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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산동성 조장시 여행기
아침 여섯시 봉동 제네리 고속버스 정류장으로 큰 딸아이가 차를 몰아
배웅을 해 주었다.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는 동안은 남자 하나와 멀찍
이 젊은 여자 하나가 나를 가운데 두고 앉았는데 조금 지나니 버스는 소
리 없이 다가왔다.
반쯤 빈 버스의 앞자리에 모여 있는 일행 속에서 친구 창현이와 조 선생
이 아무데나 앉으라며 엉거주춤 일어섰다. 나는 며칠 전 미팅에서 만난
구면인 일행과 손을 잡으니 정류장에서 본 그 여자는 내 등 뒤에 앉았다.
창현이 앉으며 나에게 여권은 챙겼느냐, 묻는다.
지갑을 들어 보이다 아무래도 인천공항까지는 그를 보고 앉아야 될 것
같아 창가의 여인 옆에 자연스레 앉았다. 몇 마디 더 오고 갔다.
앞에 붙은 의자 주머니에 지갑을 넣으며 나를 쳐다보는 여인에게 머리를
숙이고 등받이를 기대니 편안하게 안긴다. 옆 자리의 그녀가 해외에 가느
냐? 묻는데 코끝으로 분 냄새가 가까이 다가왔다. 대답을 하며 혹, 나와
같은 비행기에 오르지는 않을까, 버스를 기다리면서 부터 곁에 앉은 인연이
궁금해왔다. 나는 어느 나라에 가느냐. 물었다.
이 버스는 김포공항과 인천 국제공항을 가는 버스여서 그런 줄 알았으나 김
포 무슨 구청에 일이 있어 간다는 그녀는 내가 사는 봉동의 새로 생긴 아파
트 단지에 이사를 와 살았다.
나는 초등학교에 다니는 두 아이의 이야기도 들었으며 묻지 않았어도 봉동의
자랑인 오봉산의 숲진 코스나 현대 자동차의 헬스장이며 내가 다니는 군민체
육관의 배드민턴 전용구장을 이용하는 걸 알려줬다.
김포에 들어서자 그녀는 덕분에 참 빠르게 도착한 걸 감사하며 머리를 숙이고
돌아섰다. 여행길에 오른 예감이 좋았다
인천 공항에 도착하니 100g 이상의 액체가 들어 있는 가방은 기내로 들어갈
수 없어 단체 짐들 속에 나도 따라 맡기고 일행을 따라 검사대를 통과하니 목
이 탔다. 나는 중국에서만 쓸 수 있도록 핸드폰을 로밍하고 28번 탑승구에서
만나기로 한 12시 30분까지 서성거리다 물 한 병을 사들으니 삼백 원짜리
물 한 병이 이천 원이다. 지독히 비싼 이 면세점 코너는 알고 보면 시중보다
비싼 것이 더 많으니 일행 중 애연가는 담배만 사라 귀띔이다. 중국 동방 항공
탑승구에 모인 우리는 승무원이 나와 청도 공항의 군사훈련 관계로 한 시간 연
착을 알려주어 기다리면서도 중국 비행기는 싼 것이 싼 것이 아니라는 말을 들
었다. 사십분이 더 지나갔다.
옛날 우리나라 완행열차에 있을 법한 일이 처음 타 보는 비행기에도 있어 의아
했지만 이십분을 더 기다리다 3시 10분이 되어서야 탑승을 하였다,
기내는 완행버스 속처럼 비좁았고 가운데를 통로로 세 명씩 앉은 의자가 양 옆
으로 빼곡이 배열되어 기장 실이 있는 맨 앞까지는 까마득했다.
우리가 28번 탑승구 창 너머로 본 이 비행기는 독일의 루프트한자에 비하면 반쯤
되어 보였어도 158명의 정원을 가득 채웠다. 비행기가 서서히 움직이더니 큰 굉음을
내며 구름 위로 올라서자 인천만의 모습은 지도처럼 검푸른 모형이다.
조금 지나니 스튜어디스는 중국 입국신고서를 작성하라며
모든 탑승자에게 종이를 돌리고 기내식이 앞에서부터 차례로 나누어졌다.
우리는 새벽에 일어나 고속버스 휴게실에서 햄버거 하나를 먹은 것이 전부였다.
개인 경비로는 오십 만원을 걷었으며 중국 산동성 지방 정부의 투자 유치를 위해
4박5일 동안 초청된 사람들이었다.
옆에서는 형편없다 하면서도 모두는 기내식을 깨끗이 비웠다. 한 시간쯤 지나
방송이 흘러나오고 비행기는 구름 밑으로 내려와 고도를 낮추는 듯싶더니 눈
깜박할 사이 다 왔다는 말이 들렸다. 두 줄로 늘어선 여행객들 옆으로 우리는
투자 유치단의 단체라는 이유로 입국 신고서를 내지 않고 여권만 보이며 그대로
나왔다. 칭따오 공항 간판이 덩그러이 영문이었으며 전 창현의 양자라는 조장시
외사과장의 가이드를 받을 거라는 이야기는 일찍부터 들었었다.
출구를 빠져나와 가방을 찾은 우리 일행 중의 하나가 똑같은 가방이라며 바뀌
었다 하자 공항 직원이 앞서 공안 사무실로 뛰어 갔다. 바뀐 가방에는 한국인의
명함과 만 불의 미화가 들어 있어 그 어망사업을 하는 대표를 기다리며 청도 공
항 밖의 거리를 지켜 보아야 했다.
조장 시청 소속의 미니버스에 올라 우리는 청도 공항을 나와 육차 선을 달리니
한인촌인 듯 한글 간판이 대로를 따라 이어졌다. 한 시간여 나지막한 집들의 대
로변을 지났어도 신호등이 없고 자동차가 한산한 시 외곽의 거리는 끝이 가물가물
텅 비었다. 그러나 내가 간판 속에서 쇠 금자가 세 개 포개진 보지 못한 한문이
자주 눈에 띄어 가이드에게 물으니 그것은 신자라 하지만 뜻은 모른다 하며
이름을 쓸 때 많이 사용한다고 하였다. 그가 이어서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윗 상자와
아래 하자가 붙은 카 자는 만든 지 얼마 안 된 글자라며 오르고 내리는 뜻을 담은
글이라는 것도 가르쳐 주었다. 주유소에 들르니 주유기는 낡아 보였어도 우리나라
처럼 주유 구에 삽입하는 형식은 똑같았다. 그러나 오도바이가 오면 주전자에
기름을 넣어 파는데 꼭지부분에 짧은 호스가 끼워져 손님들이 스스로 주유를 했다.
한참을 달리니 멀리에서 큰 강줄기가 내려와 길옆으로 흘렀다.
여기를 몇 번쯤 다녔을 창현이 에게 무슨 강이냐 물으니 수나라 양재가 만든
수로라며 중국의 강은 폭이 넓어 끝이 안보일 정도라 한다, 우리가 뛰 놀던 만경
강은 어린 내가 쉽게 건너다니는 강이 그게 강인 줄 알고 살았었는데 엄청난
물줄기를 보고 큰 숨을 뱉었다.
홍도라 쓰여 진 편도 이차선의 고속도로 출입로에 들어섰다. 높은 곳에서 보이는
탁 트인 광활한 들판이 지평선으로 이어지고 가도 가도 작은 산하나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네모난 물이 고인 웅덩이가 우리나라 같으면 혹 미나리 깡이나
될 범 직도한데 여기는 농작물을 심지 않는 습지인 듯 키가 작은 잡초만 무성하게
끝이 없이펼쳐졌다.
자동차 앞에는 중국 공산당 기와 오성기인 국기가 꽂혀 공무원의 거동을
알려주고 길이 막히면 사이렌을 불며 앞지르기를 하였다. 아스팔트
표면 위에는 흙이 뿌옇게 묻어 우리 차는 고막이 아프게 기를 쓰고 세 시간
여를 달렸다. 차는 앞자리와 간격이 좁아 무릎이 끼인 모두가 울상이어서 몸
을 떨어대는 이 고물차가 한국에서는 찾으려도 없을 거라며 뒤에서 누군가
불평을 늘어놓았다.
한글로 된 슈퍼마켓이라 쓰인 붉은 전기가 들어오는 간판을 보고 휴게실에 들
르니 우리나라 오천 원짜리 뷔페식은 나무젓가락만 있었지 호크나 수저는 보이지
않았다. 우리는 아직도 세 시간은 더 가야한다는 말을 들었으며 누군가 밥을
먹고 식당 종업원에게 물을 달라 하자 그것은 옆 슈퍼마켓에서 사먹는 거라며
당당한 얼굴이다.
용무를 마친 우리는 석양의 붉은 옥수수 밭을 끼고 끝없이 달렸다. 모두는 불
만이 극에 오르고 내 입에서도 잠깐 졸리다 무릎이 아파 신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뒷자리의 사람들도 어둠속의 이 소음의 질주에 몸을 비틀며 간간히 죽겠다는
소리가 들려왔다. 가도 가도 끝없는 들판이 왜 자꾸 슬프게 지날까. 어둠이
오고 아마 우리는 목포에서 휴전선까지의 이 거리를 호남평야를 달린다 하여도
산은 눈 안에 쉽게 다가왔었다.
우리는 공항에 앉아 지도를 보며 산동성은 인천과 마주보고 있어 위도 상으로
도 같았지만 중국의 가장 작은 성이어도 한반도만 한 땅이었다. 일곱 시간 거
리의 청도와 조장은 우리는 중국의 큰 지도를 보며 엄지 손톱만한 길이라는
것을 아는 터였다. 그리고 두 개의 성을 지나면 길림성의 우리 땅 요동성이 있
었으며 이곳은 고구려의 땅으로 양만춘 장군의 생생한 역사를 드라마로 보았었
다. 밤을 달리는 사람들은 침묵을 하고 나는 그 때의 대 평원을 생각했다.
중국 시간은 우리나라보다 한 시간이 늦어 로밍한 핸드폰 시계를 보니 목적지는
24시 15분에 도착했다. 이곳은 조장시의 호텔이라 하며 정문 입구의 주차장에 우
리들을 내려주었는데 외형은 하얀 타일이 붙어 허름한 학교 건물을 닮았다.
안으로 들어서니 카펫이 깔린 넓은 홀은 천정이 높고 식당과 카운터와 구내
매점으로 이어져 긴 통로는 호텔다운 면모를 갖추고 있었다. 유리창 옆으로
고급스런 긴 소파와 탁자가 놓여 일행은 잠깐 앉았으나 그곳에서 곧바로 4층의
객실 키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TV도 이십년 전쯤 우리가
쓰던 것이고 두 개의 침대가 작은 간격으로 떨어져 그 사이에는 사물함이 있어 서랍
속에 내일 쓸 물건을 넣으며 여행 가방을 정리했다.
나의 방 짝은 전 창현의 고등학교 동창인 조 선생과 한방을 쓰기로 들었는데 전주
에서 창현이와 약속이 잡힌 날은 이 분도 술자리에서 보는 구면이었다.
샤워기만 달린 욕실에 들어 몸을 씻고 팬티만 걸친 채 누웠다. 내가 여기에 온
이유는 무엇일까?
헬리콥터 한번 타 보지 못한 나는 어느 사람들과 쉽게 어울릴 사람이 없어 누구
나 다 나다니는 해외여행 한번 나간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내 나라 어느 구석
구석인들 가보지 않은 곳이 있을까? 옆의 조 선생이 침대에 오르더니 불을 껐다.
울릉도는 적은 것이 뚝 떨어져 있어 제쳐두었으며 독재자 전 두환의 묵상지인
백담사는 기분이 나빠 그냥 지나쳤었다. 그 흔한 제주도 여행은 고등학교 시절
가야호를 타고 수학여행을 다녀온 사실을 못내 잊히지 못해 살았다.
먼 먼 첫사랑 동화 속의 그 골목 집, 검게 그을린 화산암 숭숭 둟린 돌담과 동아
밧줄로 꽁꽁 여민 솥뚜껑 같은 그녀의 집 지붕은 왜 내 머릿속에 배신처럼 떠다
닐까? 그곳은 풋풋한 내 어린 날의 향수로 금단의 섬이라 못질한 아픔은 이제
다 늙어 그런 것도 그립다. 가물가물 졸려온다. 전 창현 친구는 나에게 아주 저렴
한 해외여행을 이야기 하고 중국의 투자 유치단의 양아들의 실적을 넌지시 비치
며 일류 호텔의 동행인 십여 명의 사박 오일을 말했었다. 나는 창현이 가장 어린
날의 친구라는 인연이 좋았으며 나의 여자친구들은 찻집에 앉아 여행을 하면 이곳
저곳 차를 타고 옮겨만 가도 얻어지는 것이 많을 거라며 동남아 여행이나 유럽의
지중해와 남미의 잉카를 말하기도 하였다.
나는 중국 투자 유치는 안중에도 없었으며 친구 따라 강남을 가는 거라 말했었다.
고속도로를 달려오면서도 이 나라는 너무 크다는 것을 체감하며 요동을
넘겨준 김춘추나 김유신이 찢어 죽일 놈이라고 나도 모르게 입안에 독침이 고여 눈에
힘이 들어갔었다.
둘째 날 아침은 식권을 가지고 일층 연회장으로 들어서니 산동성 조장시 투자
유치단은 삼백 명이 초청되었으며 몽골에서도 왔다고 하였으나 호텔 식탁에는 그리
많은 사람이 되어 보이지는 않았다. 중국의 아침 뷔페는 횟감은 없었어도 호텔에서
나 먹을 법한 중국 고급 요리들이 나왔으며 점심은 만찬이어서 거창할 거라, 일행 중
한 교수가 귀띔을 한다. 그도 투자 유치를 위해 여기에 와 시장의 영접을 받아 이 호텔
에서 잠을 잤었다고 들려줬다. 이들의 투자 유치란 거대한 공장이 아니어도 작은 수퍼에서
부터 주유소 같은 사업을 말하는 걸 들었다.
식사를 마친 사람들은 열대의 미니버스에 나눠 타고 조장시 투자 유치 기념식장으로
출발하니 내 앞자리의 일행 둘이서 이 여행은 전 창현이의 들러리라고 의자 속에 묻
혀 낄낄거린다.
나는 조장 시 번화가의 외형상 모습이 전주의 십년 전 쯤 되어 보인다 하니 뒤에서 일행
중 하나가 그 크기나 인구는 전라북도 반만 할 거라 허리를 구부려 들려준다.
여기는 대부분 외곽으로 빠지면 끝이 없는 사차선 길이 나 있었으며 그 폭은 간선
도로가 있느냐 없냐에 따라 달랐다. 길가에는 단층과 이층 건물들이 즐비하게 지나고
오층 짜리 빌라의 모습이 끝이 뾰족하게 연동으로 간혹 지나쳐 낡은 아파트들은 왜
페인트칠을 안 할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미니버스는 줄줄이 늘어서 행사장에
도착하고 그곳에는 붉은 에드버른에 매달린 현수막들이 일렬로 서 있어 개막식이라
쓴 큰 구조물이 본부석임을 알렸다. 우리나라는 대부분 붉은 것은 위험을 알리는
표시로 많이 사용하지만 이 나라의 붉은 색은 그들이 말하는 행운과 복을 준다는
의식이 뚜렷해 보였다. 붉은 것이 국기요 당기이며 행사장의 모든 깃발이나 북을 치는
사람들의 옷까지 붉었다. 버스에서 내린 사람들이 본부석을 앞으로 펼쳐 놓은 빈 의자에
밀려가 앉았고 무대 위에 삼열로 배열된 의자에는 정장을 한 시청 고관들과
귀빈들이 자리를 하고 한 교수와 전 창현은 맨 뒤 삼열에 앉아 있었다.
나는 일행을 따라 앞으로 갔지만 의자가 없어 본부석을 마주보고 맨 뒤로 갈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는 젊은 공안들이 질서 정연하게 줄을 맞추고 그 뒤로 자기 차의 배번을 표식으로
차장 아가씨들이 어깨띠를 두른 채 앉아 있었다. 그들은 우리의 목에 걸린 귀빈이라 쓴 손바
닥만 한 비닐 표식을 보아선지 한국이라는 말을 하였으며 멀찍이서도 웃음을 내밀어 우리를
바라보았다. 땡볕이 내리고 여기도 한국에 두고 온 무더위가 우리를 따라온 듯 등거죽이 온통
뜨거웠다. 팜프렛으로 빛을 가리다 이마에 땀이 흘러 티셔츠를 들추고 안으로 바람을 일으켰다.
본부석의 알지 못할 인사말들은 몇 명을 지루하게 보내고 이 정도면 창현이에게
체면치레는 했을지 싶어 등을 찌르는 젊은 일행들을 따라 뒤로 빠져나왔다. 사람들이
밀려가고 오며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곳은 먹을거리라 하여 우리는 먼저 세계 중고차
전시장을 둘러보기로 하였다. 입구의 맨 앞줄에는 우리나라 티코와 똑같은 차종이 있어 멈추니
이것은 중국이 티코를 모방하고 그와 똑같이 만들었다고 일행 중 이 교수가 설명을 해 주었다.
"중국은 이제 자동차도 만들 수 있는 나라입니다. 현대 자동차가 북경의 모든 택시를
현대차로 바꾸게 하는 대신 북경에 현대자동차 생산 공장을 짓기로 하였습니다." 자신에
찬 일행 중의 젊은 친구는 잘 생각한 거라며 우리가 일본보다 먼저 선수를 친 거라 강조한다.
중고 전시장은 세계의 승용차들이 새 차로 손질을 해 가격표를 붙였으며 중형의 벤츠나
폭스바겐. BMW. 현대 기아 차들도 즐비하게 한편을 차지했다. 그러나 어느 나라나 대형의
고급 차는 없었다. 우리가 청도에서 조장 시까지 고속도로로 오는 동안
놀란 것은 이 나라에는 산업용 자재를 실은 트럭이나 컨테이너를 싣고 달리는 차들이
많다는 것과 가끔씩 큰 화물차들이 밀려들어 비껴가기가 쉽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런 추세라면 이들의 노력은 서구 선진국이나 일본이나 우리나라의 고급 기술 도입으로
어느 정도 면모를 갖추고 있을 지 싶었다.
아침에는 샤워를 하려 욕실에 들어서니 모든 세면도구는 중국제 였는데 머리를 말리는
드라이기는 그런 대로 양호 하나 세면 비누의 질은 너무 떨어져 거품이 나지 않았고
일회용 면도기는 아예 털이 뽑히듯 아파 집에서 가져간 것으로 사용하니 부드럽게
수염이 밀렸다. 어쩌면 이런 모자란 부분들은 우주 항공기나 스텔스기를 만드는
나라여서 몇 년쯤 지나면 생필품도 우리 뒤를 바짝 따라 붙지나 않을까?
두려움이 일었다. 내 봉동 후배가 여기에 와서 마대공장을 할 때만 해도 I, M, F,
전이였는데 직원들 봉급이 한 달 칠팔만 원으로 벌써 옛날이야기라며 무섭게 변한다고
들려주었었다.
현재는 기술과 과학이 그 나라의 경제를 좌우하고 국민의 부유를 보장하는 것쯤은 잘
알아 중국도 사상과 시장 경제를 조율하는데 성공한 나라라 말했었다. 참으로 땅덩이가
커서 부자인 이 나라는너무 커서 아직도 손이 미치지 못하는 곳이면 잡풀이 우거져
개발하지 못한 대 평원이 펼쳐졌었다.
여기에 비하면 작은 우리나라는 자갈밭이라 하여도 어디 한 뼘의 땅을 놀리는 곳이
있었던가. 나는 농사꾼이었고 어머니와 아버지는 전주 제 3공단이 들어와 땅값이
금값이었어도 한 조각의 땅이라도 당신의 피 같은 살덩이라 여기며 내가 죽은 다음
팔아라. 하셨었다 그러나 이제 촌놈이 되기 싫어 떠나려니 땅은 도시계획이 들어서
주거지역이 되고 투기를 막는다는 이유로 세금만 33퍼센트로 국가의 이익을 앞세웠다.
어쩌면 농사를 오래토록 지은 촌놈은 그대로 농사꾼으로 죽으라는 법이 내 나라 법이었다.
그러나 내 땅이 이렇게 광활한 땅덩이라면 트랙터로 며칠을 밀고 미는 재미면 숱 검뎅이가
되어 어느 계집이 나를 싫다하여도 까짓것 농사꾼이 되어 대농의 꿈이 있었을 것이다.
혹자는 내가 부자인줄 알고 나를 추천해 투자 유치단에 넣어 왔을 거라 하였다.
뒷짐을 지고 어슬렁거리며 다니다 변이 마려워 일행 중 세무사와 화장실로 들어서니
이런 황당 일이 있을까? 이 현대식 건물에 좌변기는 고사하고 화장실 문짝이 없어
마주 보는 앞 사람의 그것이 달랑달랑 보일 것 같았다. 안에까지 들어서다 남자의
소변기가 없어 후다닥 돌아서 나와 입구 표지판을 보았다. 여자의 표시가 너무 작아
잘못 들어간 곳이었다. 남자 화장실로 들어서니 한 쪽은 소변기가 현대식이고 한 쪽은 변기도
없는 우리의 옛날 시멘트 푸세식인데 여기도 여자와 마찬가지로 문짝이 없었어도 그래도 앞
벽을 보며 일을 보게 해 놓았다.
급한 김에 맨 끝 쪽을 택하고 쪼그려 앉으니 머리카락이 앞 벽에 닿아 뒤로 물렸다.
중학교 시절, 조회 시간이면 훈육 선생님이 조회대에 올라와 정조준을 잘못한 놈이
많다고 악을 쓰며 똥구멍이 비틀어진 놈은 죽을 줄 알아라. 하던 생각이 떠올랐다.
그 긴 몽둥이가 나를 가리키는 것만 같아 헛웃음이 났지만 나는 세면대 옆의 빈 물병에
물을 담아 몇 번이고 골인 하지 못한 그것을 치웠다. 토종 한국산이 버젓이 욕을
얻어먹고 그대로 남아 있는 것은 굴욕이어서 뒤돌아 나오면서 바짓가랑이에 튀어 오른
물방울을 털어 내다 손을 씻으니 뱃속이 시원해 왔다.
“왜 이렇게 늦어, 배탈 났어” 일행의 세무사가 물었지만 음식을 바꿔 먹어서 라며 나는
건너편 건물을 가리키며 그곳으로 향했다. 투자 유치단 행사가 끝났는지 조금 전 그곳은
공터가 되어 있었고 옆 건물로 들어서니 옷들은 끝없이 진열되어 있었어도 한물간
상품인 듯 눈에 드는 것이 없어 빠르게 그곳을 빠져 나와 그늘을 찾았다.
하도 많은 사람들 속으로 우리가 타고 온 미스버스를 지켜보며 난간에 앉아 있으니
중국인 아들과 어머니가 아는 척을 하며 다가와 무슨 말을 하는데 알 수 없었다.
넓은 이 공간에서 다시 만나 반갑다는 말인 듯싶었다. 이 모자는 자동차 전시장에서
소나타 자동차를 구경하며 한국 차가 좋다는 말을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고 자기도
훗날 이걸 타고 싶다고 손짓으로 말하였었다. 우리는 일행을 기다리며 그녀와 한문을 써
가며 소통하고 나의 직업을 임대업이라 쓰니 모르는 듯하여 시인과 소설가로 쓰자 아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 곁에 바짝 붙은 어머니는 내 손에서 종이 한 장 꺼내 한국말을 배우고
싶다는 뜻을 종이에 적었다.
그의 아들이 청도 대학 계산과라는 글을 보고 어머니가 아들의 장래를 생각해 우리에게
호감을 갖는다, 하자 세무사는 자기의 전화 번호를 아르켜 주었다.
우리는 일행을 따라 버스에 올랐다. 버스는 산업시설을 들러 늦은 점심을 먹고 침대 위에
길게 누우니 조 선생이 창현이의 방에서 한잔하자 한다. 방에는 한국에서 가져온 고추장과
멸치가 침대 위에 있었으며 주당들은 이미 둘러 앉아 팩으로 된 소주에 빨대를 꽂아 빨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은 맛사지 방을 가자며 밖으로 나갔다.
세째 날 아침, 밥을 먹고 시청 미니버스에 오르니 항일 전시관을 갈 거라 한다.
시내의 거리를 지나며 여기는 미니버스가 많다 하자 근거리는 이런 버스를 대중교통으로
운행하며 먼 거리는 큰 버스가 영업을 한다고 한 교수가 들려줬다. 삼십분을 넘게
시내를 빠져 나오다 길 가 건물 뒤로 부서진 패기물이 많아 물으니 올림픽이 지나간
후유증이라 한다. 큰 길 옆의 전쟁 전시관은 높은 충혼탑이 서있고 그 때의 비행기도
입구에 전시용으로 있었으며 높은 돌계단을 오르니 벽면에는 승전 전적지와 그 때의 처참한
죽음이 사진으로 나열 되어 항일 전쟁을 이끌어간 사람들의 얼굴이 크게 돋보였다.
나는 몇 발자국 들어서다 뒤 돌아 나오며 꼴이 나라가 워낙 크다 보니 작은 나라에 밀리고
내주면서도 기회를 노렸다고 하는 거라 싶었다. 나는 어려서부터 우리나라는 너무 작아
한 입에 일본 놈에게 털어 넣어 준 삼십 육년이 너무 쪽팔렸고 어른이 되면서 경제 대국의
그 징후들이 우리도 머지않아 선진국으로 작지만 큰 나라가 될 거라는 희망 속에 세종대왕
이나 이순신 장군이나 안 중근 의사나 윤 동주 시인을 사랑하며 살았다.
그래서 한 번만 더 용솟음치면 일류 국가로 근접하리라 여겼으며 미운 옆 집 놈들이려니
비위를 다스텼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처음 보는 대 주점이라 쓰여 진 호텔 식당으로 점심을
먹기 위해 들어섰다.
코스 요리로 둥근 탁자에 둘러앉으니 그만 나와도 되겠다, 싶으면 놓을 자리가 없어도
가져온 음식을 용케도 식탁 위에 올려놓았다. 고추가 들어 간 맵고 간간한 육류가 많아
모두가 입에 맞는다 했지만 여기 중국 음식은 모두 기름에 튀긴다는 말은 믿을 수가
없었다. 조장호텔의 요리도 싱거우면 소금만 뿌리면 입에 맞았는데 우리나라 호텔은
중국식의 그것과는 비교가 안 돼 만찬일수록 담백한 그 맛이 깊고 다양한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열 명의 일행이 버스를 타고 습지로 가면서도 먹으러 온 여행 같다고 구경하려면 많이
걷는 곳으로 가자, 이구동성이 되었다. 버스 속은 배부른 침묵이 이어지고 나는 버스 속의
침묵이 싫어 우리 나이가 가질 수 있는 삶 속의 잡스러운 것들을 웃음 섞어
이야기하다 뒷좌석의 중국 여인 하나는 귀머거리니 괜찮다 떠들어댔다. 일행 중 후배가
모자를 벗어 강의료를 걷어야 한다 했지만 웃고 말았다.
두 시간을 달려 유네스코 지정 세계문화유산 이라는 산동성 등주시 미산호 습지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연밥이며 오리 알이며 보지 못한 습지의 생산물들을 여인네들은
선물용으로 포장하여 가판대에 늘어놓았다. 선착장에는 백여 명 이상이 탈 수 있는 이층
여객선이 대기하고 우리는 배에 올라 강처럼 수심이 깊은 수로의 한 가운데를 따라
앞으로 나갔다. 연잎과 물풀이 수로 옆으로 넓고 넓은 바다를 이루고 멀리 검은 기름 때
저린 목선 들이 큰 군함처럼 군데군데 정박해 자세히 보니 그 중 배 하나에서 웃옷을
벗은 어부가 손을 흔들었다. 어느 곳은 물풀에 가려 작은 동산이 잘 구분되지 않았는데
수평선은 어느 곳에 눈을 돌려도 끝이 없고 수로가 나지 않은 곳은 수심이 일 미터도
안 되는 곳이 많다고 가이드 청년은 손가락으로 군데군데 가리키며 설명을 해 주었다.
바다 같은 습지, 나는 문득 연개소문이 당 태종을 만리장성을 넘어 습지인 어디쯤 쫒아 갔고
이 세민은 앞으로는 고구려 침공을 중지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들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고종은 신라와 동맹을 맺고 백제를 멸한 다음 고구려로 치고 올라 왔으며 고구려는
연개소문의 큰 아들 막리지 남생의 모반으로 쉽게 북에서도 무너졌다.
우리는 고구려의 칠백년 역사에서 누구나 많은 교훈을 얻었으며 외세와 담합하고 통일을
한다는 것은 그 이후의 더 큰 손실을 익히 아는 터였다. 정치꾼들은 내분이 일고 국론이
흔들이면 전쟁이 아니더라도 천안함의 침몰 하나에서도 우리는 갈등을 겪었다. 형제는
형제고 적은 적이며 우리나라의 군인인 내 아들이 죽는데 어느 국회의원은 전쟁이
일어나길 바라느냐는 나약한 말을 나는 TV에서 들었다. 누가 전쟁을 원하겠는가?
적에게 내 모습을 나약하게 보이면 그들은 우리에게 많은 희생을 요구할 게 분명하다.
전쟁이란 먼 미래를 위해 내가 가진 재산과 내 자식과 나의 목숨도 운명처럼 버려야
한다는 각오가 있어야 승리를 하지 않겠는가? 섬뜩한 마음이 피부를 파고든다.
역사는 우리의 땅 만주와 요동을 버렸다. 북간도는 우리가 살았어도 쉬쉬한다. 강대국에
기죽어 벙어리가 된 두려운 외교다.
나도 지금 이 나라에 투자하려는 자들 속에 섞여 최상의 대우를 받고 그들은 무엇을 원할까
생각을 한다. 여기에 투자를 하고 망해 먹고 몽땅 놓고 돌아온 후배도 보았다. 이 큰 나라가
작은 나라의 기술을 원하는 건 분명하다.
우리가 비행접시 하나만 만들면 작은 나라라 하여도 얼마든지 세계를 하나로 통일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나라가 작아도 슬퍼하거나 분해할 것은 없다.
또 역사는 돌고 돈다.
배는 강줄기 같은 수로를 따라 삼십분쯤 나가다 뱃머리를 돌렸다. 반쯤 돌아오는 길에는
그들의 섬 속의 복원 된 항일 전적지를 둘러보고 휴게소에서 커피를 시키니 커피가 무슨
말인지도 모른다. 호텔 매점에서도 커피라는 말을 몰라 굶은 지가 삼일 째였다.
일행들은 빙과류를 먹고 나무다리를 건너, 섬과 섬 사이를 돌아 왔다.
밤이 다 되어서야 그곳을 떠나 등주에서 조장까지 부서지는 고물버스의 소음과 실내
등이 들어오지 않는 어둠 속으로 오늘 메모해야 할 이야기들은 호텔에 가 쓰기로 하고
졸리는 눈을 감았다.
늦은 저녁은 먹는 둥 마는 둥 창현의 방에 모여 일행들은 어제 먹다만 고추장과 멸치를
침대 위에 늘어놓고 소주를 마시다 새벽 한시가 되어서야 각자의 방으로 돌아갔다.
네째 날 아침 뷔페에서 나는 겨우 죽 한 그릇을 비우며 나흘 동안 채적된 지방을
걱정하고 가이드를 따라 조장시의 대형마트와 재래시장을 보기로 따라 나섰다. 번화가로
들어서니 이 나라는 어디나 횡단보도에 신호등이 없어 사람들이 차선을 무질서하게
횡단하고 큰 거리에 매달린 자동차 신호등은 화살표 방향을 가리키지만 전기 자전거와
오도바이가 제멋대로 자동차에 끼어 크렉션을 울려댔다.
대형마트는 엄청나게 컸다. 물건들이 싸여 통로가 좁았으며 포장된 쌀의 가격을 보니
20KG 우리 돈 만 팔천 원으로 우리와는 너무 격차가 커 입이 벌어졌다. 우리는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다
먹을거리 코너에서 작은 군밤을 십 위안 어치 샀는데 봉투에 가득하다. 유심히 보아도
진열된 상품의 포장되어진 수준이 이미 우리와 같았다.
창현이 우리들을 불러 마누라가 깨를 사오라 했다며 곡물코너로 우리를 데리고
앞서 나갔다. 옷과 신발과 공산품들이 즐비해도 썩 눈에 들어오지 않아 천천히 걸으니
빨리 오라 손짓하며 검은 깨를 손바닥에서 자르르 내려보인다. 우리 중 농사를 지으며
깨의 씨알의 품질을 아는 사람은 셋이나 되어 재래시장으로 가보자며 돌아섰다.
내가 보아도 참기름이 많이 나오려면 씨알이 통통할수록 좋은 거였다.
만경강 변의 모래가 많은 땅은 항상 깨를 심고 이것이 익으면 깻단을 만들어 세워서
말렸는데 깨알을 빼려면 삼베 홋 이불 포를 멍석 위에 펴 그 위에 깻단을 놓고 막대기로
털어 어머니는 키로 바람을 일으켰었다.
재래시장은 도심을 조금 벗어나 있어 다리를 지나며 내려다보니 여기도
하천은 이미 생활 오수에 심하게 오염되어 흐르고 낡은 단층 집 건물이 하천을 끼고
즐비하게 지어졌다. 큰길가 고층 주상 복합 아파트 건물을 옆으로 돌아드니
재래시장은 생물을 파는 곳과 곡물을 파는 곳으로 나뉘어 우리가 사는 전주 공판장의
건물의 규모와 비슷하나 가게들은 길 옆으로만 모여 있을 뿐 안으로는 텅 비었다.
참깨 쇼핑은 예전부터 한국 사람이 중국에서 선호하는 품목으로 우리는 통통한 검은
깨를 10KG 우리 돈 삼만 사천 원에 포장을 하고 한 사람당 하나를 들었으나 나는
그것이 싫어 그만두라했다. 이 깨 십 키로는 한국에 들어갈 때 한 사람의 세관
정량이어서 그렇게만 포장을 했지만 이 깨를 내 조국에 가져가면 십여 만원이 남는
다고 그들은 귀띔을 하였다. 나는 집에 안 사 간다 하여도 바보라 할 여자도 없고
그것을 또 기름집에 맡기고 우두커니 지켜봐야 할 내가 싫었다. 나는 농사꾼 자식으로
태어나 밭두렁에서 자란 놈이고 깨 농사는 부자가 하는 농사가 아니라는 것쯤은 잘 알았다.
깨를 하나씩 들으니 모두 호텔까지는 멀다하고 시내버스가 있는 곳으로
이동을 하며 기다리는데 요행이 텅 빈 미니버스가 조장호텔을 종점으로 다니는 차였다.
우리는 호텔 식당에 앉아 점심 식사를 하며 여기 오래 살다가는 돼지가 될 것 같다는
푸념들을 나눴다.
호텔 소파에 앉아 늦은 일행을 기다리니 길거리에서 보았던 웃옷을 벗은 사람이 카운터
앞을 어슬렁거린다. 벌써 이런 사람들을 큰 길에서도 시장에서도 보았는데 혹 이 나라
문화가 그런 것인지 의문이 들었다. 조금 전 호텔 식당 안에서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을
보고 불과 십여 년 전의 우리의 모습을 상상하며 고개를 돌렸었다. 여기가 꼭 우리나라
어디쯤으로 이국의 맛을 잊어버리기도 하였으나 우리는 부유한 나라의 사람으로
부러워하는 시선은 얼마든지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나라 국민 중 팔억이 어렵고
이천만이 우리의 부유층에 해당한다는 말을 들었을 땐 우리나라 인구의 반이 부유층
이라는 사실이었다.
오후의 일정은 너무 걸은 탓인지 공자의 묘로 가는 것을 포기하고 가까운 인민 공원에
들른 다음 발 마사지를 하자는 의견이 다수여서 나는 마음에도 내키지 않는 그들의
뒤를 따랐다. 공원에는 연로하신 분들이 모여 카드나 장기 같은 걸 두었으며 가끔은 젊은
연인들이 지나쳐 가기도 하고 얼굴이 까맣게 그을린 거지 할아버지는 엎드려 앉아 붉은
인민 패를 한 손에 들고 사람들의 발이 멈추길 기다렸다.
나는 허리를 굽혀 우리 돈 천 팔백 원인 십 원을 그 분의 손 위에 놓고 천천히 걷다
돌아 보았는데 그 분은 돈을 쥔 손으로 몇 번이고 나에게 손을 저었다.
마음이 짠하였지만 동산에 올라 아래를 내려 보았다. 인간은 즐겁기 위해 내가 여기에
왔고 그러기에 발 마사지나 전신 마사지를 받으려 하지 않는가? 나는 순간 기분이 좋은
것은 길거리에 버려진 사람을 도운 성서에 나오는 바리사이파 인의 인정이었다.
중국 여인 하나가 돈을 놓는 것이 보인다.
나는 요사이 한 번도 남을 위해 봉사한 기억이 나지 않았다. 우리는 두 대의 택시에 나눠
타고 앞자리를 앉으니 이 초 미니 차는 우리를 넷이나 태웠는데 곡예를 하듯 자전거와
오도바이를 피해 자동차들의 비좁은 사이로 머리를 들이밀었다. 이 차는 내가 오를 때
택시의 표시가 없어 왜 그런지 의문스러웠지만 삼십년을 운전한 내가 봐도 입이 벌어질
만큼 용감했다. 나는 운전하는 여인에게 손바닥을 펴 천천히 가라는 시늉을 해도
막무가내일 뿐 어깨를 토닥여 주니 하얀 이를 드러내며 가끔씩 머리를 돌려 씽긋 씽긋
웃었다.
마사지 집으로 들어 가 입구에 앉으니 전신 마사지는 우리 돈 만원 이고 한 시간
반을 해주며 발 마사지는 오천 원인데 한 시간이라 한다. 그들이 이층으로 올라가고
나는 인도에 나와 서성거리니 미장원 아가씨가 컴이라는 말로 유리문을 조금 열고
안에서 손짓을 하였다. 밖은 땡볕의 나무 밑이어도 등줄기에 땀이 고여 미장원으로
들어섰다. 에어컨 바람이 시원하게 밀려왔다. 남자 미용사와 또 한 아가씨에게 머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긴 의자에 앉았다.
그녀의 호감은 당신만 왜 밖에 나와 있느냐는 것이었는데 나는 내 몸을 만지는 것이
싫다는 것을 토막 영어와 손짓으로 말하고 그녀도 토막 영어를 해 알아들었지만 이곳
조장시의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의 토막말도 통하지 않았었다. 나는 손톱깎이를 달라
하고 손질을 하며 남자 손님이 머리를 깎는 걸 보다 대중문화에서도 이미 우리나라에
근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 일행인 한 교수는 중국은 해안 가 지방이 많이
발전을 하여 상하이나 북경은 이미 우리나라에 비길 바가 아니라는 말도 들려주었었다.
나는 그들이 호감어린 눈으로 중국말을 해도 알아들을 수 없어 밖으로 나와 큰 길을
건너 상가를 따라 걸으니 골목 안은 초라한 담장의 집들이 보여 입구의 마트로 들어섰다.
중국인 가이드의 말은 절대 혼자 다니지 말라는 주의 사항이 있었으나 내 머리 속에선
창현이의 쥐도 새도 모르게 내장을 빼어 팔아먹는 놈들이 있다는 말이 귀에 남았다.
여기는 어느 가게나 우리와 조금도 다를 게 없어 길을 나설 때마다 어제 마신 똑같은
오렌지 주스 한 병을 냉장고에서 꺼내어 들었다. 삼원을 카운터에서 계산하고 뚜껑을
틀어 땄다. 한국에서 마시면 천 원인 것이 여기서는 오백 원인 샘인데 상가 안은 손님들이
시원치 안아 퇴근 시간 이후인 걸 감안하면 변두리라 장사가 어려워 보였다.
한 교수나 전 창현이도 사업가요 젊은 날부터 유통 사업을 하며 농지를 관리한 내가
중국이라는 나라의 개방된 경제정책을 이해할 것 같았다. 이 거대한 나라의 시장에
무엇을 투자하며 장사를 해야 될까. 나는 내 호주머니 사정으로 어림도 없다는 것을
알지만 그들은 투자 유치를 하고 이익이 난다하여도 그 이익금을 한국으로 가져가는
것은 쉽지 않다는 말을 했었다.
우리는 조장시를 들어오는 길에서도 한글 간판의 삼성, LG, 현대 기아나 심지어는
병원이나 주유소, 작은 상점, 휴게실에 이르기까지 많은 투자의 흔적을 보았으며
습지에 가는 길에도 베지밀의 대단위 공장이 옆에 있다는 말도 가이드로부터 들었다.
한글로 된 이정표도 우리는 흔히 보았으며 항일 전적지에서도 그곳의 안내문이 우리나라
글로 두 번째에 자리한 것을 보았다.
조장 시에서도 우리 중 몇은 투자 비중이 커서 호텔식을 4박5일로 투자했으리라 싶었다.
오렌지주스를 마시며 인도에 걸터앉아 기다리니 맨 먼저 근화씨가 안마 집을 나오며
여기는 서비스가 엉망이라며 미얀마 아이들은 땀을 뻘뻘 흘리며 성의를 다한다고
투덜거렸다. 하나 둘 나오는 일행 중에는 기분이 좋다는 사람은 없고 간지럽다거나 별
볼일 없다는 투정이다.
나는 택시를 잡고 조장호텔 카드키를 보이며 가자하니 한참을 달렸어도 오원이라는
말을 한다. 우리나라 돈, 구백 원인 이 택시 가격이 우리나라 오천 원은 달렸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문 앞까지 태워준 이 똥차 기사님에게 허리를 구부려 쎄쎄라는
말을 하고 남은 돈 이원을 팁이라 하며 내주었다.
얼굴 가득 깨끗하고 순박한 웃음이 흘렀다. 나는 한국에서 볼 수 없었던 이 순수한
미소를 투자 유치단 행사장에서 그, 주 평지 여인에게도 보았으며 나에게 손톱깎기를 내어
주던 미용사 아가씨의 수줍은 얼굴에서도 한국인에 대한 따뜻한 중국을 읽었다.
샤워를 마치고 큰 대자가 되어 있으니 조장시 외사 국장의 저녁 마지막 만찬이 있으니
사층 식당실로 오라며 우리 팀만을 초대한 파티라 한다.
여기 특실은 아무리 안 되어도 지름이 십 미터는 됨직한 둥근 탁자에 의자 간격이
띄엄띄엄 떨어져 공산당 수뇌부의 파티를 TV에서 보았던 것처럼 혹여 서열이 있지나
않을까? 나는 문 옆에 자리를 잡았다. 국장이 맨 안쪽 중앙에 앉고 그의 오른 쪽 자리에
청주에서 왔다는 기업가가 국장 다음으로 인사 소개를 했다.
그 사람은 우리가 습지에 갈 때 맨 뒤 자석의 중국인들이었으며 여자는 그의 아내였다.
그러고 보니 한국 기업가의 아내 앞에서 내가 음담패설을 하고 썩은 한국인의 이성을
말했으며 조공으로 붙들려간 여인들의 그 길을 굴욕이라 토했다.
국장이 일어나 가득 담긴 술잔을 비워야 가슴에 정을 가득 담을 수 있다며 원 샷 건배를
청하니 우리 일행들은 그 산동성 오십도 독주인 帝家를 국장을 따라 비웠고 머리 위에
거꾸로 잔을 털어 보였다. 다음 잔은 적은 잔으로 똑같은 술이었는데 한국인 기업가가
원 샷 건배를 청하고 모두는 그렇게 외쳤다. 나는 처음 의자에 앉아 이 작은 병의
독주를 호텔 아가씨들이 잔에 채울 때 이미 마시면 사망이라는 사실을 알아 물을
채우라고 카운터의 물병을 가리켰었다. 멋있게 목을 꺾어 한 모금 들어가니 입안이
뜨겁다. 나는 몸을 돌려 그 중국 여자에게 우거지상으로 입안을 벌려 보이자 영문도
모르는 여인은 태연한 눈치다. 건배를 외칠 때마다 아가씨들은 잔을 채웠고 몇 순배 돌자
일행들이 짝을 지어 웅성거렸다.
상석의 청주 기업인 부부와 국장님 부부도 자리에 일어나 얼싸안으며 취흥의 절정을
이야기 하고 국장 사모님에 전하는 화장품 전달식도 가졌다.
밤 열시 국장이 자리를 떠 술자리는 끝나고 나는 독주 맛을 보았는데 그 기업인은
나를 찾아와 자기가 이 조장시 무슨 고문이라 하며 시청 버스 속에서 삶의 이야기를
재밌게 들었다고 하니 그의 아내도 허리를 반쯤 굽혔다. 새벽 여섯시 공항으로 가기
위해 우리는 입실을 마쳤으며 나는 일찍 잠이 들었다.
다섯째 날, 눈을 뜨니 새벽 4시여서 어제의 일들을 기록하고 샤워를 마치니 방 짝인
조 선생이 만찬장의 일을 물으며 필름이 끊겼었다고 뱃살을 쓸어내렸다.
이 분은 점잖게 들어와 침대에 눕자마자 잠이 드는 듯 했는데 금세 벌떡 벌떡 일어났다
쓰러지며 몸부림을 치고 테이블 밑에 머리를 쳐 박고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 변기통에
두 번 토한 다음 그대로 죽어 버렸었다. 주사가 없는 것은 교사를 평생 몸 바친 탓도
있겠지만 원 샷 한다고 왜 그대로 따라하는지. 중국 사람이 술 준다고 퇴직금 가져다
바칠래요? 하고 물으니 빙그레 웃었다.
우리는 아침 해장으로 나온 스프와 곰국을 먹고 시청 버스에 올라 13시 30분 비행기를
타려 바쁘게 내달려야 했다. 나는 이날 난생 처음으로 고속도로에서 내려 노상 실례한
사실은 그 중국제 제가라는 술은 정말 독한 놈이라고 뱃속의 모든 것을 다 털어 놓고
간다고 쓴 웃음을 지었다.
중국에 매료된 친구 틈에 나는 덤으로 왔지만 이 나라에 와 보면 끝이 없이 크다는 것과
그래서 많은 기업이 들어와 큰 전쟁을 치르고 있으며 이미 고사하거나 비틀거린다는
현실도 들었다.
우리는 전주를 출발한 지 4박 5일의 그 소중한 인연을 가슴에 남기며 서로는 헤어졌다.
도착한 2010년 9월 19일은 사랑하는 내 조국이 눈부시도록 화창했다
첫댓글 마치 내가 조장시를 다녀온듯한 마음으로 잘 읽고 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