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12/01 내 고향집에서 본, 앞산 용산(龍山)
80에, 50여년 운영하던 동대신동의 소아과 의원을 -02/5에 닫고,해운대에서 칩거(蟄居)한지 10년만에,힘 내어 선영(先塋)을 찾았다.
生家 에서 보니 용산(435m)은, 의관을 바로 쓰고 여전히 거기에 앉아있었다, 산 비탈인 내집에서 찍으 사진은 초점을 높이해서 일가, 산이 오히려 낮아보인다. 용산의 동서남북 중,가장 멋지게 보이는 곳은, 동쪽인 내집에서 이며, 언제나 정좌(定座)하고 있어 위험이 있다.제2차세계 대전후 불란서를 살린, 드골(1890-1970) 대통령은 "위험 없는곳에 권위 없다"고 했다.
관란천(觀瀾川)
집앞 들을 남북으로 뻐든 길은 1930년대에 딱은 자동차용 신작로인데 , 1996.4.13 운문댐의 완공으로, 대구-운문댐-운문사-언양을 잇는 2차선 관광도로로 격상되었다.그 길을 따라 대구로 가는 운문댐의 수도 파이프도 매설되 있다.
그 앞에 시멘트 다리가 보이느데, 사연 많은 관란천(觀瀾川)이다. 수원(水源)은 청도 운문댐으로 넘어가는 곱들 골자기, 청도 동창으로 넘어가가는 용산골자기,경주 산내면으로 넘어가는 세암골 골자기에서 내려온 개천이 고란 동구(洞口)의 유서 싶은 고란 숲에서 합류 하여,내려가다 용성천,남산천,자인천이 합류되여,오목천(烏沐川)을 이루고,"하대"의 경산온천을 비겨 금호강으로 합류한다.
관란천의 옛길은,보부상(褓負商)이 울산,언양,대천,자인의 5일장을 오가는 Silk road이고, 내원사-석남사-운문사, 범어사-통도사-동화사를 오가는 비구,비구니의 탁발순례(托鉢巡禮) 길이다.이들은 우거진 고란숲에서, 쉬어가면서 보고 들은 소식을 동내 어르신에게 자랑삼아 전한다. 고란숲은 여름 삼복중에는 어른신의 사랑방이고,아이들의 놀이터 이다.
그 유명한 고란 숲도, 일제말 ,배을 만든다고, 수백년 묵은,느티나무, 당상목을 ,왜놈이 모조리 베어가 버려, 이제는 황패하여 엣모습을 찾아볼수 없다.
원효,설총의 고향, 慈仁縣(경산군) 하대
경산 온천이 있는 "하대"는 원효대사(617- ? )와,설총(薛聰 654-?) 부자의 고향이다, 김춘추(602-661)는 22세에 장남 법민(法敏,운무왕)을 얻고,52세에 외손자 설총을 얻었다.요석공주의 모후는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그녀는 일찌기 화랑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둔 청상과부(靑霜寡婦)이다. 그녀는 원효와의 파계(破戒)로 -654년에 설총을 얻었고, 그때 원효는 37세, ,요석공주의 오빠격인 법민(法敏)은 28세였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파계로 태어난 설총을 ,서라벌의 눈을 피해,원효의 고향인 자인현 "하대" 에서 길렀다.
薛聰의 원사(願寺) 반용사(盤龍寺)
문무왕은 남매 숙질간의 정의가 두터웠다, 문무왕은 경주와 자인현의 경계(境界)인 (반용산,651m,일명 王제)를 넘어 자인현 쪽에 설총의 원사(願寺)인 반용사를 지어놓고,문무왕 왕족은 1년에 한번식 왕제를 넘나 들면서, 왕실의 불사를 올렸단다.
요석공주와 설총 모자는 하대에세 관란천을 고란(谷蘭)까지 거슬러 올라와 ,고개 너머 욍제 아래 반용사에서, 문무왕과 원효를 만낫단다. 마치 오작교에서의 견우,직녀 처럼 말이다.
왕사인 반용사는 임진왜란에 소실된것을 1641년에 중창했으나 ,1916 대화재로 완전소실 됬다.
용산이 뒤거름 친다
어릴때 들은 전설,내집 산대 뒤 마을우물에 새벽에 물길러간 아낙네가, 항아리에 물을 길러 머리에 이고 오는데,, 느닷없이 용산이 뒤걸음 치는것을 보고 대경실색 (大驚失色)하여, (산이 뒷거름 친다)고 소리 치자 , 산이 그만 그 자리에 멈처버렸다는 것이다.
아낙네가 소리만 안질렀서도,고란 골짜기는, 넓은 들판이 됬을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우린 그 아낙네를 원망 했었다,
해서 용산은 동쪽은 용성면의 고란과 곡신을,서쪽은 남산면 사이에서, 와룡(臥龍)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어있다,용산성에서 바라보면,서북은 팔공산까지 훤히 내려다 보인다,아마 신라에 병합된 압독국(押督國)의 산성이리라, 이십년 전만해도 경산-대구간 기차,영천-동대구간 고속도로 차창에서 20여 km 저멀리, 맑은 날시엔,작은 한라산 같은 용산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아파트촌이 시야를 가로막아 안 보알지도 모르겠다.
용산의 精氣는 관란서원,난포공 古宅 (경상북도지방문화재)로 흘러
용산의 왼쪽 봉우리는 최고봉인 "매봉"이며,용의 용머리에 해당된다,산의 정기(精氣)는 그 밑의 "관란서원(觀瀾書院)",그리고 솟을 대문인, 종가 고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내려왔단다.
솟을 대문은 권세있고 돈있는 양반이라도, 함부로 지을수 없단다.
관란서원은 자인현의 유일한 서원이며 1659년에 설림한 ,경주 玉山서원 계열(系列)이다. 근런데 그서원은 대원군의 愚民政策으로 1868년 철패되고 말았다,
조선일보 2006,6,9 조용현 살롱에서, 자인현에 관란서원이 있었는데 소장한 관란문집(觀瀾文集),관란齊 遺稿,관란亭 古書는 다 없어젔다고 안타까와 하더라, 그는 觀瀾의 유래를 맹자(孟者)의 "觀水有術 必觀其瀾" 물을 보는데는 비법이 있으니,반디시 물결 이는 곳을 삺 펴야 한다"고 해설했다..
임란 의병장 최철견, 3대가 임란功臣
최철견은 영천 최씨 판서공파 14대손, 1525생이다.화약을 발명한 崔茂宣의 후예 이리라.
그의 아버지는 4형제중 막내 이다, 물려받을 전답이 없는 그는, 신천지를 찾아 해매다 자인현의 왕산골인 고란 마을을 발견하고,21살인 1546년, 영천에서 고란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첫째 시작한것은 엄청난 토목공사, "흐르는 물을 가두는 못" 을 3개나 막았던 것이다. 하늘만 처다보는 천수답(天水畓)을 수리답(水利畓)으로 개간하여, 고란을 부농, 부촌(富農 富村)을 일구 었던 것이다.
崔鐵堅(蘭圃公)이 고란으로 입향(入鄕)한지 46년째인 1592년에 임란이 터젔다. 그는 67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손자인 인수(仁壽),증손자인 준립(竣立)을 대동하고, 의병을 일으켜 영천의 의병장 권용수와 함께 영천,경주에서 왜병과 싸웠고,특히 이화산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뒤에 전라도사가 되어, 전주를 방위한 임란공신이며,조손(祖孫) 셋이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의 훈장을 받았다는.서애 유성룡의 (징비록徵秕錄)의 기록 이다,
증손 준립는 임란중 무과(武科)에 등극한 군관 이다.
난포공은 버슬아치가 살았다는 상작골(上爵골)의 언덕에 사청등(射廳嶝)이란 궁도장(弓道場)을 차려놓고,고란의 담양(潭陽) 田씨,곡신의 흥해 최씨 崔八凱,崔八元 형제 등과 , 궁술을 익혔단다. 담양 田씨,최팔개 형제도 의병으로 참전한 임란공신이란다.
일제는 임진왜란의 의병장인 최쳘견의, 일본에 불리한 행적과 전적의 기록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고저, 관란서원의 장서를 싹 쓰리해 갖고 갔다는 동내 어르신의 증언이다.이로서 서원의 역사와, 고란의 개척사도 사라졌다.
용산은 화산,용산성은 청소년 수련장
매봉에서 북쪽으로 정상부는 넓은 평원으로,그대로 직선 400m의 운동장이며,수백의 천막도 칠수있는 넓비란다, 해방후 북쪽 그릉지(丘陵地)의 "용산성"의 유적지를 묶어,청소년 야영지로 개발했단다. 이 평원은 화산이 폭팔한 분화구(噴火口) 이리라, 내 보통학교 시절, 여기는 고학년의 소풍코스 였다.동내 젊은이는 정월 대보름 달집을 여기 정상에서 태운다. 나는 형따라 간적이 있고, 친구 셋이서 간적도 있다.원래 정상은 푸른 소나무 일색이었는데,10년만에 가니 낙엽수 일섹으로 변모해, 경개선이 사라져 아쉬웠다
매봉 아래로 용암이 분출하여 흘러내려오다 Y형의 넓은 "너덜겅"을 이루고 있는데, 전설로는 아낙네가 치마에 돌을 싸서 가다가 치마기 찌저져서,돌이 흘러내린 것이 란다. 돌은 대대 손손 온돌 구들장으로 팔려나갔으나. 너덜겅의 돌은 아직도 그 대로 이다.
용산은 산정(山頂)의 넓는 마당과,용암의 너덜겅을 보아 구색을 갗운 , 작은 화산이리라,
용산의 반경 약 4 km 이내의, 남쪽 대천(大川) 에 청도온천이, 관란천 하류 "하대"에 경산온천이,해방후 개발되것으로 보아도 더욱 그렇다.
무지개샘, 암자, 벗나무
물이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무지개 샘이 있다, 무지개는 여기에서 쏫아 오른다고 하기에, 무지게가 떳다하면 우린 언제나 그 샘부터 먼저 살핀다.
옛날에 그자리에 암자(庵子)가 있었는데,빈대가 하도 많아, 빈대를 잡을려다 절을 태워 버렸다는 전설이다, 사실 해방후 미군이 DDT라는 살충제를 갖고오기 까지는, 밤 마다 누구나 빈대와의 전쟁으로 잠을 설첬다.
그 무지게샘 가에는 벗나무 한구루가 있었는데, 내 보통학교 저 학년 때만 해도,봄에 꽃을 피워주고,무지개샘의 위치도 알려줬는데, 어느 누가 도끼 자루로 쓸려고, 벗 나무를 베 버렸다는 후문이다. 우린 학교를 오가면서, 봄이면 그 자식을 원망했다.그 이끼 낀 무지개 샘도,몇번 가보았다.
동제 (洞祭)
용산에는 동내를 수호하는 산신령이 계시는데,그는 천년묵은 호랑이라고 했다.가뭄이 들면 무지개 샘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그리고
가뭄은 신성한 산에 누가 도둑묘를 썻기 때문이라고 믿고, 동민이 살기충천(殺氣衝天)하여, 꼭갱이를 들고, 산을 삿삿히 뒤진다.
동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고란 숲에서 지낸다.제주로 추대받으면 일년내내 몸을 단정히 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의 출입을 엄금한다,동제날은 고란숲에서 목욕제계(沐浴齊戒)한다.
2002년 11월, 묘사로 고향가니,용산의 동남부가 벌거숭이가 됬더라.산불이 났느냐 하니,봄에 풀(도토리 나무)을 경매했다는 것이다.
엤날은 모자리,논 밑거름으로 봄에 참나무,굴밤나무 풀을 벳는데, 지금은 큰 나무로 키워서 "표고버섯 대목"으로 공매한단다.
그래서일가 그해 동내 에 거주하는 동민이 질병이나 사고로,또는 일가친척이 고향 오가다 교통사고로 7명 이나 횡사(橫死)했다는 것이다.우리집 제실을 20여년이나 관리하던 "徐氏"도 경운기 사고로 직사했다는 슯은 소식이 었다.
해서 동내는 동제 (洞祭)를 다시 크게 지네,山神 과 地神에게 사죄(謝罪)하고,횡사한 怨魂을 달렜더니 불행의 진행은 멈첬단다.
산지에 참나무를 벤다고,별도로 告由祭를 지내지 아니 했을가? 아니했으면 산신이 대노할 수 밖에.
안동댐으로 가는길 한복판에 수백년된 당상목이 한구루 홀로 서있다,이를 벨려는 사람이 안 나타나,나무를 놔두고 ,길을 양쪽으로 냈다는 것이다.
일본,나라지방의 다가마츠 츠가(高松古墳)을,20세기 후기에 발굴한 사람중 3명이 3년안에 알수없는 병으로 죽어갔단다.
종교는 토속신앙을 미신(迷信)으로 타기(唾棄) 하는데,더더욱 일제는 조선민족의 주체성을 말살(抹殺)하고저 ,토속신앙을 야만행위로 배격했었다.
풍수학에는 " 山生人 水生財" 이라 했다. 용산은 나의 어버이이고,스승이고 나의 신앙이다.
솟을 대문, 남포고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
*** 용인 민속촌의 솟을 대문은 16회 송재식 동문의 "합천 송씨의 종가댁, 낙향한 송시열(1607-1689)의 후예" 의 고택을 헐어 이전(移轉 ) 한 것이라고,고인이 생전에 술회했었다.
80에, 50여년 운영하던 동대신동의 소아과 의원을 -02/5에 닫고,해운대에서 칩거(蟄居)한지 10년만에,힘 내어 선영(先塋)을 찾았다.
生家 에서 보니 용산(435m)은, 의관을 바로 쓰고 여전히 거기에 앉아있었다, 산 비탈인 내집에서 찍으 사진은 초점을 높이해서 일가, 산이 오히려 낮아보인다. 용산의 동서남북 중,가장 멋지게 보이는 곳은, 동쪽인 내집에서 이며, 언제나 정좌(定座)하고 있어 위험이 있다.제2차세계 대전후 불란서를 살린, 드골(1890-1970) 대통령은 "위험 없는곳에 권위 없다"고 했다.
관란천(觀瀾川)
집앞 들을 남북으로 뻐든 길은 1930년대에 딱은 자동차용 신작로인데 , 1996.4.13 운문댐의 완공으로, 대구-운문댐-운문사-언양을 잇는 2차선 관광도로로 격상되었다.그 길을 따라 대구로 가는 운문댐의 수도 파이프도 매설되 있다.
그 앞에 시멘트 다리가 보이느데, 사연 많은 관란천(觀瀾川)이다. 수원(水源)은 청도 운문댐으로 넘어가는 곱들 골자기, 청도 동창으로 넘어가가는 용산골자기,경주 산내면으로 넘어가는 세암골 골자기에서 내려온 개천이 고란 동구(洞口)의 유서 싶은 고란 숲에서 합류 하여,내려가다 용성천,남산천,자인천이 합류되여,오목천(烏沐川)을 이루고,"하대"의 경산온천을 비겨 금호강으로 합류한다.
관란천의 옛길은,보부상(褓負商)이 울산,언양,대천,자인의 5일장을 오가는 Silk road이고, 내원사-석남사-운문사, 범어사-통도사-동화사를 오가는 비구,비구니의 탁발순례(托鉢巡禮) 길이다.이들은 우거진 고란숲에서, 쉬어가면서 보고 들은 소식을 동내 어르신에게 자랑삼아 전한다. 고란숲은 여름 삼복중에는 어른신의 사랑방이고,아이들의 놀이터 이다.
그 유명한 고란 숲도, 일제말 ,배을 만든다고, 수백년 묵은,느티나무, 당상목을 ,왜놈이 모조리 베어가 버려, 이제는 황패하여 엣모습을 찾아볼수 없다.
원효,설총의 고향, 慈仁縣(경산군) 하대
경산 온천이 있는 "하대"는 원효대사(617- ? )와,설총(薛聰 654-?) 부자의 고향이다, 김춘추(602-661)는 22세에 장남 법민(法敏,운무왕)을 얻고,52세에 외손자 설총을 얻었다.요석공주의 모후는 김유신의 여동생 보희,그녀는 일찌기 화랑과 결혼하여, 딸을 하나둔 청상과부(靑霜寡婦)이다. 그녀는 원효와의 파계(破戒)로 -654년에 설총을 얻었고, 그때 원효는 37세, ,요석공주의 오빠격인 법민(法敏)은 28세였다 ,요석공주는 원효의 파계로 태어난 설총을 ,서라벌의 눈을 피해,원효의 고향인 자인현 "하대" 에서 길렀다.
薛聰의 원사(願寺) 반용사(盤龍寺)
문무왕은 남매 숙질간의 정의가 두터웠다, 문무왕은 경주와 자인현의 경계(境界)인 (반용산,651m,일명 王제)를 넘어 자인현 쪽에 설총의 원사(願寺)인 반용사를 지어놓고,문무왕 왕족은 1년에 한번식 왕제를 넘나 들면서, 왕실의 불사를 올렸단다.
요석공주와 설총 모자는 하대에세 관란천을 고란(谷蘭)까지 거슬러 올라와 ,고개 너머 욍제 아래 반용사에서, 문무왕과 원효를 만낫단다. 마치 오작교에서의 견우,직녀 처럼 말이다.
왕사인 반용사는 임진왜란에 소실된것을 1641년에 중창했으나 ,1916 대화재로 완전소실 됬다.
용산이 뒤거름 친다
어릴때 들은 전설,내집 산대 뒤 마을우물에 새벽에 물길러간 아낙네가, 항아리에 물을 길러 머리에 이고 오는데,, 느닷없이 용산이 뒤걸음 치는것을 보고 대경실색 (大驚失色)하여, (산이 뒷거름 친다)고 소리 치자 , 산이 그만 그 자리에 멈처버렸다는 것이다.
아낙네가 소리만 안질렀서도,고란 골짜기는, 넓은 들판이 됬을 것이란 이야기를 듣고,우린 그 아낙네를 원망 했었다,
해서 용산은 동쪽은 용성면의 고란과 곡신을,서쪽은 남산면 사이에서, 와룡(臥龍)처럼 남북으로 길게 누어있다,용산성에서 바라보면,서북은 팔공산까지 훤히 내려다 보인다,아마 신라에 병합된 압독국(押督國)의 산성이리라, 이십년 전만해도 경산-대구간 기차,영천-동대구간 고속도로 차창에서 20여 km 저멀리, 맑은 날시엔,작은 한라산 같은 용산이 희미하게 보였는데, 지금은 아파트촌이 시야를 가로막아 안 보알지도 모르겠다.
용산의 精氣는 관란서원,난포공 古宅 (경상북도지방문화재)로 흘러
용산의 왼쪽 봉우리는 최고봉인 "매봉"이며,용의 용머리에 해당된다,산의 정기(精氣)는 그 밑의 "관란서원(觀瀾書院)",그리고 솟을 대문인, 종가 고택(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로.내려왔단다.
솟을 대문은 권세있고 돈있는 양반이라도, 함부로 지을수 없단다.
관란서원은 자인현의 유일한 서원이며 1659년에 설림한 ,경주 玉山서원 계열(系列)이다. 근런데 그서원은 대원군의 愚民政策으로 1868년 철패되고 말았다,
조선일보 2006,6,9 조용현 살롱에서, 자인현에 관란서원이 있었는데 소장한 관란문집(觀瀾文集),관란齊 遺稿,관란亭 古書는 다 없어젔다고 안타까와 하더라, 그는 觀瀾의 유래를 맹자(孟者)의 "觀水有術 必觀其瀾" 물을 보는데는 비법이 있으니,반디시 물결 이는 곳을 삺 펴야 한다"고 해설했다..
임란 의병장 최철견, 3대가 임란功臣
최철견은 영천 최씨 판서공파 14대손, 1525생이다.화약을 발명한 崔茂宣의 후예 이리라.
그의 아버지는 4형제중 막내 이다, 물려받을 전답이 없는 그는, 신천지를 찾아 해매다 자인현의 왕산골인 고란 마을을 발견하고,21살인 1546년, 영천에서 고란으로 이거(移居)하였다. 첫째 시작한것은 엄청난 토목공사, "흐르는 물을 가두는 못" 을 3개나 막았던 것이다. 하늘만 처다보는 천수답(天水畓)을 수리답(水利畓)으로 개간하여, 고란을 부농, 부촌(富農 富村)을 일구 었던 것이다.
崔鐵堅(蘭圃公)이 고란으로 입향(入鄕)한지 46년째인 1592년에 임란이 터젔다. 그는 67세, 고령임에도 불구하고,손자인 인수(仁壽),증손자인 준립(竣立)을 대동하고, 의병을 일으켜 영천의 의병장 권용수와 함께 영천,경주에서 왜병과 싸웠고,특히 이화산성 싸움에서 큰 공을 세웠으며,뒤에 전라도사가 되어, 전주를 방위한 임란공신이며,조손(祖孫) 셋이 선무원종훈(宣武原從勳)의 훈장을 받았다는.서애 유성룡의 (징비록徵秕錄)의 기록 이다,
증손 준립는 임란중 무과(武科)에 등극한 군관 이다.
난포공은 버슬아치가 살았다는 상작골(上爵골)의 언덕에 사청등(射廳嶝)이란 궁도장(弓道場)을 차려놓고,고란의 담양(潭陽) 田씨,곡신의 흥해 최씨 崔八凱,崔八元 형제 등과 , 궁술을 익혔단다. 담양 田씨,최팔개 형제도 의병으로 참전한 임란공신이란다.
일제는 임진왜란의 의병장인 최쳘견의, 일본에 불리한 행적과 전적의 기록을 발본색원(拔本塞源)하고저, 관란서원의 장서를 싹 쓰리해 갖고 갔다는 동내 어르신의 증언이다.이로서 서원의 역사와, 고란의 개척사도 사라졌다.
용산은 화산,용산성은 청소년 수련장
매봉에서 북쪽으로 정상부는 넓은 평원으로,그대로 직선 400m의 운동장이며,수백의 천막도 칠수있는 넓비란다, 해방후 북쪽 그릉지(丘陵地)의 "용산성"의 유적지를 묶어,청소년 야영지로 개발했단다. 이 평원은 화산이 폭팔한 분화구(噴火口) 이리라, 내 보통학교 시절, 여기는 고학년의 소풍코스 였다.동내 젊은이는 정월 대보름 달집을 여기 정상에서 태운다. 나는 형따라 간적이 있고, 친구 셋이서 간적도 있다.원래 정상은 푸른 소나무 일색이었는데,10년만에 가니 낙엽수 일섹으로 변모해, 경개선이 사라져 아쉬웠다
매봉 아래로 용암이 분출하여 흘러내려오다 Y형의 넓은 "너덜겅"을 이루고 있는데, 전설로는 아낙네가 치마에 돌을 싸서 가다가 치마기 찌저져서,돌이 흘러내린 것이 란다. 돌은 대대 손손 온돌 구들장으로 팔려나갔으나. 너덜겅의 돌은 아직도 그 대로 이다.
용산은 산정(山頂)의 넓는 마당과,용암의 너덜겅을 보아 구색을 갗운 , 작은 화산이리라,
용산의 반경 약 4 km 이내의, 남쪽 대천(大川) 에 청도온천이, 관란천 하류 "하대"에 경산온천이,해방후 개발되것으로 보아도 더욱 그렇다.
무지개샘, 암자, 벗나무
물이 일년 내내 마르지 않는 무지개 샘이 있다, 무지개는 여기에서 쏫아 오른다고 하기에, 무지게가 떳다하면 우린 언제나 그 샘부터 먼저 살핀다.
옛날에 그자리에 암자(庵子)가 있었는데,빈대가 하도 많아, 빈대를 잡을려다 절을 태워 버렸다는 전설이다, 사실 해방후 미군이 DDT라는 살충제를 갖고오기 까지는, 밤 마다 누구나 빈대와의 전쟁으로 잠을 설첬다.
그 무지게샘 가에는 벗나무 한구루가 있었는데, 내 보통학교 저 학년 때만 해도,봄에 꽃을 피워주고,무지개샘의 위치도 알려줬는데, 어느 누가 도끼 자루로 쓸려고, 벗 나무를 베 버렸다는 후문이다. 우린 학교를 오가면서, 봄이면 그 자식을 원망했다.그 이끼 낀 무지개 샘도,몇번 가보았다.
동제 (洞祭)
용산에는 동내를 수호하는 산신령이 계시는데,그는 천년묵은 호랑이라고 했다.가뭄이 들면 무지개 샘에서 기우제를 지낸다.그리고
가뭄은 신성한 산에 누가 도둑묘를 썻기 때문이라고 믿고, 동민이 살기충천(殺氣衝天)하여, 꼭갱이를 들고, 산을 삿삿히 뒤진다.
동제는 해마다 음력 정월 대보름날 고란 숲에서 지낸다.제주로 추대받으면 일년내내 몸을 단정히 하고, 관혼상제(冠婚喪祭)에의 출입을 엄금한다,동제날은 고란숲에서 목욕제계(沐浴齊戒)한다.
2002년 11월, 묘사로 고향가니,용산의 동남부가 벌거숭이가 됬더라.산불이 났느냐 하니,봄에 풀(도토리 나무)을 경매했다는 것이다.
엤날은 모자리,논 밑거름으로 봄에 참나무,굴밤나무 풀을 벳는데, 지금은 큰 나무로 키워서 "표고버섯 대목"으로 공매한단다.
그래서일가 그해 동내 에 거주하는 동민이 질병이나 사고로,또는 일가친척이 고향 오가다 교통사고로 7명 이나 횡사(橫死)했다는 것이다.우리집 제실을 20여년이나 관리하던 "徐氏"도 경운기 사고로 직사했다는 슯은 소식이 었다.
해서 동내는 동제 (洞祭)를 다시 크게 지네,山神 과 地神에게 사죄(謝罪)하고,횡사한 怨魂을 달렜더니 불행의 진행은 멈첬단다.
산지에 참나무를 벤다고,별도로 告由祭를 지내지 아니 했을가? 아니했으면 산신이 대노할 수 밖에.
안동댐으로 가는길 한복판에 수백년된 당상목이 한구루 홀로 서있다,이를 벨려는 사람이 안 나타나,나무를 놔두고 ,길을 양쪽으로 냈다는 것이다.
일본,나라지방의 다가마츠 츠가(高松古墳)을,20세기 후기에 발굴한 사람중 3명이 3년안에 알수없는 병으로 죽어갔단다.
종교는 토속신앙을 미신(迷信)으로 타기(唾棄) 하는데,더더욱 일제는 조선민족의 주체성을 말살(抹殺)하고저 ,토속신앙을 야만행위로 배격했었다.
풍수학에는 " 山生人 水生財" 이라 했다. 용산은 나의 어버이이고,스승이고 나의 신앙이다.
솟을 대문, 남포고댁,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0호
*** 용인 민속촌의 솟을 대문은 16회 송재식 동문의 "합천 송씨의 종가댁, 낙향한 송시열(1607-1689)의 후예" 의 고택을 헐어 이전(移轉 ) 한 것이라고,고인이 생전에 술회했었다.
첫댓글 좋은 영상,글에 잘 쉬었 다 갑니다.
내내 안강하세요..
역사가 깃든 고향산천이군요. 사진과 글 잘보았습니다. 아름다워 보입니다.
좋은 글, 사진 잘보고 배웁니다. 늘 선배님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