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월, 가정의 달에 어울리는 동호인을 찾기 위해 설문 조사를 했다. 테니스 실력이 우수하고 누가 보아도 효성이 지극한 동호인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거의 포기를 할 즈음 국화부들 사이에서 이구동성으로 추천하는 사람이 있었다. 당진에 사는 국화부 김영미였다. 결혼후 지금까지 22년째 시어머니를 모시면서 만 이천평의 논농사를 짓고 1톤가량의 서리테 콩 농사를 짓고 있다고 했다. 그리고 한창 대회 출전을 많이 할 당시에는 카토와 국민생활체육에서 국화부 연말 랭킹 10위권에 들었다니 실력도 무시 못 할 선수라는 평이다.
주인공 김영미를 만나기 위해 당진군 합덕으로 차를 몰았다. 막 기울어가는 노을빛을 받은 수십만 평의 소들평야가 한 눈에 들어왔다. 언제라도 모내기를 할 수 있도록 단장한 논에 잠긴 물은 석양의 반영을 황홀하게 보여 주었다. 합덕은 당진의 최대 곡창지대로 알려진 곳이다. 테니스에 심취한 동호인이 그 평야 한 가운데서 모내기를 하고 가을이면 추수를 한 다는 것이 쉽게 연상되지 않았다. 하우스에서 이제 막 새순이 솟고 있는 벼 모종을 손질하던 김영미는 이쪽은 가장 늦게 출하되는 호품이고 저쪽은 가장 비싸게 팔리는 해나루쌀 품종 삼광 벼라는 설명을 했다. 남편은 사업을 하는데 혼자서 농사일을 하는 이유는 오로지 시아버지께서 물려주신 전답을 남의 손에 맡기는 것이 바람직한 일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한다. 도열병이나 새로운 농약 출시에 관한 잡지는 빼 놓지 않고 읽는다는 김영미는 프로급 진짜 농부였다. 그녀의 손을 거쳐 생산되는 쌀만 연 300가마니가 넘는다고 하니 부자 농부이기도 했다.
"어머니와 함께 사는 것은 당연하고 특별하게 미화시켜 기사화 할 일은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취재한다니 부담스럽고 쑥스럽다. 나와 같은 상황이 되면 누구나 할 수 있고 해야한다." 김영미는 그랬다. 어머니를 모시고 산다는 표현 자체가 맞지 않다고 했다. 그동안 어려움이 없었다면 거짓말이나 지금은 서로 기대면서 산다고 했다. 50 초반에 혼자되신 어머니는 말씀이 없고 내성적이어서 어떻게 하면 어머니와 거리낌 없이 소통할 수 있을까를 고민했던 시기가 있었노라고 한다.
시골이라서 교통이 불편해 10년 넘게 어머니를 수영장에 모셔다 드린다는 김영미는 "한 번은 논에서 일을 하다가 다리를 다쳐서 기브스를 하게 되었다. 그때가 마침 어머니께서 인공관절 수술을 받고 퇴원을 하는 날이었다. 수발을 들어야 하는 며느리가 다쳤으니 어머니는 우리 집에 못 오시고 다른 곳으로 가셨는데 그때 서로의 소중함을 알게 된 계기가 되었다"며 "가끔 거리에서 어머니를 만나면 김동희씨!하고 이름을 불러 드린다. 깜짝 놀라면서 기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 재미도 있고 딸처럼 장난을 치기도 한다. 요즘은 어머니께서 오해를 해 토라지시면 남편을 통하지 않고 어머니와 둘이서 풀어갈 정도 각별해 졌다"고 전한다. 김영미는 어머니의 마음을 이해하고 긍정하는 마음이 짙어지면서 예민한 교감을 나눌 수 있는 광전자 세포가 발달하게 된 것이다.
부모에게 잘하면 복을 받는다는 고전적인 표현대로 김영미는 이미 많은 복을 받고 있단다. 1남 2녀의 자녀들이 무탈하게 자라고 또 손자들에게 무한한 사랑을 쏟는 어머니를 뵐 때마다 저절로 감사하는 마음이 든다고 했다. 옛말에 자식에게 주는 사랑의 일부만 부모님께 쏟아도 효부소리를 듣는다는 그 의미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했다. 해가 막 산을 넘어 붉은 여운이 사그라질 즈음 100년도 넘은 합덕 성당 앞에서 더 많은 이야기들을 주고 받았다.
특별히 어머니께서 기뻐했던 순간은 언제였는가?
어머니께서는 슬하에 2남 1녀를 두셨는데 손녀만 여섯 명을 얻었다. 꼭 어머니께 손자를 안겨드리고 싶다는 생각으로 1년 동안 육식을 끊고 채식만 했다. 둘째 딸을 낳고 6년 만에 기어코 아들 손자를 안겨드렸더니 너무나 기뻐 하셨다. 잊을 수 없는 순간이다.
테니스는 어떤 계기로 시작했나?
시골에서 테니스는 매우 귀족적인 운동이다. 20대에 천주교 성당에 테니스장 만드는 것을 거들게 되었는데 그때 처음으로 라켓을 잡았다. 하지만 한 여름이 아니고서는 라이트가 없어 퇴근하고 나면 어두워져 레슨을 받을 수가 없었다. 결혼 후 직장을 그만두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전업주부로 살게 되었는데 어려움이 많았다. 그 때 구원해 준 것이 테니스다. 20여분 걸어간 후 버스를 타고 시내에 가야 테니스를 할 수 있는 여건이었으나 테니스는 산소를 공급해 주는 통로였다.
언제부터 전국대회를 다녔는가?
이충무공배 지역대회에 처음 출전해서 우승을 했더니 주변에서 이틀 후에 열리는 개나리부도 출전하라고 했다. 거기에서 8강까지 올랐던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 후 2004년 용인시장배 개나리부에서 우승을 했다. 아들을 낳고 2년만이다. 그때 받은 60만원의 상금 모두 어머니께 드렸다. 대회 출전할 때마다 손자들을 돌봐 주시니 진정성 담긴 감사의 뜻이었다. 또 남편의 뒷바라지가 컸다. 대회에 출전하는 날이면 남편은 저녁 약속을 취소하고 일찍 귀가해 가족들과 저녁 시간을 보냈다. 내가 대회에 출전 할 수 있었던 것도, 그리고 국화부에서 여러 차례 우승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가족의 협력 덕분이다.
농사일을 하는데 테니스는 어떤 역할을 했는가?
일종의 스트레칭과 같다. 농약 통을 등에 지고 종일 펌프질을 하다 보면 어깨가 땅으로 내려앉는다. 그대로 집에 들어오면 고단해서 금방 쓰러진다. 그러나 일마치고 테니스로 몸을 풀고 오면 밤늦게까지 몸에 생기가 돈다. 테니스도 농사일도 많은 체력이 요구되는 일이나 적절히 병행하면 시너지 효과가 난다. 특히 어려운 일이 생겼을 때 볼에 집중하는 동안만큼은 다 잊고 나비가 되게 한다. 일종의 해독제다.
지금도 전국대회에 출전하는가?
가끔 도시냄새를 맡으러 나간다. 대회를 출전하면서 처음으로 대도시를 알게 되었다. 모내기 준비를 하고 또 뜬 모를 다시 손질해야 하는 5~6월에는 어린 자식 돌보듯 벼를 살펴야 한다. 가장 바쁠 때를 제외하고는 새벽에 논 관리를 해 놓고 대회에 참가한다. 대회 출전하는 날은 그야말로 소풍가는 기분이 든다. 살아 있다는 기쁨, 취미생활까지 하고 살 수 있다는 여건에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
농부의 삶은 어떤가?
벼 한 톨은 농부의 진액이다. 기다림을 배우게 한다. 막 모내기 끝난 초록의 논이 연둣빛으로 바뀌면 그때가 바로 이삭거름을 줘야 할 때다. 그 후 벼꽃이 피고 황금색으로 익어 가면 저절로 마음이 숭고해지고 풍요로워진다. 동창회에 나가면 농사를 짓는 나를 안타깝게 생각하는 친구들도 있다 그러나 사실 흙을 만지며 농사를 짓는 일은 자연으로 부터 많은 것을 배우게 된다. 어떤 삶과도 바꿀 수 없는 나의 창조적인 터전이자 맛나게 삶을 가꾸게 하는 소중한 영역이다.
도민체전에 대표선수로 뛰고 있는 김영미는 당진의 테니스계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사람이었다. 내비게이션도 없이 혼자 전국대회를 다니면서 길을 닦아 놓았다. 김영미가 만들어 놓은 그 길을 후배들이 오가면서 많은 국화부가 배출되었다. 오랫동안 한 동네에서 살고 있는 이현숙은 "전국대회 우승하면 테니스장에 플랜카드 거는 것도 몰랐다. 영미가 개나리 첫 우승 했을 때 고등고시에 합격하면 현수막을 붙이는 동네 사거리에 우승 축하 플랜카드를 붙일 정도 합덕은 테니스 분야에 외지였다"고 한다.
하루 일과를 마치고 밤이 깊어지도록 라이트 불빛에서 테니스를 하는 김영미는 행복한 사람이었다. 올해 75세가 되신 어머니께서 아프지 않고 남은 생을 건강하게 살아 주셨으면 하는 소망을 전하던 김영미의 달빛 받은 얼굴이 아름다웠다.
김영미 1966년생,
합덕 덕영클럽 소속,
마녀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