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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13 - 튜더 왕조의 헨리 8세 아들을 얻기위해 6번 결혼하고 성공회를 만들다!
헨리 8세는 헨리 7세와 요크가문의 엘리자베스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으니 복잡한 여성 편력과
여섯번의 결혼으로 유명하며 종교 개혁과 영국 국교회 수립, 정치적 중앙집권화 등의 성과
를 거두었으나 늘어나는 왕실 비용과 과도한 화폐 발행으로 인플레이션을 겪었고, 공유지의
사유재산화로 농민에 대한 수탈이 극심했으며 런던 인구가 크게 증가해 사회문제가 발생합니다.
헨리 8세는 장미전쟁이 끝난 6년 후인 1485년에 태어났는데 유년기 부터 부왕의 자리가 확고
부동하지 않음을 알고 자랐으며 1497년 콘월의 반란군이 그리니치 블랙히스 까지 쳐들어
왔을때 5살이었던 어린 헨리는 모친과 함께 반란이 진압될 때까지 런던탑에 피신해 있었습니다.
유럽을 방문하는 부왕이나 형 아서 왕자를 수행하면서 외교적 동맹관계를 이용하면 유리하다는
점을 인식하고 있었으니 10살에 형수를 맞이하러 형을 대신하여 에스파냐에 다녀왔는데
형 아서는 결혼후 6개월만에 사망했고, 이듬해 모친 엘리자베스마저 출산 중에 세상을 떠납니다.
헨리 왕자의 양육은 조모인 마거릿 보퍼트 부인이 맡았는데... 가족상을 당하면서 부왕인 헨리
7세는 살아남은 차남을 철저히 보호하기 시작했고, 헨리 왕자에게 통치에 관한 모든 것을
직접 전수하고자 했으니 말년에 헨리 왕자를 계승자로 정하고 평화적으로 왕위를 양도합니다.
헨리 7세는 강력히 부상하던 에스파냐의 아라곤 왕국과 국교를 공고히 할 필요성을
느꼈고, 장남인 아서 왕자를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와 카스틸랴의 이사벨라
1세의 딸인 캐서린과 혼인시키기로 마음먹었으니 캐서린을 영국으로 호위해
오도록 했고 공주의 수행 행렬에는 10살의 소년이었던 헨리 8세 왕자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아서 왕자는 몇달만에 병사하니 캐서린은 양측 부왕의 뜻에 따라 이전 혼인을 무효화
하고 다시 미성년인 헨리왕자와 약혼했는데 헨리 7세의 사망후 왕위에 오른 헨리 8세는
즉각 캐서린과 결혼을 감행했으니 몇년간 좋은 관계를 유지하며 연회를 함께 즐겼던
것으로 보아, 헨리 8세는 처음 만났던 때 캐서린에게 좋은 감정을 지녔던 것으로 추측됩니다.
즉위할 때 18살의 청년이었던 헨리 8세는 스포츠, 문학, 음악, 시 등 다양한 인문적 취향을 갖고
있었으니 토머스 모어를 가까이 하여 그의 강연을 즐겨 들었고, 나중에 대법관에 임명했으며
에라스무스도 케임브리지 대학에 초빙해 강연을 들었으니 활쏘기에 탁월했고 경주를 위해
하루에 말 6마리를 갈아 치우기도 했으며 닭싸움을 즐겨 런던의 화이트홀에는 투계장을 둡니다.
문학적인 소양이 있어 시를 직접 짓기도 했으며, 10개의 트롬본과 14개의 트럼펫, 5개의
백파이프와 76개의 리코더, 78개의 플루트를 소유할 정도의 음악 애호가로 작곡
을 즐겼으며 「푸른 옷소매 아가씨」의 곡조를 작곡했다고 알려져 있으니 앤 볼린을
의미한다는데 후에 영국국교회를 설립했지만 가톨릭 신앙에도 존경을 거두지 않았습니다.
15세기 말엽에는 프랑스, 에스파냐등 유럽 대륙에서는 강력한 왕국이 세워졌으니
이들 국가가 중앙집권 체제를 강화하고 자국민끼리 단결을 도모하자 영국의
귀족 및 무사들은 점차 대륙에 진출할 명분과 입지가 좁아지니 결국 영국에서
자신들끼리 장미전쟁 세력다툼을 벌이다가 세력을 단축시키는 결과를 가져옵니다.
헨리 7세는 봉건귀족의 세력 약화와 더불어 봉건사회질서 붕괴로 금전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영국의 미래가 해상무역에 있다고 보아 상인 및 지방의 젠트리, 요먼 계층을 지원하고
후원하는 정책을 썼으니 보르도에서 포도주를 수입할때 영국의 선박이 운송하도록
조치하는 항해법 정책을 통해 이익을 얻은 신흥 중산층은 국왕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습니다.
헨리 8세는 해군을 육성하고 항해를 촉진하는 정책을 썼고... 메리 포춘등 큰 배를
건조해 상인들이 임대해서 사용할 수 있도록 장려했으며 더군다나 해군을
육성하면 전시가 아닐때 해상무역에 활용할수 있다는 이점이 있었으니 즉위 5년
만에 해군부를 창설하고 선박 수를 늘리며 함대의 시설을 현대화하는 데 힘씁니다.
출신이 비천하더라도 도움되는 인물이라면 기꺼이 만나고자 했고, 능력이 인정되면 요직에
기용했으니 첫번째 총리 토머스 울지는 푸주한의 자식이었으나 11살에 교회가 지원하는
장학금을 받아 옥스퍼드 대학에 진학할 만큼 수재였으니 왕실 개인교사에 불과했던 울지
는 1513년 대법관에 임명되었고 요크셔 대주교와 추기경을 역임하며 왕의 신뢰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성공한 이후 400여명의 시종과 개인 합창대를 두는등 허영이 심했고 권력욕
도 강했으니 헨리 8세는 첫 번째 왕비 캐서린과 이혼하기 위해 로마교황청에
탄원을 제기하는 과정에서 울지가 제 역할을 못하자 불신하기 시작했으니
결국 울지는 경질되었고 후일 반역죄로 고발되어 압송되는 도중에 사망합니다.
헨리 8세의 두번째 총리는 대법관 출신인 토머스 모어였는데 정치가 보다는 학자에
가까웠으니 왕은 그를 초청해 강연을 즐겨들을 만큼 신뢰했지만 1530년 왕비
캐서린과의 혼인을 무효로 해 줄 것을 교황청에 요청하는 편지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자 토머스 모어는 거부하고 사임했지만 의회는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
하는 법에 서명하기를 요구했고 그는 거부하다가 런던탑에 갇힌후에 참수되었습니다.
"세속인은 영적 지도자가 될 수 없다." 라고 토머스 모어가 공언을 하자 의회는 그에게
거열형을 선고했는데... 그러나 왕의 지시에 따라 참수형으로 시정된 것을 살펴보면
헨리 8세는 마지막 까지 토머스 모어에 대한 신뢰를 완전히 거두지는 않았던
것으로 짐작되는데 저 토머스 모어는 위대한 저서인 "유토피아" 의 저자이기도 합니다.
헨리 8세의 세번째 총리는 토머스 크롬웰이었는데 대장장이 아들로 교육받지 않았으나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이탈리아어를 비롯한 외국어를 배우고 무역과 정치에
대한 견문을 넓혔으며 귀국 후에는 토머스 울지를 위해 일하다가 왕에게 발탁되었습니다.
크롬웰은 왕의 이혼 문제에 좀 더 적극적인 해결책을 내놓았으니 크롬웰은 1533년
앤 볼린이 왕비로 책봉된 이후에는 아예 로마에 중요한 문제를 의뢰하지
못하게 하는 '호소 금지법'을 통과시켰으며 그리고 왕을 교회의 수장으로
세우는 법을 제정할 것을 권하여 1534년에 의회에서 만장일치로 통과시켰습니다.
1534년 교회 법정은 폐지되었고 대륙법과 다른 영국 보통법이 시행되면서 점차 보통법은
국가의 유일한 법으로 확립되어 갔으니 크롬웰은 왕의 신임을 얻었는데 사실상 왕은
그의 비열한 근성을 모르지 않았으나 실리적인 면에서 그를 이용했다고 해석되기도 합니다.
크롬웰은 왕이 앤 볼린과 이혼하고 제인 시모어를 왕비로 임명할 때도 적극 돕고 지지
하였으며 또한 수도원을 해산하여 그 재산을 몰수하도록 하고, 국민이 전시뿐 아니라
평화 시에도 의회에 세금을 내도록 하는 법을 통과시켜 왕실 재정을 튼튼히 하였습니다.
그러나 제인 시모어 왕비가 에드워드 6세를 낳고 사망한 후에 다음 왕비를 간택하는
과정에서 크롬웰이 독일 클레베의 왕녀 앤을 추천한 것이 문제였으니 크롬웰은 이
정략결혼을 통해 영국이 독일과 공고한 동맹을 맺어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그러나 왕녀의 용모에 큰 관심을 가졌던 헨리 8세는 크롬웰이 소개한 초상화만 믿고
결혼했다가 실제 신부를 만났을 때 미인과는 거리가 먼지라 크게 실망하였고,
이 일로 크롬웰은 왕의 신뢰를 잃었으니..... 이 기회를 노린 반대파들은 크롬웰
의 경질을 주장했고, 결국 그는 런던탑에 갇혀 직위를 박탈당한 뒤 참수되었습니다.
한편 종교개혁후 캔터베리의 대주교가 된 토머스 크랜머는 토머스 크롬웰과 함께 왕의
첫 이혼을 적극 도왔었는데 그는 "왕이 이혼할 때에 로마에 읍소할 필요가 없으며
최초의 결혼이 무효였음을 두세명 정도의 신학자가 증명하면 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에 발탁된 몇명의 신학자들은 애초에 성경의 레위기에 금지된 바와 같이 형수
와의 혼인은 무효임을 주장했고, 교황은 이 문제를 결정할 권한이 없음을
확인하는 제안서를 의회에 부치도록 했으며 의원들은 자신들의 선거구로
돌아가 이 사실을 지역민들에게 납득시키도록 하는 임무도 부여 받았습니다.
당시 헨리 8세의 첫 이혼에 대한 여론이 그다지 좋지 않았기 때문이었는데 그러나
곧 앤 볼린이 임신을 하자 여론도 호전되면서 이 법안은 결국 통과되었으며,
토머스 크랜머는 영어 성경인 『크랜머 성경』을 직접 썼고 이를 실제로 사용했으니
에드워드 6세 때인 1549년에는 신교 성향의 최초의 기도서를 저술하기도 했습니다.
헨리 8세는 유럽 국가들과의 권력관계에 개입하였는데 당시 교황청을 위협하며 이탈리아
로의 진출을 꿈꾸던 프랑스는 신성로마제국(독일)의 황제와 에스파냐 동맹에 대항해
적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스코틀랜드의 제임스 4세는 프랑스 편에 서 있었습니다.
에스파냐의 캐서린과 결혼한 상태였던 헨리 8세는 전략적으로 에스파냐 동맹편에
서서 프랑스를 침공하였고, 이와 함께 스코틀랜드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여
스코틀랜드의 입지를 약화시켰으나, 후에 여동생 메리를 프랑스의 루이 12세와
결혼시켜서 다시 프랑스와 우호 관계를 유지하는 등 전략적인 대외 정책을 폅니다.
한편 헨리는 시녀 앤 볼린과 결혼하기 위해 왕비 캐서린에게 에게 이혼을
요구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자 결국 바티칸의 로마 교황청과 결별하고
“영국국교회”라는 새로운 형태의 종교 체계를 설립하였으니 이로써
이루어진 영국의 종교개혁은 헨리 8세의 개인적인 문제만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대중은 교황청의 과도한 간섭과 수도원의 부패에 염증을 느끼고 있었고 이를 대체할
새로운 종교를 갈구하고 있었으니 영국은 헨리 7세부터 해상무역을 장려하여 중산
계급이 성장하고 있었는데 신흥 중산층은 인쇄술 발명 이후 독서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중산계급의 많은 사람들은 영어로 된 기도서와 성경을 직접 읽기를 원하였으며,
루터파의 개인성을 중시하는 신앙에 호의적이었으니 헨리 8세는 영국국교회
설립의 명분을 얻었고 수도원을 개혁하는 작업을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대중이 원하는 것은 수도원 개혁과 로마로 부터의 분리 정도일 뿐이고, 일상과
깊이 결합되었던 가톨릭 의식까지 뿌리째 개혁하는 것이 아님을 헨리 8세는 간파하고
있었으니 수도원과 종교재판 등을 제외한 나머지 가톨릭 의식은 그대로 유지하여
안정성을 선호하던 대중의 요구에 부응하였으니 종교 갈등은 크게 부각되지 않았습니다.
헨리 8세는 정치적으로 중앙집권화와 법령 개정에 힘썼으니 토머스 울지, 토머스 모어,
토머스 크롬웰, 토머스 크랜머 등과 함께 이루어졌는데 행정이 중앙으로 집중되도록
정비하였고 지방 통치자들이 정기적으로 왕의 명령을 전달받는 시스템을 만들었습니다.
1534년 이후 교회법정 대신에 왕의 보통법이 유일하게 권한을 행사하도록 법령을
재정비 하였으며 해군을 장려하고 대규모 선박을 건조하여 영국 해상무역의
입지를 넓혀놓았으니 선박과 해외 통상에 지원을 받은 런던 등 대도시의 중산층은
왕의 굳건한 지지 세력이 되었고 대귀족의 잔존 세력을 제압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말년에 헨리 8세의 사치가 심해진데다 군사비를 충당하고자 화폐의 귀금속 함량을 줄이고
마구 발행했기 때문에 화폐의 가치는 떨어지고 인플레가 심해졌으며 중세 공유지에
울타리를 쳐서 사유화하는 과정을 통해 부를 축적하고 농민을 수탈하는 인클로저 현상
까지 심각하여 농민의 불만으로 헨리 8세 사후 2년만인 1549년 농민반란으로 이어집니다.
헨리 8세의 여성 편력은 1536년 첫 왕비인 아라곤의 캐서린이 사망했고 제1계비인 앤 볼린은
참수되었으며, 제인 시모어가 제2계비가 되었는데, 제인 시모어가 유일하게 아들을 남기고
사망한 1537년 헨리 8세의 상심은 컸으니 그후 3년간 새로운 왕비를 맞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1540년 토머스 크롬웰의 적극적인 권유로 또다시 독일 클레베의 왕녀인
앤을 맞아들이게 되지만 미인과는 거리가 먼 용모에 크게 실망해 그해에
바로 이혼하고 같은 해에 제4계비인 당시 19살의 캐서린 하워드와 결혼합니다.
결혼한지 2년 뒤인 1542년에 캐서린 하워드는 앤 볼린처럼 간통죄로 참수되었고
이듬해인 1543년에 마지막 계비인 캐서린 파와 6번째로 결혼하여 안정을
이루었는데 이처럼 다양한 그의 여성 편력의 배경에는 아들을 낳아 후계자로
삼아 튜더왕가를 굳건하게 세우고자 하는 강한 의중도 실려 있었다고 여겨집니다.
아라곤의 페르디난도 2세와 카스틸랴의 이사벨라 1세의 딸이었던 캐서린은 헨리 8세의
첫 왕비이자 후일 메리 1세로 여왕에 오르는 메리의 어머니이니캐서린이 15살의
아서 왕자(헨리 7세의 장남)와 결혼하기 위해 영국으로 들어올 무렵 그녀의 나이는
16살이었고 캐서린을 호위하는 행렬에 있던 헨리 왕자(헨리 8세)는 10살이었습니다.
캐서린은 당시 우아하고 경건한 왕실의 여인으로서 품위를 갖추었으며 에스파냐의
대사 노릇을 한 경험도 있던터라 헨리 왕자의 마음에도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불과 3살 때 캐서린은 영국과 에스파냐의 동맹을 위해 아서 왕자와
정혼하였으나 원래 병약한 체질이었던 그는 캐서린과 결혼한지 몇달 후 병사합니다.
나중에 캐서린은 이때 제대로 신방을 치르지도 못했다고 하여 이 결혼이 무효임을 주장
하게 되는데..... 이에 부왕인 헨리 7세는 동맹 관계를 유지하기 위하여 캐서린과 헨리
왕자를 정혼시켰는데, 당시 헨리는 미성년이라 아직 결혼을 할 수 없었기 때문 입니다.
후에 에스파냐와의 동맹이 필요하지 않게되자 헨리 7세는 이 결혼에 명분이 없음을
아들에게 말하니 헨리 왕자는 순응하는 태도를 보였다지만 그러나 부왕의 사망후
즉위한 헨리 8세는 즉시 캐서린과 결혼식을 치르고, 이후 몇 년간 두 사람은
다정한 사이였으니 1511년 캐서린은 첫 아들을 낳았으나 몇 주 만에 사망 합니다.
이후 캐서린은 다섯번의 임신과 유산을 거듭하지만 결국 생존한 유일한 혈육은
공주 메리뿐이었는데.... 캐서린에게 왕자 생산을 더 이상 기대할 수 없게
되자 헨리 8세의 마음은 돌아섰고, 때마침 캐서린의 시녀였던 앤 볼린에게
끌리게 되어 그녀와 결혼하기 위해 캐서린 왕비와 이혼할 방법을 강구합니다.
헨리 8세가 앤 볼린에게 구애할 무렵 캐서린 왕비는 임신과 유산에 마음고생으로 수려했던
용모가 많이 상했는데.... 캐서린은 이혼을 완강히 거부하다가 왕궁에서 쫓겨났고, 1532
년에는 딸과도 격리되어 외롭고 쓸쓸한 말년을 보내다가 결국 1536년 암으로 사망하니
죽기 직전까지도 캐서린은 자신만이 영국의 정통성 있는 왕비라는 생각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는 유일한 혈육 메리에게 에스파냐의 유명한 교육가 등을 섭외하여 양질의 교육을 시켰고
구교 가톨릭 신앙을 지키게 했으니 메리는 후일 메리 1세로 즉위한 뒤 영국에서
로마 가톨릭을 부활시키고 어머니를 폐비시킨 신교 세력을 응징하는 정책을 펴게 됩니다.
앤 볼린은 캐서린 왕비처럼 왕실 출신은 아니었으나 외교관이었던 아버지 토머스 볼레인
과 명문가인 하워드 가문 출신인 어머니 엘리자베스 사이에서 태어났으니 어려서
부터 총명했던 앤은 12살부터 프랑스의 궁정에서 프랑스어와 라틴어를 배웠다고 합니다.
앤 볼린은 프랑스의 왕비 메리 튜더의 시녀로 발탁되었으며, 왕비의 통역도 도맡아 했다는데
비범한 용모는 아니었으나 활기찬 성격에 매력적인 검은 눈의 소유자였던 앤은 1522년
영국으로 돌아와 왕실에 들어갔고, 캐서린 왕비 시중을 들다가 헨리 8세 눈에 들게 되었습니다.
앤은 왕의 마음을 얻게 되자 대담하게도 왕비와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하기 전에는 함께
잠자리에 들 수 없음을 선언했으니 이러한 태도는 헨리 8세를 더욱 자극했고
왕은 대신과 의회를 종용하여 마침내 캐서린과 이혼하는데 이혼하기 직전인
1532년 12월에 앤은 결국 임신했으며 결국 1533년 1월 비밀리에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러나 태어난 아이는 공주인 엘리자베스였으며 왕을 실망시켰는데 이후 앤은 임신과
유산을 반복했으나 실패하면서 왕의 신뢰를 잃어갔으니 앤은 캐서린 왕비처럼
굳건한 친정 인맥도 없었고 대중의 사랑도 받지 못했기 때문에 급속히 몰락하게 됩니다.
그를 제거하려던 세력들은 명확한 증거도 없이 간통죄와 근친상간죄를 뒤집어 씌웠고
헨리 8세는 앤을 변호해 주지 않았으며 오히려 앤의 자매 메리와 자신 사이에
정사가 있었다며 앤과의 결혼마저 무효였음을 주장하기에 이르니 앤은 런던탑
에 갇히게 되었고 법정에서 자신의 죄목을 차분히 부인했지만 1536년 참수 됩니다.
제인 시모어는 앤 볼린과 마찬가지로 왕실 출신이 아니었으며 궁녀였다가 헨리 8세의 마음에
들어 제2계비가 된 인물인데 창백한 얼굴에 침착하고 검소한 제인 시모어는 앤 볼린과
상반된 성격이었으니 헨리 8세는 제인에게 많은 재물을 하사하려했으나 제인은 돌려보냅니다.
그러면서 오직 결혼할 때만 지참금으로 일부를 받아들이겠다는 뜻을 전했다는데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던 제인은 왕비가 된 후에는 헨리 8세의 맏딸 메리 공주
의 신분 복원을 왕에게 간청했고, 부녀 사이의 화해를 중재하기도 했다고 합니다.
결혼 후에는 왕실의 평화와 안정을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돌아온 메리 공주를 환영
하여 화평하게 지냈지만 헨리 8세가 관심을 보일 무렵 제인은 이미 27살로 당시
에는 결혼과 출산을 위한 적절한 나이가 아니었으며 게다가 허약한 체질
이었던 제인은 1537년 출산때 무려 사흘이나 걸려서 아들 에드워드를 낳았습니다.
헨리 8세는 아들의 탄생에 크게 기뻐하여 울먹였고, 런던탑에서는 2,000여발의
축포가 터져 나왔는데.... 그러나 제인은 출산후 산욕열로 2주 만에
사망했고 헨리 8세는 깊은 시름과 슬픔에 잠겼으니..... 헨리 8세는 왕자를
낳아준 제인 시모어를 특별하게 여겼고 사후에 제인 곁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독일의 뒤셀도르프에서 클레베 공작 요한 3세의 딸로 태어난 앤은 헨리 8세의
제3계비가 되었으나 용모가 왕의 마음에 들지 않았으니 불과 6개월 만에
이혼당하고 본국으로 돌아갈 처지였는데 당시 앤과의 결혼을 추진하던
이는 영국성공회를 탄생시키는데 지대한 공헌을 한 토머스 크롬웰이었습니다.
크롬웰은 당시 급부상하던 신교 국가인 클레베 공국의 앤과의 결혼을 통해 영국이 독일의
신교 국가와 동맹 관계를 맺을 것을 주장했는데..... 왕비의 외모가 궁금했던 헨리 8세는
궁정 화가가 보내온 앤의 초상화에 만족했고 앤과의 결혼을 추진하도록 허락했다고 합니다.
독일에서 태어나고 자란 앤에게 익구인 영국은 생소하고 불편한 곳이었으니 헨리 8세
는 그리니치 궁에서 로체스터 까지 새 신부를 맞으러 직접 행차했지만 직접 대면한
앤은 초상화와는 다른 인물이었으니.... 평범한 외모에 독일어만 할 줄 알고 궁정
의 예의범절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는데다가 문학 및 예술적 취향도 없었습니다.
책도 읽지 않고 오로지 바느질만 할 줄 알았던 앤은 왕을 크게 실망시켰으니 헨리
8세는 앤과의 신방을 치르지도 않았고 6개월 뒤에 이혼을 제기했는데 당시
너무 순진했던 앤은 자신의 결혼이 실제로 성립되지 않은 것조차 모를 정도
였다고 하는데... 그러나 캐서린 왕비와 달리 앤은 이혼을 순순히 받아들였습니다.
왕비가 아닌 '왕의 누이' 라는 호칭을 대신 얻은 것에 만족하며 영국에 머물렀으며....
후에 왕실과 평안한 관계를 유지하며 조언을 하기도 했다는데, 헨리 8세가 마지막
왕비인 캐서린 파를 간택했을 때는 모두 만장일치로 합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캐서린
파의 용모가 자신보다 못하다고 하여 유일하게 반대 의견을 제시했다고 전해 집니다.
제3계비인 앤 왕비의 시중을 들다가 헨리 8세의 간택을 받은 캐서린 하워드는 앤과는 사뭇
다른 여성이었으니 명문가인 하워드가 출신으로서 앤 볼린과는 외사촌 간인지라 그 딸인
엘리자베스와 가깝게 지냈으며 캐서린이 참수되었을 때 엘리자베스는 큰 충격을 받았다는
데 캐서린 하워드는 15살에 프랜시스 더햄이라는 정부를 둘 만큼 조숙한 여성이었다 합니다.
당시 47살이었던 헨리 8세는 19살인 캐서린 하워드의 활기차고 발랄한 면모에 빠져들었고
어린 새 신부에게 보석과 토지와 옷 등을 선물하며 기쁨에 넘쳤다지만 그러나
중년에 접어든 왕에게 캐서린은 곧 싫증을 느꼈으니 자유분방한 캐서린은 정부였던
프랜시스를 시종으로 삼았는가 하면 이전 구혼자였던 토머스 컬페퍼에게는 연서를 보냅니다.
그녀는 추문에 휩싸이게 되는데 어린 신부를 ‘가시 없는 장미’ 라는 애칭으로 부르며 사랑했던
헨리 8세는 처음에는 추문을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사실로 밝혀지자 매우 분노했고,
캐서린의 두 정부를 잡아다가 중형에 처했으며 헨리 8세는 분노하면서도 자기 연민에
치를 떨며 울었다는데 간통죄로 런던탑에 갇힌 캐서린은 왕비가 된지 두해 만에 참수됩니다.
1543년 헨리 8세는 왕실의 가정교사였던 캐서린 파와 결혼했는데 캐서린 파는 두번의 결혼 경력이
있었으니 첫 남편 에드워드 버로우경과는 1529년 사별했고, 두번째 남편 래티머의 영주 존 네빌
경과 결혼했으나 곧 남편이 병약해진 탓에 캐서린 파는 런던으로 이사 와서 남편을 간호 했습니다.
여기서 캐서린 파는 헨리 8세의 자녀들을 만나 교육을 담당했고 에드워드
왕자의 작은 외숙인 토머스 시모어에 대한 연정을 품게 되었다는
데.... 그러나 헨리 8세가 구혼하자 왕의 청혼을 거절할 수 없었다고 합니다.
1542년 사랑했던 캐서린 하워드 마저 참수하고 자신에게 맞는 짝을 찾아 방황하던 헨리 8세는
아직 남편이 죽기도 전인 캐서린 파에게 선물 공세를 했다는데.... 캐서린 파는 토머스 경을
사랑하고 있었지만 왕에 대한 임무를 선택하였고, 결국 헨리 8세의 마지막 왕비가 되었습니다.
결혼할 당시 캐서린 파의 용기는 놀라운 것이었으니 이미 앤 볼린, 캐서린 하워드
등을 참수시켰고, 첫 왕비와 클레베의 앤과는 이혼을 감행했던 헨리 8세의 왕비
가 된다는 것은 결단코 쉬운 일은 아니었으며 게다가 왕은 이미 노쇠했고 메리,
엘리자베스, 에드워드 등 세 명의 양자녀 까지 모두 보살펴야 하는 입장이었습니다.
그러나 캐서린 파는 진보적인 신교 사상을 교육받은 온화한 여성으로서 왕비
의 임무를 잘 수행해냈는데 그녀는 왕이 진노하면 다독여 주고 두 딸
과의 관계를 중재했으며, 왕의 아픈 다리를 무릎에 얹고 간호할 정도로
자상했으니.... 결국 헨리 8세는 1547년 1월 에드워드에게 양위한 뒤 사망합니다.
사상과 태도에서 왕비의 위엄을 갖추었던 캐서린 파는 "내가 하는 모든 일이
도움이 되기를" 이라는 모토로 자신의 삶을 표현했다는데 그러나 희대의
난봉꾼이었던 토머스 시모어를 사랑했던 것이 문제였으니 캐서린 파는
헨리 8세가 사망하던 해에 이전의 구혼자였던 토머스 시모어와 결혼합니다.
하지만 권력욕이 강했던 토머스 시모어는 이미 헨리 8세의 차녀이자 당시에 한참 성숙했던
엘리자베스와 심상치 않은 추문을 일으키고 있었으니 캐서린 파는 우연히 남편과
엘리자베스가 함께 있는 장면을 목격하고 나서 결국 추문을 잠재우고자 남편을 엘리자베스
에게서 격리했으며 이후 35살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첫 임신을 했지만, 출산도중 사망합니다.
스포츠를 사랑했고 활력이 충만했던 헨리 8세는 1544년 7월 다시 프랑스와 전쟁을 시작해
9월 18일 불로뉴가 함락되자 더욱 기세등등했는데..... 그러나 프랑스는 다시 불로뉴를
탈환했고 이듬해 포츠머스에서 함선을 시찰하던 헨리 8세를 위협했으나 프랑스의
공격은 수포로 돌아갔지만 헨리 8세는 많은 세금을 거둬들여야 했으니 백성의 원성을 삽니다.
말년에 헨리 8세는 곧잘 분노했고 한편 두려워했으니 1546년 크리스마스에 그는
왕비와 대부분의 왕실 사람들을 그리니치로 돌려보냈고, 몇몇 참사관들만이
화이트홀에서 곁에 남아 있었으니 이듬해 1547년 1월, 크랜머 대주교를
불러들였고 에드워드 왕자를 충실히 보좌해 줄 것을 당부한 뒤 사망했습니다.
생전에 두 딸을 사생아로 만들고 잘 돌보지 않았으나, 죽기 직전에는 그들을 적자로 부활
시켜 왕위 계승권을 인정했고 상당한 유산도 물려주었는데 에드워드 6세가 6년이라는
짧은 치세를 끝내고 사망하자 두 딸은 차례로 메리 1세와 엘리자베스 1세로 등극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