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께서는 1923년 음력 9월 9일 전라남도 나주시 반남면 청송리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어머니의 아버지는 함평이씨 이재춘 이고 어머니는 영암군 시종에서 시집오신 문성녀 입니다. 어머니께서는 이 집안의 2남 4녀 중 가장 맏이로 태어나셨는데 아버지 이재춘은 힘이 세고 기질도 왕성하신 분이었고 어머니 문성녀는 부지런한 분이었습니다. 당시 어머니 집안은 주변 마을에서 경제적으로는 상당히 여유 있는 집안이었으며 아버지 집안은 매우 어려웠습니다.
1930년대부터 70년대까지 어머니께서 살아오신 삶은 일제의 식민 지배를 받는 시기와 그리고 해방과 혼란 그리고 전쟁과 독재의 시대를 거쳐 온 암흑과 질곡의 우리 역사와 함께 한 시대였습니다. 따라서 어머니께서도 이런 우리 역사의 질곡에서 비켜설 수 없었을 것입니다. 개인의 가난은 물론이고 생명마저도 국가가 보장해 주지 못하는 시대에 개인과 가족의 삶은 온전히 각자의 몫이었기 때문입니다.
여기에 더해 나남집 할아버지는 빚보증으로 재산을 잃고 48세의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남겨 놓은 것은 당시 14세인 나도채, 10세인 나도훈, 6세인 나도춘 세 명의 아들뿐이었습니다. 아버지 없이 남겨진 이 세분들이야 불행이었을 수 있지만 나이가 어려 세상 물정 모르고 그냥 커갈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홀로 되신 할머니께서 감당하셔야 할 고통이 어떠셨을까? 농업사회에서 남자의 노동력은 한 가계를 유지하는데 없어서는 안 될 필수였는데 겨우 초등학교 나이인 철모르는 세 명의 자식들을 혼자서 키워 내야 하는 상황이 되었을 때 할머니의 심정이 어떠셨을지 상상이 됩니다. 고도에서 절벽을 맞닥뜨린 것과 같은 그 불안과 좌절감은 어떠셨을까? 그리고 그 이후 삶은 얼마나 무거우셨을까? 생존마저 위협하는 지독한 가난과 남존여비가 여전한 야만의 시대에 자신과 자식들의 미래마저 확신할 수 없는 현실 앞에서 얼마나 한스러워 하셨을까?
하지만 할머니께서는 세 아들을 끝까지 눈에서 놓지 않으셨습니다. 수족을 다하여 세 아들들을 키워내셨을 뿐만 아니라 할머니의 따뜻한 손길은 당신의 손자 손녀들까지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당시로서는 상당히 긴 세월을 살아내시고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할머니께서 72세까지 살아내신 것은 남은 자식들을 온전히 혼자 키워내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당시 누군들, 어떤 집안인들 이와 비슷한 굴레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을 것이지만 희미한 기억밖에 남아 있지 않은 할머니를 생각하면 애달픈 감정이 먼저 듭니다. 하지만 세 자식에 대한 할머니의 절대적 사랑과 헌신적인 보살핌이 있었기에 당신의 아들들이 존재했고 이런 아들들 때문에 저희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할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돌아가신 어머니를 생각합니다. 동네에서는 큰소리도 치고 논마지기도 갖고 있는 집안의 큰 딸이 정작 농사일을 해야 할 시아버지는 보증을 잘못서서 그 화병으로 돌아가시고 남은 것은 시어머니와 세 아들밖에 없는 가난한 집안의 장남에게 누가 시집을 가려고 했을까? 고생길이 뻔히 보이는 길이었지만 재산보다는 성씨를 봐야 한다는 이재춘 외할아버지의 뜻대로 어머니께서는 선하지만 가난한 아버지에게 시집을 오셨습니다.
막막한 집안에 시집오셔서 맞닥뜨리는 절대 가난이라는 엄혹한 현실 앞에서 어머니께서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하셨을까? 자식들에게 먹일 밥이 부족해 친정집 문턱을 드나들었다는 어머니의 말씀은 지금도 저의 귓가에 남아 있습니다. 하지만 ‘출가외인’ 이라는 유교적 전통이 여전한 시대에 어머니께서 감당하셨을 현실이 얼마나 곤궁하셨을지 상상이 됩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이런 현실을 피하지 않으셨습니다. 8남매를 키워내면서 때로는 바람 잘 날이 없었을 것인데 어머니께서는 6남 2녀 우리 가족의 가난과 역경을 희망과 안정으로 변화시키면서 억척스럽게 쉼 없이 살아오셨습니다. 다른 어머니들이 쉽게 해 낼 수 없는 강인한 노력으로 척박한 저희 집안을 일궈내셨습니다. 어머니의 그 노력에 경의심을 갖지 않을 수 없습니다.
자식들이 거쳐 온 시대보다 더 곤궁했고 더 불안했을 1940년 50년의 어머니는 어떻게 살아 내셨을까......
광주에 있는 형님들을 위해 무거운 식량을 머리에 이시고 내동 앞에까지 걸어가시는 모습, 짐 값을 아끼려고 여객버스 차장과 언쟁도 마다하지 않으신 것, 겨울이 지나 조금이라도 더 나은 가격을 받으려고 가을 곡식을 마당 한편에 힘들께 쌓아 올리셨던 일, 말바우 높은 언덕바지까지 올라갔던 삭월세 집, 연탄가게까지 하면서 연탄 구루마를 밀어 주시고 우리가 쌓을 수 있도록 하얀 재를 깔아주셨던 모습, 가정 방문 오신다는 담임 선생님을 직접 못 만나시고 담배 한 값만 제 손에 놓아 주셨던 일, 자식은 편한 승용차를 타고 가는데 80이 넘은 당신은 봉선동 버스 정류장에 서 계셨던 모습, 자식들이 당신을 위해 쓰라고 준 돈을 이미 다 장성한 자식들에게 다시 나누어주셨던 일, 전남대학병원에서 마지막 가시는 순간까지도 자식들을 눈에서 떼지 못하셨던 것......어머니를 생각하면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어머니께서 저에게 남겨 주신 어머니의 모습입니다.
어머니께서 남겨 놓은 그 모습만으로도 어머니는 저희들에게 영웅입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 지금 기억하실지 모르겠습니다. 개인적으로 어머니를 생각하면 평생 잊지 못할 기억이 또 하나 있습니다.
제가 13살 정도 나주 터미널 부근이었을 것 같은데 광주로 가는 버스가 시동이 걸려 있는 상태로 여러 사람들이 바쁘게 타는데 어머니는 손에 든 여러 개의 짐을 분주하게 차에 싣느라 저만치 뒤에 있는 저까지 챙기지 못하셨고 그리고 버스는 저를 남긴 채로 떠나 버렸습니다. 어머니를 잃어버린 저는 얼마나 놀랬는지 모르며 버스가 나간 방향으로 발을 동동 거리면서 울었습니다. 그 시간이 얼마나 길었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어머니는 빨갛게 달궈진 얼굴로 달려와 제 머리를 품어 주셨습니다. 어머니 감사합니다.
어머니께서 좋아하실 소식 하나 올립니다. 정현이가 호주에서 학교 생활을 마치고 돌아와 처음 본 시험에서 최우수 성적을 내 어머니 묘소를 찾아 그 기쁨을 전해드렸듯이 어머니께서 기대하셨던 정현이가 학업에 노력하여 이제 최고의 대학에 입학하여 학교에 잘 다니고 있습니다. 주변의 많은 형제 가족들과 축하의 시간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그 자리에 어머니와 아버지는 계시지 않았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계셨으면 얼마나 기뻐하셨을까? 춤이라도 추실 듯 기뻐하셨을 것인데......하늘나라에서도 박수를 치고 기뻐하실 어머니 아버지의 모습이 떠 오릅니다.
그 이외에도 어머니의 자식들은 어머니가 계실 때와 같이 잘 살고 있습니다. 서울의 둘째 형님 하시는 일과 어머니께서 자주 들리셨던 공장 누나의 사업도 번창하고 있습니다. 이제 그 분들의 성공이 그 분들에게만 머물지 않고 주변 형제들에게까지 도움을 주고 영향을 끼치고 있습니다. 이것도 어머니 아버지께서 기뻐하시고 편안해 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아버지 기억나십니까? 저는 둘째 형님에게 들었지만 지금도 그 이야기가 생각나면 가슴이 먹먹해집니다. 광주에 있는 자식들에게 줄 쌀자루를 마을에서 싣고 오시다 영산포 정미소에서 누군가 가져가버려서 잃어버렸던 일 그리고 이내 당신의 눈물까지 보이셨던 일......얼마나 아파하시고 자책하셨을지......가슴이 아려옵니다. 아버지 아버지의 그 눈물과 사랑이 오늘 우리를 있게 했습니다.
항상 정도를 잃지 않으셨고 평생을 6남 2녀 자식들을 위해 살아오시면서 병마와 싸우시다가 돌아가신 아버지 이젠 어머니와 함께 많은 대화도 나누시고 하늘 여행도 하시면서 행복하시길 빕니다. 아버지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신 지가 벌써 5년이 흘렀습니다. 2010년 12월 8일 평생을 자식들 보살핌과 걱정으로 살아오신 어머니께서는 하늘나라로 돌아가셨습니다. 마지막 가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았지만 자식걱정 다 잊어버리고 이제 편한 세상에서 좋으신 아버지 다시 만나서 잘 사시라는 말씀을 차마 드릴 수 없었습니다. 항상 그랬듯이 다시 일어서실 것이라고 믿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다른 부모와 달리 팔순이 넘어서면서도 자식들 앞에 당당하셨고 호령을 멈추지 않으셨던 강한 성품의 어머니였기에 저는 어머니의 죽음을 실감하지 못했습니다. 어머니의 이마에 제 손을 올려놓고 눈을 떠보시라고 흔들었으나 어머니께서는 돌아오시지 못했습니다. 당신을 마지막 뵈는 영안실에서도 어머니의 얼굴을 후비며 눈을 떠 보시라고 외쳤지만 끝내 돌아오시지 못했습니다. 대신 어머니께서는 곱고 편안한 얼굴로 저희들과 마지막 이별을 하셨습니다.
요양병원에서 휠체어에 앉으셨지만 총총한 기색을 잃지 않으셨고 창밖을 향해 자식 걱정과 손짓으로 배웅을 해 주셨던 모습이 지금도 기억에 선 합니다.
칠흑 같은 어둠과 질곡의 시대를 감내하면서 오직 자식들을 위해 평생을 헌신해 오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오늘 당신들의 아들 딸과 손주들이 모여 당신들의 희생과 사랑에 감사의 제를 올리고 당신들의 모습을 떠 올릴 것입니다. 이제 자식들 걱정 다 내려놓으시고 천국에서 편안한 시간 보내십시오. 오늘의 저희들을 있게 하신 할아버지 할머니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감사합니다. 사랑합니다.
2016년 3월 13일 가족 공동 기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