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묘왜변(乙卯倭變) :
왜인(倭人)들이 왜구(倭寇)가 되어 근세조선 명종 때인 을묘년(서기 1555년)에 근세조선 남쪽 바닷가인 전라남도 영암/강진/진도에 쳐들어 온 일.
근세조선 정부는 삼포왜란(三浦倭亂: 서기 1510년)/사량진왜변(蛇梁鎭倭變: 서기 1544년/중종 39년) 등 왜구들의 행패가 있을 때마다 이에 대한 제재조치로 그들의 세견선(歲遣船. 해[歲]마다 보내는[遣] 배[船]. 일본 여러 번국[藩國]에서 무역하러 보내는 배)을 엄격히 제한하여(무역을 제한한 일이다), 근세조선으로부터 물자의 보급을 받아야 하였던 왜인들은 이의 완화조치를 요구하여 왔으나, 근세조선 정부는 이에 응하지 않았다.
또한, 서기 16세기에는 일본에서 전국적으로 호족들이 세력다툼을 하면서 싸우던 전국시대가 열렸고, 이로써 국내 혼란이 더욱 심해졌으며, 그때까지 일본 국내를 다스리던 무로마치막부(室町幕府[실정막부], 또는 아시카가 막부[足利幕府/족리막부])의 중앙 통제력이 약화되면서 약 1세기간의 혼란기에 접어든 때였다.
이 때문에 일본의 서부 지방에 사는 바닷가 사람들이 이웃인 근세조선과 명나라로부터 물자를 얻어 곤란함을 타개하려고 했으나, 그것이 근세조선 정부의 거절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근세조선 정부의 통제에 대해 불만을 품은 왜구는 배 70여 척으로 전라남도 연안지방을 습격, 먼저 영암(靈岩 : 현 전라남도 해남군)의 달량성(達梁城 : 해남군 북평면 남창리)/어란포(於蘭浦: 전남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 진도(珍島)의 금갑(金甲)/남도(南桃) 등의 보루(堡壘)를 불태우는 등 만행을 자행하였고, 장흥(長興)/강진(康津)에도 침입하였다. 이를 막던 전라병사 원적(元積)과 장흥부사(長興府使) 한온(韓蘊) 등은 전사하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은 사로잡혔다.
이에 근세조선 정부는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을 도순찰사, 김경석(金慶錫)/남치근(南致勤)을 방어사로 삼아 왜구를 토벌, 영암에서 이를 크게 무찔렀다.
왜구가 물러간 후 대마도[對馬島] 도주(島主) 종의조(宗義調)가 이들 왜구의 목을 잘라와 사과하고 세견선(歲遣船)의 증가를 간청해오자, 근세조선 조정에서는 그들이 내왕무역을 할 수 있도록 세견선 5척을 허용해 주었다. 그 뒤, 이 관계는 서기 1592년 이전까지 계속되었다.
([두산백과 두피디아]/[한국 고전용어 사전]/[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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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www.youtube.com/watch?v=60CdPfJDnN4&t=64s
☞ 옮긴이(잉걸)의 말 :
을모왜변은 그로부터 서른일곱 해 뒤에 일어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전쟁의 '전주곡'이자 '전초전'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동안 창/칼/화살만 쓰던 왜구(倭寇)들이 처음으로 총통(!)을 가지고 쳐들어왔고, 그 '해적'들은 사실상 군대(!) 수준이었으니까.
난 예전에는 서기 1592년의 전쟁(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일으킨 근세조선 침략전쟁인 6년 전쟁)이 중요하고, 그 이전에 일어났던 일들(예를 들면, 왜구의 약탈)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그건 틀린 생각이었고, 후기 고리(高麗)[왕건이 세운 나라] 말기의 왜구들(사실상 왜국의 해군/군벌인 자들들)과 싸운 일이나, 을모왜변 같은, 근세조선 시대에 일어난 왜변(倭變. 왜구들이 일으킨 변란)들을 서기 1592년의 전쟁 못지않게 중요하게 여겨야 한다고 판단한다.
그 두 가지 일도 사실상 전쟁이자 전투로 인정하고 나서 그것이 서기 1592년의 전쟁에 끼친 영향을 연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후기 고리 말기의 왜구가 6년 전쟁과 직접 관련은 없다 하더라도, 을묘왜변은 – 6년 전쟁과 겨우 서른일곱 해밖에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 ‘6년 전쟁의 예고편’으로 부른다 하더라도 어색하지 않다.
(좀 더 확대해석하자면,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왜군이 을묘왜변에서 살아남은 왜구들의 경험/전술을 참고해서 6년 전쟁에서 써먹은 게 아니냐는 의문이 든다. 침략한 대상이 똑같은 근세조선이고, 겨우 한 세대밖에 안 흘렀기 때문에, 을묘왜변에 참전했던 왜구가 자신들의 후배 세대인 왜군 군사들에게 자신의 전술이나 경험을 전해줄 수 있으며, 히데요시에게 무릎 꿇은 왜국의 지방 세력들 가운데 을묘왜변에 참가한 세력이 들어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때문에라도 을묘왜변을 무시할 수 없다)
사실, 나는 후기 고리 말기에 일어난 왜구의 약탈이나, 을모왜변은 ‘지나간 옛날’이 아니라, ‘(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서독[西獨]처럼 민주국가로 바뀌지 않는 한) 앞으로도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왜 그런지는 여러분이 잘 아시리라 믿는다. 자위대를 군대로 만들려고 왜국 『 헌법 』 을 고치려 드는 왜국 정부를 보는(그리고 길거리에서 “<조센징>을 죽여라!”하고 외치는 왜국 우익 시위대를 보고, 왜국 안에서 아주 많이 팔려나가는 혐한[嫌韓] 서적이나 하루가 멀다 하고 나오는 왜국 언론사들의 혐한 보도를 보는) 여러분은 내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잘 아실 거라는 뜻이다.
- 단기 4355년 음력 9월 9일에, ‘왜국(倭國) 정부와 왜국 우익과 대다수 왜국 국민들이 언제 중세 말기의 왜구(倭寇)나, 을묘왜변 때의 왜구나, 서기 1592년의 왜군(倭軍)이나, 서기 1894~1909년의 근대 왜군이나, 서기 1930~40년대의 왜국처럼 굴지 모른다.’ 는 생각이 들어, 도저히 마음이 편치 않은(그러나 성향이 친일인 외가[外家]와, 어디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친일파들 때문에, 이런 생각을 현실 세계에서는 소리 내어 말하지 못하는) 잉걸이 올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