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과 후진
글 德田 이응철(춘고 39회)
선진(先進)과 후진(後進)은 공자가 즐겨 쓰는 선배, 후배를 일컫는다.
선배에 대한 인식이 자리 잡은 것은 언제부터일까? 고등학교 시절 학생지도부가 교문 지도를 한 것이 첫 번째 연유였다.
67년 고교생은 빡빡머리에 검은 학생복이며 상의는 일본식 차이나 칼라였다. 호크를 잠그고 왼쪽엔 학교 뺏지를 오른쪽엔 학년 표시로 당시 1학년은 F, 2학년은 S, 3학년은 T를 달았다. 상의 주머니 상위에 직사각형의 명찰을 부착하고 소매 뒤편에도 학교표시의 단추를 두 개씩 달아야 하고 단화(短靴)도 금했다. 학생모엔 모표(帽標)를 달고 챙 위에 줄을 절대 늘여서도 안 된다.
60년대 대부분이 끼니마저 때우기 어려웠다. 봄이면 거의 장려 쌀을 꾸어 충당해도, 많은 식구에 보릿고개 넘기가 참으로 어려웠다. 밀을 껍질째 빻아 붉은 밀가루로 수제비(뜨덕국), 칼국수로 먹으면서 도급모를 내며 자녀 학비로 상급학교를 보낸다는 것은 특히 시골에선 여간 힘든 일이 아니었다.
두어 마장이 되는 진병산 아래 양지편에서 경춘선 길을 달린다. 도시락 넣은 가방을 무겁게 들어 어깨마저 기운 약꼴이라 지각하기 일수다. 약사리 고개를 넘어 낙원동 골목을 지나면 교문엔 선배가 줄지어 기다린다. 검은 얼굴의 아름드리처럼 우뚝 버티고 선 당시 유도부 박 선배만 봐도 가슴이 방망이질을 한다.
단단히 준비를 해도 교문 통과는 좀처럼 쉽지 않다. 웃는다고 트집을 잡아 목덜미를 가격한다. 소장수 형님이 우시장에서 산 갑바로 된 손가방에 뜨거운 눈물을 뚝뚝 흘리며 교실을 찾아 비실거리면서도 몇 번이고 자신을 부축이며 꿈을 버리지 않았다.
선배란 의식이 완전히 두려움의 대상이 된 또 하나는 교문이 아닌 옥상이었다. 60년대 후반 반공 방첩으로 공설운동장에 시민들 동원과 학생들이 수시로 모여 궐기대회와 체육대회가 빈번했다.
학교 간 경기일 경우 재학생은 스탠드에서 야윈 가슴을 드러내고 감추며, 내용도 모를 독일어로 입실렌드 체이홉 카시케시케시코 갈마시 케시케시 춘고춘고 응원가를 온종일 불러댔다. 경기 결과 야구가 다른 고에 패한 경우, 종일 물 한 방울 못 먹고 목이 쉬도록 해도 응원 탓으로 돌린다. 동원된 재학생은 전원 옥상으로 집합해 선배의 단체기합이 유감없이 자행된다. 엎드려 뻐쳐를 시키고 한줄 한줄 야구방망이로 내리 친다. 눈알이 튀어 나오고 영양실조로 야윈 엉덩이가 부서지는 듯한 느낌은 지금도 생생하다.
고희가 지나 옥상에서 기합을 돌이켜보며 웃는다. 어처구니가 없는 웃음이다. 우리 줄을 두 대씩 때리고 간 선배가 다시 옆줄이 아니고, 우리 줄을 때렸기 때문이다. 서슬퍼런 당시 현장에 그 누가 시정을 요구하겠는가!
그렇게 맞으며 학년이 올라가면 시어머니 행세를 며느리는 다음 며느리께 또 실천한다. 전통이지만 구태의 답습이 아니던가!그 때 그 시절로 선배하면 좋은 면보다 두렵다는 선입견이 지금까지 잔존해 우뇌 저편에 자리하고 있다. 그 덕에 군대 말처럼 고참이 되면 후배들 또한 감히 버릇없이 구는 자가 크게 없이 전통은 흘러 드디어 백 주년 일세기의 역사를 맞이하게 된다.
작금 명문고등학교가 많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고교입시 평준화와 현장에 부조리를 바로잡는 전교조의 집단활동과 민주시민들의 목소리가 하늘을 찔러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시대가 도래했다. 두발 자유화, 교복마저 구각을 탈피하고 일제 잔재를 일소한 21세기 학교 전반의 교육활동이 크게 변모 되었다. 지난번 우연히 외람된 핸드폰 문자가 답지해 음미해 본다.
-우리가 마지막 세대!
이제는 우리 세대를 일컬어서 컴맹의 마지막 세대
검정 고무신에 책 보따리를 메고 달리던 마지막 세대
굶주림이란 질병을 알고 보릿고개를 넘은 마지막 세대
부모님을 모시며 성묘를 다니는 마지막 세대
부자유친(父子有親)이라는 교육을 받았던 마지막 세대
명문고의 전통과 선 후배가 존재하던 마지막 세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내겐 춘고 선배라면 두려움과 훈훈함으로 서려 있지만, 선배의 이미지는 변하지 않는 상수다. 선 후배간 토사구팽의 바람은 없어야 한다. 선배들이 찾아와 월부책을 강요해도 기꺼이 수용할 수 밖에 없던 70년대-. 선배 외판원이 부러워 거짓말까지 하다 들통 난 웃지 못할 넌센스도 나는 기억한다.
어려웠던 시절 선배들께 밥 한번 쏘지 못하고 대접만 받던 빈한한 직장 시절이 후회된다. 고희 중반에 선배들이 점점 곁을 떠난다. 이제 내가 선배로써 의를 중히 여기고 후진을 위해 정성껏 소찬이라도 대접할 마지막 세대임이 느껴진다.
마지막 세대인 선후배 간-. 생전에 유명한 춘고 대선배로 행정,사시 양과에 합격한 고대 장덕진 선배가 조회때 소운동장에서 장학금을 수여하며 춘고의 사명을 훈시한 것이 평생 좌우명이 되기도 했다. 후하게 잘 끌어주고 밀어주던 것이야말로 진정 춘고인의 사명인 것이다.
현재는 복잡하고 미래는 두렵고 과거는 그립다고 누가 말했던가! 아무리 교문과 옥상에서 선배들의 두려움에 모골이 송연해도 희한한 것은 무엇일까? 다시 그립고 마지막이란 서글픈 단어가 되지 않도록 하고 싶다. 선진과 후진의 진정한 존경과 사랑을 꽃 피우는 것이다. 그런 아름다운 전통이 모교를 중심으로 강원특별시는 물론 전 세계로 펴졌으면 하는 바람이다. 진하게 여생을 잘 보내고 싶은 욕심? 이것이야말로 수면 아래로 가라앉는 명문고의 전통에 부채질을 하여 퍼올리는 마중물이길 바란다.(끝)
-이 글은 춘고 백주년 기념 동문책 발간에 보낼 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