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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21-39 시므온의 찬송 2006. 11. 26
21 ○할례 할 팔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수태하기 전에 천사의 일컬은 바러라 22 ○모세의 법대로 결례의 날이 차매 아기를 데리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니 23 이는 주의 율법에 쓴바 첫 태에 처음 난 남자마다 주의 거룩한 자라 하리라 한대로 아기를 주께 드리고 24 또 주의 율법에 말씀하신대로 비둘기 한 쌍이나 혹 어린 반구 둘로 제사하려함이더라 25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 26 저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鰥?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27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가매 마침 부모가 율법의 전례대로 행하고자 하여 그 아기 예수를 데리고 오는지라 28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가로되 29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30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31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32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 하니 33 그 부모가 그 아기에 대한 말들을 기이히 여기더라 34 시므온이 저희에게 축복하고 그 모친 마리아에게 일러 가로되 보라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며 비방을 받는 표적 되기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35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려 함이니라 하더라 36 또 아셀 지파 바누엘의 딸 안나라 하는 선지자가 있어 나이 매우 늙었더라 그가 출가한 후 일곱 해 동안 남편과 함께 살다가 37 과부 된지 팔십 사년이라 이 사람이 성전을 떠나지 아니하고 주야에 금식하며 기도함으로 섬기더니 38 마침 이 때에 나아와서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루살렘의 구속됨을 바라는 모든 사람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하니라 39 주의 율법을 좇아 모든 일을 필하고 갈릴리로 돌아가 본 동네 나사렛에 이르니라
마태복음 17장에 보시면 가버나움에서 성전 세를 받는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당신의 선생은 세를 내지 않느냐며 물었습니다. 베드로가 낸다고 하고서는 예수님께 갔더니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세상 임금들이 누구에게 정세와 관세를 받는가 하였습니다. 자기 아들에게 받느냐 타인 에게냐고 물으시자 베드로가 타인 에게라고 답변을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이 오해하지 않도록 또는 넘어지지 않도록 성전 세를 내라고 합니다.
내는 방법을 바다에 가서 낚시를 던져 먼저 오르는 물고기의 입을 열어 한 세겔이 나오면 그들에게 주라고 하십니다. 성전 세가 반 세겔이니 베드로와 예수님의 성전 세를 내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집에 대하여 세를 낼 이유가 없습니다. 세상의 임금의 아들도 세금을 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전 세를 내지 않고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밝히시지 아니하시는 것은 아직 때가 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왜 이 말씀으로 시작하는가 하면, 예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제정자 이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인간의 그 어떤 의무도 지실 이유가 없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이 땅에 오시면서 비천한 계집종의 몸을 사용하십니다. 태어나실 때는 말구유에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에게는 평화입니다.
이 소식을 들은 자들이 주님을 찬송합니다. 마리아가 찬송하고 엘리사벳이 찬송하고 스가랴가 찬송하고 천군천사들이 찬송하고 목자들이 찬송하고 오늘은 시므온이 찬송합니다. 왜 이런 찬송이 나오는 것입니까? 갈라디아서 4:4-5절입니다. “4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5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고 우리로 아들의 명분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에서의 속량입니까?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속량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러면 율법을 받지 않은 자들은 어떠합니까? 마찬가지입니다. 율법을 받은 이스라엘이 율법의 의에 이르지 못하였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한다고 성경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죄의 삯은 사망입니다.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한 것이요 그 이후에는 심판이 있습니다.
사람들이 괴로우면 자살을 합니다. 요즈음도 자살이 많은데 언론에서 보도를 하지 않습니다. 자살이 유행처럼 번지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러나 자살한다고 끝이라면 착각입니다. 죽은 자를 다시 살려 내셔서 심판을 하신다는 것이 성경의 증거입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거저 눈에 보이는 세상의 것이 전부인줄 알고 사니 괴롭다는 말이 나오고 죽겠다는 말이 나오는 것입니다.
이것은 모든 사람들이 캄캄한 어두움에 갇혔다는 증거입니다. 죄와 사망의 그늘에 앉아서 죽어가는 인생들의 모습입니다. 이런 세상에 하나님께서 자기 언약을 이루시기 위하여 사람으로 오신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4장에서 어디로 오셨다고 하였습니까? 율법 아래 오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율법을 다 완성하시는 것입니다. 그 어떤 누구도 이루어 낼 수가 없는 율법을 온전하게 다 이루시는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3:10절 말씀을 보시면 모든 율법을 항상 지켜 행하지 아니하는 자는 저주아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간은 저주아래 있는 것입니다. 이 저주를 예수님이 율법을 다 지키심으로 의를 만들어내실 뿐만 아니라 율법의 저주를 대신 받으시는 곳이 바로 십자가인 것입니다. 이 일을 이루시어 하나님이 의롭다 하심을 받으시고 예수님을 믿는 자도 의롭다 하시기 위하여 율법아래 오신 것입니다.
21-25절입니다. 예수님이 난지 팔일 만에 할례를 행한 것도 율법을 따라 행한 것입니다. 물론 이 할례는 율법 이전에 아브라함이 할례를 행한 것이지만 율법에서도 할례를 행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고 할례를 행할 때에 이름을 지어 부르는데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합니다. 이미 천사의 예언대로 부른 것입니다. 이 이름은 유대사회에서 흔한 이름입니다. 그러나 성령으로 잉태하여 처녀의 몸으로 오셔서 말구유에 누이신 분이 표적이었습니다. 물론 가장 분명한 표적은 십자가의 표적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입니다.
이 이름의 뜻을 마태복음 1:21절에서 이렇게 증거 하고 있습니다.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하려 하심이라고 합니다. 모든 사람이 아니라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입니다. 그런데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은 예수님을 각자의 욕망대로 부르는 것입니다. 마치 정월 대보름에 달을 보면서 각자의 소원을 빌듯이 예수님의 이름을 부르면서도 자기 죄를 모르는 사람은 자기 영광을 위하여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성령이 임하지 않고서는 자기 죄를 모르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종종 드는 예를 권정생 이라는 동화작가 이야기입니다. 강아지 똥, 몽실 언니를 지은 사람이라고 하면 잘 아실 것입니다. 이 사람의 책 중에 도토리 예배당의 종지기 아저씨라는 책을 보면, 함께 사는 생쥐와 고무다라기를 타고서 하늘로 올라간 것입니다. 드디어 천국에 도달하니 천사가 지키고 있더랍니다. 왜 왔느냐고 하자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서 왔다고 했습니다.
그러자 어떤 하나님을 만나러 왔느냐고 묻는 것입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만나러 왔다고 하였지요! 그런 하나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자 그러면 어떤 하나님이 있느냐고 하는 것입니다. 각 교회마다 하나님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 교회 이름을 말하려고 하니 시골의 작고 초라한 교회라서 도시의 어느 큰 교회 이름을 말하니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큰 문을 열고 들어가니 하나님이 가득 한 것입니다.
죽 늘어선 하나님 밑에 이름이 적혀있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 하나님, 어느 교회 하나님, 그래서 드디어 자기가 지목한 교회의 하나님께 가니 하나님이 온갖 보석으로 치장이 되어 있는데 인상을 쓰면서 또 무엇을 달라고 그러느냐고 하는 우화입니다. 왜 이 말씀을 드리는 것입니까? 우리가 예수님을 모르면 하나님도 모르는 것입니다. 누구도 하나님 아버지를 본 자가 없습니다. 예수님만이 하나님 아버지를 아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모르고서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엉터리 우상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가복음을 통하여서 예수님이 어떻게 오셨으며 무엇을 이루셨는지를 제대로 보아야 합니다. 그래서 누가의 인도를 따라서 우리 중에 일어난 사실에 대하여 자세히 조사하여 기록한 이 말씀을 따라 살펴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는데 할례를 행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율법에 의하면 사내아이를 낳으면 7일과 33일 동안 즉 40일의 결례기간을 마치면 성전에서 예물을 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이런 것이 다 모세 율법대로 행하는 것입니다. 번제와 속죄제로 어린 양이나 비둘기를 드릴 수가 있는데 요셉과 마리아는 가난하여 비둘기를 드리기 위하여 성전으로 왔습니다. 그렇게 결례를 행하기 위하여 성전으로 들어가는데 그때 시므온이라는 사람이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 들어와서 그 아기를 보게 됩니다. 이 시므온은 25-27절에서 보시면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린 사람입니다.
이사야 성경에 보면 내 백성을 위로하라는 말씀이 나옵니다. 그 위로를 기다린 것입니다. 위로란 어떤 사람에게 필요합니까? 모든 것이 부여하여 부족함이 없다는 사람에게는 위로가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에 본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우리는 부요하여 부족함이 없다고 여기는 그들에게는 위로가 필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실상은 어떠하였습니까? 곤고하고 가련하고 벌거벗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환난과 궁핍을 당하는 서머나 교회의 실상은 부요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의 눈으로 보지 말아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성령이 말씀을 우리에게 비추어주셔야 합니다. 그러면 자신의 가련하고 곤고하고 벌거벗은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런 자에게 십자가를 지셔서 우리의 죄를 가려주신 예수님만이 위로가 됩니다. 이런 위로를 기다린 시몬이 성령의 지시를 받았습니다. 메시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것입니다. 아마 많이 늙底?오늘내일 하는 사람으로 보입니다. 늙어서 빨리 죽는 것이 해방으로 여기고 있는데 죽지 못하는 것입니다. 무슨 약속을 받았기 때문입니까? 메시아를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어느 가정에 심방을 갔습니다. 어느 집사님의 모친이 연세가 많으신 것입니다. 내가 빨리 죽어야 자식이 고생을 안 할 텐데 이렇게 안 죽어서 큰일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드렸습니다. 예수님을 믿으시라고 그래서 살려두셨다고 하면서 복음을 전하고 예수님을 믿자고 하였습니다. 순순히 예수님을 믿겠다고 아멘으로 화답을 하였습니다. 성령께서 그 마음을 움직여서 그렇게 고백하였다면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시므온의 이야기를 계속 봅니다. 그렇게 오랫동안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는데 성령의 감동이 오는 것입니다. 성전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27-32절입니다. 그 아기를 안고서 주를 찬송합니다.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 도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이는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입니다. 놀라운 찬송을 합니다.
주의 성령이 메시아를 보기 전에 죽지 않으리라고 하였는데 이제 메시아를 보았으니 이스라엘의 구원을 보았으니 이제야 종을 놓아주시는 군요! 이 자유의 외침을 아시겠습니까? 이제 평안히 눈을 감겠다는 것입니다. 이산가족이 상봉하는 모습을 보면 늙고 늙은 사람들이 끌어않고 울면서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가족이 만난다고 해서 천국에 가는 것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의 구원이여 이방의 빛이신 예수님을 만나야 됩니다.
오늘도 여러분이 교회로 이렇게 모이게 된 것이 성령의 감동으로 모였지요! 그러면 누구를 만나야 합니까?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이제야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니 감사합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태어나서 지금까지 죽지 않고 살아있는 이유가 최고의 무엇입니까? 예수님을 알고 만나기 위함입니다. 이것이 최고가 아닌 사람은 아직도 시므온의 찬송의 의미를 모르는 것입니다. 이제 구원을 보았는데 무슨 소원이 더 있겠습니까?
온갖 욕망에 붙들려 살면서 그것이 사망에 이르는 죄가 되는지도 모르고 열심히만 달려온 인생이 예수님을 만나게 되면 공통된 고백이 이 세상의 영광이라고 여긴 것들이 배설물로 여겨지는 것입니다. 단지 세상 사람들이 성공이며 복이라고 여기는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것만이 헛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의롭고자 율법을 지키고 선행을 하고 착하고 바르게 살고자 한 것조차 주님의 빛 앞에서 더럽고 추한 것으로 알게 됩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이 마냥 좋은 소식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사랑하여서 하루라도 빨리 얼굴과 얼굴로 대하여 보고 싶다면 이 육신의 장막을 지금이라도 벗고 싶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젊고 해야 할 일이 많이 있고 세상의 것들이 보암직하고 먹음직하고 이생의 자랑이 될만한 것으로 보이는 사람에게는 이런 소식이 기쁜 소식이 아니라 원망과 비방이 될 것입니다.
33-35절입니다. 시므온의 찬송을 듣고서 부모들이 의아해 합니다. 천사들의 소식을 들은 자들이지만 지금 시므온의 찬송을 듣고서 의아해 하는 것입니다. 왜 그럴까요? 예수님이 보통 아기가 다를 바가 없는 모습으로 자라나신 것입니다. 젖을 먹고 배설을 하고 잠을 자는 것입니다. 별다른 특징이 없어 보이는 것입니다. 첫 아이 놓고서는 얼마나 분주하고 정신이 없습니까? 그렇게 바빠서 그런지 천사의 말도 잊어버린 모양입니다. 다시 시므온의 찬송을 듣고서 의아해 하는데 그때 시므온에 메시아의 역할을 또 예언합니다.
시므온이 그 부모를 축복하고서 마리아에게 말합니다. 분명히 축복하는데 그 축복이 내용이 무엇입니까? 이 아이는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의 패하고 흥함을 위하여 세움을 입었고 또 칼이 네 마음을 찌르듯 하리라 이는 여러 사람의 마음의 생각을 드려내려 함이라고 합니다. 이것이 축복의 내용입니까? 자식을 축복하려면 이 아이가 입신양명하여 부모의 이름을 높이라고 그렇게 하여야 축복으로 알고 있는 우리에게는 저주입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찌르는 일이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이 예언대로 예수님의 고난과 배척과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것을 직접 눈으로 본 마리아의 심정이 어떠하겠습니까? 부모를 묻으면 산에다 묻고 자식을 묻으면 가슴에 묻는다는 우리나라의 말도 있는데 성령으로 잉태하였으나 자신의 몸에서 10달을 지내고 자신의 젖을 먹고 자란 예수가 그 고난과 죽임당할 때에 마리아의 심정은 혼절하고도 남을 것입니다. 차라리 자신이 대신 죽는 것이 낫지 그러나 예수님의 그 죽으심으로 인하여 마리아도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것이 축복입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비방을 받는 표적이 됩니까? 이스라엘 중 많은 사람을 패하고 흥하게 한다고 하십니다. 메시아가 오면 사람들을 흥하게 하여야지 패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패하는 것이 먼저입니다. 무너뜨리는 것이 먼저입니다. 예레미야 선지자의 사명이 이러하였습니다. 예레미야 1:10절 말씀입니다. “보라 내가 오늘날 너를 열방 만국 위에 세우고 너로 뽑으며 파괴하며 파멸하며 넘어뜨리며 건설하며 심게 하였느니라”
오늘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기존의 모든 생각, 우리 조상으로부터 받은 모든 교육, 세상의 가치관, 세상의 기준들이 다 무너져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괴로운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어야 새롭게 건설하고 심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를 보시면 정말 이 시므온의 예언대로 됩니다. 사람들의 마음의 생각을 드러내시기에 비방의 표적이 됩니다.
예수님이 드러내신 인간의 마음은 어떠합니까? 그 마음에서 나오는 모든 것들이 마태복음 15:19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마음에서 나오는 것은 악한 생각과 살인과 간음과 음란과 도적질과 거짓 증거와 훼방이니” 이 말씀은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음식을 먹는다고 바리새인들이 비방 할 때에 이 말씀을 하신 것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을 따라서 손을 씻고 음식을 먹지 않는다고 비방 할 때에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은 사람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 비방 받을 만 하지요!
우리도 서로 좋은 것이 좋다고 좋은 말만 하면 비방을 받지 않을 것입니다. 어떤 분이 제가 설교하면 목사님이 우리의 속을 들여다보는 것과 같다고 합니다. 저는 전혀 그런 은사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속을 모릅니다. 다만 성경의 말씀을 증거 함으로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성령께서 여러분의 마음을 말씀의 예리한 검으로 수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셔서 하나님의 말씀이 벌거벗은 듯이 우리의 실상을 드러내어야 합니다.
그때 어떤 탄식이 나오는 것입니까? 오호라 곤고한 자로다 이 사망의 법에서 어찌할꼬? 그때의 복음은 이것입니다. 그러나 감사할 것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도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범에서 해방하였도다! 이것이 감사와 찬송의 제목이 됩니다. 이 찬송이 여러분의 삶에서 나오고 있습니까? 아니 이 예배시간이라도 나오고 있습니까? 오 주여 종을 놓아주시기 감사합니다.
세상에서 살고자 발버둥 친 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모습입니다. 예수님을 알고 믿는 것 외에 더 나은 소망이 없습니다. 이런 고백을 꼭 다 늙어서 죽기 직전에만 해야 할 고백입니까? 여러분을 묶고 있는 것들이 무엇입니까? 세상의 염려들입니까? 자녀? 사업? 결혼? 입학? 이런 것을 해결하여 준다는 곳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절에도 이런 문제 해결한다고 하고 길에서 사주보는 사람들도 해결한다고 하고 심지어 교회에서 얼마나 많이 이런 문제를 해결하여 준다고 합니까?
그러나 정말 예수님을 만나면 시므온의 찬송이 나옵니다. 주여 이제야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는군요! 감사합니다. 이 고백은 죽기 직전의 고백이 아니라 젊은 청년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고백이 참된 자유를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만 계신다면 나는 됩니다. 이 고백이 바울의 고백입니다. 이 몸을 떠나 하루라고 빨리 가고 싶지만 그러나 주님께서 맡기신 복음 때문에 산다고 합니다.
이제 한 사람의 이야기만 보고 말씀을 맺고자 합니다. 36-39절입니다. 아셀 지파의 안나라는 여 선지자입니다. 이 사람의 운명도 기구합니다. 결혼하여 7년 만에 남편이 죽고 과부로 84년을 지냈습니다. 과부 된지 84년 결혼 7년 더하면 91세입니다. 결혼을 몇 세에 하였겠습니까? 우리나라도 조혼을 하면 16살 때도 하였지요! 15살에 결혼하였다고 하여도 106세입니다.
과부되어 무엇을 하였습니까? 주야로 성전을 떠나지 않고 금심하고 기도함으로 주님을 섬겼습니다. 마침 아기 예수를 보고서 시므온처럼 하나님께 감사를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의 구속을 바라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 아기에 대하여 말한 것입니다. 연세 드신 분들이라고 할일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는 것이 주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 하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다 이 주님을 만나기를 소원합니다. 참으로 주의 성령께서 감동하여 주셔서 우리에게도 이런 고백, 주여 종을 평안히 놓아주시니 감사합니다. 또한 안나처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감사하고 증거 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