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자 언어, 적자 언어
영국의 소설가 다니엘 디포의 『로빈슨 크루소』를 읽다 보면 흥미로운 장면이 나온다. 무인도에 표류한 로빈슨은 절망에 빠져 울부짖기만 하지 않았다. 그는 상인답게 자신의 처지를 마치 장부를 정리하듯 기록했다. 오늘날의 복식부기처럼 손실과 이익을 나누어 적었다.
"나는 난파당했다." 이것은 적자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죽었는데 나 혼자 살아남았다." 이것은 흑자다.
"나는 무인도에 갇혔다." 적자다.
"그러나 마실 물이 있고 먹을 열매도 있다." 흑자다.
그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적자를 적자라고 기록했다. 동시에 흑자도 놓치지 않았다. 절망만 바라보지 않고 감사할 이유를 함께 발견했던 것이다. 어쩌면 그가 무인도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힘은 도구나 기술보다도 이러한 언어의 태도에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는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말을 하며 살아간다. 글을 쓰는 사람은 더욱 그렇다. 그런데 모든 언어가 같은 가치를 지니는 것은 아니다. 별문제 없는 상황에서도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는 언어가 있다. 반대로 절망적인 현실 속에서도 희망을 노래하는 언어가 있다. 같은 현실을 두고도 어떤 언어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이 달라진다.
성경도 마찬가지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죄악과 멸망을 가감 없이 선포했다. 그것은 적자 언어였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심판 이후의 회복을 말했고, 포로 생활 이후의 귀환을 약속했으며, 마침내 십자가를 통한 구원의 복음을 선포했다. 성경은 인간의 죄라는 적자를 직시하면서도 하나님의 은혜라는 더 큰 흑자를 보여 준다.
그런데 우리의 언어 습관을 돌아보면 이상한 점이 있다. 미래에 대해서는 막연한 희망을 품으면서도 현재를 말할 때는 적자 언어를 남발한다. 가진 것보다 없는 것을 더 크게 말하고, 받은 은혜보다 부족한 것을 더 자주 이야기한다. 작은 손실은 확대하고, 큰 축복은 당연하게 여긴다. 마치 스스로 절망의 늪을 파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것과 같다.
독일 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는 "언어는 존재의 집"이라고 말했다.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는 단순한 표현 수단이 아니라 우리 존재가 머무는 집과 같다. 적자 언어 속에 살면 마음도 적자가 되고, 흑자 언어 속에 살면 영혼도 풍성해진다.
물론 흑자 언어가 현실을 외면하는 낙관주의는 아니다. 적자를 숨기지 않되, 그 가운데 남아 있는 은혜를 발견하는 것이다. 눈물 속에서도 감사의 제목을 찾고, 실패 속에서도 배움을 발견하며, 상실 속에서도 하나님의 손길을 신뢰하는 것이다.
오늘 나의 언어 장부에는 무엇이 더 많이 기록되어 있는가? 불평과 원망의 적자 언어인가, 감사와 소망의 흑자 언어인가. 인생의 수지를 결정하는 것은 환경이 아니라 언어일지 모른다. 그러므로 의도적으로라도 흑자 언어를 선택하자. 감사의 말을 자주 하고, 축복의 말을 아끼지 말자. 희망을 말하는 사람은 결국 희망의 삶을 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