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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비공개 입니다
메인스토리 2009년 9월호
진실은 최고의 열쇠 - 작가 윤후명
엉겅퀴꽃 같이 심성이 고우나 엉겅퀴처럼 바람에 흔들리며 살아온 작가가 있다. 그래서 세상에 대한 가시를 세우고 그 많은 날들을 야생으로 살아왔나보다. 그러면서 그는 부러지지 않으려고, 자신만의 색깔을 내려고 노력해왔다. 그의 얼굴은 엉겅퀴꽃처럼 불그레하다. 요즘은 건강이 나빠져서 술을 못 드신다고 하지만 그의 얼굴이 보랏빛으로 보이는 것은 건강 때문만은 아닌 것 같다. 아름다운 마음만을 견지하다보면 얼굴에 꽃이 피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고, 아름다움 중에서도 장미꽃이나 국화처럼 조화로운 아름다움이 아니라 질곡의 아름다움에서 나타나는 엉겅퀴꽃 같은 선생의 모습은 선생이 살아오신 날들에 대한 보상으로 보인다. 엉겅퀴꽃 같은 그의 내면은 아름다움과 사람다움과 진실함으로 채워져 그 관다발을 통해 보랏빛 꽃을 피워낸다. 그러나 그의 외부는 투철한 언어와 작가정신으로 엉겅퀴 가시처럼 무장되어 있다. 사람의 마음을 자유자재로 그리고, 표현해내시는 윤후명 선생은 신이 주신 최고의 능력을 가지신 분이다.
인사동의 한 음식점 시인에서 만나기로 했으나 공교롭게도 그날은 식당이 휴가 중이었다. 앞집에서는 전어를 굽는 냄새가 멀리 퍼지고 정오가 넘어가는 시각이니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서인지 회가 동한다. 지성찬 주간선생은 윤후명 선생께 앞 집 2층으로 올라오시라고 전화를 넣은 후 2층에 올라가 좌정하고 우리는 식탁 앞에 앉으려니 잠시 후 선생 특유의 싱거운 웃음을 띠고 계단을 올라오신다. 시원한 에어컨에 생태찌개에 밥 한 공기까지 든든히 먹었으니 몇 시간을 이야기해도 좋겠다. 그런데 선생의 약속이 있어 아쉽다. 그럼 선생과의 취재내용을 호칭을 생략한 채 대화체 형식으로 싣는다.
김순진 : 굉장히 바쁘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늘 이렇게 저희 월간 스토리문학을 위해서 시간을 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그러면 여쭙겠습니다. 선생님의 문학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화두는 무엇인가요? 소설이야기 먼저 여쭙겠습니다.
윤후명 : 나는 문학이 내게 준 약속의 반쪽 거울을 품에 안고, 소설을 지도삼아 먼 길을 나서기로 하였습니다. 소설을 시작하면서 나는 ‘늙어서도 젊어 있는 삶’의 자세를 언제까지나 지키겠다는 약속했습니다. 나와의 약속을 지키는 일, 그것이 내 소설 쓰기라고 나는 거듭 서약했지요. 그 가운데 내 오랜 화두가 올연히 똬리를 틀고 있습니다. “진실이란 무엇일까?” 이 질문은 문학을 시작하면서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는 물음이고 제 문학 속에 몰래몰래 조금씩 풀어 넣는 나만의 비방 같은 것입니다.
지성찬 : 선생님 소설에서는 자주 나가 등장하던데요. 무슨 이유인가요?
윤후명: 네, 저는 주로 ‘나’를 그립니다. 나의 소설 속의 주인공은 거의 예외 없이 1인칭 ‘나’가 나오지요. 『삼국유사 읽는 호텔』도 저로 보아도 무방할 주인공 ‘나’가 등장합니다. 저는 대학시절(연세대 철학과)부터 <삼국유사>에 푹 빠져있었어요. 작가가 된 후로도 가야의 수로왕과 인도에서 왔다는 황후 허황옥의 로맨스가 담긴 현장인 옛 가야 땅 김해를 여러 번 찾았지요. 답답한 현실을 넘어 아득한 시간과 공간의 저 너머를 보기 위해서랄까요. 이 소설에는 우리 노래의 보고(寶庫)인 『삼국유사』를 통해 서구의 근대적 기획에 닫히고 다친 우리의 삶을 어떻게 위무하고 어떤 새로운 전망을 보여줄 것인가 하는 고민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어요. 이는 우리 사회에서 집단주의가 매우 승한 반면 개인의 탐구가 상당히 부족하다고 느낀데 기인합니다.
김순진 : 어떻게 해서 선생님만의 문학세계를 발견하시고 소설을 본격적으로 쓰게 되셨나요?
윤후명 : 대학 시절, 도대체 소설은 어떻게 쓰는 것인가? 소설가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내가 지금 쓰는 게 소설인가? 알 수 없었습니다. 내 삶에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시적 방법론이 문제인지도 몰랐습니다. 그렇다고 그냥 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습니다. 눈물이 나도록 꾀죄죄한 몰골만 눈에 보였습니다. 거의 사력을 다해 밤을 지새우며 글을 썼지만 결과는 뜻대로 글이 되지 않았습니다. 술도 삼가고 있던 나는 달동네 언덕 아래 허름한 식당으로 내려가 혼자 탄식하며 막걸리를 마셨습니다. 새는커녕 ‘곤달걀’의 내가 그려졌습니다. 그렇다면 나는 소설을 쓸 수 없는가? 소설가가 되려 하는 것 자체가 오산인가? 아무런 해답을 얻을 수 없었습니다. “네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를 써라.” 나는 이 금언을 뒷전에 놓고 그야말로 ‘소설’을 쓰고자 하였습니다. “소설가는 소설을 쓰려 해서는 안 된다. 오직 진실을 쓰려 해야 한다.”는 교훈은 충분했습니다. 나는 내가 가장 잘 아는 이야기가 무엇인지 곰곰 뒤져보았어요. 그것은 내가 살아온 역정 속에 있을 것이었습니다. 좁게는 내 개인 이야기, 혹은 넓게는 내 집안 이야기. 여기에 소설가는 추억을 파먹고 산다는 말이 적용된다 하겠습니다. 그러므로 소설가에게 경험이란 금맥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나는 내 고향의 이야기를 더듬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에는 태어남이 있었고, 전쟁이 있었고, 만남과 헤어짐이 있었습니다. 죽음이 있었습니다. 사랑과 미움이 있었고, 오랜 상처가 있었습니다. 과거와 현재, 시간과 공간이 얽혀 있었습니다. 치유와 화해가 있었습니다. 고향의 큰 산과 큰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습니다. 그때서야 나는 꼭 써야만 할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소설가가 되지 못 하더라도 꼭 써야만 할 것이었습니다. 삶을 전제로 한 어김없는 약속으로 쓰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높새의 집」과 「산역山役」이라는 두 편의 단편소설을 완성했습니다. 첫 문장을 쓰는데, 벌써 붙는 맛이 달랐지요. 이상하게도 이건 ‘필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나는 서두르지 않고 원고지 칸칸에 꼭꼭 볼펜 자국을 눌러 나갔습니다.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 당선작인 「산역山役」은 전쟁과 함께 내 고향 큰 산과 큰 바다에 얽힌 어떤 사랑의 운명의 기록입니다. 나의 태어남을 배경으로 삶의 어느 편린에 스며있는, 고래의 부패한 내장에서 얻을 수 있는 용연향(龍涎香) 같은 사랑 이야기, 「산역山役」 작품을 쓰고 나서 나는 허청거리는 발걸음으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막걸리집으로 걸어 내려갔습니다.
지성찬 : 언제부터 시를 쓰게 되셨나요. 문학을 하게 된 구체적인 동기가 있었나요?
윤후명 : 처음 시랍시고 일기장에 적어놓곤 한 것은 중학교 때였습니다. 5·16군사혁명이 나고 군인이었던 아버지가 혁명 검찰관이 되어 중3 때 서울로 올라옴으로써 내 서울생활은 시작되었는데, 그건 견디기 어려운 혼돈 속에 내팽개쳐진 것이기도 했지요. 1946년에 강원도 강릉에서 태어나서 여덟 살 때 고향을 떠난 것도 군인가족이 된 때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거의 매년 대전, 춘천, 대구, 양주, 부산 등등 여러 곳을 옮겨 다니며 살다가 드디어 서울에 정착한 것이지요. 새로운 생활의 혼돈은 ‘홀로 있음’을 강조하여, 나는 갑자기 내 존재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내 손에 들려진 게 학생잡지 『학원』이었어요. 내 또래의 아이들이 시도 쓰고 산문도 써서 잡지에 발표하고 있다는 사실에 나는 놀랐다. 그리하여 나는 드디어 그 대열에 동참하게 되었지만, 밤마다 토해 놓는 ‘시’는 시가 아니라 그저 보잘것없는 넋두리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요컨대 산문을 행만 갈라놓는 꼴이지 시가 아닌 것이었어요.
그러면서 용산고등학교에 진학한 나는 이미 문학에 깊이 빠져 있었습니다. 나는 학업과는 점점 담을 쌓아갔고, 오로지 글쓰기에만 매달려 밤을 밝히기 일쑤였습니다. 주된 발표 무대는 역시 『학원』이었지요.
김순진 : 학생 때부터 문학을 좋아하셨으면 주로 어떤 시집을 읽으셨나요? 그리고 어떤 분들에게 영향을 받으셨나요? 학생 때 이야기 좀 더 해주세요.
윤후명 : 『학원』에 글이 실리는 전국의 문학 소년소녀들과 편지를 나누며 사귀게 되었어요. 박목월 시인의 「보랏빛 소묘」를 읽으며 ‘우리가 시로 병들었더니, 시로 다시 서게 되었구나’ 하는 구절과 ‘진실해야 한다’는 구절이 가슴에 멍울져서, ‘문학은 진실’이라는 명제에 사로잡혀 있던 시기이기도 했습니다. “진실이란 무엇일까?” 알 수 없는 이 절체절명의 의문을 붙들고 나는 학교를 건성으로 오갔습니다. 산문이나 소설보다는 시에 경도되어 시만이 가장 진실하고 순수하고 위대한 것이라는 믿음에 빠진 나날이었지요. 조지훈·박목월·박두진, 이른바 청록바 시인들의 『청록집』은 나에게 있어서 경전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뒤에 서정주 시인의 『화사집』, 외국 시인들의 시가 뒤따랐지요. 고등학교 2학년 때 성균관대학교의 전국 고등학생 백일장에 나가 장원상을 받은 것을 시작으로, 동국대 백일장을 비롯한 여러 백일장을 거치면서 2학년과 3학년 연거푸 『학원』 문학상을 받게 되기까지 내 수상경력은 자못 화려한 것이었습니다. 뒷날 시인이 되는 임정남·정희성을 비롯하여 연출가가 되는 채윤일도 시를 쓰는 선배였습니다. 3학년이 되어 남들은 입시에 매달려 두툼한 책가방을 힘겹게 들고 다닐 때도 나는 홀쭉한 책가방을 끼고 간신히 학교를 오갔지요. 대학에 갈 생각도 구태여 없었고 머릿속에 차 있는 건 문학, 시뿐이었습니다. 학교가 생긴 이래 첫째가는 지각생이라고 선생님으로부터 늘 야단을 맞으면서도, 이왕 늦은 바에야, 하고 포기하는 마음에 학교 앞 시장에서 막걸리 한 사발을 들이켜고 등교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획일적인 학교 교육에 진저리를 치던, 그야말로 ‘지옥에서 보낸 한철’이었지요. 하하하.(멋쩍은 웃음을 지으신다).
지성찬 : 선생님은 시인으로 출발하셨지만 지금은 소설가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소설을 쓰시게 된 동기는 무엇인가요?
윤후명 : 네. 그로부터 2년 뒤, <칠십년대>라는 시 동인을 결성하여 새로운 시를 선보이기까지 나는 방황을 계속했습니다. 동인은 나를 비롯하여 강은교, 김형영, 석지현, 임정남, 정희성 등이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하고 출판사에 다니며, 나름대로의 언어와 세계를 갖추었다고 여긴 시들을 발표함으로써 나는 내 안에 시인을 진정으로 맞이하고 있다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는 첫 시집 <명궁(名弓)>에 고스란히 담겨 있어요. 1977년 첫 시집을 내고 나서 막다른 골목으로 내닫게 된 나는 이듬해 더욱 악전고투하고 있었지요. 문학에 대한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고, 나는 점점 그악스러워졌습니다. 위기를 스스로 불렀는지도 모릅니다. 다른 길을 뚫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생활 기반을 깡그리 잃고서야, 홀로 된 그 해 여름, 나는 소설가가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어지러운 상황, 캄캄한 상황에서 달리 돌파구는 없어 보였습니다. 막다른 골목에서 되돌아 나오자면 새로운 삶을 바라보아야 했습니다. 새는 알을 깨고 나오지 않으면 안 된다. 하기야 낯간지러운 아포리즘으로 이겨나가기엔 현장은 너무 각박했습니다. 그러므로 알이고 새고 간에, 이른바 죽기 아니면 살기였지요. 그해 안으로 신춘문예에 소설이 당선되지 못 하면 이승에 하직을 고하리라 마음먹을 수밖에 없도록 나는 몰려 있었습니다.
김순진 : 지난 달 메인스토리에 성춘복 선생님을 취재했습니다만 그 선생님처럼 윤후명 선생님은 문인으로서 그림을 잘 그리시는 분으로 널리 알려져 있습니다. 최근에는 ‘문학그림집’을 내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림 이야기도 좀 해주세요.
윤후명 :예, 그러지 않아도 오늘 제가 선물로 드리려고 『지심도 사랑을 품다』라는 일명 ‘문학그림집’을 가져왔습니다. 이 책(보여주시며)은 제 그림을 비롯하여 제가 쓴 소설, 시, 동화, 에세이, 그리고 화가들이 작업한 그림까지 함께 실려 있습니다. 지심도는 경남 거제도 옆에 붙은 작은 섬으로 83년 여름, 한 기업의 초대로 처음 거제도에 갔다가 원시림을 품고 있던 지심도를 발견했습니다. 지심(只心), 다만 마음뿐이란 그 뜻이 참 멋지지요. 거기 매혹된 뒤로 무슨 일을 할 때면 지심도를 생각하면서 마음을 다잡곤 합니다. 지금도 기회가 될 때마다 그곳을 찾습니다. 하지만 개발의 손이 뻗치면서 지심도도 이제는 예전 같지 않습니다. 그곳에는 정말 마음의 기도가 필요한 사람만 갔으면 했는데요. 제가 쓴 동화 「세상에서 제일 예쁜 꽃」은 엉겅퀴꽃 이야기입니다. 지난 3월 22일 타개한 화가 김점선씨의 요청으로 쓴 작품이지요. 2007년쯤 같이 작업을 하자고 하던 걸 차일피일 미뤘는데, 그새 건강이 안 좋아졌다는 소식이 들리더군요. 부랴부랴 작업을 시작했지만, 그는 병상에서 일어나지 못하더군요. 민정기, 이인, 최석운, 한생곤 씨 등 국내 화가 16명이 제 작품을 모티브로 그린 작품 40여점이 실려 있습니다.
지성찬 : 선생님은 자화상에서 섬과 새와 나를 대비되게 그리신 걸로 알고 있습니다. 자화상은 선생님께 어떤 의미입니다.
윤후명 : 처음에는 독도를 그렸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독도와 그 하늘에 날고 있는 새를 그렸습니다. 그래서 소설집 ‘새의 말을 듣다’를 낼 때, 느닷없이 담당자에게 들이밀고 표지에 넣겠다고 우겼지요. 내 책에 내 그림을 넣으려는 욕망은 실상 꽤 오래 전부터 품어왔었습니다. 그 새는 두 봉우리 위를 날며 알타이 말로써 우리에게 뜻을 전하는 새였습니다. 그렇게 독도를 우리 의식 속에 혼연일체로 불어넣기 위해 새는 전령사 혹은 무격의 모습이 되었습니다. 나로서는 어려운 접근 방법이었지만, 그건 새의 추상성이 신화에 닿아 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습니다. 그림을 꿈꿔온 지 여러 해 만에 마침내 다가갈 수 있었던 길……. 그 이미지는 그로부터 달리 응용되어 내 하늘의 여기저기에 나타납니다. 내 사진을 볼 때마다 ‘이게 나로구나’ 하고 들여다봅니다. 거울을 볼 때도 그런 마음이지요. 때로는 일부러 건성으로 스쳐 볼 경우도 많습니다. 내 이목구비며 얼굴 모양을 자세히 확인하고 싶지 않은 경우가 많은 것이지요. 나의 진면목을 바로 들여다볼 필요가 없어서는 결코 아닙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와 실제의 나 사이에는 건너지 못할 강이 있습니다. 그림도 그렇고 문학도 그렇고 아마추어 때는 쉽고 재미있지만, 점점 그것을 알아가다 보면 생각이 많아지고, 고뇌도 생기게 마련이라 만만치가 않아요. 하지만 그림에는 특별한 욕심이 없어서 그냥 나 좋은 대로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세계가 있겠다 싶지요. 특히 문학과 미술은 비슷한 것 같기도 해요. 문학은 글로 쓰고, 그림은 그려서 보여주는 것이잖아요. 그림은 심상을 그리는데, 실제의 나는 피안을 그리고 있을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두려움에 떨면서 나에게 접근하려 합니다. 그러나 내 실상을 곧이곧대로 파악하고 노출시키는 데는 실패하지요. 내가 그리는 나는 애초에 내가 아닌 것이에요. 관념으로서의 나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러니, 실패가 아니라 이미 마음먹은 그대로인 것입니다. 하하하.(작가는 모처럼 맛있는 웃음을 웃으신다.)
김순진 : 부모님은 어떤 분이었나요?
앞서 말한 바와 같이 아버지는 법조인이셨습니다. 아버지는 사법고시 합격생을 극히 적게 뽑던 예전, 겨우 6명 중 한 명으로 입신하여, 혁명 검찰관과 육군 고등검찰부장을 역임한 분이었지요. 어느 어두운 날 밤,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를 불러 앉혔습니다. 그날따라 전기가 나가서 대신 촛불이 방안의 어둠을 물리고 있었지요. 나는 이미 무슨 말이 나올지 짐작하고 있었습니다. 벌써 여러 날째, 나의 대학 진학 문제 때문에 아버지는 머리가 무거운 모양이었어요. “자, 이제 마지막 결정을 해야 해.” 아버지는 결연히 입을 여셨습니다. 중등학교 때는 꽤 성적이 좋던 나는 고등학교에서 학년이 높아갈수록 형편없어졌습니다. 성적이 나쁘면 거기에 맞는 대학을 택하면 되는 것이었는데 아버지의 뜻(법관이 되는 것)에 따르지 않고 나는 문학을 하겠다는 뜻을 굽히지 않고 있었습니다. 여러 입상 경력으로 이미 문학에 병든 경력을 업고서 말입니다. 아버지는 당연히 법을 공부하기를 무엇보다 바라고 있었구요. 나는 “법은 인간을 구속하는 거고, 문학은 인간을 해방하는 거예요.”라고 아버지께 항변하듯 말했습니다. 고3 녀석이 이 무슨 가당찮은 말인가요. 어떠한 조언이나 회유도 소용이 없었습니다. 나는 그렇게 아버지의 믿음을 저버렸는데 아버지는 내가 어엿한 법관이 아니라 몹쓸 소설가가 되던 그 해에 눈을 감았습니다.
지성찬 : 그런데 대학에서는 철학을 하셨다면서요? 왜 문학을 전공하지 않으셨나요?
윤후명 : 아버지와의 대립으로 나는 엉뚱하게 연세대 철학과에 들어가게 되었어요. 그것은 나의 문학과 아버지의 법학이 양보하지 않아 절충을 본 길이었습니다. 철들며 손에 든 문학책. 거의 누구나 그랬을 것처럼 나도 문학, 그중에서도 소설이었습니다. 한국 소설보다는 외국 소설이었다고 기억됩니다. 아버지가 사다준 다이제스트 세계 문학 전집을 펼치고 불쌍하게 낑낑거렸던 기억도 새롭습니다. 처음으로 무언가 문학을 의식하며 읽은 게 『전후문제작품집』이었습니다. 그전까지는 그냥 문학의 본질이야 어쨌든 어떤 분위기에 아롱젖은, 나름대로의 감상적 책읽기였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드디어 나는 시를 쓰기 시작하고 있었고, 위 전집 가운데 『한국전후문제시집』과 『소설집』은 새로운 귀감이 되었습니다. 세계 명작에서 한국 것으로의 회귀를 가능케 한 일이었습니다. 시를 향한 열정은 대학에 들어가서 거의 절정에 이르렀지요.『청록집』의 시인들, 서정주, 김춘수, 김수영, 외국 시인들, 가리지 않고 섭렵하던 무렵이었어요. 박목월 선생님의 국문학과 강의실과 서라벌 예대의 서정주 선생님 강의실까지 나는 시를 찾아 순례했습니다. 그리고 2학년을 마치면서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당선됨으로써 급기야 시인이 되었습니다.
지성찬 : 대단하십니다. 선생님, 그러면 대학 2학년 때 신춘문예에 당선하신 거네요. 어떤 책을 주로 읽으셨나요?
시에 빠져 있던 대학 시절, 자의반타의반으로 읽지 않으면 안 되었던 철학 책들. 서양의 플라톤과 중국의 장자, 맹자 강독은 또 하나의 다른 세계였습니다. 얼마 전에 무슨 일로 학교에 가서 떼어본 성적증명서에서, 나는 내가 이렇게 많은 과목을 이수했던가, 하고 놀란 적이 있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제법 많은 철학 책들이 눈에 어른거렸습니다. 을유문화사의 『세계사상전집』과 몽테뉴의 『수상록』을 차례로 읽던 어느 날, 데카르트가 화장실에 가서 깨달았다는 COGITO ERGO SUM의 『방법서설』에 그만 경도된 그날을 잊지 못합니다. 그토록 고대해온 시인이 되었으나, 나는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닫고 여간 당혹스럽지 않았습니다. 내게는 보여줄 언어도, 세계도 없었으니까요. 갈 길이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나는 단지 문학에 뜻을 둔 문학도일 뿐이었지요. 어쨌든 신춘문예 당선이 아버지에게 실망을 안겨준 만큼 내게는 반성을 안겨주었다는 점에서 나는 새로운 출발점에 서게 된 것이었다.
김순진 : 이야기를 좀 바꾸겠습니다. 사모님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나요? 들리는 에피소드가 대단하던데요.
1991년 어느 날, 민족문학작가회의 주선으로 충무 통영에 있는 섬에서 열린 문학모임 자리에서였습니다. 그 자리에 지금 집사람이 저를 쫓아왔습니다. 독자로서 참석한 자리였지만, 이미 선생에게 애틋한 마음이 있어서였을 겁니다. 2박3일 일정이었는데 첫날부터 소설가 이문열 선생과 바둑을 두고 술을 마시다 취중에 이문열 선생이 “살고 싶다면 저 여자와 결혼하라”는 말을 듣고 그렇게 하겠다고 했습니다. 살고 싶은 마음이야 죽는 순간까지 인간을 끌어올리는 밧줄과 같은 것이지요. 그리고 다음날 아침, 술에 취해 쓰러져 있는데 누가 깨우면서 결혼식을 하러 가자고 했습니다. 남의 결혼식인 줄 알았어요. 그렇게 결혼식을 치루었습니다. 연장자인 이호철 선생이 주례를 해주셨고, 이근배 시인이 사회를, 송영 선생이 축가를 불러주었습니다. 민족문학 창간기념 자리에서 즉석으로 진행된 결혼식은 마침 취재거리를 찾던 KBS 지국에서 취재해 ‘전국은 지금’ 프로그램에 전국으로 생중계되었습니다. 그런데 정작 결혼을 주선한 이문열 선생은 결혼식장 한구석에서 술에 취해서 이불을 돌돌 말아 얼굴을 가린 채 자고 있었습니다. 그때 김주영 선생은 저의 결혼식 광경을 보고 건물 기둥을 붙잡고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마도 저의 파란만장한 삶이 여기에서 제발 안정을 찾기를 바라는 기도의 눈물이었을 겁니다. 아무런 준비가 없었지만, 마침 동행한 기자가 아침에 통영으로 나가 금반지를 사와서 부인의 손가락을 울지 않게 했으니 그때가 1991년 여름이었습니다. 그렇게 어려운 상황에서도 저를 믿고 저와 결혼해준 아내에게 이 자리를 빌어서 정말 고맙다는 말을 전합니다.
지성찬 : 정말 귀하고도 아름다운 인연이네요. 정신병원에 가신 적도 있으시다면서요?
윤후명 : 결혼 전, 살아 있음은 지독한 인연의 연속이었습니다. 안산의 작은 방에서 라면만 먹고 살았던 적이 있습니다. 일을 안 하니 당연히 돈이 없었지만, 그것이 불편하지 않았습니다. 정확하게는, 라면만 먹은 것이 아니라 그 라면에 들에서 뜯어온 풀을 넣어 먹고 살았지요. 그리고 백조 담배, 일주일에 서너 번 라면에 넣어 먹던 달걀로 그 시절을 표현할 수 있습니다. 생활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어요. 들에 나가면 먹을 게 많아요. 그걸 먹으면 되는 거지요. 라면에 들풀을 뜯어 넣고 끓여 먹던 시절이에요. 그때 시 쓰는 최승자씨가 양파를 같이 먹으면 오래 살 거라고 하더군요. 오래 살고 싶지 않아 양파는 안 넣었지만 풀은 넣어 먹었어요. 들이 가르쳐준 거지요. 그리고 술병이 늘 곁에 있었지요. 그때 만난 제 처가 이미 술 중독 상태인 선생을 서울대 정신병원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소주병을 든 채 그녀를 따라가서 의사를 만났는데, 그런 상태로는 진료를 받을 수 없다고 해서 아래층에 있는 식당으로 내려가 있다 다시 올라갔지요. 그리고 검진을 한다고 해서 따라갔는데, 등 뒤로 철커덕 문 닫히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직감적으로 이상한 생각이 들었는데 정신병동에 입원한 것이었습니다. 그 시절에 받은 정신과 치료는 한마디로 ‘순응’을 배우는 것이었습니다. 이걸 견뎌야 한다는 생각으로 살아내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퇴원하였습니다. 정신병원은 감옥보다 더 고독한 곳입니다. 이 시절 이야기는「별까지 우리가」에 그렸고 이 작품으로 현대문학상을 받았습니다.
김순진 : 정말 대단하신 결혼담이고 인생담입니다. 결국 희망의 끈을 놓징 않으면 꼭 이룬다는 말씀이군요. 정말 귀한 말씀 해주셔서 스토리문학 독자들과 신인작가들에게 좋은 귀감이 될 것 같습니다. 귀한 시간 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해서 취재는 끝났다. 이제 우리 문단에서 윤후명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의 언어는 때론 미세하게 흩날리는 흙먼지의 부드러움보다 세밀하고 때론 거대한 이과수폭포수에서 쏟아져 내리는 폭포의 위력보다도 거세게 가슴을 뚫고 사람을 혼미하게 만든다. 겪지 않고도 울게 하고, 아프게 한다. 그의 소설을 읽노라면 첫 장을 넘김과 동시에 우리는 그가 펼치는 마술에 마음을 빼앗기고 만다. 그의 그러한 필력은 어디서 출발하는 것일까? 물론 경험이다. 세상에는 많은 시련이 거미줄을 펼치고 인간들을 잡아들인다. 우리는 자의든 타의든 그 시련의 거미집에 걸려 허덕이지만, 어떤 상황에서라도 타개책과 안정을 찾아 거미줄을 흔들며 즐길 수 있어야 하는데, 윤후명 작가는 극도의 시련에서도 한번 마음먹은 문학의 틀을 벗어나지 않고 최선을 다하여 살아왔기 때문에 오늘이 있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그 내면에는 물론 진실함이 있어야 한다. 윤후명 선생이 늘 가슴에 두고 화자로 삼는 것, 진실은 이 세상을 열고, 문제점을 해결하며, 새로운 세상으로 운반해주는 최고의 열쇠인 셈이다.
먼발치에서는 여러 번 뵈었으나 직접 만난 적이 없는 윤후명 작가를 만난 다는 것은 시와 소설을 함께 쓰고 있는 필자로서는 정말 가슴 설레는 일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선생은 시, 소설, 수필, 동화 등을 두루 섭렵하시며 게다가 그림까지 잘 그리시는 분이지 않는가? 평소에 예술은 모두 한 가지여서 음악을 뺀 나머지 예술은 문학인이라면 모두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해왔고 해야 한다고 믿어왔다. 그런 생각이 점점 더 내 머릿속을 채워갈 즈음에 윤후명 선생을 만난다는 것은 결국 문학이란 진실함만 있으면 무엇이든 가능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또 윤후명 선생의 말씀처럼 자화상을 아무리 잘못 그렸다고 할지라도 이미 그려졌다면 그것은 실패가 아니라는 말씀에 용기를 갖게 된다. 윤후명 작가를 소설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으나 시인으로 알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시인으로 먼저 신춘문예에 등단하였는데도 말이다. 그래서 소설책은 직접 구입해보라고 권하는 뜻에서 이번호에서는 윤후명 작가의 시 3편을 싣는다.
석화石化 외 2편
윤후명
속에 돌을 넣고
밤잠도 없이 가는가
잊었던 설움은 황혼에 뭍혀
서산西山에 휘휘 감기고
밤길의 푸르름 속에서도
지친 몸을 일으키는
각별한 어둠의 칼날
눈물은 눈물대로 건곤乾坤을 적시고
노래가 홀로 걸어
가장 높이 걸어올라 쉬는 곳에
옛일은 즐거움으로
귓전을 간지럽힌다.
마음이 홀로 되지 않으면
어두운 날로부터 가시가 돋는
홀로 가는 사람이여
돌로 여물리라
명궁名弓
잡목雜木 숲은 무덤처럼
어둠의 둘레를 무지개로 감고
별빛을 모아 물결의 장단에 따라
바람이 하늘거렸다.
날새의 제일 유심히 반짝이는
두 눈깔의 꿰뚫음에
공명共鳴하여 하룻밤을 흔들린 이의
사무치는 뜬 눈의 웃음
드넓고 광포해라,
새가 온 들을 쥐어 채고
한 기운으로 푸드드득 오를 때
활짝 당겨 개인 먼오금
숲과 들을 벗어나 휘달려
그는 죽음의 사랑에 접근한다
곰취의 사랑
눈 속에서도 싹을 내는 곰취
앉은 부채라고도 부른다
겨울잠에서 갓 갠 곰이
어질어질 허기져 뜯어먹고
첫 기운 차린다는
내 고향 태백산맥 응달의 고취 여린 잎
동상 걸려 얼음 박힌 뿌리에
솜이불처럼 덮이는 눈
그래서 곰취는 싹을 낸다
먹거리 없는 그때 뜯어먹으라고
어서 뜯어먹고 힘내라고
파릇파릇 겨울 싹을 낸다
눈 오는 겨울 밤 나도 한 포기 곰취이고 싶다
누군가에게 죄 뜯어먹혀 힘을 내 줄 풀
윤후명 연보
1946년. 강원도 강릉에서 출생함.
1965년. 용산고등학교 졸업, 연세대학교 철학과 입학
1967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 「빙하(氷河)의 새」 당선.
<70년대>의 창간 동인으로 활동하면서 시인에의 길에 본격적으로 들어섬.
1969년. 연세대학교 졸업.
1977년. 첫시집 『명궁名弓』(문학과지성사) 출간.
1979년. <한국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산역山役」당선.
1980년. 소설 동인지 <작가>의 창간 동인이 되었다.
1983년. 중편소설 「돈황敦煌의 사랑」으로 녹원문학상 수상.
첫 소설집 『돈황敦煌의 사랑』 (문학과지성사) 출간.
1984년. 단편소설 「누란樓蘭」(뒤에 「누란의 사랑」으로 개작)으로 소설문학 작품상 수상.
1985년. 단편소설「엉겅퀴꽃」과 「투구게」를 중편소설 「섬」으로 개작, 한국일보 문학상 수상.
소설집『부활하는 새』(문학과지성사) 출간.
1986년. 단편소설「팔색조」(소설집에는 「새의 초상」으로 수록)
MBC 베스트셀러 극장에서 드라마 방영.
1987년. 산문집『내 빛깔 내 소리로』(작가정신) 출간.
중편소설 문고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고려원) 출간.
1988년. 중편소설「높새의 집」이 국제펜대회기념 <한국소설집>에 번역(서지문 역), 수록.
「모든 별들은 음악소리를 낸다」가 무용가 김삼진에 의해 호암 아트홀에서 공연됨.
1989년. 소설집『원숭이는 없다』(민음사) 출간.
1990년. 장편소설『별까지 우리가』(도서출판 둥지) 출간.
산문집『이 몹쓸 그립은 것아』(동서문학사) 출간.
장편소설『약속 없는 세대』(세계사) 출간.
문학선집 『알함브라궁전의 추억』(도서출판 나남) 출간.
1992년. 장편소설 『협궤열차』(도서출판 창) 출간.
장편동화 『너도밤나무 나도밤나무』(민음사) 출간.
시집 『홀로 등불을 상처 위에 켜다』(민음사) 출간.
1993년. 『돈황의 사랑』이 프랑스 출판사 악트 쉬드(Actes Sud)에서 번역(최윤 역)되어 출간.
1994년. 중편소설 『「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로 현대문학상 수상.
1995년. 중편소설 「하얀 배」로 이상문학상 수상.
한국소설가협회 기획분과위원회 위원장 선임.
연세대학교, 동국대학교 국문학과 강사(~1997년).
1997년. 소설집 『여우 사냥』(문학과지성사) 출간.
산문집 『곰취처럼 살고 싶다』(민족사) 출간.
한국소설학당 설립.
1998년. 추계예술대학교 강사(~2000년).
1999년. 단편소설 「원숭이는 없다가」독일에서 나온 『한국 소설집』에 번역(안소현 역), 수록.
2000년. 민족문학작가회의 이사 선임.
2001년.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 겸임교수(~2003년).
소설집 『가장 멀리 있는 나』문학과지성사 출간.
한국소설가협회 이사, PEN클럽 기획위원회 위원 선임.
2002년. 단편소설 「나비의 전설」로 이수문학상 수상.
산문집 『그래도 사랑이다』(늘푸른소나무) 출간.
중편소설「여우 사냥」이『현대한국단편선』(일본 이와나미문고) 번역(三枝壽勝 역), 수록.
대한매일신보 명예논설위원, 연세대학교 동문회 상임이사(문화예술분과) 위촉.
2003년. 산문집 『꽃』(문학동네) 출간.
2004년. 소설가협회 중앙위원.
2005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박람회 출품 도서 ‘한국의 책 100선’에 「돈황의 사랑」선정.
동화 『두부 도둑』(자유지성사) 출간.
장편소설 『삼국유사 읽는 호텔』(랜덤하우스중앙) 출간
『돈황의 사랑』을 『둔황의 사랑』(문학과지성사)로 바꾸어 출간.
『이별의 노래』를 『무지개를 오르는 발걸음』으로(일송북) 출간.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을 계기로 독일 순회 낭송회에 참가.
『The love of Dunhuang(둔황의 사랑)』(김경년 번역) (미국 CCC출판사) 출간.
서울디지털대학교 초빙교수.
2006년. 『敦煌之愛(둔황의 사랑)』(번역 왕책우) 중국에서 출간.
국민대학교 문예창작대학원 겸임교수(~현재).
시와 소설 선화집 『사랑의 마음, 등불 하나』(랜덤하우스중앙) 출간.
2007년. 단편소설「촛불 랩소디」로 제12회 현대불교문학상 수상.
소설집 『새의 말을 듣다』(문학과지성사) 출간, 이 책으로 제10회 동리문학상 수상.
2008년. <21세기문학> 편집위원.
헤이리 문화공간 ‘마음등불’의 ‘티베트의 길, 자유의 길’ 전시회 참여(그림 4점 출품).
제11회 동리문학상 심사.
2009년, 베이징 주중 한국문화원 개원 2주년 기념행사 한중작가 사인회 참가.
현재 ‘문학비단길’ 고문.
국민대 문창대학원 겸임교수.
첫댓글 대단하신 분을 만나뵈었습니다 '문학은 진실해야한다'는 대시인님의 말씀 명심하며 더 열심히 공부해야 겠다고 주먹에 불끈 힘이 들어 가집니다. 좋은 취재하셔서 좋은글 올려주시어 정말 감사합니다 김순진 선생님^*^
귀한 글을 읽으면서 다시 마음을 다잡아봅니다.
고난을 겪고 나서야 참다운 글이 나오는 건 아닐까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