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 제1호] 기술의 진보 : 외제에서 국산으로
▲ [대한민국 제1호] 선풍기·에어컨 : 1960년 3월 여름을 서너 달 앞두고 우리나라 자체 기술로 만든 최초의 선풍기가 우리 국민에게 선을 보였다.
금성사(현 LG전자)가 내놓은 'D-301'<왼쪽 사진>이었다. 금성사는 금형과 모터를 개발한 기술력을 바탕으로 선풍기 설계에 착수한 지 2개월 만에 첫 선풍기를 내는 데 성공했다.
날개로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와 달리 집안 공기 자체를 냉각시켜 냉방을 하는 국내 최초의 가정용 에어컨은 1968년에 등장했다. 역시 금성사가 만든 'GA-111'<오른쪽 사진>. 창문형 룸에어컨으로 개발된 'GA-111'은 자동 온도조절장치와 회전식 방향조절기를 갖췄다.
▲ [대한민국 제1호] 사무자동화 : 1970년대까지 국내에선 손으로 직접 쓰거나 타자기를 쳐야만 문서작성이 가능했다. 서류 하나를 만드는 데 걸리는 시간도 만만치 않으며, 수정을 하기는 더욱 어려웠다. 1982년 여름 어느 날, 서울 하월곡동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 기초소프트웨어 연구실. 당시 연구실장이었던 이기식 박사(65·아이티젠 회장)〈왼쪽 사진〉와 4명의 팀원은 컴퓨터 화면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었다. 컴퓨터 화면 내에서 자유롭게 문서 내 글자크기·모양을 바꿀 수 있는지 확인해보기 위해서였다.
한 팀원이 외쳤다.
"성공입니다! 성공이라고요!" 국내 최초의 워드프로세서 '명필'(名筆)이 탄생하는 순간이다. 국내에서도 사무자동화의 기반이 되는 '워드프로세서'가 우리 기술로 선보인 것이다. 그로부터 2년 후 제품 개발에 성공했고, 1983년에는 한국화약그룹(현재 한화) 소속 '고려시스템'이라는 회사가 기술이전을 받아 상용 제품을 내놓았다.<오른쪽 사진> 10만자까지 무리 없이 글자를 집어넣을 수 있었던 명필의 출시가격은 300만원. 2010년이라도 소프트웨어 가격으로는 고가인데, 일반인들이 쓰기에는 가격이 너무 높았다.
▲ [대한민국 제1호] 인터넷 : 1982년 3월 15일 경북 구미시 전자기술연구소(현재 한국전자통신연구원). 전길남 KAIST 교수(67·현 게이오 대학 교수·작은 사진)와 수십명의 연구원들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컴퓨터 앞에 서 있었다.
누군가 컴퓨터 자판에 있는 엔터(Enter)키를 눌렀고 몇 초 뒤 모두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환호했다. "(통신망에) 붙었다, 로그인(log in) 성공!" 전자기술연구소와 서울대학교가 인터넷으로 연결된 것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터넷망 이름은 'SDN(System Development Network)'이다.
한국 최초의 인터넷망을 만든 전 박사는 "미국에 이어 세계에서 두번째로 우리가 인터넷 연결에 성공한 것"이라고 말했다. 국내에서 개인이 처음 인터넷을 쓰기 시작한 것은 1994년 6월이다.<큰 사진> 평균 전송속도는 9.6Kbps. 지금 사용하는 초고속인터넷의 100분의 1 이하다.
▲ [대한민국 제1호] PC : 1980년 7월 2일, 이용태씨를 비롯한 7명의 젊은이가 서울 청계천 세운상가에 모여 자본금 1000만원으로 삼보엔지니어링을 설립했다. 이 회사는 설립 6개월 만인 1981년 1월 SE-8001을 발표했는데, 이것이 국내에서 처음으로 상품화된 개인용컴퓨터(PC)이다.
SE-8001은 텔레비전 수상기에 전동 타자기가 붙어 있는 형태로, CPU 속도는 1㎒였다. 현재 국내에서 판매되는 110만원짜리 일반 PC의 CPU 속도(약 2.5㎓)와 비교하면 2500분의 1 수준인 셈이다.
가격은 1000만원. 당시 대기업 대졸 초임이 25만원 수준이었던 점을 감안하면 가정용으로 쓰기엔 값이 너무 비쌌다. 때문에 이 PC는 주로 기업의 회계관리용으로 사용됐으며, 일부가 캐나다로 수출되기도 했지만, 대량 생산·판매는 이뤄지지 않았다.
▲ [대한민국 제1호] 국산 자동차 : 전쟁 직후인 1955년 서울 종로에 있던 한 사무실은 손님과 구경꾼이 연일 북새통을 이뤘다. 자동차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가 그해 8월 4기통 엔진에 전진 3단·후진 1단 변속기를 장착해 만든 6인승 지프형 승용차를 보기 위해서다.
최씨는 차의 이름을 '첫 출발'을 의미하는 '시발(始發)'로 지었다. 국산 1호 차가 탄생한 순간이다. 시발은 수제(手製) 승용차였다. 엔진과 변속기는 미군이 사용하던 지프형 차의 부품을 활용했고, 차체는 미군 부대에서 나오는 드럼통을 망치로 펴서 만들었다.
주요 부품을 미국 차량에서 가져왔지만 시발을 국산차 원조로 보는 이유는 실린더 헤드 등 엔진 부품을 한국 기술자가 공작기계로 깎아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제조 방식 때문에 초기에는 시발차 한 대를 만드는 데 4개월이 걸렸다.
▲ [대한민국 제1호] 국산 미사일 : 1971년 12월 청와대비서실에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 '극비' 메모가 전달됐다. 비밀 프로젝트는 '항공 공업 사업'이라는 위장 명칭으로 불렸다. 박 대통령은 "단거리 미사일은 수입해서 쓰면 된다.
중·장거리를 개발하라"고도 지시했다. 1978년 9월 26일 충남 서해안 안흥시험장. 박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백곰'이란 이름의 국산 미사일이 엄청난 불기둥을 내뿜으며 하늘로 치솟았다. 한국은 이로써 세계에서 7번째 미사일 보유국이 됐다.
미국 나이키 허큘리스 미사일을 꼭 빼닮은 백곰은 사정거리가 180㎞였다. 유사시 군사분계선(MDL)에서 150㎞ 이내에 있는 북한 평양을 타격할 수 있는 무기였다.
▲ [대한민국 제1호] 휴대폰 : 22년 전 우리나라 업체가 처음으로 만든 휴대폰은 요즘 시각으로 보면 '휴대폰'이라고 부르기도 민망할 정도였다.
삼성전자가 1988년 처음 개발한 'SH-100'<왼쪽 사진>이라는 휴대폰은 길이가 요즘의 두 배가 넘는 20㎝였고, 무게는 6배 가까운 0.7㎏이었다. 한 손으로 들면 팔이 휘청할 정도인 데다 두께(4.6㎝)까지 만만치 않아 '냉장고 폰'이란 별명까지 생겼다.
▲ [대한민국 제1호] 국산 텔레비전 : 1966년 8월, 마침내 국내 최초의 흑백 TV 'VD-191' 500대가 만들어졌다. 48㎝(19인치)짜리 흑백 TV에 대한 시장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당시 가격이 6만원으로 쌀 27가마 값에 달했지만 '최초의 국산 TV'는 공개 추첨을 통해 당첨된 사람에게만 팔았을 정도로 인기였다. 금성사는 월 생산능력을 1500대로 늘렸고, 1966년 말까지 1만대를 생산했다.
▲ [대한민국 제1호] 1988년 전화 1000만… '1가구1전화' 시대로 : 국내에서 유선전화가 대중화된 것은 1986년 정부가 국내 기술로 개발한 교환기를 한국전기통신공사(현 KT) 전화국에 보급하면서부터였다. 이로 인해 1988년 가입자가 1000만명을 넘어서면서 국내에서도 '1가구 1전화'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 한때 '부(富)의 상징'으로 여겨졌던 유선전화는 최근 위기를 맞고 있다. 이동통신 가입자가 4500만명에 이르면서 유선전화 사용 빈도가 빠르게 줄고 있기 때문이다. 유선전화 가입자는 2007년 2300만명을 정점으로 감소세로 접어들었다. 대신 그 자리를 요금이 싼 인터넷전화가 대체해가고 있다. 인터넷전화 가입자는 현재 LG데이콤(205만명)을 포함해 600만명에 이른다.
▲ [대한민국 제1호] 국내증시 전산거래 1979년 도입 : 국내 증시에 전산시스템이 처음 도입된 것은 1979년 7월 2일이다. 증권거래소(현 한국거래소)가 명동시대를 접고 여의도로 이전해 개장한 날이다.
이날 한국거래소 내 증권거래소시장 벽면엔 대형 전자 시세게시판이 모습을 드러냈다. 1970년대 들어 증권 거래량이 급속히 늘자 정부는 1973년부터 증권업무 전산화에 착수했다.
증권거래소 산하에 한국증권전산(현 코스콤)을 설립하고, 1978년에는 한국증권전산 소속 프로그래머 4명 등 총 7명으로 구성된 프로젝트팀이 메인컴퓨터 구매업체인 미국 스페리사 엔지니어 3명의 지원을 받아 시스템 개발작업에 들어갔다. 결국 증권거래소의 여의도 이전에 맞춰 전자 시세게시판이 시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당시 거래됐던 전체 주식 종목 수는 768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