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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마름 – 맥스루케이도
*역사상 가장 처참했던 재앙에 순위를 매긴다면, 흑사병을 상위권에 올려놓아야 할 겁니다. 상위권 가운데서도 상당히 높은 위치를 차지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최고는 아닙니다. 재앙이니 파멸이니 하는 말이 어울릴 만한 참사였던 것만은 분명하지만, 사상 최악의 재난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고갈(枯渴)'이라는 질병에 '최악'이라는 타이틀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거기에 비하면 흑사병은 입가에 잡힌 물집 정도에 지나지 않습니다. 어떤 문명도, 어떤 나라도 이 병을 피해 갈 수 없었습니다. 누구도 죄에서 비롯된 고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흑사병은 예르시니아 페스티스(Yersinia pestis) 박테리아가 일으킵니다. 그러나 죄의 역병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결정을 내리는 데서 비롯됩니다.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을 외면하고 뱀의 속삭임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하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라고 하나님께 묻지 않았습니다. 아담은 "창조주께 여쭤 보자"고 설득하지 않았습니다. 둘 다 하나님 아버지의 존재나 주님의 뜻 따위는 전혀 염두에 두지 않았습니다. 결국 옷자락에 죽음을 주렁주렁 매단 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죄는 세상에 하나님이 없는 것처럼 행동하게 합니다.
인간은 죄를 사소한 실수나 오류로 생각하지만,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가짐이요, 주님을 저버리게 만드는 실마리로 여기십니다. "우리가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사 53:6). 죄로 가득한 마음은 하나님을 무시합니다. 주님의 가르침에 귀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실습 중인 교생을 바라보는 중학생 정도의 존경심을 담은 시선으로 하나님 을 봅니다. 인정하기는 하지만 경외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 중심적인 마음가짐을 놓치면 죄는 언제나 나를 내세우며 꼬드깁니다. "당신 삶인데 마음대로 살아요. 약물로 몸을 탐욕으로 마음을 채워요. 쾌락으로 가득 찬 밤을 보내요." 하나님을 소외시키고 나면 어린아이처럼 자기 중심적인 삶을 살게 됩니다.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엡 2:3) 행하는 생활을 되풀이합니다.
하나님은 사랑하라고 하십니다. 나는 미움을 택합니다.
하나님은 용서하라고 가르치십니다. 나는 복수를 다짐합니다.
하나님은 절제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나는 쾌락에 더 깊이 발을 담급니다.
죄는 얼핏 갈증을 풀어 주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하지만 그것은 바닷물을 들이마시는 격이라 잠시 뒤 다시 목이 마릅니다. 기갈은 점점 더 깊어지고, 목은 더 타 들어갑니다. "저희가 감각 없는 자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엡 4:19).
이런 강박적인 탐욕에 자신을 맡기면 결국 값비싼 대가를 치르게 됩니다. 성경은 "육신에 있는 자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느니라"라고 말합니다(롬 8:8). 바울은 죄인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 졌나니 …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 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 (롬 1:21,24).
*조셉 얼라인(Joseph Alleine)은 이렇게 썼습니다. “오, 비참한 인간이여! 죄가 너희를 괴물로 바꿔 놓았구나. 하나님이 그대를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지으셨거늘, 죄 때문에 '악마보다 조금 나은' 존재가 되고 말았으니!" "하나님을 소외시키면 혼돈이 닥쳐올 뿐입니다. 혼돈이 계속되는 한, 비참한 처지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죄의 역병은 하나님 나라에 침투할 수 없습니다. 전염병에 감염된 영혼은 하늘나라의 거리를 활보할 수 없습니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하리라는 것을 여러분은 알지 못합니까? 착각하지 마십시오.
음란한 자나 우상을 숭배하는 자, 간음하는 자나 남창노릇 하는자, 동성연애 하는 자나 도둑질하는 자, 탐욕을 부리는 자나, 술 취하는 자, 남을 중상하는 자나 남의 것을 약탈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상속받지 못할 것입니다." (고전 6:9-10).
하나님 나라의 순수성을 지키는 일에 관해서라면 너그러우신 주님도 절대 타협하지 않으십니다.
죄는 두렵고도 끔찍한 열매를 맺습니다. 하나님을 외면하고 살면서, 하나님 없는 영원을 꿈꿉니다. "다 알아서 할 테니 간섭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큰소리치며 세월을 낭비합니다. 주님은 그냥 내버려 두십니다. '아무 소망이 없이 하나님도 없이' (엡 2:12. 표준새번역) 살게 하십니다. 그 결과는 치명적입니다. 데살로니가후서 1장 8-9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을 모르는 자들과 우리 주 예수의 복음에 복종치 않는 자들에게 형벌을 주시리니 이런 자들이 주의 얼굴과 그의 힘의 영광을 떠나 영원한 멸망의 형벌을 받으리로다.”
*그러나 하나님이 지으신 구원의 노래는 두 절로 구성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을 뿐만 아니라, 마음속에 들어와 살고 있습니다. 여기까지가 1절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 안에서 역사하십니다. 이것이 2절입니다.
바울은 말합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갈 2:20).
교회에 빗대어 설명하기도 했습니다.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뇨"(고전 3:16).
하나님은 구원받고 새롭게 태어난 아담과 이브의 마음에 들어 오십니다. 그들의 마음에 자리 잡고 영원히 거하십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그리스도가 죄를 지은 적이 있던가요? 없습니다.
죄에 둘러싸여 있으면서도 한 점 빈틈도 보이지 않으셨던 분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가 계신 곳에는 죄가 깃들 수 없습니다. 주님이 살아 움직이는 심령에는 죄가 싹을 틔울 수 없습니다. "예수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의 영이 여러분 안에 살고 계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리신 분께서 여러분 안에 계신 자기의 영으로 여러분의 죽을 몸도 살리실 것입니다"(롬 8:11).
*모든 교회들이 '은혜의 단절' 이라는 똑같은 질병에 시달리고 있었습니다. 값없이 식탁에 앉도록 초대받았으면서도, 어떻게 해서든 밥값을 내겠다고 우깁니다. 구원의 대가를 이미 다 치르셨건만 할부로 갚아 나가기를 고집합니다. 하나님이 모터보트를 내주셨는데, 기어코 직접 노를 저어 하늘나라에 들어가겠다고 뻗댑니다.
이 병에 걸리면 은혜를 맛볼 수는 있지만 깊이 들이키지는 못합니다. 입술을 적실 뿐, 갈증은 해결하지 못합니다. "마시지 말 것. 한 모금 머금는 건 상관없으나 목구멍으로 넘기는 행위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음." 이런 경고문이 붙은 우물을 보신 적이 있습니까? 어불성설입니다. 목마를 때 물을 퍼 마실 수 없다면 우물이 무슨 소용입니까?깊이 빠져 만끽할 수 없다면 은혜가 무슨 소용입니까?
자신의 모습을 살펴보십시오. 심령을 어떤 모습으로 묘사할 수 있습니까? 활짝 열린 소화전 앞에서 물을 뒤집어쓴 채 웃고 뛰노는 아이의 형상입니까? 아니면 뿌리가 뽑힌 채 사막을 굴러다니는 가시덤불 모양입니까? 정확한 모습을 볼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간단한 질문 하나만 던져 봐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에 비추어 볼 때, 나는 어떤 존재인가?" 은혜를 기준으로 살펴보면 자신의 참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
은혜의 눈으로 보면 스스로 달라 보입니다. 은혜에 깊이 잠기는 순간, 세상의 꼬리표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조립 라인 위의 물품에 딱지를 붙이듯이 세상은 모든 사람에게 딱지를 붙입니다. 멍청함, 비생산적임, 일을 배우는 속도가 느림, 말이 빠름, 쉽게 체념함, 구두쇠···. 하지만 은혜가 깊이 스며들면, 비판적인 꼬리표들이 떨어져 나갑니다. 세상이 붙인 딱지가 자신의 참 모습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모습이 자신의 실체라는 확신이 듭니다. 영적으로 살아 있으며, 하늘나라에 자리가 준비되어 있고, 주님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주님의 인자하심을 보여 주는 샘플이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자녀임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므비보셋은 로드발에서 궁궐로, 미천한 자에서 존귀한 자로,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처지에서 왕의 식탁에 앉는 영광으로 자리를 옮겨 갔습니다. 그를 보고 있으면 마치 우리 자신을 보는 것 같습니다. 므비보셋이야말로 크리스천이 걷는 여정의 모델입니다. 하나님은 로드발의 막다른 골목에서 우리를 끄집어내다가 주님의 식탁에 앉게 하셨습니다. "또 함께 일으키자 그리스도 예수안에서 함께 하늘에 앉히시니" (엡 2:6).
영혼 갈피갈피에 이 말씀이 스며들게 하십시오. 메마른 사막의 바람이 불어오거든, 누군가 지난날의 고통이 적힌 딱지를 붙이려 하거든 손을 내밀어 은혜의 잔을 드십시오. 생명의 물을 심령 깊은 곳까지 흘려 보내십시오. 하나님은 온갖 요구를 다 채워 드려야 비로소 기뻐하는 까다로운 부모가 아닙니다. 무척 사랑해주시지만 한 번이라도 실망시키는 순간 관계가 깨져 버리는 아저씨도 아닙니다. 사람과는 비교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사람과 다릅니다. 바로 그분이 우리를 당신의 소유로 삼으셨습니다. 그렇다면 얘기는 끝난 겁니다. 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 지으심을 받은 자니 이 일은 하나님이 전에 예비하사 우리로 그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2:10).
므비보셋이 에베소서 2장 10절을 읽었다고 상상해 봅시다. 로드발(이스라엘의 궁벽한 마을) 시절에 누군가가 그에게 찾아가 이렇게 이야기해 준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이 친구야, 기죽을 것 없어. 물론 뛰어다니지도 못하고 춤출 수도 없다는 건 알아. 다른 애들이 신나게 공을 찰 때 창가에 꼼짝 못하고 서서 물끄러미 쳐다볼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들어봐. 하나님이 성경에다 자네 얘기를 쓰셨어. 흥미진진한 드라마의 주인공으로 자네를 발탁하신 거야. 한 3천 년쯤 지나 보라고 자네는 21세기 독자들 사이에서 '은혜의 상징'으로 통할걸?"
므비보셋이 그 말을 믿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믿으시길 기도합니다. 크리스천 한 사람 한 사람은 하나님의 걸작입니다. 하나님의 솜씨를 빛내는 작품이 되어 은혜의 화랑에 전시될 겁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시간표를 인간의 손에 맡기지 않으셨다는게 문제입니다. 주님은 당사자와 아무런 상의 없이 독단적으로 일정을 진행시키십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게 무언지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언제인지 정확하지는 않지만 반드시 죽는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합니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랜스톤 말고도 유타 산에 올랐다가 바위틈에 손이 끼거나 험한 일을 당한 이들이 여럿 있었을 겁니다. 성경은 "누가 살아서 죽음을 보지 아니하겠느냐?"고 묻습니다. 느끼지 못할지라도 죽음의 그림자가 늘 따라다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들도 예외가 아닙니다. 하루하루 장례식을 향해 나가고 있는 것이지요.
그러나 하나님의 관점에서 보면 그건 슬픈 일이 아닙니다. 주님은 죽을 수밖에 없는 인간의 현실을 복된 소식으로 보십니다.
"죽는 날이 출생하는 날보다 나으며" (전 7:1). 참으로 뜻밖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죽음이란 하늘나라에 새로 태어나는 걸 의미합니다. 천사들은 주검이 땅에 묻히는 장면을 분만실 앞에서 손자를 기다리는 할머니의 심정으로 지켜봅니다. "조용히 해! 조금만 있으면 태어날 것 같아!" 얼른 새 식구를 보고 싶어서 다들 안달을 합니다. 세상에서는 검은색 정장을 입고 영구차를 따라가지만, 하늘에서는 핑크색이나 푸른색 리본으로 한껏 멋을 부리고 서로 마실 것을 주고받으며 기다립니다. 아기가 태어나는 걸 보면서 슬피 우는 경우는 거의 없을 겁니다. 하늘나라에서도 그렇습니다. 주님의 자녀들이 세상을 떠나는 순간, 천국 시민은 누구도 눈물짓지 않습니다.
*혹시 이렇게 묻고 싶으세요?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이렇게 피로하고 초조하죠? 하나님의 영이 내 안에 거하시는데 어째서 강제수용소 소장처럼 냉정한 겁니까? 어머니만 보면 괜히 화가나고 성질을 죽일 수가 없어요. 나를 용서하지도 못합니다. 정말 피곤해 죽겠어요."
바울의 입을 통해서 하나님은 단 세 마디로 정답을 제시하셨습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엡 5:18). "용서하라", "기도하라", "진리를 선포하라"고 말씀하실 때와 똑같은 어조와 강세로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명령하셨습니다.
바울의 명령은 지속적이고 집단적입니다. '성령 충만' 이 날마다 주시는 은혜라는 점에서 지속적이고, 모든 그리스도인을 초청하고 있다는 점에서 집합적입니다. "모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겁니다. 성령님은 나이, 지위, 신앙 경력 따위를 가리지 않고 모든 이들에게 차고 넘칠 것입니다. 성적(학교 성적을 말하든, 성령적성검사의 약자든)은 소용없습니다. 졸졸 따라다니며 들어와 주시길 청할 필요도 없습니다. 성령님은 이미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십니다(그렇다고 식사를 준비할 때마다 수저를 한 벌씩 더 놓을 것까지는 없습니다). 어디를 가든지 항상 동행하십니다.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고전 6:19). 그리스도인이라면 닥쳐오는 모든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필요한 능력을 완벽하게 갖추고 있는 셈입니다.
문제는 어떻게 하면 성령님으로 더욱 충만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흔히들 하나님이 마더 테레사(Mother Teresa)와 같은 규모의 답변을 하시리라고 기대합니다. "고아원을 세워라. 레위기를 암송해라. 한센병 환자를 목욕시켜라. 루케이도가 쓴 책을 모두 사서 읽어라. 그런 일을 하면 할수록 더욱 충만하게 해 주리라."
하나님 생각은 다릅니다. "그랬다가는 무척 지칠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성령 충만하기를 간절히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할 일은 하나뿐입니다. 구하십시오. "구하는 이마다 받을 것이요 찾는 이가 찾을 것이요 두드리는 이에게 열릴 것이니라. 너희가 악할지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눅 11:10, 13).
기도를 통해 주님과 대화하는 일이 물 흐르듯 자연스러워질 때,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충만하게 해 주십니다. 힘을 얻고 싶으십니까? 물론 그러시겠죠? 이렇게 기도해 보십시오. "주님의 능력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성령으로 강건하게 해 주세요. 능력 주시는 그리스도 안에서 무슨 일이든 다 해낼 수 있음을 믿습니다. 마음 구석구석 성령님을 받아들이십시오.
*그러나 기다림은 정지가 아닙니다. 하나님 보시기에는 그 무엇보다도 활발한 움직임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은 주님을 바라본다는 뜻입니다.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은 차가 오는 쪽을 뚫어져라 쳐다보게 마련입니다. 진심으로 하나님을 기다린다면, 그쪽을 바라보고 주님을 찾으며 그분을 소망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언약은 그렇게 기다리는 이들을 통해 성취됩니다.
"오직 여호와를 앙망하는 자는 새 힘을 얻으리니 독수리의 날개치며 올라감 같을 것이요 달음박질하여도 곤비치 아니하겠고 걸어가도 피곤치 아니하리로다" (사 40:31).
여전히 갈등하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나를 기다려라." 기다리되 올바른 자리에서 기다려야 합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서 기다리라고 말씀하시지 않습니다. 정직에, 믿음에, 진리에 머물라고 가르치실 뿐입니다.
"너희가 만일 여호와의 목소리를 듣지 아니하고 여호와의 명령을 거역하면 여호와의 손이 너희의 열조를 치신 것같이 너희를 치실 것이라" (삼상 12:15).
바르지 못한 방법으로 이익을 얻었습니까? 결혼 서약과 반지를 나눠 끼지 않은 상대에게 몸을 주었습니까? 입만 열면 험담이 쏟아져 흐릅니까? 의도적으로 불순종의 정류장을 서성이고 있다면, 알아 두십시오. 하나님의 버스는 거기에 서지 않습니다. 순종의 자리로 가서 기다리십시오. 사도행전 5장 32절은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에게 성령을 주신다"고 가르칩니다.
올바른 자리에서 기다리는 동안 함께 머무는 동료들과 화목하게 지내십시오. 성령이 임할 때 제자들이 티격태격 다투고 있었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남편들을 훈계하면서 다툼이 기도를 가로막는다고 지적합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아내가 여성으로서 자기보다 약한 그릇임을 이해하고 함께 살아야 합니다. 그렇게 해야 여러분의 기도가 막히지 않을 것입니다" (벧전 3:7). 하나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갈등을 이기고, 잘못을 서로 용서하며, 다툼을 피하는 걸 말합니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 (엡 4:3).
*'전혀(계속)'라는 부사를 기억하십시오. 다락방에 모였던 제자들이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할 때 쓰였던 부사 말입니다. 골로새서 4장 2절은 모든 크리스천의 기도가 그러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부담스럽게 들리십니까? "하루 종일 직장에서 얼마나 바쁘게 일하는 줄 아세요? 집에 돌아와도 마찬가지에요. 아이들은 보채지, 각종 청구서도 처리해야지. 그런데 어떻게 항상 기도를 한단 말이죠?" 쉬지 않고 기도한다는 게 언뜻 불가능해 보이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닙니다.
이렇게 해보세요. 기도의 정의를 바꾸는 겁니다. 하나님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줄이고, 그분을 의식하는 시간을 늘리도록 노력하세요. 항상 주님을 기억하세요. 어디를 가든 하나님의 임재를 떠올리세요. 관공서에 가서 차례를 기다릴 때는 "여기 있게 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생각하세요. 가게에 물건을 사러가서도 “나의 왕이신 주님을 환영합니다" 하고 말씀 드리세요. 설거지를 할 때도 창조주를 찬양하세요. 로렌스 형제의 예를 따르십시오. 스스로 냄비와 접시의 주인'이라고 불렀던 이 유명한 성자는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임재 연습 」의 한대목입니다.
"일하는 시간이나 기도하는 시간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서로 다른 일을 하느라 온갖 소음과 떠드는 소리가 가득한 부엌에서도 마치 거룩한 제단 앞에 무릎을 꿇고 있는 것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크리스천이라면 누구나 마음에 성령 하나님을 품고 있습니다. 하지만 모든 그리스도인이 하나님께 온전한 마음을 드리는 건 아닙니다. 기억하십시오. "어떻게 해야 성령님을 더 많이 받을 수 있을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성령님이 내 삶을 더 깊이 주관하게 해 드릴 수 있을까?"가 문제의 핵심입니다. 손가락 한두 개나 주먹 하나만 간신히 들어갈 수 있는 장갑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루이스(C. S. Lewis)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리스도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모두 내게 다오. 많은 시간, 많은 재물을 바라는 게 아니다. 내가 원하는 건 바로 너다. 나는 너의 자아를 괴롭히러 온 게 아니라 죽이러 왔다. 미봉책은 소용 없다. 이쪽 저쪽에서 조금씩 가지를 잘라내는 건 내가 원하는 바가 아니다. 나무 전체가 필요할 뿐이다. … 온전한 자아를 다오. 순전하든 사악하든 마음에 품고 있는 갈망 전체를 다오, 내가 새로운 자아를 네게 주겠다. 아니, 내 자신을 주겠다. 내 의지가 곧 네 뜻이 될 것이다.'
목록을 작성해 봅시다. 자신의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끝까지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습니까? 구멍이 막혀서 손가락이 들어가지 못하는 자리는 없습니까? 하나하나 살펴볼까요?
혀부터 시작합시다. 사실을 과장하는 습관이 있던가요? 어떤 언어를 쓰고 있나요?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훼손하고 지저분한 이야기를 나누는 도구로 사용하고 있지는 않은가요? 마음에 원한을 품고 있습니까? 창고에다 분노를 채워 두고 있나요? 비생산적이고 게으른가요? 질문이 너무 구체적이어서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셨나요? 그렇다면 바울 선생한테 가서 따지십시오. 이건 그 양반이 만든 목록이니까요.
"그런즉 거짓을 버리고 각각 그 이웃으로 더불어 참된 것을 말하라. 이는 우리가 서로 지체가 됨이니라.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도적질하는 자는 다시 도적질하지 말고 돌이켜 빈궁한 자에게 구제할 것이 있기 위하여 제 손으로 수고하여 선한 일을 하라. 무릇 더러운 말은 너희 입 밖에도 내지 말고 오직 덕을 세우는데 소용되는 대로 선한 말을 하여 듣는 자들에게 은혜를 끼치게 하라.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훼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엠4:25-31)
*물론, 우리를 기다리는 건 꼬맹이 골목대장이 아니라 장례식장입니다. 정리해고일 수도 있고 다급한 상황에서 등을 돌리는 친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삶의 여정에 흠집을 내는 다양한 도전들입니다. 그런 상황에 부닥쳤을 때, 어디서 도움을 청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무런 불행도 겪지 않고 살 수 있게 해 주겠다고 말씀하신 적이 없습니다. 다만, 어떠한 상황에서도 곁을 떠나지 않고 성령님으로 함께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을 뿐입니다.
성령님을 '엄청나고 놀라운 기적을 일으키는 분'으로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텔레비전만 켜면 알아듣기 힘든 발음으로 청중을 울렸다 웃겼다 하며 수상쩍은 기적을 행하는 설교자의 모습을 얼마든지 볼 수 있습니다. 물론, 성령님이 사도들의 머리 위로 불의 혀같이 임하셨던 것처럼 또다시 놀라운 역사를 일으키실 수 있다는 점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처럼 눈에 띄는 현상' 에만 초점을 맞추다 보면, 정작 은밀히 돌보시는 성령님의 사역에는 무감각하기 쉽습니다.
성령님은 함선으로 치자면 키와 같은 분이십니다. 영혼의 배가 물에 가라앉지 않고 올바른 항로를 따라가도록 방향을 잡아 주십니다.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없어서는 안 될 결정적인 역할을 하십니다. 삶은 혼자 떠나는 항해가 아닙니다. 혹시라도 그런 생각이 들거든, 성령님이 주신 선물들을 꼽아 보십시오.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의 기업에 보증이 되사 그 얻으신 것을 구속하시고 그의 영광을 찬미하게 하려 하심이라" (엡 1:13-14).
*성령님이 달콤한 노래로 마음을 황홀하게 해 주시는 순간들이 있습니다. "너는 하나님 아버지의 것이다. 그분이 너를 구원하시고 인 치셨다. 마지막으로 성령님이 속삭이시는 확신의 말씀을 들은 지 얼마나 됐습니까? 까마득하십니까? 그럼 그분께 이야기 하십시오. 성령님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지금도 말씀하고 계시는데, 잘 들리십니까?
"이와 같이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마음을 감찰하시는 이가 성령의 생각을 아시나니 이는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성도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롬 8:26-27).
성령님은 '연약함을 도우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눈에 잘 띄는 펜으로 밑줄을 그어 놓으십시오. 누구라서 이 말씀이 필요 없겠습니까? 연약한 육신, 박약한 의지, 허약한 결심…. 이미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요? '연약함' 이라는 단어는 38년 동안이나 꼼짝 못하고 누워 있던 병자를 표현할 때 쓰였던 말이기도 하지만, 로마서 5장 6절의 경우처럼 영적인 무기력을 설명하는 말이기도 합니다.
영혼이 허약하십니까? 몸이 약하십니까? 아니면 둘 다입니까? 성경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놀라운 소식입니까?
*하나님의 주권을 고백한다는 것은 곧 주님이 세상만사를 다스리시며 왕으로서의 위엄과 권세를 가지고 계심을 인정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삶의 주인으로 확정하고, 폭풍 속에서 항로를 결정하는 권한을 그분께 양도해 드린다는 의미입니다.
밀트와 바다 얘기가 아니라, 하나님과 인생 얘기를 하는 겁니다. 선장을 바라보고 마음을 놓으십시오. 그분이 우리에게 가장 좋은 것을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우주의 흐름을 계획하신 분이 아닙니까?
"우리 하나님은 하늘에 계셔서, 하시고자 하시면 어떤 일이든지 하실 수 있으시다"(시 115:3).
"과연 태초부터 나는 그니 내 손에서 능히 건질 자가 없도다. 내가 행하리니 누가 막으리요" (사 43:13).
"내가 종말을 처음부터 고하며 아직 이루지 아니한 일을 옛적부터 보이고 이르기를 나의 모략이 설 것이니 내가 나의 모든 기뻐하는 것을 이루리라 하였노라" (사 46:10).
'모든 일을 그 마음의 원대로 역사하시는 자의 뜻을 따라 우리가 예정을 입어 그 안에서 기업이 되었으니" (엡 1:11).
하나님의 거룩한 뜻이 우주를 움직입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 "위에서 주지 아니하셨더면 나를 해할 권세가 없었으리니 그러므로 나를 네게 넘겨준 자의 죄는 더 크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요 19:11). 이스라엘의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를 십자가로 보낸 주체가 자신들이라고 믿었지만, 베드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뜻과 미리 아신 대로 내어준 바 되었거늘”(행 2:23).
예레미야는 반어법을 써서 묻습니다. "주의 명령이 아니면 누가 능히 말하여 이루게 하랴?" (애 3:37).
다니엘도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는(하나님은) 땅의 모든 거민을 없는 것같이 여기시며, 하늘의 군대와 이 땅의 모든 거민에게 뜻대로 하시지만, 아무도 그가 하시는 일을 막지 못하고, 무슨 일을 이렇게 하셨느냐고 그에게 물을 사람이 없다" (단 4:35).
구약에서 신약을 막론하고, 선지자에서 시인과 전도자에 이르기까지 한결같이 말합니다. "기약이 이르면 하나님이 그의 나타나심을 보이시리니 하나님은 복 되시고 홀로 한 분이신 능하신 자이며 만왕의 왕이시며 만주의 주시요" (딤전 6:15).
*정말 그럴까요? 성경에 따르면 문제의 초점은 하나님의 능력과 인자하심이 아닙니다. 인류가 가지고 있는 우선순위가 모든 논의의 핵심입니다. 인간은 잘못된 우선순위를 따르고 있습니다. 누구나 건강하기를, 수입이 많기를, 깊은 잠을 자기를, 은퇴할 때까지 승승장구하기를 바랍니다. 우선순위 꼭대기에 ‘나'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우선순위는 다릅니다. 그 정점에 '하나님' 이 있기 때문입니다. 하늘의 존재 이유가 무언지 아십니까?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해서입니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선포하고"(시 19:1)
인간이 갈등하며 버둥거리는 까닭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주님의 능력을 드러내기 위해서입니다. "보라 내가 너를 연단하였으나 은처럼 하지 아니하고 너를 고난의 풀무에서 택하였노라. 내가 나를 위하며 내가 나를 위하여 이를 이룰 것이라"(사 48:10-11). 이사야 선지자는 큰 소리로 선포합니다. "주께서 이렇게 주의 백성을 인도하셔서 주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사 63:14).
하나님은 펄럭펄럭 깃발을 내거십니다. 힘을 내보이십니다. "어떻게 하면 맥스 루케이도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라고 묻지 않으십니다. "어떻게 하면 맥스 루케이도를 사용해서 나의 위대함을 드러낼까?"라고 물으실 뿐입니다. 축복을 사용하실 수도 있지만, 고통을 도구로 삼으실 수도 있습니다. 선택은 그분의 몫입니다.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사 45:7).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전 7:14).
“궂은일도 좋은 일도, 가장 높으신 주께서 말씀하셔서 일어나는 것이 아니냐?" (애 3:38)
*형들은 요셉의 옷을 벗기고 아우 요셉을 노예로 팔아 버렸습니다. 주님이 보고 계셨을까요? 물론이죠. 하나님은 패역한 형들의 마음을 주권적으로 들어 쓰셔서 이스라엘을 기근에서 건져내셨을 뿐만 아니라 메시야의 가계(家)가 이어지게 하셨습니다. 요셉은 다시 만난 형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들은 나를 해하려 하였으나 하나님은 그것을 선으로 바꾸사 오늘과 같이 만민의 생명을 구원하게 하시려 하셨나니" (창 50:20).
부디 그 여인이 나사로와 만나기를 바랍니다. 나사로가 죽을 병에 걸렸다는 얘기를 들으시고도 예수님은 아무것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무덤에 나흘씩이나 묻혀 있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왜일까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 하나님의 아들로 이를 인하여 영광을 얻게 하려 함이라”(요 11:4).
그러나 무엇보다도 예수님을 한번 뵙고 대화를 나눠 보는 게 좋겠습니다. 주님은 하나님께 일정표를 변경시켜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아버지의 계획은 '십자가의 죽음' 이었습니다. 밤새도록 겟세마네 동산에 머무시면서, 줄곧 '긴급 수정'을 간구했습니다.
'못이 없는 구원사역을 구하셨습니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어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옵소서. 그러나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되기를 원하나이다 하시니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눅 22:42-43).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아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나요? 천사를 보내시는 데서 그치셨습니다. 독생자로 하여금 죽음을 피해가게 하셨나요? 그리스도의 안위보다 하나님의 영광이 상위 개념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고통을 당하셨고 하나님의 은혜는 해처럼 밝게 드러나서 세상 곳곳을 비추게 됐습니다.
*하나님께서 겟세마네의 밤을 견디라고 명령하십니까? 크리스천은 그리스도를 믿을 뿐 아니라 또한 그를 위하여 고난도" (빌 1:29) 받도록 부름받은 사람들을 말합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주님의 주권을 목마르게 찾아야 합니다. 그분의 우물에서 마음껏 길어 마셔야 합니다. 계획을 세우시는 건 하나님의 몫입니다. 주님은 무엇이 최선인지 정확하게 알고 계십니다. 모든 갈등과 고통에는 그분의 뜻이 있습니다. 언제나 그분이 함께하십니다. 주님의 허락 아래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더 이상 무슨 격려가 필요하겠습니까? 어쩌다가 생긴 일도 아니고 운명의 소산도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삶에 우연이 끼어들 여지는 없습니다. 운명의 바람이 부는 대로 나부끼는 풍향계 따위에 비할 수 없는 존재들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정말로 자녀들을 마약에 취한 강도나 무자비한 기업사냥꾼, 사악한 상사의 손아귀에 맡겨 버리실 것이라고 믿습니까? 당장 그런 생각을 버리십시오.
"네가 물 가운데로 지날 때에 내가 함께할 것이라. 강을 건널 때에 물이 너를 침몰치 못할 것이며 네가 불 가운데로 행할 때에 타지도 아니할 것이요 불꽃이 너를 사르지도 못하리니 대저 나는 여호와 네 하나님이요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요 네 구원자임이라”(사 43:2-3).
만왕의 왕이요 전능한 주권자께서 사랑의 손으로 그 백성들을 보호하십니다. 그분이 누구십니까? 삶의 모든 환경을 감찰하시고 기꺼이 선한 것들로 채워 주시는 분이 아닙니까? 하나님은 무엇이든 먼저 사랑의 필터로 걸러 낸 뒤에야 자녀들에게 나눠 주십니다. 마가레트 클라크슨은 「은혜는 겨울에 잘 자라는 나무⌟라는 책에 이렇게 썼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은 제아무리 강한 충격에도 꼼짝 않는 바위 같아서, 고통스러운 마음을 넉넉히 감출 만하다. 삶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모든 일 가운데 우연은 없다. 사탄이 벌이는 것일 수도 있지만, 그 역시 주권자 되신 하나님의 손바닥 안에 단단히 붙들려 있을 뿐이다. … 사탄은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다. 그러므로 주님의 허락 없이는 그분의 자녀들을 건드릴 수 없다. 하나님은 인류 역사의 주인이실 뿐만 아니라, 구원받은 이들 하나하나의 개인사를 주관하는 분이시기도 하다.“
*주권자를 찬양하는 노래를 잘 배워 두십시오. "하나님이 최선을 알고 계십니다"가 첫줄 가사입니다. 겸손하게 그분께 의뢰하는 기도를 드리십시오.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하고 의지합니다. 저는 주님의 소유입니다. 무슨 일이든 하나님을 통해 온 것임을 믿습니다."
당부하고 싶은 얘기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이라는 교리는 크리스천들에게 큰 도전을 줍니다. 조금씩, 지속적으로 공부하십시오. 하지만 아직 무르익지 않은 상태에서 함부로 나누지는 마십시오. 사랑하는 이의 얼굴에 불쾌한 기색이 보이거든 "하나님이 통치하신다"는 진리를 무리하게 밀어붙이지 마십시오. 거만한 목소리가 진리를 가릴 수도 있습니다. 조심해야 합니다.
격려해 주십시오. 하나님의 방법은 언제나 옳지만, 상대방이 이해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못 알아들을 수도 있고, 어렵다고 고개를 흔들 수도 있고, 심지어 고통스러워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주님의 길만이 올바른 통로입니다.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 8:28).
*문젯거리들을 잘 관리하고 계십니까? 좋습니다. 그러나 문젯거리에 휘둘리고 있지는 않나요? 마음에 늘 염려를 품고 사는 사람은 그렇게 되기 쉽습니다.
염려를 떨쳐 내지 못하면 비싼 대가를 치를 수밖에 없습니다. 헬라어에서 '염려' 라는 말은 나뉜 마음'을 뜻하는 단어에서 나왔다고 합니다. 근심은 중심을 쪼개 두 마음을 품게 합니다. 걱정은 내일의 문제를 해결하는 열쇠가 아닙니다. 오늘의 기운을 빼는 구멍일 뿐입니다. 비전이 왜곡되고, 에너지가 낭비됩니다. 잃어버린 힘을 누가 다시 채워주겠습니까?
어떻게 하면 염려를 떨쳐 버릴 수 있겠습니까? 사도바울은 두 방향에서 해답을 제시합니다. 하나는 하나님이 감당해 주셔야 할 몫이고, 나머지는 우리 손에 달린 문제입니다. 크리스천으로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기도와 간구입니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모든 일을 오직 기도와 간구로 하고,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빌 4:6).
걱정을 덜 하고 싶습니까? 기도를 더 하십시오. 두려움이 가득한 눈길로 앞을 내다보지 말고 믿음이 넘치는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십시오. 처음 듣는 얘기가 아닐 겁니다. 성경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기도를 강조합니다. 예수님은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눅 18:1) 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바울은 "기도를 항상 힘쓰고 기도에 감사함으로 깨어 있으라" (골 4:2)고 권면합니다.
야고보는 "너희 중에 고난당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기도할 것이요 즐거워하는 자가 있느냐 저는 찬송할지니라"(약 5:13)고 선포합니다.
무슨 일인가를 두고 걱정하기보다 모든 일에 기도하십시오. '모든 일'이라고요? 기저귀를 갈거나 데이트하는 일도요? 업무와 관련된 회의나 깨진 욕조 수리하는 일도요? 늦어지는 일뿐만 아니라 아직 시작되지 않은 일에 대해서도 기도해야 하나요? 그렇습니다. 모든 일을 기도로 주님께 말씀 드리십시오. "아무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여러분이 구할 것을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아뢰십시오." (빌 4:6, 우리말성경).
*하나님 아버지도 똑같이 명령하십니다. "내 곁에 딱 붙어 있어라. 뭐든지 내게 이야기하거라. 내게 기도해라. 나를 들이마시고 걱정을 내뿜어라." 하늘 아버지를 바라보면 걱정이 줄어듭니다.
자녀들이 인생 여정에서 무슨 일을 당하는지 주님은 알고 계십니다. 어서 집에 돌아갈 수 있도록 돕고 싶어 하십니다.
모든 일을 기도로 아뢰십시오.
감사를 빠뜨리지 마십시오. 바울은 기도와 감사라는 두 가지 원료를 제시했습니다. "여러분이 바라는 것을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아뢰십시오." …
두 번째는 기도의 단지입니다. 진료실을 나서자마자 곧장 문제를 하나님 손에 넘겨 드립니다. "하나님이 나의 주인이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입니다. 내게 일어난 모든 일들이 주님을 통해서 온 것임을 믿습니다." 여기에 씩씩한 감사를 덧붙여서 마무리를 합니다. 그리고 곰이나 사자를 때려잡았던 지난날의 일들을 돌아봅니다. 사냥 얘기가 아닙니다. 남들이 다 불가능하다고 했지만 결국 세금을 환급받았던 일, 누군가가 적절한 시기에 꼭 필요한 조언을 해 주어서 위기를 넘겼던 일, 예약을 못 해서 비행기를 못 탈 뻔했는데 갑자기 빈자리가 났던 일을 생각합니다. 과거를 돌아보면 미래를 준비할 힘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인간의 몫은 기도와 감사뿐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어떤 일을 하십니까? 평강을 주시고 보호해 주십니다.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빌 4:7). 믿음의 기도가 하나님의 평강을 불러옵니다. …
걱정은 의무가 아니라 선택입니다. 주님은 자녀들을 '걱정 면제 지역'으로 인도하십니다. 어서 기도하십시오. 문제에 초점을 맞추지 말고, 그분이 주실 승리를 바라보십시오. 주께 간구했으면 나머지는 그분의 몫으로 남겨 두십시오. 하나님이 누구도 알수 없는 놀라운 평안으로 지켜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분 앞으로 돌이키는 이들을 보호하십니다. 계속 두들겨 맞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드십니까? 주님이 멀리 계신다는 뜻이 아니라 아주 가까운 곳에 머무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주인 되심을 인정하고 받아들이십시오. 그만큼 주님을 신뢰하십니까?
하나님이 빈말을 하신 적이 있나요? 약속을 지키지 않으신 적이 있습니까? 수십 년 동안 하나님을 따라다닌 끝에 여호수아는 이렇게 결론짓습니다.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족속에게 말씀하신 선한 일이 하나도 남음이 없이 다 응하였더라" (수 21:45). 하늘나라 사전을 펼치고 '확실성'이라는 단어를 찾아보십시오. 아무 설명도 없이 하나님 이라고만 되어 있을 겁니다. "우리는 미쁨이 없을지라도 주는 일향 미쁘시니 자기를 부인하실 수 없으시리라'(딤후 2:13).
하나님이 실수하신 게 있다 싶으면 목록을 만들어 보십시오. 너무 짧다고요? 반대쪽에는 주님이 용서해 주신 잘못들을 나열해 보십시오. 어떻습니까? 그처럼 여러 차례 허물을 용납해 준 이가 하나님 말고 또 있습니까? 성경은 말합니다. "여러분을 부르시는 분은 신실하시니 이 일을 또한 이루실 것입니다" (살전5:24)
주님은 마음 놓고 기댈 만한 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 하시기 때문입니다(히13:8). 하나님은 변함이 없습니다. 바로 그 주님께서 '안정된 시대를 누리게 하실 것 입니다(사 33:6).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시편기자는 노래합니다. '내가 두려워하는 날에는 주를 의지하리이다"(시 56:3). 이사야의 고백도 감동적입니다. "보라 하나님은 나의 구원이시라 내가 의뢰하고 두려움이 없으리니 주 여호와는 나의 힘이시며 나의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심이라" (사 12:2).
하늘 아버지는 자녀들의 걸음을 인도하시며 삶의 구석구석까지 기쁨이 넘치게 하십니다(시 37:23-24). 세상의 조건은 중요하지 않습니다.
*날마다 내 마음은 하나님 안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
이토록 하나님의 사랑 안으로 깊숙이 내려가려는 소망을 가진 이들에게 성경은 닻을 제공합니다. 이 말씀을 붙들고 더 심원한 곳까지 이르십시오.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요일 4:16).
짧은 말씀이지만, 하나님의 지극하신 사랑을 선명하게 보여 줍니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그렇게 사랑하신다니, 놀랍지 않습니까? 사람들은 '때문에 사랑합니다. 귓가에 들려주는 달콤한 얘기나 웃을 때마다 두 볼에 생기는 보조개 때문에 좋아합니다. 매력이 없어지면 사랑도 없습니다. 사람들은 '때문에' 사랑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릅니다. '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하십니다. 그러기로 작정하셨기 때문에 좋아해 주십니다.
사랑이 시작되는 출발점이 상대가 아니라 하나님 자신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에는 합당한 이유가 없으며, 무조건적이고, 언제나 한결같습니다. 주님은 크리스천 하나하나를 그런 사랑의 대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적으니라. 여호와께서 다만 너희를 사랑하심을 인하여.. 속량하셨나니" (신 7:7-8).
인간은 하나님의 사랑에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나무의 나무다운 속성, 하늘의 하늘다운 본질, 바위의 바위다운 특성을 좌지우지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베풀어 주시는 사랑의 속성에도 아무런 영향을 미칠 수 없습니다. 그럴 수 있었더라면 사도요한은 성경을 기록하는 데 더 많은 잉크를 들여야 했을 겁니다.
"하나님은 가끔 사랑이시라" 또는 "하나님은 내키실 때만 사랑이시라", 날씨가 좋을 때만 사랑이시라고 썼을 겁니다. 상대의 행동이나 모습에 따라 변한다면 그건 인간의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사랑하시지 않습니다.
*마르지 않는 사랑의 샘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예루살렘 성밖, 군데군데 잡초가 자라는 황량한 언덕에 그런 샘이 있습니다. 가시관을 쓰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셨던 바로 그 자리입니다. 사랑받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들면, 그 언덕을 오르십시오. 자신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오랫동안 그리고 깊이 묵상하십시오.
극한을 향해 치닫는 고통을 견뎌 내느라 예수님은 질끈 눈을 감으셨습니다. 십자가를 메고 오는 동안 두 어깨가 모두 벗겨져서 마치 날고기를 얹어 놓은 것 같습니다. 꼭 다문 입술은 온통 갈라졌습니다. 순간순간 가쁜 숨을 몰아쉽니다. 피투성이가 된 하나님의 독생자. 그분의 얼굴을 볼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세상의 기준 따위는 잊어버리십시오. 얼마나 자주 그런 함정에 빠지는지 모릅니다. 건강하고 성공한 사람을 보자마자 생각합니다. "저렇게 건강과 돈과 행복 그리고 좋은 솜씨를 주신 걸 보니 하나님이 정말 사랑하시나보다."
아니면 정반대쪽 극단에 치우칩니다. 한없이 처량하고 연약한 모습으로 병원 침대에 누워서 단정 짓습니다. "주님은 나를 사랑하시지 않아. 내 꼴을 좀 봐. 어쩌면 내게 이러실 수가 있지?"
착각을 버리십시오. 성공했다는게 하나님이 사랑하신다는 증표가 될 수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갈등과 고통도 주님이 사랑하지 않는다는 신호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판단하는 절대적인 기준은 형편의 좋고 나쁨이 아니라 죄의 대가로 독생자를 십자가의 제물로 내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좀 더 자주 십자가 언덕으로 산책을 나가십시오. "날마다 내 마음은 하나님 안으로 깊이 빨려 들어간다"는 브레너드의 얘기가 무엇을 말하는지 실감하시게 되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의 초대를 받아들이십시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같이 나도 너희를 사랑하였으니 나의 사랑 안에 거하라" (요 15:9).
'거한다'는 말은 거기에 산다는 뜻입니다. 일단 자리를 잡으면 날이 갈수록 주위 환경에 익숙해집니다. 자기 집 마당에 차를 세우고 "차고가 어디 있지?"라고 묻는 이를 보셨습니까? 설계도를 뒤져 본 다음에야 부엌을 찾아가는 집 주인이 있던가요? 거한다'는 건 그만큼 익숙하고 편하다는 소립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사랑 안에 거한다는 얘기는 그분의 사랑으로
집을 삼는다는 뜻입니다.
*제자들은 로마병정들을 따돌리고 숨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은 떨쳐 버릴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이런 사연을 들었을까요? 만약에 그랬다면 확신을 갖고도 남았을 겁니다. 예수님을 버리고 도망쳤습니까? 그래도 주님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베드로가 이 글을 썼더라면 좀 더 강한 동사를 사용했을 겁니다. 버리다' 대신 '부인하다'라고 했겠지요. 예수님을 부인하고 도망치셨습니까? 그래도 주님은 여전히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시험을 당하시는 동안, 베드로도 자기 문제를 끌어 안고 시험을 치러야 했습니다. 모닥불 옆에서 곁불을 쬐는 중이었습니다. "한 비자가 나아와 가로되 너도 갈릴리 사람 예수와 함께 있었도다 하거늘 베드로가 모든 사람 앞에서 부인하여 가로되 나는 네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겠노라 하며... 저주하며 맹세하여 가로되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 하니 닭이 곧 울더라"(마 26:69-70,74),
베드로의 믿음은 기복이 무척 심했습니다. 믿음이 치솟았을 때는 주님이 '반석'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실 정도였지만(마 16:16-19), 바닥까지 곤두박질쳤을 때는 '사탄'이라는 소리를 들여어 했습니다(마 16:21-23). 베드로처럼 집요하게 충성을 다했던 인물은 다시없을 겁니다. 동시에 그만큼 용서받기 힘든 실수를 저지른 사람도 없었습니다.
다른 사람도 아닌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다니요. 두 발로 물 위를 걸었던 게 누구입니까?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요? 5천명을 먹이는 기적의 현장에서는 두 손으로 직접 빵을 떼어 주었습니다. 변화산에서는 예수님 곁에 모세와 엘리야가 선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습니다. 스스로 입술을 열어 충성을 맹세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나십니까?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 베드로가 펄쩍 뛰면서 대답했습니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마 26:34-35).
결과는 예수님 말씀대로였습니다. 더도 덜도 아닌 딱 세 번이었습니다. 험악한 분위기를 모면하려다 보니 가장 사랑했던 이의 이름을 저주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러자마자 닭이 울었습니다. '꼬끼오' 하는 닭 울음이 베드로의 귀에는 감옥 문이 '쾅!'하고 닫히는 소리로 들렸을지도 모릅니다. "주께서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니 베드로가 주의 말씀 곧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번 나를 부인하리라 하심이 생각나서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눅 22:61-62).
"이제 나 같은 건 쳐다보지도 않으실 거야' 베드로는 그렇게 생각했을 겁니다.
그러나 이번에도 틀렸습니다.
*죽음에서 돌아오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뿐입니다. 그리고 사랑의 주님만이 의심하는 자를 위해 다시 찾아오십니다.
하나님을 버려도 여전히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부인해도 여전히 사랑해 주십니다.
하나님을 의심해도 여전히 사랑해 주십니다.
바울은 확실히 믿었습니다. 여러분도 그러십니까? 정말 외롭다고 생각했던 시절에도 주님이 함께하셨음을 이제는 아시겠습니까? 혼자가 아니었습니다. 버려진 채 사랑받지 못한 적은 한 번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을 저버렸던 시절에도 주님은 여전히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그분의 낯을 피해서 숨었을 때도 꾸준히 찾아오셨습니다.
혹시 주님을 부인한 적이 있습니까? 그리스도께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과 어울려 다니는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의 이름이 수면 위로 떠오르면 잔뜩 취한 사람처럼 저주를 퍼붓습니다. 하나님은 수탉 대신 양심이 소리쳐 울게 하십니다. 마음이 찢어질 듯 아픕니다. 그러나 주님은 잡은 손을 놓지 않으십니다. 비록 그에게 외면당했지만 그로부터 사랑을 거두시지는 않습니다.
의심도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에 회의가 가득하십니까? 좀처럼 가시지 않는다는 말씀이죠? 세상에는 알 수 없는 일들이 부지기수입니다. 죽을 때까지 풀지 못하는 수수께끼도 있을 겁니다. 하물며 이처럼 놀라운 진리가 어떻게 쉽게 믿기겠습니까? 의심은 하나님의 사랑을 끊어 놓지 못합니다.
감옥 문은 영원히 잠기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끊임없이 공급됩니다. "하늘이 땅에서 높음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시 103:11).
성경이 전하는 가장 큰 뉴스는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는게 아니라 주님이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알게 됐다는 게 아니라 그분이 이미 우리를 아신다는 소식입니다. 주님은 못자국난 손바닥에다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의 이름을 문신으로 새겨 놓으셨습니다. 바닷가 모래 수보다도 더 자주 우리들을 생각하십니다. 모든 자녀들을 마음에 품고 계십니다. 잠시도 눈을 떼지 않고 지키십니다. 친절히 배려하십니다. 가창 추한 모습일 때조차 사랑하십니다. 오늘 죄를 저지르고, 내일 다시 실족한다 하더라도 놀라지 않으십니다. 그저 지켜보실 뿐입니다. 하루하루의 삶, 생활 속의 행동 하나하나를 모두 보고 평가하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