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절 “형제들아 내가 너희와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와 같이 되기를 구하노라 너희가 내게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너희 같이 되었은즉 너희도 나처럼 되라는 이심전심이 되라는 뜻입니다.
이 말은 주님이나 할 수 있는 말씀입니다. 영의 세계는 이심전심의 세계입니다.
해롭게 하지 아니하였다는 말은 부당한 일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요즘은
목회자들이 교인의 비위를 맞추다 보니 세상을 따르고 맙니다. 우선은 그들을
이롭게 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은 해롭게 하고 맙니다. 한국의 대표적인 목사가
은퇴를 하고 난 다음에 목회를 오래 하다 보니 자신도 모르게 교인들을 따라 가더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도 이와 같은 현상에 자신 있게 아니요 할 수 없을 겁니다.
13절 “내가 처음에 육체의 약함으로
말미암아 너희에게 복음을 전한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그들은 바울의 육체의 약점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와 같은
상태에서 약할 때에 곧 강함이라고 표현을 했습니다(고후12:10) 이 정도라면
갈라디아교회는 지금의 관점으로 상당히 수준이 높은 교회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14절 “너희를 시험하는 것이 내 육체에 있으되 이것을
너희가 업신여기지도 아니하며 버리지도 아니하고 오직 나를
하나님의 천사와 같이 또는 그리스도 예수와 같이 영접하였도다”
바울은 육체에 시험거리가 있었습니다. 이를 바울은 스스로 사탄의 사자라고
말했습니다(고후12:7) 이와 같은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갈라디아교회는 바울을
업신여기지도 않고 그를 버리지도 않았으며 오히려 천사처럼 영접을 했습니다.
예수그리스도를 영접하듯 했다고 합니다. 육체의 자랑이 아니라 오직
진리의 말씀만 증거한 바울을 영접한 갈라디아 교회였습니다.
15절 “너희의 복이 지금 어디 있느냐 내가 너희에게 증언하노니
너희가 할 수만 있었더라면 너희의 눈이라도 빼어 나에게 주었으리라”
이와 같은 것이 갈라디아교회의 복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복이 지금 어디 갔느냐?
그 복이 무엇인지 너희들이 기억이나 하고 있느냐는 질문입니다. 바로 6절의 복입니다.
아들의 영으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로 부르는 복입니다. 이 복이 갈라디아교회에
온데 간데 없어 지고 말았습니다. 성령의 내적 역사로 시작했다가 육체로 진행되고
있는 겁니다. 신앙이 율법을 좇아 육체로 진행이 될 때에는 성령의 일이 작아 보입니다.
처음 말씀을 받을 때는 너희가 눈이라도 빼서 내게 주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지금은 뭐냐? 말씀을 받을 때와 육체 안에 있을 때의 차이를 지적합니다.
16절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참된 말을 하므로 원수가 되었느냐”
진리의 말씀을 증거하는 바울이었습니다. 그런데 진리를 말하면 육신의 사람들은
싫어합니다. 주는 것도 없으면서 미워합니다. 결국 원수가 되어 버립니다.
아무리 가까워도 진리의 사람을 자신도 모르게 은근히 적대시 하게 됩니다.
진리를 말하는 사람은 17절의 열심(의욕)을 내는 사람과 대조가 됩니다.
17절 “그들이 너희에게 대하여 열심 내는 것은 좋은 뜻이 아니요
오직 너희를 이간시켜 너희로 그들에게 대하여 열심을 내게 하려 함이라”
육신의 의욕으로 열심을 내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이
바로 진리의 사람을 이간질하게 됩니다. 분리시켜 쫓아내고 문을 닫습니다.
아마 지금 이 시대에 인터넷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현상입니다. 진리의 사람은
다른 이들과 쑥덕쑥덕할 필요가 없습니다. 진리 자체가 자신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을 붙잡기 위해 울타리를 만들고 문을 닫고 가둘 필요가 없습니다.
18절 “좋은 일에 대하여 열심으로 사모함을 받음은
내가 너희를 대하였을 뿐 아니라 언제든지 좋으니라”
좋은 일에 있어서 열심을 내는 것은 언제든지 좋습니다. 진리를 열심히 사모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열심과 탐심이 하나님을 향하면 하나님께 열납이
되는 제물이 된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헛된 영광을 구해서는 안 되는 겁니다.
19절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너희 안에 그리스도께서 형상화되기 까지 다시 해산의 수고를 해야겠답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의 영과 생명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이 되지만 그 다음에는
아들의 형상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속성이 나타나는 존재로 되어 가는 겁니다.
그리스도의 빛이 생명, 그 생명이 사랑으로 변해가는 것입니다. 그로 말미암아
성도의 몸은 하나님이 머무는 하나님의 집이 되어 갑니다. 이를 위해서 바울은
희생의 해산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왜냐하면 이와 같은
비밀을 가르쳐서 되는 일이 아니라 누군가 낳아야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0절 “내가 이제라도 너희와 함께 있어
내 언성을 높이려 함은 너희에 대하여 의혹이 있음이라”
이제 바울이 고함을 치는 이유는 그들 안에 있는 것이 의심이 되기
때문이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긴가민가해서 확인을 하려고 고함을
좀 쳐야겠다는 의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생명나무와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중간에 숨어 있듯이 이 둘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는 성도들이 얼마나 많은지...
목회자들은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고함을 좀 쳐야죠. 하늘의 상급 운운하면서
돈 내라고 말할 때 만큼만이라도 목소리를 높여야 합니다. 과연 그렇게 될까요?
듣는 말씀이 온전하지 못하고 듣는 귀가 둔해져서 영과 육의 분별이 분명하지
않고 빛과 어둠, 사망과 생명의 경계가 선명하지 않는 현재교회의 실정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리를 선포하고 진리의 말씀을 사모해야 합니다. 십자가의 도를
각 사람에게 부활시켜 마귀가 사용하는 사망의 권세로 율법의 종을 만드는 미혹의
영들로부터 하늘의 부름을 받은 성도들을 구원하고 보호할 책임을 져야 합니다.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
할렐루야! 기도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하늘의 비밀은 가르쳐서 되는것이 아니고
성령으로 낳아야 되는것"
아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