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 그림 문외한의 변명
나는 사실 그림을 잘 모른다. 그저 남들이 훌륭한 작품이라고 하면 그 ‘훌륭한’ 이라는 선입견으로 작품을 바라본다. 그러니까 왜 훌륭한지가 아니라 내 시야로 들어오는 그림은 이미 훌륭한 작품이므로 나는 그저 무엇이 훌륭한 것인지에 집중하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작품을 나의 시선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남이 시선으로 보는 것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는 그림을 볼 줄 모르기 때문이다. 그림을 이해하려면 그림의 탄생과정을 아는 것이 중요하지만 그런 독서는 별로 할 기회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어쩌다 해외여행을 하는 기회에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들러도 그림을 꼼꼼히 보는 경우는 거의 없다. 그저 지나는 길에 지나는 눈길로 그림을 대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지난해의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시실에는 세상의 유명화가들의 작품이 벽을 빙 둘러 걸려 있었지만 그저 익숙한 그림들에 시선을 주는 것 말고는 낯선 그림들은 늘 그렇듯이 별로 눈길을 주지도 않았다. 봐도 그림을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그림에 감추어진 화가의 이야기를 모르기 때문이다.
영국의 대영박물관이나 다른 나라의 박물관에서 수도 없는 그림들을 보았지만 늘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서울의 예술회관에서 전시된 고흐의 그림 앞에서는 괜히 아는 척하며 한참을 바라보는가 하면 고개를 끄덕이기도 한다.
어디선가 그의 이야기를 듣거나 읽었고 그에 관한 이야기를 조금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지금은 우리 동네 상가 건물 공사장 가림막에 커다랗게 인쇄된 그의 그림이 붙어 있기 매일 오가며 본 탓에 친숙한 그림이 되기도 했다.
사실 평소에 나의 독서가 다양한 영역을 두루 섭력하는 편이기는 하지만 미술이나 음악 또는 체육 분야의 책은 거의 읽지 않는 편이다. 그러므로 이 분야의 지식이라는 것이라고는 그저 중고등학교 때 학교에서 배운 지식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그림을 보는 눈도 꼭 그때의 시야에 갇혀버리고 말았다. 그런 점에서 진병관의 『위로의 미술관』은 그림에 대한 나의 허술한 구석을 조금은 메워주었다. 그리고 책 속에서 제시한 그림 중 익숙한 그림의 대부분은 아이러니하게도 공사장 가림막의 그림 때문이다.
말하자면 이 책에 소개된 마네 같은 다른 화가의 그림도 그 가림막에 있다. 그러니 책 속에서 그런 그림을 본 것만으로도 뭔가를 친숙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니 내게 이 책은 ‘위로의 미술관’이 아니라 ‘가림막의 미술관’이 어울릴 듯하다.
나. 내 시선을 붙잡은 작가들
책에는 내게 익숙한 화가들도 몇몇 소개되어 있다. 그러나 화가 모네는 화풍이 인상파라는 것, 그리고 그의 작품으로 ‘인상, 해돋이’, ‘건초더미 연작’ 등이 있다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 사실 익숙하다는 말이 무색할 지경이다.
특히 ‘해돋이’는 우리 동네 상가 건물 신축 공사장 가림막에 커다랗게 인쇄된 복제 그림으로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가림막에는 수련을 그린 그림도 있다. 산책을 나갈 때면 가끔 그 가림막을 지난다. 그럴 때마다 흘낏 거릴 뿐 그곳에서 어떤 이야기를 건져 올리지는 못한다.
그저 저린 그림이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이구나 하는 정도였다. 그것이 빛을 좋아 그린 그림인지는 알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왜 별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이는 건초더미를 계절별로 그리고 아침저녁으로 그렸는지는 더울 알지 못했다.
그것이 그가 빛을 좇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은 더욱 몰랐다. 나는 그의 가정사에는 별 관심이 없다. 다만 그림에 빛을 담으려 했다는 그의 대담한 발상과 그것이 성공을 거두었다는 결과만이 내게 오롯이 남았다.
이 책을 통해 내 시선을 특별히 끈 화가는 그랜마 모지스다. 그녀는 정규 미술 교육을 받지 않고 어떤 화풍과도 관계없이 화가 자신만의 순수하고 독특한 특징을 가진 작품을 남겼다. 이러한 작품 경향을 ‘나이브 아트(Naive Art)’, 또는 ‘소박파(素朴波)’라고 한다.
나이브 아트 계열의 화가들은 원근법, 명암법, 구도 등에 구애받지 않고 순수한 즐거움과 느껴지는 감정 그대로 때로는 충동적인 방식으로 그려낸다. 말하자면 차근히 미술 수업을 받지 않았으므로 그림이 제멋대로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림이 훌륭하다는 것이다.
이들 화가들은 본업이 따로 있으므로 보통 본업이 따로 있고 휴일에 주로 그림을 그린다고 하여 ‘일요화가’라는 비하 섞인 호칭을 듣기도 하지만, 예술이 교육받은 자만의 전유물이 아닌 만큼 이들의 출연은 현대 미술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그랜마 모지스는 75세에 붓을 잡았다고 한다. 노년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한 것이었지만 그녀는 곧 그림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그림은 마치 동화속의 어느 마을 같았다. 두 번의 세계 대전을 치루고 지쳐있던 사람들에게 농촌 풍경을 그녀의 그림은 큰 위로가 되었다.
많은 이들이 그녀의 그림에서 고향을 떠올렸고, 가족과 이웃의 사랑을 느끼며 감동했다. 마침내 동화 같은 몽환적인 그녀의 작품들은 크리스마스카드, 연하장으로 인쇄되어 보급되었다고 하는데 늦게 시작한 그림이었지만 75세부터 101세까지 1600여 점의 작품을 남겼다고 한다.
그녀는 꿈을 꾸기에 늦은 나이는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를 때라는 말도 있다. 내가 멈칫 거리는 동안에도 시계추는 멈추는 법이 없다. 내가 가장 즐겁게 할 수 있는 일을 찾아보고 그 동안 수북이 쌓인 먼지를 털어내야겠다.
다. 예술가들의 고집
예술가들은 대체로 자기만의 고집이 있다. 자존심일 수도 있을 것인데, 그것이 그들을 지탱하는 유일한 이유일 것이다. 천재적인 화가들은 대부분의 기존의 화풍을 거부하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렸다. 폴 고갱도 그들 중 한명임이 분명하다.
화풍에 동화된다는 것은 그저 평범함을 의미하기 때문일 것이다. 화풍을 뛰어넘을 때 비로소 그 존재감이 확연히 드러나는 것임을 화가들이 모를 리 없지만 그러나 그 일이 결코 만만한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어떤 화가는 순간순간 변하는 빛으로부터 영감을 얻는가 하면 어떤 화가는 색채를 통해 감정을 표현하기도 했고, 또 어떤 화가는 기존의 틀을 깨는 작업에 몰두하기도 했다. 이를 폴 고갱이 적절히 말해주고 있다.
“손 다칠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유리창을 깨서 완전히 해방되는 것이 중요하다. 상처는 아무것도 아니다. 가난도 아무것도 아니다.... 우스꽝스러운 것을 창조한다고 해도 부끄러울 필요가 없다. 이젤 앞에서 하가는 과거의 노예가 되어서도, 현재의 노예가 되어서도 안 된다.”(142쪽)
그러나 어쩌면 수도 없는 화가들이 그 길을 걷다가 명성을 얻지 못하고 사라졌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 중 성공한 겨우 몇몇을 기억하는 것이다. 세상이 그러나 그들 화가들의 집요한 노력으로 화풍이 변화하고 영역은 보다 넓어지고 풍성해져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몇 해 전 예술의 전당에서 빈센트 반 고흐 전이 열렸었다. 미술 전시회를 잘 찾는 편이 아니었지만 화가의 이름값에 부응하기 위해 전시관을 찾았다. 지금 내 기억 속에는 그의 자화상만이 겨우 남아있다.
고흐의 삶은 광인의 그것과 별로 다르지 않아 보인다. 동료 화가(고갱)과 다투고는 분을 이기지 못해 자기 귀를 자르는 자해 행위는 광인이 아니고서는 쉽지 않은 일이다. 그뿐 아니라 그는 그림을 그리다가 발작을 일으키기도 하고 그러면 물감을 먹기도 했다.
결국 의사는 자해 방지를 위해 그에게 그림 그리기를 금지하기도 했다고 한다. 그는 자화상은 30이상을 그렸다고 한다. 자신의 외모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모델을 여건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하니 화가로서의 치열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라. 난공불락의 요새 같은 그림들
책에는 굴곡 많은 한 시대를 삶아간 화가들이 다양한 모습으로 소개된다. 대부분은 그들은 이미 충분한 천재성을 가지고 태어났던 것 같다. 어린 나이에 대부분은 그림에 대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 탓에 정식으로 미술교육을 받게 되자 그림은 삽시간에 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모두들 자기만의 그림을 찾아 나섰다. 자기만의 그림을 그리고자 하는 열망과 그 열망을 충족시키기 위한 고된 작업은 거의 대부분의 화가가 동일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들은 자기만의 그림을 그릴 수 있었고 더러는 생존에 그 결실을 맛보았다.
그들의 그림은 오늘에도 세계 전 역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걸려 방문객들을 묵묵히 맞이하고 있다. 나처럼 문외한들은 그림을 바라보아도 화가 이름을 확인하려 그림 옆에 조그마하게 붙어있는 이름이나 설명서를 잘 읽지 않는다.
이름은 생소하고 이름처럼 설명 또한 낯설기는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런 점에서 이 책은 나 같은 미술 문외한들에게는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된다. 다음에 미술관을 가려면 이 책을 먼저 살펴야겠다.
여기에 소개된 화가들의 작품이라면 더더욱 그럴 것은 당연하다. 이 책에서 저자가 말한 것처럼 책을 읽고 나니 뭔지는 모르지만 뭔가 하나는 얻은 느낌이 든다. 이런 기회를 가끔이라도 접하게 된다면 그림을 읽는 혜안이 생길 것은 분명해 보인다.
더욱이 현대로 오면서 그림은 내게는 다소 파격적으로 변화하고 있어 어리둥절하기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그 조차도 조금은 고개를 끄덕일 수 있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그러나 피터르 몬드리안의 선으로 교차된 그림은 여전히 내가 이해하기는 난공불락 같다.
거기에 음악을 추상호로 표현한 칸딘스키의 작품을 보면 위안이나 평온함을 얻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머리가 지끈거릴 지경이다. 그나마 이 책을 통해 조금이나마 미술의 세계를 이해한 것 같기도 하다. 꾸준히 책을 읽고 그림을 보다보면 나름의 안목이 길러지 기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