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一日不作 一日不食 누구나 다알고 있는 백장청규에 나오는 글입니다.
스님이 이렇게 말했다고 호미나 들고 밭이나 간다면 止없는 觀이요
定없는 慧요, 사마타 없는 비파사나요, 달마의 理入없는 四行입니다.
달마스님이 말하길 "만약 무위법을 닦으려거던 먼저 자기의 본성을
본 후에 대상에 대하여 일어나는 마음을 쉬어야 하느니라. / 혈맥논
이것이 달마의 理入四行입니다.
하긴 작금에도 밭갈고 빗자루질 하다가 五濁惡世를 정화 하겠다고
사회운동 하는 분도 계지만 세상은 한번도 탁했던 적이 없으니
생각하는 그 마음에 죄가 따를뿐 입니다.
세존께서 "착한 일도 하지마라" 하시니까
제자가 "그러면 악한 일을 하라는 말입니까?"
세존 " 착한 일도 하지 말랬거늘 하물며 악한일이랴~"
중도를 현실로 비유해서 설하신겁니다.
마음이 일어나는 때가 죄가 생기는 때이니
五濁은 마음에 있을뿐 마음 밖에는 五濁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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善은 惡을 바탕으로 존재하고 惡은 善을 바탕으로 존재하기에
善을 추구하는 자는 善을 위해 惡을 行하고도 명분을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합리화 시키기에 뉘우치기가 어렵지만
惡을 惡인줄 알고 行한 자는 반드시 뉘우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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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때 세존께서 바라문 사제의 집앞에서 바루를 들고 서 계셨는데
사제가 말하길 "사문이여 나는 밭을 갈고 씨를 뿌린 후 밥을 먹습니다.
그러나 당신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리십시요." 한마디로 비웃는 거지요.
그러자 세존께서 " 바라문이여 나도 밭을 갈고 씨를 뿌린후에 먹습니다.
사제가 말하길 " 그러나 나는 당신이 밭 가는 것을 보지 못했고
호미나 작대기같은 연장을 본 일이 없습니다. 설명해 보시요."
그러자 세존께서 말씀하시길 " 믿음은 종자요, 고행은 비요, 지혜는
나의 멍에요, 부끄러움은 괭이 자루요, 작대기는 의지입니다.
다른건 이해가 쉽기에 略하고 부끄러움이란 양심에 거리낌 없는가?
戒를 말하는 겁니다.
세존께서 계정혜 三學을 닦아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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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쌍수 수행의 근본이라 너무 많이 들었지만 戒가 앞에 있습니다
경험으로 미루어봐도 戒 없는 定慧는 닦아지는게 아닙니다.
왜그런가 양심이라는 마음에 걸림이 장애를 하기에 절대로 안됩니다.
순수함이 근본인데 순수함은 계로 부터 시작합니다.
戒는 자신을 당당하게 하고 나아가 大自然 앞에 당당하게 만들어 줍니다.
(지난 경험을 말할때 자세히 설명하겠습니다)
작금에 불교는 물론 기독교 천주교등 모든 종교인들의 행이 언론에
비쳐지는 모습을 보면서..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저를 찾아온 사람에게 제일 먼저 하는 말
"그대가 가장 즐겨하는 오락이나 취미가 무엇인가? 묻고 끊을수 있는가?"
술, 담배, 가무(歌舞) 바둑 장기 나아가 스포츠도 승부가 있는 것은 모두
포함하여 그중에서 가장 즐겨 하는 것을 끊을 수 있겠는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 낼수 있는 작대기 같은 의지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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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길 상근기 하근기로 구분 하는데 근기에는 차별이 없고
믿음과 의지가 근기를 결정하니 깨치려면 먼저 자신을 돌아보고
습관(習慣) 우리말로 버르장머리를 고친 후 선지식을 찾아야 합니다.
모든 것에는 때가 있으니 때를 기다리라 했다고 감나무 밑에 누워
감 떨어지기 기다리지 마십시요.
自作自受라 했듯이 선지식은 믿음에 의한 계행의 비례로 다가옵니다.
저의 경우를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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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절을 다녔던 기간은 6년뿐 이지만 짧은 기간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2000년 8월 첫째주 해인사 하계수련에서 계를 받은 후 이듬해 9월 부터
수련회에 동참을 하면서 지역에서 다닐 사찰을 생각하다가 십여년전
친구가 세상을 떠났을때 천도재를 했던 절이 생각나 그곳을 택했습니다.
초막같은 암자는 아미타불을 주불로 염불수행하는 관음암이였습니다.
당시는 노스님이 계셨는데 다시 갔을때는 입적하셨고 상좌스님께서
주지로 계셨습니다. 그렇게 해서 매월 법회 참석을 하게 되었는데
암자 규모에 비해 신도들이 무척 많았습니다.
대부분 노스님때 부터 30년 이상된 신도들로 법당은 열서너평 남짓이라
법회때마다 법당 미닫이 문을 열고 마당 전체를 비닐로 깔고 앉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예불 직전 주지스님께서 저를 찾으시더니 스님 옆자리에
좌복을 깔아놓고 여기 앉으라 하시는데 초짜 신도로 눈치도 보이는데다
재가자는 어간에 앉지 못하는 걸로 배웠기에 많이 당황스러웠습니다.
저보다 네살 많은 스님은 상좌도 없으시고 혼자 예불하기가 힘드셔서
그랬는지 어쨌던 스님의 염불이 끊어지면 제가 받고 호흡을 맞췄습니다.
그리고 초가을 법회가 끝나고 스님께서 할말이 있다며 공양후 기다리라
하시기에 기다렸는데 스님께서 방으로 들어오라 하시더니 하시는 말씀
" 저와 함께 있자' 하시는데 아는 것도 없고 당황도 됐고, 거절했습니다.
두달에 걸쳐 부탁 하시는데 승낙을 안하면 절을 그만 다녀야 하겠고
고심 끝에 세번째 물으실때 어쩔수 없이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제가 "그러겠습니다" 하는 순간 놀랐습니다.
스님께서 벌떡 일어나시더니 "오늘부터 도반입니다" 하시며 도반의 예를
갖추신다 며 절을 하시는데 순간 저도 벌떡 일어나 삼배로 맞절을 했습니다.
당시 팔십만원이며 부전스님을 얼마던지 구할 수가 있는데 그보다
많은 보수를 주시며 절 살림을 모두 저에게 맞기겠다고 하시기 까지,,ㅎㅎ
작은 암자지만 정기 법회가 아닐때도 항상 열분 이상 참석을 했습니다.
삼일째 되던 날 예불시간이 되었는데도 스님이 나오시지 않는겁니다.
미닫이 문이 열리며 " 볼일이 있어 나가니 거사가 예불 올리시요." 하고
나가시는데 이런 황당한 일이, 목탁을 치기는 커녕 만져본 적도 없는데..
어쩔수 없이 마이크를 켜고 스님의 목탁 잡고 치면서 시작을 했습니다.
그런데 막히지가 않는겁니다. 그렇게 시작된 예불은 정기 법회 외에는
저녁예불까지 대부분 혼자 하게 되었지요. 조계종 사찰에서 유발거사가
스님은 당시 암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새법당을 지으시고 계셨는데 거의
완성단계였고 규모는 대웅전이 백여평이 넘는데다가 요사체는 삼층으로
절이름도 암에서 사로 바뀠고 이듬해 음력 2월 점안법회는 천축사
무문관과 대자암 무문관으로 유명하신 정영스님께서 노구에 건강도
안좋으셨는데 집전하셨고 스님은 그이듬해 입적하셨습니다.
이대목을 왜 길게 소개한 이유는 평범한 재가자로서 스님들도 경험하기
힘든 경험들을 많이 했기 때문입니다. 당시 소임이 지객(知客)이였기에
각처에서 오시는 스님들이 머물 곳을 안내하고 접대를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 스님의 법납이 40여년이 넘으셨기에 유명하신 스님들이 많았습니다.
제주 원ㅇ선원 ㅇ효스님을 비롯하여, 달ㅇ선원장스님, 카나다에 선원을
내신 분까지, 멀리서 오시다보니 하루 이틀 머무시며 저녁에도 그랬지만
새벽이면 산책길을 동행 하면서 많은 대화를 나눴습니다.
한번은 ㅇ효스님께서 제게 묻기를 " 거사님은 무슨 수행을 하시오?"
제가 답하길 "저는 눈감고 자는 시간 외에는 항상 부처님을 생각합니다."
잠시 말 없이 바라 보시더니 " 대단 하십니다." 뭔가 한 말씀 기다렸지만..
찾아 다녀도 만나기 어려운 분들을 제가 있는곳으로 찾아 오셨다는 것은
돌아보면 우연을 가장한 필연입니다. 저를 인도해주신 성오스님까지도..
그렇게 십여일 가량 손님(스님)들이 오고 가고 하시는 가운데 어느 날
안국선원 지도법사로 계시던 스님이 부산지원에 지도하러 일주일에 두번?
가신다며 가는길에 오셨고 그후 두 세번 들렸는데 그때 마다 제가 역까지
전송했습니다.
마지막 헤어질때 바랑속에서 책한권을 꺼내 주시는데 수불스님 저서
[황금빛 봉황이] 말뜻은 이해가 되지만 그러한 견처는 알수가 없고..
밤을 새워 두세번 읽었는데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 제가 본 글 중에서
가장 정확히 집어준 것 같았습니다.
모든 것은 때에 맞춰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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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6월 30일 그절을 나왔습니다.
절집 생활 7~8개월 소개한 것 외에도 많은 경험을 했습니다.
6얼 30일 절을 나온 후 하던 대로 좌선을 겸한 백팔배를 이어가며
여름 휴가때마다 절에가서 쉬고 싶다는 범정거사 역시 동문입니다.
이분과 십만배 했다는 거사와 셋이 사찰순례또는 절에서 몇일씩
머물곤 했었는데 첫해는 부석사에서 일박을 하면서 그곳에서 만난
초면의 거사가 각화사 서암? 고우스님을 찾아가 보라고 권하며
각화사 주지스님에게 연락을 해줬습니다.
미리 연락을 받은 주지스님은 저희들을 기다리고 계셨고 고우스님은
출타중이시라며 사시예불까지 다른 스님에게 미루시고 차담을 했고,
이듬해에는 갑사에 삼박사일.. 갑사에 문선명이 머물다가 깨쳤다는
통일교신도들에게 聖地인 누각이 있다는걸 아는 분이 드물겁니다.
통일교 신도들이 자주 찾는다며
주지스님 말씀 " 거기서 주무시면 한소식 할지 모릅니다. 허~허~"
그렇게 삼년, 6월30일 절집에서 나오고 7월 셋째주 범정거사가 경영하는
병원 휴가기간을 이용하여 또 다시 나서자고 할때 이렇게 말했습니다.
" 이번에는 조용한 사찰에 가서 삼일동안 숨구멍만 쳐다보고 싶네."
그리고 찾은 절이 계족산(鷄足山) 비래사(飛來寺) 였습니다.
마곡사 말사로 미쳐 주지발령이 나지 않아 임시로 와 계신 스님이
십만배한 거사와 친분이 있어서 그곳을 택하게 돼었습니다.
대웅전옆으로 조그마한 요사체는 주지스님 방과 종무소 간판을 단
방까지 합쳐 두칸, 아래층은 공양간과 공양주 방 하나.
2006년 7월 21일 금요일 오후 세시경 빗줄기가 굵어질 무렵 절에
도착했습니다. 임시주지로 오신 진표스님이 맞아 주시며 당신 방을
내주시며 이곳에 머물라고 하는데 사양을 했지만 어쩔수 없이 스님 방에
여장을 풀고 저녁예불을 마치고 저녁 공양을 하던중 전화를 받으시더니
식사를 중단하시고 "큰스님 마중가신다" 며 나가셨습니다.
빗줄기는 더욱 거칠어 계곡물이 넘칠듯 했고, 얼마전 까지 날자를 몰랐는데
봉정암 가는 길이 산사태로 끊어지고 인제군 일대의 팬션과 가옥이 산사태로
쓸려나가던 때라 지금도 인터넷에 기사가 있기에 날자를 알게 됐습니다.
저희는 저녁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갔고 7시 경 방문을 두두리고
진표스님이 두분의 스님을 모시고 방으로 들어오셨습니다.
진표스님이 큰스님이라며 인사를 드리라 하여 삼배를 하려하니 가운데
앉아계신 스님께서 한번만 하시라 하셨고, 그렇게 상견례가 끝나고
진표스님이 '거사지만 공부를 열심히 하시는 분이라' 고 소개를 하자
스님은 다짜고짜 " 공부가 뭐요?, 무슨 공부를 어떻게 하십니까?."
우리는 아무말도 못하고 있을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묻기를 " 허공은 아시요?." 역시 눈만 껌벅.. 껌벅..
잠시 침묵 하시더니 " 허공이 그대 몸 이라는 것은 이해 하시요?."
작은 방안에 스님 세분과 거사 셋, 쥐죽은 듯 조용했습니다.
스님이 다시 묻기를 " 허공과 하나로 연결 된 것은 아시요?."
그때 저도 모르게 손가락을 들어 코구멍을 가르켰습니다.
[사실 훗날 스님이 말해줘서 알게 되었지, 저는 그때 제가 코구멍을
가르킨 것도 몰랐고 스님의 질문에 무의식적인 행동을 했었나 봅니다.
그랬기에 더 의심을 했던 것 같습니다]
卽, 한생각 나기전에 즉답을 했던 거였는데 정작 제 자신은 몰랐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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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이 놀라는 눈빛으로 "어? 거사가 어찌 알았을까? 훌륭하십니다."
이러 저런 몇마디 하시고 불과 30여분도 못되어 떠나시면서
" 밝혀 보시오?, 아무튼 훌륭하십니다."
스님이 떠나고 난 후
"도대체 무엇을 알았다는 것이며? 무엇을 보고 훌륭하다고 하셨는가?"
도무지 알수는 없고 ' 무슨 말인가?'
한마디로 스님이 건넨 말귀를 못알아 들었다는 뜻이지요.
" 도대체 무슨 말인가?." 이 생각이 머리속을 떠나지 않고 맴돌며
금요일 밤을 지나 토요일 아침 눈을 떴는데도 역시 그 생각이
떠나지를 않는겁니다. " 뭘까?.. 무슨 말인가?.."
[이때 나는 지금 의정에 들었다고 생각한다면 거짓말입니다]
[疑情은 생각으로 모릅니다, 선정도 의정(擬定)도 조작(造作)을 배격합니다]
[오매일여 숙면일여도 글자 풀이요, 지난후에나 알수 있지 당시는 모릅니다]
그리고 일요일 오후 각자 헤어져 집으로 돌아왔는데도 의문은
풀리지 않고 점점 더 깊어만 가더군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7시경
아침 식사를 마치고 물을 마신후 컵을 식탁위에 내려놓는데 컵이
유리탁자에 탁! 하고 부딛는 소리와 동시에 찰라간에 무중력같은
진공속으로 쑥 들어갔습니다.
(어록에는 '도둑이 빈방에 들어간 듯 하다' 고 했지요.)
'앗!~ ' 이게 뭐지???
몸은 가볍고 마음은 虛淸(맑고 텅빔)하여 마치 날아 갈 듯 한데
전혀 뭐가 뭔지 감을 잡을수가 없더군요.
제방으로 들어와 책을 들쳤습니다. 이게 뭔지 찾아 보려고.. 그런데
그동안 까막눈으로 짐작만 했던 글자의 뜻이 한눈에 들어오는 겁니다.
' 아~ 이거로구나' 말로 설명할수 없는 ' 一千聖人도 모른다' 는...
다 식어버린 쟂더미 속에서 불꽃이 튀어 오르듯..
지혜의 눈이 열린겁니다. 공을 체득하면 게송이 쓰고 싶고,
無心을 알았다는 자만심 때문인지 말이 많아지게 됩니다.
그러나 누구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바로 일어나 과일을 사들고
비래사 대웅전 부처님께 삼배를 올리며 " 감사합니다."
진표스님이 웬일이냐고 하시는데 그분과는 말이 통하지 않을듯 하여
" 부처님 뵈러 왔습니다." 스님방에서 차를 마시며 스님의 이런 저런
이야기를 건성으로 듣다가 나왔습니다.
그리고도 어쩔줄 몰라 다음날 대자행보살과 함께 또다시 찾아가려고
전화를 걸었더니 본사에서 주지발령 받은 스님이 오전 중 오신다며
지금 떠나는 중이니 오지 말라 하시더군요.
나는 분명 眞空을 체득했는데.. 텅빈 空의 여운은 아직 그대로인데..
이소식을 뉘에게 전할꼬가 아니라, 누구에게 물어야 알아 들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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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20여일 후 오후 2시경 십만배 했다는 거사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저의 연락처를 모르기에 진표스님이 거사를 통해서 연락을 했던 겁니다.
" 진표스님과 성오스님이 경주를 출발해서 저를 만나러 오시는 중이라고.."
훗날 스님 말씀, 경주 모 사찰에 잠시 머물고 있을때 진표스님이 찾아와
법문을 듣고 싶다고 해서 이틀간 함께 머무셨다는데 그날 점심공양 중
진표스님이 지나는 말로 "비래사에 왔던 거사가 이틀 후 찾아왔었다" 고
하더 랍니다. 그말을 듣는 즉시 저를 만나러 출발하셨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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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날 곳이 조용해야 겠기에 유성호텔 커피숍에서 오후 6시에 만나도록
연락해 달라 전하고, 정각 6시에 커피숍에 들어가니 먼저와 기다리고
계시더군요. 성오스님 좌우로 전과 동일하게 진표스님 정관스님(타종단).
들어서자 마자 세분의 스님들 앞으로 다가가 앉지도 않고 우뚝 선체로
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르키며 큰소리로
"스님! 육조 혜능은 앉은 적이 없는데 왜들 쭈구려 앉아있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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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초 그때가 하안거때라 일갈을 했던겁니다.
두스님은 눈이 휘둥그레지고 성오스님은 빙긋이 웃으시며
" 내 그럴 줄 알았소." 그리고 하시는 말씀 좀 더 일찍 만났어야 하는데..
전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무슨 뚱단지 같은 말인가? 나는 공을 체득했는데..'
훗 날 성오스님 말씀 하시길 비래사를 떠나면서 진표에게
" 거사가 이삼일 안으로 찾아올지 모르니 오면 연락하라"고 했답니다.
그리고 하시는 말씀 "소식은 인정하겠는데 눈을 떠야 합니다.
소식은 기억으로만 남은 간밤 꿈에 떡 맛본 것과 같은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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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부정했습니다.
眞空 나는 경에서 말하는 空을 몸으로 체득했는데 무엇이 더 필요한가?
스님께서 묻기를 " 지금 무엇을 보시요? 말해 보시요?."
갑자기 생각을 굴리며 "무엇을 볼게 또 있다는 말인가?." 대답이 막혔지요.
즉답을 못하면 '일념즉 무량겁'이라 했듯이 생각을 일으키면 이미 철리 만리
무량겁으로 멀어집니다.
그리고 그날 이후 거의 매일 같이 만나며 탁마를 시작했습니다.
그럴때 마다 가끔씩 혼자말처럼 " 바로 만났어야 하는데, 진표가 샘을 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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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마디 한마디가 뼈에 사무치며 빨리 만나지 못했다는 한탄과 함께
" 도대체 무엇이 또 있는가?" "무엇을 보아야 한다는 말인가?"
금강경에 '약이 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라 했는데..'
10월 중순
늘 그런 생각에 쌓여있던중 갑자기 마치 눈꺼풀이 벗겨지는 듯한 느낌이 들면서
눈앞이 밝아 지는데 장님이 눈을 뜬듯,,
또는 백내장 환자가 개안 수술을 받고 사물이 환하게 보인다고 하는 말 처럼..
맑다고 해도 부족하고 밝다고 해도 부족한 [투명하고 깨끗한 광휘(光輝)]가
시야의 한계까지 끝없이 '만리 하늘에 티끌 한 점 없다' 는 말이 떠올랐습니다.
전 이때 이 광경을 보면서 놀랐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삼십 여년전 이와 똑같은 현상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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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를 받고 절을 다닌지 불과 6년이 채 못되지만, 1980년대 중반 무렵
수행이 뭔지 염불이 뭔지 아무것도 모르던때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을
산천을 다니면서 사람이 있으면 속으로, 없으면 소리내고 다니다가 새로운
무덤이 있으면 좌로 세바퀴 돌면서 마무아미타불을 했습니다.
누구에게 배운적 없고 들어본적도 없는데 왜 그런 행동을 했는가?
지금 돌아봐도 이해가 되지 않지만...
누구나 삶에 고통이 있듯이 恨이 없이 떠나는 사람이 드물테고 저 역시도
괴로움 속에 산속을 떠돌고 있는데 살아가는 동안 얼마나 힘들었을까를
생각하며 좋은곳으로 가시라는 마음에서 했었던 것 같지만,
돌아보면 망자를 통해 내 마음을 달래고자 했던 행위였다고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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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중에 절에 다니면서 염불하는 것을 보니 관음염불, 아마타, 따로 하던데,
경험으로 보아 집중과 기한없는 염불이 문제지 편한 대로 하면 됩니다.
경험에 의하면 수행을 시간을 정해놓고 하면 공덕이 적어질듯 합니다.
때론 지루할때도 있을테고, 끝나기를 기다리는 마음이 들기도 할테고,
수행을 마치 숙제하듯 한다면 안되겠지요.
쉬는 입에 염불이라고 생각없이 입이 저절로 열려야 합니다.
지금은 해인지 편집실이 따로 있어서 책자로 나오지만 1982년경 처음 발간
할때는 강원스님들이 8절지 두장을 반으로 접어 8면으로 펴내다가 1985년
3월 정식 월간지로 등록후 통권38호 부터 책자로 출판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저를 여기까지 인도한 책으로 소중하게 보관하고 있지만...
어느해 해인편집실에서 부족한 자료를 구할때 부족분을 보낸 적이 있듯이
오래전 부터 불교의 깨달음에 대하여 매우 궁굼해 했고 궁리를 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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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십여년 전
깊은 산 계곡 폭포아래에서 목욕을 하고 물밖으로 나오는 순간 제 몸에서
광채가 퍼져 나오면서 계곡은 물론 하늘까지 온 천지가 형언 할 수 없는
光明의 빛으로 뒤덮히는 장관을 보고 '내가 도대체 무엇을 보는 것일까?'
그것도 잠시도 아니고 제가 계곡을 빠져 나올때까지 계속 산과 하늘을
바라 보면서 나왔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옛 노인들 말에'사람에게는 인광(人光)이 있어서 호랑이가 피한다' 던 말이
떠올라 '이런게 인광인가?' 생각했지만 너무나 신기했고 광명을 보는 마음이
황홀해서 남들에게 말하면 미쳤다고 할까봐 말하지 않았지만 너무 신기해서
집사람에게 말하고 다음날 집사람과 함께 폭포를 갔습니다.
폭포 물속에 들어갔다 나오며 물어봤습니다. " 보여?,, 빛 나는 거,,? "
한마디로 "웃기시네,," 였습니다. 30대 젊은시절이라 가능했던 일이지요.
그에 대한 의문은 2007년 우학스님이 역한 달마어록에서 발견했습니다.
1) 꿈에 광명(光明)이 햇빛보다 밝게 나타나는 것을 보게되면 남아 있는 습이
한꺼번에 없어지고 법계의 성품이 나타나리라. 만약 이런 일이 있으면
부처의 씨앗이 되리니 혼자서만 알고 남에게 말하지 말지어다.
2) 또는 생시에 고요한 숲속을 거닐거나 머물거나 앉거나 누웠을때
크고 작은 광명(光明)이 보이더라도 남에게 말하지 말지어다.
3) 혹 어두운 밤중에 행주좌와 또는 일상적 행동 중에 대낮 같은 광명이
보이더라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지어다. 모두 자신의 마음이 밝아지는 것이니라
4) 혹 꿈에 별이나 달이 분명하게 보이면 자신의 온갖 연이 쉬려는 것이니
역시 남에게 말하지 말지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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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험을 근거로 하나를 더 보탭니다.
5) 염불이나 기도중에 이해할수 없는 눈물이 흘러 내리면 습기가 녹는 것이니
아무에게도 말하지 마라
눈물은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너무 기쁠때, 등 분명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전혀 이해가 되지 않는 눈물은 자신도 모르는 내면 의식의 참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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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이곳 시민선방에서 밤을 새울때 였습니다.
모두 사면의 벽을 향해 돌아 앉았는데 저는 서쪽으로 계룡산을 향해 앉았지요.
자정이 지날 무렵 갑자기 사방의 벽이 사라지면서 마치 실물을 보듯이 계룡산
능선 위로 하늘에 별들이 찬란하게 빛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달마 어록을 보기전 이였기에 금강경 사구게가 귀에 박히도록 외고 있었기에
말할수 없었지요, 아마 말했다면 환이라고 하거나 신들렸다고 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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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어갑니다.
10월 중 하순 그런 경험을 하고 마음이 마치 푸른 창공처럼 항상 명료해지며
공체득때 일어났던 아상이 사라지더군요. 진공 체득때가 가장 문제입니다.
사실 검증 받겠다는 생각보다 부디쳐 보고 싶다는 생각이 먼저입니다.
'그대가 진실로 공을 체득했는가?' 마치 나혼자 깨친 듯 한 착각(만용)에서..
그래서 하게 되고 서로 비난도 하게 되는데 왜 그런 현상이 벌어지는가?
장님들끼리 말싸움하기 때문입니다. 눈뜬 조사가 드물다는 반증이지요.
제가 이곳에 혜월스님 만공스님 거량하시는 글을 써놓았듯이,,
사실 깨쳤다는 분들은 법담을 해야지 거량하는게 아닙니다.
즉설로 '성품을 보았는가? 法眼이 열렸다면 보는 것을 말해보라"
"나는 창밖에 반송을 보고 있는데, 그대도 보는가?" 물으면
" 탁자에 차가 식어가니 차먼저 드시지요?" 한다면 좋으련만..
장군 하면 멍군 해야 合이 맞는데 둘다 장군을 외치니 부디칠수 밖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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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탈 열반은 이러한 과정에서 이루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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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 칙각지, 삼십칠,조도법, 십바라밀 등 부처님 이런 것 하지 않았습니다.
經은 기본형으로 같은 법문이라도 이런 경우에는 이렇게 저런 경우에는 저렇게
달리 했습니다.
네란자라 강에서 기어나와 우유죽 드시고 보리수나무 밑에 기대 앉습니다.
그동안 수행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아셨지만 어떻게 해야 올바른 방법인지
싯달타 본인 자신도 모릅니다. 알았다면 벌써 방식을 달리 했을게 아닙니까?
여러분께 묻습니다.
저나 여러분이나 시행착오를 발견하면 어떻게 할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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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모두 내버릴까요? 천만에요 누구던지 처음부터 되집어 보게 됩니다.
문제가 어디에 있는가? 지나온 과정을 검토하며 기억을 더듬어 봅니다.
지난 육년간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생각이 끊어 질리가 없지요,
이것은 지극한 과학이요 인간 심리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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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치기 전에는 싯달타도 그 당시 사유(思惟)의 중요성을 몰랐습니다.
문제점을 찾으려고 밤을 세워가며 생각하다 보니 나중에 깨닳고 난후
그것이 사유인줄 알게 됩니다.
실에 꿴 구슬처럼 생각이 끊어지지 않게 처음부터 생각을 풀어 갑니다.
한생각 일어나면 처음과, 중간과, 끝이, 좋을때까지 인연과를 총체적으로
살핀 후, 다시 다른 생각을 일으켜 역시 그와 같은 결과를 도출해 냅니다.
싯달타 자신도 모르게.. 훗날 조사가 '한생각이 만년가도록 하라는 것처럼'
사유는 옳고 그른 것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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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떠한 사유일지라도 그에 합당한 원인을 찾으면 因果를 보는겁니다.
고로 因果를 확실하게 사유했다면 더 이상 따라 붇을 因이 없게됩니다.
因果를 사유함으로 마음속 티끌을 완전하게 멸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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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가 말한 보원행 수연행 무소구행 칭법행이 이에 해당할겁니다.
당시 싯달타는 이미 깊은 선정을 체득했었기에 전처럼 선정에 들지 않고
고요한 마음으로 사유를 했던겁니다. 경에는 '순일한 마음' 이라 했습니다.
사유가 잘된 이유는 목욕으로 나른해진데다가 우유죽으로 식곤증까지..
보통사람 같으면 잠에 골아 떨어 졌겠지만 요가와 선정으로 다져진
싯달타는 다르지요. 요즘말로 고도의 리렉스상태가 되어야 합니다.
'여섯 매듭을 풀어라' 했듯이 六根을 풀어놓은 상태로 사유를 했겠지요
밤새도록 검증이라는 명목으로 사유를 하던 중 날이 밝아옵니다.
문득 고개를 들고 보니 서쪽 하늘로 새벽별이 빛나고 있습니다.
안광(眼光)이 새벽 별 빛(光)에 부디치는 순간 대폭팔이 일어납니다.
빛의 충돌 (眼光과 별 빛(光)의 충돌)은 소멸과 탄생을 보여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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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했던 완전한 소멸과 새롭게 드러나는 만물(대상)
마치 땅속에서 솟아 오른듯 각각의 형상마다 빛으로 감쌓여진 모습..
" 아~ 모두가 이렇게 왔구나!.. 如來여~ 如來여!.."
눈뜬 조사가 두번째 경계를 보고 " 마치 달을 유리병속에 담은듯 하다." 하니
그후 부터 한소식으로 지혜가 열린 선사들도 지해풀이로 조작을 합니다.
"경계가 어떠십니까?" 물으니 " 유리 항아리 속이다." "안밖이 밝다" 등.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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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명은 천년전에 비해 상상할수 없이 발달했기에 비유하기도 예전과 달리
매우 쉬워졌습니다. 고로 자신의 견처도 이해하기 쉬운 말로 해야 합니다.
4년전 西緣이 말하길
'문득 창밖을 보니 나무들이 마치 코팅 한 것처럼 빛나고 있기에 이게 뭔가?
그것도 한겨울이라 나뭇 잎도 없는데 그런 현상이 한동안 지속했다고 합니다.
이와같이 현실에 맞게 이해하기 쉬운 말이 얼마던지 있건만 천년전 그대로
'유리 항아리 속이다' 이러니 믿을수도 없고 흉내가 아닌가 의심되는 겁니다.
서연(西緣)이 空이 밝아진 두번째 경계를 본 것입니다. 대자행보살 역시..
내친 김에 대상에 물들지 않는 것을 이해하기 쉽게 설명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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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번째 경계에 들면
신문이던 책이던 어떤 대상을 볼때 마치 스캔(scan)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데
이는 마치 是非없는 無念인 상태로 대상을 관하고 있는 자신을 알수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을 옛 사람들은 '보는 놈을 되본다' 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즘 현실에 맞게 표현할수 있는 방법이 얼마던지 있는데 옛 글자를
그대로 인용하기에 사실 그런 경계를 보는지? 믿을수가 없다는 겁니다.
심우도로 말하면 반본환원(返本還元)에 해당할 겁니다.
주관과 객관의 구별이 없는 상태에세 비쳐지는 그대로의 대상(자연)을 꿰뚫어
보는 지혜에 해당할 겁니다.
마지막 경계에 들면 안밖의 경계가 사라집니다.
"살갓이 없는데 경계를 어디서 찾겠는가 안밖이 없다."
중생과 부처의 경계가 사라졌다면 당연히 속세로 들어와 중생과
함께 동고동락하면서 근기에 따라 약처방하듯 중생제도를 해야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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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두타파 하면 끝인 줄 착각하는 조사들이 불종을 끊었습니다
검증은 自問自答이니 자신의 말에 책임을 질수 있어야 합니다.
화두타파는 초선에 해당하는데 허접한 게송으로 속이려 하지 말고
누구던지 말과 글을 쓸때 이렇게 할수 없다면 혀를 놀리면 안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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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글과 내말에 거짓이 있다면 글쓰는 손가락이 오그라 들 것이요,
말하는 혀는 굳어지고 마왕의 칼날 앞에 심장이놀라 멈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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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의 충돌! 빛의 충돌이 물질을 만든다. 현대 물리학이 여기까지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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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돌의 순간 물질의 입자를 부여하고 사라진다는 힉스의 정체는 미리 존재하지도 않고
전부터 존재하지도 않고, 현재에도 존재하지 않고 오직 충돌 순간에만 존재한다고 합니다.
다만 과학은 보이는 것(물질의 생성)까지는 밝힐수 있을지 몰라도 충돌 이전의
원인 인 無의 실체는 영원히 밝힐 수 없을 겁니다.
無無明 亦無 無明盡
無明이 因이라 하나 無明도 아니고, 無明이 다함도 아니니 이것은 늙고 죽는 것이
아닌 常寂光이라 항상 고요한 가운데 비추고 있기에 부디치면 드러난다.
싯달타가 깨친후 이말을 누가 믿을 것이며 누가 알아 들을 것인가?.
' 슬프고 고독함에 이대로 入滅하고 싶다.' 필히 과치는 과정입니다.
범천의 권청에 법문을 시작하는데
초선은 가르치기 쉽습니다. 누구던지 다가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들으면
바로 깨칠수가 있습니다. 그다음이 문제지요.
思惟 하라고 해도 부족하고 어떻게 해야 生住離滅이 끊어지지 않게 해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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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로 사념처를 말하고, 어떤때는 안반수의관을 가르치고, 어떤 때는 백골관을
즉 한생각이 일어나면 완벽하게 그생각이 끝날때까지 정신차리고 이어가라
" 깨어 있어라! " 삼매라 하지요. 어떤 현상이던 언떤 생각이던 상관 없이..
무의식(無心 空)이 그대를 윤회의 글레속으로 이끌고 있으니
생주이멸(生死)에 끌려 다니지 말고 생주이멸(생사)을 통찰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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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물은 중도실상으로 공의 조화니 중도 라는 생각까지 벗어나야 합니다.
왜냐 하면 空 無常 無我는 윤회요, 변하지 않는 常 不空 我는 열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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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으로 증명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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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썹 아래는 화관(華冠)에 감쌓여진 만물의 실상을 눈으로 보고 (見)
눈썹 위 백호(미간)은 극미(極微)로 느껴지는 파동(波動)의 동일함을 감지하고.(知)
[그래서 해탈지견(解脫知見)이라 한다.]
정수리는 허공을 향해 활짝 열려 불가측 불가측량이라 그 누구도 알수 없는 寂滅의 寂靜處라
과학에 전혀 문외한이 과학을 빌려 설명하지요
양자역학에서 빛은 입자이면서 파동이라고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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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이 허공에 가득차 있다 해도 부디칠 대상이 없으면 빛은 볼수도 알수도 없고
작용도 할수가 없습니다.
마치 밤 하늘에 부디칠 대상(별)이 없으면 빛을 인식 할 수 없듯이..
빛 자체에는 에너지도 없습니다. 부디쳐야 충돌에 의한 에너지가 발생합니다.
(지수화풍의 생성과 소멸이 이러한 과정속에 있습니다)
요즘은 2500년 전에 비해서 설명하기가 너무나 쉽습니다.
얼마전 까지만 해도 백만화소를 말하더니 요즘은 '천만화소'시대가 되었습니다.
천만화소란 천만개의 점으로 물질의 형상을 실물처럼 나타낼 수가 있다는 거지요,
그러나 실제의 모습은 빛의 입자에 의하여 생멸하기에 천문학적 숫자가 될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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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고 빛(光)만 있다고 생명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고 조건이 따라야 합니다.
연기는 조건이 성취입니다. 조건의 성취를 위해서 무수한 조건들을 나열한 것이
화엄세계요 그런 현상을 세밀하게 설한 것이 화엄경입니다.
왜 깨치면 생사가 없다고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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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은 입자라 극미한 간극이라도 있지만 진공에는 간극이 없습니다.
따라서 빛에는 생사가 있지만 空은 간극이 없기에 생사가 없습니다.
잠시 다른 이야기를 한번 집고 넘어가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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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로' 티벳사자의서'에 파드마 삼바바는 바르도 50단계를 거치면서 영혼이
자기 업의 빛을 따라 간다고 했습니다. 일부 일리는 있지만 그런 신비주의는
불법을 외곡시킵니다.
현재 세밀하게 분류하는 방법으로 바코드라는 인식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業은 어떤 바코드가 작용할까요? 經에도 물질을 色이라 했듯이 빛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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地水火風에서 눈에 보이는 것은 흙의 성분이기에 色(빛)을 물질이라고 합니다.
고로 영가(귀신)는 물론 어떠한 신들도 色(물질)으로 나타낼 수가 없습니다.
따라서 물질(흙)도 공하거늘 하물며 물질도 아닌 것이랴.. 역부여시라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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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과학이 '나노'를 말하고 1나노m를 10억분의 일 이라고 하지만 빛 만큼
세밀하게 분류할수 있는 방법은 과학이 아무리 발달해도 불가능 할 겁니다.
왜냐하면 빛을 입자로 분류할 수 있는 기술은 불가 할테니까요.
1976년 부산 용당동 소재 목재와 합판으로 유명했던 동명산업을 가본 적이
있었습니다. 사업을 확장하는 과정에서 도료(페인트)공장을 신설했는데
마침 그분야 전문가인 지인과 동행을 하게 되었는데 그때 알았습니다.
컴퓨터로 동일양을 희석해도 동일한 빛깔은 절대로 만들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시간, 온도, 습도, 자연은 동일한 조건을 두번 다시 형성하지 않습니다.
법성게 '불수자성 수연성'을 인용하지 않더라도 과보는 조건의 형성이고
조건은 연(緣)에 해당합니다. 그러므로 똑같은 因이라 해도 緣(조건)에
따라서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는 것은 지극한 자연현상입니다. 고로 緣은
연결과 부디침(만남)을 뜻하기에 좋은 스승, 좋은 벗을 강조하는 겁니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2500년 전에는 인체에서 가장 많은 것을 설명할 수 있는 방법은 모공입니다.
그래서 숫자를 모공(毛孔)에 비유해서 설하셨습니다.
태란습화 모든 중생들이 동일한 빛의 입자와 동일한 파동으로 생멸하고 있건만
수용(파동)은 똑같은데 業에 따라 색깔을 달리하며 고유파동을 만들어 냅니다.
중생은 각기의 업으로 생성된 고집체를 보기에 자아를 주장 하는게 당연합니다.
고로 중생은 자기 입장(현실)에서 지극히 옳은 말과 행동을 하는 겁니다.
그래서 완성된 세계라고 하는 겁니다.
스스로 자기 업(스타일)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는 전혀 손댈 곳이 없습니다.
당연히 자기 업(스타일)대로 수레바퀴처럼 굴러갈 수 밖에 없겠지요.
고로 중도를 가르킬때 是非, 有無, 단상 양변을 떠나라고 하고, 깨친자는
중생과 더불어 살되 '같게 살지도 않고 다르게 살지도 않는다' 하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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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래는 동일한 빛(光)과 동일한 파동을 봅니다.
고집체 이전에는 차별이 없기에 나와 대상이 한몸과 같습니다.
중생은 生成 후의 고집체를 보고 여래는 生成 前 경계 없는 모양을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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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三身 四智'를 복잡하게 논하지 마라 위글에 모두 들어 있지 않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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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신은 눈썹아래 드러나는 만물의 모습(實相)이요
보신은 수용신이라 경계없이 생성되는 것을 감지하는 常寂光의 파동이요
법신은 여러분의 정수리가 수미정상입니다. 앞에서 常寂光이라고 했듯이
寂(고요할 적) 靜(고요할 정)으로 고요가 겹쳐 大寂光이라고 합니다.
三身感知가 涅槃自覺입니다. 경에는 涅槃妙心이라 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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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미정상에서 사천하를 백호광으로 비춰보니 모두가 여래 아님이 없으니
내몸이 여래요, 사생육도가 여래의 화신이니 중생이 아프면 내가 아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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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어갑니다.
2006년 10월 중 하순 티끌한 점 없는 맑고 밝은 하늘을 30여년 전에 보고
또 다시 보았지만, 화엄경을 펼쳐 놓고 보니 전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못본 것을 보았다고 말하지 말고, 모르는 것을 안다고 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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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이야기를 중단하고 설명하겠습니다.
요즘 화엄경을 설법하는 스님들을 보게 됩니다.
화엄세계는 글자 풀어 짐작하는 세계가 아니요 이해의 대상도 아닙니다.
화엄세계 라고 말하는 순간 화엄세계는 그곳에 없습니다.
왜? 빛의 속도로 투영되며 변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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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엄세계는 찰라 찰라 내몸을 조사(照射)하는 빛의 작용(파동)으로 수천 수만의
모공(毛孔)에서, 각각의 작용으로, 각각의 형상을 만들어 내고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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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륜청정을 설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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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淨한 빛의 조사(照射)가 보시의 淸淨이요,
빛을 수용(受用)하는 것이 받음의 淸淨이요.
빛에 의하여 물들지 않는 가운데 형성 되는
몸이 淸淨이니 淸淨을 몸 밖에서 구하지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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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이어갑니다.
大光明으로 法眼은 열렸는데 화엄세계는 알수가 없었습니다.
물론 글자로는 이해가 되지만 실체(本體)가 보이지도 않고 알수도 없는 겁니다.
참생명이라는 무량광(아미타불)을 보았다고 할까요..
스님께서 당시 말씀하시길
눈을 뜰수도 없는 엄청난 光明에 땅바닥에 엎드려 "고맙습니다. 석가모니 부처님!"
하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는데,, 스님의 경계가 여기까지 였기에
그후 제가 본 물질의 경계에 대하여는 지금까지도 말을 하지 않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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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진하는 과정에서 반야경은 중생들이 이해를 못하기에 방편과 비유로 설 했지만
내용은 픽션이 아니라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기에 생각으로 맞추려 하지 않았습니다.
어찌해야 할 바도 모르겠고,, 어떻게 정진 해야 할지도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도 머리속에는 한생각이 떠오르면 그생각이 완벽하게 끝날때 까지
시작과 과정 마무리까지 전과정에 의심이 없을때까지 소화가 되도록 사유를 했습니다.
깨달음은 이론 물리학과학의 원리와 너무도 똑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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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가설을 세우고 가설에 입각해서 수없는 생각(실험)을 통해서 생각을 수정하여
합당한 결과를 도출해 내는 겁니다.
예를 들면,
경전을 보다가 의문점이 생기면 부처님이 왜 이렇게 말씀을 하셨는가? 를 사유해야 합니다.
저는 6년전 절에 처음 다니기 시작할때 반야심경을 접하는 순간부터 '조견오온개공' 이라고
한꺼번에 뭉뚱거려 설하신 후 곧바로 색과 수상행식으로 나누어 설하셨는가? 생각했습니다.
그결과 마음은 몸을 바탕으로 생겨났기에 몸이 사라지면 마음은 당연히 사라지는 것.
그렇다면
色(몸)은 무엇인가? 지수화풍을 생각하며 그것은 어떻게 생겨났는가?를 생각했습니다.
당시 그것이 인연과를 사유하는 것 인 줄 전혀 몰랐습니다.
그저 의문이 일어나면 왜 그런가? 로 시작하여 아 그렇구나! 할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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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스님과 만남은 그대로 였지만 저의 머리 속은 스님의 말과 상관없이
떠오르는 생각에 의문이 풀릴때까지 자동으로 돌아 가고 있었지요.
그렇게 한해가 지나고 2007년 7월20일 토요일 오전 11시 55분 도시 공원 벤취에
홀로 앉아.. 이것은 집중이 아닙니다. 한가 하지도 않고 집중도 아닌 몸과 마음을
풀어트린 상태라고 보면 됩니다.
한생각이 마무리 될 무렵 문득 고개를 들고 눈앞에 비쳐지는 사물을 보는 순간
산, 나무, 사람 건물등 일체 대상이 대폭팔, 대화염속으로 완벽하게 소멸 된 후
곧바로 새롭게 드러나는데..
" 아~! 지금 내눈에 비쳐지는 대상(사물)들이 어찌 이렇게도 나와 똑같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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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충 설명하지요.
암흑의 바다라고 하지만 암흑이 아니요 보여주면 보고 들려주면 듣는
성품의 바다입니다. 부디치지 않으면 아무 것도 모릅니다.
마치
바닷물이 바위에 부디치며 포말(거품)을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부수기도 하듯이
쉬지 않고 生滅作用을 하면서 변해가고 있기에 空 가운데 만법을 포용하고 있습니다.
제망찰해(帝網刹海)란 물샐틈 없는 그물(無漏法)을 말하며 인드라망을 뜻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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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방삼세 제망찰해 상주일체 석가모니불에서 제망찰해라 햇다고 싯달타가
윤회의 그물에 걸렸다는 뜻이 아니고 상주일체(常住一切) 그물같은 바다에서
항상 중생과 하나 되어 함께 하며 천백억화신으로 나툰다는 뜻입니다.
'일중일체 다중일 일즉일체 다즉일'
물에서 불이 나오고, 불에서 흙이 생하니 세가지 조건이 緣을 만나면 조건의 성취로
생명이 생겨나면서 바람의 작용으로 호흡을 하게 되기에 四大 六身으로 화현합니다.
누구던지 이해할수 있게 설명하지요.
땅에 씨를 심으면 싹이 트기에 알맞는 물과 적당한 온도 적당한 공기가 필요합니다.
그씨가 싹이 터서 나무로 자라날때 물을 빨아 들이면, 물이 햇빛(光)에 부디치는 순간
결합작용에 의하여 온갖 색깔로 나타나 비로서 눈에 보여지는 흙의 성분으로 변합니다.
허공에 빈틈없이 가득한 水氣는 천변 만화라 불가측입니다.
고로 연이 닿으면(수기의 압이 한계점에 이르면 폭팔에 의해 흙이 생겨나는데
이러한 작용은 지금도 모든 중생의 살갓(피부) 끗에서 벌어지고 있습니다.
고로 草觀,, 나를 보려거던 풀끗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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色과 光이 다른이유
光은 肉眼, 慧眼으로는 볼수가 없습니다. 여래의 佛眼에만 보여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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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재하는 무엇이던 물질은 색깔이 있고 물질이 아닌 것은 색깔이 없습니다.
색깔이 있는 것은 흙의 성분이기에 肉眼은 고집체의 색깔을 보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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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말하길
사람의 몸을 말할때 '四大 六身'이라고 합니다. 四大는 그렇고 六身은 무엇인가?
六身을 사전에서 보니 두팔과 두다리에 머리 몸통 이렇게 여섯가지라고 했는데
그것은 몸을 고기덩어리처럼 여섯토막의 잘라 놓은 것이지 그렇게 말하려면
고기 육(肉)을 써서 육신(肉身)고 해야 됩니다.
자기를 바로 보려면 마땅히
사대에 갖춰진 여섯가지 감각기관을 六身으로 보아야 실체를 발견할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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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있어 대상을 보는가?
대상이 있어 눈이 보는가?
만일
대상이 없다면 무엇을 눈이라 할 것인가?
귀가 있어 소리를 듣는가?
소리가 있어 귀가 듣는가?
만일 소리가 없다면 무엇을 귀라고 할 것인가?
냄새가 있어서 코가 맏는가?
코가 있어서 냄새를 맏는가?
만일 냄새가 없다면 무엇을 코라고 할 것인가?.
고로
일체가 대상에 있으니 三界(삼라만상)가 곧 나의 六根 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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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9월 5일 草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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