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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Francis Thompson는 의사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의학을 전공했지만, 작가가 되겠다는 꿈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집을 떠나서 막노동을 하며 노숙자나 다름없는 생활을 하였습니다. 신경 쇠약으로 인한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아편을 피우다 중독되고 말았습니다. 평생 가난, 노숙, 아편, 질병에 시달렸습니다. 비평가들로부터 “...가장 경이로운 시the most wonderful lyric...”라는 극찬을 받았고, 한 권위 있는 일간지The Times로부터는 200년 후에도 사람들이 배워야할 시라고 평가를 받은 “천국의 사냥개HOUND OF HEAVEN”라는 자전적自傳的인 시를 남겼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밤과 낮의 비탈길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세월의 아치 저 아래로
나는 그에게서 도망쳤네,
내 마음의 미로로
그리고 눈물의 안개 속에...
그를 피해 숨었네,
흐르는 웃음의 시냇물 속에,
탁 트인 희망의 가로수 길로 달려 올라갔네.
그러다 거대한 공포의 심연 속으로
쏜살같이 거꾸로 떨어졌네.
쫓고, 또 쫓아오는 저 힘찬 발을 피해,
그러나 서두르지 않은 추적으로,
침착한 보조로,
시인은 끊임없이 하나님을 외면했습니다. 부정했습니다. 낮에도, 밤에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여러 갈래로 어지럽게 흩어져 있기 때문에 섞갈리기 쉬운 마음의 미로迷路 속으로 하나님을 피해서 쉬지 않고 도망쳤습니다. 서글픔과 눈물 뒤에 숨었습니다. 잠시 동안 스쳐지나가는 웃음 뒤에 숨었습니다. 지은 죄가 적나라하게 드러나서 괴로울 때도, 향락에 취해서 세상을 다 얻은 것처럼 즐거울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숨고 또 숨었습니다. 때로는 활짝 트여 보이는 희망을 향해서 달렸습니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올라갔다가 끝없이 추락하는 삶이 반복되었습니다.
추락할 때는 도무지 바닥을 헤아릴 수 없는 거대한 공포와 심연深淵 같은 절망 속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때마다, 자신을 따라오고 있는 하나님의 발걸음을 느꼈습니다. 발걸음은 둔중鈍重했습니다. 쉬지 않았습니다. 절대로 서두르지 않았습니다.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습니다. 치밀하게 조율調律되었습니다. 대단히 웅장雄壯했습니다. 장엄莊嚴했습니다. 도무지 긴장을 떨쳐버릴 수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에게 마음을 열어드리지는 않았습니다. 인류 역사를 통해서 얼마든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급기야 발걸음보다 훨씬 더 급한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 퍼졌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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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가 나를 배반하기에,
만물이 너를 배반하느니라.”
(모든 것이 널 저버리리라,
날 저버리는 너를)
(모든 것이 너를 떠나노라,
네가 나를 떠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만물이 그로부터 떠나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가 하나님을 떠났기 때문이었습니다. 아무리 몸부림을 쳐도 진정한 사랑을 찾을 수 없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 그가 존재하지도 않았던 영원 전부터 현재까지 찰나刹那조차도 쉬지 않고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부어주고 계시는 사랑을 외면했기 때문이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구원의 여망餘望이 보이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지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를 거룩한 희생 제물로 내놓으시면서까지 구원해 주시려는 하나님을 거부했기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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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쫓아오는 그의 사랑을 알았지만,
그를 모시고 나면
그 이외의 다른 것을 가질 수 없을까
몹시 두려웠네...)
그가 자신에게 부어지고 있던 하나님의 사랑을 알고 있으면서도 마음을 열지 않은 이유는 포기하고 싶지 않은 것들이 너무나 많았기 때문이었습니다.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니까 그는 온 세상을 조금도 남기지 않고 모두 다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탐욕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더 정확하게 표현하면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하신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세상을 통째로 다 가진다 할지라도 절대로 채울 수 없는, 세상에 존재하는 그 무엇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절대 결핍缺乏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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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말했네 :
새벽에게는 “빨리 오라”고,
저녁에게는 “곧 와서,
그대의 갓 피어난 밤하늘의 꽃으로 덮어
이 무서운 연인으로부터 나를 숨겨 다오!
그가 보지 못하게
희미한 밤의 베일로 나를 감싸 다오!”
시인은 또 세상 향락享樂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생활은 방탕했습니다. 그렇다고 결핍이 채워지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가 세상에게 가졌던 기대와 이상과 꿈은 산산散散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너무나 허무했습니다. 실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절대절망이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고통이 밀려들었습니다. 그럼에도 시인은 여전히 하나님께 돌아서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하고 싶은 마음이 추호秋毫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새벽에게 자신을 숨겨달라고, 저녁에게 자신을 숨겨달라고 애원했습니다. 어떻게 해서든 하나님으로부터 피해서 숨으려고 몸부림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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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나 서두르지 않는 추적으로 :
침착한 보조로,
유유한 속도로,
위엄 있는 긴박성으로,
그리고
발자국소리보다 더 큰 목소리로 말씀하셨네 ;
“나를 받아들이고자 하지 않는 너를,
아무도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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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 가까이, 추적해 오네.
진지한 발걸음으로,
유유한 속도로, 위엄 있는 신속함으로.
저 요란한 발소리 지나
더 빠른 소리가 들리네 ;
“보라, 내게 기쁨을 주지 않는 네게,
아무도 기쁨을 주지 않느니라.”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그를 따라오셨습니다. 그가 당신을 하나의 습관처럼 떠났기 때문에 가까이 두고 싶은 모든 것이 그를 떠나가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가 당신을 쉬지 않고 배반하기 때문에, 만물이 그를 배반하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가 수시로 당신을 버리기 때문에 모든 것이 그를 버리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가 당신을 기뻐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 그 누구도 그에게 기쁨을 주지 않는 것이라고 가르쳐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절대로 당신을 멀리하지 말아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반드시 당신께로 돌아와야 한다고 가르쳐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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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께서 말씀하셨다)
“인간의 사랑은 그만한 공로가 있어야 받느니라,
너는 무슨 공로가 있느냐 ;
엉긴 흙덩이 같은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거무칙칙한 흙덩어리인 네가?
오호라 너는
아무런 사랑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걸 모르고 있으니!
치욕스런 너를 사랑할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나 밖에는,
단지 나 밖에는 말이다.
그렇습니다. 허물과 죄로 죽은 인류는 여러 가지를 따져서 인정할 만한 면이 있을 때 존중합니다. 사랑합니다. 가까이 합니다. 끊임없이 하나님을 거부하며 세상 향락에 빠진 채 방탕한 삶을 살고 있었던 그에게서는 어떤 장점도 찾아볼 수 없었습니다. 진흙으로 빚어진 인간들 가운데 가장 보잘것없고 더러운 덩어리 같은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당연히 인정할 만 한 면을 찾는 사람들 가운데 누구도 비천한 그를 존중할 이유도, 사랑할 이유도, 가까이할 이유도 없었습니다.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당당하게 내놓을 만한 어떤 자격도 갖추지 못한 그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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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네게서 빼앗았던 것은
너를 해치기 위해서가 아니라,
다만 네가 내 품에서
그것을 찾도록 하기 위해서였느니라.
내 어둠이, 결국
쓰다듬으려고 내민
그 분의 손 그림자였단 말인가?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아무리 몸부림쳐도 채워지지 않는 탐욕 곧 결핍을 해결하기 위해서 세상 향락과 방탕에 빠져 있던 시인으로부터 모든 것을 빼앗듯 가져가신 데에는 다 그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괴롭히기 위해서가 아니었습니다. 결핍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오직 당신 안에서만, 당신을 통해서만 완벽하게 해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순간, 시인은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비로소 삶에 깊게 드리워져 있던 고통이 사실은 자신을 다듬기 위해서 내밀어주신 하나님의 손길이었다는 사실이 깨달아졌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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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어리석고, 앞 못 보고, 약하기 짝이 없는 자여,
네가 찾는 사람은 바로 나야!
너는 나를 쫓아 버렸기 때문에, 사랑을 쫓아 버렸었느니라.”
이는 하나님을 피해서 끊임없이 달아나고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는 절대 결핍 때문에 세상 향락과 방탕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못난 자신을 아주 버려버리기는커녕 오히려 쉬지 않고 오아시스와 같은 사랑과 긍휼과 은혜를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그것도 값없이 부어주고 계시던 하나님께 올려드리는 찬양입니다. 감사입니다. 영광입니다. 송사頌辭Ode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은 과연 어떻습니까? 지극히 짧은 시간인 찰나刹那조차도 저와 여러분을 놓치지 않고 추적하시며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길로 인도해 주고 계시는 하나님 한 분만 믿고 의지하십니까?
받으시기에 합당한 찬양과 감사와 영광과 송사를 올려드리고 있습니까? 음音 하나가 이탈하면 노래 전체의 균형이 깨집니다. 결핍은 영적입니다. 절대적입니다. 세상 모든 것을 다 가진다 할지라도 절대로 채울 수 없습니다. 저와 여러분 인생을 송두리째 망가뜨립니다. 시인은 누구보다 사랑했던 아들Absalom의 반란을 피해서 요단강을 건너고 있던 주군David과 함께 동행 하고 있었습니다. 어디를 둘러보아도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 아주 버려졌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습니다.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큰 낙심이 훅하고 밀려들었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습니다. 하루 스물네 시간 쉬지 않고 하염없이 흘러내렸습니다. 마치 음식처럼 되었습니다. 평범한 사람들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믿음을 가졌다 할지라도 “세상에 어떻게 이렇게 끔찍한 일이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여호와를 섬기는 일에 관해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인 주군에게 받은 은혜를 저버리는 배은망덕한 일이 대명천지大明天地 벌어질 수 있는 것이냐?”라고 외칠 수 있었습니다. 분노와 좌절과 슬픔과 탄식과 통곡을 터뜨릴 수도 있었습니다. 빠져나오기 힘든 고통과 회의와 절망에 사로잡힐 수도 있었습니다.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아낌없이 투자해서 찬양과 감사와 영광을 돌리고 있었던 하나님에 대한 극한 원망과 불평을 쏟아놓을 수도 있었습니다. 시인은 달랐습니다. 그는 오히려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낙심하며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 해 하는가? 너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 그가 나타나 도우심으로 말미암아 내가 여전히 찬송하리로다.”(시42:5)라고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소망יחל(야할)”은 “기다리다, 바라다, 기대하다, 예상하다, 희망하다.” 등의 뜻입니다. 그는 아무리 둘러보아도 지극히 작은 희망도 찾을 수 없는 열악한 상황에 매몰되지 않았습니다.
쉬지 않고 악담과 저주를 폭포수처럼 쏟아 붓고 있던 원수들에게 마음을 빼앗기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절대로 낙심하지 말라고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절대로 불안해하지 말라고, 절대로 포기하지 말라고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절대 주권과 누구도 상상할 수 없는 탁월한 섭리로 사랑하는 당신 백성들의 인생을 주관하고 계시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라고 자신을 다독였습니다. 자신은 지금 당장은 그림자조차도 보여주지 않고 있지만 때가 되면 반드시 나타나서 현재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실 하나님을 찬양하겠다고 고백했습니다.
절대로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거룩한 희생을 통해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났지만 지금도 여전히 지극히 죄 친화적이고, 죄에 관한한 너무나 취약하며, 지극히 작은 죄 하나조차도 절대로 이길 수 없는 연약한 육신을 입고 있습니다. 이 세상 그 무엇으로도 아니 이 세상 전부를 송두리째 다 가지게 된다 할지라도 절대로 채워지지 않는 결핍을 가지고 있습니다. 저와 여러분의 힘과 능력과 지식과 신학과 지혜를 총동원한다 할지라도 절대로 해결할 수 없는 영적이고 정신적이면서 또 육체적인 문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또 절대로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이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만날 때마다 언제든지 지체 없이 달려가서 도와주심을 구할 수 있는 가장 탁월한 조력자Helper가 되십니다. 동시에 고해와 같은 인생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날 수밖에 없는 위험들은 물론 영원한 죽음과 저주와 지옥 불구덩이로부터도 건져낼 수 있는 구원자Salvator가 되십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기다리고, 바라고, 기대하고, 소망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절대로 저버리지 않으십니다. 절대로 거절하지 않으십니다. 가장 선하고 아름다운 방법으로 인도해주십니다.
이보다 큰 격려와 위로는 세상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습니다. 또 절대로 잊지 말고 반드시 기억하십시오. 저와 여러분의 결핍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을 통해서만 채워질 수 있습니다. 결핍은 하나님의 자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으로 충만하면 언제 그랬었느냐는 듯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사라지게 되어 있습니다. “골수와 기름진 것을 먹음과 같이 나의 영혼이 만족할 것이라.”(시63:5a)라는 고백대로, 저와 여러분의 영혼은 더할 나위 없이 충만해 지게 되어 있습니다. 새털같이 많은 세월을 사는 동안 필연적으로 만나게 되는 모든 상황에서 만족할 수 있습니다.
시인이 희망은 어디에서도 그림자조차 찾을 수 없는 지극히 열악한 상황 곧 무엇을 통해서도 해결할 수 없는 결핍 속에서도 낙심하거나 절망하지 않고, 포기하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 한 분에게만 소망을 두라고 자신을 다독였던 이유입니다. “주님, 나에게 단 하나의 소원이 있습니다. 나는 오직 그 하나만 구하겠습니다. 그것은 한평생 주님의 집에 살면서 주님의 자비로우신 모습을 보는 것과 성전에서 주님과 의논하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시27:4)라는 고백에 따르면, 시인에게는 반드시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간절하게 구하던 한 가지 소원이 있었습니다.
평생 하나님의 거룩한 집에서, 하나님과의 사이에서 지극히 작은 틈도 찾을 수 없을 정도로 긴밀緊密한 관계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었습니다. 시인은 자신의 마음이 오직 하나님 한 분만으로 가득 채워지기를 바랐었던 것입니다. 종교 개혁자인 그Martin Luther는 죽음을 목전에 두고 “우리는 거지들이다. 참으로 그러하다Wir sein pettler Hoc est verum.”라고 말했습니다. 많고 많은 좋은 말들이 있는데 굳이 거지라는 표현을 써야만 했었느냐고 지적하는 분들도 있을 수 있겠지만, 하나님에 대한 뜨거운 갈망渴望을 표현하기에는 가장 적절한 단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평생 하나님 안에서 행복을 누리는 삶을 추구해 온 그John S. Piper는 당대 최고의 목회자들John F. MacArthur, James I. Packer, Charles H. Spurgeon, Tony Evans, Os Guinness과 공동집필한 “작은 이야기 속 큰 지혜A Bright Tomorrow”라는 책을 통해서 “사람들이 하나님께서 주시는...은혜를 맛보거나 이해하지 못하는 가장 큰 이유는 하나님을 향한 갈망과 목마름이 빈약하기(너무 보잘것없기) 때문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인생을 통해서 만나는 광야 곧 문제 자체는 비극이 아닙니다. 광야를 통해 주어지는 하나님 말씀을 듣지 못하는 것이 비극입니다.
시인은 자신이 빠졌던 광야라는 수렁 속에서 오직 하나님 한 분만 기다렸습니다. 바랐습니다. 기대했습니다. 소망했습니다. 그 결과 전에는 알지 못했던 하나님의 위로와 돌보심을 맛볼 수 있었습니다. 자신이 연약할 때 하나님이 힘이 되어주셨다고 고백할 수 있었습니다. 자신의 소망이 되어주신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었습니다. 환난과 시험의 때 저와 여러분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하나님 한 분만 소망할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호흡이 허락되는 모든 날 동안, 저와 여러분을 끝까지 쫓아오시는 하나님 한 분만 갈망하는 거지로 살 수 있는 은혜를 구하십시오.
그것을 통해서 자신이 동원할 수 있는 모든 힘과 능력과 지식과 신학과 지혜를 조금도 남기지 않고 총동원해도 도무지 해결할 수 없는 힘겨운 상황과 맞닥뜨리게 되다 할지라도 낙심과 절망과 포기와는 전혀 상관없이 평안을 누리는 복된 삶, 오히려 하나님으로 충만한 믿음의 사람에게 부어지는 만족을 더할 나위 없이 풍성하게 누리는 복된 삶, 무엇보다 사랑하는 백성을 쉬지 않고 쫓으시며 그들을 위한 창세전 작정을 이루시기 위하여 일하시는 하나님께 찬양과 감사와 영광과 송사를 올려드리는 복된 삶을 사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