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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대전송촌동주여사네집 원문보기 글쓴이: 땅오아부지
동로마제국 (東-帝國)
유럽의 역사와 기독교 초기의 역사를 알기 위해서는 동로마 제국의 콘스탄틴 황제 및
그 무렵의 역사적 배경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이 든다. 특히 니케아 신조의 배경을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다음은 위키피디아 한국어 판에서 뽑은 자료이다,
설명
콘스탄티노플(지금의 이스탄불)을 수도로 한 중세 로마제국. 동로마제국이라고도 한다. 나중에 비잔틴제국의
모체가 된 로마제국의 동쪽영토에는, 서쪽의 로마를 중심으로 하는 서로마제국이 망한(476) 뒤에도 1453년까지
그리스도교, 고대 그리스 문화, 그리고 로마의 정치체제가 지속되었다. 그리스어가 공용어이며 그리스정교
(동방정교회)가 국교인 이 제국은 전 중세를 통하여 그리스정교권의 맹주(盟主)로 군림하였다.
특히 나중에 새롭게 탄생하는 슬라브계 여러 국가에게 있어 제국의 정치·종교·사회·문화 및 경제는
그 모든 면에서 모범이 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은 바로 <동로마>였다. 문화적으로는 그리스의 고전 문예를
가장 잘 보존·육성·발전시켜 이것을 서유럽 여러 나라 및 이슬람권에 전하였다. 또한 이탈리아 인문주의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시대구분
비잔틴제국의 역사적 출발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이 있지만 전체를 초기·중기·후기의 3기로 나누고
그 중 중기를 전반기와 후반기로 나누는 것이 일반적이다.
330년(콘스탄티노플에 수도를 엶)부터 610년(황제 포카스의 퇴위)까지를 초기,
610년(헤라클리우스 1세 즉위)부터 1204년(제4차 십자군에 의한 수도 함락)까지를 중기,
중기를 다시 610년부터 1025년(바실레이오스 2세 죽음)까지를 전반기,
1025년(콘스탄티누스 8세 즉위)부터 1204년까지를 후반기로 한다.
1204년(니케아제국의 발족)부터 1453년(오스만투르크의 메메트 2세에 의한 수도 함락)을 후기로 한다.
초기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395) 뒤 로마제국의 영토는 동과 서로 나누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비잔틴제국의
모체가 되는 동쪽의 영토는 다키아·마케도니아·아시아·폰토스·오리엔스·트라키아·이집트 각 지방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들 영토는 서쪽 영토와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제도(制度)>에 의해 통합되었다.
즉 수도를 제외한 모든 영토는 민정·군정의 각각 독립된 양두(兩頭) 지배를 받았다.
수도의 규모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2중 성벽 완성(413)으로 확정되었다. 수도는 서로마와 마찬가지로
특별행정구로서 거리의 치안유지, 식량확보, 시민의 재판권, 상업 활동의 규제와 보호 등 시민생활에 관한
모든 행정상의 처리는 수도 총독이 맡았다. 국가 정치의 중추인 궁정에서는 재상·재무대신·궁정재무장관·
궁정장관·시종장 등이 황제를 도와 일을 처리하였다. 원로원은 황제의 공식 자문기관으로 정권의 교체나
황제 자리가 비게 되었을 때, 또한 새로운 황제의 선출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통치체제가 지배하는 제국은 대외적으로 언제나 2개의 정면(正面) 작전을 세워야만 하였다.
즉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는 전시대부터 계속하여 전투 상태에 있었으며 이것은 율리아누스황제의
전사(363),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의 일시적 평화조약 체결(545)을 거쳐 6세기 후반 소아시아로의 침입과
이에 헤라클리우스 1세의 최종적인 승리(627, 니네베 전투)에 이르기까지 단속적(斷續的)으로 계속되었다.
또 발칸반도에서는 4세기 고트족의 남하, 계속되는 국내로의 게르만민족의 침입, 5세기 중엽 아틸라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들은 모두 <테오도시우스 성벽>에 의해 막을 수가 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에는
옛 로마제국의 서쪽 영지를 되찾기 위한 대원정군이 파견되었다. 그 결과 534년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을,
554년에 지중해의 섬들과 에스파냐의 서고트왕국의 일부를, 555년에 이탈리아의 동고트왕국을 각각
제국령으로 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6세기 후반 이들 지역에 다시 이민족이 침입하자 마우리키우스황제
(재위 582∼602)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영토 확보에 힘썼다. 그러나 6세기 후반의 대외적 위기는 북쪽의 다뉴브전선에서 시작되었다.
즉 대서방(對西方)·대동방 정책에 쫓긴 제국은 다뉴브강을 건너 남하해 온 슬라브 아바르족을 막을 수 없어
마우리키우스 때 발칸의 주요 도시 시르미움·신기두눔이 차례로 함락되었다. 결국은 발칸반도의 슬라브화가
시작되어 제국의 행정망은 끊기고 통치기능은 여기에서 크게 후퇴하여 7세기 변혁의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중기 전반
이 시대의 속령(屬領)통치 방식 및 중앙집권체제 안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대외정세 변화에 촉구된 군사력의
강화와 문관 세력의 후퇴이다. 군사력의 강화는 제국 영토의 양두지배에서 테마제도(軍管區制)로의 전환이며,
문관세력의 후퇴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제도에서 군사·세무(稅務)를 중시하는 로고시트제도로의
전환이다. 이들 모두 로마적 행정제도에서 변신한 것이다. 테마제도는 헤라클리우스 1세의 치하(610∼641)에서
비롯된 국력의 전체적 저하를 보충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지방 영지의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 제도는 점차 정비되어서 마케도니아왕조 번영의 기초가 되었다. 제국의 성운(盛運)은 테마제도의 성쇠에
달려 있었다고도 할 수 있었다. 즉 지방 호족 및 중앙의 고급관리, 군인층·교회·수도원으로 이루어지는
대토지소유자층이 중소자유농민을 홉수하여 테마제도를 침식하였으며, 거듭되는 대외위기에 따른 내정의
혼란이 테마제도의 기능을 위협할 때 제국의 성운도 혼들렸다. 대토지소유자층의 증대는 이미 8세기 무렵부터
현저하게 나타났다. 9세기 초, 니케포루스 1세(재위 802∼811)는 대토지소유자층의 재력을 강제적으로 국가에
되돌리려고 하였다. 10세기의 로마누스 1세(재위 919∼944)를 비롯한 여러 황제는 중소자유농민 농지의
전매(轉賣)·기진(寄進)·유증(遺贈)을 금지하여 대토지소유자층의 증대를 막으려고 하였다.
또한 납세의 연대제강화, 대토지소유자의 선매권(先買權) 금지 등의 보호책으로 중소자유농민층을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은 결국 국세에 의한 수입확보에 지나지 않는 정책이었다. 그리고 11세기 초에 대토지
소유자층 출신인 로마누스 3세(재위 1028∼34)가 종래의 보호책을 폐지하고 대토지소유자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펴 중소자유농민층이 몰락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7∼9세기에 걸쳐 외적의 침입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중앙정부 내부에서는 군사·세무 관계를 다루는 부국(部局)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들 부국장은
정치의 중추를 차지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제도 아래의 여러 대신·장관과 교체되었다.
즉 로고시트제가 등장한다. 이것은 원래 회계(會計) 담당을 뜻한다. 이 제도의 중심은 회계국장이며
외무·내무대신직을 겸하는 역체(驛遞)국장과 함께 큰 권력을 가졌다. 그런데 관료 기구의 정비와 함께
황제는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을 이 관료 기구의 요소(要所)에 두어 이것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행정 기구의 개조는 대외적 요인에 따른 것으로, 그 첫번째 요인은 7세기 전반부터 시작하여
9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이슬람과의 싸움이며, 두번째 요인은 불가리아족의 등장이다. 7세기 중엽에
발칸 북부에 나타난 그들은 아스파루흐왕 때 발칸반도 중부, 비잔틴령 안에 최초의 독립 국가인 제1차
불가리아왕국(681∼971)을 세웠다. 세번째 요인인 슬라브족은 일찍부터 남하하여 정주하고 있었는데
독립국가를 만들지 않고 선주민인 그리스계 주민과 융화하여 그리스민족을 슬라브화하였다.
그러나 9세기 초에는 슬라브족에게 점령된 지역을 남그리스에서 탈환하기 시작함에 따라 슬라브의
그리스화가 시작되었다. 또한 9세기 중엽에는 나중에 키예프공국을 세우는 루스족이 처음으로
수도 주변에 나타났는데 블라디미르 1세 때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선언(988)함에 따라 키예프공국도
그리스정교권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다. 이렇게 대외 위기를 극복하고 행정·군사 기구의 정비와
중소자유농민의 번영을 배경으로 제국은 바실레이오스 2세(재위 976∼1025) 때 아르메니아,
시리아의 연안지대, 다뉴브강 이남 발칸반도를 다시 제국령으로 하여 유스티니아누스황제 이후
최대 영토를 얻었다.
중기 후반
11세기부터 천천히 시작된 비잔틴제국의 쇠퇴 현상은 1204년의 제4차 십자군과 베네치아의 총독 엔리코
단돌로에 의한 수도 점령으로 상징된다. 그 원인은 국내 봉건화의 진행과 셀주크투르크, 제1차부터
제4차까지의 십자군, 제2차 불가리아왕국, 세르비아왕국 등이 초래한 외부 압력에 있다.
국내 봉건화의 현상은 11세기 초의 콘스탄티누스 9세(재위 1042∼55) 통치하의 프로노이아제
(토지를 매체로 한 황제와 신하의 주종 관계)의 성립이었다. 당시 면세특권이 부여되어 있던
대토지소유자층의 영지, 징세청부인에게 임대로 내놓은 토지, 프로노이아로서 지급된 토지는 징세에 있어
치외법권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토지의 증가는 한편으로 중소자유농민의 납세 부담을 증가시켰으며
이것은 곧 전자의 증대와 후자의 몰락이라는 악순환을 낳았다. 또한 이러한 사태는 국고(國庫)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회·경제상의 변혁은 행정·군사에도 영향을 끼쳤다. 테마제도는 소아시아와 발칸반도의
주요부분이 11세기 중엽 제국령에서 벗어남에 따라 또 국내의 봉건화로 인해 차츰 사라지게 되었다.
남은 영토의 대부분은 봉건화로 인해 대토지소유자층에게 돌아갔다. 황제도 거의가 대토지소유자층 출신이었다.
따라서 대토지소유자층의 발언권은 커졌으며 반대로 황제의 권력 그 자체는 약화되었다. 중앙·지방을 가리지
않고 내란과 반란, 세력확장을 위한 음모와 세력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1세기 후반의 작아진 제국령에서는
2사람의 군사령관이 전 영토를 2개의 군구(軍區)로 나누고 자국군(自國軍) 대신 외국인 용병부대가
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불안한 국내 정세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대외 위기였다. 11세기 후반
노르만인의 진출은 제국의 남이탈리아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으며, 1071년 로마누스 4세(재위 1068∼71)는
셀주크투르크군에게 패하여 소아시아 중앙에 룸왕국의 수립을 허용하였다(1080). 이러한 동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알렉시우스 1세는 베네치아에 군사원조를 의뢰하고 그 보상으로 제국영토 안에서의
무역·면세 특권을 주었다. 더욱더 혼란을 초래한 것은 페체네그·마자르 등 이민족의 남하와 침입이며
네마냐왕 아래에서 세르비아왕국의 번성과 제2차 불가리아왕국(1186∼1393)의 수립이었다.
이러한 외세의 압력이 정점에 이른 것은 제4차 십자군이었다. 이미 제1차 십자군(1096∼99)이 지나갔을 때
서구와 비잔틴제국 사람들 사이에 생긴 오해는 반감과 혐오와 적의로 변하였는데 제4차 십자군에서는
그 정점에 달했다. 그리고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을 기도한 베네치아 총독 엔리코단돌로는 이것을 계기로
수도 점령을 단행하기 위해 십자군과 힘을 합하였다. 이렇게 하여 1204년 수도는 함락되고 옛 제국령 안에
보두앵 1세를 황제로 하는 라틴제국(1204∼61)이 탄생했다.
후기
수도를 빼앗긴 옛 비잔틴제국 세력의 하나는 니케아(1204~61)에, 다른 하나는 에피루스(1204~1335)에
각각 망명 정부를 세웠다. 이 망명 정권 가운데 니케아제국은 불과 반세기 사이에 주변의 외적을 무찌르거나
화친하였으며, 미카엘 8세에 의한 펠라고니아전투(1259)의 승리로 그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리고 1261년 미카엘 8세는 옛 수도를 라틴제국으로부터 회복하여 팔레올로구스왕조를 열었다.
그러나 부흥된 제국은 국내외적으로 어려운 문제가 많았다. 대외적으로는 13세기 후반에 수도 탈환을
노리는 반비잔틴 세력에 시달렸다. 시칠리아 앙주가(家)의 책동으로 옛 라틴제국의 보두앵 2세는
수도 공략에 나섰는데 미카엘 8세는 반대로 <시칠리아의 만종(晩鐘) 사건(1282)>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국내 봉건화에 따른 악폐는 더욱 심해졌으며 행정의 혼란, 경제활동의 부진, 외국인 용병의 증가는
일반 시민과 농민층의 세금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이러한 내정상의 악순환은 외정상의 실패로 이어졌다.
가장 큰 실패는 14세기 오스만투르크에 대한 정책이었다. 소아시아의 부르사에 수도를 두고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투르크군은 니코메디아·니케아의 두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당면해서도
국내에서는 황제위계승문제로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수 없었다. 1365년 오스만투르크의 무라트 1세가
수도를 아드리아노플로 옮기자 비잔틴제국은 해상으로는 베네치아와 제노바에, 육지에서는 오스만투르크에
둘러싸인 동지중해의 작은 나라가 되었다. 이때부터 비잔틴제국은 술탄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으며
이로써 비잔틴제국은 정치적 독립을 잃게 되었다. 게속해서 오스만투르크군이 세르비아와 헝가리를 무찌르자
발칸반도에서 오스만투르크군에 대항할 세력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비잔틴제국은 동서
두 교회의 재통일을 조건으로 로마교황을 통해 라틴세계로부터 군사원조를 얻으려고 했지만 이것도 실패로
끝났다. 무라트 2세 이후 수도 공략은 날로 심해졌으며, 1453년 봄 술탄 메메트 2세는 농성군(籠城軍)의
10배나 되는 병력으로 수도를 포위하여 5월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비잔틴제국의 정치적 생명은
끝나게 되었다. 수도 함락에 이어 아테네·모레아·트라브존이 차례로 오스만투르크군에게 점령되었지만
그리스정교회만은 오스만투르크의 종교적 유화정책에 따라 존속이 허용되었다. 성화(聖畵), 교회음악과
교회건축으로 대표되는 종교예술은 그리스정교회와 함께 오늘날까지 비잔틴문화의 계승자로 남아 있다.
비잔틴제국의 정치·법률·문화를 수용하고 그리스정교를 국교로 한 슬라브의 여러 국가,
특히 불가리아·세르비아·루마니아·키예프·러시아(나중의 모스크바대공국)에는 제국 멸망 후에도
여러 방면에서 그 영향이 계속되었다. 그 중에서도 모스크바대공국의 이반 3세는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 11세(재위 1449~53)의 조카 소피아와 결혼하였다.
그는 비잔틴황제의 즉위식을 본보기로 대관식을 거행하고 스스로를 비잔틴제국의 후계자로 자처하였다.
또한 모스크바를 <제2의 로마(콘스탄티노플)>에 다음가는 <제3의 로마>라고 선언하였다.
330년 5월11일 로마 제국의 사실상 마지막 황제인 Constantinus가 신도시 콘스탄티노플의 준공식을 치르면서 동방 제국의 역사는 시작된다. 이후 서로마가 476년에 멸망하면서 동방 제국은 유일하게 남은 로마 제국이 된다. 아직 로마 제국의 멸망을 인정할 수 없었던 Justinianus는 이탈리아의 수복을 꾀하여 라벤나 총독부를 설치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미 역사의 시계추는 되돌릴 수 없었다...
Reo V. - Nicephorus III. Botaniates (A.D 813 - A.D 1081): 제국의 전성기 (The Apogee)
복잡하고 추상적인 신학 논쟁이 어지러이 전개되면서 황제와 총대주교는 권력을 놓고 줄다리기를 벌인다. 서방에서 끊어진 고전 문명은 동방 제국에서 화려하게 부활하고, 제국은 정치와 경제, 문화 모두에서 명실상부한 전성기에 접어든다. 그러나 불가리아를 복속시킨 Basilius 2세를 정점으로 제국은 쇠퇴의 기미를 맞는다. 그 결정타는 Manzikert 戰鬪였다...
Alexious I. Commenus - Constantinus XI. Palaiologus (A.D 1081 - A.D 1453): 쇠퇴, 그리고 함락 (The decline & fall)
서유럽 세계가 위상과 실력을 갖추는 것과 때를 같이하여 상대적으로 동방 제국은 쇠퇴를 보인다. 십자군의 시대를 맞아 서방과 동방은 같은 그리스도교 권이라는 일체감과 더불어 본격적인 라이벌 의식을 품게 된다. 이탈리아의 주인이 바뀔 때마다 동방 제국이 느끼는 위협은 점점 커졌지만, 정작 제국의 멸망을 가져온 것은 바로 투르크였다. 결국 콘스탄티노플은 이교도의 손으로 들어가고 제국은 1100년의 문을 닫는다...
비잔티움 제국의 통치조직은 고도의 관료제 조직으로 특징 지워진다. 한편 이 관료제에서는 行政과 軍事가 일치되어 있었는데, 이는 비잔티움 제국의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여 있던 사정에서 설명이 되리라. 한편 방대한 조직의 관료제를 유지하는 人力을 공급하는 수단으로서 로마제국 이래의 俗人敎育이 유지되고 발달하였다. 이는 동일한 시기 西方世界의 귀족들이 대개 문맹에 가까웠던 사정과 현저히 구별되는 특징이다.
군대의 주축은 重裝騎兵으로서 총 병력의 약 반을 차지하였다. 이들은 보병의 지원 없이 독립적인 전투를 수행할 수 있는 능력을 구비. 그 지휘관은 역시 귀족출신이었다. 그밖에 군역의 대가로 소 자영농민이 국유지를 보유하는 屯田兵制度를 채택하였다. 해상에서도 많은 위협을 받고 있던 제국은 강력한 함대를 육성했는데, 이 함대는 '그리스의 불'(Greek Fire)이라고 하는 일종의 화염방사기에 유사한 특수한 비밀병기를 갖추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는 Caesaropapism이라고 알려진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다. 이는 皇帝가 敎皇의 역할을 겸하는 강력한 교회의 통제를 의미하나, 실제로 황제의 권한은 Constantinople 總主敎를 선임하는 정도였다. 그러나 황제는 총대주교의 選任을 통해 교리논쟁과 교회행정에 관여할 여지가 있었으며, 어쨌든 동시대 서방에서 황제와 교황이 서로 갈등하는 처지와는 매우 차이가 있었다. 한편 황제의 교회 및 종교에 관한 권한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었으며, 경우에 따라 총대주교와 대립하여 인민의 비난을 받지 말도록 주의해야 할 처지이기도 했다.
비잔티움 제국의 교회는 그리스 철학의 영향으로 사변적인 경향이 강력했다. 따라서 서방교회와 달리 純正한 思辨에 치우쳐, 偶像 - 예수나 聖者의 像도 보기에 따라서는 우상이 될 수 있다 - 을 철저히 배격하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와 같은 입장의 차이로 동방 교회는 8세기경부터 서방 교회와 聖像崇拜(Iconoclasm)논쟁에 빠지게 되었다. 결국 9세기경에 이 논쟁은 한 때 잠잠했으나, 마침내 11세기 동방 정교회와 서방 로마 교회가 결정적으로 분리하게 되었다. (1054년, 20세기에 들어서야 비로소 화해)
이슬람 세계의 침입을 막아냄-'그리스의 불'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만년, 즉 6세기 중엽부터 비잔티움 제국에는 주변 제 민족이 연이어 침입하였다. 특히 우마이야 조의 칼리프였던 무아위야(재위 661-680)는 비잔티움 제국을 굴복시켜 번영하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 합병하려는 생각으로 674년에서 5년간에 걸쳐 이 곳을 포위 공격하였다. 비잔티움 제국 측은 이 전투에 전대미문의 신 병기를 등장시켜 격렬하게 저항하여 끝내 우마이야 군을 격퇴하였다.
그 신 병기는 시리아 태생의 유태인 칼리니코스가 발명한 것이라고 전해지고 있는데 이 무기는 일종의 화염방사기로 '그리스의 불'이라고 불렸다. 이 무기의 원료는 석유라는 설과 나프타라는 액체역청과 유황 및 나무기름 등의 혼합물이라는 설이 있어 확실하지는 않지만 짙은 연기와 맹렬한 불꽃을 내뿜는 무시무시한 것이었다고 한다. 만약 후자라면 이것은 완전한 화약으로 중국에서 처음 발명되었다고 알려져 있는 화약의 출현은 그보다 수백 년 거슬러 올라가게 되는 것이다.
서 로마 교회와 동 로마 교회는 어떻게 다른가?
제정(帝政) 말기의 로마는 외세의 잦은 침입과 군인 황제들의 등장으로 황제권이 극도로 약화되었다. 이에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가 로마의 정통성을 유지하기 위해 황제가 암살되더라도 정치 권력의 공백을 메울 수 있는 부황제 제도를 신설하였고, 후에 로마를 사분하여 두 명의 정제와 그 밑에 두 명의 부제가 정무를 보도록 하였다. 그러나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와 콘스탄티누스 황제 이후 로마의 중흥을 꾀하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죽은 뒤 인위적으로 분리되었던 로마는 정치적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되고, 서로마 제국은 게르만의 용병 대장 오도아케르에 의해 멸망당했으며, 동로마는 동방적 전제 군주 국가였던 비잔티움 제국으로 15세기까지 그 역사를 이어 갔다. 비록 로마는 정치적, 영토적으로 분리되었지만, 유럽인들의 정신세계를 지배했던 로마 교회는 분리되지 않은 상태로 서유럽뿐만 아니라 비잔티움 제국에까지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으며, 비잔티움 제국은 서로마 교회를 정치적으로 보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8세기 초 비잔티움 제국의 레오 3세가 내린 성상 숭배 금지령을 계기로 11세기에 이르러 동서 교회는 비잔티움 황제를 수장으로 한 그리스 정교와 로마 교황을 수장으로 한 로마 가톨릭으로 분열되었다.
그리스도교가 로마에서 공인된 이후 예수나 성모 그리고 순교자들의 성상(聖像)을 숭배하는 풍습이 생겨났는데, 특히 게르만의 개종 이후 서유럽에서는 선교 활동에 밋밋한 십자가보다 성상이 더 많이 활용되었다. 그러나 소아시아 지방이나 시리아 등지에서 십자가 이외의 성상을 숭배하는 행위에 대해 이단이라고 비판하는 소리가 높아지자 레오 3세가 이를 받아들여 성상 숭배 금지령을 내렸다. 그러나 서유럽 지역에서는 비잔티움 황제의 성상 숭배 금지령이 그리스도교 선교 활동에 지장이 있다 하여 이를 따르지 않았다. 결국 이것이 문제가 되어 서로마 교회와 동로마 교회는 분열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더 이상 서로마 교회를 정치적으로 보호하지 않았으며, 서로마 교회는 프랑크 왕국과 제휴하여 서유럽 사회의 정신적 지주로 성장했다.
동, 서 교회의 갈등(1054년 분리)
일찌기 8세기에 교황들은 성상 숭배에 관한 문제로 성상 파괴를 내건 비잔티움 황제들과 싸우게 되고, 이탈리아에 있는 비잔티움 제국의 적들을 지원하였다. 그 앙갚음으로서 최초의 성상 파괴자인 비잔티움 황제 레오 3세는 교황의 관할구에서 남이탈리아와 발칸 지방을 떼어 콘스탄티노플의 총대주교 관할구에 덧붙였다. 그러나 교황의 위신과 재정에 가한 이 타격조차 이 시기에 교황을 비잔티움에서 분리시키는 결정적인 문제로 되지는 않았다. 결정적이었던 것은 비잔티움이 북아프리카에서 쳐들어오는 아랍인이나 알프스를 넘어 쳐들어오는 롬바르드족에 대하여 이탈리아와 교황청을 방어할 힘이 없다는 교황의 정치적 판단이었다. 교황이 8세기에 피핀과 샤를마뉴에 의존하고 800년에 서방에 새로운 제국(서로마 제국)을 만들어 낸 것은 비잔티움인이 하지 못하는 방어를 단단히 하여 롬바르드족을 막기 위해서 였던 것이다.
동, 서 교회는 교리상으로도 약간의 차이는 있으나 성상 숭배 문제와 더불어 정치적인 문제가 개입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는 로마 교황의 영역을 빼앗아 교황의 위신과 재정 상태에 타격을 주었고, 교황은 자신의 보호자로 비잔티움 제국을 더 이상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서기 800년 서로마 제국의 성립은 이러한 대립을 결정적으로 확인하는 것이다. 원래 한 뿌리에서 나온 동, 서 교회는 성상 숭배 문제, 교황과 황제의 정치적 갈등으로 갈라지게 된다.
그리스 정교(Greek Orthodox Church)
1054년 이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수장(首長)으로 하여 정통적인 그리스도교회임을 자처하는 여러 교회의 일단. 그리스도교는 대체로 가톨릭교회·그리스정교회·프로테스탄트교회로 나뉜다. 그리스정교회는 동방교회(東方敎會;Ecclesia Orientali)라고도 하며, 처음에는 로마교황을 수장으로 했으나, 지나친 국가주의·민족주의 등의 원인으로 교리의 차이가 생겨 로마교회에서 분리되었다. 이것을 동방이교교회(東方離敎敎會)라 한다. 이에 대해 현재도 로마교회에 충실한 교회를 동방교회 또는 동방귀일교회(東方歸一敎會)라 한다. 그리스정교회는 전자를 말하며, 신도수는 약 1억 5000만이다. 그리스정교회가 가톨릭교회에서 분리된 것은 각기 그 지방의 종교적 전통의 차이에서 오는 것이지만,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은 로마제국의 동서분열의 결과로서 정치적 이유에 의해서였다. 즉 서로마에서는 교황과 황제가 대립하고 있었으나 동로마에서는 정치와 종교가 협력하고 있어 로마와 콘스탄티노플과는 점차로 멀어져 갔다. 그 외에도 성상 숭배 논쟁과 교황 수위권 문제를 들 수 있는데, 성상 숭배 논쟁은 842년에 해결을 보았으나, 교황 수위권 문제는 9세기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포티우스의 취임에서 발단하였다. 서로마의 교황은 그 우월권을 주장하고 동로마는 총주교의 독립을 주장하여 정면 충돌을 일으켰다. 1054년에 이르러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는 로마교회의 의식과 교리를 크게 비난하여 당시의 교황 레오 9세는 화해의 사절을 콘스탄티노플에 파견했으나 받아들이지 않으므로 결국 교황사절은 그곳의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파문했다. 그로써 분열이 확정되었고, 그 뒤 오늘날까지 여러 번 서로 화해를 시도했으나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453년 비잔티움 제국이 멸망하자 그리스정교회는 이슬람 교도의 압박을 받고 중세에 시달렸으나, 1830년 그리스 독립과 동시에 그리스정교회는 투르크 지배의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에서 독립, 1878년에는 불가리아, 루마니아, 세르비아의 독립과 동시에 정교회도 또한 총주교 관구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한편 러시아에서는 989년 키예프 공(公) 블라디미르가 그리스도교로 개종한 이래, 그리스도교는 러시아에 침투, 동로마 제국 멸망 후에는 그리스정교회 사상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이반 4세는 교회의 지지로써 러시아를 통일, 1589년에는 러시아의 총주교 관구가 설치되어 교회는 황제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었고 국가는 교회를 보호하여 그리스도교는 번영하였다. 가톨릭교회와 그리스정교회의 차이는 교회관(敎會觀)의 차이에 있다. 즉 가톨릭에서 교회를 불가견적(不可見的) 신비체인 동시에 교황을 수장(首長)으로 하는 가견적(可見的) 통일체라고 하는 데 대해 그리스정교회는 사랑과 은총에 의한 불가견적 통일체임을 강조한다. 그리고 로마교황을 베드로의 후계자로서 교회의 수장이며 신앙 개조(箇條)의 결정과 신앙 도덕에 관한 최고의 결정자라고 하는 교황 수위권(首位權)에 반대하고 있다.
비잔티움 문화의 전파와 계승
988년 러시아의 군주 Vladimir가 정교회로 개종한 이래, 러시아는 그리스 정교를 宗旨로 받드는 교회와 문화적 체질이 형성. 나중에 비잔티움 제국이 몰락한 뒤, 그 후계자로서 이른바 제 3의 로마를 자처하게 되었다(Czar, Tsar라고 하는 러시아 황제의 稱號와 Caesar라고 하는 옛 로마 황제의 칭호가 갖는 연관성을 주목하라).
한편 서방과는 대체로 불화하였거나 불편한 관계가 主潮를 이루었다. 이미 로마 제국이 멸망한 직후의 혼란기에 비잔티움 제국은 서방에 별다른 원조를 제공할 수가 없었는데, 특히 로마교황이 渴求하던 보호를 제공함이 없이 무익한 성상숭배 논쟁만을 야기한 바 있었다. 이러한 사정에서 로마교황은 카롤링거 왕조(Carolinger)와 연결되고, Carolus Magnus를 로마제국의 황제로 戴冠했다. 비잔티움 제국은 이 문제로 카롤링거 왕조와 그리스도교 세계에 대한 지도권을 둘러싸고 불편한 관계에 처하게 되었다.
한때 Otto왕조와 연합하여, Otto 2세의 황후로 Macedonia 왕가의 황녀 Theophano를 출가시켜, 對이슬람연합전선의 구축을 시도한 바 있었으나, 영속적인 관계로까지 발전하지는 못했다. 中世盛期에 비잔티움 제국은 투르크 족의 압력에 못 이겨 로마 교황을 통해 서방에 원조를 요청, 여러 세기를 끈 십자군 원정이 시작되었으나, 이는 결국 비잔티움 제국의 세력을 약화, 특히 제 4차 십자군은 Constantinople을 약탈하고, 국체의 보존까지 위협(일시 라틴 제국이라는 국가가 수립)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비잔티움 제국은 동, 서 문명의 교차로에 위치하여, 서방세계에 대하여 이슬람의 압력을 막는 방파제의 역할 수행. 한편 고대세계와 문화적 연속성을 보존함으로써, 특히 그리스의 고전문명을 보호했다(서유럽의 르네상스에 간접적으로 기여하였다).
키예프 공국과 블라디미르 1세
이슬람의 위협이 사라진 후 또 다시 비잔티움 제국을 위협한 것은 북쪽의 슬라브인들이었다.9세기 노르만인들은 노브고르드 왕국, 키예프 공국을 세워 슬라브인을 지배하였으나 압도적으로 많은 슬라브인에게 점점 동화되어 갔다. 그 중 키예프 공국은 10C말―11C 블라디미르 1세와 그의 아들 야로슬라프(재위1015~1054) 때 전성기를 이루었다. 키예프 공국은 드네프르강과 바다를 통해 비잔티움 제국과 활발하게 교역하면서 동시에 남러시아의 스탭 지대를 통과하는 이른바 '초원길'을 거쳐 많은 아시아계 유목민족과도 교류를 하고 있었다.블라디미르 1세가 비잔티움 황제의 여동생과 결혼하여 그리스 정교와 유럽 문화를 받아들인 후 이들은 러시아 문화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는데 그 간의 사정을 러시아 연대기를 통해 알아 보도록 하자.
블라디미르 1세의 그리스 정교 수용
"바야흐로 나는 그대들의 번영의 도시를 점령하였다. 그대에게 미혼의 여동생이 있다고 들었다. 만약 그녀를 나의 황후로 내주지 않으면 그대들의 도시 역시 이 도시에서 한 것과 똑같은 방법으로 파괴해 버릴 것이다."
이를 들은 황제는 비탄에 잠겨 다음과 같은 회답을 보내 왔다.
"그리스 정교는 이교도에게 자녀를 출가시키는 일은 허락되지 않는다. 만약 당신이 이 선례를 따른다면 황후를 얻고 나아가 천국으로 이어진 우리들의 종교를 가진 자가 되어라. 만약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여동생을 당신에게 줄 수 없다."
블라디미르는 이를 듣고 황제의 사신에게 말했다.
"황제에게 이렇게 고하라. 나는 선례를 따르겠다. 왜냐하면 이미 나는 그대들의 믿음을 조사했는데 우리가 파견한 부하들이 보고한 너희들의 신앙과 근행은 내 마음에 흡족하기 때문이다."라고.
황제는 이를 듣고 크게 기뻐하며 안나라는 여동생에게 승낙을 간원하여 사신을 블라디미르에게 보내....그러나 그녀는 가기를 꺼려하며 "우리는 붙잡혀 가는 것과 다를 바 없는 몸, 여기서 죽는 편이 낫습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녀의 오빠들은 그녀에게 말했다.
"신은 너를 통하여 루시의 땅(키예프 공국을 가리킴)을 회개의 땅으로 만들려 하심이다. 너는 그리스 국을 무서운 전쟁으로부터 구하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루시가 얼마나 많은 재앙을 그리스에 초래했는지 모른단 말인가? 만약 지금 네가 가지 않는다면 그들은 똑같은 일을 우리들에게 저지를 것이다."
이리하여 겨우 그녀의 승낙을 받아냈다. 그녀는 배에 올라 타 눈물을 흘리며 육친들에게 입을 맞추고 먼 바닷길에 올랐다.
블라디미르는 그리스 정교 외에 이슬람교와 유대교에 대해서도 연구를 하고 난 후 황제교황주의를 채택한 그리스 정교가 전 러시아 민족들을 지배하는 데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레고리우스 7세의 연설
"우리는 이교도들이 그리스도교 제국을 압박하고 있으며, 거의 콘스탄티노플에 이르기까지 국토를 잔인하게 황폐하게 하였고, 수 천명의 그리스도 교인들을 양처럼 도살했다고 듣고 있습니다. 그런 고로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그리스도 교인임을 자인한다면, 위대한 제국의 비틀린 운명과 많은 그리스도교인의 살해에 대하여 마땅히 비탄에 빠지게 됩니다."(1074년)
이 연설은 로마 교황이 비잔티움 제국의 상황을 전하면서 그들을 도와주자는 의도로 행한 것이다. 이 글을 통해서 당시 동로마 제국은 이민족, 특히 셀주크 투르크의 시달림을 받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잔티움 제국의 이민족과의 항쟁은 자신들의 생존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하지만 결과적으로 서유럽으로 통하는 길목에서 이를 지켜 주는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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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교회 (東方正敎會, Eastern Orthodoxy)
가톨릭 교회·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와 더불어 그리스도교 3대 교파 가운데 하나. 그리스 정교회(Greek Orthodox Church), 또는 정교회라고도 한다. 넓은 뜻의 동방 정교회는 후일 중국으로 들어와 경교(景敎)라고도 불리게 되는 네스토리우스 교회라든지 그리스도 단성론(單性論)으로 여겨지는 아르메니아 교회, 이집트의 콥트 교회, 에티오피아 교회 등 그리스도교의 이단 그룹을 포함한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라고 할 경우는 좁은 뜻의 동방 교회, 즉 중동(中東)·동유럽·러시아를 중심으로 하는 15개 자립교회의 연합체를 일컫는다. 동방 정교회는 다른 2대 교파인 가톨릭 교회나 프로테스탄트 여러 교회와 비교한다면 대체로 낯선 편이다. 그러나 동방 정교회는 원래 고대교회의 전통을 이어받고 있으며, 원시 그리스드교의 정신을 잘 전해왔다. 고대 교회는 로마 제국에서 발생하여, 전교구(全敎區)를 예루살렘·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로마 등의 5대 교구로 나누었다. 그 중 로마 교회만이 11세기에 분리되어 나가, 이후 로마 가톨릭 교회로서 발족했으며, 다른 동로마(비잔티움) 제국 내의 여러 교회는 동방 정교회로서 발족했다. 그 후 16세기 중엽에 이르러 비잔티움 제국이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하였기 때문에 그 대신 러시아가 동방정교의 대국(大國)으로 등장하였다. 서방(라틴) 교회의 상대적 의미로 동방교회라 호칭되지만 더 깊은 뜻은 죽음에서 부활한 빛인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빛나는 태양이 동방(東方)에서 떠오른다는 데 있다. 파스카(Πασχα)라고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 대축일을 서방에서는 아직도 ‘East Day’(동방의 날)라고 한다. 동방정교회라고 할 때 정(正:Orthodox)이란 사도전통 ·교부전통의 올바른 가르침, 올바른 믿음, 올바른 예배의 의미를 지닌다. 동방정교회는 보편적 신앙의 교회이므로 그냥 정교회(Orthodox Church)라고 부르는 것이 정상이다. 정교회에서는 세계공의회(世界公議會:Ecumenical Council)를 최고의 권위로 인정한다. 주교들은 신앙의 문제를 결정할 때 전체교회의 승인과 동의를 받는 것이 필수조건이다. 그래야만 공의회가 성령의 인도를 받았다는 것이 확실히 인정되는 것이다.
역사와 본질
그리스도가 주창한 그리스도교는 민족종교인 유대교를 초월한 세계종교이고, 그 이상주의적 체질이 로마제국의 현실적·국가주의적 체제에 적합하지 않아, 결국 그리스도는 십자가에 못박혀 처형되었다. 그러나 사흘 뒤에 부활하여, 40일이 지나 다시 승천했다. 그의 가르침은 베드로·바울 등의 사도들에 의해 로마제국 영토 내의 각지로 퍼졌다. 로마제국에서는 당초 그리스도교도가 박해를 받고 순교자가 속출하였으나, 313년에 콘스탄티누스 대제(1세)에 의해 간신히 공인되었다. 그들은 탄압을 받으면 받을수록 굳게 단결했으므로, 그리스도교를 차라리 공인해 주는 쪽이 사회질서 유지에 도움이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교가 보급된 지역은 대개 그리스문화의 영향을 받고 있었으나, 로마교구만은 문화적으로 뒤져 있었고 총주교는 다른 총주교들에 비해 종교적 권위뿐만 아니라 정치적 권위까지도 필요로 하였기 때문에 교황이라는 이름을 스스로 붙였다. 고대교회의 신앙의 요점을 정하는 공의회(公議會)가 니케아·콘스탄티노플·칼케돈 등지에서 7회에 걸쳐서 열렸다(325∼787). 결정된 내용은 그리스도는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세상에 태어난 완전한 신이자 완전한 인간이고, 그 2개의 성, 즉 신성(神性)과 인성(人性)은 구별되지 않으며, 분리될 수가 없다는 주지(主旨)였다. 몇몇의 설(說)은 이단으로 규정되었다. 아버지인 하느님과 아들인 그리스도의 동질성을 부정한 아리우스의 설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그리스도의 인성을 중요시한 네스토리우스의 설은 431년 에페수스 공의회에서, 알렉산드리아 신학자들의 신성을 중요시하는 그리스도 단성론은 451년의 칼케돈 공의회에서 이단이라고 규정되었다. 또,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를 중심으로 하는 교회 내부에서도 8∼9세기에 성상(聖像)파괴운동이 일어났고, 결국 성화상(聖畵像)을 파괴하는 것도 이단으로 간주하기로 결정했다. 동서 양 교회간에는 정치적으로 틈이 생겼는데, 교황 레오 3세에 의한 프랑크 국왕 샤를마뉴 대제의 대관은 로마 황제권에 대한 반역이라고도 할 만한 사건이었다. 콘스탄티노플에서는 포티우스라는 인물이 일개 외교관에서 단번에 총주교로 뽑혀 로마교황 니콜라스 1세가 반발하고 나섰다. 또 교리상의 다툼도 있었다. 성령(聖靈)의 발출(發出)을 둘러싸고 <니케아 신경(信經)>의 <아버지로부터>에 로마 측이 <및 아들로부터>를 첨가한 사실에 대해 동방이 비난했다. 또, 성직자의 결혼금지라든지 효모를 넣지 않는 빵을 성체(聖體)로서 사용하는 일 등 로마 측의 관행에 대해서도 동방이 반대했다. 이러한 대립 속에서 1054년 결국 고대교회는 동서로 분열하여, 서방은 서방 가톨릭 교회, 동방은 동방정교회가 되었다. 1204년에, 제4회 십자군의 서유럽 병사가 큰스탄티노플을 공격했기 때문에 서방 그리스도교가 비잔티움 제국에 적대적인 입장을 취하게 되어, 양 교회의 대립은 한층 깊어졌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멸망했고,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하의 동방 정교회는 19세기 중엽에 그리스가 터키로부터 독립하기까지 약 350년 동안 터키의 지배 하에 놓였다. 이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이 터키의 지배 하에 있었던 동안은 러시아가 그 대신 정교의 대(大)보호국이 되었다. 현재의 동방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예루살렘·불가리아·러시아·그루지아·세르비아·루마니아·그리스·키프로스·알바니아·폴란드·체코·일본 등 자립교회로 되어 있다. 서유럽이나 미국 등에도 이주자 또는 망명자들에 의하여 교회가 세워지고 있다. 정교의 신자총수는 약 1억∼1억 5000만 명으로 짐작된다. 일곱 공의회 정교회에서는 일곱 공의회, 즉 325년의 제1차 니케아 공의회, 381년의 제2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431년의 제3차 에페소스 공의회, 451년의 제4차 칼케돈(할키돈) 공의회, 553년의 제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680년의 제6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 787년의 제7차 니케아 공의회의 결정사항을 준수한다. 일곱 공의회에서 결정된 주요내용은 먼저 교회의 신조(Creed:니케아·콘스탄티노플 신경)가 확정되어 교회의 신앙으로 지금까지 고백되고 있다. 다음으로 전체 그리스도 교회의 가시적 조직이 선언되었는데, 대표적인 행정구역으로 로마·콘스탄티노플·알렉산드리아·안티오키아·예루살렘인데 이를 펜타르키(Pentarchy:5집정 관할구역)라고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성육화(成肉化:Incarnation)의 교리와 연관적으로 성모 마리아의 호칭은 테오토코스(θεοτοκοζ:하느님의 어머니)로 결정되었으며, 삼위일체(三位一體) 교리를 확고히 하였다. 끝으로 성화상(聖畵像:이콘) 공경은 성화상이 상징하는 내용을 공경하는 것임을 확실히 하였다. 교회와 이교 그리스도교계의 대표적인 문화권은 셈 문화권·그리스 문화권 ·라틴 문화권 등 3문화권으로 대별할 수 있다. 초대교회 때 신학자들과 저술가 그리고 교회학교로 번성했던 셈 문화권의 교회(Oriental Church) 곧 네스토리우스 교회와 아르메니아 교회, 시리아 교회(Jacobite Church라고도 함), 이집트 교회(Coptic Church), 에티오피아 교회, 인디아 교회는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소위 단성론파(單性論派:Monophicism)라는 이름으로 갈라져 나갔다. 두 번째로는 로마교황을 중심으로 한 라틴 문화권 교회(Western, Latin, Roman Catholic Church)와 그리스 문화권 교회(Eastern, Greek Orthodox Church) 간에는 문화적 ·정치적 ·경제적 요소들과 교황권 및 필리오퀘(Filioque)라는 문제로 갈라지게 되었다. 그 후 1274년에는 리옹에서, 1438년에는 피렌체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위협에 직면한 그리스 교회가 라틴 교회와 화해의 시도가 있었으나 무산되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멸망과 지역 정교회의 독립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투르크에게 함락되어 그 이름도 이스탄불로 바뀌었고 역사적인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아야 소피아 모스크로 바뀐 뒤 오늘에 이르고 있다(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됨). 오스만 투르크 치하에서 동방정교회는 제2등급 종교로 전락되는 한편, 교회조직은 오스만 투르크 정권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되었다. 그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가 되려면 오스만 투르크 정부의 재가를 얻어야 했고, 상당한 대가(세금과 같은)를 지불해야 했다. 총주교의 자리는 주로 반 라틴적인 인물에게 주어졌다. 오스만 투르크 정권은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 등의 총주교좌를 형식적으로는 정교회의 독립관구로 인정하면서 실제로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좌에 예속시켰고 불가리아와 세르비아도 콘스탄티노플에 종속되게 하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오스만 투르크로부터 정치적 독립을 획득한 국가의 정교회들은 콘스탄티노플의 간섭에서 독립을 선언하였다. 그리스는 1833년, 루마니아는 1864년, 불가리아는 1871년, 세르비아는 1879년에 각각 독립을 선언하면서 자치적 교회로 행보 함으로서 콘스탄티노플의 관할구역은 아주 작아지고 말았으며, 아직도 터키정부의 압력 하에 있다. 러시아 정교회 기원 후, 1세기경 사도 안드레아가 처음으로 예루살렘에서 북동쪽 대륙으로 선교의 발걸음을 옮겨서 흑해(黑海) 주변 시노페와 코르순 지역에서 선교했다고 한다(교회사가 유세비우스의 기록). 사도 안드레아가 방문 선교했던 지역은 후일 키예프와 노보고라드라는 러시아에서 유명한 도시로 발전하였다. 988년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980~1015)이 세례를 받음으로서 정교회는 러시아의 국교가 되었다. 1019년 야로슬라브 공(1015~1054)이 키예프 러시아의 권력자가 되어 러시아를 그리스도교화 하는 데 공헌하였다. 1037년에는 테오 펨프스 대주교가 키예프 러시아의 수좌주교로 착좌하였다. 1237년 11월 바투가 40만 대군을 이끌고 러시아를 침입하여 1240년에 키예프를 점령한 이후 러시아는 몽골의 지배 하에 들어갔다. 알렉산드르 네프스키 대공의 막내아들 다니엘은 모스크바를 중심으로 영토를 확장했다. 전쟁으로 찌든 러시아 백성들은 모스크바로 몰려들었고 이반 1세(다니엘의 둘째아들) 때에는 모스크바가 전체 러시아의 수도가 되었다. 1380년 9월 8일, 약세의 러시아 군대는 40만 몽골대군을 격전 끝에 격파함으로써 러시아는 정교회 국가로 남게 되었다. 1472년 이반 3세(1462~1505)는 마지막 비잔티움 황제의 조카딸인 소피아 팔라이올로기나와 결혼하고 쌍두(雙頭) 독수리 문장(紋章)을 취하고 자칭 차르, 곧 황제가 되어 비잔티움 제국의 후계자로서 러시아를 제3의 로마라 불렀다. 1589년 모스크바 총주교좌가 축성되어 욥(1589~1605)이 초대 총주교로 취임하였다. 1917년 이래로 무신론 공산주의자들은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파괴했다. 1918년 2월 1일 총주교 티콘은 무신론 정권을 파문하고 무신론 정권에 동조하는 성직자들의 집단, 곧 ‘살아 있는 교회’를 단죄하였다. 1920년 11월 20일 티콘 총주교는 자기가 투옥될 것을 예견하고 주교들의 자치적인 조직을 증언하는 교령을 발표했다. 1921년 세르비아 총주교의 입회 하에 칼루프치에서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를 조직하였다. 1922년 서유럽의 엑사르크 에블로기 수좌대주교와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주교들은 러시아 밖의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를 재조직하였다. 1921년 이후 러시아 밖의 러시아정교회 시노드는 유고슬라비아의 칼루프치에서 독일 뮌헨으로 그 본부를 옮겼다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뉴욕으로 옮겨서 지금까지 전 세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41년 나치 독일의 침략을 받던 스탈린은 교회의 협력을 얻기 위하여 러시아 안의 정교회에 다소 자유를 주었다. 당시 소련 헌법에는 반종교 활동의 자유가 있다는 조항을 두어서 교회의 사회활동 금지, 사제교육 금지, 종교교육 금지, 액션단체 조직 활동 금지, 교회 내 도서실 폐쇄, 성경 및 교회서적 출판금지, 교회의 토지 ·건물 ·현금은 언제든지 몰수할 수 있게 되어 있었다. 1990년 이후, 종교의 자유가 선포되자 교회의 개방은 급격히 증가되어 90년 모스크바 관구에는 40개의 성당이 문을 열었다. 1993년에는 300여 개가 넘는 성당들이 문을 열고 열심히 선교사업에 열중하고 있다. 한국의 동방정교회 러시아정교회는 1897년 러시아정교회 시노드가 한국(조선)에 선교사 파송을 발의함으로써 러시아정교회의 한국선교사업은 시작되었다. 1898년에 니콜라이 부제가, 1900년에는 크리산토스 신부가 입국하여 본격적인 선교사업을 펼쳤다. 그러나 청일전쟁, 러일전쟁, 무신론 공산주의 혁명, 제1, 2차 세계대전, 6 ·25전쟁을 겪는 동안 한국에서의 러시아정교회는 침체를 벗어나지 못했다. 러시아정교회 한국인 첫 사제는 요한 강탁(1912년 서품)이었으며 두번째로 루가 김희춘 신부가 방인사제로 활동했고(1924), 1950년 북한 공산당에 의해 강제 납북된 알렉세이 김의한 신부의 활동이 있었다. 1956년 한국의 정교회 공동체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관할이 됨으로써 한국에서 러시아정교회 선교사업은 사실상 막을 내린 셈이 되었다. 그러나 1994년 부활절에 러시아정교회 시노드(해외)는 러시아 상트 페테르부르크 정교회 신학 아카데미에서 수학한 유스틴 강태용(姜泰鎔) 신부를 러시아정교회 한국선교부 주관사제로 임명함으로써 한국에서의 러시아정교회 선교활동은 다시 시작되었다. 그리스정교회는 1954년 주한 그리스군 종군사제로서 활동하던 안드레아스 할키오풀로스 신부가 보리스 문이춘을 사제로 추천하여 일본정교회에서 사제 서품을 받게 하였다. 1956년 보리스 문이춘 신부는 한국에 남아 있던 정교회 공동체를 이끌고 콘스탄티노플 관할 미국 그리스정교회 대관구에 소속되었다가 1970년 이후 뉴질랜드 대관구로 소속을 옮겼다. 1975년 말 그리스정교회 아르키 만드링 소티리오스 트람바스 신부가 내한하여 그리스정교회 선교활동을 주도하였다. 그는 1993년 초에 주교로 서품되었다. 1995년 4월 8일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바로톨로메오스 1세(이스탄불 주재)가 5박 6일 일정으로 한국을 방문하였다.
가르침과 전통
정교회의 가르침은 성경과 성전(聖傳:Sacret Tradition)에 기초한다. 성경은 70인역(Septuaginta)으로서 구약 49권과 신약 76권이다. 구약에 붙어 있는 제2경전(외경)은 교리나 신학적으로 권위는 없다. 교회력은 대체적으로 율리우스력을 사용한다. 교회력의 중심이 되는 부활절은 춘분이 지나고 음력 보름이 지나서 다시 한 주간이 지난 주일이다. 성탄절은 1월 7일이다. 성사는 대표적으로 7가지 성사가 있다. 그러나 수(數)에 구애되지는 않는다. 집행 상 라틴교회와 다른 것은 견진성사에서 주교가 축성한 성유(聖油)로 사제가 집전한다. 성체 ·성혈 성사는 아기에게도 해준다. 신품성사에서 독신 남성, 기혼 남성 모두가 서품 될 수 있지만 서품 후에는 결혼 또는 재혼은 할 수 없다. 주교는 독신 성직자와 홀로 된 성직자 중에서 선임된다. 정교회 예배는 다양하다. 연중 매주일 아침(때로는 토요일 밤)에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기념하는 예배, 곧 조과(早課)가 집전된다. 물론 성령강림절은 제외된다. 그리고 만과, 시과예배가 있고 절기와 교회력에 따른 다양한 예배가 있다. 정교회 예배 중 대표적인 것은 리투르기아라고 하는‘거룩한 성찬예배’이다. 교의(敎義) 동방정교회는 원래 고대교회의 계속이며, 원시 그리스도교의 정신에 충실하다. 동방정교는 서방 그리스도교에 비해서 의(義)보다는 사랑, 십자가보다는 부활, 죄보다는 구원을 중요하게 여긴다. 신인일체(神人一體)이며, 신인현격(神人懸隔)은 아니다. 서방측은 그리스도교가 성(聖)과 속(俗)을 구별하고 정신을 물질보다도 우위에 놓으며 정교분리(政敎分離)의 경향이 있는 것과는 달리 동방정교는 성속일치·영육일치(靈肉一致)·정교일치가 특징을 이룬다. 가톨릭이 연옥(煉獄)을 인정하고, 마리아의 무원죄설(無原罪說)을 펴고 있는 것과는 달리 정교에서는 연옥을 인정치 않으며, 마리아의 무원죄설을 펴지 않는다. 가톨릭 신학이 사변적(思辨的)·체계적이고 신에 대해서 지적(知的)으로 배우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정교에서는 신앙체험, 즉 신학이다. 그리스도교 문화 속에서 살면서 신을 체험적으로 몸으로써 배우는 것이 동방정교신학이다. 정교에서는, 신학이 논문으로서보다도 성가(聖歌)·이콘·교회규칙 또는 주교들의 서한이나 설교형태 등으로 제출된다. 정적주의(靜寂主義)는 아토스산(山) 출신의 성 그레고리우스 팔라마스가 주장한, 정적 속에서 <주기도문>을 외며 하느님을 명상하는 수도법(修道法)으로서, 이는 비잔티움 신학을 대표하고 있다. 조직 교회의 조직에서도 동방정교회는 가톨릭 교회보다 덜 권위주의적이다. 가톨릭 교회에서는 교황무류설(敎皇無謬說)을 펴며 교황을 정점으로 하는 피라미드형(型)이며, 일반신도를 평신도라고 부른다. 그러나 정교에서는 교황무류설 대신 교회무류설을 펴고, 주교나 사제는 개인적 권위를 지니지 않으며 일반 신도를 평신도라고는 일컫지 않는다. 동방정교의 성직자로는 주교·사제·보제직(輔祭職)이 있다. 사제·보제에는 수도와 재속(在俗)의 구별이 있고, 수도사제·수도보제는 결혼하지 않는다. 주교 이상은 수도사제가 아니면 될 수가 없고, 주교 위로는 대주교·부주교(府主敎)·총주교(總主敎)가 있다. 전례(典禮) 동방정교회에서, 교회생활의 기준을 가르치는 것을 성전승(聖傳承)이라 한다. 성전승에는 성서, 공의회(公議會)의 결정, 성사부(聖師父)의 저서, 전례, 성가(聖歌), 이콘 등이 있다. 그 중에서도 전례(리토르기아·奉神禮·公祈禱라고도 한다)가 가장 중요하다. 그것은 하느님을 섬기는 사람의 의무이고, 신도가 평생 그리스도의 삶을 스스로의 삶으로 삼기 위한 것이며, 신도에게 생활의 지혜와 신조(信條;마음가짐)를 제공한다. 전례에는 입회예의(세례), 성체예의(포도주와 빵을 먹음으로써 그리스도의 피와 살을 같이 나눈다), 생활예의, 시기적(時機的)인 예의 등이 있다. 전례에 참가하는 사람은 성서가 경전(經典)임과 동시에 성가의 책임을 의식한다. 동방정교회에서는 성가를 부를 때 악기를 전혀 쓰지 않는데, 이는 성가는 마음 속으로부터의 기도이므로 악기가 필요 없다고 보기 때문이다. 또 이콘은 그리스도·마리아·성인(聖人)들의 성화상(聖畵像)으로서, 신자는 이콘에 그려져 있는 내용을 숭배한다. 정교에서는 죄보다도 구원, 십자가보다도 부활을 중요시하고, 축일로는 성탄제(크리스마스)보다 부활제를 더 중요하게 여긴다. 파스하·과월제(過越祭;유월제)라고도 한다. 신자는 이 축제에 참가함으로써, 이 세상의 종말로부터 내세(來世)의 생명으로 이어져 가는 인간의 과정이 그리스도의 부활에 의해서만 가능함을 기억한다. 대체로 동방정교회 의식은 서방 그리스도교에 비해 동양적 색채가 짙다.
오늘날의 동방 정교회
고래(古來)의 4개 총주교 관구(Patriarchate)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 고대 전승에 따르면 1세기경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 비잔티움 지역이 선교되었으며 사도 안드레아가 사도 스타키스를 비잔티움의 주교로 임명하면서 주교구가 세워졌다고 한다. 콘스탄티노플 총주교는 세계총주교의 명예를 지니며 381년 콘스탄티노플에서 개최된 제 2차 세계 공의회에서 콘스탄티노플은 '새로운 로마'로서 구(舊) 로마에 이어 두 번째 서열을 지니게 되었고 후에 세계총주교는 동방 정교회에서 '동등함 중에서 첫 번째(primus inter pares)'의 지위를 얻었다. 현재 세계총주교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구 뿐만 아니라 서유럽 대관구, 남북미 대관구, 호주 대주교구, 뉴질랜드 대주교구 등을 모교회(母敎會)의 영적 지도자로서 관할하고 있다. 알렉산드리아 총주교 관구: 알렉산드리아의 총주교는 아프리카에 있는 정교회의 영적 지도자로서 교황(Pope)이란 호칭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에 이어 세 번째 서열을 지닌다. 알렉산드리아는 69년에 사도 마르코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사도 마르코에 의해 알렉산드리아 교회가 세워졌다. 안티오키아 총주교 관구 : 안티오키아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예수님의 제자들이 그리스도인이라고 처음 일컬어진 곳이다. 안티오키아의 총주교는 사도 베드로와 바울로로부터 이어지는 사도계승을 지니며 안티오키아와 주변의 중 근동 지역 교회를 관할하는 네 번째 서열을 지닌다. 예루살렘 총주교 관구 : 예루살렘 교회는 가시적인 교회의 출발지로서 사도 야고보가 예루살렘 교회를 관할하였다. 451년 칼케돈에서 개최된 제 4차 세계공의회에서 5대 총주교 관구(Pentarchy) 중 안티오키아에 이어 다섯 번째 서열을 지닌 총주교구로 설정되었다. 10개의 독립교회(Autocephalous churches) 독립교회란 초대교회 시대에 역사적 기원을 둔 고래(古來)의 총주교 관구에 속하지 않고 자립적인 지역공의회를 인정받은 지역정교회이다. 러시아 정교회 : 전승에 의하면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 후에 러시아가 되는 스키티아 지역이 선교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러시아 민족이 그리스도교화한 것은 988년 당시 키예프 공국의 블라디미르 대공이 세례를 받으면서부터였다. 초기 러시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1589년 자립적인 총주교구로 승격되었다. 그루지아 정교회: 그루지아 지역은 사도 안드레아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이미 4세기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널리 전파되었다. 초기 그루지아 정교회는 안티오키아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5세기에 자립적인 가톨릭코스(Catholicos) 지위를 얻은 후 11세기에 총주교구로 승격되었다. 세르비아 정교회: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슬라브인 선교 이래 메토디우스의 후계자들에 의해 세르비아 지역이 선교되었다. 세르비아는 역사적으로 9세기경 당시 무투미르 왕자가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으면서 정교회 국가가 되었는데 초기 세르비아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사바 대주교의 영적 지도 아래 부분적인 자치권을 얻은 후 1346년에 세르비아의 총주교구로 승격하였고, 1375년에 자립적인 총주교구 지위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청에 의해 인준되었다. 루마니아 정교회: 전승에 의하면 사도 안드레아가 2 세기경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다뉴브강 하류에 도착하였다고 전해지는데 그 사실의 신빙성 있는 발굴은 당시 다뉴브강 하류 지역에 최초 루마니아인들의 조상인 다키아인들의 도시들이 발굴됨으로 알 수 있다. 사도 안드레아가 전한 복음은 다뉴브강 북쪽에 전파되었고 4 세기에 첫 주교좌가 루마니아에 설립되었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슬라브 민족이 아니라 라틴 민족의 동방 정교회라는 특색을 지니고 있으며 역사적으로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슬라브인 선교의 깊은 영향을 받았다. 루마니아 정교회는 1885년에 독립 교회 지위를 얻었고 1925년에 총주교구로 승격하였다. 불가리아 정교회: 불가리아 지역은 이미 1세기에 발칸반도에 분포되어 있던 그리스도인들 공동체와 접해 있었고 6세기 이래 불가리아인들은 당시 동로마제국과 빈번하게 접촉하면서 그리스도교의 복음을 알게 되었고 865년 당시 보리스 1세가 그리스도교 신앙을 받아들이면서 공식적으로 승인되었다. 불가리아 정교회는 다른 슬라브 교회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역사적으로 키릴루스와 메토디우스의 슬라브인 선교의 영향을 받았으며 초기에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구 관구에 소속되어 있다가 자치권을 얻은 후 927년에 총주교구의 지위로 승격하였다. 키프로스 정교회: 키프로스 지역은 이미 초대교회 시대에 사도 바르나바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일찍부터 독립교회의 지위의 영예를 지녔다. 키프로스 정교회는 431년 에페소스에서 개최된 제 3차 세계 공의회에서 자립적인 대주교구의 지위를 승인받았다. 그리스 정교회: 그리스 지역은 사도 바울로에 의해 선교되었으며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었다. 현재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를 영적 지도자로 하여 1852년 승인된 지위에 따라 그리스 정교회 주교들로 구성된 성의회(聖議會; Holy Synod)에 의해 관할되는 자립적인 독립교회이다. 알바니아 정교회: 그리스도교는 4세기 이전에 알바니아 지역에 전해졌으며 북부 지역은 서방교회에 의해, 남부지역은 동방 교회에 의해 주도적으로 선교되었다. 그러나 15세기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정복된 후로는 알바니아인의 다수가 이슬람교인이 되었고 남은 정교회 신자들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었다. 알바니아 정교회는 1937년에 자립적인 대주교구로 승인되었다. 폴란드 정교회: 폴란드가 제 1차 세계대전 후에 독립하면서 새로운 국경선 지역에 약 4백만 명의 정교회 신자들이 폴란드로 편입되었는데 이들은 대부분 벨로루시 민족이거나 우크라니아 민족이었다. 초기에 폴란드 정교회는 모스크바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었으나 1927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에 의해 자립적인 대주교구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 : 제 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 로마 가톨릭이 우세한 체코슬로바키아에서 일단의 성직자들과 신자들이 정교회로 돌아왔다. 그들 중 대표적인 인물은 마태 파블릭 신부였는데 그는 후에 세르비아 정교회에 의해 고라즈드라는 이름으로 주교 서품을 받았다. 또한 당시 로마 가톨릭에 소속되어 있던 동방 전례 교회들이 정교회에 재 일치하면서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는 빠르게 확장해 갔다. 그리하여 1951년 모스크바의 총주교청은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에 독립교회의 지위를 인정하였고 1998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이 자립적인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주교구 지위를 승인하였다. 한편 1987년 체코-슬로바키아 정교회는 고라즈드 주교를 성인으로 선포하였다. 미국 정교회 : 정교회의 선교가 북미 대륙에서 이뤄진 것은 1794년 당시 러시아 제국의 영토였던 알라스카에 발람 수도원의 정교 선교단이 도착하면서이다. 북미 대륙에서의 첫 번째 정교회는 코디악 섬에 세워졌으며 당시 일단의 알라스카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 1840년 시트카의 주교구로 승격하였고 이노센트가 첫 번째 주교로 임명받았다. 1867년 알라스카 지역이 미국에 팔린 이후에 주교좌는 시트카에서 샌프란시코로 옮겼다가 다시 1905년 뉴욕으로 옮겼다. 당시 미국정교회는 대주교구로 승격되어 티혼(후에 모스크바의 총주교) 대주교가 관할하였으며 미국으로 이민 온 수많은 동유럽 지역의 정교회 신자들과 함께 나날이 교회는 확장해갔다. 한편, 1970년 모스크바 총주교청은 미국정교회의 독립교회 지위를 인정하였지만 아직까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으로부터 자립적인 대주교구 지위를 승인받지는 못한 상태이다. 현재 미국정교회는 이러한 과도기적인 상태에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된 남북미 대관구와 미국 지역의 다른 정교회 지체들과 함께 SCOBA (Standing Conference of Canonical Orthodox Bishops in the Americas)라는 주교협의회를 운영하고 있다. 6개의 자치교회(Autonomous Churches) 자치교회란 해당 지역 교회를 자치적으로 관장하지만 자립적인 지역공의회를 소집하지 못하고 모교회(母敎會)의 공의회에 소속되어 있는 지역 정교회를 말한다. 시나이 정교회 : 시나이 산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십계를 내리신 곳으로 매우 중요한 성지였고 3세기 경에 이미 그 지역에 은둔자들이 기거하며 수행에 힘쓰고 있었다. 4세기 경에는 수도자 공동체가 형성되었고 7세기에는 성 요한 클리마쿠스와 같은 유명한 수도원장이 있었다. 이런 중요한 위치 때문에 초기 예루살렘의 총주교 관구에 소속되어 있던 시나이 산의 성 카타리나 수도원은 후에 시나이 반도를 관할하는 대주교좌 수도원이 되었고 1575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에 의해 자치교회의 지위를 승인 받았다. 현재 시나이 정교회는 예루살렘의 총주교에 의해 서품되는 자치교회이다. 핀란드 정교회 : 핀란드 지역의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비잔티움인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핀란드의 대부분 지역은 서방교회의 영향을 받았다. 다만 핀란드 동부지방인 카렐리아 지방은 라도가 호수에 위치한 고대 발람 수도원에서 파송된 수도자들에 의해 선교되었고 러시아 교회의 관할 하에 있었다. 1917년 핀란드가 러시아로부터 독립한 후 1921년 당시 러시아 총주교였던 티혼 총주교는 핀란드 정교회의 자치교회의 지위를 인정하였고 1923년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에 의해 자치적인 대주교구를 승인 받았다. 현재 핀란드 정교회는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의 영적 지도 하에 있는 자치교회이다. 중국 정교회 : 중국 정교회의 기원은 1686년 당시 중국의 황제가 일단의 러시아인 카자크 병사들을 그의 호위병으로 임명하면서부터이다. 후에 카자크 병사들의 후손들은 완전히 중국 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신앙만은 정교회 신앙으로 남아 있었고 그들이 중국에서의 정교회 공동체의 핵심이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본격적인 중국 선교는 19세기 말부터이며 1914년에는 중국인 성직자를 포함하여 5000명 정도의 중국 정교회 신도들과 베이징에 정교신학교를 가지고 있었다. 특히 1917년 러시아의 볼세비키 혁명 이후엔 중국에 러시아인과 중국인을 포함하여 약 100,000 명 정도의 신자들이 분포해 있었으며 1939년에는 5명의 주교와 하얼빈에 정교회 대학이 있었다. 그러나 중국의 공산 혁명으로 인해 많은 정교회 신자들이 서방으로 이주하거나 러시아에 송환되어 현재는 하얼빈에 한 성당만이 운영되고 있을 뿐이다. 중국 정교회는 1956년 러시아 총주교청에 의해 자치교회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일본 정교회 : 일본 지역은 1861년 러시아의 젊은 선교사였던 니콜라이 카사트킨 수사신부(후에 일본의 대주교)가 일본에 도착하여 선교를 개시하면서 정교회가 세워졌다. 1912년 안식하기까지 그는 약 20,000명에 이르는 일본인들에게 세례를 베풀었고 신약성서와 많은 전례서적을 일본어로 번역하였다. 한편, 1970년 일본 정교회 선교의 공을 인정하여 니콜라이 대주교는 성인으로 선포되었다. 모스크바의 총주교청은 1970년 일본 정교회를 모스크바 총주교의 영적 지도 하에 있는 자치교회의 지위로 인정하였고 1972년에 일본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데오도시 대주교가 자치적인 일본의 대주교에 착좌하였다. 그러나 아직 일본 정교회의 자치적인 대주교구 지위가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에 의해 승인되지는 않은 상태이다. 에스토니아 정교회 : 에스토니아 지역은 16세기 말에 스웨덴의 통치 하에 있었고 루터파 개신교의 영향 하에 있었다. 그러나 18세기에 러시아의 표트르 대제에 의해 정복되면서 19세기 경 일단의 에스토니아인들이 정교회 신자가 되었고 러시아인들이 본토에서 에스토니아 지역으로 이주하면서 정교회 공동체가 확장되었다. 1917년 에스토니아가 독립을 선언한 후 에스토니아 정교회는 1923년 당시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 멜레티오스 4세에 의해 자치교회의 지위를 승인받았으며, 1991년 에스토니아가 구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1996년에 재차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영적 지도 하에 있는 자치적인 지위를 콘스탄티노플의 총주교청 성의회(聖議會; Holy Synod)에서 공식적으로 추인받았다. 우크라이나 정교회 : 키예프 러시아 시대부터 러시아 정교회와 역사를 같이 해온 우크라이나 정교회는 1991년 우크라이나가 구 소련연방으로부터 독립하면서 최근에 모스크바의 총주교청으로부터 모스크바 총주교의 영적 지도 하에 있는 자치교회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 밖의 선교 도상에 있는 지역 교회(Missions) 한국, 우간다와 케냐, 필리핀, 인도네시아, 인도, 타이, 싱가포르 등 아시아와 중앙아프리카, 남북미 대륙 및 기타 지역들이 현재 고래(古來)의 총주교구를 모교회(母敎會)로 하여 근세기에 확장되어 가는 선교 도상의 신생 지역 교회가 세워진 곳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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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성가 Byzantine chant
비잔티움 제국(330-1453)부터 16세기까지 그리스 정교회 교회의 단성성가(單聲聖歌). 그러나 근대 그리스에서는 시기에 관계없이 그리스 정교회의 음악 모두를 비잔티움 성가라고 한다. 비잔티움 음악은 동로마 제국의 그리스어 사용 지역에서의 그리스도교 전파와 관련이 있으나 대부분 유대교와 시리아의 초기 그리스도교 예배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시리아 성가). 여러 유형의 성가들이 주목을 끌었는데 그 가운데 트로파리온. 콘타기온. 카논이 있다. 비잔티움 성가는 고대 그리스, 비잔티움의 음악과 관련이 없다. 비잔티움의 네우마 기보법에 관한 기록은 10세기가 되어서야 처음 나타나며, 그 이전에는 알렉산드리아·이집트 등지에서 온 그리스의 문법학자들이 만든 강세표시를 기초로 한 '에크포네티크 기보법' 을 썼다. 이 기보법은 목소리의 상행 또는 하행 움직임의 대강의 방향만 표시한 것이다. 부호를 덧붙인 음창(吟唱)하는 법이 수세기 동안 구전으로 습득되었다. 초기(팔레오-비잔티움, 10-12세기) 비잔티움의 네우마 기보법은 에크포네티크 기보법보다 좀더 구체적이었지만 리듬과 음정을 표기하는 데 정확성이 부족했다. 이 것은 중기 비잔티움 기보법(12세기 말에 발전)에서야 개선되었고 지금도 그 원리를 그리스 음악에 사용하고 있다. 네우마 부호들로 구성되어 있는 이 기보법은 서유럽의 네우마와는 달리 음 높이를 지정하지 않고 대신 앞선 음과의 음정 관계를 나타낸다. 시작음의 음 높이와 길이는 마르티리아이('증거')라고 부르는 부호로 나타냈는데, 이것은 잘 알려진 선율을 축약하여 첫 음정을 나타내는 방식이었다. 몇 가지 전형적인 특징들 때문에 16-19세기 초 필사본에 나타난 기보법은 보통 네오 비잔티움 기보법 이라 불린다. 19세기 초에 와서 마디토스의 대주교 크리산토스는 전통적 기보법이 너무 복잡하다고 생각하여 이를 간단하게 만들었고, 이는 인쇄를 통해 전파되어 오늘날까지 그리스 정교회의 모든 예배 음악 악보에서 쓰이고 있다. 여러 선율형이 있는데 작곡가는 대개 전통적인 선율에 가사를 붙이고 이것을 가사에 맞도록 변형시켰다. 어떤 선율형들은 성가의 처음에만 사용되고 어떤 것들은 끝 부분에 사용되는 또다른 것들은 양쪽에 두루 쓰인다. 전환 악구도 있는데 전통적인 악구를 사용하는 경우도 있고 새로 작곡해서 쓰는 경우도 있다. 선법의 틀을 구성하는 기본적인 음조를 쓰는 몇몇 선율형은 에코스라고 불린다. 에코스들은 각기 독자적인 선율형을 갖고 있지만, 이따금 1개 의 선율형이 2개 이상의 에코스에 걸쳐 있을 때도 있다. 가사와 음악이 모두 들어 있는 예배서에는 헤이몰로기온(카논 찬미가에서 뽑은 연(聯)들에 선율을 붙임), 스티케라리온(교회력의 각 절기마다 고유하게 사용하는 찬미가 가사 및 선율), 살티콘과 아스마티콘(프콘타카온을 비롯한 일부 성가에 붙인 독창과 합창을 각각 말함) 등이 있다. 아콜루티아이(또는 Anthologion)에는 저녁기도, 아침기도, 진혼기도, 3개의 예배의전(성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 예배, 성 바실리우스 예배, 사전축성(事前祝聖)한 성체로 드리는 봉헌) 때 부르는 일상부 성가와 그 밖에 예배의 사이를 연결하며 단음절 또는 의미없는 음절에 맞추어 부르는 임의로 택할 수 있는 몇몇 성가들이 있다. 초기 작곡가들은 시인이기도 했는데 성 로마노스 멜로도스(6세게초 활동)는 가수이자 콘타키온을 만든 사람으로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다. 다마스쿠스의 성 요한네스(645경-749)는 카논을 작곡했으며 특히 옥토에코스 체계를 분류한 것으로 전해지는데 이 체계는 시리아에서 1세기 먼저 기록되었다. 여승(女僧)이었던 카시아(9세기 활동)는 여러 찬미가들을 작곡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밖에 요안네스 글라디스, 크세노스 코로니스(13세기 말-14세기 중반)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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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잔티움 전례 Byzantine rite
동방정교회와 대부분의 동방전례교회(로마교회와 유대를 맺고 있음)가 지키는 전례의식과 계율. 이 전례는 가장 오래되고 유명한 그리스도교 중심지 가운데 하나인 그리스의 도시 안티오키아(지금의 터키 최남단에 위치)에서 시작되어 비잔티움 제국에서 발전하고 완성되었다. 주로 콘스탄티노플 대교회와 관련이 있으며 그리스어를 사용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플의 영향력이 확대되자 이 전례는 그리스적 특성에서 벗어나 여러 민족의 말로 번역되어 비잔티움화 되었다. 원래의 비잔티움 전례로부터 알바니아 전례(즉 더 이상 그것이 기원한 지역 고유의 것이 아님), 벨로루시 전례(흩어짐), 불가리아 전례, 그리스 전례, 헝가리 전례, 이탈리아계 알바니아 전례, 멜키트 전례, 루마니아 전례(1948년 정부로부터 탄압받음), 러시아 전례(흩어짐), 루테니아 전례, 슬로바키아 전례(1950년 정부로부터 탄압을 받았으나 1968년 복원됨), 우크라이나 전례, 유고슬라비아 전례 등 13개의 표준 전례들이 유래했다. 흩어지거나 탄압을 받은 전례를 따르는 교회는 다른 나라, 특히 미국에 많이 있다. 초기 그리스도교 교회에서 전례는 점진적으로 발전하여 기본적인 틀이 이미 6세기에 형성되었지만 그 이후에도 계속 발전하였다. 비잔티움 전례 교회에는 3가지 종류가 있으며 그 중 성(聖) 요한네스 크리소스토무스의 전례가 가장 많이 사용되며 교회전례의 표준으로 인정되고 있다. 바실리우스의 전례는 더 길며, 매년 10회 정도 특별 행사에 쓰인다. 그레고리우스 대 교황의 '축성 전 예물의 전례(Liturgy of the Preconsecra ted Offerings)'는 사순절 기간 동안 수요일과 금요일에 거행한다. 이 밖에 사도 야고보 전례가 있으나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전례에 쓰는 언어는 나라마다 다르지만, 미국에 있는 비잔티움 전례 교회들은 대체로 모교회(母敎會)의 언어를 그대로 사용해 왔다. |
콘스탄티노플 Constantinople - 동방의 로마 (지금의 이스탄불 Istanbul) |
비잔티움(Byzantium)에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그리고 이스탄불로 이름이 바뀔 때마다 역사에서 서로 다른 중요한 역할을 맡아왔던 이 도시는 지난날에는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였으며, 현대사에서나 종교적으로도 가장 중요한 도시 중 하나이다. 예로부터 아시아와 유럽의 경제와 문화의 가교는 물론, 이슬람교와 그리스도교가 교차하던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지금까지 이스탄불에 남아 있는 수많은 건축물과 미술품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에게 해로 이어지는 마르마라 해와 흑해를 잇는 보스포루스 해협에 자리잡고 있는 이스탄불은, 문화와 상업의 중심지로서 지금도 여전히 중요한 항구 도시이다.
콘스탄티누스 의 도시 |
새로운 로마의 도시계획 |
메갈로폴리스 로의 발전 |
제2의 전성기 |
오스만 제국 의 수도 |
제국 수도의 장려한 건축물 |
그리스 정교회 의 총본산 |
아름다운 모스크 |
현재의 이스탄불 |
'콘스탄티누스의 도시'
이스탄불은 B.C 7세기 초에 고대 그리스의 도시국가였던 메가라의 비자스가 세운 도시로, 그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움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비자스는 그리스 델포이의 아폴로 신전에서 받은 신탁에 따라, 골든혼과 마르마라 해 사이의 보스포루스 해협으로 내민 곶의 동쪽 끝, 지금의 토프카피 궁전이 있는 언덕에 식민도시를 세웠다고 한다. 비잔티움은 B.C 512년 다리우스 1세에게 점령되어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페르시아 전쟁 이후 그리스의 도시동맹에 가입하였으나 B.C 5세기에 그리스의 2대 도시 국가인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해상교통의 요충지인 이 도시의 영유권을 놓고 싸움을 벌이면서 이반(離反)을 거듭했다. 어업이 성하고 또 에게해와 흑해를 잇는 해상교통의 요지이기 때문에 비잔티움은 아테네로부터 보스포루스 해협 통과세의 징수권을 부여받았고, 통상을 통하여 경제적으로 매우 번영하였다. B.C 4세기 후반에는 마케도니아 왕국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재위 B.C 336-B.C 323)이 이 도시를 정복했으며, 그가 죽은 후인 B.C 270년경 그리스 여러 도시와 화폐동맹을 체결하였고, 그 후 동방으로 영토를 넓혀 가던 로마가 지배했다. 로마 공화정 치하에서는 자유도시였다가 베스파시아누스 황제 재위기간(69-79) 동안에는 로마의 직접통치를 받았다. 로마 제국 때에도 해협세가 징수되었으며, 그 뒤 로마는 비잔티움의 독립을 인정하고 동맹을 맺였지만, 비잔티움이 비동맹국인 니겔을 돕자, 로마 황제 셉티미우스 세베루스(재위 193-211)는 196년에 비잔티움을 공격해 파괴하였고 해협세도 폐지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로마 제국의 통상무역에 지장을 초래하였기 때문에 곧 재개되었다. 비잔티움을 손에 넣은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는 시가지를 지금의 갈라타 다리 근처까지 서쪽으로 확장하고, 새롭게 성벽을 쌓았으며, 그 후에는 당시의 왕조 명에 따라 '안토니니아'라 호칭되어졌다. 그 뒤 324년에 로마 제국의 동쪽을 지배하던 황제 리키니우스를 물리치고 제국을 장악한 콘스탄티누스 대제(재위 306-337)가 330년에 제국의 수도를 로마에서 이 곳으로 옮기고, '콘스탄티누스의 도시'라는 뜻의 콘스탄티노폴리스(영어명 콘스탄티노플)로 이름을 바꾸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322년과 323년에 리키니우스 황제와 전쟁을 치를 때 이미, 3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입지 조건 덕분에 메가라의 식민 도시로서 견고한 방비를 자랑하던 이 곳에 군사 기지를 두고 있었다. 이 같은 전략은 군사적으로 불안한 정세에 놓여있던 발칸 반도 남부에서 큰 효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군사상의 필요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은 그 뒤 오랫동안 난공불락의 요새 도시가 되었다. 정치적.군사적 중요성과 더불어 새 도시 콘스탄티노플은 교역의 확장에도 새로운 가능성을 가져다 주었다. 아시아와 유럽의 경계에 있으며, 또 흑해와 지중해를 잇는 해상 교역로의 요충지로 동서 교역로가 교차하는 콘스탄티노플은, 물자를 유통하는 데 있어 로마보다 더 적합한 도시였다. 교역으로 부를 쌓은 콘스탄티노플은 옛 수도 로마보다 화려한 '새로운 로마'로 변모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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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로마'의 도시계획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가 세운 성벽 바깥쪽에 새로운 성벽을 쌓는 한편, 토프카피 궁전이 세워진 동쪽에 새 궁전을 지었다. 그리고 그 남쪽에는 아우구스티누스 포룸(광장), 원로원, 신전 등을 잇달아 건설했다. 또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 때의 전차 경기장도 확장해, 330년 5월에 이 곳에서 수도 이전을 축하하는 행사를 가졌다. 313년에 발포한 밀라노 칙령으로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도교가 공인되자, 이 지역의 신앙의 대상이었던 그리스 신들의 상징물인 조각상이나 신전 등이 그리스도교의 상징물인 조각상이나 성당 등과 빠른 속도로 융합되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고대 그리스나 로마의 유산을 계승하면서 콘스탄티노플을 새로운 도시로 완성시켜 갔다. 콘스탄티노플은 전형적인 로마의 도시계획에 따라 직선으로 뻗은 대로, 이와 직각으로 교차하는 도로, 그리고 두 도로의 교차점에 만들어진 포룸을 중심으로 시가지가 건설되었다. 길이가 5km에 이르는 당시의 대로는 오늘날의 디완로, 예니체리렐로, 오르두로와 같이 구역에 따라 그 이름이 달랐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 시대의 도로나 건물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옛 시가지 중앙에 있는 2개의 언덕을 잇는 발렌스 황제(재위 364-378) 때의 수도교(水道橋)가,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공사를 통해 로마시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유일한 유적이다. 발렌스 황제의 뒤를 이은 테오도시우스 1세(재위 379-395)는 390년 무렵에, 이 도시 서쪽 끝에 개선문인 '황금문'을 건설했다. 조각으로 장식된 이 개선문은 당시에는 이름 그대로 황금빛으로 빛났다고 한다. 그 무렵 전차 경기장에는, 스피나라고 하는 중앙 구분대 중심에 지난날 이집트에서 운반해 온 오벨리스크가 놓여 있었다. 오늘날 '테오도시우스의 오벨리스크'라고 알려진 이 오벨리스크는 원래 이집트 영토를 최대로 넓혔던 투트모세 3세(재위 B.C 1490 경-B.C 1436 경)가 카르나크 신전에 세웠던 것이다. 오벨리스크의 대리석 받침대 4면에는,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전차경기를 구경하는 모습과 승리자에게 관을 씌워 주는 모습 등이 부조로 장식되었다. 또 시가지 중앙에는 테오도시우스 포룸이 만들어지고, 황제의 조각상으로 장식한 원주도 세워졌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제국을 둘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물려줌으로써, 로마제국은 동서로 분열되었다. 이 때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한 비잔티움(동로마) 제국의 통치자가 된 사람이 아르카디우스 황제(재위 395-408)였다. 아르카디우스 황제는 테오도시우스 포룸 남서쪽에 아르카디우스 포룸을 새롭게 건설했다. 또 그의 아내 에우독시아는 새 궁전과 몇 개의 욕장을 만들었다. 아르카디우스 황제의 아들인 테오도시우스 2세(재위 408-450)는 대학을 세우고, 시가지를 서쪽으로 더욱 넓혀 새로운 성벽을 쌓았다. 그러나 413년에 완성된 성벽은 447년에 일어난 대지진으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마침 당시는 중앙 유럽을 지배하던 훈족의 아틸라 대왕이 발칸반도로 침입해 콘스탄티노플을 노리고 있던 때라, 테오도시우스 2세는 급히 무너진 성벽을 보강·수리하는 한편, 바깥쪽에 또 하나의 성벽을, 그리고 다시 그 바깥쪽에 성벽과 해자(垓字)를 건설함으로써 1년 만에 견고한 삼중 방위 시설이 완성되었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총길이 6.65km의 이 성벽은 오늘날 서서히 붕괴되고 있지만, 아틸라 대왕의 공격을 물리치고, 15세기 오스만 제국에게 공략당하기까지 여러 차례에 걸친 적의 공격으로부터 콘스탄티노플을 보호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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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갈로폴리스로의 발전
유스티니아누스 1세(재위 527-565)의 치세 때인 6세기에 콘스탄티노플은 황금시대를 맞았다. 당시 인구가 50만에 이르렀던 콘스탄티노플은, 황제의 보호와 원조를 받으며 학자와 예술가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덕분에, 찬란한 문화를 꽃피우며 제국의 수도로서 그 위치를 굳혔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지난날 아시아와 유럽 대륙을 지배했던 대제국 로마를 재건하기 위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을 그에 걸맞은 도시로 발전시킴으로써 역사에 발자취를 남겼다. 이 시기에 콘스탄티노플에서는 건축과 미술 분야에서 역사에 남을 만한 뛰어난 작품들이 많이 탄생되었고, 그 방법과 양식은 제국 전체에 퍼졌다. 특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비잔티움 제국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이었다. 532년에 무거운 세금에 시달리던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1주일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무정부 상태에 빠뜨린 '니카의 반란'이 일어났다. 반(反)황제파의 원로원 의원까지 휘말려든 대반란을 가까스로 진압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하기아 소피아와 하기아 이레네 등 이때 파괴된 성당을 복구하고 개축하는 한편, 시가지를 서쪽으로 더욱 확장했다. 이 때 호화로운 새 궁전도 지어졌지만, 지금은 일부 유적만이 가까스로 남아있을 뿐이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비잔티움 제국은 지중해 서쪽 연안 일대와 북아프리카까지 그 세력을 뻗쳤다. 그러나 시리아, 이집트 등 제국의 핵심지역에서는 민족적인 반항이 뿌리 깊게 남아있어, 제국의 지배에 대한 이들 민족의 적개심도 점점 깊어져 갔다. 그러다가 636년 야르무크의 싸움에서 참패한 이후 이슬람 세력에게 이들 지역을 모두 상실하였고, 드디어 674-678년에는 이슬람 군이 콘스탄티노플 부근까지 쳐들어왔다. 예언자 마호메트의 계승자인 아브 아이유브 안사리가 이끄는 군대에게 포위당했던 콘스탄티노플은, 신병기인 '그리스의 불' 덕분에 이들을 물리칠 수 있었다. 이 기간 중에 죽은 안사리의 무덤은 골든혼 옆에 마련되었는데, 15세기 중반에는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한 오스만 제국에 의해 모스크가 세워졌다. 이 곳은 지금도 이슬람교도의 순례지로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8세기에 일어난 성상파괴논쟁(아이코노클레즘)은 비잔티움 제국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문제로 발전했다. 성상이나 성유물에 대한 신앙을 우상숭배로 간주하는 성상 금지론자들은 모든 성상 표현을 꺼렸다. 성상파괴논쟁은 제국 영토 내의 카톨릭교도를 그리스 정교회로 귀속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726년 황제 레오 3세(재위 717-741)가 성상숭배금지를 주장하자, 그 뒤 100년이 넘도록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그러는 사이에 성화,성상 등 많은 작품들이 파괴되어 없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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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의 전성기
결국 성상파괴논쟁은 843년에 미카일 3세(재위 842-867)의 모후인 테오도라가 성상부활을 선언함으로써 성상비호세력의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9세기 후반에 바실리우스 1세(재위 867-886)가 왕위에 올라 마케도니아 왕조를 열자, 제국의 영토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최대로 확대되었다. 이 때 제국의 수도가 재정비되는 한편, 평면이 십자형인 작은 성당이 많이 지어졌다. 이러한 양식은 발칸반도 전체로 퍼져, 새로 짓는 건축물들의 모델이 되었다.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은 바실리우스 1세가 거느리던 기술자들에 의해 모자이크로 새롭게 장식되었다. 1054년에 성상파괴논쟁을 계기로 대립의 골이 깊어졌던 로마와 콘스탄티노플의 교회가 결정적으로 분리되어, 서쪽의 로마교회는 가톨릭을, 동방의 비잔티움 제국의 여러 교회는 정교를 신봉하며 독자적인 신앙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 뒤 이탈리아의 도시 상인들인 베네치아인과 제노바인이 지중해 무역에 진출하면서, 비잔티움 제국의 상업과 재정은 그들의 지배를 받아 상업 도시인 콘스탄티노플에도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들은 로마 카톨릭과 분리되어 있던 이 도시에서 교역상 갖가지 특권을 누리는 등 콘스탄티노플의 정치력은 시간이 갈수록 쇠퇴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 시기에 새로운 건물들이 들어서고, 사회구조도 변화되는 등 도시의 모습이 베네치아 풍으로 바뀌었다. 1203년 6월 제4차 십자군이 종교적인 사명을 망각한 채, 콘스탄티노플의 부를 빼앗기 위해 몰려와 이미 쇠퇴한 이 도시를 포위했다. 10개월 뒤인 1204년 4월 12일 이 곳을 점령한 십자군은 철저하게 약탈하고 파괴한 뒤, 플랑드르의 백작 보두앵을 황제로 추대해 콘스탄티노플에 라틴제국을 세우고 약 60년 동안 지배했다. 일찍이 절대권력을 자랑하며 번영했던 비잔티움 제국은 서서히 군소국가로 해체되었고, 이 과정에서 교역으로 다졌던 경제 주도권을 잃었다. 수도에서 쫓겨난 뒤, 콘스탄티노플의 탈환을 노리던 니케아의 미카일 8세는 1259년 어린 황제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황제가 되어 팔라이올로구스 왕조를 열었다. 2년 뒤 미카일 8세는 라틴제국군의 허를 찔러 콘스탄티노플을 되찾았다. 수도를 되찾음과 동시에 콘스탄티노플에는 새로운 예술양식이 발전해,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계상랑(階上廊)의 모자이크와 코라 수도원의 벽화가 그 아름다움을 자랑했다. 특히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남쪽의 계상랑을 장식하는 모자이크 '데이시스'(請願)는 비잔티움 미술의 최고 걸작이다. 제4차 십자군에 점령당하기 전후의 작품으로 짐작되는 이 모자이크에는, 심판자 예수를 중심으로 좌우에 모든 인류를 대신해 하느님에게 용서를 비는 성모 마리아와 세례 요한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비잔티움 제국은 서서히 다가오는 멸망의 운명을 피할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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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만 제국의 수도
15세기에 접어들자, 새로운 세력이 힘을 뻗치기 시작했다. 일찍이 비잔티움령이었던 아나톨리아(소아시아)를 비롯해, 발칸지역 일대를 정복한 투르크족의 오스만 제국이 바로 그들이다. 오스만 제국은 2개월 동안 콘스탄티노플을 포위해 격렬한 전투를 벌인 끝에, 1453년 5월 29일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켰다. 이 격렬한 공방전을 지휘한 사람은 메메드 2세(재위 1451-1481)로, 그는 이를 계기로 '파티(정복자)'라는 별명을 얻었다.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한 메메드 2세는 곧바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으로 가서, 메카 방향을 향해 예배를 올렸다. 이리하여 비잔티움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의 새로운 수도가 되었으며, 그리스어로 '도시로'를 뜻하는 '이스틴폴린'에서 유래한 이스탄불로 다시 이름이 바뀌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 이후 1000년이 넘도록 번영했던 옛 모습을 이미 잃어버린 이 도시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되살아나, 이슬람교도인 투르크인에 의해 독자적인 모습으로 재건되었다. 지난날 포룸과 대로를 중심으로 계획되었던 시내의 도로는 짐을 운반하는 동물이 겨우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좁아졌고,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나 포룸 주변에는 위층이 1층 외벽보다 튀어나온 독특한 외관을 지닌 투르크의 목조가옥이 지어졌다. 이 유적은 20세기 말에 당시의 모습대로 복원되었다. 술탄이라 불리는 오스만 제국의 수장 메메드 2세는 오스만 제국에 점령된 뒤에도 이스탄불에 남아있던 시민들에게 그들의 신앙과 법을 지킬 수 있도록 허가하는 한편, 제국 각지에서 이주자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리고 '일 마니피코(비호자)'라고 불리는 쉴레이만 1세(재위 1520-1566) 때인 16세기에 새로운 도시의 건축활동은 절정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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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수도의 장려한 건축물
중세의 철옹성으로 널리 알려졌던 콘스탄티노플의 성벽은 마르마라 해에서 골든혼까지는 1겹으로 이루어졌지만, 육지인 서쪽은 3겹으로 이루어져 총길이가 6.65km나 되었다. 비잔티움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에 의해 서쪽 성벽의 내벽과 외벽에는 각각 96기의 탑과 크고 작은 문이 있었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이 도시를 점령한 뒤, 파손된 부분을 수리하고 몇몇 성문을 벽으로 막아, 오늘날 이에디클레, 곧 '7기의 탑'이라고 불리는 남쪽 끝 부분을 완성시켰다. 메메드 2세는 테오도시우스 2세 때 지어진 성벽 안쪽에 북쪽탑, 남쪽탑, 동쪽탑을 세우고, 각 탑과 성벽을 연결하는 오각형 성채를 건설했다. 이에디클레는 오스만 제국 시대에 감옥이나 처형장으로 사용되었으며, 테오도시우스 1세가 건설한 개선문인 황금문도 이 이에디클레의 일부분으로 편입되었다. 성벽북쪽에 있는 에디르네 문은, 유럽으로 진출한 오스만 제국이 비잔티움 제국을 공략하는 근거지로 삼았던 수도 에디르네로 통하는 에디르네 가도의 출발점이다. 이 문은 또한 메메드 2세가 이 땅에 처음 발을 들여놓은 곳이기도 하다. 성벽을 따라 북쪽으로 올라가면 내벽과 외벽 사이에 지어진 콘스탄티누스 궁전(텍푸르 궁전,콘스탄티누스 대제 사후 1,000년경 건립)이 있다. 지금은 폐허가 되었지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비잔티움 제국 시대의 궁전 건축물이다. 3층 벽 정면에 각각 디자인이 다른 아치를 설치하고, 붉은 벽돌과 다채로운 색깔의 대리석으로 표현한 기하학 무늬로 외벽을 장식하는 비잔티움 건축의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 중세 이후, 이슬람교도인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은 뒤에도 이 곳에는 여전히 많은 그리스도교 성당이 남아있다. 이 건축물들은 오리엔트 그리스도교 건축과 미술의 발전과정을 나타내는 유적들이다. 에디르네 문 근처에 있는 카리에 자미 모스크도 그 가운데 하나이다. 카리에 자미 모스크의 원형(原形)은 4세기에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건설한 코라 수도원으로, 몇 차례에 걸쳐 재건과 복원이 이루어졌다. 그 사이에 내부는 모자이크와 프레스코화로 장식되었다. 14세기에 증축되어 지금의 모습을 갖게 된 이 건물은, 16세기 초인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2세(재위 1481-1512) 때 모스크로 바뀌었다. 토프카피 궁전 부지 내에 위용을 자랑하고 서 있는 하기아 이레네 성당은 4세기에 건립되어 '니카의 반란'으로 불에 타 버렸다가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 다시 지은 것이다. 360년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완성되기 전까지 주교좌가 놓인 대성당이었으나, 1453년 오스만 제국에 점령당한 뒤로는 오스만 군대의 병기고로 사용되었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쓰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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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532년에 일어난 '니카의 반란'으로 하기아 이레네 성당과 함께 불에 타버린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터에 모든 자재를 동원해 가장 아름다운 성당을 건설했다. 공사를 맡은 사람은 트랄레스의 안테미우스와 밀레투스의 이시도루스였다. 재건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 축성식은 537년에 거행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메메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자마자, 동방 그리스도교 세계의 상징이자 그리스 정교회의 총본산으로 군림한 이 대성당을 콘스탄티노플 최초의 모스크로 바꾸었다. 모스크로 개조된 대성당에는 미나레트와 마드라사가 설치되었다. 또 내부의 둥근 천장이나 벽면을 뒤덮었던 황금빛 모자이크 일부가 하얗게 덧칠되어 [코란]의 문구가 씌어졌다. 유스티니아누스 1세는 자신을 신이 지상의 군주로 인정한 사람이라고 여겼다. 그의 신앙심으로 탄생된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이 오스만 제국의 점령과 함께 가장 먼저 모스크로 바뀐 것은 어쩌면 당연한 결과였다.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22년, 터키의 술탄제를 폐지한 케말 아타튀르크는 1934년에 아야 소피아 모스크를 종교와는 관계없는 박물관으로 만들었지만, 오늘날 이슬람교도 사이에는 다시 모스크로 되돌려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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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모스크
이스탄불에는 우아한 구성과 화려한 타일 장식으로 아름다움을 겨루는 모스크들이 많이 있다. 그 가운데 특히 중요한 건물이 오스만 제국이 가장 번성한 시기인 쉴레이만 1세 때 지어진 쉴레이마니에 모스크이다. 오스만 제국 최고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설계.감독해 1550년에 착공하여 1557년에 완성한 이 모스크에는 마드라사, 병원, 쉴레이만 1세와 왕비의 영묘(靈墓)가 있는 정원묘지 등이 부설되어 있다. 안뜰의 네 귀퉁이에 세워진 4기의 미나레트와 그 곳에 배치된 총 10개의 갤러리는 쉴레이만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제10대 술탄이며, 이스탄불을 통치한 제4대 술탄 임을 상징한다. 골든혼에 놓인 갈라타 다리에서 옛 시가지를 유심히 바라보면 언덕 위에 4기의 미나레트가 솟아 있는 중후한 모스크가 바로 쉴레이마니에 모스크이다. 모스크 북쪽에 있는 정원묘지에는 건축가 시난의 무덤이 있다. 보스포루스 해협과 마주 보는 동쪽 언덕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에는 아크로폴리스가, 비잔티움 제국 시대에는 황후의 궁전과 욕장, 전차 경기장 등이 잇달아 들어섰다. 오스만 제국 시대인 1464년에 메메드 2세는 약 70ha인 이 땅에 새로운 도시를 세우려 했으며, 그 뒤의 역대 술탄들도 이 곳에 새로운 건물을 짓고, 파손된 부분을 여러 차례 복원했다. 그 가운데 유난히 아름다운 건물이 술탄 아메드 모스크이다. 1609년에 공사를 시작해 1616년에 완공된 이 모스크는 우아하고 아름다운 외관과 내부의 화려한 타일 장식이 눈길을 끄는데, 흰 바탕에 푸른 색을 바탕으로 한 타일 색깔 때문에 블루 모스크라고도 한다. 술탄 아메드 모스크 주변에는 오랜 세월에 걸쳐 빵집, 병원, 조폐국, 관청, 그리고 궁전 등이 들어서 이스탄불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보스포루스 해협을 바라보며 서 있는 토프카피 궁전은 오스만 제국의 역대 술탄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궁전을 이루는 건물 대부분은 1459년 짓기 시작해 1465년경에 완성되었다. 4개의 정원이 있고, 제2의 정원과 제3의 정원에 둘러싸여 있는 궁전은 외궁, 내궁, 하렘의 3개 부문으로 이루어져 있다. 대재상이나 정부고관들은 '지복(至福)의 문'을 지나 '알현실'에 들어가 술탄 앞에 엎드렸다. 정원에 있는, 무라드 4세(재위 1623-1640)가 지은 정자 바그다드쾨스퀴는 터키 건축의 걸작으로 꼽힌다. 1853년 압둘 메지드 1세(재위 1839-1861)가 골든혼 맞은편의 새 시가지 북쪽, 보스포루스 해협에 맞닿아 있는 매립지에 돌마바체 궁전을 짓고 거처를 옮기기 전까지, 토프카피 궁전은 제국 수도와 국정의 중심지였다. 지금은 국립박물관으로 개방되어, 술탄의 각종 소장품들을 감상할 수 있다. 4개의 정원을 둘러보고 홀과 하렘을 구경하며, 섬세한 장식품과 셀림 1세(재위 1512-1520)의 보물들을 보고 있노라면, 화려했던 술탄의 궁정 생활이 눈앞에 떠오르는 듯하다. '의례의 문'을 지나 언덕을 내려가면, 지금도 활기찬 이스탄불 시가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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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이스탄불
19세기에 들어서자 오스만 제국의 쇠퇴를 면하기 위하여 각 분야에서 서구화가 추진되면서 이스탄불도 점차 서구적인 도시로 변해갔다. 19세기 후반 이후 이스탄불은 발칸 문제를 둘러싼 열강의 분쟁지가 되어 자주 전화(戰禍)를 입었지만, 터키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 쪽에 참전하여 패했기 때문에 1918년 11월-'23년 10월까지 영국.프랑스.이탈리아 연합군에게 점령되었다. 그러나 케말 아타튀르크가 지도하는 혁명이 성공하여 1923년 10월에 터키공화국이 성립되자 수도는 아나톨리아의 앙카라로 옮겨졌다. 따라서 이스탄불은 1,600년에 이르는 수도로서의 지위를 잃었지만, 경제적, 문화적으로는 여전히 터키의 중심지로서 번영하고 있다. 그와 더불어 이스탄불의 문화유산은 파란 만장한 역사를 말해주는 귀중한 증인으로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등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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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0년경 비잔티움 제국의 최대판도, 보라색은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치세때 회복한 영토 | |||||
공용어 | 그리스어 | ||||
수도 | 콘스탄티노폴리스 | ||||
정치체제 | 전제군주제 | ||||
면적 - |
붕괴전 최대 3,500,000 km2 | ||||
인구 - |
붕괴전 최대 34,000,000 추정. (4세기) | ||||
주요 민족 | 그리스인 | ||||
종교 | 동방정교회 | ||||
통화 | 노미스마 | ||||
성립 | 330년 | ||||
해체 | 1453년 5월 29일 | ||||
초대 황제 | 콘스탄티누스 1세 306년-337년 | ||||
최후 황제 | 콘스탄티누스 11세 1449년-1453년 | ||||
성립 이전 | 로마 제국 | ||||
해체 이후 | 오스만 제국, 러시아 제국 |
비잔티움 제국(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 바실리아 톤 로메온[*]) 또는 동로마 제국(라틴어: Imperium Romanum Orientale 임페리움 로마눔 오리엔탈레)은 콘스탄티노폴리스(현재의 이스탄불)에 수도(首都)를 둔 로마 제국의 동쪽 절반이었으나, 5세기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도 천년 가까이 유지되었다. 비잔티움 시대는 보통 395년부터 1453년까지로 본다.
비잔티움 제국은 중세 유럽에서 가장 막강한 전제 군주제 국가였으며, 한때 활발한 정복 사업을 통해 옛 로마 제국의 고토를 거의 되찾아 광활한 지중해 세계를 통일하여 그 중심지 역할을 하였고 심지어는 중동 지역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특히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시아와 유럽, 흑해, 그리고 에게 해의 무역로에 자리잡고 있어 제국의 경제는 수 세기 동안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다.
더불어 비잔티움 제국은 사산조 페르시아와 아랍 및 오스만 제국의 침략으로부터 유럽과 기독교 문명 세계를 보호하는 방파제 역할까지 하였다.
비잔티움 제국(비잔틴 제국)이라는 말은 콘스탄티노폴리스(콘스탄티노플)의 원래 이름이었던‘비잔티움’(그리스어로는 비잔티온)에서 유래하였다. 동-서 로마의 궁극적인 분리 이후 서방인들이 동로마 제국을 로마 제국으로 인정하기 싫어하여 이 나라를 ‘비잔티움적인’ 제국이라고 칭하게 되었다. 이것을 영어식으로는 ‘the Byzantine Empire’라고 표기하고 있고, 대한민국에서는 이 영어식 표기를 그대로 따와 ‘비잔틴 제국’이라고 불렀으나 최근에는 원어를 살려 비잔티움 제국 또는 동로마 제국이라 부르고 있다.
정작 비잔티움 제국은 언제나 ‘비잔티움’이 아니라 ‘로마’를 자처했다. 비잔티움 제국 정부는 자국을 그냥 ‘로마 제국(그리스어: Βασιλεία των Ρωμαίων|Basileia tōn Rōmaiōn, 라틴어: Imperium Romanum 임페리움 로마눔)’이라고 불렀으며 비잔티움 제국이라 불렀던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제국의 황제는 자신을 로마의 통치자, 즉 옛 로마 황제의 후계자이자 상속자로 여겼다. 그 주민들은 인종적으로는 그리스인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나, 스스로 그리스인(그리스어: Ἕλληνες|헬레네스)이라고 하지 않고 로마인(라틴어: Ρωμαίοι|로마이오이)이라고 불렀다. 또한 자국을 ‘로마인의 영토’라는 뜻의 ‘로마니아(그리스어: Ρωμανία|Rōmania)’라고 불렀다.
그러나 실제로 비잔티움 제국은 헤라클리우스 황제 이후에는 거의 완전히 그리스화하였다. 황제의 명칭도 '바실레우스 또는 바실레이오스'(그리스어로 '대왕'의 뜻)로 바뀌었으며, 정부의 구성이나 복식, 군 편제 등도 모두 그리스식으로 변모하였다. 제국의 영토도 대부분 그리스 문화권에 한정되었으며 그에 따라 제국 인구와 문화의 대부분도 그리스인의 것이었다.
콘스탄티노플은 사실 약칭으로, 실제 이름은 '새 로마'이다. 그리스어를 구하지는 못했지만,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정식 명칭이 '새로마 총대주교'라는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또한 제국이 그리스화 되었다고 해서 비잔티움 제국을 로마 제국의 연장선으로 보지 않는 경향이 대세인데, 로마 제국 때에 동방을 점령하면서부터 이미 헬레니즘화가 진행되기 시작하였다. 로마 제국 때에도 제2국어(?)는 그리스어였다. 또한 황제의 명칭이 바실레이오스 라고 하여 아니라는 시각이 있는데, 이 또한 로마 제국 때부터 시행되던 바이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스스로를 ‘로마 제국’이라고 칭하고 있었다. 그리고, 로마 제국은 ‘문명 세계 모두를 지배하는 대제국’이며 ‘하느님에 의한 최후의 심판이 일어날 때까지 계속 되는, 지상의 마지막 제국’이라고 여기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은 고대 로마 제국의 수준 높은 이념과 제도를 그대로 이어받으면서 거기에 종교적 권위와 오리엔트적인 전제 정치를 더하여 매우 엄격한 전제군주적 황제권과 관료 정치를 시행하였다.
비잔티움의 황제는 원로원, 시민, 군대에 의해 추대되어 지상을 책임지는 하느님의 대리자이고 제국은 천국의 예표이며, 최후의 심판이 올 때까지 정통 그리스도교 신앙을 지키도록 하느님이 임명한 단 하나의 후견인으로서 사도들과 대등한 종교적 권위를 지니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황제는 정치·군사·종교 등에 대해 무한적인 절대 권력을 휘둘러왔으며, 제국의 백성들은 스스로 황제의 노예임을 자청하며 오로지 그의 은혜만으로 살아간다고 생각하였다.
395년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로마 제국의 영토는 동(東)·서(西)로 나뉘어지게 되었다. 나중에 비잔티움 제국의 모체가 되는 동쪽의 영토는 다키아, 마케도니아, 아시아, 폰투스, 오리엔트, 트라키아, 이집트 각 지방을 가리킨다. 그리고 이들 영토는 서쪽 영토와 함께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제도>에 의해 통합되었다. 즉 수도인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제외한 모든 영토는 민정과 군정의 각각 독립된 양두(兩頭) 지배를 받았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규모는 테오도시우스 2세의 삼중 성벽의 완성으로 확정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로마와 마찬가지로 특별행정구로서 거리의 치안 유지, 식량 확보, 시민의 재판권, 상업 활동 규제와 보호 등 시민 생활에 관한 모든 행정상의 처리는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독이 맡았다. 국가 정치의 중추인 궁정에서는 재상, 재무대신, 궁정재무장관, 궁정장관, 시종장 등이 황제를 도와 업무를 처리하였다. 원로원은 황제의 공식 자문기관으로서 정권 교체나 제위가 비게 되었을 때, 또한 새 황제의 등극에 있어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통치체제가 지배하는 비잔티움 제국은 대외적으로 언제나 2가지 정면 작전을 세워야만 하였다. 즉 동쪽의 사산조 페르시아와는 전시대부터 계속하여 전투 상태에 있었으며 이것은 율리아누스의 전사,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일시적 평화조약 체결에 이르기까지 단속적으로 계속되었다.
또 발칸 반도에서는 4세기 고트족의 남하, 계속되는 국내로의 게르만족의 침입, 5세기 중엽 훈족의 침입을 받았지만 이들은 모두 성벽에 의해 막을 수가 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때에는 옛 로마 제국의 서쪽 영토를 되찾기 위한 원정군이 조직되었다. 그 결과 534년 북아프리카의 반달왕국을, 554년에 지중해의 섬들과 히스파니아의 서고트왕국의 일부를, 555년에 이탈리아의 동고트 왕국을 각각 제국령으로 편입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6세기 후반 이들 지역에 다시 이민족이 침입하자 황제 마우리키우스는 이탈리아의 라벤나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에 황제 대리로서 총독을 두어 제국의 영토 확보에 힘썼다. 그러나 6세기 후반의 대외적 위기는 북쪽의 다뉴브 전선에서 시작되었다. 즉 대서방(對西方) 정책과 대동방(對東方) 정책에 쫓긴 제국은 도나우 강을 건너 남하해 온 아바르족을 막을 수가 없어 마우리키우스 때 발칸의 주요 도시 시르미움, 신기두눔이 차례대로 함락되었다. 결국은 발칸 반도의 슬라브화가 시작되어 제국의 행정망은 끊기고 통치기능은 크게 후퇴하여 7세기 변혁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이 시대의 속령 통치 방식 및 중앙집권체제 안에서의 가장 큰 변화는 대외정세 변화에 촉구된 군사력의 강화와 문관 세력의 약화이다.
군사력의 강화는 제국령의 양두 지배에서 테마 제도로의 전환이며, 문관 세력의 약화는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제도에서 군사와 세무를 중시하는 로고시트 제도로의 전환이다. 이들 모두 옛 로마적 행정제도에서 변신한 것이다. 테마 제도는 헤라클리우스의 치하에서 비롯된 국령의 전체적 저하를 보충하기 위한 비상 수단으로, 지방 영지의 자급자족을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었다. 이 제도는 점차 정비되어서 마케도니아 왕조의 번영시대의 기초가 되었다. 제국의 성운은 테마 제도의 성쇠에 달려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즉, 지방 호족 및 중앙의 고급 관료, 군인, 성직자로 이루어지는 대토지 소유자층이 중소자유농민층을 흡수하여 테마 제도를 침식하였으며, 거듭되는 대외 위기에 따른 내정의 혼란이 테마 제도의 기능을 위협할 때 제국의 성운도 흔들렸다. 대토지 소유자층의 증대는 이미 8세기 무렵부터 현저하게 나타났다. 9세기 초, 니케포루스 1세 또는 니케포로스 1세는 대토지 소유자층의 재력을 강제적으로 정부에 되돌리려고 하였다.
10세기의 로마누스 1세 또는 로마노스 1세를 비롯한 여러 황제들은 중소자유농민 농지의 전매, 기증, 유증을 금지하여 대토지 소유자층의 증대를 막으려고 노력하였다. 또한 납세의 연대제 강화, 대토지 소유자의 선매권 금지 증의 보호책으로 중소자유농민층을 보호하려고 하였지만 이러한 정책은 결국 국세에 의한 수입 확보에 지나지 않았다. 그리고 11세기 초엽 대토지 소유자층 출신인 로마누스 3세 또는 로마노스 3세가 종래의 보호책을 폐지하고 대토지 소유자층을 옹호하는 정책을 펼쳐 중소자유농민층이 몰락하기 사작하였다.
또한 7세기~9세기에 걸쳐 외적들의 침임이 끊이지 않았으며 그 때문에 중앙정부 내부에서는 군사와 세무 관계를 다루는 부국의 중요성이 커졌다. 이들 부국장은 정치의 중추를 차지하여 〈디오클레티아누스-콘스탄티누스 제도〉 아래의 여러 관료들과 교체되었다. 즉 로고시트 제도가 등장한다. 이것은 원래 회계 담당을 뜻한다. 이 제도의 중심은 회계국장이며 외무대신직과 내무대신직을 겸하는 역체국장과 함께 큰 권력을 가졌다. 그런데 관료 기구의 정비와 함께 황제는 자신이 신임하는 사람을 이 관료 기구의 요소에 두어 이것을 장악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행정 기구의 개조는 대외적 요인에 따른 것으로, 그 첫 번째 요인은 7세기 전반부터 시작하여 9세기 후반까지 계속된 이슬람과의 싸움이며, 두 번째 요인은 불가르족의 등장이다. 7세기 중엽에 발칸 반도 북부에 나타난 불가르족은 제국령 안에 최초의 독립 국가인 제1차 불가리아 왕국을 세웠다. 세 번째 요인인 슬라브족은 일찍부터 남하하여 정주하고 있었는데 독립국가를 만들지 않고 선주민인 그리스계 주민들과 융화되어 그리스 민족을 슬라브화하였다. 그러나 9세기 초에는 슬라브족에게 점령된 지역을 그리스 남부에서 탈환하기 시작함에 따라 슬라브족이 그리스화 되기 시작하였다. 또한 9세기 중엽에는 나중에 키예프 공국을 세우게 되는 루스족이 처음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인근에 나타났는데 988년 키예프 대공 블라디미르 1세 때 동방 정교회를 국교로 선언함에 따라 키에프 대공국도 동유럽의 유력한 일원이 되었다. 이렇게 대외 위기를 극복하고 행정·국방 기구의 정비와 중소자유농민층의 번영을 배경으로 비잔티움 제국은 바실리우스 2세 또는 바실리오스 2세 때, 아르메니아와 시리아의 연안지대, 다뉴브 강 이남 발칸 반도를 다시 제국령으로 편입시키키는 등 유스티니아누스 1세 이후 최대 영토를 얻었다.
바실리우스 2세가 죽은 후 비잔티움 제국은 내부에서는 혼란이 거듭되고, 이탈리아 지역에서는 노르만족이, 도나우 강 유역에서는 페체네그족이, 동쪽에서는 신흥 세력인 셀주크 투르크가 제국을 위협했다.
1071년 로마누스 4세 또는 로마노스 4세가 20만 병력을 이끌고 제국의 위협 세력으로 떠오른 셀주크 투르크를 침공했다. 전쟁 초기에는 압도적인 병력을 지닌 비잔티움군이 우세를 점했으나, 밀린 보수에 대한 불만으로 제국 영내를 약탈한 독일계 용병들의 반란, 투르크 계열의 유목민족의 이탈, 분산시킨 병력의 패배, 호위대를 지휘하던 안드로니쿠스 두카스의 배반, 결정적인 순간에서 명령계통의 혼란 등 겹쳐진 악재로 비잔티움군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군의 4만 병력에 크게 패배한다. 이어 셀주크군은 비잔티움 제국의 주요 병력 제공 지역이었던 아나톨리아 등 동부 지역을 완전히 초토화시켜 제국을 철저하게 와해시켰다.
11세기부터 천천히 시작된 비잔티움 제국의 쇠퇴 현상은 1204년의 제4차 십자군의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으로 상징된다. 그 원인은 국내 봉건화의 진행과 함께 셀주크 투르크, 십자군, 불가리아 왕국, 세르비아 왕국 등이 초래한 외세의 압력에 있었다. 국내 봉건화의 현상은 11세기 초의 콘스탄티누스 9세 또는 콘스탄티노스 9세 통치하의 프로노이아 제도(토지를 매개로 한 황제와 신하의 주종 관계) 성립이었다. 당시 면세 특권이 부여되어 있던 대토지 소유자층의 영지, 징세청부인에게 임대로 내놓은 토지, 프로노이아로서 지급된 토지는 징세에 있어 치외법권적인 존재였다. 이러한 토지의 증가는 한편으로 중소자유농민층의 납세 부담을 증가시켰으며 이것은 곧 전자의 증대와 후자의 몰락이라는 악순환을 낳았다. 또한 이러한 사태는 국고의 빈곤화를 초래하였다. 이러한 사회상·경제상의 변혁은 행정·국방에도 영향을 끼쳤다. 테마 제도는 소아시아와 발칸 반도의 주요 부분이 11세기 중엽 제국령에서 벗어남에 따라 대토지 소유자층에게 돌아갔다. 황제들도 거의 다 대토지 소유자층 출신들이었다. 따라서 대토지 소유자층의 발언권은 커져갔으며 반대로 황제의 권력은 약화되었다. 중앙과 지방을 가리지 않고 내란과 반란, 세력 확장을 위한 음모와 세력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11세기 후반의 축소된 제국령에서는 군사령관 2명이 전 영토를 2개의 군구로 나누고 자국군 대신 외국인 용병대가 나라를 지키게 하였다. 이러한 불안한 국내 정세에 더욱 박차를 가한 것은 대외 위기였다.
11세기 후반 노르만족의 진출은 제국의 이탈리아 남부 지배에 종지부를 찍게 하였으며, 1071년 셀주크 투르크와의 전투에서 패배하여 소아시아 중앙에 룸 술탄국의 수립을 허용하였다. 이러한 동서의 압력에 대항하기 위해 알렉시우스 1세 또는 알렉시오스 1세는 베네치아 공화국에 군사 원조를 의뢰하고 그 보상으로 제국령 안에서의 무역 및 면세 특권을 주었다. 더욱더 혼란을 초래한 것은 페체네그족, 마자르족 등 이민족들의 대거 남하와 약탈이며 세르비아 왕국의 번성과 제2차 불가리아 왕국의 수립이었다. 이러한 외세의 압력이 정점에 이른 것은 제4차 십자군 원정이었다.
이미 제1차 십자군이 제국령을 통과하였을 때 서유럽과 비잔티움 제국 사이에 생긴 오해는 반감과 혐오와 적의로 변하였는데 제4차 십자군 원정 때에는 그 정점에 달하였다. 그리고 동지중해 무역의 독점을 기도한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이것을 계기로 콘스탄티노폴리스 점령을 단행하기 위하여 십자군에 가세하였다. 이렇게 하여 1204년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아군인 십자군에게 함락되고 라틴 제국이 설립되었다.
수도를 빼앗긴 옛 비잔티움 제국 세력은 니케아 제국, 에피루스 공국, 트레비존드 제국등 곳곳에 망명 정부를 세웠다. 이 망명 정권 가운데 하나인 니케아 제국은 불과 반세기 사이에 주변의 외적들을 무찌르거나 화친을 하였으며, 1259년 미카일 8세에 의한 팔라고니아 전투에서의 승리로 그 지위는 확고해졌다. 그리고 1261년 미카일 8세는 옛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라틴 제국으로부터 탈환하여 팔라이올로고스 왕조 시대를 열어 비잔티움 제국을 부활시켰다.
그러나 부활한 비잔티움 제국은 국내외적으로 많은 문제를 떠안게 되었다. 대외적으로는 13세기 후반에 콘스탄티노폴리스 탈환을 노리는 반(反)비잔티움 세력에게 시달렸다. 앙주 가문의 책동으로 옛 보두엥 2세는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에 나섰는데 미카일 8세는 1282년에 일어난 시칠리아 만종 사건으로 위기를 넘겼다. 그러나 국내 봉건화에 따른 악폐는 더욱 심해졌으며 행정의 혼란, 경제활동의 부진, 외국인 용병의 증가는 신민들의 세금을 더욱 무겁게 하였다. 이러한 내정상의 악순환은 외정상의 실패로 이어졌다.
가장 큰 실패는 14세기 발흥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정책이었다. 소아시아의 부르사에 수도를 두고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오스만 제국은 니코메디아와 니케아 두 도시를 점령하였다. 이러한 상황에 당면했음에도 국내에서는 제위계승문제로 효과적인 대책을 세울 수가 없었다.
1365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무라드 1세가 수도를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옮기자 비잔티움 제국은 해상으로는 베네치아 공화국과 제노바 공화국에, 육지에서는 오스만 제국에게 둘러싸인 동지중해의 작은 나라로 전락하였다. 이때부터 비잔티움 제국은 오스만 제국에게 조공을 바쳐야만 했으며 이로써 비잔티움 제국은 정치적 독립을 상실하게 되었다. 계속해서 오스만 제국이 세르비아와 헝가리를 물리치자 발칸 반도에서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세력은 없어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세 속에서 비잔티움 제국은 동방 정교회와 로마 가톨릭의 재통일을 조건으로 로마 교황청을 통해 서유럽으로부터 군사 원조를 얻으려고 하였지만 이마저도 실패로 끝났다. 무라드 2세 이후 콘스탄티노폴리스 공략은 날로 심해졌으며, 1453년 봄 술탄 메메드 2세는 농성군의 10배나 되는 병력으로 콘스탄티노폴리스를 포위하여 5월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어 비잔티움 제국은 멸망하게 되었다. 콘스탄티노폴리스의 함락에 이어 아테네, 모레아, 트레비존드 제국이 차례대로 오스만 제국에게 점령당하였다.
교회의 우두머리인 교황이 세속의 우두머리 역할까지 하는 교황지상주의를 제창한 로마 가톨릭과는 달리, 세속의 우두머리인 황제가 교회의 우두머리 역할까지 겸하는 황제교황주의가 발달한 동방 정교회를 국교로 믿었다. 동방 정교회는 황제의 지배 하에 있어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의 영향력은 그리 대단치 않았으며, 각 나라별로 교회의 자립화가 이루어져 있다. 황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행자이자, 교회의 수호자로 믿어져 왔다. 비잔티움 제국의 활발한 선교로 대부분의 동유럽권(세르비아, 불가리아, 러시아 등 슬라브 민족)과 일부 중동권에 기독교 문화가 형성되었고 비잔티움 제국은 자연스레 정교회의 본산지 역할을 담당하였다. 슬라브 민족은 동방 정교회와 함께 키릴 문자와 동방정교회의 교회 헌법을 수용했다. [1]
비잔티움 사회에서는 교회가 중추적인 역할을 하였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세례, 결혼, 장례 등 개개인 생활의 중요한 순간에 교회가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또한 신학, 예술, 경제, 정치, 외교 등 국가와 사회의 모든 부문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비잔티움의 문화는 고대 그리스의 고전 문화인 헬레니즘 문화를 계승, 그 위에 기독교적 요소를 결합하여 천년 간에 걸쳐 중세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발달하였다. 중세를 통해 유지한 비잔티움 문화는 근세 서유럽에는 그리스 정신을 전해주었고, 발칸과 러시아에 거주하는 슬라브계 민족의 문화적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특히 6세기와 9세기~10세기, 14세기에는 절정에 이르렀다.
비잔티움 문화는 일반적으로 보수적이면서 신비적인 분위기가 두드러지는 점이 있으며, 비잔티움 사람들은 아름다움을 외면적 요소보다는 정신적인 요소에 더 가치를 두고 있었다.
비잔티움 제국에서는 서유럽과는 달리 고대 이래 화폐 경제 제도가 발달하였다. 제국 정부에서 발행한 금화 노미스마는 11세기 전반까지 높은 순도를 유지하여 후세에 ‘중세의 달러’라고 불릴 정도로 국제적 화폐로 유통되었다.
특히 수도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는 업종마다 길드를 통한 국가에 의한 보호와 통제가 두루 미치고 있었기 때문에, 국영 공장에서 독점적으로 제조된 견직물이나 귀금속 공예품, 다른 나라와의 무역 등이 제국에 많은 부를 가져와, 콘스탄티노폴리스는 ‘세계의 부의 3분의 2가 모이는 곳’이라고 칭해질 만큼 크게 번영하였다. 그러나, 12세기 이후로는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의 상공업의 발전에 밀려나 제국의 국내 산업은 쇠퇴하여 해군력 제공을 담보로 이탈리아 도시국가들에 대한 무역 특권 부여로 무역의 이익도 잃은 제국은 쇠퇴의 길로 들어섰다.
주요 산업 가운데 하나인 농업은 고대 그리스-로마 시대 이래 별로 기술의 진보가 없었다. 고대부터 중세까지는 서유럽에 비해 고도의 농업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유럽의 농업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12세기부터는 서유럽이나 중동에서도 농업 기술이 개선되면서, 제국의 농업 기술이 눈에 띄게 낙후되었다.
연도 | 사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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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4년 | 콘스탄티누스 1세가 제국을 통일하고 유일한 로마 황제가 되다. |
325년 | 제1차 니케아 공의회가 개최되다. |
330년 | 콘스탄티누스 1세가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수도를 천도하다. |
431년 | 에페소스 공의회가 개최되다. |
451년 | 칼케돈 공의회가 개최되다. |
532년-537년 |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하기아 소피아 성당(그리스어: Αγία Σοφία 성스런 지혜)을 짓다. |
541년-543년 | 페스트가 유행하여 막대한 인구 손실을 입다. |
552년 | 유스티니아누스 1세가 이탈리아, 북아프리카, 에스파냐 남부를 탈환하다. |
730년-753년 | 우상숭배 금지를 이유로 성상파괴칙령이 내려져 성상파괴운동이 전개되다. |
843년 | 성상논쟁이 종결되어 성상파괴칙령이 파기되고 성상공경이 재수립되다. |
1014년 | 바실리우스 2세가 불가리아를 정복하다. |
1054년 | 교회의 대분열이 일어나다. |
1071년 |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셀주크 투르크군에게 패배하고 로마누스 4세 황제가 포로가 되다. |
1096년-1204년 | 십자군이 제국의 영토를 지나가다. |
1204년 | 콘스탄티노폴리스가 제4차 십자군에 점령되다. 이때가 중앙정부가 무너졌으므로 멸망일수도 있겠다. |
1261년 | 콘스탄티노폴리스가 미카일 8세 팔라이올로고스에 의해 수복되다. |
1453년 | 오스만 제국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침공, 전장에서 콘스탄티누스 11세가 전사하고 제국이 멸망. 로마 제국의 멸망은 476년 서로마 제국의 멸망이나 이 사건이라고 보는 시각이 대부분이다. |
1460년 | 제국의 마지막 영토, 제국령 모레아가 오스만 제국에 점령. |
1461년 | 제4차 십자군 직후 건국된 비잔티움계 트레비존드 제국이 멸망. 이 사건이 로마 제국의 멸망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