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비봉루 [飛鳳樓] /경남문화재자료 제329호
소재; 경상남도 진주시 상봉동 887-1번지
2003년 4월 17일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29호로 지정되었다. 진주의 진산인 비봉산(飛鳳산, 높이 138.5m) 서쪽 기슭에 있는 누각으로, 고려 말·조선 초의 대유학자이자 고려조의 충신인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1337~1392)의 장구지소(杖求之所; 한가로이 머무는 곳)였다 한다.
현재의 비봉루는 정몽주의 후손 정상진이 1939년 건립한 것으로,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이다. 팔작지붕과 겹처마 5량가로 구성되었으며, 누하주((樓下柱; 누각 아래쪽 기둥)의 장초석(長礎石; 높은 주춧돌)은 8각으로 비스듬히 가공되었고, 3익공계 공포형식을 하고 있으며 출목이 있다. 충량(衝樑; 한쪽 끝은 기둥머리에 짜이고 다른 쪽 끝은 들보의 중간에 걸친 보)는 대들보 위에 얹혀 있으며, 머리에는 용두장식을 하였다.
비봉루 동쪽으로는 서실 겸 다실로 이용하는 관리사가 있는데 이 건물은 정면 3칸·측면 2칸 규모의 팔작지붕집이다. 사방에 계자난간을 두르고, 외부에 유리창을 부착하였으며, 대청 방 2칸으로 구성된 한옥·일식집 절충형이다. 추사체의 맥을 이은 진주지역의 서예가 정명수(鄭命壽)가 서실로 운영했던 곳으로, 현재는 그의 후손 정인화가 다실로 변경하여 사용하고 있다.
문화재 지정면적은 1,190㎡이며, 비봉루의 건물면적은 42.97㎡이다. 비봉루는 진주의 대표적인 건축물로서, 이곳에서 바라보는 진주 시가지 전경이 일품이다.
다시 찾는 비봉루 [飛鳳樓] 그리고 포은선생 발자취를 따라 진주에 살고 있는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본다. 설 명절임에도 불구하고 반갑게 맞아주었고, 지난 답사 길에 함께 동행을 하였고 저녁나절에 찾은 비봉루는 어둠에 찍은 사진이라 신통치도 않았으니 자세한 내부도 볼 수가 없어 그냥 지나쳤지만 수단과 방법을 동원하여 기어코 담을 것이라는 각오로 안내를 부탁 한다.
오늘도 문은 굳게 잠겨 있었다. 관람할 방법이 난감한 가운데 공원에 햇살을 받고 있는 나이 지긋한 주민에게 물어봐도 방법이 없다고 한다.
주위를 둘러보며 찾던 중 막다른 사이골목에 비좁은 골목을 지나 어렵게 찾아내고 항상 아쉬운 점은 개인 사유지이기는 하지만 폐쇄적인 공간에서 찾아야한다는 점이다.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비봉산전비봉루(飛鳳山前飛鳳樓) 비봉산 앞에는 비봉루 있고
루중숙객몽유유(樓中宿客夢悠悠) 누각에 잠든 객 한가히 꿈꾸네
지령인걸강하정(地靈人傑姜河鄭) 지세 좋고 인물 걸출하니 강·하·정
명여장강만고류(名與長江萬古流) 그 명성 긴 강같이 영원히 흘러가리
1374년(고려 공민왕 23년) 충신 포은(圃隱) 정몽주(鄭夢周) 선생이 경상도 안렴사로 경상도 지역의 민심을 살피러 내려와 진주에 들렀다. 이때 선생의 나이 38세였다. 안렴사는 고을 수령들의 성적을 살피고 백성들의 어려움을 조정에 보고하는 직책으로, 조선시대 암행어사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포은 선생은 진주에 들러 하룻밤을 묵었다. 하룻밤을 묵은 곳이 비봉산 앞에 있었던 비봉루(飛鳳樓)였다. 포은 선생이 비봉루에서 하룻밤을 묵으면서 시 한 수를 남겼다.
진주시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비봉루에 올라 잠시 숨결을 느껴본다.
지금까지 여러 누대를 살펴보았지만 이렇게 화려한 장소는 처음이다
오색찬연하게 구색을 갖출 것은 다 갖추어진 손색이 없는 누각이라는 점에서 또 한 번 놀란다.
장구지소(杖求之所) 훌륭하신 분이 머물다 간 장소란 비석이 더 이상 논할 가치도 없다. 누가 바로 포은선생이 이 장소에서 흔적을 남겼다.

진주에는 강씨, 하씨, 정씨 라 본인의 정씨를 낮추는 예(禮)를 표현하자 진주에 강씨, 하씨 문중에서 기념하가위한 유적지 기념비를 세운 것이다. 주택이 밀집하자 비봉루에서 가까운 공원에 옮겨 세워졌다고 한다.
비봉산의 원래 이름은 대봉산(大鳳山)이었다고 한다. 대봉산이 비봉산으로 불리게 된 전설이 전한다. 옛날 대봉산 아래 봉곡촌에 진주 강씨들이 집단으로 살고 있었다. 봉곡촌 뒤에 봉황을 닮은 바위가 있었는데, 어느 날 이곳을 지나던 한 도사가 “강씨의 대성함이 이 바위에 있다”고 점을 쳤다. 고려 조정에서 너무 인물이 번성함을 걱정하여 봉바위를 없애게 하고, 산의 이름도 본래 대봉산이던 것을‘봉이 날아갔다’는 뜻으로 비봉산이라고 부르게 했다.
산 아래에 있던 호수‘봉지(鳳池)’를‘가마못’으로 고쳐 부르게 하였으니, 봉황을 가마솥에 삶는다는 뜻이다. 조선 중엽 어느 도승이 ‘날아가 버린 봉황은 알자리가 있으면 돌아오는 법이니 알자리를 만들라’고 점을 쳐 후손들이 알자리를 만들었으니 그것이 현재 비봉산 앞 상봉서동에 있는‘봉알자리’이다. 또 이성계와 무학대사에 관한 이야기도 있다. 이성계가 등극한 뒤 산남(山南)지방에 정(鄭)·하(河)·강(姜) 등 세 성을 가진 인물이 많이 나오는 것을 싫어하여 무학대사를 시켜 진주의 지리를 살피게 하였다. 무학대사가 비봉산을 살펴보니 바로 이곳이 명당이요 명승이며, 더욱이 비봉산 지맥이 대룡골의 황새터와 연결되어 있어 크게 놀란 무학대사는 지금의 비봉산과 이 산의 서쪽에 있는 가마목 사이의 등을 끊어서 한시름 놓았다 한다. 옛날 봉황은 왕을 상징하였다. 왕이 거주하는 궁궐문에 봉황의 무늬를 장식하고, 그 궁궐을 봉궐이라고 했으며 왕이 타는 수레를 봉연·봉거라고 불렀다. 그러니 대봉산 밑에서 왕의 정기를 탄 인물이 날 것을 염려하여 조정에서는 '봉황이 날아갔다는 뜻'의 비봉산으로 부르게 한 것이다.
일제 강점기에는 비봉산의 정기를 없애고자 연못을 파고 끊고자 하였다고 하니 대범한 산이요 진주의 진산임에는 틀림이 없는 듯하다.
自林 또한 두 번째 방문하였으니 포은선생도 만나고 진주시의 진산 정기를 듬뿍 받아 가야하지 않겠나 하고 기대를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