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으로의 여행 크로아티아, 발칸을 걷다]
Venice
02 달마티아의 공작, 베네치아와 지중해
베네치아는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각 지역에 거점 요새 및 해상 고속도로를 건설함으로써 지중해를 장악, 교역을 독점하여 부를 얻게 되었다. 4차 십자군 전쟁에도 참여하여 부를 획득하였으며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다.
지붕해를 배경으로 발칸에 많은 영향을 주었던 나라는 베네치아이다. 베네치아를 이해하면 발칸 반도의 역사를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며 베네치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지중해에 대하여 잘 아는 것이 중요하다.
지중해라는 말의 어원은 라티어 “메디테라네우스(Mediterraneus)’이다. 이것이 지구의 한가운데를 의미한다. 여러 바다 중에서 지중해 바다는 염분 농도가 가장 높은데 평균 염분 농도는 38퍼센트라고 한다. 그리고 지중해는 바다 대부분이 거의 땅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대서양이 속한 바다로 볼 수 잇다. 북쪽은 서쪽은 유럽과 인접해 있고 남쪽은 아프리카, 동쪽은 레반트와 접하고 있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동 지중해에 접해 있는 거의 모든 나라가 그 성쇠를 지중해와 같이하였다는 것이다. 그러한 나라를 보면 이집트, 튀니지 등 북부 아프리카와 이탈리아, 그리고 발칸 반도 해안 지역인 아드리아해에 면한 나라인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알바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그리스 등과 커키, 키프로스, 시리아, 요르단, 현재 이스라엘과 레바논 지역인 팔레스타인 지역이다. 이들 나라들의 번영이 지중해를 빼놓고는 있을 수 없었던 것은 고대부터 동 지중해가 중요한 교역로로 이용되어 왔다는 사실 때문이다. 고대부터 근대까지 메소포타미아, 카르타고, 그리스, 레반트, 로마, 무어인, 이집트, 페네키아, 베네치아, 투르크 등 여러 민족들이 물자와 다양한 문화를 지중해를 통해 주고받았는데 오리엔트나 고대 로마는중국에서 온 물품을 가져다가 유럽에 팔면서 부를 축적하였다. 말하자면 고대의 주요 교역로는 오리엔트에서 동 지중해에 이르는 길이었고 이러한 교역로를 거쳐 물품이 유럽대륙으로 가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이 교역로를 장악한 국가가 부를 얻게 되고 강성하였던 것이다. 베네치아는 일찍이 지리적인 위치로 인해 각 지역에 거점 요새를 구축하였으며, 해상 도시 국가답게 최초로 해상 고속도로를 건설하였다. 그래서 동 지중해를 장악, 교역을 독점함으로써 부를 얻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11세기 중엽에 동 지중해 지역의 기존 질서가 깨지게 된다. 그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것은 바로 이슬람 세력의 대두이다. 이들의 급속한 성장으로 비잔틴제국 증 동로마제국이 위기에 빠지게 되고 비잔틴은 기독교의 이름 아래 서유럽의 모든 국가들에게 군사 개입을 호소하게 되었다. 즉 신의 이름으로 군대가 결성되는데 그것이 바로 십자군이다. 십자군은 11세기 말부터 13세기 말까지 1차에서 8차까지 대규모 군사원정에 나선다. 서유럽 국가들은 예루살렘을 회복한다는 명분과 함께 군사원정에 대부분 참여하였다. 그들이 참여할 수있었던 것은 정치적, 사회적인 안정과 종교적 열정, 그리고 지도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서유럽은 11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도시와 상공업의 발달에 토대를 둔 경제적 발전을 하게 되었다. 그것의 전형적인 예가 바로 베네치아 상인들이다. 그런데 이들 베네치아 상인은 십자군 전쟁의 목적 달성보다 자신들의 경제적 이득을 우선시한 대표적인 경우다. 1096년에 교황 우르반 2세는 성지회복을 위한 십자군 전쟁을 주장하는데, 이렇게 십자군 전쟁을 주장한 이유는 기독교 순례자들에 대한 박해와 정치, 종교적인 문제 때문이었다. 그래서 유럽 갖지의 군주, 영주, 기사들이 무리를 지어 예루살렘을 정복하기 위해 모이게 되었다. 이때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의 조달을 위해 동서 교역이 급격히 증가하게 되었고 이러한 시대적 분위기에서 베네치아가 십자군 원정을 기회로 자신들의 세력을 확고히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이 당시 전비 확보는 쉬운 것이 아니었다. 그러면 십자군은 어떻게 전비를 확보하게 되었을까?
여러 국가의 지원과 상인세력의 십자군 참여가 바로 그 답이었다. 이렇게 일단 재정 문제가 해결되었다. 하지만 전쟁을 수행하기 위한 비용이 높아질수록 자본은 상인들에게 다시 재분배되는 결과를 낳게 되었다. 그리고 이때부터 교황청에서는 면죄부를 발행하는데 바로 십자군을 후원하기 위해서였던 것이다. 그런데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 당시 종교적으로 금기시하던 이슬람인과의 교역을 하며 이득을 얻고 있었다. 그러다가 십자군 전쟁이 일어나자 십자군 원정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우리가 알고 있듯이 1차에서 8차까지 일어나지만 실질적으로 성공했다고 보는 것은 1차 밖에 없다. 그리고 농민 십자군과 소년 십자군이 있었는데 농민 십자군은 양민을 약탈하였으며 베네치아 상인들은 성지 탈환을 내세워 소년 십자군을 모집, 소년들을 노예로 팔았다. 이것은 기독교 역사에서 인정하기 싫은 사실일 것이다.
베네치아 상인들은 자신들이 보유하고 있는 선반과 자금을 십자군에 지원하였다. 4차 십자군 전쟁 때에 베네치아 상인들은 그들이 제공한 선박과 기타 원정 자금의 대금을 받지 못하게 되었으며, 그것을 이유로 제4차 십자군을 이용해 같은 기독교 지역을 쳤으니 기독교 도시 중 하나였던 자라드(Aadar)를 공격하였던 것이다.
자다르는 달마티아 연안에 있으며 이탈리아어로는 ‘자라’라고 불리는, 당시 베네치아가 차지하고 있던 무역항이었다. 하지만 이곳은 헝가리에 의해 점령당한 상태였다. 자다르는 방어가 잘되어 있기 때문에 그곳을 함락하려는 베네치아의 노력은 매번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러자 베네치아는 제4차 십자군에게 자다르를 탈환하는 것을 도와준다면 대금 지불을 무기한 연기해 주기로 제안하였고, 십자군은 이에 동의를 하고 자다르를 공격, 함락시켰다. 하지만 여기서 이들에게 가장 문제가 된 것은 바로 십자군이 공격한 자다르가 기독교 도시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로마 교황청에서 알게 되었고 교황은 십자군과 베네치아 상인들을 파문한다. 회개하고 후회하는 십자군들에게 사면을 해주었으나 베네치아 상인들은 자다르의 점령이 정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교황은 베네치아 상인들에게는 공식적인 파문을 내렸다. 자다르를 점령하였으나 십자군은 여전히 대금을 갚을 능력이 되지 않았고, 십자군이 기독교 도시를 공격했다는 것 때문에 십자군 내부에서도 분열이 일어났다. 그러면서 십자군은 자다르에서 한 해를 보내게 되었는데, 이때 비잔틴 황제의 아들 알렉시우스가 십자군에게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하였다 자신이 콘스탄티노플에 돌아가 황제의 자리에 오르는 것을 도와주면 군자금과 군사를 제공하겠다는 제안이었다. 십자군 내부에서는 반대 의견이 있었지만 알렉시우스의 제안은 받아들여 졌다. 그리고 제4차 십자군은 결국 콘스탄티노플로 향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십자군이 알렉시우스가 왔다고 알리면서 평화적으로 해결하기를 원하였지만 비잔틴은 십자군을 먼저 공격하였고 싸움이 승산이 없자 알렉시우스의 아버지를 석방암으로써 십자군의 공격 구실을 없앴다. 하지만 그 후 알렉시우스 4세는 무르추플라스에게 제위를 찬탈당하였으며 십자군은 약속했던 대금을 받을 수 없게 되었다. 이에 십자군은 베네치아 상인들과 함께 콘스탄티노플을 공략하여 함락시켰는데, 이 사건은 쇠퇴해가는 비잔틴제국에 큰 타격을 입혔따. 또한 십자군 역사상 가장 잔인한 약탈이 자행되었다. 제4차 십자군 전쟁은 성지인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기독교 세력 확대를 꿈꾸었지만 그들에게 커다란 실망만을 안겨주고 오로지 베네치아 상인들만이 이익을 얻게 되는 결과를 낳았을 뿐이었다. 즉 베네치아인들은 자다르라는 도시를 점령함으로써 중요한 무역로를 확보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함락, 그들이 가지고 있던 해상 무역권마저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베네치아는 항해의 안전을 보장받고 지중해에서의 자유로운 통행권을 획득했다. 그리고 베네치아인들은 이후 부와 막강한 해군력을 바탕으로 크레타 섬을 비롯한 에게 해의 많은 섬들과 달마티아 해안을 완전히 장악하게 된다. 이때부터 베네치아는 ‘달마티아의 공작’이라는 명칭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