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롬 12:14~21 지난주에 우리들은 사랑에 대한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거짓 없는 사랑은 악을 미워하고 선 에 속하게 되며 형제를 사랑하되 우애하면서 먼저 존경하게 된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거짓 없는 사랑은 게으르지 않고 열심을 품고 주를 섬기며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 환 난 중에 참으며 기도에 힘쓰며 성도들의 쓸 것을 공급하는 사람으로 변화시킨다는 말씀을 나누었습니다. 오늘의 메시지는 진정한 사랑은 나를 핍박하고 나를 저주하고 미워하고 괴롭히는 사람까지 도 축복한다는 것입니다. 14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축복하고 저주하지 말라” 진실한 사랑은 불가능이 없습니다.진실한 사랑에는 안 되는 것이 없습니다.어떤 사람들은 구제하라고 하면 돈이 없다고 말합니다. 아닙니다. 돈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 입니다.사랑이 있으면 막노동이라도 합니다.자존심 다 버립니다. 그렇게 팔짱끼고 좋은 일 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사랑하지 않기 때문에 그렇습니다.어떤 사람들은 일을 함께 하 자고 제안하면 나는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봉사 하자고 하면 능력이 없다고 합니다.봉사 는 그저 함께 서 있기만 해도 됩니다.이것이 사랑입니다.시간이 없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없는 것입니다.사랑만 있다면 한두 시간만 자거나 밤을 새도 괜찮습니다.그것이 사랑입니 다. 오늘 우리 사회는 돈이 중심이 된 사회입니다. 그래서 돈을 주면 용서하고 돈을 주면 화해 하고 돈을 주면 정당도 움직입니다.돈을 주면 인격도 팔고 몸도 팝니다.그러나 돈이 없을 지라도 감사하고 배고플지라도 감격하고 일찍 죽을 지라도 기뻐하는 것이 사랑입니다. 사랑 은 최악의 환경으로 최선의 결과를 만들어내는 줄 믿습니다. 사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인간에게는 사랑이 없습니다.사랑은 하나님뿐입니다.우리가 가지고 있는 사랑은 동물적이고 본능적인 것입니 다.참 사랑을 인간은 잃어버렸습니다.그래서 원수를 사랑한다거나 나를 핍박하는 자를 축 복한다는 일은 머리로는 되지만 감정으로는 어려운 것입니다. 지난주에 P.L.O.에서 목사님 한분이 오셨습니다. 그 분은 팔레스타인에서 태어났고 거기서 자란 분입니다. 그의 아버지가 총에 맞아 죽음으로 그는 어려서부터 고아가 되었습니다. 그 는 고아원에서 분노와 미움과 한과 복수로 자랐습니다. 그러던 그가 예수님을 믿고 목사가 되었습니다.지난번에 우리는 그의 간증을 들었습니다.그가 목사가 되어 목회를 하는데 교 인들이 변하지 않고 고아들을 돌보는데 고아들이 변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은 자기 속에 분노와 미움이 있고 용서하지 못하는 것을 알게 되었답니다. 그 후에 십 자가의 사랑을 다시 깨닫고 성령 받고 마음으로부터 진정한 용서를 했다고 합니다. 그랬더 니 교인들이 변하고 아이들이 변했답니다. 여러분이 변하면 여러분의 자녀들이 변할 줄 믿습니다. 자녀들이 먼저 변하기를 기다리지 마십시오.부모의 문제이고 우리들 문제입니다.목사가 회개하지 않는데 어찌 평신도들이 회개하겠습니까? 괴롭히는 자를 축복하라 예수님께서 마태복음 5장 43~ 44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핍박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오늘 주님은 이 아침에 우리들에게 “네가 할 수 없는 일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지만 너를 핍 박하는 자를 축복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 메시지는 첫째,너를 핍박하는 자,너를 고통스럽게 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고 축복 하라는 메시지입니다.저주하지 말고 축복하라. 우리 주변에는 핍박을 받는 사람들이 참 많습니다. 나를 핍박하고 미워하는 사람이 많습니 다. 내가 무슨 잘못을 했거나 피해를 주었다면 핍박받는 것이 당연하지만 남에게 피해준 일 도 없고 잘못한 일도 없는데 미움 받는 경우가 아주 많습니다. 이유 없이 텃세를 하고 기득 권을 행사합니다.그것은 어느 직장에 들어가도 마찬가지입니다.군대에서도 신고식을 해야 하고 사회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경쟁에 부딪혀야 합니다. 나를 모함하고 나를 파괴시키려는 세력들이 항상 주변에 있게 마련입니다. 저는 이 설교를 준비하다가 군대에서 기합 받던 일이 생각났습니다. 지금은 용서했지만 제 사수가 하나 있었는데 예수 믿는 저를 보고 재수 없다고 때렸습니다. 그리고 술을 주고 나 서 안 먹는다고 때렸습니다. 그 이유는 자기가 주는 술을 먹지 않는 것은 자기를 무시해서 그러는 것이니“너 한번 맞아 봐라”라면서 때렸습니다. 제가 일등병 때 그 사람은 저를 골 탕 먹이려고 몰래 숨어 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 ‘충성’하면서 경례를 합니다. 그리고는 졸병 이 고참이 인사하는데 먼저 인사하지 않았다고 때립니다. 또 돈을 가져다주지 않는다고 때 립니다.그리고 마음은 참 착한데 저를 때리던 사람이 있었습니다.그 사람은 대학원까지 졸업한 사람인데“내가 하도 많이 맞아서 너를 때리지 않을 수가 없다”면서 때렸습니다. 그 래서 맞았습니다. 그렇게 계속 맞으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살아가기가 어렵습니다. 보기만 해도 굳어지고 치 를 떨게 됩니다.제가 제대를 하고 신학교를 갔더니 신학교에 예비군이 있습니다.그런데 예비군 조교가 저를 많이 때리던 제 사수인 바로 그 사람이었습니다. 물론 그 사람을 먼저 찾아가서 악수를 청했지만 그 사람을 보니까 가슴이 두근거리고 다시 보고 싶지 않아졌습니 다. 원수를 사랑한다는 것,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이해하고 축복한다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 니다.어디 이런 일 뿐이겠습니까?자기를 고문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습니까? 법적으로 는 걸리지 않게 사기 쳐서 자기 기업을 부도나게 한 사람을 사랑할 수 있습니까? 내 기업 이 부도가 나고 가정이 힘들어지고 주변에 있는 모든 사람들에게 힘들어졌을 때 왜 분노가 없겠습니까?그 사람을 어떻게 사랑할 수 있습니까?장미 빛 꿈을 가지고 결혼을 했는데 남자가 남편역할을 하지 않고 딴 짓을 합니다.여자가 부인역할을 하지 않습니다.그래서 이혼합니다.이혼했을 때 분노가 얼마나 크겠습니까?사랑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우리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너를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 라.”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을 향해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여 저들 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스데반은 자기에게 돌을 던지는 사람들을 향해“하나님,저들 은 자기의 죄를 잘 모릅니다. 용서해 주십시오.” 이 사람이 크리스천입니다. 이것이 교회입 니다.예수님께서 마태복음5장 10~12절에서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 나를 인하여 너희를 욕 하고 핍박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스려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기 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을 이같이 핍박하 였느니라” 사랑하는 성도여러분!여러분을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지 말고 축복하십시오.이것이 오늘 하나님의 말씀입니다.여러분은 할 수 없습니다.그러나 여러분이 주님 안에 있을 때는 가 능합니다. 타인의 고난에 참여하라 15절을 보십시오.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 둘째 메시지는 다른 사람의 고난에 방관자가 되지 말고 참여자가 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두 가지 태도를 가집니다.비판을 하던지 방관을 하던지 합니다.남을 도와준다는 말은 내가 손해 보지 않는 범위 내에서 도와주는 것입니다. 내 명예가 상하거나 내가 손해를 볼 때는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오늘 성경에서는 우리들에게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은 방관자 입장에서 거리를 두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 속에 들어가고 동참해서 사랑하라고 하는 것입니다.정말 어려운 이야기입니다.어떤 사람 은 다락방에 있는 순예배에도 가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누가 내 생활을 간섭하는 것이 귀찮아서 아무데도 참여하지 않습니다.이것이 현대인입니다.그래서 현대인들은 스스로 외 로운 것입니다. 자기 스스로 벽을 만들어 놓고 성을 쌓아놓고 성속에 들어가서 다른 사람이 나를 건들지 못하게 하고 보호 장치를 해서 안전하게 만들었지만 외로워합니다. 점점 외로 워집니다. 우리나라의 속담에“사촌이 논을 사면 배가 아프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런데 정말 사랑하 면 그 사람이 잘되기를 원하고 잘되면 좋아합니다. 자식 잘된다고 질투하는 부모를 보신 적 이 있습니까? 시골에서 농사짓는 부모님이 자식이 성공했을 때 그 부모가 얼마나 좋아합니 까?사랑하는 사람은 잘될수록 좋은 것입니다.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라. 우리가 왜 남이 잘되는 것을 잘 보지 못할까요?그 이유는 간단합니다.사심이 많아서 그렇 습니다.사심이 많으면 다른 사람을 축복하지 못합니다.자꾸 경쟁하게 됩니다. 우리가 화를 잘 내고 섭섭해 하고 미워하는 이유는 상대방이 나에게 피해를 주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내안에 경쟁심, 소유욕, 이기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은 남이 잘되는 것을 축복하지 못 합니다. 축복을 해주어야 하겠는데 축복이 안 되는 사람의 얼굴을 본 일이 있습니까? “저 사람이 저렇게 복 받으면 안 되는데... ”하는 경쟁심, 이기심이 있을 때 축복할 수 없습니다. 사심 없이 정말 축복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이 잘될수록 좋아합니다. 저는 한국사회가 이런 사회 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남을 축복해 주는 사회,격려해주는 사회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계속해서 15절을 보면 “우는 자들로 함께 울라”는 말이 있는데 그것은 약자에 대한 동정심 이 아닙니다.약자에 대한 동정심은 화가 나게 하는 것입니다.자존심을 긁어놓는 것입니다. 그런 동정이 아니라 정말 사랑하기 때문에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것입니다. 아픈 사람을 보고“저 사람이 아파요.하나님 저 병을 나를 주세요.내가 대신 아플께요.”라 고 하는 기도는 그저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의 고통 속에 함께 들어가겠다는 말입니다 .같이 눈물을 흘리라는 말입니다.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한 자가 되 고, 나는 누릴 수 있는 가정환경이 있지만 그 모든 환경을 포기하고 가난한 자와 함께 있 고,병든 자와 우는 자들과 함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었지만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사람이 되셨습니다. 종의 모습으로 세상에 오셨고 자기를 낮추시고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신 분 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느끼고 예수님을 만나고 싶다면 그 방 법은 간단합니다.높은 곳이나 화려한 곳에 가 있으면 하나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가난한 자들과 낮은 곳에 가서 며칠만 지내다 보면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병든 자들 속에 가 서 도와주십시오.억울한 자들을 도와주십시오.거기서는 하나님을 느낄 수 있습니다. 사랑 하면 죽기까지 합니다. 예수님은 “즐거워하는 자들로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로 함께 울 라”고 말씀하십니다. 저는 세례요한을 참 좋아하는데 “나는 광야의 외치는 소리요.빛에 대하여 증거자요,나로 인하여 하나님의 어린양을 알고 세상의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기 원한다.”는 것이 세례요한 이 외친 소리였습니다. 세례요한이 한 말 중에 “높은 산골짜기는 낮아지고 낮은 골짜기는 높여서 주의 길을 평탄케 만든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오늘 높아진 사람들은 다 낮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또 낮아진 사람들은 모두 높아지시기를 축원합니다. 16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서로 마음을 같이 하며 높은데 마음을 두지 말고 도리어 낮은 데 처하며 스스로 지혜 있는 체 말라” 핍박하는 사람을 축복하시고 고난당하는 사람을 옆에서 그저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고난에 동참하십시오.어려운 사람은 어려울 때 도와줘야 도움이 됩니다.어려움이 다 지나간 후에 도와주는 것은 도움이 아닙니다.가장 어려울 때 같이 있어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셋째, 겸손하십시오. 낮추십시오. 교회 안에는 높은 사람도 없고 낮은 사람도 없습니다. 장 교와 졸병이 함께 있는 곳입니다. 재벌과 서민이 함께 봉사하고 배운 사람과 못 배운 사람 이 함께 기도하는 곳이 교회입니다.모든 높아진 사람은 모두 내려오시기 바랍니다.잘난 척 하지 마십시오. 낮아있는 사람은 지나치게 열등감에 빠져 있지 마시고 올라오십시오. 자 동차는 도로를 달려야 합니다. 산같이 올라갔다 내려왔다 하는 굴곡이 심한 곳은 운전하기 가 어렵습니다.주의 길을 평탄케 하라. 넷째 17절을 보십시오. “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모든 사람 앞에서 선한 일을 도모하라” 우리는 17절에서 엄청난 도전을 받습니다. 구약에서는‘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고 했습니 다. 누가 나를 때려서 오른쪽 두 번째 이가 빠지면 마찬가지로 때린 사람의 오른쪽 두 번째 이를 빼내면 됩니다.눈이 빠지면 눈을 빼면 됩니다.이것이 구약의 율법이었습니다. 율법의 사회는 무섭습니다.그러나 예수님은 “원수까지 사랑하라.너를 핍박하는 자를 축복하라. 적 극적으로 모든 사람 앞에서 선을 도모하라.아무에게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라.선으로 보 답하라.” 이것이 주님이 원하는 사회이며 교회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사람은 많이 모이는데 왜 능력이 없을까요?세상과 비슷해서 그렇습니다.세 상과 다른 것이 없습니다.원수를 미워하고 자기 핍박하는 자를 저주하는 것도 똑같습니다. 모두 이익을 따라 살고 필요하면 하고 필요 없으면 하지 않는 이것은 교회가 아니라 세상입 니다.교회가 크다고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진짜일 때 능력을 주고 영향력을 주는 입 니다. 작은 교회라 할지라도 성도들이 주님의 명령을 온 마음으로 이 지키고 있다면 그 교 회는 진짜교회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할 수 있거든 너희로서는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평화하라” 다섯째 모든 사람과 더불어 평화를 만들라는 말씀입니다.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우리는 방관자도 비판자도 아닙니다.우리는 화해자입니다.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입니다. 나 는 이 축복이 온누리교회 성도들의 삶 속에,가정 속에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이런 가치관, 철학, 인생, 인생관을 가진 여러분이 가는 곳마다 웃음꽃이 피고 조직이 변하고 사회가 변 한다면 얼마나 놀랍겠습니까?예수님은 마태복음5장에서 누구든지 네 오른뺨을 치거든 왼 뺨을 돌려대고 겉옷을 달라하면 속옷까지도 주고 오리를 가자고 하면 십리를 함께 가라고 말씀하십니다.이것이 교회입니다.나는 온누리교회에 이런 일이 있기를 바랍니다. 모두 와 서 청소하시고 섬기고 대접하시고 이익을 보는 것이 아니라 손해를 보는 사람들, 자기를 희 생하는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10년 전에 우리교회에 계시던 한 장로님의 눈동자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은 60 이 되신 그 장로님이 처음으로 텔레비전에 조선족이 소개되던 때 제게 찾아왔습니다. “목사 님, 제 50년의 인생은 이제 만족합니다. 제 남은 인생을 조선족을 위해 살겠습니다.” 그리 고는 그는 병원과 농장과 집을 팔고 떠났습니다.저는 가끔 그분을 생각합니다.그 외에도 그와 비슷한 분이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저는 최근에 이런 소식을 들었습니다.88년도에 우리교회에 와서 일대일을 마치고 새롭게 하나님을 만난 미용하는 자매가 있습니다. 제가 가끔 설교할 때 ‘나가라’고 말했던 그 말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듣고 경북 봉화라는 곳에 갔 답니다. 남편을 졸라서 남편과 함께 사과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기 시작했답니다. 그리고 그 동네에 교회가 없어 교회를 짓는 답니다. 온누리교회가 오고 싶어서 한주는 남편이 오고 한 주는 부인이 오고 그랬답니다. 그런데 요즈음에는 일이 많아서 한 달에 한번밖에 오지 못한 답니다.저는 아직 얼굴도 못 뵈었습니다.그러나 제 마음이 그렇게 따뜻할 수가 없습니다. 또 온누리교회 안에서 정말 신실하게 봉사하는 분들이 참으로 많습니다. 저는 그런 분들을 보면 ‘목사님’이라고 부르고 싶습니다.저는 교인 같고 그분들이 목사님들 같습니다.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릅니다. 이것이 교회입니다.원수를 사랑하고 여러분을 괴롭히는 사람을 축복하는 것,고난에 구경 꾼이 아니라 동참하는 사람,선을 추구하는 사람,자기를 낮추는 사람들이 있는 곳,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있는 곳이 교회입니다. 기도합시다 주님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주여,우리 성도들이 평화를 만드는 사람들, 낮추어지는 사람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과 외로운 사람들과 함께 있는 사람들이 되게 하여주시고 주의 거룩과 축복이 온누리교회에 나타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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