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영화와 책을 테마로 자유로이 조별 주제를 정해 발표하는 2학기 영어 수행평가 시간. ‘The Best of OST’를 주제로 발표에 나선 팀이 영화 <라라랜드> 속 남녀 주인공의 탭댄스 장면을 음악과 함께 재연하자 평가의 긴장도 잠시 잊은 채 교실은 웃음바다가 됐다.
# 물의 화학적 성질과 정수 과정을 이해하는 화학 수업 시간, 조별로 간단한 실험 키트를 이용해 정수 과정을 눈으로
확인하기로 했다. 푸른 잉크를 탄 물을 붓고 ‘기다려’와 ‘제발 나와라’를 번갈아가며 외치던 학생들은 마지막 정수 단계를 거쳐최초의 맑은물 한 방울이 떨어지자 동시에 환호성을 지른다. 이내 “아프리카 아이들한테 주면 좋겠다”는 진지한 한마디가이어진다.
# 문학 수업 시간, 이호철의 <큰산>과 김승옥의 <서울, 1964년 겨울>을 읽고 토론하며 추상적으로 느껴지던‘인간 소외’의 의미를 다시 생각해보게 됐다. ‘공동체에게 말을 걸다’를 주제로 한 교육청 주관 독서나눔인문학한마당의 학교 예선전에 이 책들을 선정해 나가보기로 했다. 친구들에게 ‘개인 플레이’와 ‘팀 플레이’ 중 무엇을 선호하는지 스티커 설문 조사를 해보니 96명 중 73명이 개인 플레이를 선택하는 모습에 놀랍고 씁쓸했다. 사회 활동에 참여하지 않는 이유로는 ‘수능이 끝나고 해도 충분할 것 같아서’ 등의 답변이 나왔다. 이제 우리 안의 열정은 다 꺼진 걸까? 이 의문에서 다시 출발했다. 역사 속 청소년의 사회 참여와 지난겨울을 뜨겁게 달군 청소년의 촛불 참여, 공동체의 힘을 느낄 수 있었던 사례들을 상기시키며 공동체가 함께 나아갈 ‘큰산’에 대한 희망을 전했다
미즈내일 독서나눔인문학한마당에서 발표한 내용이 인상적이다. 특히 문학 토론 수업 때 읽은 책을 모티프로 했는데, 대회는 어떻게 나가게 됐나.
2학년 김민제·진채원·최주은 학기 초에 대회 공지가 붙었는데, 언론인이라는 같은 꿈이 있어서 나가 보면 재미있을 것 같았다. 정보 활용 능력이 뛰어난 주은이를 스카우트해 세 명으로 팀을 이뤘다. 평소 학교에서 인문학 고전을 읽을 기회가 많아 흥미로웠던 데다 주제 자체도 수업 시간에 토론했던 ‘인간 소외’와 연결되어 있어 관심이 생기더라. 처음엔 좀 어려운 책을 선정해야 유리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책을 심화시켜 고민해보는 것도 좋을 듯해 수업 시간에 읽은 책을 골랐다.
준비 과정이 쉽지는 않았다. 대본 쓰는 게 힘들어 울기도 했지만, 막상 친구들 앞에서 프레젠테이션하는 영상을 보니 우리 스스로도 너무 놀라웠다. 와~ 우리가 어떻게 이런 걸 해냈지 싶더라.(웃음) 글을 잘 쓰거나, 발표를 잘하거나, PPT를 잘 만들거나 각자 강점이 다른 만큼 함께 했기에 가능했던 것 같다. 학교 대표로 출전, 우수상을 수상해 더 기뻤다.
미즈내일 대구는 수능에 강점을 보이는 지역인 만큼, 아직 수능 중심 지원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대구여고는 그 안에서 수업 변화를 모색하는 중인데, 낯설지는 않았나.
2학년 신아라 1학년 때는 토론식 수업을 받아들이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았다. 국어 시간에 연극 한 편을 완성하기 위해 우리끼리 대본도 짜고 소품까지 다 준비했고, 영어 시간에는 발표와 함께 TED 강의를 듣고 정리하거나 3~5분가량 스피치를 하는 활동들을 했다.
2학년이 되니 솔직히 고민이 되더라. 강의식 수업에 길들어 있던 학생들 입장에서는 어차피 시험에 나올 건데 선생님이 답을 불러주시고 외우는 게 낫지 않을까 싶었다. 한데 모의고사를 치러보니 교과서 지문을 달달 외운다고 수능을 잘 치르는 게 아님을 깨닫게 됐다.
특히 이과 학생들은 비문학에서 새롭거나 추상적인 철학 지문들이 생소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토론 수업을 통해 모둠끼리 서로 의견을 들어보고, 답을 찾아가는 연습을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자기 주도적 힘이 길러졌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2학년 이하은 모둠 활동 수업을 통해 알게 되는 게 많다. 그림을 잘 그리는 친구들은 그림으로 표현하고, 글을 잘 쓰는 친구들은 스토리텔링을 맡다 보면 배우는 내용을 더 잘 이해할 수 있다. 다른 학교 친구들에게 물어보니 강의식 수업이 주여서 자는 학생들이 많다고 하는데, 모둠 수업 때는 자는 친구들이 없다.
1학년 여동진·오채연 대구여고에서도 모둠 수업과 함께 강의식 수업도 한다. 각각 장점이 있기에 적절히 섞어 하는 게 좋을 것 같다. 학생이 교사가 되어 친구들 앞에서 설명하는 모의 수업도 많은 편이다. 선생님들이 이처럼 발표할 기회를 자주 주시니 학생부 세부 능력 및 특기 사항에도 상세하게 기록되는 장점이 있더라. 또 기억에도 오래 남는다.
미즈내일 과정 중심 평가에 대해 간혹 ‘일상이 평가여서 부담스럽다’는 학생들도 있던데.
민제 중학생 때는 이런 수업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객관식 시험에 맞춰 항상 암기식으로 공부하는 게 전부였기에, 친구들 사이에서도 쟤는 나보다 좀 더 아는구나 혹은 모르는구나의 느낌이 전부였다. 고등학교에 와서 함께 해결하는 수업을 접하면서 이 기준도 달라졌다. 나보다 잘하고 못하고가 아니라 저 친구는 이 주제를 더 깊이 생각하는구나, 듣다 보면 나도 궁금증이 생기는 그런 느낌이랄까?
중학생 때는 수업 시간에 자주 졸았고, 입학할 때 성적도 썩 좋지 않았는데 친구들에게 긍정적인 자극을 받으면서 120등이었던 성적이 지금은 20등으로 올랐다.
동진 얻는 점도 많지만, 그만큼 어려운 점도 있다. 수행평가가 지필평가를 준비해야 하는 기간을 피해 몰려 있다 보니 우리끼리는 ‘수행 폭탄 기간’이라고 부르는 때가 생기더라.
진동섭 이사 기본적으로 수행평가는 핵심 지식을 배우고, 이를 토대로 실험이나 발표를 하는 방식이다. 지필평가 역시 그런 내용을 반영해 같은 방식으로 문제를 내면 두 평가가 일치하게 된다.
반면 수행평가는 그대로 하고, 수능에서 벗어나기 어려우니 수능형 지필평가를 병행하면 학생들에게 이중 부담이 된다. 대구여고의 지역적 특성상 두 가지를 병행하는 형태로 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쪽 권역의 대학에는 학생부 교과 전형 모집 규모가 크고, 의대가 많아 수능을 잘 봐야 하는 숙제도 있기 때문이다.
수행평가와 지필평가가 일치하면 1등이 진짜 1등이다. 한데 일치하지 않으면 학생부 종합 전형에서는 1등과 20등 중 누가 더 실력이 있는지 재봐야 한다. 앞으로는 교육과정과 대입 제도를 바꿔 학생들이 이중 부담을 느끼지 않도록 하려는 건데, 여러분이 과도기의 거의 마지막 세대인 것 같다.
하지만 분명한 건 고등학생 때 발표도 해보고, 협업하는 방법도 배운 다음 대학에 가면 앞장서서 할 수 있게 되고, 직업을 가졌을 때도 자신감과 자존감이 생긴다. ‘수행평가 하느라 지필평가를 망쳤고, 등급이 안 좋아졌으니 나는 수능으로 가야지’ 할 수도 있는데, 이럴 때 의지를 꺾지 않았으면 좋겠다.
1등급인지, 3등급인지가 아니라 누가 진짜 실력을 키웠는지가 중요하다. 특히 학교가 수능형으로 시험을 냈다면, 입학사정관들은 이런 특성을 고려해 등급은 떨어졌어도 지필평가 외에 다른 부분에 역량이 있는지 감안해서 본다. 이는 입학사정관들의 몫일 것이다.
전문가의 눈으로 본 대구여고
“정시 중심 학교에서도 수업 개선 가능성 보여줘”
대구여고 선생님들은 점수 경쟁이 곧 실력을 의미하지 않기에 배우고 실행해봐야 실력이 되고 학생이 성장하므로 수업 변화를 시도하기로 했다고 한다. 더구나 교과 협의회에서 실행 가능한 방안들을 모색했다는 점이 눈에 띈다. 같은 수업을 여러 교사가 맡았을 때 보조를 맞추기가 어려운데, 이를 넘어서려는 노력을 한 것이다.
한편 수능 중심 수업도 남아 있다. 이는 학교가 아닌 제도의 문제다. 그렇기에 이중 부담이 될 수도 있다.
그런데 학생들은 수행평가와 지필평가의 이중 부담 속에서도 활동하는 수업이 즐겁다고 말한다. 학생 스스로 역량이 느는 것을 대견해한다. 그래서 역시 교실이 깨어 있다. 대구여고는 수능 공부 요구가 많은 학교에서 변화를 모색하는 사례를 보여준다. 역시 오늘도 수능의 질곡이 문제다.
대구여고는 지금까지 방문한 학교와는 다른 환경이다. 대부분 학생들이 학생부 위주 전형으로 지원했던 것과 달리 지금도 정시 지원율이 높기 때문. 보통 이 경우 수업과 평가는 수능에 최적화된 형태로 집중되기 마련이다. 대구여고 역시 처음 과정 중심 평가를 도입하기로 했을 때 저항이 적지 않았다고. 1학기 연구부장에 이어 교무부장을 맡고 있는 윤지양 교사는 현실을 고려한 접점을 찾으려면 수업 안에서 답을 내야 했다고 전했다.
“2, 3학년은 선생님들의 자율에 맡기기로 하고, 1학년부터 시작했어요. 뭔가 별도의 시간을 내서 하는 게 아닌, 가급적 수업 시간 안에서 수행평가와 과정 중심 평가를 연결해보기로 했죠. 교사들이 힘들어하는 것 중 하나가 변별인데, 다들 열심히 하고 잘하니까 등급을 매기는 일이 숙제더라고요. 나름대로 방법을 찾은 게 과정 평가는 60~70%로 하고, 나머지 30~40%는 변별할 수 있는 과정을 넣기로 했어요. 일제 시험도 좋고, 논술형 글쓰기도 좋으니 객관성과 타당성을 확보하는 차원의 과정 중심 평가를 만들어낸 거죠.”
이 과정에서 교과 협의회가 활발하게 작동했다는 것은 환경적 어려움을 극복하는 데도 큰 힘이 됐다. 교육연극을 전공한 국어과 김지현 교사는 “학생들을 데리고 연극 수업을 하다 보면 아무래도 소란스럽다 보니, 예전 근무했던 학교에서는 항의를 받거나 저지를 당하는 경우도 있었다. 대구여고는 이미 연극 수업을 하고 있었고, 교과협의회에서 말하고, 쓰고, 표현하고, 창작하는 과정에서 학생들이 성취감을 얻는 것이 진짜 국어 수업이라는 공감대가 자연스럽게 형성됐다”고 했다.
어릴 때부터 영어 사교육을 충분히 받아온 학생들인데도 실제 영어를 활용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모습을 본 안세영 교사는 이 역량을 끌어내기 위해 모둠 수업을 도입했다. 학생들의 부담을 줄이려고 한 학기 동안 조별 발표를 준비하는 전 과정을 수업 안에 담고 평가와 연결했다. 일주일에 네 시간인 영어 수업을 세 시간은 종전 방식대로 하되 모의 수업이나 짝 활동, 간단한 발표 중심으로 조금씩 변화를 주고, 모둠 활동 수업은 안 교사가 전 학급을 맡는 식. 정시를 준비하는 학생들의 부담을 최소화하기 위해 찾은 방법이다.
대구여고 교사들이 수업 변화의 접점을 찾아온 과정에 대해 진동섭 이사는 “정시 진학률이 높은 학교에서 수업 개선을 기대하기가 쉽지 않은데, 교사와 학생 모두 나름의 방법들을 찾아나간 모습이 인상적”이라고 표현했다.
미즈내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