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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타페로 가는 사람
김 승 희
아침 신문인 『데일리 이블린』이 복도에 떨어져 있다. 언제나 나의 아침은 조간신문을 복도에서 줍는 일로부터 시작된다. 문을 닫으면서 보니 조간신문의 앞면 중간에 남자 무용수들이 허공 높이 뛰어오르는 사진이 커다랗게 실려 있다. 두 팔을 하늘로 치켜들고, 머리카락이 새의 깃처럼 허공으로 솟구치고, 두 다리는 L자로 접혀 허공에 그대로 멈추어 있다. 그 사진 위에는 ‘나는 중’이라는 제목이 실려 있다. “남자 무용수들이 발레수업 시간에 완전한 스윙*을 연습하고 있다. 월요일 오후, 핼시 홀에서. 프랑수아즈 마리네트가 발레수업의 교수.”
날개가 휘파람을 부는 것 같다. 날개가 없으면 날 수가 없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고 나는 것이 두렵다고 말한 사람도 있었지만 이렇게 날개 없이 나는 사람들을 보니까 나의 아침에 행복한 휘파람의 사닥다리가 세워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보아라, 어젯밤 중국식 당에서 뽑은 행운의 쿠키 종이에 뭐라고 씌어 있던? “당신은 지금 유례없이 성공하려 하고 있다”고 씌어 있지 않던가? 두 다리를 날씬하게 하늘로 접고 황금빛 어깻죽지에서 나비의 힘 같은 가벼움이 솟아오르는 남자 무용수들의 얼굴에서 나는 하염없는 행복과, 무게를 뛰어넘는 자의 흘러넘치는 영광을 느끼고 전율한다. 우리는 모두 중력에 굴복하는 무거운 사람들이 아닌가?
도대체 이런 아름다운 예술사진이 신문 1면의 한가운데 실린다는 자체가 이블린이 얼마나 평화스럽고 작은 예술도시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예가 된다. 처음 나는 전혀 미국의 이미지답지 않은 이 작은 대학촌 도시의 평화스러움에 놀랐었다. 강물도, 다리도, 물론 사람들도, 나무도, 건물도 어찌 그리 평화스러운가? 평화스러운, 너무 평화스러운 것이 나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평화의 충격으로부터 내가 깨달은 것은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휴전선 아래서 살았기 때문에 한 번도 평화라는 것을 체험하지 못한 세대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에게 평화란 낯선 것이었고 너무 이상한, 비정상적인 충격으로 다가왔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휴전선이 있고 그것이 우리의 격한 행동(빨리빨리)의 양식, 행복에 대한 죄의식, 날개에 대한 원천 봉쇄적 사고를 형성 했는지도 모른다. 누가 알겠는가. 무의식이 운명의 형식이라고 말한 사람도 있지 않은가? 그러나 오늘도 창밖은 회색이다. 나는 강물을 내려다본다.
강물을 내려다볼 때마다 중력을 느끼는 나의 마음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어머니 날 낳으실 적에
바람은 가던 길을 멈추고
우리 집 봉창문 밖에서 바람의 딸이 태어나기를 기다렸다.
어머니 날 낳으실 적에
무서워라, 달빛 하나 없는 초하룻밤이 무서웠다.
아가야, 엄마의 딸이 달빛 하나 없는 밤길, 삭망*의 길을 걸을까봐……
회색의 흐린 강물이 물결을 저으며 흘러가는 것을 유리창을 통해 내려다보고 있으려니 상여꾼의 노랫소리 같기도 하고 강원도 정선이나 혹은 영월같이, 첩첩 막힌 벽지에서 구술 전승되어오는 민요 가락 같기도 한 어두운 노랫소리가 나의 귓가에 들려오는 것 같다. 어디에서 오는가, 이 노랫소리는, 하늘에서 오는가, 아니면 내 방 유리창 아래를 흐르는 저 이블린의 강물의 어느 밑바닥에서 웅얼거리며 퍼져 나오는가. 어느 때 나는 강물만 보면 떠오르는 그 시구 같기도 하고 정선아리랑 같기도 한 민요조의 비탄가가 어디에서 오는가 궁금하여 강물의 밑바닥을 하염없이 들여다보며 강변에 앉아 시간을 보내기도 했었다. 강물 속에 무엇이 있겠는가, 강원도 정선이 미국 중서부의 이 평화로운 강물 속에 있겠는가? 도대체 이 비탄의 노래가 솟구쳐 나오는 근원, 중심, 원천은 어디인가 알기 위해 아침이나 저녁이면 나는 그렇게도 긴 시간을 강변을 샥책하며 걸었다. 아아, 잡을 수 있는 것은 흔적과 이미지뿐, 원천을 발견하지는 못하였다. 강물은 그냥 회색이거나 푸른색이거나 해가 질 때면 타오르는 붉은색이거나 할 뿐이었다.
“아가야, 우리는 하나의 콩 줄기에 묶인 깍지콩과 같으니 부디 저주하지 말고…….”
노래는 또 그렇게 이어지고 나는 나의 어머니, 정선아리랑의 안 보이는 원천이자 내 모든 비탄의 근원인 어머니를 잊기 위해, 커튼을 닫아버린다. 강물의 중심에 빠져 환생한 것은 심청이다. 유교 이데올로기는 그녀에게서 최고의 중력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이때 나의 꿈결 같은 시간을 현실의 시계로 돌려놓고 싶다는 듯 전화벨이 울린다. 나의 아침은 늦은 오전 속으로 황급히 굴러 떨어진다.
명확하고 이지적인 음성의 에리카다. 그녀는 인도 출신이기 때문에 영어 실력이 좋고 자신의 지성과 영릉한 사고를 영어로 밝힐 수 있기 때문에 매사 다른 행동에도 자신이 있다. 나이지리아 남자와 결혼하여 아프리카 국적이 되었지만 그녀는 인디언 여인이고 영문학 박사이자 교수이다.
“킴, 너 방에 있으면서 왜 꼼짝 안 하니? 너, 빨리 결정해라. 너 때문에 우리가 미챔 회사와 확실한 계약을 못하고 있어. 네가 잘 몰라서 그렇지 미국은 생스 기빙 데이에서 크리스마스 사이가 가장 비행 스케줄이 바쁜 시즌이야. 지금이 11월 중반이 아니냐. 빨리 결정해야 돼. 내일까지 확실한 것을 알려주렴.”
또 그 소리다. 나는 솔직히 너무도 명확한 그녀에게 싫증을 느낀다. 그러나 사실 에리카는 결코 차가운 여자가 아니다. 그녀의 말이 오늘 차갑고 사무적으로 들리는 것은 그녀가 오늘이야말로 나의 우유부단하고 지겨운 머뭇거림에 종지부를 찍어주고자 마음먹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뭐 우유부단하고 싶어 그러는 줄 아니? 매일매일 나는 산타페를 들렀다 갈까, 집으로 그냥 갈까?를 내 필생의 제목으로 정해놓고 연구하고 있다.
우리는 미국의 작은 도시 이블린의 세계예술가대회에 석 달간 참가하고 이제 각기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는 참이다. 그런데 여성 시인과 화가 들이 몇 명 모여 이블린에서 자기 나라로 그냥 돌아갈 것이 아니라 산타페에 일주일 정도 들렀다가 거기에서 헤어지자는 것이다. 우리는 거의가 제¸세계의 여성 예술가들이고 중년의 나이이기 때문에 이번 여행을 무언가 결정적인, 다시는 없을 기회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 생전에 언젠가 또 유나이티드 스테이츠 오브 아메리카에서 이런 자유로운 시간을 다시 가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집에 돌아가면 누구나 자기 현실 속의 직업인으로, 어머니로, 아내로, 자기 사회의 한 구성원이 되어 다시 자기 나사의 원래 위치로 돌아가 나사 맞추기의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중력에의 복종.
그리고 지금은 중력이 거의 없는 희귀한 계절의 마지막 순간들이 아닌가. 그리고 예술가란 언제 어디서나 죽음의 향기를 누구보다도 먼저 맡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시간을 향해 무언가 죽음에 항의하는 행동의 기념탑을 세우고 싶어 한다. 하나의 시간이 끝날 때 거기에서 풍겨오는 죽음의 냄새. 모든 끝은 죽음의 예행연습이고 우리는 누구든지 간에 죽음의 약혼녀들이다. 죽음이 있기 때문에 우리는 모든 작은 끝을 애도한다. 하다못해 종강파티. 쫑파티라는 것도 인간이 기본적으로 죽음을 의식 하는 동물이기에 거행하는 의식이다. 그래서인지 프로그램의 마지막 날을 앞두고서는 모두들 조금씩 우울증 비슷하기도 하고 무너져 내리는 환상의 끝에서 경험하는 극심한 허무감 비슷한 것을 앓고 있었다. 그것은 그만큼 이블린에서의 생활이 일상을 떠난, 현실 시간이 아닌, 가벼움과 날갯짓으로 가득 찬 시간이었기 때문이리라. 결코 다시는……
그래서 생각한 것이 산타페였다. 산타페에 무엇이 있는지, 그것을 구체적으로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지만, 어느 사진작가가 산타페의 자연 속에서 누드사진을 찍었는데 그것이 그렇게 아름답다는 것, 정말 원시라는 것, 20세기의 문명이 오염시키지 않은 순수 원초의 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 외에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우리가 마지막 이별파티의 장소로 산타페를 택한 유일한 이유였다.
산타페에서의 며칠…… 원시의, 근원의, 원색의 시원기를 찾아서. 억압 이전의 삼원색을 찾아서. 나이지리아의 교수인 에리카와 이집트의 작가 모하마드, 한 남자와 두 번 결혼하고 두 번 이혼하고 혼자 소설을 쓰며 살고 있는 라틴아메리카의 모니카, 전위무용가인 케냐에서 온 님페, 작가이자 비디오 예술가인 마리안, 그리고 나의 친한 친구이자 루마니아에서 온 탁월한 시인인 타타넬라…… 이렇게 모여 찬성을 하고 서로 격려하면서 선택한 곳이 산타페였던 것이다. 왜 인지는 아무도 모르고 구체적 이유도 없다. 순수 원초. 자유. 뉴멕시코. 모든 중간색의 파생 이전의 원색 그 자체.
언제나 11월은 흐리다. 서울의 11월드 안개의 구름으로 흐려서 나는 11월에는 언제나 인생의 안개주의보를 느낀다. 모든 나뭇잎들은 떨어져 자기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하고, 새들도 어딘지 우리가 알지 못할 자기 집으로 돌아갈 준비를 하고, 뱀·다람쥐·나비·잠자리·…… 그것들은 이미 우리가 모루는 자기 집을 예비해놓고 어디론가 돌아갔고, 돌아가려 하고 있다. 나…… 나도 어딘가…… 나의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 않는가? 산타페로 가는 것에 내가 동의도 안 하고 완전한 거부도 안 하며 어정쩡한 머뭇거림을 계속하고 있는 것은 바로 이 11월 때문이다. 11월의 안개주의보는 나에게 말한다. 11월은 길을 묻는 계절이 아니라 집으로, 어느 회색의 길 끝에 있는 집으로 돌아가는 귀소*의 계절이라고. 집이라니…… 집!…… 집? 집으로!!!!
―어제도 보증보험회사에서 전화가 왔다. 12월 7일까지 부채를 상환 안 하면 집달리*를 보내 집을 차압한다는 마지막 경고장을 어제 발송했다고 하더라. 그러니 네가 빨리 귀국하여, 그 전에 얼굴이라도 보험회사에 비치고 연기를 탄원하면 또다시 봐줄는지 모르겠다만 지금으로 봐서는 12월 7일날 차압 들어오는 것은 사실 같다. 내가 무슨 죄가 많아 너에게 지금 이 말을 하는지는 모르겠다만…… 핏줄이 원수니 어떡하겠냐. 네가 우리 집안 장녀니 집안의 모든 손재수*를 한 몸으로 막고…… 너야 아버지 덕에 박사 공부까지 했고. 아무튼 12월 7일 전에 무슨 조처를 해야 하는데 이 추위에 어린것들 데리고 길바닥에 나갈 수는 없지 않느냐. 에미는 아무 힘이 없어 태평양 건너 늬 얼굴만 바라본다, 동기간에 보증 서는 것이야 인간지상정이니 너무 저주하지 말고.
바로 며칠 전 이런 편지를 어머니에게서 받은 것이다. 세상에 동생이라는 인물이 다방 하나를 인수하고 오천만 원 은행 융자를 받을 때 보증을 서준 것이 이 년간, 파우스트를 따라다니는 메피스토의 저주처럼 나를 따라다니고 있는 것이다. 나의 동생이라는 인물은 다방 뒷방에서 나오다가 나를 보더니 부시시 웃으며 미국 가기 전에 은행 융자 건 해결해주고 가야지 어떡하느냐고 오히려 나를 나무란다. 나는 말을 잃고 다만 한 개의 콩 줄기에 묶인 깍지콩 같은 그 사악한, 불행한 핏줄이라는 것을 증오할 뿐이었다. 인연. 연좌제. 보증인. 연대보증인의 의무와 책임. 피의 함성과 분노. 누가 누구를 보증 설 수 있으며 누가 누구에게 보증이 된다는 발상 자체가 나에게는 무의미했기에, 유언과도 같은 “에미의 마지막 간청”이라는 엄마의 말을 받아들여 보증보험회사에 동생과 같이 가서 창구 앞에 서 있다가, 보험희사직원의 “보증인은 여기 저기 거기에 도장을 찍으세요” 라는 상냥하기 짝이 없는 지시에 따라 몇 군데, 도장을 찍은 죄밖에 나에게는 하무 책임도 없었다.
사실을 말하자면 이 세상에서 내가, 우리 가족이, 가장 보증할 수 없는 인간이 있다면 바로 그라는 인물이었다. 그가 “이번 기회를 마지막으로 알고” 장소가 좋고 매상도 좋은, 퇴계로에 있는 다방 하나를 인수해서 사업을 잘해서 어머님 잘 모시고 자기 자식들 잘 부양하겠다고 하도 엄마를 구슬리는 바람에 내가 보증의 앞잡이로 뽑힌 것 뿐이었다. 어떻게든 그 싫은 의무에서 벗어나려고 도망칠 궁리를 하고 있을 때 나는 저승에 계신 아버지의 음성을 꿈에 들었다.
“탄아, 내 딸아, 너는 얼마나 강한가.” 오직 그 말 한 마디뿐이었지만 나는 주술에 걸린 듯이 아버지가 바라는 강한 딸이, 어려서부터 신동 소리 듣던 아버지의 자랑스런 딸이 다시 되기 위해, 다음 날 이른 아침 세종로에 있는 보증보험회사로 동생과 함께 걸어 들어갔던 것이다.
보증인이 된다는 것에 대한 심리적 실감이 전혀 없었기에 나는 그저 도장 세 번 찍은 기억밖에 아무런 책임감을 느끼지 못했다. 융자금에 대한 이자 납부가 늦어져 다달이 나에게 이자 독촉이 오고, 원금 상환 독촉까지 날아들어 올 때도, 원금 상환을 더 이상 미루면 나의 집을 차압한다는 계고장*이 올 때도, 나에게는 보증인의 위치에 대한 심각한 각성이 없었다. 엄연히 돈 쓴 사람이 따로 있고 그 돈으로 운영하는 다방이 있는데 왜 나의 집을 차압하겠느냐는 원론적인 도덕적 분개 때문에 나는 보증보험회사의 계고장을 무시해버렸다.
자본주의 사회의 기초지식이 나에게는 결여되어 있다고 보아야 하리라. 워낙 기초지식이 없는 사람은 때때로 그렇게 용감하고 오만할 수 있다.
그 집은 남편이 나에게 남긴 유일한 유산이고 나와 두 아들이 살아야 할 마지막 공간이기 때문에 ‘차압’ ‘경매’ 따위의 단어들이 너무나 우습게 느껴질 뿐이었다. 참, 웃겨, 감히 누가 이 집을? 하는 나의 심리적 절대주의가 모든 현실적 진행을 비현실적 인 것으로 얕잡아보게 만든 것이다. 다방은 손님도 없을뿐더러 동생의 이름으로 계약된 것도 아니고, 우리 가족은 생판 듣지도 못한, 어느 여자의 이름으로 계약된 것이어서 이 융자금 상환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것이 밝혀졌을 때가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사흘 전이었다.
“이제 이 문제는 엄마가 책임지세요. 나는 더 이상 모르겠으니까. 지난번 원금 상환도 내가 온갖 고생 다해서 일부 갚았으니까 이제 나머지는 좀 제발 그 새끼하고 알아서 해요. 아, 지겨워, 내가 이 집안의 종신노옌가, 남들은 출가외인이라고 시집간 딸은…… 아무튼 지겨우니까 다 내 앞에서 꺼져버려요!”
동생은 내 ˙앞에 아예 나타나지 않으니 꺼지고 말고 할 필요도 없고 우리 엄마는 꺼지는 게 아니라 손자들을 돌보기 위해 오히려 나의 집에 와서 살림을 살아주고 있는 형편이니 그 싫은 피를 바꾸기 위해서는 동맥이라도 끊어 피를 다 쏟아버리지 않는 한, 그래서 백지장같이 텅 빈 피가 되지 않는 한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 이블린의 강물에서 들려오는, 정선아리랑, 그 흐리고 침울한 어듐의 노래. 단종이 어린 세자비와 함께 귀양 와서 일천 날, 일천 밤을 울고 울다가 목소리를 잃어버려 소리가 나오지 못하였다는 영월. 그래서 정선아리랑에는 억장이 무너지는 숙명의 먹구름이 끼어 있는가. 나는 아리랑 중에서는 정선아리랑을 가장 좋아한다. 뭐랄까, 밀양아리랑은 정서 부족이고 진도아리랑은 정서는 있으나 너무 청랑하다.* 너무 밝게 햇빛이 찰랑인다. 11월의 하늘에는 정선아리랑의 아라리가 어둡고 서사적으로 잠겨있다.
노크 소리가 급하게 들리더니 타타넬라가 화장까지 화려하게 한 모습으로 들어온다. 까만 가죽 재킷에 내가 준 빨간 실크 블라우스에 까만 가죽 바지를 받쳐 입은 모습이 자못 생기 있고 야성적이다.
“얘, 너는 오늘 왜 꼼짝을 안 하니? 나 지금 대학교에 가다가 뉴스 듣고 들어왔어. 너희 나라에 무슨 일 있나 봐. 노스코리아가 휴전선 근처에 수천 명의 군인들을 이동시키고 있다는 거야. 아주 젊은, 대학생 또래의 군인들인데 모두 머리카락을 깎었다는구나. 머리 깎은 군인들은 무섭지 않니. 일본 가미카제* 군인들이 자신의 신인 천황을 위해 죽기를 결심할 때 머리를 깎는 거 아냐? 동양의 스님들이 부처가 되기 위해 산으로 들어갈 때 머리를 깎는 것이고. 노스코리아의 움직임이 심상치 않으니 너희 나라에 전화해봐. 나도 그것밖에 모르니까. 수업 갔다 와서 다시 올게. 참, 너는 안 나가니?”
“응, 나 오늘 움직이기 싫어. 패널시간에는 가야지…….”
타타넬라는 노스코리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관심은 긍정적인 관심이 아니라 냉소적인 호기심이다. 그녀는 70년대와 80년대를 거쳐 독재에 저항하고 독재를 뚫고 나온 힘 있는 시인이다. 차우셰스쿠 독재에 저항하고 공산독재를 무너뜨린 민중민주파의 시인으로서 차우셰스쿠가 무너진 후 그녀는 의회의 의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물론 투표를 통해서. 4년 임기가 끝나고 이제는 그녀의 남편이 의회에 들어가고 그녀는 시를 쓰며 출판사의 편집주간으로 나가고 있다. 그녀의 노스코리아에 대한 관심은 차우셰스쿠에 대한 증오와 관련된 것이다. 차우셰스쿠는 자신의 권력 유지에 위기를 느낄 때마다 노스코리아를 찾아가 김일성으로부터 독재 유지 통치기술을 한 가지씩 배워왔다는 것을 루마니아 사람이면 누구나 알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의 움직임은 무엇을 의도하는 것일까. 남한 정부는 이것에 대해 어떤 반응을 보일까? 5공화국이나 5공화국 때 같으면 이만한 북한의 움직임 만 가지고도 전국에 비상계엄령이 내려졌으리라.
전쟁·동란·38선·사변·동족상잔……우리의 상상력은 이런 식의 위기상황에 대해 너무도 도식적인 연상의 그물망을 가지고 있다. 대체 무슨 일이·…·나는 급한 생각에 TV를 켜고 CNN을 찾았다. 마침 CNN의 화면에는 금강산인지 휴전선 부근의 희미한 산이 보이고 무언가 희뿌연 행렬이 움직이는 것이 보이는데, 뉴스 진행자의 너무 빠른 영어를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하니 그것은 사건이라기보다는 하나의 이미지로만 멍멍하게 다가올 뿐이다. 그것이 지금ㅡ여기一 있는 나와 서울에 ― 살고 있는―나의 ―두―아들에게 무슨 의미가 있는지 전혀 실감으로 다가오지가 않았다. 그것은 단지 CNN이 제공하는 이미지였다. 세상의 어느 누구도 CNN의 눈을 피할 수는 없고 그 나라 정부도 모르는 일을 CNN은 누구보다도 빨리 알고 있으며 그래서 CNN은 지구 위의 가장 큰 정부라고 말하지 않는가?
정보화 사회에서는 모든 정보가 파편화되고 모든 사건이 이미지화 되어서 삶 그 자체가 가지는 절박한 아픔이나 사건 그 자체가 가지는 무거움이 감소된다고 말한 것은 확실히 사실이다. 그래서 역사도 영상이 되고 전쟁이나 학살 같은 끔찍한 사건도 하나의 화면이 된다. 화면은 또한 연속적인 인과관계의 의미론적 사슬을 갖는 것이 아니라 편집의 불연속성을 갖는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하나의 이미지와 다음 이미지 사이에 논리적 인과관계를 가질 수 없다. 그래서 정보화 사회의 사람들은 필연적으로 표면 위의 삶을 살 수밖에 없으며 삶의 단편(斷片)밖에 가지지 못하고 가볍고 부유하는 삶을 살 수밖에 없게 된다. 걸프전쟁 때 우리는 보지 않았는가. 미국과 연합군의 바그다드 공습 때 전 세계인이 숨을 죽이고 관찰, 아니 관람한 것은 한 나라의 비극적 운명, 거기 사는 사람들의 처절한 운명과 무서운 권력투쟁에 대한 끔찍한 전율이 아니라 새로운 무기에 대한 호기심과 전쟁 영화 촬영을 보는 것 같은 구경심리뿐만이 아니었던가. 미국은 그 영화를 제작하고 감독 촬영했고 할리우두판 대형 전쟁영화는 전 세계에 위성방송을 통해 즉각 동시 생방송되었다. 그것이 정보화 사회의 생의 양식이다. 전쟁도 이미지가 되고 인간의 죽음, 전쟁의 참상 등은 실체감을 잃고 간접화되어 전달된다. 그러므로 이 정보화 사회 속에서는 아무것도 무겁지가 않다. 모든 것이 가볍다.
CNN이 북한의 움직임을 계속 보도하지 않는 걸 보면 심각할 것이 없다는 이야기다. 오늘 밤 위성방송으로 KBS를 봐야겠다. 이블린에는 밤 열 시 반에 한국 KBS의 위성방송이 나온다. 「일월」이라는 KBS 연속극도 한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정보위성이 떠 있으니 항상 조심해야 한다. 또한 그 덕분에 북한의 움직임에 대한 걱정을 잊을 수 있으니 고마운 정보위성이기도 하다.
느릿느릿 점심을 챙겨 먹고 나는 대학으로 간다. 오늘 오후엔 타타넬라를 포함한 공산권에서 온 작가들과 독재를 경험했던 나라의 작가들이 ‘검열, 자기 검열’이라는 제목으로 패널 디스커션을 한다. 이것이 우리 프로그램의 마지막 공식 토론이다. 케냐에서 온 전위무용가인 님페는 독재가 한창 심할 땐 그녀가 빨간 끈으로 머리를 묶고 맨발로 거리를 걷는 것 자체가 저항행위로 비쳐져 감시당했고, 방글라데시의 시인은 과거 자기 나라의 독재정부가 남자의 머리카락이 긴 것을 반정부행위로 판단해 길에서 경찰들이 가위를 들고 머리를 깎았다는 이야기를 했다. 모두들 배꼽을 쥐고 웃었으나 나는 3공 당시 우리 대학 시절의 장발 단속이 생각나 쓴웃음이 나왔다. 후에 나의 남편이 된 운이 유학시험 준비로 시간이 없어 머리를 못 깎고 다니다가 신촌에서 장발 단속반에 딱 걸려 마포경찰서에 하루 구금되었던 생각이 났다. 운은 나에게 아들 둘과 집 한 채를 남기고 먼저 갔다. 교수생활 이십 년에 과로사. 얼마나 무거움에 시달렸으면 그렇게 가볍게 갈 수 있는가?
마지막 차례로 타타넬라가 나와 흥분된 목소리로 차우셰스쿠 당시 정부의 검열과 그런 공권력의 검열에 시달리다 보니까 어느 때부터인지 자기가 자기를 검열하는 자기 검열이 자기도 모르게 시작되었고 항상 안전선을 찾다 보니까 수사학이 발전되어 그때의 문학이 할 말을 모조리 지껄이는 요즈음의 루마니아 문학보다 더 좋았다는 말을 했다. 그녀는 전체주의 사회의 제도권적인 검열은 작가를 안전선 안에 가두는 비인간화를 저지를 뿐만 아니라 위험한 것과 타협하는 협정선을 개인에게 준다는 의미에서 가장 비열한 미끼라고 말하고, 정부 검열관의 시선을 자기 내부에 갖게 되었을 때 그녀는 심각하게 자살을 고려했었다고 고백했다. ‘'검열당하는 자는 검열관을 닮고, 억압당하는 자는 억압하는 자를 닮는다.” 그녀는 가택수색의 위험에 항상 노출되어 있어서 자신의 시를 이모 집 지하실의 양파자루 속에 숨겨놓았었고 그래서 자신의 시에서는 양파 냄새가 난다고 웃으며 말했다. 양파 냄새는 그녀의 안전선이었던 것이다.
검열당하는 자가 검열관을 닮는 것이 진실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휴전선을 닮아 있을까? 휴전은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백록담은 휴화산인가, 사화산인가? 휴화산 아래 사는 사람은 화산 없는 마을에 사는 사람과 또 사화산 아래 사는 사람과 근본적으로 다른 운명의 형식을 가지고 있으리라. 안정된 평화가 항상 나에게 낯설고 미래에 대한 확신을 한 번도 갖지 못했던 것도 혹시 휴전선 증후군이 아닐까. 루마니아의 공산독재가 무너지고 자본주의화가 시작되자 이제 공권력의 검열은 사라졌는데 더 무서운 검열이 시작되었다고 타타넬라는 말했다. “그것은 상업주의의 검열이다. 공산독재 아래에서 우리가 이데올로기 검열관과 함께 일했다면 이제 자유 루마니아에서 우리는 상업주의의 검열관과 함께 일해야 한다. 상업주의 검열관이 내 안에 들어와 살면서부터 자기 검열이 또 시작되었다. 이 책이 팔릴 것인가, 말 것인가 하는. 나는 여전히 행복하지 않다.” 안전선과 휴전선은 누구에게나 있는 것 인가?
정말 타타넬라는 지성적이고 강력하며 흑백이 분명한 발언을 잘한다. 그녀는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알고 있고 자신의 정열을 실천할 줄 아는 여자다. 나는 타타넬라의 그 강력한 지성과 과격한 열정이 좋다. 나도 그녀처럼 분명하고 싶다. 나는 왜 내가 무엇을 원하는 지를 모를까? 항상 될 대로 되겠지의 사상을 나는 가지고 살았다. 비틀즈의 「렛 잇 비」를 너무 좋아했던 탓일까? 질문이 이어지고 우리의 마지막 공식 활동은 끝났다. 타타넬라가 여자들끼리 푸른 오리온에 모이자고 한다. 푸른 오리온은 타운에 있는 레스토랑의 이름이다. 끝을 애도하고 축하하자는 거겠지. 좋다. 나도 끝은 애도하고 축하하고 싶다. 그런데 문제는 아직도 시작이 안 보인다는 거구나. 산타페로 갈지, 집으로 갈지. 회색의 11월 때문에.
푸른 오리온에 앉았을 때 타타넬라는 가죽 재킷을 벗고 먼저 담배를 피우기 시작한다. 빨간 실크 블라우스가 푸른 오리온의 푸른 조명과 어울려 아주 강인하게 보인다. 아침에 조간신문에서 보았던 남자 무용수들의 나는 모습에서 느꼈던 강력한 날갯죽지의 힘과 중력을 거부하는 탄력을 나는 그녀에게서 느낀다. 그 빨간 실크 블라우스는 그녀가 워낙 좋아한다고 조르기도 했지만 내가 진정으로 그녀에게 미안해서 준 것이다.
우리가 처음 이블린에 와서 서로를 아직 잘 모르고 있을 때였는데 그녀는 내가 한국에서 온 사람인 것을 알자 모든 사람이 다 있는 데서 “물론 사우스코리아겠지?” 하더니 북한에 대한 비판을 늘어놓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그녀가 아는 소설가가 있는데 그는 중국 여행을 간 김에 북한을 여행하고 싶어 공식적 외교루트를 통해 허가를 받고 북한에 갔다. 호텔에 며칠을 묵었는데 어느 날 아침 무심코 그 전날 쇼핑 한 신발이 눈에 띄어 마침 방에 있던 신문지로 그것을 싸놓았다. 그런데 몇 분 후 노크 소리가 들리고 누군가가 방 안에 들어와 그를 연행해 갔다. 어느 어두운 방에 갇혀 그는 영문도 모르고 취조를 받았는데 “왜 신문지로 신발을 싸놓았느냐?”는 것이었다. 왜 신문지로 무엇을 싸면 안 되는가? 우리는 신문지로 먹던 밥을 덮어놓을 수도 있고 개똥을 치울 수도 있고 누군가 길바닥에 토해놓은 것을 덮어놓을 수도 있다. 왜 그것이 문제인가? 그는 그동안 자신의 방 안에서의 행동조차 낱낱이 감시당하고 있었음을 알았고 공포와 불안으로 하룻밤 사이에 백발이 되어버렸다. 왜 신문지로 무엇을 싸놓으면 안 되는가? 그는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채로 하룻밤의 지옥을 보내고 다음 날 자기 대사관의 도움으로 풀려나게 되었다.
하룻밤 사이에 백발로 변한 그는 환한 햇빛 아래서 대사관 직원에게 물었다. 왜 여기서는 신문지로 무엇을 싸놓으면 안 되는가? 그것은 신문이 Holy Paper이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왜 그것이 Holy Paper인가? 모든 사람의 시선이 타타넬라의 입에 모였다. “김일성의 사진이 신문에 실리기 때문”이라고 그녀가 말하자 모든 사람이 눈물이 나도록 웃으며 일제히 나를 응시하는 것이었다. 나의 얼굴은 수치와 분노로 새파래졌다. 나는 더듬거리며 “우리는 안 그래. 사우스코리아는 너무 자유로워서 우리는 아노미를 앓고 있다”고 말했는데 사람들의 침묵의 웅시 속에는 “우리라니? 그 우리 속에는 노스코리아는 안 들어가나? 같은 동족이면서.” 하는 멸시의 눈빛이 있는 것을 나는 느꼈다. 그 뒤 타타넬라는 가끔씩 그 이야기를 했고 그때 일을 당한 사람이 지금도 얼마나 건강이 안 좋은가를 누누이 나에게 말하는 것이었다. 미안함의 표시로 나는 그녀가 그렇게 갖고 싶어 하는 내 빨간 실크 블라우스를 그녀에게 주었다. 우리가 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우리가 아니라고 부정해버릴 수도 없는’ 사람들이 한 야만적인, 건전한 감각을 잃어버린 상식 이하의 행동이 아무튼지 미안했기 때문에 .
모두들 다 모였다 싶을 때 에리카가 입을 연다. 아침처럼 날카롭지 않고 어딘가 어둡다.
“산타페에 가자고 처음 말이 나왔을 때는 모두들 찬성이었는데 내일까지 예약을 안 하면 안 되는데도 오늘 이 시간까지 불투명한 사람이 많다. 내가 하나하나 물을게.” 한다. 타타넬라는 자신은 노 프로블럼이니 오케이라고 하고 이집트의 모하마드는 잠시 머뭇거리더니 안 간다고 하면 배신자가 되는 거냐고 묻는다. 모슬렘*들은 신의를 굉장히 중요시 여긴다고 몇 번씩 그녀가 말한 바 있어서 다들 웃으며 그렇다고 하니까 그녀는 무겁게 입을 연다. “나는 그동안 이블린 대학교 영문학과 박사과정에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는지 알아보고 있었어. 그런데 오늘 응답을 받았는데 오케이래. 나는 내년 가을에 다시 여기 와서 공부하게 되었어. 그러니까 나는 빨리 집에 가야 해. 가서 내년을 위한 준비랑 여러 가지 처리를 서둘러야 해. 나의 남편이 마취과 의사잖아. 그도 여기 대학병원에 교환 프로그램을 알아보고 있고.”
모하마드의 나이가 52세이다. 52세의 나이에 무엇을, 외국 유학을 시작할 수 있는가? 나는 기가 막혀 심한 우울증이 몰려오는 것을 느낀다. 갑자기 심한 상대적 박탈감이 드는 것이다. 내가 집에 차압이 오느냐, 마느냐? 하는 저주스런 신용보증보험 문제로 그토록 고통에 빠져 있을 때 바로 나의 옆방에서 이렇게 미래를 준비하는 사람이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모두들 모하마드의 용기를 찬탄하고 부러움의 머나먼 시선으로 바라본다. 멀다. 그녀는 먼 곳에 있다. 그녀에겐 산타페가 필요하지 않다. 우리는 순식간에 심한 허기에 빠져드는 것 같다. 안전선을 부수고 스스로 전쟁이 된 여자의 용기.
그때 모니카가 무겁게 입을 연다. “요즈음 마리안 못 보았지? 진작 말했어야 하는데…… 마리안 지금 다른 주에 가 있다. 그녀 임신이래. 여기는 낙태가 허용이 안 되잖아. 그녀는 아마 산타페에 못 가. 여기 돌아오면 자기 나라에 금방 가야 돼.”
임신이라니? 여기 온 지 5개월밖에 안 되는데? 그럼 요즈음 같이 다니던 그 젊은 학생? “아니지. 자기 나라에 있을 때 방송국 PD랑 가깝게 지냈는데 부인 있는 남자래. 싱글 마더가 돼서 일생을 그렇게 망치고 싶지는 않대.”
싱글 마더인 님페의 얼굴이 굳어진다. 그녀눋 가방을 어깨에 메더니 훌쩍 나가 버린다. 생을 망친다는 말이 그녀를 화나게 했으리라. 남은 사람들은 모하마드의 충격에 이어 마리안 임신의 충격, 님페가 준 충격으로 아주 멍청한, 물속 깊이 빠져버린 사람의 표정으로 앉아있다. 에리카는 나에게 묻는다.
“탄은 아마 어려울걸, 오늘 뉴스에 보니까 코리아에 이상한 일이 생기려나 봐.”
타타넬라는 나의 대변인처럼 심각하게 말한다.
나는 긍정도 부정도 못하고 앉아 있다. 아무 일도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큰일이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은 우리가 한 치 앞을 못 내다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모하마드의 용기에 기운을 얻어 솔직해지기로 결심 했다. 회색을 걷어라, 회색을 걷고 새 길을 내라. 왜 선택하기를 주저하는가 항상? 제발 안전선을 철폐하코 모하마드처럼 새로운 길을 만드는 용기를.
“그 문제는 우리 정부 발표를 들으니까 심각한 게 아니라고 하더라. 나는 정치적인 문제가 아니고, 사실 집에 심각한 문제가 있어. 두 아들도 나만 기다리고…… 난 집에 빨리 돌아가야 돼. 산타페에는 확실히 못 갈 것 같애. 정말 미안해.”
모두들 나를 멍하게 바라본다. 너만 자식이 있느냐는 표정과 너마저 빠지면 어떻게 되느냐는 표정이다. 일주일의 여유를 못 내느냐는 표정인데 내가 12월 7일이라는 지상 최후의 심판의 날을 앞두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겠는가. 12월 7일날 차압이 들어오겠다니 나는 이제 내일이라도 집에 돌아가 누구에겐가 빚을 내든가 아니면 보증보험회사에 가서 나의 모든 것을 걸고 심판의 날을 연기해야 한다. 한 마디로 기적이 일어날 것을 나는 기대하고 있다. 보증보험회사를 상대로 휴전협정을 다시 맺어야 하는 것이다. 나를 세상에 있게 한 핏줄의 대가로. 인당수에 빠지는 심청이보다는 낫겠지. 나을 것도 없다. 황후로 환생할 것도 아니고 오천만 원 갚을 궁리를 하다 보면 나의 일생이 다 가리라. 은행을 상대로: 계속 휴전협정을 연기해가면서. 눈물이 눈을 가려서 나는 푸른 오리온을 나와 버린다. 어둠 속에 바람이 무섭게 불고 있다.
너희는 산타페를 가서 무얼 하려는가. 너희는…… 다만 조금 더 자유를 연장하고 싶고 언젠가 나중에 아주 늙었을 때 벽장 속에 넣어둔 사진을 꺼내보며 아, 나에게도 이런 날이 있었다고 환상의 거울을 삼으려고 하는 거지. 나도 알아. 아름다운 거울 하나를 만들어놓고 그것을 중심으로 너의 자아와 행복한 관계를, 안전협정을 맺으려는 거야. 그래, 우리에겐 그런 거울의 행복한 관계가 필요하다. 아름다운 시간을 갖고 행복한 추억을 만들고 그것을 자기 삶의 원천으로 삼으려는 거야. 중심 ― 원천 ―근원으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아무도 없어서 밤바람이 더 무섭게 느껴진다. 희미한 상점 불빛 아래로 신문지며 낙엽이며 비닐봉지 따위가 바람에 무섭게 휩쓸려 다니는 것을 본다. 어떤 신문지는 마치 생물인 양 퍼덕거리며 회오리를 타고 하늘로 막 올라가기도 한다. 술 취한 남자가 저 모퉁이로 돌아가려다가 너무 센 바람에 비틀거리더니 벽에 딱 하고 이마를 묻고 두 손으로,벽을 의지한다. 바람벽이 때로는 중심을 잡아주기도 하는구나. 다시 한 번 바람이 회오리를 그려 비닐 봉지며 신문지며 가랑잎들이 공중곡예를 하는 듯 붕붕 뜬다. 나는 아침 신문의 남자 무용수의 나는 모습을 회상하고 그것이 아름다웠던 것은 중력과 싸우는 힘을 스스로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는 것을 안다. 중력.
추운 바람이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하게 불어와 나를 쓰러뜨리려고 한다. 나는 반사적으로 가로등 옆의 가로수 몸을 붙든다. 따뜻하다. 뿌리 있는 것은 결코 완전히 흔들리지는 않는다. 어두운 밤하늘의 색채가 정선아리랑을 부르는 것 같다. 나의 발끝에서부터 실뿌리가 돋아나는 것 같고 마구마구 하늘의 색채를 먹어 나무의 몸통처럼 나의 몸이 우뚝 서는 것 같다. 아아, 집으로 가야지, 부디……
『동아일보』 (1994. 1. 1); 『산타페로 가는 사림ι(장비 1997)
김승희(金勝熙)
1952년 전납 광주에서 태어나 서강대 영문과 및 동 대학원 국문과를 졸업했다.
197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에 시로 등단하여 시인으로 활발한 작품 활동을 해왔으며, 1994년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산타페로 가는 사람」 이 당선되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해 소설집 『산타페로 가는 사람』 과 장편소설 『왼쪽 날개가 약간 무거운 새』를 펴냈다.
시집으로 『태양 미사』 『왼손을 위한 협주곡』 『미완성을 위한 연가』 『달갈 속의 생(生)』 『어떻게 밖으로 나갈까』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싸움』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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