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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원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인걸. 그게 ‘진짜’ 나라구.” |
연습을 일찍 마친 은희는 어느 담벼락에서 길을 묻는 남자 료헤이를 우연히 만난다. 소설가인 료헤이는 자신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했다. 은희는 자신도 거짓말을 하는 사람이라고 응수한다. 짧지만 인상적인 만남 후에 두 사람은 각자의 하루를 산다. 은희는 최근 아침드라마 출연으로 콧대가 하늘을 찌르는 남자친구 현오(권율)를 만나러 남산으로 향했다. 료헤이는 자신의 책 《어둠 속에서》 출간기념회에 참석할 예정이다. 료헤이가 단 두 명의 청중만 있는 출간기념회에서 맥이 빠지는 하루를 보냈다면, 그와 헤어진 후 은희의 하루는 긴장과 블랙코미디의 연속이었다.
촬영 중 잠시 빠져나온 현오와 심하게 다투고, 은희는 남산길을 서둘러 내려간다. 잘난 애인을 둔 여자가 겪는 흔한 속앓이인가 싶을 때, 은희 앞에 제2의 남자, 유부남인 운철(이희준)이 나타난다. 운철은 이혼했다고 거짓말을 했던지라, 은희에게 미안해서 어찌할 줄을 모른다. 이제 은희는 누가 보아도 순진하고 억울한 피해 여성이다. 현오를 무섭게 다그치는 은희와 운철 앞에서 눈물을 뚝뚝 흘리는 은희, 긴 머리를 발랄하게 풀어 내린 은희와 다소곳이 하나로 묶은 은희(운철을 만나기 전 은희는 매번 머리를 묶는다) 중 어떤 은희가 ‘진짜’인가? 위 여인의 대사처럼, 둘 다 진짜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둘 다 그 순간에 솔직했던 것은 맞을 것이다.
물론 은희만 그런 건 아니다. 은희가 운철과 현오 사이 어느 지점에 서 있듯이, 현오는 전 여친과 은희 사이에, 운철은 아내와 은희 사이에서 진실게임을 벌이고 있다. 다만 이 게임은 결국 은희를 가장 진실하지 못한 사람으로 지목한다. 새로운 사실들이 계속 폭로되면서 그녀는 더욱 곤란해지는데, 은희에게는 이런 항변이 가능했다. “나는 원래 거짓말을 하는 사람인걸. 그게 ‘진짜’ 나라구.”
‘최악의 하루’를 겪고 있는 세 남녀는 이처럼 진실과 진심, 사실과 진실 사이에서 사랑의 비루함을 폭로하고 비웃는다. 이쯤 되면 이들에게서 홍상수와 우디 앨런의 냄새가 나는 것이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홍상수가 술병을 늘어놓는 바로 그 자리에서 김종관은 찻잔과 커피를 고집한다. (우디 앨런이라면? 정신과 의사에게 갔겠지. 아니면 마술사나 점쟁이에게라도.)
차중진담(茶中眞談), 그들은 커피를 마신다
〈최악의 하루〉는 장면이 바뀔 때마다 까만 커피가 가득 담긴 두 개의 잔이 내려다보이는 쇼트를 끼워 넣었다. 왜 커피였을까? 소주나 맥주가 아니고? 당신들을 믿게 하기 위해서는 정신을 똑바로 차려야 한다고, 은희는 선배의 대사를 따라 말했다. 이를테면 홍상수의 소주가 진심(혹은 진실)을 끌어내기 위해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이라면, 김종관의 커피는 ‘각성’이다. 관찰자이자 전지자로서 취한 인물들을 내려다보는 홍상수의 가혹한 시선과, 주인공들과 함께 걸으며 그들의 이야기에 수평으로 동참하는 작가 김종관의 따뜻함은 이 차이에서 비롯되는 것인지 모른다.
여기서 작가인 료헤이는 감독의 분신이다. 다섯 개의 단편을 묶은 소설집을 출간한 작가로서 료헤이의 상황은 다섯 편의 에피소드를 옴니버스 형태로 구성한 김종관 감독의 장편 데뷔작 〈조금 더 가까이〉(2010)와 포개진다. 은희, 현오, 운철은 모두 그 작품에 나오는 에피소드 주인공들의 이름이기도 하다. 흥미롭게도 〈조금 더 가까이〉의 첫 에피소드에는 떠나간 애인을 찾아 무작정 국제전화를 돌린 폴란드 남성이 등장한다. 서울에서 카페를 하는 여인이 그의 전화를 받는다. “그녀는 커피를 싫어해요. 하지만 난 좋아해요”라고, 폴란드 남자는 말했다. 은희와 료헤이처럼, 그들은 서로 영어로 대화한다.
긴 하루를 보내고 나서 은희를 다시 만났을 때, 료헤이는 다음에 쓸 이야기가 떠올랐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내용을 들려주기에는 그의 영어가 짧다. 은희 말마따나, 영어로 거짓말을 하기는 쉽지 않다. 어쩌면 영화는 차라리 너무 많은 말들이 문제라고, 그러니까 진심을 가장하여 진실을 은폐하는 그 ‘말의 모호함 또는 덧없음’이 문제라고 말하는 건 아닐까. 진심은 가장 단순한 언어에 있으니 말이다.
말을 멈출 때 들리는 것
료헤이가 일본어로 시를 읊는 동안, 은희는 그가 무척 멋진 음성을 지녔다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중단되자, 그의 목소리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리고 그녀 또한 자신이 지닌 다른 언어를 말하기 시작한다. 한때 전공했던, 춤이었다. 말이 아닌 소리를 음미하고, 말이 아닌 몸짓으로 시작하는 그들의 이야기는 료헤이가 처음으로 쓰는 해피엔딩이 될 것이었다. 그리하여 새로운 계절을 불러들인 〈최악의 하루〉의 엔딩은 이토록 신비로운 풍경이다.
피조물과 창조자가 나란히 걷는다. 창조자가 말한다. 다음에 쓸 이야기는 해피엔딩이야. 잘 봐. 바로 여기에서 내 이야기를 끝내게 될 거야. 이상하게 위로가 되는 ‘거짓말’이다. 오래된 돌담에서 꽃잎이 피어나는 꿈과 같은 것. 하지만 조물주가 원한다면 못할 일도 아니다. 그러니 오늘도 최악의 하루를 갱신한 당신에게 창조자와 함께 걷는 ‘진짜’ 〈최악의 하루〉를 권한다. 더 이상의 ‘최악’은 없을 거라고, 원래 ‘최악’이란 그런 거라고.
최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