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극락세계 여행기」를 처음 펴낸
싱가포르 남해보타산
파밍(法明, 싱가포르 南海普陀山 住持)
“「극락세계 여행기」 책을 아십니까?”
“안다.”
“1987년 첫 법문 준비를 스님이 직접 준비하셨습니까?”
“그렇다.”
“그 때 사진을 가지고 있습니까?”
“없다.”
“혹시 그 때나 그 뒤 나온 「극락세계 유기」 같은 책을 가지고 잇는지요?”
“없다.”
내가 그 동안 모은 싱가포르 제자들의 이름과 전화번호를 보여주며 물었다.
“혹시 아는 분이 계신지요?”
“없다.”
“미국의 왕쩐 박사를 아시는지요?”
“모른다.”
“이 책 뒤에 보면 인쇄소 이름이 나오는데 맞습니까?”
“안다.”
“연락처를 아십니까?”
“모른다.”
“류스화 거사를 아시는지요?”
“안다.”
“「극락세계 유기」를 류스화 거사가 썼씁니까?”
“그렇다.”
“류스화 거사는 중국계입니까?”
“그렇다”
“류스화 거사는 중국 어디 출신입니까?”
“모른다.”
“혹시 류스화 거사를 아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무도 모른다.”
<꼬리말> 람하이포토산(Lam Hai Poh Toh San, 南海普陀山) 방문
보정(普淨)
「극락세계 여행기」를 처음 읽으면서부터 관징 스님이 극락 다녀온 이야기를 법문하신 싱가포르 남해보타산을 꼭 가보고 싶었다. 그곳에서 강의한 내용으로 처음 책을 낸 곳이고, 책 중간에 정토선 염불을 하고 싶은 사람은 싱가포르 남해보타산에 연락하면 관징 스님이 직접 녹음한 CD를 구할 수 있다는 안내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생각은 나 혼자만의 것이 아니었다. 인터넷에 몇 사람이 싱가포르를 찾아갔지만 관정 스님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아 아쉽다는 사람이 있기도 하고, 막상 찾아가 보니 아무 것도 없었다며 관징 스님을 비판하는 자료로 활용하기도 하였다.
2013년 4월 1일 싱가포르를 방문하여 택시를 타고 남해보타산 주소를 주고 가자고 했더니 넉넉하게 생긴 여자기사가 지도를 찾아 문 앞에까지 데려다 준다. 안으로 들어가 보니 제법 넓었다. 인기척이 없어 법당에 들어가 붇다께 절을 올리고 보니, 이곳이 바로 1987년 관징 스님이 법문을 했던 곳이다. 사진을 몇 장 찍고, 다시 안으로 들어가니 큰 대청이 나온다. 사무실, 식당, 거실 같은 것이 있는 곳이다. 사무를 보던 분이 우리를 맞이했다. 이미 미국에서 전화를 했었고, 며칠 전 탁교수를 통해서 전화를 했기 때문에 내가 온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사무 보는 보살은 “2년 전에 왔기 때문에 자기는 아무 것도 모른다.“고 한다. 그러면서도 내가 싱가포르에서 출판된 「극락세계유기」를 보여 주었더니 ”아주 옛날 것“이라고 한다. 아마 그 뒤로도 새로운 것이 많이 나온 모양이다. 안에서 다른 보살이 나오는데, 그 보살도 ”너무 오래 된 일이라 알 수 없다“고 한다. 몇 가지 물어 보았으나 ”모른다.“로 일관한다. 그러면서 지금 스님이 밖에 외출 중이니 스님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문제는 그 스님이 4년 전부터 기억력을 거의 상실해서 알 수가 있는 일이 없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법당 앞에 있는 의자에서 기다리라고 한다.
기다리는 동안 주변을 자세하게 둘러보았더니 대강 현재 이 절의 상황을 알 수 있었다. 전에 미국에 갔을 때 왕쩐 박사가 한 말이 기억난다.
”관징 스님 입적하기 전에는 싱가포르에 제자들이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징쿵(淨空) 법사를 만나 타이완 포광사로 모두 옮겨 갔다.“
법보시 하는 곳을 가보니 그 말이 실감난다. 거의 100가지에 가까운 DVD 법보시를 하는데, 모두가 정공법사가 운영하는 곳에서 나온 것이다. 정공법사 쪽에서 관징 법사를 가장 비판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해 보면 이곳에서 왜 그렇게 관징 스님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지 않는지 쉽게 이해 할 수 있었다.
밖에서 기다리는데 사무 보는 보살이 나와서 냉장고에서 시원한 물을 두 병 꺼내서 준다. 그리고 다른 보살이 나와서 말을 건다. 이 보살은 영어를 잘 못해 얄팍한 중국어로만 해야 했는데 아까 관징 스님 이야기 할 때보다는 아주 친절하게 얘기를 한다. ”언제 떠나느냐?“ ”중국에서 온 스님과 아들이 차를 가지고 나를 데리러 온다.“며, 묻는 것으로 봐서는 이 보살도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에서처럼 그렇게 쌀쌀하지도 않다.
조금 뒤에 차가 도착했는데, 아들만 영어를 하고 중국에서 왔다는 스님은 영어를 못한다. 아들 말을 들으면, 자기 어머니가 이 절을 전체적으로 운영하는 회주보살이라고 한다. 여기도 미국처럼 개인 사찰을 짓고 스님을 모셔다 운영하는 것이다. 지금 스님이 이미 나이가 들어 기억력이 좋지 않아 중국에서 새 스님을 모셔왔다고 한다. 아들의 통역을 통해서 몇 가지 이야기를 했지만, 중국 스님은 아무 것도 모르고, 보살은 새로운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이 절을 언제부터 맡아서 했느냐“
그렇게 되면 관징 스님과의 인연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답이 없었다.
세 분이 떠나고 우리는 계속 기다렸다. 12시가 훨씬 넘어서야 스님이 돌아오셨다. 스님이 아래만 승복을 입고 위에는 런링셔츠를 입은 채로 차에서 내리자 한 보살이 부축해서 방으로 모신다. 우리는 안으로 들어가 기다리니 스님이 나와서 낮밥을 먹는다. 간단한 국수를 먹는데, 우리는 스님이 국수를 먹는 동안 이야기를 하였다.
거동은 불편해 보였지만 기억력이 완전히 없어진 상태는 아닌 것이 확실했다. 그러나 모든 것을 ”NO“라고 대답하니 더 물어볼 것이 없었다. 아니 물어도 아무런 새로운 것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고맙다는 인사를 마치고 인터뷰를 마쳤다.
차가 다니는 곳과 거리가 멀어서 우리는 택시를 불러 달라고 부탁했다. 차를 기다리기 위해 나오니 스님이 대문 앞 시원한 의자에 앉아 있다. 여전히 런링셔츠만 입고 맨발이다. 편안하고 깨끗한 인상이다. 기다리는 동안 스님은 언제 한국으로 가느냐는 등 제법 살갑게 대화를 한다. 스님을 시봉하면서 스님에게 신경질적으로 이야기하는 보살도 마음이 아니라 본디 판이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차가 곧 올 것이라며 우리에게 잘 대해 주고 떠날 때 끝까지 밖에까지 나와 차를 돌리게 해서 잘 배웅해 주었다.
비록 다른 곳에서처럼 지료를 얻을 수 없었지만 현황을 정확하게 파악할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방문이었고, 법당을 비롯한 사진 자료를 확보한 것도 중요한 일이었다.
혹시라도 관징 스님이 처음 발표한 싱가포르 절을 가고 싶은 독자들이 있을까 해서 꼬리말을 달았다. 이제 정토선이나 정토선 염불에 대한 자료를 얻기 위해 싱가포르에 가도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서다. 중국 현지에 가도 마찬가지다. 대만에 한 곳이 있으나 이제는 관징 스님의 정토선을 수행하고 펴는 곳은 한국뿐이라는 것이 결론이다. 자세한 것은 관징 스님의 일대기인 「극락과 정토선」에 밝혔으니 참고하기 바란다.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나모아미따불
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_()_()_()_
감사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