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로(polo)라는 단어를 들으면 먼저 떠오르는게 영국 귀족 스포츠라는 것을 연상한다.
그 근본이 어디에서 시작되었던 일단은 우리와는 거리가 먼 이국적 서양적인 냄새가 나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이 폴로라는 것이 우리와는 상관이 없지만 우리의 역사 속에 자리 잡고 있다면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 폴로가 우리의 스포츠라고 생각이 될 것인가. 전혀 이질적인 스포츠라고 생각될 것인가. 이 땅의 환경이 폴로라는 경기를 할 정도의 조건이 갖추어진 곳이라면 당연히 과거의 전통으로서 계승되어 내려왔을 것이다. 환경이 바뀌어 전통의 맥이 사라져 버렸다 하더라도 문헌상의 기록으로, 혹은 구전으로 내려왔을 것이며 약간의 흔적도 남아 있을 것이다. 이 땅의 문화가 아니라면 원래부터 그 흔적도 없었을 것이며 애당초 환경이 그러한 경기를 할 조건이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면 문화는 없고 기록만 있다?
그러면 폴로라는 스포츠는 어떤 것인가? 유래를 찾아보면 명칭은 티벳 지방의 플루(pulu: 공이라는 뜻)에서 유래 되었으며 페르시아 지방에서 유행하였다가 티벳, 중국, 이집트, 터키 등지로 전파되었으며 1866년에 인도에 주둔했던 영국군에 의해 근대적 스포츠로 발전되었고 1886년 창설된 영국 헐링엄 클럽이 폴로규칙을 제정하였고, 1890년 미국 폴로협회가 설립되어 규칙을 통일하였다고 되어 있다.
그러니까 영국이나 미국에서 스포츠로 시작된 것은 100년이 좀 넘었을 뿐이며 그 유래가 인도와 중앙아시아 쪽에서 시작된 것이다. 이란의 고도 이스파한 중심의 이맘 광장에는 아직도 두 쌍의 석조 골대가 남아 있다(실크로드 문명기행-정수일)고 한다.
우리의 기록에는 어떻게 남아 있을까? 그것은 격구[擊毬]라는 용어로 나타난다.
그것을 미치도록 좋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태조 이성계이다. 그리고 그것이 왕족과 귀족들의 놀이로서 엄청난 각광을 받았으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가능한 곳이면 시합을 벌였다. 그리고 이러한 놀이는 하루아침에 생겨난 것이 아니고 오랜 전통을 지니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고려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왔으니까. 놀이와 풍습은 시대라고 달라지거나 바뀌는 것은 없다. 주어지는 환경에 맞으면 언제나 면면히 이어져 내려오는 것이니까.
< 고려의 풍속에 매양 단오절(端午節)에는 무관(武官)의 나이 젊은 사람과 의관(衣冠)의 자제(子弟)들을 뽑아서 격구(擊毬)의 기예(技藝)를 익혔는데, 그 날이 이르면 구규(九逵-큰길)에 용봉(龍鳳) 장전(帳殿)을 설치하고 길 복판에 구문(毬門)을 세우고, 왕이 장전(帳殿)에 나아가서 이를 구경한다. 연회를 베풀고 여악(女樂)을 벌려 놓으매, 경대부(卿大夫)들이 모두 따르고, 부녀들도 또한 길 왼쪽과 오른쪽에 장막을 매고 금단(錦段)으로 장식하여, 이를 화채구(畫彩毬)라 이름하니, 구경하는 사람이 많이 모이게 된다. 격구(擊毬)하는 사람이 의복 장식을 화려하게 하여 다투어 사치를 숭상하니, 말안장 한 개의 비용이 중인(中人) 10가(家)의 재산에 해당되었다. 두 대열(隊列)로 나누어 왼쪽과 오른쪽에 서고, 기생 한 사람이 공[毬]을 잡고 전전(殿前)에서 창(唱)하기를,
"온 장내의 퉁소와 북은 공을 따라 모아들고, 사간(絲竿)과 홍망(紅網)에 구경꾼의 머리 쏠리누나" 하니,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나는 것이 모두 음악의 음절에 맞았다.
공을 길 복판에 던지면, 왼쪽과 오른쪽의 대열(隊列)에서 모두 말을 달려 나와 앞을 다투어, 맞힌 사람은 이를 얻게 되고, 나머지 사람은 모두 물러가서 서게 된다. 공을 치는 법은 먼저 구장(毬場)에 말을 달려 나와서 장(杖)의 비(匕) 안으로써 공을 일으키면, 이를 배지(排之)라 하고, 장(杖)의 비(匕) 등으로써 공을 움직이면, 이를 지피(持皮)라 하고, 세 번의 형세를 마치면, 그제야 말을 달려 쳐서 공을 운행(運行)하게 된다. 공을 운행하는 처음에는 세로 치[縱擊]지 않는데, 이를 비이(比耳)라 하니, 장(杖)을 잡고 가로 바로 서[橫直]서 말귀[馬耳]와 가지런함을 말함이다. 비이(比耳)한 후에 손을 들어 세로 치는데, 이를 수양(垂揚)이라 하니, 손은 높이 들고 장(杖)은 아래로 드리워져 휘청휘청함을 말함이다. 공이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은 적고, 문에 지나가는 사람은 10명에 2, 3명 정도이고, 하던 중간에서 그만두는 사람이 많으며, 만약 문밖으로 나가는 사람이 있으면, 같은 대열(隊列)의 사람들이 즉시 모두 말에서 내려 전전(殿前)에 나아가서 두 번 절하고 사례(謝禮)하게 된다. 태조도 또한 그 선발(選拔)에 참여하여 공을 운행할 때에, 말을 달림이 너무 빨라서 벌써 수양(垂揚)이 되었는지라, 공이 문득 돌에 부딪쳐 놀라 거꾸로 달아[逆走]나 말의 네 발 뒤로 나왔다. 태조는 즉시 위를 쳐다보고 누워 몸을 돌려서 말 꼬리에 부딪쳐 공을 치니, 공이 도로 말 앞 두 발 사이로 나오므로,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때 사람이 이를 방미(防尾)라 하였다. 또 공을 운행해 칠 때는 또한 벌써 수양(垂揚)이 되어 공이 다리 기둥[橋柱]에 부딪쳐 말의 왼쪽에 나가므로, 태조는 오른쪽 등자를 벗고 몸을 뒤집어 쳐서 이를 맞히고, 다시 쳐서 문밖으로 나가게 하니, 그 때 사람이 이를 횡방(橫防)이라 하였다. 온 나라 사람들이 몹시 놀라면서 전고(前古)에 듣지 못한 일이라 하였다. - 태조실록- >
위의 기록을 보면 경기의 내용에 대한 용어까지 다양하다. 한편 격구를 하기 위한 비용도 만만치 않게 들기 때문에 일반 사람들은 엄두도 내지 못하는데 말안장 하나의 값이 일반 사람들의 10가구 재산과 맞먹는다는 것이 얼마나 사치스럽고 귀족적인 놀이로 변절되었는가를 말해주는 대목이기도 하다. 물론 사치스럽게 치장을 한 경우에 한해서 이겠지만.
그리고 이것이 고위 정치적인 사교나 밀담을 하기 위한 놀이이기도 한 면이 있었다.
< 임금이 왕우(王瑀)와 더불어 격구(擊毬)하면서 왕우에게 이르기를,
“사람들이 모두 ‘내가 인아(姻婭)의 관계인 까닭으로 경(卿)을 용서한다.’고 말하나, 그렇지 않다. 내가 경(卿)과 더불어 공민왕을 함께 섬겼으므로 서로의 교분이 얕지 않으니, 내가 어찌 경을 해치겠는가? 경을 마전군(麻田郡)에 봉한 것은 주(周)나라에서 미자(微子)를 송(宋)나라에 봉한 것과 같다. 경의 형인 공양왕이 다만 욕심이 많기가 한량이 없었던 까닭으로 오늘날의 일이 있게 되었다.”
하니, 왕우가 울면서 사례하였다. - 태조실록 2년 4월 4일(무인) - >
한편 격구를 하는 장소도 어느 일정한 장소에서 경기를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러한 경기를 할 만한 조건은 언제든지 장소였던 것으로 보인다.
< 임금이 내정(內庭)에서 격구(擊毬)하였다. - 태조실록- > < 조온(趙溫)·정남진(鄭南晉)·조진(趙珍)이 날마다 모시고 격구(擊毬)하였으므로, 각각 말 1필을 하사하였다. 유운(柳雲)·도흥(都興) 등을 불러 대궐 뜰에서 격구(擊毬)하였다. - 정종실록 - > 그 외 해온정(解慍亭), 창덕궁(昌德宮), 광연루(廣延樓), 인덕궁(仁德宮), 모화관. 경회루......
이러한 격구가 연회와 더불어 구경거리로도 매우 흥미진진하였다.
< 임금이 태상전(太上殿)에 나아가 격구(擊毬)하고 술자리를 마련하여 극진히 즐거워하였으니, 태상왕이 부른 것이다. - 태종실록 4년 10월 27일 - >
또한 놀이가 있는데 도박(내기)이 따른다고 했던가.
< 임금이 인덕궁(仁德宮)으로 나아가 술자리를 베풀고 격구(擊毬)하다가 도마희(賭馬戲-격구(擊毬)할 때 말에 돈을 걸어서 내기하는 놀이) 를 하였다. - 태종실록 ->
이러한 격구가 조선초기의 기록에는 잘 나타나 보인다. 물론 왕이나 종친, 귀족들에겐 흥미로웠을 것은 말할 것도 없었다. 이것이 더 발달된 실용적 용도로 나아가는 과정이 바로 무과 과거 시험에 포함되는 것이었다.
< 병조에서 계하기를,
“삼가 예전 제도를 상고하오니, 한(漢)나라의 축국(蹴蘜)과 당(唐)나라의 격환(擊丸)은 그것이 황제(黃帝)의 축국하던 옛 제도로서, 그렇게 하는 까닭은 모두가 유희를 이용하여 전투를 연습하는 것이었습니다. 전조(前朝) 전성시대(全盛時代)의 격구(擊毬)하던 유희는 대개 그것을 모방하였던 것이었습니다. 격구를 잘 하는 자는 말을 타고 활을 쏠 수도 있으며, 창쓰고 칼쓰기도 능할 수 있사오니, 이제부터는 무과 시취(武科試取)거나 춘추 도목 시험(都目試驗)에는 아울러 그 재주를 시험하여, 말타기와 손쓰는 것이 모두 빨라서 자세를 세 번 갖추어 능히 공을 쳐서 구문(毬門)으로 내보내는 자는 1등으로 하여, 말 타고 활 쏘아, 세 번 쏘아 세 번 맞힌 예에 따라 점수로 15점을 주고, 말과 손이 모두 빨라서 자세를 세 번 갖추어 비록 공을 쳐서 공문으로 내보내지는 못하였더라도, 능히 행장(行杖)을 치는 자는 2등으로 하여, 말 타고 활 쏘아 세 번에 두 번 맞힌 예에 따라 점수 10점을 주고, 말과 손이 모두 빨라서 자세를 두 번 갖추고 능히 공을 쳐서 공문으로 내보내는 자는 3등으로 하여, 말 타고 활 쏘아 세 번에 한 번 맞힌 예에 따라 점수 5점을 주게 하며, 친히 시험하실 때에 1등으로 입격한 자는 도수(到數) 2백을 주고, 2등에 입격한 자는 도시험(都試驗)에 2등한 예에 의거하여 도수 1백 50을 주고, 3등에 입격한 자는 도시험 3등한 예에 의거하여 도수 1백을 주게 하고, 그 중에 이름 붙여 있는 곳이 없으나 숙련하기가 특이한 자는 상을 주도록 하소서. ”
하니, 그대로 따랐다. - 세종실록 7년 4월 19일 - >
오례 / 가례 의식 / 무과 전시의
< 격구(擊毬)의 문을 만든다. 구문(毬文)은 서로 떨어지기가 3보(步)이고, 기(旗)를 세운 곳에서 구문(毬門)까지는 서로 떨어지기가 2백 40보이고, 말을 세운 곳에서 기 아래 구를 둔 곳[置毬處]까지는 서로 떨어지기가 30여 보이다. 거인(擧人)이 오른손으로 장(杖)을 쥐는데, 장(杖)의 끝을 안으로 향하게 하여서 뒤집어 말 목에 싣고, 상반(上半)은 왼쪽으로 나오게 한다. 말을 달려 구를 둔 곳[置毬處]에 나아가서 배지(排之)로써 구(毬)를 움직이고, 도돌방울[持皮]로써 이를 돌리는데, 구(毬)가 만약 오목한 곳에 들어가면, 또한 배지를 쓴다. 무릇 격구할 적에는 반드시 구의 가는 것을 뒤따라 가 멈추기 전에 이를 치는데, 말머리[馬首]도 날래고 구부린 자세를 취한다. 3회에 마치고서, 그제야 말을 달려 〈구를〉 쳐서 행구(行毬)한다. 행구의 처음에는 함부로 치지 아니하고, 장(杖)을 횡직(橫直)하게 쥐고 말 귀[馬耳]와 나란히 되게 한 후에 손을 들어 멋대로 쳐서 구문으로 내보낸다. 말을 돌려서 처음에 섰던 곳으로 되돌아 오는데, 그 말 달리는 것과 장(杖)을 쥐는 자세가 처음과 같다. >
이리하여 격구의 역사는 면면히 내려오다 드디어 하나의 무예로서 기록되었으니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가 완성되었다.
곤봉(棍棒), 등패(藤牌), 낭선(狼筅), 장창(長槍), 당파(鎲鈀), 쌍수도(雙手刀)등 여섯 가지 기예에 죽장창(竹長鎗), 기창(旗鎗), 예도(銳刀), 왜검(倭劒), 교전(交戰), 월협도(月挾刀), 쌍검(雙劒), 제독검(提督劒), 본국검(本國劒), 권법(拳法), 편(鞭), 곤(棍) 등 12가지 기예와 기창(騎槍), 마상 월도(馬上月刀), 마상 쌍검(馬上雙劒), 마상 편곤(馬上鞭棍) 등 4가지 기예를 더 넣고 또 격구(擊毬), 마상재(馬上才)를 덧붙여 모두 24가지 기예로 구성되었다.
- 정조실록 14년 4월 29일-
오랜 세월 놀이 문화가 이어져 내려오면 새로운 환경을 맞이하면서 약간의 변화를 가져오게 된다. 물론 고려시대에도 격구에 많은 변화가 있어 용품에 사치스런 치장이 가미되는가 하면 구경하는 관람객들에게서 풍기문란 사건도 종종 나타나게 되어 세종 때에는 격구를 폐하자는 상소도 이어지게 되는데 세종조차도 격구를 워낙 좋아한 나머지 그러한 상소를 무시하기에 이르는 기록을 볼 수 있다. 얼마나 좋았으면 날이 저무는 줄 모르고 즐겼겠는가!
< 경회루(慶會樓) 아래에 나아가서 종친(宗親)들을 모아 격방(擊棒-격구)하게 하였는데, 기녀(妓女)와 광대[伶人]를 시켜서 악(樂)을 연주하게 하고, 저녁이 되어서야 파(罷)하였다.
- 세종실록 23년6월 8일 - >
또한 변화된 형태로 강의 얼음위에서 행해지기도 했는데 지금의 아이스하키와 유사한 놀이가 되었으며 말을 타지 않고 공을 쳐서 구멍에 넣는 방법으로 지금의 골프의 원조격이 되는 놀이도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棒戲(봉희)라는 이름으로 기록에 전해진다.
< 경회루(慶會樓)에 나아가서 활 쏘는 것을 보고, 드디어 사정전(思政殿)에 임어하여 종친(宗親)들의 봉희(棒戲)를 관람하였다. (봉희(棒戲)를 혹은 격구(擊毬)라고도 한다. 격구하는 법은 혹은 수인(數人), 혹은 십여 인, 혹은 수십 인이 좌우로 나누어서 승부(勝負)를 겨루는데, 봉(棒)의 모양은 숟가락[匙]과 같고 크기는 손바닥[掌]과 같은데, 우피(牛皮)로 만든다. 두터운 대나무를 합하여 자루를 만드는데 봉피(棒皮)가 얇으면 구(毬)가 높이 솟고 봉피가 두터우면 구가 높이 솟지 않는다. 또 곤봉(袞棒)이란 것이 있는데, 친 구(毬)가 구르고 일어나지 않으며, 그 후박(厚薄)과 대소에 따라 그 명칭이 각기 다르다. 구는 나무를 사용하여 만드는데, 혹은 마노(碼碯)도 쓰며 크기는 계란(鷄卵)만 하다. 땅을 파서 주발[椀] 모양같이 하고 이를 이름하여 와아(窩兒)라 부르며, 혹은 전각(殿閣)을 사이에 두고 와(窩)를 만들어 놓기도 하고, 혹은 섬돌 위[階上]에 와를 만들어 놓기도 하며, 혹은 평지에 만들기도 한다. 구(毬)가 굴러갈 때 혹은 뛰어넘기도 하고 혹은 비켜가기도 하며 혹은 굴러가기도 하여, 각기 그 와(窩)의 소재에 따라 다르게 된다. 한 번 쳐서 와 속에 들어가면 산가지[算] 2개를 얻고 한 번 쳐서 들어가지 못하고 구가 그쳐 있는 곳에서 두 번 세 번 쳐서 들어가면 산가지 1개를 얻는데, 한 번 쳐서 들어가면 다른 구는 두 번 치지 못하고 죽으며, 두 번 쳐서 들어가면 다른 구는 세 번 치지 못하고 죽는다. 이 뒤에도 이와 같다. 한 번 친 구는 비록 다른 구와 부딪쳐도 죽지 않지만, 두 번 친 구가 다른 구와 부딪치게 되면 죽는다. 이 뒤에도 역시 이와 같다. 혹은 서서 치기도 하고 혹은 무릎꿇고 치기도 하는 여러 가지 방법이 있다.) - 세조실록 1년 9월 8일 -
* 봉희(棒戲) : 옛날 궁중에서 공[球]을 쳐서 구멍에 넣던 놀이의 하나. 격구(擊毬)와 다른 점은 말을 타지 않고 그냥 평지에서 공을 치는 것이었음. 방희 >
이와 같이 조선시대에는 폴로와 유사한 놀이로 격구라는 것을 상류층 사회에서 즐겨 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관람을 하며 일반 사람들도 같이 즐겼다.
현종 때의 기록으로는 태조가 소시적에 격구를 너무나 좋아하였다는 사실을 알고 그것을 기념하고자 함흥에 격구정(擊毬亭)을 지었다. [ 擊毬亭: 東十五里雲田社地連海門綠莎平衍十餘里俗號松原 太祖少時擊毬于此顯宗十五年始建亭 -함경도 함흥읍지 ]
또한 실록의 기록에는 “정릉(定陵)과 화릉(和陵) 두 능의 재실(齋室)을 수선하고 격구정(擊毬亭)을 중건하였다. 격구정은 바로 태조(太祖)의 잠저(潛邸) 때 격구하던 곳으로 현종(顯宗) 갑인년에 관찰사 남구만(南九萬)이 처음으로 창건하고, 45년 후 무술년에 이탄(李坦)이 중건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관찰사 이문원(李文源)이 다시 신축한 것이다. - 정조실록 16년 6월 19일 - ” 이렇게 되어 있다.
그리고 五峯 李好敏(이호민.1553∼1634)의 문집(오봉집)에 관북의 유명한 명소로 關北十絶(鐵嶺, 龍興館大門, 龍興江, 城川江, 萬歲橋, 宜月亭, 聞韶樓, 梨雪堂, 擊毬場, 東門柳)이 있는데 그 중에 격구장(擊毬場)이 있는 것이다.
이러한 사료적 기록으로 보아 초원지방에서 행해지는 말놀이 문화인 격구가 있었다는 사실은 환경적으로 말[馬]이 많이 있는 지역임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러한 문화가 생겨난다는 것은 그만큼 말과의 친화적 유래가 있어야만 가능한 것이다. 지금의 제주도에 말 몇 마리 가져다 놓고 제주에는 말의 역사가 이러쿵저러쿵 하다는 이야기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식인 것이다. 지금의 한반도 땅에는 말의 자연적 생태적 친화 환경이 아니다. 말의 친화 환경을 찾자면 지금의 중앙아시아이며 조선의 관서 관북지방으로 눈을 돌려야 할 것이다.
이러한 격구의 상위층 놀이를 슬그머니 자신의 귀족적 전통놀이인양 바꾸어 버린 것은 어찌보면 아시아(조선)의 상위 문화를 동경하는 서양의 심리적 부러움에서 나온 것인지 모른다.
첫댓글 음....미국영화 람보2에서 아프가니스탄에 비슷한 경기가 있다...말을 타고 양을 원안에 넣으면 이기는 경기다.. 이것도 하나의 아류로 생각한다...지금은 혼혈들의 세상이 되었지만 우리선조가 뛰어놀던 곳이 아닐런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