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되묻는 단순하지 않은 ‘작은 역사’ - 곽차섭 부산대 교수 · 사학
‘미시사(黴視史)’란 이탈리아어 ‘microstoria(미크로스토리아)’를 우리말로 옮긴 것이다. 이는 작다는 뜻은 ‘micro’와 역사라는 뜻의 ‘storia’가 합성된 단어. 직역하자면 ‘작은 역사’가 된다. 하지만 미시사란 말에서 풍기는 이런 식의 인상이야말로 미시사의 실체를 이해하는데 큰 방해가 된다. 그것은 단순히 ‘작은 역사’가 아니기 때문이다.
미시사의 ‘미시(黴視)’는 역사적 대상을 작은 규모와 척도에서 관찰한다는 의미다. 예컨대 한 마을 혹은 한 지역의 사건, 때로는 어떤 한 인물의 행적을 집중적으로 세세히 추적하는 것이다. 하지만 미시사는 그렇게 관찰한 결과가 거시적으로는 어떤 함의를 가지는 지 항상 되묻는 특징이 있다. 그것은 마치 인류학자가 한 마을, 한 부족을 자세히 연구함으로써 사회와 문화에 대한 좀더 넓은 의미를 도출해내려는 시도와 유사하다. 따라서 미시사가 어떤 것인지를 이해하려면, 우선 그것을 단순히 ‘거시사’(사실 이런 역사 분야는 없다. 단지 미시사에 대응하는 말로 사용될 뿐이다.)의 반대쯤으로 보는 생각부터 버려야 한다.
미시사는 1970년대 중반 이탈리아 좌파 역사가들 사이에서 처음으로 나타났다. 카를로 긴즈부르그(지금까지 그의 이름을 통상적인 이탈리아어 발음에 따라 ‘진즈부르크’로 표기해왔으나, 최근 그가 조한욱 교수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신을 각별히 ‘긴즈부르그’로 불러달라고 요청했으므로 앞으로는 이렇게 표기하겠다), 조반니 레비, 에두아르도 그렌디 등이 그 선구자 격이다. 긴즈부르그는 ‘베난단티’(1996), ‘치즈와 구더기’(1976), ‘밤의 이야기’(1989)로 이어지는 3부작을 통해 이단 신앙과 농촌 구전문화 간의 관계를 추적했고, 유명한 논문 ‘징후들 : 실마리 찾기의 뿌리’(1979)에서는 미시사 방법론의 인식론적 근거를 제시하고자 했다.
레비는 ‘microstoria'란 말을 처음 고안해낸 인물이다. 그는 ‘무형의 유산’(1985)에서 근대 국가와 시장경제라는 거대 조류가 평범한 농민들에게는 무엇을 의미했는지 물었고, 최근엔 ‘미시사에 대하여’(1992)란 글에서 미시사의 개념적 함의를 제시하고자 했다. 그렌디는 ‘미시 분석과 사회사’(1977)에서 ‘이례적 정상(異例的 正常)’이란 개념을 통해 전통적인 실증주의에 내재한 엘리트적 속성을 비판함으로써 미시사의 이론적 근거를 마련했다.
이탈리아에서 태동, 1980년대 이후 유럽 ? 영미 역사학계로 전파
미시사는 이탈리아에만 머물지 않고 1980년대 이후 유럽과 영미 역사학계로 퍼져나갔다. 프랑스 아날학파 3세대인 엠마뉘엘 르 루아 라뒤리는 일찍이 한 농촌 이단 재판사건을 다룬 ‘몽타이유’(1967)로 미시사적 접근을 시도했고, 4세대인 로제 샤르티에는 ‘자기화하기로서의 문화’(1984)에서 엘리트 문화를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그들이 입장에서 적절히 변형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미국의 나탈리 제이먼 데이비스는 같은 이름의 영화로 널리 알려진 ‘마르탱 게르의 귀향’(1982)으로 16세기 프랑스 농촌의 한 평범한 여인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었는지 탐색했다. 여성의 삶에 대한 그의 관심은 17세기의 도전적인 세 여인을 다룬 ‘주변부의 여성들’(1995)로 이어졌다. 로버트 단턴은 ‘고양이 대학살’(1984)에서 ‘고양이 재판’과 같은 상징적 행위를 분석해 18세기 프랑스 공장 직공들의 사회문화적 태도가 어떠했는가를 물었다.
이외에도 의학사적 사건을 소재로 근대 초 이탈리아 민중의 일상을 섬세하게 드러낸 카를로 치폴라의 ‘누가 몬테 루포의 방책을 부숴버렸나?’(1977), 16~18세기 독일을 무대로 ‘민중화의 촌락 담론’을 구명하려 한 데이비드 세이빈의 ‘피로 얼룩진 권력’(1984), 르네상스기 피렌체의 사랑과 결혼을 다양한 문화적 맥락에서 복원해낸 ‘조반니와 루산나’(1986)등이 미시사적 접근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이러한 경향은 현재도 꾸준히 지속되고 있다.
미시사가 출현한 배경에 대해서는 여러 각도에서 조명해볼 수 있겠지만, 역시 가장 큰 이유는 1970년대에 일어난 서구 지성계의 회의주의적 경향 때문이다. 68혁명에서 어느 정도 그 징후를 읽을 수 있기도 하지만, 이 시기는 서구 지식인들이 근대성의 오랜 환상에서 깨어나기 시작한 때였다. 푸코나 데리나는 이미 1960년대 말부터 서구적 근대성의 내면을 깊숙이 성찰하기 시작함으로써 이른바 포스트모던적 조류를 선도했다. 리처드 로티가 ‘형이상학의 죽음’으로, 잔니 바티모가 ‘근대성의 종말’로 그 뒤를 이었다.
물론 이탈리아 마시사학파가 이러한 조류를 액면그대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었다. 그들의 뿌리는 마르트스주의였으므로 텍스트 밖의 실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고 주장하는 데리다식의 이른바 ‘언어적 전환’이나 연구대상에 대한 과도한 해석보다는 그에 대한 ‘촘촘한’ 기술(記述)을 선호한 문화인류학자 기어츠식의 ‘상대주의’에 대해서는 강한 거부감을 표시했다. 그들에겐 오히려 사회주의의 교조적 혁명관에 대한 회의, 현대 과학의 물화(物化)가 초래한 생태적 위기에 대한 반성 등 비판적 합리주의가 더 직접적으로 체감됐던 것 같다. 하지만 그럼에도 1970~80년대의 포스트모던적 조류가 미시사의 생육에 필요한 자양분을 마련해준 것은 분명한 사실로 보인다.
1970년대 서구 지성계의 회의주의적 경향이 출현 배경
미시사의 출현 배경을 역사학계로 좀더 좁혀볼 때, 그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고 동시에 도전의 대상이 된 것은 프랑스 아날학파였다. 1970년대는 2세대인 페르낭 브로델의 선도 아래 아날학파의 구조기능주의적 방법론이 서양 역사학계를 풍미하고 있을 때였다. 그 연장선상에서 집단적 행동양식과 가치관(망타리테) 같은 문화적 대상까지도 브로델이 주창한 ‘장기지속’적 구조의 관점에서 계량적으로 연구하려는 피에르 쇼뉘와 프랑수아 퓌레류의 계열사가 등장했다. 특히 퓌레는 민중의 삶이 오직 ‘수와 익명성’, 즉 인구통계학 사회학을 수단으로 한 계량적 방법을 통해서만 가능할 뿐이라고 단언했다.
좌파적 민중주의이자 동시에 반교조적 · 급진적 세속주의자로서, 역사를 ‘실제의 삶에 관한 학문(scienza del vissuto)’으로 규정한 미시사가들이 이에 반발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그들은 ‘수와 익명성’의 표피를 쓴 희미한 모습의 민중이 아니라 실제 살아 숨쉬는 생생한 인간으로서의 민중을 원했고, 이야말로 미시사의 출발점이자 지향점이었다.
미시사는 이전의 역사학과는 상당히 다른 몇 가지 특징을 가지고 있다. 이는 연구주제, 사료의 종류, 서술방식이라는 세 측면에서 살펴볼 수 있다.
첫째, 연구주제를 보자. 미시사는 지금까지 무시돼온 주제들, 연구가 거의 불가능하다고 간주된 주제들을 오히려 중점적인 연구대상으로 생각한다. 우리가 평범한 농민의 세계관(‘치즈와 구더기’)을 접하고 이름없는 촌부의 가치관(‘마르탱 게르의 귀향’)을 만날 수 있는 곳, 또한 근대 국가와 산업혁명 같은 거대 조류 속에서 도대체 작은 마을의 보통 사람들은 그것에 어떻게 대처해나갔는지, 작지만 촘촘한 삶의 전략들을 실감하게 볼 수 있는 곳은 미시사적 저작뿐이다.
미시사는 또한 지금까지 역사 연구에서 소외된 주제뿐 아니라 중요한 주제로 다뤄져왔던 것, 흔히 엘리트계급에 관련된 주제들도 다루되 그것을 새로운 각도에서 조명하며, 나아가서는 종종 기존의 해석과 이미지를 뒤집는 전복적 경햐을 가지고 있다. 피에트로 레돈디가 쓴 ‘이단자 갈릴레오’(1983)가 좋은 예다. 갈릴레오가 지동설을 주장하다 교회재판을 받고 그것을 번복했지만, “그래도 지구는 돈다”고 중얼거렸다는 일화(신빙성이 의심스럽긴 하지만)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이야기다. 그런데 레돈디는 당시 갈릴레오에게서 실제로 문제가 된 것은 지동설이 아니라 원자론이고, 그의 절친한 친구 교황 우르바노 8세가 즉위 전에 그를 보호하기 위해 상대적으로 경미한 사안인 지동설 유포를 죄목으로 삼았다는 파격적 주장을 내놓았다. 원자론은 가톨릭 미사에서 나눠주는 포도주와 빵이 곧 그리스도의 피와 살이라는 오랜 교리와는 도저히 병존할 수 없는 매우 ‘이단적’인 이론이었다.
비록 대부분의 과학사가들이 레돈디의 주장을 근거가 미약하다고 비판하긴 했지만, 이 저작이 전혀 다른 각도에서 갈릴레오를 조명하는 계기를 마련해줬다는 점만은 인정한다. 레돈디는 지금까지 천문학이나 역학 등 과학사의 내적 논리에서만 평가하던 ‘과학자’ 갈릴레오가 아니라, 반종교개혁과 30년전쟁에 휩쓸린 당시 이탈리아의 복잡 미묘한 정치적 · 문화적 관계망 속에 그의 위치를 잡으려는 새로운 시각을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그동안 의심할 여지없이 받아들였던 역사적 이미지가 가장 미세한 곳으로부터 전복될 수도 있다는 것을 ‘이단자 갈릴레오’가 극적으로 보여준 것이다.
연구주제, 사료의 종류, 서술방식에서 이전의 역사학과 차별화
둘째, 사료의 종류에 대해 생각해보자. 서양에서 사료에 대한 비판과 이용 방법에 대한 연구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그 결과 19세기 말에 나타난 것이 바로 랑케식 실증주의다. 이는 특히 고문서 자료를 신뢰하며 ‘자료 그 자체가 말한다’는 식의 역사 인식을 특징으로 하고 있다. 전통적인 역사가들(현재 한국사 연구자들을 포함해서)이 대개 이 범주에 속한다. 사료에 대한 이러한 관점은 자신에 대한 기록을 스스로 생산하는 엘리트계급의 역사를 기술하는 데는 비교적 유효한 측면이 있다. 그러나 기록을 거의 남기지 못한 민중계급 또는 하층계급에 대해서는 무기력할 수밖에 없다. 앞서 지적한 것처럼 교구 기록을 통계 처리해서 민중의 삶을 인구학적으로 살펴본다는 아날의 계열사적 접근역시 대안이 되기엔 부족하다.
미시사가들은 질적 자료에 주목한다. 그 대표적인 예가 재판기록이다. 특히 유럽의 16~17세기는 종교전쟁 시기로서, 그 어느 때보다 이단재판이 성행했던 때다. 프랑스나 이탈리아에는 아직 검토되지 않은 당시의 이단 재판 기록들이 풍부하게 남아 있다. 이를 이용한 거의 최초의 미시사 저작들이 바로 긴즈부르그의 ‘베난단티’(1966)와 르 루아 라뒤리의 ‘몽타이유’(1967)다. 이러한 종류의 자료에는 심문관과 이단 혐의자 간에 오고간 이야기(심지어는 심문 도중의 행동이나 제스처까지도)가 아주 세세히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미시사가들은 마치 어떤 마을의 의례를 옆에서 지켜보며 그 과정을 일일이 기술하는 인류학자처럼, 그 자신이 재판의 현장에 있는 양 관련 자료를 읽어나가면서 민중의 가치관과 문화적 태도를 살핀다. 재판기록뿐 아니라 일기, 연대기, 편지, 탄원서, 설화집 등 이전까지 고문서 자료에 비해 신뢰성이 떨어진다고 무시됐던 이른바 ‘내러티브적’자료까지도 활용의 대상이 됐다.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재판기록을 이용한 것이지만, ‘근대초 프랑스의 사회와 문화’(1975)에 실린 그의 많은 논문들은 이런 자료들을 십분 활용한 것이다.
셋째, 서술방식을 살펴보자. 미시사는 소읍이나 개인을 경계로 삼아 질적 자료를 재구성하기 때문에 자연히 그 서술방식도 이야기식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어떤 사건, 한 개인의 생각과 행적을 구체적으로 기술하고 해석하고자 하는 것이 미시사의 목표이므로 그에 따라 문체역시 달라지는 것이다. 레돈디의 ‘이단자 갈릴레오’는 종래의 과학사에서는 보기 드문 역사적 상상력, 움베르토 에코 못지않은 추리소설적 구성과 유려한 필치를 보여준다. 데이비스의 ‘마르탱 게르의 귀향’은 남편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밝히는 기묘한 재판과정에다 마지막 순간 진짜 마르탱의 출현이라는 반전의 묘미까지 더해져서 독자에게 꼬리를 무는 의문과 읽는 재미를 선사한다. 이 저작은 실제로 같은 이름의 프랑스 영화와 그것을 미국식으로 리메이크한 영화 ‘섬머스비’로 제작될 정도였다.
‘잊힌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로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
미시사의 서술방식은 단지 이야기식이라는 데 머물지 않고, 역사가의 자료 해석 과정까지도 ‘이야기’의 일부가 되는 특징이 있다. 긴즈부르그의 ‘치즈와 구더기’는 방앗간 주인 메노키오를 화형대로 보낸 이단 재판관들이 작성한 기록에 의거하고 있다. 하지만 주인공이 자신을 박해한 사람들의 질문 앞에서 망설이거나 침묵하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말을 할 때 저자인 역사가 또한 의문에 휩싸인다. 연구중에 일어나는 바로 이러한 의문,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가설, 그리고도 여전히 남아있는 불확실한 점들. 미시사의 서술은 이 모든 것을 가감없이 보여준다. 기존의 역사책들이 마치 ‘객관적’인 듯한 3인칭 내러티브로 사실을 ‘위장’하는 것과 달리 미시사 저작의 독자는 저자의 고민과 의혹을 스스로 체감할 수 있으며, 때로는 자신만의 해결책을 생각해볼 여지도 있는 것이다.
미시사는 아직도 충분히 성숙한 단계에 도달해 있지 않다. 그리고 이러한 접근방식에 대한 비판도 많다. 가장 주된 비판은 그것이 충분히 실증적이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예외적인 주제만을 선호함으로써 사회 전체를 제대로 조망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어떤 면에서는 옳고 어떤면에서는 틀렸다. 이러한 측면들은 왜 미시사가 필요한가를 생각해보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역사에 대한 기존의 입증 방식과 인식 체계가 엘리트계급의 문화권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점을 생각할 때, 보통 사람들과 민중들 삶과 문화를 되살려내기 위해서는 역사학이라는 게임의 룰 자체를 재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시점에서 중요한 것은 ‘역사란 무엇인가’가 아니라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라는 젠킨스식 물음이다. 이탈리아 미시사가들이 근대 민족주의와 목적론적 역사관을 거부한 급진적 세속주의자라는 사실이 이를 웅변해준다. 기존의 역사학에서 ‘잊힌 사람들’이 역사의 무대로 온전히 돌아올 때까지 미시사의 과제는 계속 남아 있을 것이다. 또한 여전히 ‘민족’과 ‘실증’에 갇혀 있는 한국의 역사가들에게도 이는 하나의 의미 있는 도전이 될 것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