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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최고의 와인이 무엇이냐는 질문에는 와인 평론가에 따라 여러 가지 답이 나올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존하는 최고의 이탈리아 와인 생산자'를 얘기하라면 열에 여덟, 아홉 사람은 안젤로 가야(Angelo Gaja·68·사진)를 꼽는다.
세계적인 와인 평론가 로버트 파커(Robert M. Parker)는 '세계 최고의 와인 유산'이란 글에서 "안젤로 가야 덕분에 이탈리아 와인의 혁명이 시작됐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양조학과 경제학을 공부한 그는 1961년 아버지인 지오바니 가야(Giovanni Gaja)가 맡고 있는 와인 사업에 동참했다. 4대째 내려오는 가업이었지만, 그는 남다른 '실험 정신'으로 이탈리아 와인에 새로운 장을 열었다. 최근 방한해 위클리비즈와 단독 인터뷰에 응한 그는 한 가지 일화를 소개했다.
"1978년 아버지가 겨울 휴가를 가셨을 때 일입니다. 아버지 몰래 포도밭 한 귀퉁이에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프랑스 레드와인 품종)을 심었습니다. 후에 사실을 알게 된 아버지는 '나폴레옹이 다시 침공해왔다 해도 이토록 당황하지는 않았을 것'이라며 '달마지(Darmagi·현지어로 유감이라는 뜻인데, 나중에 이 와인의 이름이 된다)'라고 하시더군요."
카베르네 소비뇽은 프랑스뿐 아니라 신대륙을 비롯한 여러 나라에서 잘 자라는 포도 품종이었다. 그런데도 이탈리아에서는 전통을 이유로 재배를 터부시하고 있었다. "피에몬테 지역에서는 800년째 이탈리아 토종(土種) 포도인 네비올로(Nebbiolo) 단일 품종으로만 와인을 만들어왔어요. 그래서 아버지도 프랑스 품종을 심는 데 반대한 것이죠."
결국 '달마지'는 피에몬테(Piemonte) 지방에서 나오는 유일한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의 레드와인이 됐다(물론 여전히 가야 와인의 대부분은 이탈리아 토종 네비올로 와인이다).
가야 와인 중 특히 비싼 값을 받는 와인들은 그의 이런 실험 정신에 의해 탄생된 와인들이다. 그는 '100% 네비올로 단일 품종을 써야 한다'는 피에몬테 현지 양조 규정을 어기고, 다른 품종을 일부 섞는 파격(破格)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그의 와인들은 한 등급 '강등'됐지만, 최고 등급의 다른 업체 와인보다 오히려 더 비싼 값에 팔리게 됐다.
―당시 등급이 떨어질 줄 뻔히 알면서도 굳이 네비올로 외의 포도 품종을 섞은 이유는?
"작황이 해마다 다르기 때문이죠. 해마다 날씨나 기온이 똑같다면 이탈리아나 프랑스 와인이 신대륙 와인과 다를 바가 뭐가 있겠습니까. 매년 조금씩 다른 기후, 또 조금씩 흙 성분이 다른 다양한 토양에서 생산되는 포도를 섞어 와인을 빚음으로써 와인의 깊이가 더해진다고 봅니다. 또 1995년부터는 지구 온난화 영향으로 네비올로의 산도(酸度)가 이전만 못해 바르베라(Barbera) 품종을 5% 정도 섞고 있습니다."
과거 이탈리아 산(産) 와인은 '미국으로 건너온 이탈리아 이민자들이 향수를 달래려고 마시는 값싼 와인' 정도로밖에 평가받지 못했다. 그러던 이탈리아 와인을 1970년대 세계 와인시장에서 '특급 와인'으로 인정받게 만드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한 사람이 바로 안젤로 가야이다. 그는 근거지라 할 수 있는 이탈리아 북부 피에몬테 지역에서 연간 35만병을 생산하고, 토스카나의 볼게리에서 40만병, 몬탈치노에서 7만병을 각각 생산하고 있다. 와인 생산 규모로는 이탈리아 내에서 열 손가락 안에도 못 들지만, 품질(가격) 면에서는 이탈리아 '넘버 원'이다. 가야 와인 17개 중 유럽 현지 가격이 100유로가 넘는 와인이 8개에 달한다.
―네비올로와 카베르네 소비뇽 품종으로 만든 와인은 같은 레드와인이면서도 느낌이 크게 다릅니다. 두 포도 품종의 차이점을 설명한다면?
"카베르네 소비뇽은 영화 배우로 치면 존 웨인(John Wayne)입니다.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있고, 책을 읽더라도 한번에 다 읽을 것 같은 이미지지요. 하지만 네비올로는 영화 '해바라기'의 주연을 맡은 이탈리아 배우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Marcello Mastroianni) 같은 이미지라고 할까요? 존 웨인 같은 강렬한 카리스마는 없지만, 은은한 매력으로 오랫동안 남는 배우 말입니다. 네비올로는 스스로 빛나기보다는 와인과 함께 먹는 음식을 더욱 돋보이게 하는 와인입니다."
그는 혁신가이지만 품질 관리에는 매우 엄격하다. 지난 2002년에는 포도 작황이 좋지 않다는 이유로 아예 레드와인 생산을 포기하기도 했다.
"그해 여름이 너무 서늘했습니다. 또 가을 수확기에는 비가 많이 왔고요. 혹시 싶어 포도즙 품질을 점검해 보니 역시나 '레드와인은 안 되겠다'는 판단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해 수익의 80%를 포기하고 벌크(병입하지 않은 상태의 대용량 상태)로 중간도매상에 팔아버렸습니다. 아버지에게 배운 것 중 하나가 '빈티지(포도수확연도)가 나쁘면 와인을 만들지 말고, 세컨드 와인(포도 작황이 안 좋을 경우 등급을 낮추어 값싸게 파는 와인)은 만들지 말라'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가야 이름을 창피하게 만들지 말라는 당부를 하신 거죠. 품질에 관한 한 타협의 여지는 절대 없습니다. 한두 해 할 사업이 아니니까요. (웃음)"
삼국지에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일화가 나오지만, 안젤로 가야는 좋은 땅을 사기 위해 땅 주인을 열 아홉 번 찾아가 설득한 일이 있다. 1996년 토스카나주의 볼게리 지역에 진출할 때의 일이었다. "가야 와인이 피에몬테에서 출발했지만, 다른 지역에서도 좋은 와인을 만들 수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일종의 벤처사업이죠. 그런데 '포도밭을 절대 팔지 않겠다'는 땅 주인을 만나 고생 좀 했죠. 그래서 포도밭 이름을 카마르칸다(Ca'Marcanda·현지어로 '끝없는 협상의 집'이란 뜻)로 정했습니다."
이번이 4번째 한국 방문인 그는 이번에 비서도 없이 달랑 혼자였다. 하지만 그의 양복은 구김 하나 없어 보였고, 단정히 빗어 올린 흰머리는 그가 만든 오래 숙성시킨 와인과 잘 어울려 보였다.
"워낙 여행을 좋아하는 성격이라 별로 힘든 것을 모릅니다. 더구나 가야 와인을 사랑하는 마니아들을 만나는 즐거운 여정이니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