로 돌아온 카르텔은 그를 빤히 바라보았다. 카르텔이 보기에 체르는 시리네의 악마 모습에 상당한 충격을 받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자신에 대해 회의를 느낄 정도로. 그러나 곧 그를 부축해 든 카르텔은 그와 함께 앞으로 나아갔다. 앞으로 나아가면서 중얼거렸다.
“바보. 자기 몸이 버티지 못할 정도로 힘을 소비하면 어쩌자는 것인가?”
“아, 하하, 미안.”
시리네는 낮은 목소리로 미안함을 전했다. 한편으론 앞으로 조심해야겠다고 생각하는 그였다.
그때였다.
“……!”
“……왜 그러는가?”
불현듯 살기를 느낀 시리네는 그 자리에 섰다. 그러다 뒤를 돌아보았다. 아까 스러진 척 하고 있던 유령이 숏소드를 들어 그를 향해 내리치려 하고 있었다. 안돼, 이대로 있다간……!
타아앙
그때 단발마의 총성이 울려 퍼졌다. 저도 모르게 눈을 감아 버린 시리네는 카르텔과 함께 살살 눈을 떴다. 탄환을 맞은 유령은 낮은 신음성을 흘리더니 그 자리서 안개처럼 흩어졌다.
“시리네! 괜찮아?”
“데르크!” 시리네는 광구를 조종해 뒤쪽 복도를 밝혔다. 데르크뿐만 아니라 테드도 그의 곁에 있었고, 탄환은 데르크의 것이었는지 그가 든 블리스에서부터 화약 연기가 새어나오고 있었다.
그러나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 할 시리네에게선 전혀 다른 질문이 떨어졌다. 의문과 호기심이 가득한 목소리였다.
“데르크. 방금 유령, 네가 죽인 거야?”
“유령? 난 코볼트인 줄 알고 쏘았는데?” 오히려 무슨 말이냐는 듯 대답하는 데르크. 그에 시리네는 자기가 잘못 봤나 생각하며 광구를 움직여 아까 녀석이 쓰러진 곳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코볼트의 시체는커녕 핏방울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정말 데르크가 유령을 제거한 걸까?
잠시 풀리지 않는 의문 때문에 고민하던 시리네는 곧 엉덩이를 털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조금 휘청거리는 듯 했으나 곧 그는 기운을 차린 듯 모두에게 말했다.
“자자, 이제 가자구. 사람도 다 모였고 인형도 찾았고.” “그래. 이 곳에서 한 시도 더 있고 싶은 생각은 없으니…….” “동감.”
“……제가 보기에 카르텔은 정말 유령을 무서워하는 것 같은데요.”
“아니라고 하지 않았나? 그나저나 어느 길로 가야 하는가?”
“……글쎄?” 그러고 보니 정말 길을 잃었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달은 그들이었다. 하지만 곧 누군가가 길을 알려주었다.
“음. 왼쪽으로 쭉 가면 아까 처음에 나왔던 홀에 도착할 거야.”
“그래? 그럼 왼쪽으로 가자구.” “드디어 이 요새에서의 기나긴 여정이 끝을 맺는 거로군요.”
“후후. 얼른 가서 샤워나 하자.” 그들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왼쪽 길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한참을 걸어가자 일행이 맨 처음 들어섰던 홀이 나타났다. 정문 끝에 닫혀있던 문은 누군가가 일부러 열어 놓은 듯 비스듬하니 열려 있었다.
“하아, 드디어 바깥이로군. 저긴 피 냄새가 너무 심해.” “왼쪽 길로 가라고 말해 줘서 금방 온 것 같은데. 왼쪽으로 가라고 한 사람 누구였어?” 시리네는 칭찬이라도 해 줄 것처럼 일행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러나 일행 누구도 선뜻 손을 들지 못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어 시리네는 일행에게 하나하나 물어보기 시작했다.
“……데르크, 네가 말했어?”
“아니, 난 카르텔이 한 줄 알았는데.”
“전혀 아님. 혹시 테드?”
카르텔이 물었지만 테드 역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잠시 일행 사이에 침묵이 흘렀고, 시리네는 요새를 돌아보며 중얼거렸다.
“그럼……. 저 안에 또 다른 유령이?”
요새는 시커먼 입을 벌리며 또 다른 여행자를 기다릴 뿐이었다.
...이번에도 늦고 말았습니다ㄱ-. 발표+시험기간이 닥쳐서 그런지 여유가 없군요;;
이번 편, 좀 섬뜩하셨는지요-ㅂ-ㅋㅋ 여러 모로 분위기를 만들어 보려 노력을 했습니다만 역시 좀 부족한 면이... 하긴 영상매체랑은 다를 수밖에 없지만요'ㅅ'; 여기서 간간히 몇 개의 설정이 나가긴 합니다만, 아무리 봐도 안 무섭다는 생각밖에 안 드는;ㅁ;....;
흠흠, 여기서 잠시 다른 말씀을 드리죠.
먼저 첫째로 연재 방침을 변경하겠습니다. 1편씩 올리던 소설이었지만, 이젠 쓰는 대로 하루하루 올리는 방식으로 바꾸도록 하겠습니다. 이러는 편이 독자 여러분들에게 덜 죄송할 테고 또 쓰는 제 쪽에서도 부담이 덜 하긴 하거든요^-^;
두 번째로, 이번 -A Thief's Diary2 : 양치기소년-의 사이드 스토리를 최대한 축소하여 필요한 것만 일목요연하게 나오도록, 그러니까 줄거리에 필요한 부분만을 연재하겠습니다. 현재 오프라인 소설은 완결 직전 상태인데, 막상 쓰고 나니 본 편 숫자가 70편에 육박하는군요;; 거의 1주일에 한번씩 올리는 현재 상황에선 앞으로 1년이나 더 있어야 소설을 완결한다는 계산 결과가 나오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다른 스토리들을 모두 제거하겠습니다. 저도 국방의 의무를 다해야 하지 않겠습니까-ㅂ-; 그 전에 끝내 놓는 것이 좋고, 또 그 뒤를 이을 '외전'도 얼른 선보이고 싶고요.
따라서 다음 편 예고는, 오늘로 끝을 보일지도...[퍽]윽, 여하튼 좋은 모습 보이도록 노력하겠습니다;
|
블로그[이글루] → http://sky5432.egloos.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