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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불거토피아 원문보기 글쓴이: 피날레
비전의 사람
본문 : 행19 : 8 - 22
본서 29장18절을 통해서 묵시가 없으면 백성이 행한다고 경고하셨습니다.
여기에서 묵시라고 하는 말이 비전입니다. 방자히 행한다고 하는 히브리 원어의 뜻은 신중함이나
자제력을 상실한 경거망동을 뜻합니다.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경거망동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의미합니다.
위대한 비전을 가진 시인이다라고 하면 위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있는 시인이다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비전을 가진 사람의 시선은 오늘을 뛰어넘어서 언제나 먼 곳으로 향해 있습니다. 먼 곳에 시선이 머물러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시선이 맞닿아있는 거기에 자기 자신을 부단하게 맞추기 위해서 애쓰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흔히들 장래성이 있는 사람을 가리켜서 저 사람 비전이 있다 이렇게 말을 합니다. 바로 그 사람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을 가지고 거기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서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까닭에 그에게는 장래성이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비전이 없는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비전이 없다라고 하는 것은 그의 시선이 목전에 머물러 있음을 의미합니다. 눈에 보이는 대로 기분 내키는 대로 감정대로 욕구대로 살아가는 사람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그 삶은 방자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비전이 없으면 목회자든 교인이든 어떤 인간이든 방자해집니다.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비전을 소유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유의하지 않으면 안될 두 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로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꿈, dream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미국 사람들은 비전과 dream을 구별 없이 사용하기도 합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께서 링컨 기념관 앞에서 수없이 많은 흑인들을 모아놓고 “I have a dream!"그 위대한 설교를 하실때의 dream은 비전이라는 뜻입니다.
흑인과 백인이 함께 어우러져 사는 세상을 건설하려는 비전을 소유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할 때 미국인도 ‘꿈 깨라’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그것은 망상입니다. 이처럼 미국 사람들은 비전과 dream을 구별 없이 사용하고 있지만 그러나 영어의 본고장인 영국에서는 비전과 꿈을 분명히 구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영국 수상을 역임했던 옥스폭드 대학 출신으로서 누구보다도 영어의 본질에 밝은 사람으로 알려져 있는 전 대처 수상이 비전과 꿈의 차이를 명쾌하게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반드시 그 비전에 상응하는 행동을 수반하기에 어떤 형태로든지 결과가 초래된다는 의미에서 꿈과 차이가 난다]
비전을 가진 사람은 통찰력을 가진 사람입니다. 그리고 자기 자신을 부단히 맞춰가기 때문에 어떤 형태로든 가시적인 결과가 수반됩니다. 그러나 꿈은 즐기는 것으로 끝납니다. 꿈은 그 꿈에 상응되는 행동을 요구하지 않습니다. 마음껏 누리는 것으로 끝이 나기에 아무런 책임이 있을 수 없습니다. 따라서 즐기기만 하는 꿈이라고 하는 것은 현실도피요 망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용어 중에 American dream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아무도 American vision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American dream이라고 하는 것은 아메리카 대륙이라고 하는 특정한 공간 내에서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꿈을 이야기합니다.
모든 사람이 꿈을 다 이룰 수 있다라고 한다면 American vision이라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American dream입니다. 꿈을 이루는 사람은 극소수요 나머지는 망상에 지나지 않기 때문입니다.
미국이라고 하는 곳은 꿈의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꿈을 실현할 수 있는 나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꿈 때문에 패가망신하는 나라이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 중에서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망상을 좇아서 태평양을 건넜다가 패가망신했습니까?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그러나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합니다.
두 번째로 비전은 Ambition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Ambition은 그 Ambition을 이루기 위해서 구체적인 행동이 수반된다는 의미에서 망상과 구별됩니다.
또 Ambition을 가진 사람들은 오늘에 안주하지 않고 무언가 새로운 목표를 세우고 나아간다는 의미에서 비전과 동일해 보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을 뛰어 넘어서 긍정적인 방향을 향한 자기 개발과 자기 가치입니다. 따라서 비전이라고 하는 것은 이루어지면 이루어질수록 모두에게 유익해집니다. 어떤 경우에도 해가 되지 않습니다.
그러나 Ambition이라고 하는 것은 욕망의 산물입니다. 내가 아무리 높고 먼 곳에 나의 Ambition을 설정했다 할지라도 그 근본은 욕망입니다. 따라서 그 Ambition을 이루어 가는 과정이 결코 참되거나 바를 수가 없습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Ambition은 성취되면 될수록 자기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기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우리가 결코 간과치 말아야 될 사실은 지난 2000년 동안의 교회 역사를 살펴보건대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전과 망상 혹은 야망을 혼동해 왔다는 사실입니다. 아니 그보다 더 심각한 사실은 때때로 교회가 비전을 마치 망상인 것처럼 혹은 야망인 것처럼 부추겼던 사실이 있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몬타누스 이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천년왕국이니 지상왕국이니 피안세계니 하면서 그리스도인들로 하여금 망상을 좇아서 현실을 도피케 했습니까?
얼마나 그 피해가 막심했으면 공산주의자들이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했겠습니까? 마르크스가 종교는 인민의 아편이라고 말할 때의 그 종교는 결코 불교나 힌두교를 의미하지 않았습니다. 기독교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유럽 서구 백인들이 얼마나 비전과 Ambition을 동일시했습니까? 그들은 자신들의 야망을 성취하기 위해서 유럽대륙을 강탈했습니다. 수없이 많은 흑인들을 노예로 부리고 팔았습니다. 중동 땅을 훔쳤습니다.
지난 3월 2일날 회교도들의 최대 절기 중의 하나인 하지가 있었습니다. 아마 우리나라 TV에서도 보도가 된 것으로 압니다. 사우디 아라비아 메카에 모여든 회교도들은 무려 2백만명입니다. 온 세계 회교도들이 다 모였습니다.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한 손으로는 중동 아프리카 대륙을 강탈했던 백인들이 회교도들을 똘똘 뭉치게 해주었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그리스도인이란 그들의 삶의 터전을 빼앗는 폭도들에 불과한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을 지키기 위해서 회교를 중심으로 뭉칠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프리카 대륙을 강탈한 백인들이 한 손에는 성경을 들고 갔지만 오히려 역으로 회교를 선교한 셈이 되었습니다.
미국으로 건너간 백인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아메리카 신대륙 경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의 신 야망 경영에 불과했습니다. 그 땅을 강탈하기 위해서 수없이 많은 인디언들을 죽였습니다.
오늘도 인디언들을 마약 중독자가 되게끔 하는 정책을 펴고 있습니다. 한번이라도 미국을 여행하면서 인디언 집단 수용소를 가본다면
언젠가 반드시 백인에게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을 우리의 눈으로 목격하게 됩니다.
19세기말에 클라크 박사가 사포로에 농업학교를 세웠습니다. 거기에서 일본 청년들을 모아놓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Boys! Be Ambitious" ‘야망을 품어라’ 그 이후에 이 구호가 미국으로 역수입되었습니다.
19세기말에서 20세기초에 이르기까지 대부흥운동이 일어날 그 때에 그 중심에는 항상 Be ambitious입니다.
마치 신앙이 야망인 것 처럼, 야망을 품지 아니하면 신앙이 없는 사람인 것처럼 오인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그 이후에 오늘날 미국사회는 어떤 사회가 되었습니까? 불과 30년 전에 미국의 닉슨 대통령은 거짓말 같은 거짓말도 해보지 못한 채 탄핵 위기에 몰려서 스스로 사임했습니다. 우리의 관점에서 보면 거짓말도 아닙니다.
그로부터 30년이 지난 오늘날은 어떻습니까? 클린턴 현직 대통령은 자신의 집무실에서 딸과 같은 여인을 희롱하고 거짓말했음이 만 천하에 밝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현직 대통령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미국의 도덕은 그만큼 붕괴되었습니다.
미국은 허물어집니다. 대통령이 거짓말을 하고 그 자리를 지키는데 어느 공무원이 정직해지겠습니까? 그 대통령을 보고 크는 어떤 초등학생이 정직하게 살아가겠습니까?
미국을 여행하신 분들은 아실 것입니다. 대도시 밤거리는 걸을 수가 없습니다. 백인들도 걷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흑인들이 무섭기 때문입니다. 소련 붕괴 이후에 미국은 세계 유일의 초강대국입니다.
미국이 갖고 있는 핵무기만으로도 온 세계를 초토화시킬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강력한 무기를 갖고 세계에서 슈퍼 파워를 지니고 있는 미국 대통령의 권력도 자국의 밤거리의 안전을 지키지 못합니다.
그들의 야망으로 인해서 흑인들에게 지었던 죄 값으로 그들은 밤거리를 흑인들에게 빼앗겼습니다.
작년 8월 달에 미국 콜로라도 검찰이 11살 된 소년을 아무런 중간과정 없이 체포해서 형무소에 수감시켰습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라울로라고 하는 11살짜리 아이인데 양부모는 스위스 사람이었고 그 부모가 미국으로 이민가서 라울로는 미국 시민권자로 태어났습니다.
바로 옆집에 있는 할머니가 경찰에 라울로를 고발했습니다. 라울로에게는 5살된 여동생이 있는데 그 여동생을 touch 했다는 죄목으로 고발을 했습니다. touch 했다는 이 동사가 성적인 의미를 지니면 추행이 됩니다.
11살짜리 소년이 5살짜리 여동생을 어떻게 추행했는지 구체적인 설명이 없습니다. 그 할머니의 전화 한 통에 콜로라도 검찰은 즉시로 어린아이를 체포해서 형무소에 넣었습니다. 이것이 유럽 사회에 알려졌습니다.
특히 그 아이의 부모의 나라였던 스위스가 미국에 항의를 했습니다. 국제사면위원회인 MST까지 나서서 콜로라도 법정의 부당성을 지적했습니다. 어린아이를 수감시키려면 소년원으로 보내든지 아니면 정확한 죄목이 있어야 되는데 없다는 것입니다.
마침내 콜로라도 법원은 73일 만에 세계 여론에 굴복해서 이 어린아이에게 면소 판결을 내리고 석방을 시켜주었습니다.
2가지의 조건이 있었습니다. 첫째로 스위스로 추방한다. 두 번째로 스위스에 가서 정신병 의사의 진단을 받아야 한다. 여러분 그 사건이 무엇을 의미합니까? 미국이라고 하는 사회는 할머니 전화 한 통화에 11살짜리 아이를 즉각 체포하지 아니할 수 없도록 청소년 성 문제가 심각한 위기에 처해있는 것입니다.
미국의 정부가 더 이상 청소년의 성범죄를 막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비전을 Ambition과 혼동한 결과입니다.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합니다.
야망을 좇으면 그 인간은 자신과 타인을 해치는 흉기가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비전을 가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문제는 내가 어떻게 비전을 갖는가 하는 것입니다. 내가 자리에 앉아서 비전을 찾으려고 하면 그것은 거의 100% 망상 아니면 Ambition에 지나지 않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그리스도인으로서 비전을 갖습니까?
우리는 중요한 사실을 먼저 인정해야 합니다. 여러분들이 갖고있는 비전, 그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비전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이 땅에 60억 인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또 하나의 생명을 이 땅에 태어나게 하시고 여러분들을 이 자리로 부르셔서, 여러분들을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이 중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여러분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은 야망의 성취일 수 있습니다. 사람을 해치는 것일 수 있습니다. 망상일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는 비전, 그것만이 참다운 비전이요, 그 비전만이 나와 타인을 동시에 살립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나 자신을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그분의 비전을 내가 찾기 위해서는 하나님 그분이 나의 비전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의 비전되시는 것 보다 더 큰 비전은 없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비전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에 요셉의 경우를 예를 들어 말합니다. 요셉은 어릴 때에 꿈을 꾸었습니다. 형제의 곡식단, 형제의 별들 심지어는 해와 달, 아버지 어머니까지 자기에게 절하는 꿈을 꾸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요셉처럼 꿈을 갖자. 요셉은 그 꿈, 비전을 가지고 살았기 때문에 이집트의 국무총리가 되었다. 우리 모두 요셉과 같은 비전의 사람이 되자. 지금은 모르겠습니다만은 몇 해 전까지 우리 총회 유년주일 공과 책에도 그런 식으로 적혀있습니다. 이것이 과연 성경적입니까? 틀렸습니다. 성경은 그렇게 이야기하지 않습니다.
요셉은 분명히 꿈을 꾸었습니다. 그런데 그 꿈을 꾸고 난 뒤에 많은 세월이 흐른 뒤에 자신의 형제들이 국무총리된 자기 앞에 와서 무릎을 꿇고 절을 했습니다. 자 요셉이 애굽으로 팔려가서 13년 종살이, 옥살이를 했죠. 흉년 7년 들었죠. 흉년이 들어서 죽을 때가 되어서 형들이 왔기 때문에 그 꿈을 꾼 지 최소한도 20년이 지났을 때입니다.
창세기 42장9절이 무엇이라고 우리에게 증거해줍니까? “그제서야 비로소 요셉이 어릴 때 꾸었던 꿈을 기억하고..“ 요셉은 절대로 그 꿈을 이전에 기억하지 않았습니다. 요셉은 그 꿈을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던 적이 없습니다.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오. 가나안 부자집에서 아버지의 총애를 받고 혼자 때때옷 입고 살던 요셉이 어느 날 형들의 모함에 팔려서 애굽으로 가서 종살이를 합니다. 거기에서도 또 억울하게 옥살이를 합니다.
만약에 형들이 자기에게 절하는 것 자체를 자신의 비전으로 삼았더라면 어떻게 그 종살이를 감당합니까? 어떻게 옥살이를 합니까?
그 상태를 모면하려고 탈출하려다가 체포되어서 곤역을 치루든지, 아니면 종살이, 옥살이를 이기지 못해서 정신병자로 죽었을 것입니다.
창세기 39장 2절은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 요셉이 보디발의 집에 팔려간 뒤에 하나님께서 요셉과 함께 하심으로 요셉이 형통한자가 되어...“ 무엇을 의미합니까? 요셉은 그 상황 속에서 자신이 꾸었던 꿈을 비전으로 삼았던 것이 아니라, 그 망상이나 야망에 빠졌던 것이 아니라 그 상황 속에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을 때에 그는 옥살이도 이길 수 있었고 종살이도 이길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그가 당시 인류를 기근에서 구해낼 수 있는 하나님의 도구가 될만한 자격을 갖추었을 때에 하나님께서는 요셉을 통해서 당시의 인류를 구원하시려던 당신의 비전을 실현하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 사도행전 19장은 바울 사도가 로마 복음화의 위대한 비전을 갖게되는 순간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도 바울은 처음부터 로마 복음화의 비전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래서 바울과 같은 비전을 갖자고, 비전있는 청년이 되자고 설명을 합니다. 이것도 과연 성경적인 이야기입니까?
다메섹으로 가던 사울이 꼬꾸라졌습니다. 비늘이 벗겨진 것입니다. 이제 주님을 만났습니다. 그 청년 속에 자신이 만난 주님을 전하고픈 자신의 꿈이 솟구쳤습니다. 그 다메섹에서 전했습니다. 예수가 그리스도이다.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밤중에 광주리 줄에 매달려서 도망가야만 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사도들을 만나서 뭔가 새로운 일을 도모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사도들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저 사람 위험한 사람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던 사람입니다. 무슨 흉계를 꾸미려고 하는지 모르니까 만나지 마십시오.
바나바가 신원보증을 하고서야 겨우 사도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자기를 써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라비아 무려 삼년동안 경건 훈련을 스스로 했습니다. 아무도 자기를 불러주지 않았습니다. 다소- 자기 집으로 내려갔습니다. 낙향해서 하루 이틀 지났습니다.
어느 날 안디옥교회의 바나바 목사가 찾아왔습니다.그리고 자신과 함께 공동목회를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그때까지 사울은 안디옥 교회의 목사가 되리라는 것은 생각조차 해본 적이 없습니다. 공동목회를 했습니다. 어느 날 교인들이 우리 선교합시다. 그리고 목사님이신 바나바 목사님, 바울 목사님 두 분이 선교사로 가십시오.
그는 선교사가 될 꿈을 가진 적이 없습니다. 파송되었습니다. 일차 선교여행을 끝냈습니다.
지중해의 반을 돈 셈이지만 당시 배타고 걸어 다니는 교통 수단으로 따지자면 장구한 시간이 흘렀을 것입니다. 그래서 도착한 뒤에 자기네들이 일차 선교여행지에 돌아다녔던 곳이 어떠한지 다시 한번 가 보기로 바나바와 약속을 했습니다.
그런데 느닷없이 바나바와 대판 싸움이 벌어졌습니다. 일차 선교여행을 갈 때 마가를 데리고 갔는데 마가가 중도에서 피곤하다며 되돌아 가버립니다. 바울은 그처럼 무책임한 청년을 또 데리고 갈 수 없다고 얘기했습니다.
바나바는 마가가 자신의 조카이기 때문에 데리고 가야한다고 우겼습니다. 두사람은 대판 싸웠습니다. 헤어졌습니다.
그래서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일차 선교여행지였던 싸이푸러스 섬으로 내려갔습니다. 자신과 싸운 바나바가 싸이푸러스 섬으로 갔기 때문에 바울은 그곳으로 갈 수 없어서 할 수없이 반대방향인 터어키 윗쪽으로 올라갔습니다.
자기가 말씀을 전하고 싶은 곳에서 성령께서 자꾸 막으십니다. 자꾸 빨간 불을 켜신 것입니다. 드로와에 갔다가 환상을 보고 이것이 주님의 뜻이겠거니 판단하여 마게도니야로 갑니다. 그곳에서 자주장사 루디아를 만나 최초의 세례교인이 탄생합니다.
그 이차 선교여행이 끝나고 삼차 여행을 하던 도중에 에베소에서 “아!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당신의 비전이 로마구나” 비로소 깨달았습니다. 그때까지의 세월이 얼마나 소요되었는가, 약 20년이 흘렀을 때였습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 바울이 로마제국 한 나라의 역사를 바꿀만한 하나님의 도구로 성숙해질 때에 하나님은 그를 통해서 로마제국을 새롭게 하려는 당신의 비전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그때까지의 바울의 비전은 무엇이었는가? 하나님이 그의 비전이었습니다. 가라하시면 돌이 날라 오는 곳이라도 가고, 가지 말라는 곳이면 거기에 아무리 안일함이 있다할지라도 가지 않았습니다.
하나님만을 비전으로 삼았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바울이 다메섹에서 주님을 만나는 그 순간부터 로마 복음화라는 비전을 갖고 있었더라면, 그래서 로마로 뛰어 들어갔더라면 그는 결코 우리가 아는 사도 바울이 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을 때에 하나님께서 그를 훈련시키시고,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비전을 친히 이루셨던 것입니다.
비전이 없으면 인간은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합니다. 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칩니다. 우리는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아야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아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드리는 도구가 되기 위해서 우리가 유념해야할 다섯가지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로 하나님의 비전은 삶의 현장에 주어진다고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바울이 절대로 책상 앞에서 나의 비전이 무엇인가 골똘히 생각하다가 로마의 비전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만사를 제쳐놓고 산에 올라가서 금식하면서 산기도하다 비전을 얻은 것이 아닙니다. 이때에도 에베소에서, 두란노 서원에서 밤낮으로 말씀을 가르치고 밤낮으로 병든 자를 치유하는 주님의 도구로 주어진 삶에 충실하다가 자신을 통해서 이루시길 원하시는 하나님의 비전을 그는 받았습니다.
우리의 인생이란 마치 하얀 백지 위에 매일 하루하루를 모자이크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시려는 궁극적인 하나님의 비전이 무엇인가라고 묻지만 지금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주어진 나의 현장에서 매일매일 최선을 다해서 하루하루 색종이를 붙혀갈 때 어느 날 그 글자 보입니다. 바울은 20년만에 자기 인생판에서 로마라는 하나님의 비전의 글을 보았습니다.
여러분 비전은 절대로 삶과 괴리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사는 사람은 누구보다도 지금 자기의 삶의 현장에 충실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현세주의자여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잊지 마십시오. 하나님의 비전은 절대로 허공 속에서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인간을 위한 비전이요, 인간의 삶 속에서의 비전입니다.
그러므로 내게 주어진 삶의 현장, 지금 주어진 나의 삶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그 삶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서는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자일수도 없고 하나님이 이루시길 원하시는 비전을 읽을 수도 없습니다.
두 번째는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들은 오늘은 바로 내일을 위한 예비라는 사실을 인식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해서 이루실 당신의 비전이 있으십니다. 그것이 언젠가는 모르지만 미래라는 의미로서 내일입니다.
그렇다면 그 내일이 내게 당도하기까지 오늘은 반드시 거쳐야할 과정입니다. 그날을 위한 오늘은 예비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내게 주어져 있는 모든 것이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지금 내게 있는 모든 것은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도구들입니다. 여러분의 외모는 하나님께서 친히 여러분을 위해서 만들어 주신 것입니다.
지금 이태리에서 유럽 성악계에 새로운 태양처럼 떠오르는 한국 여성이 한 명 있습니다. 푸치니가 작곡한 나비부인의 주인공입니다.
처음부터 주인공으로 발탁되었습니다. 어느정도로 그 여인이 사람들의 호평을 받는가하면 오스트리아나 독일에서 공연이 있으면 신문에서 ‘이제야 비로소 나비부인을 찾았다’ 이렇게 씁니다.
나비부인은 본래 극 속에서 일본여자 아닙니까? 그리고 유럽 사람들이 오페라를 관람하다가 굉장히 감동을 받으면 물론 일어나서 박수도 치지만 더 감동을 받으면 발로 바닥을 굴립니다. 그분의 공연이 끝나면 관객들이 일어서서 발로 바닥을 구릅니다.
그분이 공연을 하는데 얼마나 관객들이 연극으로 보지 않고 그것을 사실로 받아들이는가 하면 나비부인을 버린 미국 남자역을 한 배우를 분장실로 찾아가 “너 그러면 안돼“라며 항의를 하곤 합니다. 그 정도로 사람에게 감동을 주는 오페라가수가 탄생을 했습니다.
여러분 지금 현재 이태리에만 성악을 하고서 할 일이 없는 한국 사람이 3000명입니다. 유럽 사람들은 얼마나 많겠습니까?
그런데 한 극장에서 주연으로 발탁된다고 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거든요.
이 분이 이태리로 유학을 가서 수년동안을 성악을 공부했습니다. 그리고 내가 아직 빛을 못 보는 것은 내 눈 때문이구나. 쌍꺼풀 수술을 해야되겠다. 그래서 남편을 겨우겨우 설득시켜서 허락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있는 어머니에게 전화를 해서 제일 좋은 병원에 예약을 해줄 것을 부탁을 했습니다.
여러분 쌍꺼풀수술의 세계적인 권위자는 다 한국사람이랍니다. 왜냐하면 백인들은 다 있으니까요.
그래서 서울에서 유명하다는 모 성형외과에 어머니가 예약을 했습니다. 보통 예약을 하면 일년씩 기다리라고 합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빽을 써서 날짜를 받았습니다. 그 여인이 날짜가 예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굉장히 기뻤겠죠.
그런데 그 주일날 자기가 다니는 로마 한인교회에 예배를 드리러 간 것입니다. 목사님 설교내용이 ”왜 주어진 것을 감사 안하느냐? 왜
여자들 쌍꺼풀 수술을 하냐? 쌍꺼풀 수술했다가 나중에 죽어서 하늘나라 갔는데 하나님이 ‘네가 누구냐? 나는 너한테 쌍꺼풀을 안 줬는데 네가 누구냐?’하면 어떻게 하냐?“
여러분 오늘날 목회자를 비롯해서 한국 교인들의 문제가 무엇입니까? 세계 어느 그리스도인들보다 성경 많이 알잖아요? 공부를 많이 하지 않습니까? 그러나 자기에게 적용하지 않는 것입니다. 즐기는 것으로 끝납니다. 그런데 그 여인은 그 설교를 들으면서 이 얘기는 내 문제이구나 나를 향하신 주님의 말씀이구나 적용을 했습니다.
여러분, 그 지성인이 듣기에 그 목사님의 설교가 만약 나쁘게 생각하면 얼마나 유치합니까? 그런데 그 설교를 듣고 자기 문제로 받아들이고 적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서울에 전화를 해서 수술을 안 받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엔 어머니가 화를 냈습니다.
수술을 받지 않았기 때문에 수술을 받기로 약속되어있던 그 날에 열리는 콩쿠르에 참석을 했습니다. 그 콩쿠르에서 대상을 받았습니다.
그 콩쿠르의 현장에 독일의 유명한 극장의 극장장이 앉아 있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비부인으로 발탁이 되었습니다.
조연을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을 가지고 주연을 하려니 얼마나 실수가 많습니까? 사실 부끄러워 극장장에게 물어보았습니다.
”나처럼 서툰 사람을 왜 이렇게 처음부터 주연으로 뽑았느냐?“ 그 극장장 대답이 ”네 눈 때문에..“
본래 나비부인은 일본여인이지만 일본여인의 가창력은 한국 사람에 비해서 떨어진답니다. 그래서 유럽에서 인정을 못 받는답니다.
그뿐만 아니라 일본 여자는 100% 쌍꺼풀 수술을 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일본 여자를 무대 위에 올려놓으면 유럽 관객이 볼 때에 일본 여자로 보이지를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같은 가창력을 가진 사람으로 쌍꺼풀 없는 동양여자를 처음 보았다는 것입니다.
그 이후에 그분은 무대 위에서 나비부인을 노래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노래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지금 여러분에게 주신 외모, 여러분들의 머리색깔, 눈 모양, 얼굴모양으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목회자가 자기 외모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면 사람을 바르게 보지 못합니다. 사람을 바르게 보지 못하면, 눈과 눈이 마주치지 못하면
성령의 역사는 제한됩니다. 목회자가 자기 외모에 대해서 열등감을 가지면 그 열등감은 어느 순간엔가 교인을 해치는 흉기로 드러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로부터 갑절의 영감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엘리야의 겉옷을 쳤을 때에 요단강이 갈라졌습니다.
한 개인을 위하여 요단강이 갈라진 것은 유일합니다. 그 직전에는 엘리야 엘리사 두 사람이었습니다. 그 정도로 영감이 풍부했던 엘리사가 그 직후에 무엇을 했습니까? 자기의 외모를 놀리는 사람들 42명을 저주해서 그 자리에서 죽여버렸습니다.
하나님은 쌍꺼풀 있는 사람을 통해서도, 그의 용모를 통해서도 역사하시지만 하나님은 우리의 외모를 통해서도 역사하십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은 결코 하나님의 실패작이 아닙니다. 그때 우리는 어디서나 당당하게 주님의 증인들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 여러분들에게 어떤 상황이 주어져있습니까? 그 모든 상황이 소중함을 알아야합니다.
그 상황을 거치는 것이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지는 길이라는 사실을 알아야합니다.
우리 나라 천재 국수 중에 이창호라고 있지 않습니까? 한 중 일의 모든 바둑의 새로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만은 그 바둑의 세계에서 이창호 기사 같은 사람이 없다고 그래요.
얼마 전에 모 일간지 기자가 이 이창호 기사의 괴력이 어디에서부터 나오는가 하여 그의 어린 시절부터 죽 현지를 찾아가서 취재해서 발표한 적이 있었습니다. 전주에 있는 이창호 국수가 어릴 때에 태어났던 집을 가니 바로 그 집은 할아버지, 아버지 2대에 걸쳐서 60년 동안 시계 방을 경영하는 집이었습니다.
이창호 어린이는 이 땅에 태어나면서부터 수없이 많은 초침 속에서 살아온 것입니다. 웃는 분들은 이유를 아시죠?
이창호 국수의 강점은 끝내기에 있습니다. 다 진 바둑을 끝내기에 역전시킵니다. 일단 초읽기에 들어가면 모든 기사는 초조해집니다.
페이스를 잃습니다. 이창호 국수는 어머니의 태 속에서부터 듣던 소리이기 때문에 전혀 문제가 없습니다.
여러분 이런 것을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창호 어린이가 어린 소년시절에 주위 친구들로부터 저 시계방 아들이라고 놀림을 받을 수 있었겠지요. 왜 우리 아빠는 회사 사장님이 아니실까? 왜 우리 아빠는 다른 사람들처럼 좀 더 멋진 직업을 갖고 있지 않을까?
왜 60년 동안 똑같은 자리에서 저런 직업을 갖고 있을까? 분명히 괴로웠던 적도 있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에게 주어졌던 상황이 오늘날 그를 만들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요셉을 한번 생각을 해보십시다. 요셉은 부자집 아들로 태어나서 자기 혼자 때때 옷 입는 것으로 만족하던 이기적인 소년 아닙니까?
형들이 일을 하는데에 도와주기는커녕 형들의 허물을 아빠에게 고자질하던 비겁한 아이입니다. 이 아이가 이집트로 팔려가서 종살이를 합니다. 보통 집 종살이가 아니라 이집트 왕의 경호대장인 보디발 경호실장 집에서 종살이를 하게 됩니다.
보디발 장군의 신임을 얻어서 그 집의 모든 살림 재무 일을 다 맡았습니다. 그 집이 어떤 집인가?
창세기를 보면 그 집안에 왕의 죄수들 말하자면 국사범들을 가둔 감옥이 딸린 집입니다. 개인 집이 아니라 감옥이 딸려 있는 관사입니다. 거대한 저택입니다. 거기에 있는 수많은 죄수들을 먹이는 돈까지 모두 살림살이를 요셉이 맡았다고 하면 그 기간동안 요셉은 무슨 훈련을 받은 것입니까? 재무훈련을 받았습니다.
어느 날 억울하게 그 옥은 보디발 장군 집안에 있는 왕의 죄수들 국사범들을 가두는 감옥입니다. 그 감옥에서 옥살이를 하면서 또 신임을 얻어서 모든 죄수들을 관리하게 되었습니다. 무슨 훈련입니까? 인사관리 훈련입니다. 정치수업입니다.
여러분 착각하지 마십시다. 요셉은 절대로 꿈 한번 잘 꾸어서 국무총리가 된 사람이 아닙니다. 13년 동안 하나님께서 주신 상황 속에서 철저하게 훈련을 받은 결과 국무총리가 된 것입니다.
그 당시 이집트 전역에서 요셉만큼 국무총리가 될 만큼 제대로 훈련을 거친 사람이 없었기에 그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를 통해서 인류를 기근에서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은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지금 가난한 상황에 있습니까? 그 상황을 소중하게 받아들이십시오. 여러분들이 육체적으로 연약한 상황 속에 있습니까?
그 상황도 받아들이십시오. 바울처럼 네 은혜가 족하도다.
미우라 아야꼬 여사가 뭐라고 말합니까? ”사람이 병들지 아니하고는 나아가지 못하는 성소가 따로 있습니다. 사람이 병들지 아니하고는 들을 수 없는 하나님의 말씀이 따로 있습니다. 사람이 병들지 아니하고는 느낄 수 없는 것이 따로 있습니다. 아! 인간이 병들지 아니하고서는 인간이 인간이 될 수 없습니다.“
내가 병들므로 연약하므로 건강할 때보다 오히려 하나님에 의해 가다듬어지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모든 상황을 내게 은혜로 받아들이고 수용할 때 그것을 극복하고 수용할 수 있으며 그 과정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리는 하나님의 도구로 빚어져 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손안에 지금 무엇이 있습니까? 그것이 소중한 줄 아십시오. 모세가 출애굽의 대업을 이룰 때에 그의 손에 있었던 것은 마른
지팡이 하나입니다. 그것이 모세의 유일한 전 재산입니다. 나머지 그에게 속해있었던 모든 것은 장인 것입니다.
그는 40년 동안 처가살이했습니다. 자신의 유일한 재산은 나무 막대기 하나입니다. 그러나 그의 막대기로 홍해를 가리켰을 때에 홍해는 갈라졌습니다. 반석을 쳤을때에 생수는 터졌습니다.
다윗이 무엇을 골리앗을 이겼습니까? 사울의 갑옷으로 이겼습니까? 아닙니다. 평소 그의 손에 익었던 발 앞에 있는 물맷돌로 이겼습니다.
1863년에 태어날 때는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자신의 생년월일조차 알지 못한 채 태어났다가 1940년에 죽을 때에는 미국 백인과 흑인을 망라해서 전 미국인의 존경을 받았던 최초의 흑인이 있습니다.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입니다.
미국 최고의 농학자였고 계몽가였고 최고의 크리스챤이었습니다. 마틴 루터 킹 목사님을 싫어하는 백인들은 있습니다. 그러나 조지 워싱턴 카버는 인종을 뛰어넘어 모든 미국인으로부터 사랑을 받습니다.
한때 미국 남부는 면화재배로 유명했습니다. 그런데 면화를 재배하면 이 면화는 땅 속에 있는 질소를 잡아먹습니다. 땅이 황폐해집니다. 그러면 이 면화를 재배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땅을 개간해야 합니다. 그러면 몇 년 재배함과 동시에 그 땅은 또 못쓰게 됩니다.
미국 남부의 땅 모두가 질소를 잃어서 황폐하게 되었습니다. 미국 1/2 경제가 타격을 입게된 것입니다. 그때 조지 워싱턴 카버 박사가 질소가 없어진 땅에 땅콩을 심으면 땅콩 재배도 잘될 뿐만 아니라 없어진 질소도 회복되어진다는 사실을 연구해내어서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의 권유에 따라서 면화재배를 하던 모든 농장들이 땅콩을 심기 시작했습니다. 카터 대통령의 땅콩 농장도 다 그때 시작되는 것입니다. 문제가 또 다시 생겼습니다.
카버 박사의 말대로 땅콩을 심었더니 땅콩도 풍년이 들었고 땅도 다 되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땅콩을 처분할 길이 없습니다. 땅콩 때문에 또 망하게 된 것입니다. 그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 카버 박사가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자기 말을 듣고 수없이 많은 남부의 사람들이 땅콩을 심었는데 그들이 땅콩으로 인하여 고통을 받는다는 것이 얼마나 큰 괴로움이었겠습니까? 그 당시 자신의 심정을 자신의 전기 속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나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마음이 괴로워서 시월 어느 날 해뜨기 전에 산 속으로 들어가서 거닐다가 동쪽에서 떠오르는 해를 보고 ‘오 하나님이시여 당신은 무엇을 하려고 이 우주를 창조하셨습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에게 ‘너는 나에게 너의 작은 소견을 가지고 너무 큰 것을 알려고 하지 말고 네게 알맞는 것을 물어보아라’ 하셨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람을 무엇에 쓰시려고 세상에 두셨는지 말씀해주십시오’하고 물었습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너는 아직도 네게 감당치 못할 큰 것을 묻고 있구나. 그런 쓸데없는 것은 묻지 말고 네가 마음속으로 진정 원하는 것이 말해보려무나’ 하셨습니다.
나는 너무도 엄숙해졌습니다. 한참만에 나는 마지막으로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무엇을 하시려고 땅콩을 심게 하셨습니까? 무엇을 하시려고 땅콩을 만드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께서는 ‘옳지 됐다. 너는 땅콩을 한줌 들고 실험실로 들어가서 연구를 계속해라.’“
이 산에서 돌아와서 카버 박사는 땅콩을 한줌 들고 자신의 실험실로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밤낮없이 실험실에서 연구해서 땅콩 마아가린, 땅콩 버터, 땅콩 구두약, 땅콩 크림, 땅콩 식용유 무려 105가지의 식용품과 200가지의 실용품을 만들었습니다.
그 카버 박사가 발견해낸 모든 기술로 남부 경제가 되살아났습니다. 흑인이고 백인이고 모든 남부 사람들이 다시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카버 박사는 단 일원의 로얄티도 받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자신의 기술이 아니라, 자신의 재주가 아니라 자신을 통해서 남부 미국인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이었음을 그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카버 박사가 한줌의 땅콩을 들고 실험실로 들어갈 때에 그 땅콩의 가치가 몇 불이나 했겠습니까? 10불을 했겠습니까? 5불을 했겠습니까? 하찮은 것입니다. 그러나 내 손안에 든 것의 귀함을 알았을 때에 그를 통해 이루시려는 하나님의 비전은 이루어졌습니다. 여러분의 손안에 지금 들어있는 것, 여러분의 주머니 안에 지금 들어있는 것, 그것이야말로 하나님의 소중한 도구임을 알 때 하나님의 비전은 우리의 삶을 통해서 이루어져 가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은 끊임없이 자기 지경,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가야합니다.
자기 세계를 키워간다고 할 때에
첫째 영성의 세계를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이미 지난 3시간에 걸쳐서 말씀드렸으니까 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습니다. 끊임없이 영성의 세계를 키워가야 합니다.
우리말에 안면을 얼굴이라고 하지요. 이 얼굴이라고 하는 ‘얼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얼’이 무엇입니까? 우리의 영입니다.
‘꼴’ 우리의 영을 담는 꼴이라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영성이 깊으면 여러분의 영은 여러분의 얼굴에 모습을 나타냅니다. 영성이 깊은 사람이 절대로 무자비한 표정을 갖지 않습니다. 거친 표정으로 살아가는 사람이 결코 깊은 영성을 가질 수 없습니다.
우리의 영은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영은 여러분의 얼굴을 통해서 보입니다.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의 영성을, ‘얼꼴’을 키워가야합니다.
두 번째로 사람의 세계를 키워가야 합니다. 이것도 낮에 진설병에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 가만히 한번 생각해보십시오.
지난해에 비해서 올해에 여러분들과 성격이 틀리고 생각이 틀리는 사람을 얼마나 더 친하게 지내고 있습니까? 세월이 흘러갈수록 여러분들과 똑같은 사람들과 사귄다면 여러분들은 결코 헬라파 유대인들이 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 드릴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비전은 허공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위해 인간의 삶 속에서 이루어집니다.
나를 통해서 어떤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질지 모릅니다. 사람의 지경을 끊임없이 키워갈 때 그 사람이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이 됩니다. 자기 세계를 확장시켜 가야한다고 할 때 세 번째로 자연의 세계를 확장시켜가야 합니다.
고려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셨던 홍영식 박사가 쓰신 책 중에 이런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한국과 중국이 수교가 되기 전에 그분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입니다. 비행기를 타고 중구 내륙을 여행하는 중에 비행기가 한 공항에 내려서 급유를 하는 도중에 갑자기 승객들을 다 내리라고 합니다. 이유인즉슨 그 도시의 공산당 간부가 출장을 간다고 비행기를 착출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출장 갔다가 언제 오느냐,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기다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때 그분을 안내했던 중국인이 묻습니다. “박사님 여기서 비행기가 뜰 때까지 며칠이고 기다리겠습니까? 아니면 제일 가까운 기차역에 가서 기차를 타고 가시겠습니까?” “기차 타고 가자고” 택시를 타고 가장 가까운 기차역으로 갔습니다. 10시간이 걸렸습니다.
제일 가까운 기차역이 10시간입니다. 10시간이면 우리 개념으로 부산을 왔다가는 시간입니다. 여러분 10시간 동안 한 나라의 끝에서 끝을 왔다갔다하는 이 땅에서 사는 우리의 사고와 제일 가까운 역이 10시간이 걸리는 중국인의 사고가 같을 수 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그 산하를 보지 않고 중국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한국 산하의 특징은 산을 넘으면 또 산입니다. 첩첩산중입니다.
그래서 산을 넘는 것을 포기합니다. 그래서 내 산자락, 같은 산자락 안에 있는 사람들만 내 편입니다.
저 산자락에 있는 사람은 내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분열합니다
베를린, 파리, 워싱턴, 런던, 로마, 세계를 지배했던 나라의 수도의 특징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산이 없습니다. 하늘만 보입니다.
있다면 조그만 구릉이 있을 뿐입니다. 그 넓은 하늘을 보면서 그들은 큰 사고를 갖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이 자연을, 자연에 대한 지경을 많이 넓히면 넓힐수록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더 깊이 교감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이 창조하신 사람들을 더 수용할 수 있게 됩니다.
목회자에게 있어서 세계를 안다고 하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우리가 자기 자신을 키워가야 한다는 것은 마지막으로 두말할 것도 없이 실력의 세계를 키워야 합니다. 여러분, 실력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하나님께서는 두 유형의 사람을 쓰십니다. 베드로처럼 배운 것은 없지만 행동하는 사람이든지, 행동하는 척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진짜 행동하는 사람이든지 아니면 바울 같은 최고의 엘리트들을 쓰십니다.
모세 오경을 썼던 모세는 왕궁에서 40년 동안 왕립교육을 받았던 사람입니다. 구약 성경을 썼던 제사장들은 당시 당대 최고의 학자들입니다. 신약성경의 1/3을 썼던 바울 역시 석학입니다.
실력있는 자들을 들어서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글을 쓰게 하셨습니다. 여러분, 실력을 길러야 합니다. 실력이 무엇입니까?
실력은 표현력입니다. 예술가에게 그 속에 아무리 음악이 들어있다 할지라도 그것을 표현하는 능력이 없으면 그것은 실력이 아닙니다.
수학자는 그 속에 들어있는 모든 수학적인 사고의 논리를 공식으로 표현합니다. 운동선수는 자신 속에 있는 테크닉과 힘을 운동 경기로 표현합니다. 소설가는 자기 속에 있는 삶의 모든 이야기들을 글로 표현합니다.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은혜를, 진리의 말씀을 말로 표현하는 것입니다.
제가 여러분들께 묻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일상사 속에서 한글 사전을 쓰시는 분 마음속으로 손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거의 없을 것입니다. 한국 사람들은 중학교에서 한글 찾는 법을 한번 배운 이후는 사전을 쓰지 않습니다.
여러분 프랑스 소르본느 대학생들이 논문을 쓰기 위해서 불불 사전을 반드시 보면서 씁니다. 영국의 대학생들이 영영 사전을 놓고 씁니다. 그 사람들이 영어를 몰라서요? 프랑스말을 몰라서요? 아닙니다. 정확한 표현을 위해서입니다.
한국인들이 사전을 쓰지 않기 때문에 일반적으로 한국인들이 일평생동안 말을 하는데 동원된 단어의 수가 200여 단어에 불과하다는 글을 본 적이 있습니다. 많은 단어를 동원한다고 하는 사람이 300단어를 동원한다고 합니다.
왜 한국에 토론이 없습니까? 민주주의 훈련이 덜 되어 있기도 하지만 우리가 동원하는 단어의 숫자가 작기 때문에 내가 이 단어를 동원할 때에 내가 생각하는 의미와 받아들이는 상대가 생각하는 의미가 틀린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토론을 하지 않고 말꼬리를 잡습니다.
“내가 언제 그렇게 말했니, 이렇게 말했지.”라고 합니다. “왜 네가 안 그랬니, 그랬잖아.” 둘 다 맞습니다. 왜냐하면 한 단어를 다른 의미로 쓰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문학에서는 무엇이든지 하나를 표현하는데 동원되는 단어는 하나 밖에 없다고 말을 합니다. 그 하나의 단어를 찾기 위해서 외국 사람들은 사전을 생활화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실력은 표현력입니다.
마틴 루터는 교회는 ‘문트 하우스’라고 했습니다. ‘입의 집’. 설교가 얼마나 중요하면 문트 하우스라고 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아무리
신학서적을 많이 읽어도, 아무리 많은 정보를 입수해도 여러분들이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면 그것은 여러분들의 실력이 아닙니다.
여러분들이 하나님의 사랑을, 주님의 진리를 정확하게 표현하지 못할 때에 로고스이신 그분의 비전이 어떻게 여러분의 설교를 통해서 역사하실 수 있겠습니까? 실력은 표현력입니다. 표현은 되어지는 것만 여러분의 실력입니다.
먼저 말에 대한 한글에 대한 실력을 키워나가십시오. 여러분들이 해외에 가서 외국인을 상대로 목회할 사람이 아니라면 200단어, 300단어를 가지고는 하나님의 역사를 온전히 전달하는 도구가 될 수 없습니다.
네 번째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는 사람들은 이성적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로마서 12장 1절을 통해서 바울 사도가 이렇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우리의 몸을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는 것이 우리가 마땅히 들려야 할 영적 예배라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영적’이라고 하는 말은 ‘logikos'라고 썼습니다. ‘logikos'라고 하는 것은 ’logos'에서 파생된 말로 이성적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무엇이 영적인 예배입니까? 여러분의 이성을 접어넣고 맹신자처럼 열광하는 것이 영적인 예배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이성적이 다해져서 여러분의 뜻과 의지가 드려질 때에 그것이 영적인 ‘logikos'의 예배입니다.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6장28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또 너희가 어찌 의복을 위하여 염려하느냐 들의 백합화가 어떻게 자라는가 생각하여 보라 수고도 아니하고 길쌈도 아니하느니라” 주께서는 우리에게 생각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생각 좀 해봐라. 들풀도 하나님께서 책임지시고 새도 책임지신다면 왜 너희들을 책임지시지 않겠느냐 이 믿음이 없는 자들아 이 것을 안다면 더 이상 먹고사는 문제 때문에 나를 찾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먼저 구하는 자가 되기 위해서 나를 찾으라."
여러분들이 이성적인 그리스도인이 되지 아니하면 여러분의 신앙은 평생 먹고사는 수준을 뛰어넘을 수 없습니다
주께서 요한복음 14장26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시리라”
성령님께서 하시는 사역 가운데에 중요한 사역 중 하나는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내 이성이 잠겨진 상태에서는 성령님께서 역사하실 수가 없습니다. 누가 성령 충만한 사람이겠는가? 이성을 다해서 주님을 만나는 자가 성령 충만한 자입니다.
베드로 사도가 사도행전 11장16절을 통해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주의 말씀에 요한은 물로 세례 주었으나 너희는 성령으로 세례받으리라 하신 것이 생각났노라” 고넬료에게 세례를 주었더니 왜 이방인에게 세례를 주었냐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가 이야기합니다. 그 순간에 주의 말씀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이성적인 판단으로 세례를 주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로마서 8장18절을 통해서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여기에서 제일 중요한 단어는 무엇이겠습니까? ‘생각건대’ 내가 생각을 해보니 이 고난은 괴롭지만 주께서 나를 이 고난 속에 버리실 분이 아니시다. 이 고난을 통해서 나에게 유익을 줄 분이시므로 그때 내게 주어질 영광을 생각하면 이 고난이 무엇이 두려우랴. 생각함으로 그 사실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성을 하나님 위에 올려서 이성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재단하는 서구 교회는 틀렸습니다. 그러나 이성을 주머니에 넣고 맹신하려는 생각도 틀렸습니다. 신앙은 점이 아니라 선입니다. 여러분의 감정으로는 수없이 많은 점을 찍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점은 삶이 아닙니다. 그 점과 점을 선으로 연결시키는 것은 여러분의 이성적 신앙만이 가능합니다.
만약에 바울이 오직 감성적 신앙만을 가진 자였더라면 내가 로마로 가야하리라 얼마든지 결심할 수는 있었겠지만 로마로 가기 위해서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을 기다리고 로마로 가서 그 토굴 속에 갇혀있다 참수당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그에게는 감성이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이성적 신앙이 있었기에 그 모든 고난 속에서 ‘생각건대’ 내 삶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질 것이므로 그는 그 길을 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제게는 4명의 아이가 있습니다. 막내 아이를 제가 마흔 세살 때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는 지금 초등학교 3학년입니다.
제가 이번 집회를 위해서 화요일날 밤에 제네바에서 도착을 했습니다. 그날 밤에 이 막내아이가 제 뒤에서 목을 꼭 끌어안았습니다.
그리고 제 귀에다 대고 이렇게 이야기했습니다. “아빠 이번에 오신 김에 그냥 우리하고 살면 안돼요?” 여러분 저도 애비입니다.
제 자식을 사랑합니다. 제 자식과 볼을 비비며 살고 싶습니다. 만약 제가 이성적인 신앙의 소유자가 아니라면 저는 벌써 왔을 것입니다,
명분은 얼마든지 찾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 감성만으로는 안됩니다. 이성적 소유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여러분의 피를 끓게 하는 사람을 조심하십시오, 여러분은 어떤 경우에도 타인의 피를 끓게 해서는 안됩니다.
심령이 뜨거워진다는 것과 피를 끓게 한다는 말은 절대로 같은 말이 아닙니다. 피를 끓게 한다는 것은 머리를 흥분시킵니다.
뇌의 작동이 멈춥니다. 거기에는 감정만 남습니다. 감정으로 얼마든지 소리지르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소리소리 지르며 기도할 수 있습니다. 아멘으로 화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의 피가 뜨거워 져서 뇌의 운동이 정지된 상태에서 부르짖었던 것, 그 순간이 지나고 나면 무엇이 남습니 까? 아무 것도 남는 것이 없습니다. 오직 감정의 찌꺼기만 남습니다.
그래서 그 다음부터 마치 마약 중독자처럼 그 감정을 리바이벌하기 위해서 애를 씁니다. 여러분 심령이 뜨거워진다고 하는 것은 뇌의 작동이 더 정확하게 움직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내 뇌가 정확하게 움직여서 의지적으로 결단하고 내 감정을 끌고 갈 때에 그것이 선이 되고 삶이 되는 것입니다. 심령이 뜨거워지는 것과 피가 끓는다는 것이 같은 말이 아니라는 것을 사람들이 참 이해를 잘 못합니다.
제가 글을 하나 읽어드리겠습니다. 이성적인 신앙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심령이 뜨거워진다는 것과 흥분한다는 말이 구별된다는 말이 무슨 말인가를 알기 위해 글을 하나 읽어 드리겠습니다.
이 글은 제가 영락교회에서 교육 전도사로 봉사할 때 영락중학교 3학년 여학생이 쓴 글입니다.
“버려도 전혀 아까울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날고 찌그러진 아빠의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견딜 수 없이 우울하고 슬프기만 했습니다.
내가 이런 비참한 마음을 갖기 시작한 것은 아빠가 실직한 이후부터였습니다.
아빠의 실직이유를 나는 아직도 알지 못하지만 아빠는 그 일로 몹시 괴로워하셨습니다. 가끔 주무시다가도 몸을 부르르 떠는 모습은 마치 활동사진처럼 내 기억 속에 생생합니다. 실직하신 지 3개월쯤 되었을 때 아빠는 어느 회사의 신입사원으로 새로 입사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전 회사와는 전혀 다른 업종의 회사였는지라 아빠에게는 여러모로 어려움이 많았었나 봅니다.
입사하신 지 1개월이 조금지나 아빠는 다른 사람들이 꺼려하는 출장 근무를 자원하셨고 회사의 허락을 받은 아버지는 그 후 늘 출장만
다니시게 되었습니다. 처음에는 3-4일씩이었던 출장이 조금 지나서는 1-2주씩으로 늘어났고 요즘에 와서는 한 달에 1번 정도 경우 집에 들어오십니다. 아빠가 출장을 다녀오실 때마다 아빠의 구두는 검정색인지 황토색인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였습니다.
아빠는 왠지는 알 수 없으나 거의 매일을 걸어다니심이 분명했습니다. 그나마 그 구두도 그리 오래가지는 못했습니다. 본래 낡았던 구두가 어느샌가 뒷 굽도 다 낡고 앞으로는 입을 벌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아빠는 그 낡은 구두를 몇 번이나 수선했지만 끝내 더 이상 수선하기가 불가능하게 되었을 때 아빠는 운동화를 사 신으셨습니다. 우리 남매를 키우시느라 구두를 사 신을 형편이 못되었던 것입니다.
그 운동화 역시 한번 출장을 다녀오시자 금방 낡은 신이 되고 말았습니다. 아빠의 그 신발을 볼 때마다 나는 가슴이 아파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다가오는 아빠 생신 때에는 반드시 구두를 선물해 드리라 다짐을 했습니다.
용돈을 따로 받아 모을 형편이 아니였기 때문에 학교를 갈 때 버스 타는 대신 걸어다니기 시작했습니다. 몇 주 지나지 않아 금새 이천원이 모였습니다. 몸은 피곤했지만 마음은 한없이 기뻤습니다. 그리고 몇 달이 지난 어는 토요일이었습니다. 소복히 쌓인 은행잎들을 밟으며 중앙청 앞을 지나 집으로 가던 중 저 앞에 왠 키 작은 남학생 한 명이 낙엽을 터벅터벅 밟으며 힘없이 걸어가는 모습이 보였습니다.
바로 중학교 1학년인 남동생이었습니다. 내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동생의 팔을 잡으면서 말했습니다.
“너 왜 자꾸 누나 말 안 듣니? 넌 아직 어려서 걸어다니면 피곤해 성적 떨어지니까 반드시 버스타고 다니라고 했잖니?” 동생이 퉁명스럽게 말했습니다. “그러면 나는 아빠 구두 값을 어떻게 모으란 말이야.” 나는 동생에게 애원하듯 말했습니다. “누나가 다 모을테니까 너는 걱정하지 말라고 누나가 몇 번이나 말했니?” 갑자기 동생이 표정을 바꾸면서 물었습니다.
“누나, 누나는 얼마나 모았어?” “7500원이란 나의 대답을 들은 동생이 흥분한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모은 것과 합치면 왠만한 구두 살 수 있겠다 누나 나 그동안 2000원 모았어. 나 잘했지?“
나는 동생이 너무 대견스러워 하마트면 대로변에서 울음을 터트릴 뻔했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그 다음 토요일 동생과 나는 남대문 시장에서 만원짜리 구두를 샀습니다. 그리고 예쁘게 포장한 다음 몇 일 남지 않은 아빠의 생신일을 기다렸 습니다.
아빠가 그날만큼은 집에 오시기를 간절히 바라면서 말입니다. 마침내 아빠의 생신일이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돌아오니 먼저 온 동생이 풀이 죽어 있었습니다. ”너 왜 그러니? 어디 아프니?“ ”아빠가 오늘 못 오신대. 그러니까 구두를 드릴 수가 없잖아“ 동생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다 낡아빠진 싸구려 운동화를 신고 지금도 어느 도시 어느 길 위엔가를 걷고 계실 아빠를 생각하자 어느덧 내 눈에 뜨거운 이슬이 한방울씩 맺히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아쉬움의 눈물이었을 뿐, 더 이상 슬픔의 눈물은 아니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빠께 드릴 새 구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제가 제네바에 갈 때에 제 아이들이 약속을 합니다. 난 아빠에게 일주일에 한번씩 편지쓸거야. 아니야 나는 매일 할거야.
지키지 않습니다. 아이들은 얼마든지 감정으로 결심할 수 있습니다. 얼마든지 약속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식들 다 마찬가지일꺼예요.
여러분도 여러분의 부모에게 그랬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중학교 3학년과 1학년은 아버지의 구두를 사드리기 위해서 걸어다녀야 되겠다고 결심한 뒤에 몇 달 동안 실천했습니다.
왜 이 아이인들 떡뽁기가 먹고 싶지 않겠습니까? 왜 만화 가게를 지나갈 때 만화가 보고 싶지 않겠습니까? 왜 몸이 피곤할 때 버스를 타고 싶지 않겠습니까? 어떻게 몇 달을 걸어다닐 수가 있었겠습니까? 이성을 동원했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이 글을 읽을 때에 감동이 되지요? 그런데 흥분됩니까? 아닙니다. 여러분들의 심령이 뜨거워지지요?
이 어린아이들이 자신의 아빠를 위해서 이렇게 사는데 나는 하나님을 위해서 무엇을 하는가? 뜨거워지지요?
이성이 멈춥니까? 아닙니다. 여러분의 이성이 말할 수 없는 응답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결단을 하게 됩니다.
이것이 이성적인 신앙입니다. 이것이 심령이 뜨거워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흥분과 구별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땀에 피가 맺히기까지 이 잔을 내게서 물러가게 해주소서 라고 외칠 때에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patos'였습니다. 감성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여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그것은 그분의 ‘logos' 이성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이성적 신앙이 감성을 눌렀습니다. 그리고 그분은 그리스도가 되셨습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는 자는 마지막으로 결과를 보고싶은 유혹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반드시 결과를 보고자 하는 것은 경제원리입니다. 그것은 업적주의입니다.
많은 정치인들이 한국의 대통령들이 자신의 재임기간에 자신이 한 결과를 보려다가 실패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도 똑같습니다.
내가 행한 일의 결과를 내가 보려하면 우리는 절대 정도를 걷지 못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영원히 살아야합니다. 내가 지금 주님을 위해서 일하는 이 일의 결과 내 생애에 볼 수 없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원 속에서 주님과 더불어 보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을 해보십시오. 만약에 사도 바울이 자신이 행한 일의 결과를 보기를 원했다면 어떻게 참수형을 당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때까지 그가 로마에서 한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습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한 것 이외에 무슨 가시적인 결과가 있습니까? 경제원리로 본다면 그는 철저하게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는 철저하게 결과로부터 자유한 자였기 때문에 하나님의 비전을 위하여 그 자신을 내어놓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땅을 떠난 지 300년이 지나서 하나님께서 자신이 뿌린 씨앗을 통하여 당신의 비전을 이루는 것을 바울은 하나님의 품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요셉 같은 경우는 종살이, 옥살이를 하면서 자신이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고 살아가는 모든 일의 결과를 본 사람입니다.
바울은 보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느 경우이든 볼 수도 있고 보지 못할 수도 있지만 결과로부터 자유할 때만 진정한 하나님의 비전을 이루어드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때에만 정도를 걸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20세기 초에 일본에서 갓 안수를 받은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 당시 일본에는 교인이 얼마 없으니까 내가
어느 곳에 가서 개척을 할 것인가 일본 지도를 펴놓고 기도를 했습니다.
기도하던 도중에 동서남북 사방으로 수 십리에 걸쳐서 단 한 명의 교인도 없는 지역을 찾고 보니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역이었습니다.
그 지역에서 이 젊은 청년 목사가 텐트를 치고 개척교회를 시작했습니다.
자신의 아내와 아이 둘을 놓고 창립예배를 드렸습니다. 한 달이 지나고 두 달이 지났는데 교인이 오질 않습니다. 육개월이 지났습니다.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겠습니까? 기도할 때는 열심히 믿습니다라고 하지만 육개월동안 오지 않으면 아 하나님 뜻이 아니네라고 그만두면 그만입니다. 그런데 나가노 목사는 그 자리를 옮기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 자리로 보내주신 줄 믿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이루실 일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 자리를 무려 오년을 지켰습니다. 아내와 아이만을 두고서..
오년째 되던 해 어는 수요일 저녁에 장막의 커텐을 제치고 첫 번째 교인이 들어왔습니다. 청년이었습니다.
이 나가노 목사가 얼마나 감격했겠습니까? 우리 눈에 선하지 않습니까? 오년동안의 그 어떤 설교보다도 더 열정적인 설교를 했습니다.
설교가 끝난 뒤에 그 첫 번째 교인인 청년을 데리고 식탁에서 저녁을 먹었습니다.
식사 도중에 이 청년이 억- 하더니 피를 쏟았습니다. 폐병환자였습니다. 각혈을 한 것입니다, 나가노 목사가 순간적으로 속에서 갈등이 일었습니다. ‘이런 괘씸한 사람이 있나, 이 사람을 지금 좇아야 되나 아니면 내가 지금 이 핏덩이를 씻어내고 밥을 먹을 것인가?’
주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주님께서 내게 처음 보내주신 사람인데.. 나가노 목사가 자기 손으로 핏덩이를 치웠습니다.
그리고 음식을 가져다가 청년하고 다시 음식을 먹었습니다.
그 청년은 일본의 유명 정치인의 사생아로 태어났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출신이 그랬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많은 괴로움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러다가 우연히 복음을 접하게 되어서 신학교를 들어갔습니다. 신학교를 다니는 도중에 폐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학교에서 정학을 당했습니다.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지금도 폐병이 무서운 병인데 20세기초에 얼마나 무서운 병이겠습니까?
다니던 교회에서 파문을 당했습니다. 낫고 돌아오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청년이 생각할 적에 ‘아 성경은 거짓말이다. 예수는 거짓말이다. 나는 누구에게 돈을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치료비를 요구하지 않는다. 나는 누구에게 나의 폐병을 옮길 만큼 경솔한 사람이 아니다.
그러나 단 한사람이라도 폐병 환자인 나를 그리스도인으로 대해주는 그리스도인을 만나고 싶다.’ 없었습니다. 한사람도 없었습니다.
이 청년이 자살을 결심했습니다. 그런데 자살 전에 우연히 한 사람이 이야기를 했습니다.
북쪽 가나사와라는 지방에 가면 나가노라는 목사가 있는데 아마 그 목사 한번 찾아가 보시오. 이 청년이 찾아갔습니다.
그날 저녁에 밥을 먹다가 피를 쏟았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피를 쓸고 밥을 다시 차려왔습니다. 그 순간에 이 청년이 주님을 다시 만났습니다. 주님은 살아 계시는구나... 주님의 은혜에 의해서 청년의 폐병이 낫습니다.
그리고 이 청년이 신학교를 졸업한 뒤에 그 유명한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됩니다. 그리고 오사카에서 동경에서 수없이 많은 빈민을 위해 자신의 생을 섬김과 봉사의 삶으로 내어놓았습니다.
이 빈민들 중에 영양실조 걸린 사람들이 가장 고통스러워 하는 것은 변비입니다. 항문에 이 변이 차돌처럼 굳어 있어서 변을 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우찌무라 간조 목사가 그 빈민들의 항문을 손가락으로 후벼주지만 되지를 않아요.
우찌무라 간조 목사님이 그 더러운 빈민들의 항문에 자신의 입을 가져다대고 침으로 차돌같이 굳어있는 똥을 녹여서 빨아냈습니다.
그 사실을 알게된 신문기자가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에게 물었습니다.
“당신 아무리 그렇지만 어떻게 그런 짓을 할 수가 있습니까?” 그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저는 배운대로 합니다. 제 선생님은 제가 각혈한 핏덩이를 닦아 주셨습니다. 그분이 하신 것에 비하면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중국으로 건너갔습니다. 중국의 빈민들을 위해서도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장개석 총통의 부인 손유령 여사께서 크리스챤이십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님의 이야기를 듣고 깊은 감동을 받았습니다.
그분을 모셔서 개인적으로 성경공부도 했습니다. 1945년도에 일본이 패망을 했습니다. 일본 군대와 함께 민간인들이 철수를 합니다.
일본이 점령하고 있던 나라에서 민간인들이 철수를 할 때 현지인들로부터 테러를 당한 사건이 많았습니다.
그렇지 않겠습니까? 오랜 세월동안 그 땅을 착취한 사람들이니 어떻게 테러를 안 당하겠습니까? 우리 나라에서도 당했습니다.
제일 지독하게 당한데가 사할린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일본 패망 당시에 중국 땅에 있던 일본 민간인의 숫자는 200만명에 달했습니다. 200만명 중에 단 한 사람도 테러를 당하지 않았습니다. 천황의 항복 선언과 동시에 장개석 총통이 포고령 제 1호를 내렸습니다
‘철수하는 민간인에게 위해를 가하는 자는 물자를 빼앗거나 테러를 가하는 자는 중형에 처한다’ 이것이 종전 이후에 포고령 1호입니다. '그 배후에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의 감동이 있었던 것은 물론입니다.
여러분, 나가노 목사는 평생에 한 명의 그리스도인 밖에 배출시키지 못했습니다.
경제 논리로 보면 실패한 목사입니다. 그렇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나가노 목사가 없었더라면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는 없습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빈민들의 항문을 빨아줄 때 그 심중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가 중국의 빈민들을 위하여 자신의 생애를 내어 바칠 때 그 속에는 나가노 목사도 함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우라 아야꼬 목사는 가가와 도요히꼬 목사도 위대하지만 그 한 사람을 배출한 나가노 목사가 더 위대하다고 쓰고 있습니다.
여러분 나가노 목사는 어떤 사람입니까? 그야말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은 사람입니다.
자기에게 주어진 삶의 현장의 중요성을 안 사람 입니다. 그는 자신의 장막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오늘은 내일을 위한 예비라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5년동안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자기 세계를 확장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폐병 환자로서 각혈하는 자를 수용할 정도로 큰 진설병을 지니고 있던 사람입니다. 그는 이성적인 신앙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감성만을 가진 신앙의 소유자였다면 5년 동안 수십번 텐트를 옮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성으로 의지적 결단으로 하나님을 위해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그는 결코 결과를 보고 싶은 유혹에 빠지지 않았습니다.
그가 자신의 목회의 결과를 보기를 원했더라면, 머리 숫자만을 중요시했더라면 각혈하는 청년을 그리스도 안에서 세우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던 사람이고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기에 섬김과 봉사의 삶을 살 수가 있었고,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가노를 통하여 가가와 도요히꼬를 세우려는 하나님의 비전이 이루어졌습니다.
한가지 이야기만 더 드리고 끝을 맺겠습니다.
작년 10월6일날 포르투칼의 국민가수인 로드리게스 아말리아라는 여자 가수가 죽었습니다. 그 여자가 어느정도로 포르투칼 국민들의 사랑을 받는 위대한 가수인가 하면 로드리게스 아말리아의 죽음이 발표되는 순간에 포르투칼 내각이 각의를 개최중에 있었습니다.
그 사실을 아는 순간에 그 즉석에서 각의가 로드리게스 가수를 위해서 사흘 동안의 조의 기간을 결정했 습니다.
그리고 조기를 달았습니다.
여러분, 한국의 국민 가수가 누구입니까? 조용필씨, 이미자씨, 만약 그분이 돌아가셨을 때에 사흘동안 조의기간을 설정할 리도 없지만
설령 한다고 해서 국민이 용납하겠습니까? 그런데 포르투칼 국민은 용납했습니다.
싸도라고 하는 포르투칼 민속 음악이 있는데 이 민속 음악을 로드리게스 아말리아라는 사람이 부름으로써 세계 음악으로 끌어올렸던
사람입니다.
사흘이 지나서 로드리게스 아말리아의 장례식이 리스본 대성당에서 있었습니다. 생중계가 되었지요.
신부님의 장례 미사 집전이 다 끝났습 니다. 바로 제단 앞에 있던 로드리게스 아말리아의 관을 6명의 운구위원이 좌우에 3명씩 서서 어깨에 매었습니다. 그리고 성당 정문을 향해서 막 운구 행렬이 움직이기 시작했을 때 전혀 뜻밖의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그 리스본 성당 안에 가득 메우고 있던 조문객들이 로드리게스 아말리아의 관을 향해서 박수를 치는 것입니다.
그 운구 위원들이 그 긴 복도를 걸어나가는 동안의 오랜 시간이 걸렸는데 그 박수가 성당을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운구위원의 행렬이
저 문 앞에 다가섰을 때에 카메라가 바뀌었습니다.
성당 밖에 있던 카메라가 이제 성당 정문을 비추는 것입니다. 정문이 열렸습니다. 운구위원이 아말리아의 관을 매고 성당 밖으로 모습을 나타내었습니다. 성당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그 성당 광장을 메우고 있던 모든 시민들이 똑같이 박수를 쳤습니다.
그 관을 영구차에 실었습니다. 그리고 포르투칼 정통 복장을 한 기마병이 호위를 하고 이제 장지로 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스본 대성당 복도에서부터 그 신작로 양가에 계속 줄을 이뤄서 리스본 시민이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장의차가 자기 앞을 지나갈 때 모든 시민들이 박수를 칩니다.
여러분, 목사는 장례식을 많이 집전하지 않습니까? 저도 참 많은 장례식을 집전했습니다. 그리고 또 많은 장례식을 가 보았습니다.
세계에서 유명한 사람들의 장례식은 TV를 통해서 필름을 통해서 반드시 봤습니다. 왜냐하면 장례식에는 많은 교훈이 있거든요.
그런데 저는 어떤 장례식이든 죽은 사람을 향해서 박수를 쳐주는 것을 처음 보았습니다.
제가 포르투칼 사람에게 일부러 전화를 해서 물었습니다. “저렇게 당신들이 박수를 쳤는데 포르투칼은 본래 죽은 사람에게 박수를 치는 것이 관습입니까?” 아니라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모두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박수를 칩니까?“ 그분의 대답이 워낙 포르투칼 국민이 아말리아를 사랑했기 때문에 그의 살아온 인생 을 사랑했기 때문에 아무 약속없이 이신 전심으로 다 박수를 쳤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저는 그 모습을 보면서 얼마나 신실한 신자였는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아 장례식이야말로 정말 신앙적이다 성경적이다. 우리가 이 땅에 태어나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고 진리를 위해서 우리의 생을 바쳐 열심히 살다가 내 인생이 끝나는 날 천국을 향해 들어가는 나를 향해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박수로 환송을 해준다는 것은 얼마나 아름다운 신앙행위요, 승리인가!
제가 그날 밤에 서울에 있는 제 아이들에게 글을 써서 보내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들아 아빠와 엄마는 하나님께서 맡기신 삶의 몫을 위해 앞으로도 최선을 다 할거야. 아빠와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 천국으로 향하는 날 너희들의 아빠와 엄마의 삶에 대해 긍지를 느끼며 박수로 환송할 수 있도록 말이야.
너희들 역시 주어진 언제나 최선을 다하려무나. 너희들의 마지막 너희들의 자식들도 너희를 박수로 환송할 수 있게끔 말이야.“
사랑하는 여러분, 비전이 없으면 방자해집니다. 망상을 좇으면 패가망신합니다. 야망의 노예가 되면 자신도 해치고 남도 해칩니다.
우리는 비전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으십시다.
내 삶의 현장에서 그분을 비전으로 삼아 내 앞에 있는 자에게 섬김과 봉사를 행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다.
그때 우리 생이 다하는 날 남아있는 자들은 우리를 박수로 환송해줄 것입니다.
아니 그 순간 하나님께서 박수로 우리를 환영해주실 것입니다. 기도 드리십시다.
“하나님,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기를 원합니다. 요셉처럼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기 원합니다. 바울처럼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기 원합니다. 오늘 한국 교회는 나가노 목사를 요구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이 나가노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하나님을 비전으로 삼고 일평생 하나님께 내 생을 드리고 살아가다가 우리의 생이 다하는 날 살아남은 사람들의 박수로 환송받으며 이 땅을 떠나가게 하옵소서. 그 순간 하나님의 환영을 받으며 하나님 나라에 입성하는 자들이 되게 도와주옵소서.
그 계기가 오늘 밤부터 시작되게 하여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
첫댓글 저도" 비전의 사람" 이 책너무 감동으로 읽고 "회복의신앙" 지금 읽고있어요^^
예, 감동드린 목사님이 지금 이단이라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게 실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