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최강의 구르카 용병
용맹한 민족, 구르카족
1814년 세계 최강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대영제국이 네팔을 침공한다.
당시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라고 불릴 정도로 방대한 해외 식민지를 확보하며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다.
영국군은 약소국 네팔 정도는 손쉽게 정복하리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치 못한 복병에 발목이 잡혔다.
↑영국군을 공포에 떨게 한 구르카 용사
최신 무기로 무장한 1만 5천 명의 영국군에게 막대한
인명피해를 준 복병은 네팔의 구르카 Gurkha 용사였다.
오래전부터 네팔 중서부의 험준한 산악지대에서 살아온 구르카족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용맹한 민족이다.
구르카족은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히말라야산맥을 뒷동산처럼
휘젓고 다니기 때문에 어떤 민족보다 강인한 체력을 갖고 있다.
↑구르카족이 사용하는 단검 '쿠크리'
구르카족이 중무장한 영국군을 상대할 때 사용한 무기는
단 하나, 쿠크리Khukri라고 불리는 단검이었다.
영국군은 총과 대포를 앞세우고도 단검을 들고 덤비는 구르카 용사에게
밀리자 더 많은 군대를 동원해 전쟁에서 간신히 승리를 거두었다.
영국군이 네팔을 정복한 후 구르카족을 용병으로 고용하면서
구르카 용병의 역사가 시작된다.
영국군은 전쟁터마다 구르카 용병을 파병해 큰 전과를 얻었다.
“비겁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을 선택하겠다.”
라는 신념을 가진 구르카 용병은 전장에서 물러나거나
적군에게 포로로 잡히는 법이 없다.
↑1857년 영국에 소속된 구르카 용병
제1차 세계대전 중 영국군과 함께 유럽 전선에 투입된
구르카 용병은 독일군의 포격으로 큰 피해를 당했다.
전장에는 독일군 포격으로 크게 다친 영국군 부상자가
넘쳐났지만 영국군 누구도 빗발치는 포탄이 두려워
길바닥에 쓰러져 있는 동료를 구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이때 구르카 용병 하나가 참호에서 뛰쳐나와 포탄이 쏟아지는
와중에도 쓰러져 있는 영국군을 어깨에 짊어지고 참호로 돌아왔다.
구르카 용병은 다친 영국군을 전부 참호로
데려올 때까지 목숨을 건 임무를 반복했다.
이런 모습은 아군인 영국군뿐만 아니라 적군인
독일군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다.
공을 세운 용병은 영국 국왕으로부터 최고의 무공 훈장을 받았다.
↑거칠 것이 없던 구르카 용병
1982년 아르헨티나가 영국령이던 포클랜드를 차지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면서 이른바 ‘포틀랜드 전쟁’이 벌어졌다.
포틀랜드는 위치상 영국보다 아르헨티나와 훨씬 가까워,
전쟁 초기에는 아르헨티나군이 승기를 잡았다.
포틀랜드를 지키던 소수의 영국군은 아르헨티나군에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영국군은 전세를 뒤집기 위해 아르헨티나로 증원군을 파견했습니다.
여기에는 구르카 용병도 포함되어 있었다.
아르헨티나군은 세계 최강의 구르카 용병이 몰려온다고 하자
지레 겁을 먹고 진지를 이탈해 도주하기 바빴다.
도주하다가 구르카 용병에 포로로 잡힌 아르헨티나군은
목숨만을 살려달라고 애원했다.
구루카 용병에게는 항복하거나 저항하지 않는 적군을 절대로 죽이지
않는다는 신조가 있었기에 아르헨티나 포로들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았다.
이처럼 구르카 용병이 사지를 마다하지 않고 영국을
위해 싸우자 영국 정부는 감사의 뜻으로 런던의 영국
국방성 건물 앞에 구르카 용병을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
동상에는
“용감한 자 중에서 가장 용감한 자, 가장 믿을 수 있는 친구,
우리에게 너희처럼 좋은 친구는 없다.”
라는 구르카 용병을 칭송하는 글귀를 새겼다.
↑구르카 용병을 기리는 영국 국방부 앞 동상.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
오늘날에도 구르카 용병이 되는 것은 네팔 젊은이의 꿈이다.
네팔은 히말라야 고산지대에 위치해 관광산업
이외에는 별다른 일자리가 없다.
인구도 많아 청년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대학을 졸업해도 제대로 된 일자리를 잡을 수 없는 네팔 젊은이에게
구르카 용병이 되는 것은 가난에서 벗어나는 유일한 탈출구나 다름없다.
구르카 용병이 되어 영국군에 편입되면 영국군과 같은 연봉을 받는다.
이는 네팔 평균임금의 50배가 넘는다.
영국군에 의무 복무 기간인 15년을 마치면 평생
군인연금을 받아 안락한 노후를 보장받는다
또한, 자동으로 영국 영주권을 획득해 원하면 영국에서 살 수도 있다.
구르카 용병은 복무 기간 동안 악착같이 돈을 모아 네팔의 부유층이
모여 사는 곳에 멋진 저택을 마련하며 상가도 사들여 월세까지 받는다.
즉, 네팔에서 구르카 용병이 된다는 것은 상류층으로
단번에 오를 수 있는 사다리를 타는 것과 다름없다.
신체검사를 거쳐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 예비 구르카 용병
영국군은 매년 200명 남짓한 구르카 용병을 선발한다.
여기에는 2만 명이 넘는 네팔 젊은이가
지원해 경쟁률이 최소 100대 1을 넘는다.
네팔에는 대학진학 대신 용병이 되려는 청년을
위한 학원이 성업 중아다.
지원자가 비싼 학비를 내고 학원까지 다녀야 하는
이유는 시험 자체가 어렵기 때문이다.
시험은 필기시험과 체력테스트로 나뉘며 필기시험은
네팔의 대학 입시보다 수준이 높다.
필기시험은 영어는 물론 수학,
상식 등 여러 과목을 치르며 공부를 못하는 사람은
체력이 아무리 좋아도 용병이 될 수 없다.
은퇴한 구르카 용병은 탄탄한 재력을 무기 삼아 자식도
용병으로 만드는 일에 열정을 쏟는다.
용병 시험에는 당연히 학비를 감당할 수
있는 부유층 자제가 유리하다.
지원자는 필기시험에 합격하면 까다로운 신체검사와
함께 강도 높은 체력테스트를 받아야 한다.
여러 가지 체력테스트 중 당락을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시험은 25kg의 모래를 바구니에
담아 짊어지고 산길 6km를 뛰어 올라가는 것이다.
걷기도 힘든 가파른 길을 25kg이나 되는 모래주머니를
짊어지고 뛰는 일은 엄청난 체력과 대단한 인내를 요구한다.
6km의 거리를 48분 안에 주파해야 하는데
이 과정에서 탈락자가 속출한다.
↑모래주머니를 들고뛰는 구르카 용병 지원자
시험에 최종적으로 합격하면 정식 군사교육을
받기 위해 영국으로 떠난다.
이들은 영국에서 3년간의 극한 훈련을 받은 후에야 정식으로
세계 최강의 구르카 용병이 된다
훈련 기간에 가족과 만남도 금지되기 때문에 입대한
지 3년이 지나야 가족과 재회할 수 있다.
구르카 신병은 영국 여왕에게 충성을 맹세한 후 세계
분쟁지역에 파견되어 생사를 넘나드는 전투에 나선다.
↑신입 구르카 용병을 사열하는 엘리자베스 여왕
구르카 용병은 세계에서 사나이 중의 사나이로 칭송받지만
다른 관점에서 보면 네팔의 슬픈 자화상이기도 하다.
자국 내에 변변한 일자리가 없어 똑똑하고 건강한 청년들이
다른 나라의 용병으로 가야만 하는 현실이
좋은 일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구르카 용병이 본국으로 보내는 돈이 네팔 경제에
적지 않은 도움이 되기 때문에 네팔 정부는 영국군이
구르카 용병제도를 계속 유지해 주길 바란다.
정부도 가족도 먹고살기 위해 군대 권하는 사회가
200여 년 동안 네팔의 변치 않는 모습이다.
세계 최강' 구르카 용병
구르카(Gurkha)는 네팔 중서부
산악지대에 사는 몽골계 소수 부족이다.
1814년 영국군 침공에 맞서 끝까지 저항한 전사의 후예이기도 하다.
당시 최신 무기를 동원한 영국군은 ‘쿠크리(khukri)’
라는 구부러진 단검으로 대적한 이들의 용맹에 혀를 내둘렀다.
전쟁이 끝난 뒤 그 전투력을 높이 사 용병으로 고용했다.
구르카족은 이후 영국 용병으로 세계 곳곳의 전장을 누비며
‘백병전 일인자’로 이름을 떨쳤다.
전투력이 워낙 강한 데다 고산지대 출신이어서
폐활량 등 신체 조건도 뛰어났다.
그래서 고대 그리스, 중세 스위스, 근세 독일 용병에 이어
현대의 최강 용병대로 평가받고 있다.
이들이 세계적으로 이름을 날린 것은 2차 세계대전 때다.
혼자서 일본군 10명을 무찌르며 벙커 두 개를 탈환하거나,
오른손을 잃은 상태에서 왼손으로 방아쇠를 당기며
200명의 적을 막아낸 일화가 유명하다.
1982년 포틀랜드 전쟁 때는 “구르카 부대가 온다”
는 소문만 듣고 아르헨티나군이 도망칠 정도였다.
구르카 용병은 첨단 장비 외에 200여 년 전 자신들의
용맹을 알렸던 쿠크리를 반드시 지니고 다닌다.
군복무를 마치고 귀향하던 구르카족이 기차 안에서 맞닥뜨린
떼강도 40명을 쿠크리 하나로 평정한 얘기가 자주 거론된다.
구르카 용병은 영국만 아니라 인도에도 있다.
싱가포르에서는 경찰로 활약하고 있다.
영국의 구르카 용병은 약 3000명으로 육군 전투병의 10%에 해당한다.
한 해 뽑는 인원은 200명. 급여는 영국군과 비슷하다.
2015년 기준 일병이 연 1만 8000파운드(약 2600만 원)로,
제대 후 네팔에서 상류층으로 지낼 수 있는 금액이다.
지원경쟁률은 50~100 대 1에 이른다.
지역 예선에서 기본 체력 테스트를 거쳐 2~3 배수를 뽑고
모병소에서 최종 인원을 선발한다.
체력 테스트의 하이라이트는 ‘도코(전통 바구니) 레이스’
다.
25㎏의 돌을 채운 도코를 머리에 매달고 가파른 산길
6㎞를 30분대에 주파해야 합격권에 든다.
싱가포르 경찰은 영국군 선발에서 떨어진 차순위자들을
주로 뽑는다. 선발 인원은 연간 300명 안팎이다.
국제전략연구소(IISS)에 따르면 싱가포르 경찰 병력의
15%인 1800여 명이 구르카족이다.
이들이 오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미·북 정상회담의
경호·보안 작전에 대거 투입된다고 한다.
구르카 용병은 한국과도 인연이 있다.
6·25 때 참전해 지평리전투 등에서 맹위를 떨쳤다.
정전협정 후 유엔사령부 소속으로 용산에 남은 병력도 있다.
엄청나게 매운 빨간 고추를 소스로 넣은 카레라이스를
주식(主食)으로 삼는 이들의 모습은
“작은 고추가 맵다”
는 속담을 떠올리게 한다.
한편으로는 가난한 조국을 위한 ‘젊은 피’의
몸부림이 애잔하기도 하다.
단검 하나로 40명 때려잡은 전설의 구르카 용병 정체
오늘의 주인공 '비슈누 쉬레스타'는 1975년 네팔에서
태어나 제8구르카 보병대 7대대 소속으로 이라크,
아프가니스탄전을 포함해 기밀이 해제되지 않는 한 알 수
없는 몇 군데에서 복무한 경력이 있는 전사였다.
▼단순히 일반 병사였다고 생각하실 수 있지만 좀 더 부연하면
이라크 전쟁과 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모두 참전해 활약하고 거기서
살아남아 은퇴하는 고도로 숙련된 베테랑 중의 베테랑 아다.
▼즉,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장 경험과 전투 경험을 모두
갖추었을 뿐만 아니라 퇴역 당시 35세라는 나이로
육체적 완숙기에 이른 군인이었다.
여기에 구르카족의 숙련된 전투 능력이 더해졌으니 가히
세계 최고의 전투병력이라 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절대 잊지 못할 사건이 벌어지고 만다.
바야흐로 2010년 9월 2일, 상병 계급으로 막 퇴역한
비슈누는 열차를 타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밤이 되도록 달렸던 열차가 정글 인근 지역을 지나갈 무렵
40여 명의 무장강도가 침입해 승객들의 금품을 빼앗기 시작한다.
비슈누 본인도 이들에게 지갑을 건네줬고 큰일을
만들 생각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이 강도들은 부모가 보는 앞에서 18세 소녀를 겁탈하려
들고 소녀가 '살려달라'라고 외치자 그는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었다.
참을 수 없었던 것이다.
비슈누는 쿠크리를 뽑아 들고 강도 두목을 덮쳐 '슬리퍼
홀드'로 제압해 인간방패로 삼게 된다.
그리고 장검을 들고 있던 강도 한 명을 쿠크리로 베어 넘긴다.
다른 강도가 소녀를 인질 삼아 칼로 찌르려 하자 비슈누는
단숨에 두목의 목을 베어버리게 된다.
20여 분의 시간이 흘렀을 무렵 이미 3명의
강도가 목숨을 잃었고 비슈누는 열차 통로를 따라
이동하며 여덟 명의 강도에게 중경상을 입히게 된다.
두목을 잃고 비슈누에게 겁을 먹은 나머지
강도들은 모두 줄행랑을 치고 말았다.
그들과 싸우는 과정에서 비슈누 또한 몸이 온전치는 못했다.
왼팔에 자상을 입었고 많이 지쳐있었다.
전문가들은 10명이든 40명이든 열차 통로로 들어오면
일렬 상태가 되어 병력이 분산되는데 비슈누가 상대할
적은 1~2명으로 제한이 된다는 것이다.
또한 뒤에 있는 강도들은 앞에 있는 자신들의 동료
때문에 총을 쉽게 쓸 수 없어 이와 같은 전투가 가능했다고 평한다.
사건이 알려지자 구르카 여단은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퇴역을 일시적으로 보류하고 부대로 불러들여 표창을 하게 된다.
당시 비슈누는 은도금 쿠크리와 5만 루피를 포상으로 수여받게 된다.
또한 비슈누 덕분에 목숨을 구한 소녀의 부모는 그에게
6천5백 달러를 보답하려 했으나 받지 않고 조용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된다.
그 후 '비슈누 쉬레스타'는 인도의 영웅이 되어
지금까지도 살아있는 전설로 불리고 있다.
그는 사건 직후 이런 말을 남겼다.
"적과 싸운 것은 군인으로서의 의무였고, 열차 강도와
싸운 것은 인간으로서의 의무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