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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파] ☆ 2022년 퇴계 선생 마지막 귀향길 700리 종주 이야기(3)
퇴계 선생의 발자취, 경(敬)으로 따르다
2022.04.04~04.17.(14일간)
* [귀향길 제3일] ▶ 4월 6일(수) 봉은사→ 미음나루 (19km)
* [1569년 기사년 음력 3월 6일 퇴계선생]
○ (퇴계 선생은) 봉은사를 출발하여 무임포(지금의 남양주지 수석동 미음나루)에서 묵었다. — 《퇴계선생연보》
○ 정존재(靜存齋) 이담(李湛)이 병환 중에 내가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억지로 일어나서 광나루로 나와 작별할 때 절구 세 수를 지어주기에 차운하여 드린다. — 《퇴계집》
○ (귀향길) 사흘째 되는 날, 퇴계 선생은 봉은사를 떠나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도중에 광나루에 이르니 선생의 문인 이담(李湛, 1510~1575)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병환 중이었으나 선생이 떠난다는 소식을 듣고 지름길로 찾아왔다. 이 자리에서 그는 헤어지기 섭섭함을 담을 시(詩)를 건넸다. 아쉬워하는 제자에게 선생은 시(詩)를 지어 화답하면서 그 소회를 밝혔다.
아녀자들 이별 눈물 늘 싫어하지만 兒女常嫌別淚潺 아녀상혐별루잔
때에 따라 갈 땐 가고 쉴 땐 쉬는 것 坎流時往亦時還 감류시왕역시환
구성자여, 이날 정이 더욱 깊으니 情深此日駒城子 정심차일구성자
두 늙은이 이별하기 어려움을 알겠구려 兩老方知作別難 양로방지작별난
병든 몸 이끌고 돌아가는 배 좇아와 撥病來追歸去舟 발병래추귀거주
봄바람 푸른 강에 눈물을 뿌리누나 春風灑淚碧江流 춘풍쇄루벽강류
어찌 평생 교분 생각해 주지 않는가 如何不念平生契 여하불념평생계
眞休를 만류하여 假休를 만들려나 欲破眞休作假休 욕파진휴작가휴
벼슬살이는 촉蜀 땅을 바라서는 안 되니 宦情無望蜀 환정무망촉
사람 일은 형서처럼 징계해야 하는 법 人事有懲荊 인사유징형
퇴휴를 허락해 주심에 깊이 감격하는데 感深優許退 감심우허퇴
억지로 만류한들 무엇이 두려울까 寧怕强留行 영파강유행
“정존재의 말을 들으면 나의 물러나려는 뜻을 이룰 수 없으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若用靜存之說滉之退之路不得通矣 故云)” -《퇴계집》(靜存李仲久病中 聞余行 强起追別於廣津 且以三絶見贐 次韻奉呈)
○ 퇴계 선생이 지은 이 시는 이날 이담(李湛)이 지어 바친 송별시 3수에서 차운(次韻)한 것이다. 다만 아쉬운 것은 앞에 소개한 기대승, 박순, 김성일, 이순인의 시와 달리 이담의 시는 전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담은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하다가 을사사화에 걸려 귀양살이를 했다. 선조 초에 다시 등용되어 대사성, 관찰사에 이르렀다. 주역 책읽기를 좋아하여 침식을 잊기까지 하였고 선생에게도 자주 질의하였다. 선생보다 9세가 적을 뿐이었으나, 자신을 낮추어 후학을 자처하였다. 선생이 그를 위하여 〈정존재명(靜存齋銘)〉을 지었다.
* [2022년 4월 6일 수요일 귀향길 재현단]
봉은사 출행
▶ 오늘의 귀향길 재현단은 봉은사를 출발하여 남양주시 수석동의 미음나루까지 약 19km를 걷는다. 오전 8시, 귀향길 재현단 김병일 단장(안동 도산서원 선비문화수련원 이사장), 전 안동문화원 이동수 박사, 전 대구대 이한방 교수, 연합통신 홍덕화 기자, 오상봉·송상철 님 등 선비의 의관을 갖춘 선비단과 평상복을 입은 이장우 박사, 도산서원 이강호·진병구 지도위원 그리고 오상수, 이상천, 조민정, 진현천 님 등이 봉은사 ‘보우당’ 앞에 도열했다. 오늘은 도산서원 ‘참공부모임’ 멤버이며 2019년 처음 재현행사에 주무자였던 손기원 박사도 부인과 함께 나왔다, 그리고 김경조 시인과 그 지인이 함께 참여했다. — 재현단은 이동신 별유사의 진행으로 간단하게 준비운동을 하고 봉은사를 출발하였다.
탄천 둔치에서 부른 〈도산십이곡〉
▶ 일행은 큰길 봉은사로를 지나 봉은교 아래 탄천(炭川)에 이르렀다. ‘탄천’은 한남정맥의 용인 구성과 광교산에서 발원한 여러 물줄기가 분당신도시—송파구 문정동을 경유하여 북상하다가, 강남구 대치동에서 양재천을 받아들여 한강에 유입된다. 재현단 일행은 탄천 하구의 둔치에 크게 원(圓)을 그리고 섰다. 김병일 단장이 오늘의 여정을 말씀하셨다. 오늘은 이곳 탄천 하구를 출발하여 올림픽대로 아래 강변의 인도를 따라 잠실대교, 성내천 하구, 올림픽대교, 천호대교를 경유하여 광진교에서 한강을 건넌다. 이후 강북의 강변 길을 걸어서 구리시 아천동 암사대교, 토평동 강동대교, 왕숙천을 경유하여 한강공원 삼패지구 미음나루에 도착하게 된다. —
이동신 별유사의 진행에 따라 〈도산십이곡〉 제2곡을 다함께 노래했다. 매일 아침 출발에 앞서 부르는 〈도산십이곡〉, 오늘은 봉은사 경내를 나와서, 부르게 된 것이다;
연하(煙霞)에 집을 짓고 풍월(風月)로 벗을 삼아
태평성대(太平聖代)에 병으로 늙어가나
이 중에 바라는 일은 허물이나 없고자
‘연하(煙霞)’는 ‘연기와 놀’, ‘풍월(風月)’은 ‘바람과 달’이다. 모두 자연을 나타내는 대유법적인 표현이다. ‘병으로 늙어간다’는 말은 늙어가는 인생의 고뇌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순리대로 늙어 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인간적으로 허물'이 없고 학문적으로 부족함이 없도록 노력하고자 하는 선생의 뜻을 담고 있다. 자연과 더불어 소박하게 살면서 학문과 덕을 쌓아가겠다는 다짐이 스며있다.
퇴계 선생의 뱃길을 따라서
▶ 옛날 퇴계 선생은 탄천과 한강의 합류지점에 위치한 봉은사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갔다. 지금은 뱃길이 없으므로 오늘의 귀향길 재현단은 한강변 둔치의 바이크로도(자전거길) 옆 인도를 따라 걷는다. 한강은 잠실수중보로 인해 거대한 호수가 되어 있었다. 약간의 연무가 있기는 하지만, 4월의 봄날은 비교적 화창했다. 강변의 인도, 아침 햇살이 얼굴에 내리고 부드러운 강바람이 가슴에 안겨들었다. 강가의 버드나무에 움이 돋아 연두빛 신록이 물들기 시작했다.
▶ 탄천을 지나고 나서 잠시 쉬는 동안, 필자(筆者)가 ‘장거리 구간을 걷는 요령’에 대해 이야기했다. 〈퇴계 십훈〉 가운데 두 번째 덕목인 ‘구용(九容)’에 바탕을 둔 보법이다. 오늘날 일반화된, 피로감을 줄일 수 있는 ‘11자 마사이보법’에 관해 설명을 했다. 고개를 반듯하게 들고[頭容直], 가슴을 살짝 앞으로 내밀고, 발걸음을 가지런히 하여 진중[足容重]하게 걷되, 발뒤꿈치를 먼저 땅에 닿도록 하는 걸음걸이다. 이 보법은 걷기의 달인인 아프리카 케냐의 마사이족이 걷는 방법에서 착안한 것이다. 세계적으로 알려진 효과적인 보법이다.
▶ 우리는 강변 길을 걷고 있지만, 1569년 당시를 생각해 보건대, 퇴계 선생은 한강의 배를 타고 유유히 물길을 가셨다. 선상에는 제자 김취려(金就礪), 손자 이안도(李安道) 등 몇 분이 배행하고 있다. 탄천 하구(봉은사 나루)를 지난 재현단 일행은 잠실대교와 전철 2호선 철교 아래를 지나고 한강에 유입되는 성내천의 보도교를 건너서 올림픽대교 아래를 지났다. 그리고 한강의 너른 둔치, 직선의 쭉 뻗은 산책길을 따라 대열이 나아갔다. 한강변의 무궁화동산, 평화광장, 선착장 등을 지났다. 둔치의 공원 길 버드나무에 초록초록 신록이 피어나고 있는, 싱그러운 강변길이었다.
▶ 천호대교 교각 아래 쉼터에서 휴식을 취했다. 광진교가 저만큼 보이는 지점이다. 이곳에선 김병일 단장의 누이와 그 친구들이 재현단을 격려하기 위해 합류했다. …
광진교 — ‘광나루’, 정존재와의 석별
▶ 오전 11시, 일행은 광진교로 강을 건넌다. ‘광진교(廣津橋)’는 천호대교와 올림픽대교가 개통되면서, 차도의 폭을 반으로 줄여 시민들이 한강을 조망하며 산책할 수 있도록 정비하였다. 다리 위에 전망대, 벤치 등 편의시설을 갖추고 있다. 재현단 일행은 천호동 쪽에서 광장동 쪽으로 다리를 건넜다. 옛날 ‘광나루’는 지금의 광진구 광장동과 강동구 천호동을 잇는 나루였다. 1936년 이 광진교가 세워지면서 나루터의 기능을 잃어버렸다. 천호동 광진교 초입의 우측 교각 위에 ‘광나루’ 안내판이 있다. 조선후기 광나루 풍경은 겸재(謙齋) 정선(鄭歚, 16176~1759)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광진(廣津)’에 그려져 있다.
◎ 1569년, 퇴계 선생은 봉은사를 떠나 뱃길로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반나절이 지나서 광나루에 이르렀다. 광나루에는 퇴계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었다. 제자 * 정존재(靜存齋) 이담(李湛, 1510~1575)이었다. 스승이 떠난다는 소식을 뒤늦게 접한 이담은 지름길로 달려와 이곳 광나루에서 스승을 기다리고 있었다. 아픈 몸을 이끌고 달려온 것이다. 퇴계는 뜻밖에 찾아온 그를 보자 반갑고 기뻤다. 이담은 다시 보지 못할 스승에게 시를 지어 올렸다. 귀향을 만류하며, 애틋한 이별의 아픔을 담은 시였다. 이에 퇴계 선생은 3수의 화답시를 지어 화답했다. (안타깝게도 이담의 시는 지금 전하지 않는다)
아녀자처럼 이별의 눈물 줄줄 흘리지 마시게
웅덩이가 차면 물 흘러가듯 가고 또 오는 것
오늘 정이 이리도 깊구나 구성 사람이여
두 늙은이 이별하기 어려움을 알겠구려 (제1수)
‘구성’은 용인을 말한다. 서로 간에 헤어짐이 안타깝고 애석하지만 아녀자처럼 눈물을 흘리지 말자고 당부하는 내용이다. 그러나 마지막 구절에서 서로 정의(情誼)가 깊은 두 사람이 이별하기 쉽지 않음을 드러내고 있다.
병든 몸 이끌고 돌아가는 배 좇아와
봄바람 푸른 강에 눈물을 뿌리누나
어찌 평생 교분 생각해 주지 않는가
진휴眞休를 만류하여 가휴假休를 만들려나 (제2수)
‘진휴(眞休)’는 ‘진정한 물러남[退休]의 경지’를 뜻한다. 송나라 소동파의 시에 “눈앞에 이 경치는 망상일 뿐이니, 몇 사람이나 숲속의 진정한 퇴휴자일까(此境眼前聊妄想 幾人林下是眞休)”라는 시구에서 인용한 것이다. 귀향을 만류하는 이담에게 고향으로 돌아가는 자신의 심정을 알아달라고 하는 것이다.
* [정존재 이담] ☞ 이담(李湛)은 용인 이씨로 호가 정존재(靜存齋)이다. 한훤당 김굉필(金宏弼)의 문인인 류우(柳藕, 1473~1575)에게 배웠으며 경재(敬齋) 경세인(慶世仁)의 사위가 되어 그에게도 배웠다. 27세에 문과에 급제한 후 수찬, 지평을 역임하였으나 ‘을사사화’ 때 삭직되고 ‘양재역벽서사건’에 연루되어 양산에 유배되기도 했다. 유배에서 풀려난 후 감사를 거쳐 참의까지 올랐다. 퇴계 선생보다 9살 아래로 같은 관직에 함께 있기도 하였지만 끝내 퇴계 선생에게 후학으로 자처하며 늘 공손하게 배움을 청했다. 퇴계 선생은 1563년 봄에 이담에게 〈정존재잠(靜存齋箴)〉을 지어주기도 했다.
훗날 다산 정약용(丁若鏞· 1762~1836)은 서른의 젊은 나이에 금정찰방으로 좌천돼 실의에 잠겨 있을 때 퇴계가 정존재에게 준 편지를 보고 크게 감동했다. 당시 퇴계는 “사람들은 세상이 알아주지 않는다고 하는데 나도 이런 탄식이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자신의 포부를 알아주지 못하는 것을 탄식하고 나는 내가 허술하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 탄식합니다.”라고 글을 써 정존재에게 보냈다. 이 글을 읽은 다산은 “퇴계 선생은 참으로 훌륭하시다. 그렇게 말씀하시다니! 내가 선생을 따라 배우지 않고 누구를 따르겠는가?”라는 소감을 남겼다. — 정약용의 《도산사숙록》
▶ ‘광장동 광나루’는 지금 강변도로의 완강한 교각이 점유하고 있어 옛날 퇴계 선생과 이담(李湛)이 전별하던 흔적은 찾아볼 수가 없다. 교각 아래의 바이크로드-보도를 따라 구리 방향으로 걷는다. 길은 강변북로의 교각 아래를 따라가는 것이다. 고요한 강물이 일렁인다. 잠실수중보로 인해 흐름을 멈춘 한강물이 호수처럼 넘실거리고 있다.
한참을 걷다가 벤치가 있는 길목의 ‘쉼터’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김병일 원장이 퇴계 선생과 이담과의 각별한 관계를 소개하고, 퇴계 선생이 이담(李湛)에게 준 시(詩)를 이동수 원장이 곡진한 목소리로 창수하고 이장우 박사가 시 해설을 곁들였다. 따사로운 봄 햇살이 내리고 노란 개나리꽃이 지천으로 피어있는 강변, 강 건너편에는 강동구 암사동의 아파트 군(群)이 시야에 들어왔다.
구리시 한강시민공원
▶ 다시 열을 맞추어 걷기 시작했다. 옛날 배를 타고 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선생을 따라 우리는 453년 전의 풍경을 마음속으로 그리며 강변길을 걷는 것이다. 한강을 오른쪽에 두고 이어지는 강변의 바이크로드 인도이다. 강 건너에 보이는 아파트군은 강동구 암사동이다. ― 서울과 구리시의 경계표석을 지난다. 길은 경기도 구리시 구간으로 접어들었다. 이제 재현단은 서울을 벗어난 것이다. 한강변의 녹지는 구리시가 ‘한강시민공원’이라고 명명하고 대형안내판을 설치해 놓았다. 화창한 4월의 햇살이 강변에 가득하다. 강동구 암사동과 구리시 아천동을 잇는 ‘구리암사대교’ 아래를 지났다.
▶ 대형의 태극기가 창공에 펄럭이는 구리시 한강시민공원의 간이쉼터에 도착, 점심식사를 했다. 지원단이 제공한 정수와 맛있는 김밥이었다. 조촐한 간편식이지만 넉넉하게 요기를 했다. … 강변의 맑은 햇살이 따사롭고 청정한 바람이 온몸에 스며든다.
식사 후, 다시 강변길을 따라서 걸었다. 한창 건설 중이 ‘고덕대교’ 공사장을 거쳐 중부고속도로 ‘강동대교'를 지났다. 콘크리트 옹벽 아래의 강변길을 걸어서 왕숙천 하구에 이르렀다. 물가의 벤치가 있눈 쉼터에서 고단한 다리를 풀었다.
왕숙천
왕숙천(王宿川)은 경기도 포천군 내촌면 신팔리 수원산 계곡에서 발원하여 광릉내-진접을 경유하여 구리시 수석동에서 한강에 유입된다. 벤치가 있는 쉼터에서 쉬었다. 김병일 단장이 김경조 시인을 소개하였다. 따뜻하고 알찬 서정시를 쓰는 시인은 이미 〈물 묻은 바람을 찾다〉·〈기다리는 일〉·〈우리는 소보다 나을까〉 등의 시집을 내었고 곧 새로운 시집을 출간할 것이라고 했다. 이광호 박사의 부인이기도 한 시인은 시인으로서 독자적인 정체성을 피력하기도 했다.
그리고 김병일 단장이 손기원 박사와 그 부인을 소개하여 좋은 말씀을 들었다. 손기원 박사는 대학에서 경영학을 전공하고 회계사로서 활동하다가, 유학(儒學)의 길로 들어선 분이다. 국문학과 출신의 부인의 명상(瞑想)에 매료된 것이 계기가 되었다고 했다. 손기원 박사는 요사이 기업경영의 아이콘인 * ‘ESG’와 윤리경영에 관한 이야기를 했다. 유학에 기반을 둔 참다운 인간의 삶을 지향하는 경영철학이었다.
* ‘ESG’는 ‘Environment(환경)’, ‘Social(사회)’, ‘Governance(지배구조)’의 머리글자를 딴 단어로 기업 활동에 ‘친환경’, ‘사회적 책임 경영’, ‘지배구조 개선’ 등 투명 경영을 고려해야 지속 가능한 발전을 할 수 있다는 철학을 담고 있다. 근래 ESG는 개별 기업을 넘어 자본시장과 한 국가의 성패를 가를 키워드로 부상하고 있다. 기업의 ESG 성과를 활용한 투자 방식은 투자자들의 장기적 수익을 추구하는 동시에 기업 행동이 사회에 이익이 되도록 영향을 줄 수 있다.
왕숙천(王宿川)의 유래
그런데 무슨 이유로 이 개울을 ‘王宿’(왕이 잤다) 또는 ‘王山’(왕의 산)으로 기록했을까? 석실서원이 배출한 전북 고창 선비 황윤석의 〈이재난고(頤齋亂稿)〉에도 ‘王宿灘’(왕숙탄)으로 기록하고 한글 토를 ‘왕잔여홀(왕이 잔 여울)’이라 했다.
확인된 바는 없지만 잠을 잔 임금은 조선 태조 이성계라는 이야기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아들 이방원이 왕자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잡으니 태조 이성계는 함흥으로 떠났다. 얼마 후 방원의 간청으로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는데 한양으로 돌아오는 길에 현재 남양주의 한 마을에서 여덟 밤[팔야(八夜)]을 머물렀다는 것이다. 현재의 진접읍 ‘팔야리’의 근원이다. 그 뒤 이 마을 앞을 지나는 하천을 ‘왕이 자고 갔다’는 의미로 ‘왕숙천(王宿川)’이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것이다. 또 ‘왕산천(王山川)’이란 이름도 있는데, 이 개울이 지나는 옆 검암산에 동구릉(東九陵)이 조성되어 왕들이 영원히 잠자고 계시니, 왕숙천, 왕산천이라 부른 것 아니겠냐는 이야기도 있다.
▶ 휴식을 끝낸 재현단 일행은 왕숙천을 거슬러 올라가 보도교를 건너고 난 뒤 다시 한강의 강변길로 들어섰다. 머리 위에선 강변북로의 거대한 콘크리트 수석교가 지나간다. 그리고 한강 둔치의 삼패지구 한강공원을 지나 수석동 공원 주차장에 도착했다. 오후 4시, 오늘의 도착 지점인 ‘미음나루’이다.
‘미호진(渼湖津)’ — ‘미음나루’
▶ ‘미음나루’, 주차장 앞 카페촌을 바라본다. 겸재 정선의 미호(渼湖, 삼주 삼산각) 자리가 분명한데 기와쪽 하나 남아 있지 않다. 카페 간판 아래 놓인 누군가의 묘비 받침돌 하나가 있다. ‘삼주삼산각’을 지은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이나 이곳을 그린 겸재(謙齋)가 이곳에 왔다면 마음 가득 허망함을 느꼈을 것 같다. 겸재 정선의 〈경교명승첩(京郊名勝帖)〉 ‘미호진(渼湖津)’ 속 ‘삼주삼산각’이 있었을 법한 자리이다.
번창했던 미음나루도 음식점과 카페 건물들이 들어서 있다. 강변은 건물의 시멘트벽으로 나루터 흔적이 없다. 남은 것이라고는 이곳이 미음나루였음을 알리는 안내판뿐이다. ‘미음나루’는 고려 때부터 큰 나루였다. 고려시대 송도에서 중원[忠州]으로 가는 길목 중 하나였다. 고려 때는 노수포(蓾水浦) 또는 독포(禿浦)라고 했다. 이 지역 이름이 독음면(禿音面)이었는데 강 쪽 마을은 외미음, 안쪽 마을은 내미음이었다. 그에 따라 나루 이름도 독음진(禿音津), 독포, 독진이라 불렀다. 두음진(豆音津), 미음진, 미호진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었다.
이름이 많다는 것은 그만큼 번화한 나루였다는 말이다. 조선 말 문인 이채(李采)의 시 한 구절에는 ‘미호의 뗏목은 구름처럼 흩어져 진종일 불러도 그대는 안 보이네(渼湖津筏散如雲. 盡日招招不見君)’라는 구절도 있다. 정선의 아우라지에서 출발하여, 영월을 지나온 뗏목들이 머물다 가는 나루였다. 강을 건너면 지금의 하남시 미사리에 닿는다.
미음나루 인근의 유적지 탐방
▶ 해질 때까지 아직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 오늘밤 덕소에서 유숙하고 내일도 걷기를 계속하는 재현단은, 재현단의 기수 이한방 교수의 안내로 인근에 있는 조말생 묘소와 김육의 묘소를 탐방하기로 했다. 귀향길 지원단 버스를 이용했다. 오늘의 구간만을 걷고 귀가하는 대원들의 편의를 위해 도농역울 경유하여, ‘조말생의 묘소’와 ‘서석서원지’를 찾은 것이다. 그리고 이어서 조선 후기 실학자 ‘김육의 묘소’까지 탐방했다. …
사곡(社谷) 조말생(趙末生) 묘소
조말생 묘소는 남양주시 수석동 산 2-2에 있다. 팔당에서 내려오는 한강 물을 한아름에 안고 있는 명당이었다. 역사와 인문지리에 해박한 이한방 교수의 자상한 해설을 들었다. — 조말생(趙末生, 1370년(공민왕 19)~1447년(세종 29))은 조선 초기의 명신이다. 본관은 양주(楊州) 자는 근초(謹初). 평중(平仲), 호는 사곡(社谷) 화산(華山)이다. 정몽주(鄭夢周)의 제자인 성리학자 조용(趙庸)의 문인(門人)이다. 1401년(태종 1) 증광문과에 장원급제 하여 요물고부사(料物庫副使)에 등용되고, 감찰. 정언. 헌납 등 요직을 역임하였다.
1407년 문과중시(文科重試)에 둘째로 급제하여, 전농시부정(典農寺副正)이 되었으며, 이듬해 장령을 거쳐 주로 예문관 승정원에서 근무하였고, 그는 대학자로 특히 글씨에 뛰어났다. 1418년 이조참판에 제수되고 같은 해 형조판서 승진하였다. 세종 즉위 후, 주문사(奏聞使)로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1427년(세종 9) 병조판서 때 그의 명의로 왜국(倭國)에 보낸 국서를 보냈는데, 거기에 대마도(對馬島)는 경상도 계림(鷄林, 경주)에 예속된 우리 영토라고 명기했다.
그 후 함길도관찰사로 부임하여 여진족 방어에 힘썼고, 1435년 판중추부사를 거쳐 1437년 경상·전라·충청 3도의 도순문사(都巡問使)로 축성 사업을 감독하였다. 1439년 임금으로부터 궤장(几杖)을 하사받고 기로소(耆老所)에 들었으며, 1442년 숭록대부(崇祿大夫)가 되고, 1446년 영중추원사(領中樞院事)가 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剛)이요, 묘는 남양주시 수석동(水石洞)에 있다.
▶ 조말생(趙末生)은 죽어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에 안장되었으나 그곳에 명성황후의 능이 들어서면서 수석동 산2~1번지, 이곳으로 이장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조말생의 묘(墓)가 있는 이곳은 원래 안동 김씨의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던 곳이었는데, 고종 때 홍릉이 금곡에 들어서면서 이곳이 안동 김씨 터에서 양주 조씨들에게 넘어갔다고 한다.
조말생의 묘비는 향토유적 제8호로 지정되어 있다. 글씨가 잘 보이지 않지만 겨우 읽으면 좌측부터 ‘보국숭록대부 영중추원사 겸 병조판서 보문각 대제학 諡문강 조공 말생지묘 / 정경부인 평산 신씨 부우(祔右)’이다. 일반적으로 남편과 아내를 합장(合葬)할때 부좌(祔左)라 해서 아내를 남편의 왼편에 묻는데 ....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묘소에는 장명등이 조선 초기 양식을 고려하여 최근에 세워졌다. 한강물이 묘 앞으로 밀고 들어오고 있다. 대가람 한강과 그 주위의 풍경이 한아름에 안기는 형국이다.
석실서원지(石室書院趾)
‘조말생의 묘역’은 원래 ‘석실사(石室祠)’와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있었던 곳이다. 석실서원은 선원(仙源) 김상용(1561~1637)과 청음(淸陰) 김상헌(1570~1652) 형제분을 배향한 서원이었다. 그 연원은 이러하다. 서원을 설립한 김원행(金元行, 1702~1772)은 장동(壯洞) 김씨 청음(淸陰) 김상헌(金尙憲)의 5세손이고, 영의정을 지낸 몽와(夢窩) 김창집(金昌集)의 손자이다. 조선 명문가인 장동 김씨(장동 김씨) 가문의 적통에다가 17세에 진사에 합격하였으니 앞날은 밝았다. 가문에는 낙론(洛論)의 종장인 농암(農巖) 김창협(金昌協), 삼연(三淵) 김창흡(金昌翕)이 우뚝하고 또 그들의 문인이었던 기원(杞園) 어유봉, 성재(誠齋) 민이승, 지촌(芝村) 이희조, 송암(松巖) 이재형, 여호(黎湖) 박필주, 겸재(謙齋) 정선, 사천(사川) 이병연, 도암(陶庵) 이재(李齋)와 같은 인물들은 석실서원의 숲이 되었다. 그 숲의 중심에 김원행(金元行)이 있는 셈이다. 그러나 그의 나이 19~20세 때 잇따른 정치적 사건(* 신축환국, 임인옥사)으로 할아버지(몽와 김창집), 친아버지(죽취 김제겸), 친형(김성행) 등 노론 집안 삼대가 일거에 죽음을 당하는 멸문의 화(禍)를 겪고 나서, 그는 과거나 출세는 잊고 유람과 독서로 젊은 날을 보냈다.
40세가 넘어 미호(渼湖) 석실서원에 정착한 김원행은 학문과 교육에 온힘을 기울인다. 나라에서 내린 벼슬길도 마다하고 산림(山林, 재야)의 한 축이 되었다. 조부, 생부, 형 등이 후에 모두 신원되었지만 아들 김이안의 기록을 보면 “아버지는 과거를 가볍게 여기셨다(知科擧之輕)”면서 “다시는 한양에 한 걸음도 들이지 않았다(不復踐京城一步)”고 했으니 그의 뜻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제자를 기르는 데에 신분이나 지역, 직업에 차별을 두지 않고 학생을 받아들였다 한다. 이렇게 하여 석실서원은 명문 서원이 되어 그의 문하에는 한양, 경기 지방의 우수한 노론계 인물들이 모여들었다.
* [신축환국(辛丑換局)] ☞ 경종 원년(1721) 노론에서 소론으로 정권이 교체되었는데, 신축년에 정권이 교체되었다는 의미에서 ‘신축환국’이라고 한다. 당시 노론 측에서는 경종의 나이가 30세가 넘었는데 후계자가 없자 왕세제[영잉군]를 세울 것을 요구했다. 왕세제의 책봉과 관련된 노론 측의 요구는 관철되었으나, 이후 노론 측이 추진한 대리청정 요구는 소론 측의 반격으로 실패하였다. 그리고 이를 계기로 정권이 교체되었다. 그해 12월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는 노론 사대신을 사흉(四凶)이라고 공격하는 ‘신축소(辛丑疏)‘를 올려 소론이 정권을 장악한 사건이다. 신축옥사는 1722년에 있었던 임인옥사(壬寅獄事)와 함께 노론에게 치명적인 화를 불러온 사건이며, 영조 연간 주요한 정치 사안이 되었다.
석실서원의 흥망과 조말생 묘소
▶ 석실서원은 낙론의 본거지였다. 비탈에 서 있는 표지석을 지나며 이한방 교수의 유창한 해설이 이어진다. … 당시 서울은 진보요, 충청도는 보수였으니 이 시대에는 이른바 ‘호락논쟁’이라 하여 노론 내 인사들 간에 논쟁이 있었다. 호(湖)와 낙(洛)은 충청도와 서울을 가리키는 말로, 당시 학계의 주류였던 노론(老論)의 학자들이 주로 충청도와 서울을 기반으로 학파를 형성했기 때문이다. 충청도 노론 학자들은 호서(湖西)를 따서 호학(湖學), 호론(湖論)이라 부르고, 서울에 속했던 학자들은 낙학(洛學), 낙론(洛論)이라 불렸다. ‘낙(洛)’은 낙양을 뜻하는 말로 낙양(洛陽)이 수도의 보통명사처럼 쓰였기 때문이었다. 낙론은 지금의 낙산 아래에 주로 살았다.
호론(湖論)은 상대적으로 보수적인 정통 성리학을 추구했고, 외래 문물과 다양한 이론을 접하기 쉬운 서울이 근거지였던 낙론(洛論)은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고 한다. 논쟁의 주제는 ‘인성과 물성은 같은가 다른가’[人物性同異論]였는데, 호론은 ‘다르다’ 했고, 낙론은 ‘같다’ 한 데서 비롯된 논쟁이었다. 호론을 대표한 이들이 송시열의 문하였으며, 낙론을 대표한 인물들은 석실서원 사람들이었다 한다. 이렇듯 석실서원은 조선 성리학의 한 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나면서 서원의 숫자가 수백 곳에 이르고 이들의 패악이 극심해지면서 관민 모두에게 위협과 고통을 안기는 일도 자주 발행했다.
흥선대원군은 실권을 쥐자 서원의 혁파 작업에 들어갔다. 1865년에는 대표적인 서원인 송시열이 창건한 ‘만동묘(萬東廟)’와 ‘화양서원(華陽書院)’에 철폐 명령이 내려졌다. 1868년에는 서원에 하사한 토지에도 세금을 징수하도록 하고, 지방 수령이 서원의 장을 맡도록 했으며, 1870년에는 이 명령을 이행하지 않은 서원은 사액서원이라도 훼철하도록 하였다. 이 조처로 전국 650개 서원 중 소수서원, 도산서원, 도동서원 등 사표가 될 만한 47개의 서원만 남겨지게 되었다.
장동 김씨의 세도정치를 겪은 대원군 앞에 장동 김씨의 집합체인 ‘석실서원(石室書院)’이 살아남을 수는 없었다. 이렇게 석실서원은 잊혀 졌는데 1900년 남양주 금곡동에 홍릉이 조성되면서 그 능역(陵域)에 있던 묘들은 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중에 특별한 두 개의 묘(墓)가 있었다. 하나는 태종-세종 때의 명신 양주 조씨 조말생(趙末生)의 묘이며, 또 하나는 세종의 막내아들 영응대군의 묘다.
▶ 조말생의 묘를 이곳으로 이전하면서, 몰락한 장동 김씨의 석실서원 땅은 양주 조씨에게 사패지(賜牌地)로 내려졌다고 한다. 요즈음 개념으로 보면 대토(代土)해 준 셈이다. 석실서원 영역의 작은 봉우리 위에 이장한 조말생 묘는 한없이 넉넉하고 아름답다. 묘역으로 오르는 층계 옆에 서 있는 ‘석실서원지’ 돌비석은 허망하고 을씨년스럽다. 권력의 부침을 보여주는 역사의 현장이다.
조선 중기의 명재상 김육(金堉)의 묘소
조말생 묘소와 석실서원지 빗돌을 지나온 일행은 대기한 버스를 타고 ‘김육의 묘소’를 찾았다. 김육의 묘소는 덕소에서 가까운 남양주시 삼패동에 있다.
김육(金堉)의 청풍 김씨는 조선조(朝鮮朝)에서 문과 급제자 103명(장원 급제자 6명), 상신(相臣 : 영의정·좌의정·우의정) 8명, 대제학(大提學) 3명, 왕비(王妃) 2명, 종묘배향공신을 4명을 배출하였다. 부자 영상(父子領相) 김육 장남 김좌명(추증)·차남 김우명(추증)과 김재로, 김치인 부자가 있다. 특히 영의정 김육은 대동법을 창안해 잘못된 공납 제도로 신음하던 백성들을 도탄에서 구했다. 그의 손자 우의정 김석주는 대동법을 정착시키고 전국적으로 확대시켰을 뿐만 아니라 군역의 폐단도 시정했으며 스승 송시열과 함께 노론을 창립했다. 아울러 김우명의 딸 명성왕후는 현종의 정비이며 숙종의 친모이다. 김석주의 사촌이다. 효의왕후는 정조의 정비였다. —<위키백과>
김육(金堉, 1580~1658)의 본관은 청풍(淸風)이고 자는 백후(伯厚)이며 호는 잠곡(潛谷)이다. 1624년 문과에 급제한 후 여러 관직에서 거치면서 1649년에는 대사헌을 거쳐 우의정에 임명되었고, 1655년에는 영의정에 올랐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1611년에는 퇴계 이황을 비난한 정인홍의 이름을 청금록에서 삭제하는 것에 앞장섰다가 성균관에서 쫓겨나기도 했다.
정암 조광조(趙光祖)와 함께 * ‘기묘팔현(己卯八賢)’의 한사람으로 꼽혔던 도학자 김식(金湜)의 현손이요, 증조부 덕수(德秀)는 선비로 평생토록 숨어 살았고, 조부 비(棐)는 고을수령을 거쳐 군자감판관에 올랐다. 김육의 아버지 흥우(興宇)는 생원·진사시를 거쳐 관직에 추천되었으나 나가지 않았다가, 임진왜란 중의 피난길에서 그만 세상을 뜨니 그때 김육의 나이 13살이었다.
* [기묘팔현(己卯八賢)] ☞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화를 당했던 조광조(趙光祖), 정광필(鄭光弼), 김식(金湜), 안당(安塘), 기준(奇遵), 이장곤(李長坤), 김정(金淨), 신명인(申命仁) 등 8분을 말한다. 김육(金堉)이 지은 《기묘팔현전(己卯八賢傳)》에서 8명의 가계와 행적을 자세히 서술하였고, 이 외에 당시 연관된 현인 160명에 대해서도 간략히 기술하였다.
오늘날의 서울 마포에서 태어났던 김육은, 이리하여 할머니와 홀어머니, 어린 아우들 3남매를 거느린 소년가장이면서도 언제나 책을 끼고 다니면서 학업에 열중하였다. 15세에 해주에서 대학자 성혼(成渾)을 찾아가 배웠는데, 그때 우계(牛溪) 성혼(成渾)은 김육의 됨됨이를 보고 “사리와 물리에 통달했고, 글이 맑고 기묘하여 흥취가 있으니, 귀동(貴童)이라 할 만하다” 하고 칭찬하였다.
김육의 나이 18세에 이르렀을 때 정유재란이 벌어지니 그는 가솔들과 함께 피난을 다니다가, 할머니와 어머니마저 연달아 잃었다. 오늘날의 경기도 남양주 땅에 묘역을 마련, 해주에 묻혀있던 아버지 유해까지 옮겨 어머니와 합장으로 모시고, 뒤에 곧 할머니 묘소도 부모님 묘소 곁으로 옮겨 모시는 등, 어린나이에 조상을 받드는 일에 정성을 쏟았다.
살길이 막연했던 김육은 서울의 이모부 댁에 얹혀살다가, 그 시절로서는 매우 늦은 나이인 25세 때 파평 윤씨 윤급(尹汲)의 딸을 아내로 맞이했다. 이 무렵 김육은 10년 가까이를 집안을 꾸리고 조상을 섬기는 일에 매달려 제대로 먹지 못한 채 골몰하니, 심신이 극도로 망가져 그만 병들어 눕고 말았다. 결국 삶을 그만 두기에까지 이르렀는데, 평소 그를 못내 불쌍히 여기던 고모가 끝까지 보살펴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김육은 그런 고모의 은공을 잊을 수가 없어, 평생 동안 마음에 담아 두었다가, 뒤에 그가 개성유수가 되었을 때, 그 고모가 슬하를 두지 못한 채 세상을 뜨니, 거처에 고모의 빈소를 마련하고 3년 동안 아침저녁으로 눈물로 상식(喪食)을 올리며 은공을 갚으려 마음을 썼다.
김육은 일평생 오로지 백성을 잘살게 하고 나라를 부강하게 만드는 데 매진하면서 헛된 이론에 몰두하기보다 실생활에 유용한 학문을 추구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자세를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다.
김육은 조광조와 함께 개혁 정치를 추진하다가 죽음을 맞은 ‘기묘명현’ 중 한 사람인 김식(金湜)의 4대손이다. 아버지 김흥우(金興宇)는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으나 성혼과 이이에게서 수학하고, 김상용, 김상헌 등과 교류한 인물로 서인의 정통을 이었다고 볼 수 있다. 김육은 다섯 살에 《천자문》을 익혔으며, 열두 살에 《소학》을 통달했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피란을 떠났으나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면서 어머니와 할머니, 세 동생을 책임지는 가장이 되었다. 그러나 그는 전쟁 중에도 책을 외우면서 다녔으며, 가문을 일으키고 술을 입에 대지 말라는 아버지의 당부를 평생토록 지켰다.
퇴계 선생의 학덕을 존숭한 실학자, 김육
김육은 1605년(선조 38)에 사마 회시에 합격하고 성균관에 들어갔다. 1609년(광해군 1)에 동료 태학생들과 함께 〈청종사오현소(請從祀五賢疏,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향사할 것을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1611년 당시 집권 세력의 영수인 정인홍이 이언적과 이황을 문묘에서 출향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자, 김육은 성균관 재임으로 정인홍을 유적(儒籍)에서 삭제할 것을 주장하는 글을 올렸다.
광해군은 노하며 김육을 비롯한 성균관 학생들을 모두 그 자리에서 쫓아냈다. 성균관에서 쫓겨난다는 것은 대과에 응시할 자격을 박탈당해 관직에 나갈 수 없게 되는 것을 뜻한다. 김육은 이덕형과 이항복의 비호로 무사할 수 있었지만 광해군의 조정에 나갈 뜻을 접고, 1613년 가평의 잠곡(潛谷) 청덕동에서 10여 년간 은거했다. 이곳에서 그는 화전을 일구고 숯을 구워 팔아 생계를 이어 갔다. 호를 잠곡(潛谷)이라 한 것은 이때부터였다.
그 후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물러나자 인조는 광해군 시절 박해받던 인물들을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이때 김육도 부름을 받고 올라와 의금부 도사에 임명되었다. 마흔네 살의 나이에 처음으로 벼슬길에 나간 것이다. 그러나 죄인 압송 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관직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아 파직되고 말았다. 그런데 그가 파직된 다음 해에 논공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은 이괄(李适)이 반란을 일으켰다. 한성이 반란군에게 점령되자 인조는 공주까지 피란을 가게 되었고, 이때 김육도 왕의 피란길을 따라갔다. 난이 평정되자 피란 시절의 공으로 그는 음성 현감에 제수되었고, 그해 9월 중광 별시에 장원으로 급제해 고위직 진출을 위한 자격을 얻기도 했다.
김육이 주창한 대동법(大同法)
병자호란이 일어난 후 충청 감사에 제수된 그는 다시 한 번 목민관이 되었다. 충청도에 부임한 그가 현지의 사정을 살펴보자 전쟁을 겪고 난 터라 음성 현감 시절보다 백성들의 생활은 더욱 어려워져 있었다. 그런데도 각종 세금으로 인한 수탈은 한층 극심해져 견디기 힘든 형편이었다. 특히 공물의 폐단이 제일 컸다. 그는 시급히 대동법(大同法)을 시행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대동법은 광해군 때 이미 경기 일원에서 시범적으로 실시되고 있었고, 인조 때에는 강원도에까지 확대 실시되고 있었다. 그는 대동법의 유용성이 이미 확인되었으므로 충청도에서도 실시할 것을 주장했고, 나아가서 충청도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주장은 기득권을 빼앗길 것을 우려하는 권문세가들의 반대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기회가 있을 때마다 대동법을 실시할 것을 지속적으로 건의했다.
그러던 1651년, 마침내 조정에서 그의 주장을 받아들여 충청도에서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또한 두 번이나 전라도 지역에서도 대동법을 실시하자는 상소를 올린 덕분인지 전라도 일부 지역에서도 대동법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의 숙원이던 대동법의 전국적 시행을 끝내 보지 못한 채 다시 조정으로 올라왔다.
당시 조정에서는 대동법을 찬성하는 김육 등을 ‘한당’이라 하고, 반대하는 김집 등을 ‘산당’이라 했다. 김집은 송시열, 송준길 등 당대의 문재들을 거느린 서인의 영수격인 인물이었다. 그러나 대동법 실시는 막을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었고, 효종이 즉위하면서 충청도와 전라도에 실시된 이후 함경도(1666년), 경상도(1677년), 황해도(1708년)까지 확대되었다. 1608년 광해군이 대동법을 경기도에서 처음 실시한 이후 전국으로 확대 정착되기까지 꼬박 100년의 세월이 흐른 것이다.
대동법의 실시로 가난한 백성들의 부담이 줄어들고 국가의 재정 수입은 증가되어 사회는 안정되었다. 또한 대동법은 수공업과 산업 발달을 촉진시켰고, 초기 형태의 산업 자본가들이 등장하면서 이후 신분 제도의 변화와 사회 발전을 주도할 수 있었다.
김육은 대동법 실시 외에도 후기 조선 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1643년과 1645년에 중국에 다녀오면서 화폐를 만들고 유통시키는 방법과 수레를 만들고 보급하는 방법, 그리고 청나라의 역법에도 관심을 가졌다. 당시 조선은 300년에 걸쳐 만들어진 《칠정산내외편》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절기가 맞지 않는 등 많은 문제점이 있었다. 때문에 농업 활동에 실질적인 도움을 줄 수 있는 정확한 역법이 필요한 실정이었다. 1645년 관상감 제조로 일하던 김육은 중국의 신역법에 관한 책을 연구해 조선의 실정에 맞는 달력을 만들기로 하고 중국에 사람을 보내 그 방법을 배워 오게 했다. 그리고 마침내 1653년, 조선의 달력인 시헌력을 만들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이 시헌력을 공식 책력(冊曆)으로 채택했다. 이때 만들어진 시헌력은 1896년(고종 33)에 태양력이 사용될 때까지 조선의 공식 달력으로 사용되었다. …♣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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