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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la Scriptura Tota Scriptura
사도행전 1장 6-8절
내 증인이 되리라
오늘 본문의 해석은 많은 부분 칼빈의 주석을 근거로 하고 있음을 먼저 말씀드립니다. 보통 사도행전 1장 8절은 마태복음 28장 마지막 부분에 있는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는 명령과 함께 전도 혹은 선교에 대하여 강조 할 때 종종 설교되거나 인용되는 본문으로 있습니다. 물론 전도와 선교가 중요하고 그 일에 대하여 교회가 소홀히 할 수 없는 것은 사실이나 오늘 본문이 그것만을 말하기 위해서 기록되어 있는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우선 제자들이 하고 있는 질문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데, 6절을 보시면 저들이 이렇게 묻습니다. “그들이 모였을 때에 예수께 여쭈어 이르되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하니” 지금 사도행전을 기록한 누가는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에 이 질문이 나왔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이 질문은 단순히 한 두 사람에게서 나온 것이 아니라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의 관심사였다고 알려주고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제자들의 질문의 핵심이 뭐냐 하면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대한 것입니다. 사도행전 1장 3절에 의하면 예수님께서 부활하시고 난 뒤 40일 동인 저들에게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지만, 저들의 질문은 하나님 나라가 아니라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에 있다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여전히 지상의 나라에 대해서 회복되는 것만 꿈꾸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지상의 나라란 그 대표적인 성격에 있어 힘과 부, 외부적인 평화, 그리고 그와 유사한 축복된 사항에 의존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이스라엘이라는 나라가 강해지고, 부요해지며, 외적으로 볼 때도 평화롭게 되는 것 등 그런 기대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옛날 다윗 왕이 다스렸을 때의 힘이 회복되길 원했고, 솔로몬 시대의 부와 평안이 회복되길 원했던 것입니다. 특별히 그들이 살고 있던 시대의 현실은 로마의 속국으로 있었던 시기였기 때문에 더더욱 그런 소망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과거 예언자들의 말씀을 통해 다윗 왕국이 회복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으며, 이렇게 회복되는 역사 가운데는 메시야가 오셔서 그 일을 이루실 것이라는 것도 잘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오신 것입니다. 오셔서 가르치시고 여러 가지 기적을 베푸실 때 그것을 본 사도들은 주님이야 말로 메시야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예수님은 단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까지 했습니다. 심지어 죽으시고 난 뒤 부활하신 것을 보게 되었기 때문에 더더욱 확신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부활 이후 주님께서는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가르치셨으며(행1:3),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행1:4) 즉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까지 기다리라는 말씀을 하셨지만(행1:5), 승천을 앞두고 모이게 되었을 때 그들의 질문이 무엇이었느냐 하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여러분, 제자들의 경우 삼 년이나 하나님 나라에 대해 배웠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을 때 40일 동안 집중적으로 하나님 나라에 대하여 가르침 받았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가르친 하나님 나라는 저들이 생각하고 있는 지상의 나라와는 분명 상관이 없는 나라입니다.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18:36) 그러나 주님께서 알리시고자 하시는 바와는 달리 제자들은 그들이 가지고 있던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주님의 가르침을 해석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이 오늘 본문의 질문을 통해 나타나게 된 것입니다.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
나아가 그들은 이 질문을 통해 여전히 ‘이스라엘’이라는 나라를 벗어나지 못한 채 제한된 나라만을 보고 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미 구약의 여러 말씀을 통하여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방인까지 구원의 대상으로 말씀하신 바가 있었지만, 거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겁니다. 회복할 시기에 대해서도 ‘이 때’라고 말함으로 지금 당장 그 일이 일어날 줄 기대하고 있습니다. 주께서 말씀하신 것은 무엇입니까?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는 것이었습니다. 성령으로 세례를 받기까지 기다렸다가 이후 해야 할 일이 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저들은 지금 당장 그들이 생각하고 있는 나라가 회복될 줄로 기대하고 있으며, 그것은 곧 그들에게 주신 사명을 생각하지도 못한 채 결과만을 주목하는 모습으로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달리 표현하자면 그들 스스로는 싸우지도 않은 채 승리를 맛보고 기뻐하려는 열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칼빈은 이런 제자들의 질문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이 질문 안에는 말의 수효만큼이나 많은 과오가 들어 있다.” 즉 그들의 질문은 단어 하나하나마다 다 잘못된 것이었다는 겁니다. ‘회복하다’는 말을 쓰고 있지만 그들의 회복은 영적 회복이 아닌 정치적이고 영토를 지닌 나라를 기대하고 있었던 것이고, ‘이스라엘’이라는 말 역시 하나의 민족적 나라를 기대하고 있음을 나타내며, ‘이 때’라는 부사구도 그들의 나라가 즉각적으로 설립될 것을 기대하고 있음으로 주님께서 말씀하시고 행하신 참된 의도와는 전혀 거리가 먼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도들의 질문에 대해 예수님께서 하신 답변이 이것입니다.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7-8)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하신 답변은 어떤 면에서 아직도 깨닫지 못하는 저들에게 책망조로서 말씀하신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 말해 제자들의 잘못된 사고방식과 인식을 바로 잡아 주시기 위해서 이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맨 먼저 주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시면서 교정하시는 내용은 이것입니다. 7절을 다시 보시면 “이르시되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으니 너희가 알 바 아니요” 조금 쉽게 표현하자면 “너희는 하나님께서 숨겨두시기로 원하시는 것을 알려고 하는 헛된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때와 기한은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었으니 너희의 알바가 아니다. 주제넘게 하나님께서 숨겨두신 일을 알려고 하지 말라.”고 말씀하신 것과 같습니다.
여러분, 인간이 가지는 호기심 가운데는 어떤 일에 대한 결과를 속히 알았으면 하는 바람이 있습니다. 학생들의 경우를 예로 든다면 그가 지금 열심히 공부를 하고 있다고 할 때 “과연 시험을 치면 결과가 어떻게 나올 것인가? 그리고 그 시험 성적으로 나는 어떤 대학에 들어 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수 있습니다. 좀 더 멀게 본다면 “앞으로 나는 어떤 일을 하게 되며, 어떤 사람을 만나게 될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때로는 이런 생각이 우리로 하여금 답답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제자들을 책망하시는 것, 그러면서 교정하려고 하시는 것이 무엇인가 하면 이와 같은 헛된 호기심을 가지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 권한에 두셨기 때문입니다.
우리 신앙과는 상관없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호기심 때문에 점을 치는지 모릅니다. 특히 수능을 칠 때나 어떤 중요한 일이 있을 때면 잘 될 것인가, 아니면 안 될 것인가를 묻기 위해 찾곤 합니다. 잘 안 될 것 같으면 무슨 부적과 같은 것을 만들어서 붙이거나 몸에 지니고 다니면서 우리 앞에 있는 미래에 대하여 뭔가 좋은 방향으로만 만들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분명 이런 부분에 있어 주의하라, 아니 그 이상의 말씀을 한다는 것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이 부분과 관련해서는 신명기 13장에 있는 말씀으로 교훈을 받을 수 있는데, 1절 이하에 보시면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선지자나 꿈 꾸는 자가 일어나서 이적과 기사를 네게 보이고 그가 네게 말한 그 이적과 기사가 이루어지고 너희가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우리가 따라 섬기자고 말할지라도 너는 그 선지자나 꿈 꾸는 자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 이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가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사랑하는 여부를 알려 하사 너희를 시험하심이니라 너희는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따르며 그를 경외하며 그의 명령을 지키며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를 의지하며 그런 선지자나 꿈 꾸는 자는 죽이라 이는 그가 너희에게 너희를 애굽 땅에서 인도하여 내시며 종 되었던 집에서 속량하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를 배반하게 하려 하며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행하라 명령하신 도에서 너를 꾀어내려고 말하였음이라 너는 이같이 하여 너희 중에서 악을 제할지니라”(신13:1-5) 우리는 어떻게 생각합니까? 점을 쳤는데 그 점이 맞으면, 그것도 계속해서 맞으면 은근히 믿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혹 저들의 말이 맞을지라도 그들의 말을 청종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을 통해 시험하신다고 말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하나님만을 사랑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이 아닌 미신적인 것을 사랑하는지 시험하신다는 겁니다. 특히 이 말씀을 통하여 알리시는 바를 주목해야 하는데, 하나님의 백성들은 하나님만을 따르며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고 그 목소리를 청중하며 그를 섬기고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오늘날 점을 친다는 것은 무엇과 같은가? 하나님을 따르는 일에 있어 그 길을 벗어나는 것과 같습니다. 그분의 목소리를 청종하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을 믿고 섬긴다면 점을 본다든가 하는 미신적인 행위는 우리 안에 들어올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미래가 궁금하다고 해서 그런 미신적인 것을 찾는다는 것은 결코 그리스도인으로서 행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맞다, 맞지 않다는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명하시고 금하시는 바가 있다면 거기에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신자들의 본분임을 잊지 마셔야 합니다.
헛된 호기심과 관련해 신앙의 현장에서도 몇 가지 예를 찾아볼 수 있는데, 좀 특수한 사례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종말의 날, 심판의 때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고 하나님만 하신다고 말씀하시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태복음 24장 36절입니다.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그런데도 우리는 종말의 날, 심판의 때를 알고자 하는 호기심이 있고, 또 실제로 그 날과 그 때를 말하는 자들이 나타났을 때 미혹되어 속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 예수님께서 재림하신다고 하니까 다 흰 옷 입고 재림 준비를 하여 혼란스럽게 하는 일이 있더란 것입니다. 이런 부분은 오늘 말씀으로도 주의를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좀 다른 형태이지만 하나님의 작정에 대한 오해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알리신 바가 무엇이냐 하면 하나님의 작정 없이 이루어지는 일은 이 땅에서 하나도 없다는 것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인생은 하나님 안에서 이미 다 결정되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단지 택자와 유기자로서만 결정하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모든 것을 다 결정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생각합니다. 우리의 모든 미래가 다 그분의 뜻 안에 결정되었다면 내가 노력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좀 더 직접적으로 말하자면 혹 하나님의 뜻 가운데 내가 S대를 갈 것으로 작정되었다면 노골적으로 이야기해서 반드시 가게 되어 있습니다. S기업에 취직할 것으로 작정하셨다면 반드시 취직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면 다 어느 방향으로 그 생각이 흘러 가냐 하면 “그렇게 작정되었다면 굳이 열심을 다하고 최선을 다할 필요가 무엇이 있겠는가?” 이렇게 흘러가더란 겁니다. 그러나 성경이 우리에게 말씀하고 있는 사실은 비록 작정에 대한 교리를 우리에게 알려주시고, 또 알려주시기 때문에 가르침 받아야 하지만 작정 하신 바 결정된 미래에 대해 알려주시는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달리 말하면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배워야 하지만 그것을 배움으로 내 미래에 대한 호기심을 가지는 것은 지금 여기서 말하는 것처럼 헛된 호기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작정에 관한 말이 나왔으니까 하는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우리의 모든 것을 작정하셨다는 것은 단지 결과만이 아니라 과정도 작정하셨다는 것을 놓쳐서는 안 됩니다. 택자와 유기자를 그분의 뜻 안에 작정하시고 예정하신 일이 있다면 택자를 구원하실 구원의 서정도 예정된 것이고, 유기자로서 가야 할 그 서정도 다 예정된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 안에서 S대, S기업으로 갈 것이 작정되어 있다면 정당한 과정도 있다는 걸 놓쳐선 안 될 것입니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작정의 교리가 단지 이런 식의 것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란 것도 반드시 알아두셔야 합니다. 오히려 우리 구원에 대한 감사, 그리고 이 땅을 살아가면서도 불변하신 작정으로 말미암아 위로를 얻도록 하기 위해서 말씀하신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분명한 것은 때와 시기는 아버지께서 자기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우리의 알바가 아니란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이 책망 받고 있는 것도 다르지 않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들은 사도로 부르심을 받았고, 또한 그렇게 부르심을 받았을 때 해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물론 그 일이란 정치적 해방을 위해 싸우는 그런 일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일을 위해 부르심을 받았고, 그 일을 위하여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것, 즉 성령을 기다려야 했습니다. 그러나 저들은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것에는 관심이 없었는지 오로지 이스라엘 나라의 회복만을 말할 뿐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은 “이스라엘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 ‘이 때’입니까?”라는 질문을 함으로 아무런 싸움도 없이, 그저 승리만을 맛보려고 하는, 쉽게 말하면 사도로서 부르심을 받았을 때 그 일을 행하기도 전에 어떤 대가를 바라는 것과 같은 그런 생각이 저들에게 있었다고도 할 수 있습니다.
칼빈은 이렇게 말합니다. “우리는 언제 시기가 올 것인가 하는 따위의 비밀한 과정에는 모르는 채로 있어야 한다. (왜냐하면) 이 분야에서의 과분한 관심과 호기심처럼 우리의 의무를 수행하는 일에 게으르게 해 주는 것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장차 올 결과가 무엇이냐 하는 것에 비추어서 우리의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주께서는 장래의 결과를 어둠 속에 두시며 그 대신에 우리가 해야 할 의무를 우리에게 명령하신다.”
앞서도 종말론자들에 대하여 언급한 바가 있지만 그들의 모습이 정확하게 이런 모습입니다. 몇 년 몇 월 몇 일 주께서 재림하신다고 하니까 흰 옷 입고 주님을 맞이할 준비를 하는 것은 헛된 호기심 때문에 그들에게 주어진 의무를 게을리 하는 것과 같습니다. 이런 부분은 매우 주의하셔야 합니다.
여러분, 때와 시기는 하나님 자신의 권한에 두셨기 때문에 그것이 우리에게 알려지는 법은 없습니다. 종말의 때가 그러하고, 또 작정되었다 할지라도 작정된 바에 대해 말씀하시지 않는다는 차원에서도 그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에게 일어날 일에 대한 호기심보다 지금 우리에게 부과된 의무에만 충실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지금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계신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여러분, 참된 신앙이란 것은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기를 원하시는 것은 하나도 빠짐없이 배우도록 하는 것입니다. 더불어 우리에게 알리시지 않고 숨겨두시기를 원하시는 일에 대해서는 기꺼이 알려고 하지 않는 채 그대로 두는 것입니다. 달리 말하면 “오직 성경과 호기심의 거절”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만큼 배우려고 열망해야 하며, 반대로 주께서 숨겨두시는 것에 대해 알아내려고 헛된 호기심을 가지지 말아야 합니다.
신명기 29장 29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감추어진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원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 이는 우리에게 이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니라” 여러분, 하나님께 속한 모든 일을 우리가 다 알 수는 없습니다. 감춰진 일이 분명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나타난 일은 알아야 합니다.
물론 작정의 교리처럼 감춰진 것처럼 보이지만 성경을 통해 알리신 바가 되었다면, 알리셨기 때문에 배워야 합니다. 비록 작정의 교리가 어렵고 우리 이해 차원을 넘어 서는 듯 한 것이 사실이지만, 주께서 가르치기 위해서 드러내신 바가 되었기 때문에 배우고 알아야 할 당위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헛된 호기심을 가지기 위해 알려주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대로 따르며 행하도록 하는 방향에 있다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더불어 나타난 일과 관련하여 율법의 모든 말씀을 행하게 하심이라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그러니까 말씀과 부합하여 살도록 하는 것이 성경이 우리로 하여금 이끌고자 하는 방향이지, 말씀과 상관없이 나아가는 것은 결코 옳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작정을 말한다고 해서 아무렇게나 살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전히 그 작정 하신 바 최종적인 결과에 대해서는 아무도 모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모르기 때문에 우리가 말씀 앞에 서 있다면 성경이 요구하는 정직, 성실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이고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의 열매를 맺기 위해 말씀 안에서만 머물며 그 말씀대로 부단히 노력하는 일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때와 시기에 대한 이런 헛된 호기심을 거절할 것에 대하여 말씀하신 후 이어 약속과 명령의 말씀을 주십니다. 때와 시기에 대해서는 너희 알바 아니요, 너희는 내가 약속한 말씀 그리고 그 명령만을 준행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8절 말씀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그러나 앞에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지금 이러한 약속과 명령은 제자들의 잘못된 질문에 연유하여 그들을 책망하시고 교정하시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 그들은 “주님! ‘이스라엘’이란 나라가 회복되는 것이 이 때입니까?”라는 질문을 함으로 육체적으로 볼 때 아브라함의 자손만이 이스라엘 백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것에 대한 책망과 교정의 말씀인 것입니다.
여러분, 유대인이 가지고 있는 생각 중에 선민사상이라는 게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다른 모든 여러 나라 가운데 자기 민족만을 택해 주셨다는 사상입니다. 문제는 그들이 왜 선택받은 민족이 되었는지 전혀 모르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출애굽기 19장 5절과 6절을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선택받은 것에 이유와 관련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시는 내용이 있습니다. “세계가 다 내게 속하였나니 너희가 내 말을 잘 듣고 내 언약을 지키면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서 내 소유가 되겠고 너희가 내게 대하여 제사장 나라가 되며 거룩한 백성이 되리라 너는 이 말을 이스라엘 자손에게 전할지니라” 즉 그들은 거룩한 백성이 될 목적으로 그리고 제사장 나라가 될 목적으로 부름 받은 것입니다. 다른 민족과는 구별된 민족으로 부름을 받았고, 그렇게 부름 받았기 때문에 오직 주의 율법을 통해 교훈을 받아야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제사장 나라로서도 부름을 받았습니다. 제사장이 하나님과 이스라엘 민족 사이에 있다면 제사장 나라란 하나님과 이방인 사이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역사를 보자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몰랐던 것처럼 나타나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제자들의 경우도 말씀 자체 되시는 예수님께 3년 동안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부활 후 40일 동안 다시금 가르침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깨닫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요한복음 4장 9절에 보시면 사마리아 여인이 이렇게 말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이르되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하지 아니함이러라” 여러분, 상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단순히 모르고 지난다, 친하지 않다는 말이 아니라 아예 취급을 하지 않는 것을 말합니다. 다시 말해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에 대해 취급 대상자로도 여기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지금 제자들이 가지고 있는 생각이 바로 이와 같습니다. 오직 아브라함의 자손, 이스라엘 밖에 모르는 것입니다. 그런 그들에게 주님은 사마리아도, 그리고 그것보다 더 멀리 있는 자들도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이라고 말씀하고 계신 것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 지금 제자들의 질문이 육적 이스라엘의 회복에 관한 것이라면 주님의 답변은 영적 이스라엘에 관한 것으로 답변하신 것입니다. 제자들의 관심은 예루살렘과 온 유대에만 있지만 주님의 관심은 나아가 사마리아와 땅 끝에 있는 택자 모두인 겁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제자들의 생각을 책망하시며 교정하시는 의미에서 오늘 본문 8절의 말씀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결국 우리는 오늘 본문에서 제자들의 질문을 통해 드러난 제자들의 생각과 예수님의 답변을 통해 드러난 성경의 사고가 얼마나 다른지를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다시 말해 인간은 끊임없이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생각하는 존재이지, 그 생각이 쉽게 바뀌는 그런 존재가 아니란 것입니다. 그것도 예수님 살아생전에 가르침 받고, 죽음 이후 부활하시고 난 뒤에도 가르침 받았지만 그렇게 변하지 않는 존재가 인간이라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한 가지 더 확인해야 되는 것은 제자들의 잘못된 질문에 대하여 책망과 교정의 답변을 하시면서 결국 주님께서 그들에게 하시고자 하시는 말씀은 ‘내 증인이 되리라’는 말씀으로 집중한다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재미난 것은 ‘내 증인이 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게 아니라 ‘내 증인이 되리라’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이라는 말씀이 근거가 될 때 ‘내 증인이 되리라’고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보통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사도들이 주인공인 것처럼 생각하고, 이미 ‘사도행전’이라는 말 속에서 사도들이 주체인 것처럼 착각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실제 주체는 사도가 아니라 지금 본문에서 말씀하고 있는 것처럼 성령이 임할 때 내 증인이 되리라, 즉 증인이 되는 것은 성령이 임하셔야만 하시기 때문에 주체는 바로 성령 하나님이신 겁니다. 그럼 성령은 성부와 성자와 따로 떨어져 홀로 역사하시는 분이신가? 그렇지 않으며, 그럴 수도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한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성령 하나님은 성부와 성자와 분리할 수 없으며, 분리되지 않은 채 역사하시기 때문에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체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사도들의 실력과 능력은 그들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는다’는 말 자체도 본래 그들 스스로가 어떤 권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권능’조차도 받게 되는 선물의 성격으로 말씀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하셔야 합니다.
이렇게 볼 때 본문이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내용은 단순히 전도하라, 선교하라는 의미만 가지는 게 아닙니다. 전도와 선교에 앞서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까지도 제자들은 잘못된 사고에 젖어 있었다는 것, 그러한 사고는 어떤 의미에서 인간 스스로가 바꿀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인간 외부에서 간섭하시는 역사가 있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에도 가시면 주님께서 승천하시기 전에 제자들에게 사명을 주시는 부분으로 마태복음을 맺고 있는데, 의외의 지적을 만나게 됩니다. 16절부터 보시면 “열한 제자가 갈릴리에 가서 예수께서 지시하신 산에 이르러 예수를 뵈옵고 경배하나 아직도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더라 예수께서 나아와 말씀하여 이르시되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6-20) 주님께서 사도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시는 그 자리에서도 의심하는 자가 있었다는 겁니다.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배우면서도 그 이후에 만났을 때 의심하는 일이 있더란 것입니다. 특히 ‘아직도’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는데, 의심하지 않도록 하는 증거들이 충분했지만 여전히 의심하고 있는 것에 대한 책망의 의미가 들어 있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여러분, 인간이란 바로 이런 존재입니다. 그 귀한 가르침을 받고, 기적을 맛볼 뿐만 아니라 기적을 몸소 행하기도 하였지만, 심지어 죽음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옵고 승천하시려고 하는 그 자리에 있지만, 그런 자리에서도 인간이란 그 스스로 의심을 몰아낼 수 없는 존재로 서 있더란 것입니다.
종종 인용하여 말씀드리는 본문이지만, 다시금 확인한다는 의미에서 누가복음 16장도 보겠습니다. 여기 보시면 우리가 잘 아는 한 부자와 거지 나사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죽음 이후에 부자는 지옥으로, 나사로는 천국에 갑니다. 그런데 지옥에 간 부자가 하는 말이 있습니다. 누가복음 16장 27절부터 보시면 “이르되 그러면 아버지여 구하노니 나사로를 내 아버지의 집에 보내소서 내 형제 다섯이 있으니 그들에게 증언하게 하여 그들로 이 고통 받는 곳에 오지 않게 하소서 아브라함이 이르되 그들에게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이르되 그렇지 아니하니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이르되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눅16:27-31) 우리가 생각하는 건 뭡니까? 죽은 자가 살아 돌아오는 기적을 경험하면 그것보다 큰 기적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런 경험을 한 사람, 그것도 그 사람을 알고 있다면 그의 말은 믿을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뭔가 변화가 쉽게 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인간이란 존재는 그렇게 쉽게 납득되는 존재가 아닙니다. 외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역사가 있는데도 결코 외적인 것으로 변화될 수 없는 것, 이것이 인간이란 존재입니다.
여러분, 증인이 되는 일은 어떤 의미에서 내가 스스로 되고자 해서 되어지는 일은 결코 아닙니다. 우리의 자리는 항상 마태복음 28장에 나타난 의심하는 자리에 있을 수밖에 없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 식으로 말하면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라고 질문한 제자들의 모습과도 다를 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지도 못하며, 영적이기 보다는 세상적이요, 육적인 그런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이런 우리를 부르셔서 증인이 되도록 하신다는 사실입니다. 나 스스로는 연약하여 할 수 없는 일을 주님께서 권능을 주심으로 감당케 하시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를 증인으로 세우신다는 것은 단순히 전도하고, 선교하라는 의미만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이 하나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다면 그것을 부인하는 자리로 가야 하는 것까지를 말씀하고 있는 내용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우리는 본래 제자들처럼 영적이기보다는 세상적이요, 하나님의 뜻을 알기보다는 내 뜻을 하나님의 뜻을 아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칼빈은 ‘내 증인이 되리라’는 구절을 주석하면서 실천적인 면으로 이렇게 말합니다. “많은 사람들은 자기들이 하늘에 올리어질 때에 그들이 받을 미래의 축복이 어떤 것인가를 알고 싶어 하지만, 그들이 거기에 이르기 위하여 가야 할 길은 유의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먼저 세상을 단념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되기 위하여 그의 죽음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증인’이라는 말 자체도 그런 의미를 포함합니다. 일반적으로 신약에서 ‘증인’이라는 말은 ‘μαρτυς’[마르투스]라는 말을 사용하는데, 이것은 사도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을 증거 하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 증인이라는 말에서 순교자라는 의미의 ‘martyr’[마터]라는 단어가 나오게 되었는데, 이런 의미에서 증인은 곧 순교자와도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합니다(행22:20). 때문에 증인이라는 말은 순교요, 그런 의미에서 증인의 삶이란 자기 소견대로 사는 삶, 본래 세상의 원리대로 사는 삶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죽으시고 부활하시 주님의 뜻을 따라 사는 삶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증인이 된다는 것은 자기 부인이요, 십자가를 지는 것이요, 순교입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결코 성경을 통해 드러내신 하나님의 뜻과 부합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여 사는 삶 이어야 하는 것이며, 그것은 단순히 말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 우리의 전 삶이 세상의 방식이 아닌 하나님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세상적으로 살려고 하는 우리의 방식을 부인해야 하는 자들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 죽으신 것처럼 우리도 세상에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혀 죽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에 대해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셨던 겁니다.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마16:24) 그러나 우리는 어떻습니까? 대부분 말씀을 받는 것처럼 있지만 실제로는 제자들과 다를 바 없을 때가 많습니다. 특별히 주일은 하나님의 것을 배우기 위해 우리가 6일 동안 우리 자신을 위해 하는 모든 일을 멈추어야 하는데, 그 일을 못하고 있는 것이 한국교회의 현실이라며 현실일 것입니다. 내 인생을 책임지는 것은 하나님이 아니라, 철저히 나 자신이 되고 있는 것을 드러내는 예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주일이지만 나를 위하여 할 것을 다 하고 있는 모습으로 있습니다. 시험도 치고, 운동도 하고...
여러분, 우리가 말씀을 통해 배우지만 제자들처럼 바뀌지 않는 것은 여전히 우리의 것을 버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참된 제자, 참된 증인의 삶은 먼저 자기 자신을 부인하는 자리로 가야만 합니다. 이것을 놓치지 마시길 바랍니다. 증인, 단순히 전도하라, 선교하라가 아닙니다. 그것도 중요하지만, 단지 전도와 선교라는 이름만 있어선 안 되고 거기에 내 것을 배제하고 하나님의 것으로 행하는 일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단지 전도와 선교를 위한 사람들에게만 주신 것이 아니라 모든 성도들이 듣고 배워야 할 말씀으로 있습니다. 즉 우리 역시 주님의 것만을 내 놓은 증인의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을 교훈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는 결코 이길 수 없는 싸움의 자리요,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하나님께서 능력을 베풀지 않으면 감히 이길 수 없는 싸움의 자리라는 것을 놓치지 마셔야 합니다. 때문에 신앙의 싸움은 얼마나 하나님의 의지하느냐의 싸움인 것입니다. 이미 우리 속에 계신 성령께서 주인으로 계시지 않으면, 그리고 은혜의 방편으로 주신 말씀에 대해 순종할 수 있는 힘을 내적으로 주시지 않으면 순종이라는 말은 어쩌면 우리의 삶과는 멀고 먼 것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마십시오. 그리고 이미 우리 안에 계시 성령님을, 그리고 성령과 분리할 수 없는 삼위 하나님을 더욱 의지하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때 비로소 우리는 참된 증인의 삶, 말씀에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