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 께서는 죽기 전 요한을 가르키며 말씀하시길 '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하시고 다시 마리아를 가르켜 요한에게 말씀하시기를 '보라 네 어머니라' 하셨다. (요한복음 19장 26-27절)
그리하여 요한은 마리아와 함께 에베소로 오게 되며 3차 종교 회의록에 기록되어 있기를 요한이 마리아에게 산 위에 집 한 채를 지어 드렸다고 하였는데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집의 장소는 잊혀져 가고 폐허가 되어 찾을 이가 없었다.
1878년 캐더린(catherine)이라고 하는 독일 수녀가 꿈속에서 계시를 받은 내용을 '성모 마리아의 생애'라는 제목으로 펴냈는데 이 책 속에 마리아의 집 위치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수녀는 자기가 태어난 고장을 한번도 떠난 일이 없었으므로 1891년 나사렛의 신부가 탐사반을 조직하여 오늘날의 성모 마리아의 집을 발견하게 되는데, 집터 모양은 캐더린이 계시받아 기록한 모습과 정확하게 일치 하였다.
1961년 교황 요한 23세는 마리아의 집의 위치에 대한 논쟁을 종식 시키고, 이곳을 성지로 공식 선포 했다.
➍ 이마트 마일리지 개설했습니다. 단체명은 ‘아름다운 교회’로 번호는 ‘0191“입니다.
➎ 목회 심방기간입니다. 아직 심방하지 않으신 분들은 목사님과 연락해서
심방날짜를 잡으시기 바랍니다.
➏ 예배시간 10분 일찍 와 주시고, 오후찬양 예배시간에도 일찍 오셔서 다함께 찬양해
주시기 바랍니다.
➐ 예배 후 사용한 곳 정리정돈 및 전원상태를 꼭 확인 해 주시기 바랍니다.
서머나는 주전 3,000년부터 인간이 거주하기 시작하였고, 주전 800년 경 도리아인들의 침략을 받아 그리스로부터 쫓겨난 이오니아인들이 이곳을 점령하고, 터키 중서부에 걸쳐 위대한 문명을 건설하였다. 유명한 장님 서사시인 호머(Homer)가 태어나 활약한 곳도 바로 이곳 서머나였다.
서머나교회 (폴리캅 기념교회)
서머나 교회는 황제 숭배 반대로 많은 박해를 받았을뿐 아니라 유대의 적대 세력을 만났지만 주님께 충성했기때문에 주님으로부터 생명의 면류관을 약속받은 교회이다.(계 2:9-10)
요한계시록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에게 일상적인 것들 즉 가난, 비방 그리고 고난 등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권면하 며 이들이 부요함과 역사적으로 좋은 평판을 얻게 될 것 을 시사해 주고 있다. 시내 중심지에 자리잡고 있는 서머 나 교회(폴리갑 기념 교회)는 17세기에 새로 지어진 건물 로 여러가지의 성화가 그려져 있다.
사도 요한의 직계 제자였으며, 그로부터 직접 교육을 받았던 폴리캅은 115-116년 까지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다.
156년에 서머나 에서는 기독교에 대한 박해가 시작되었다. 지방 총독인 스타티우스는 빌라델비아 등지에서 잡아 온 11명의 기독교인들을 원형 경기장에서 야수의 먹이로 희생 시켰다.
이때 폴리캅은 밀고로 체포된 상태에 있었는데 어릴 적 부터 친구였던 스타티우스는 그를 살리기 위해 그의 신앙을 부정하라고 하였다.
그러나 폴리캅은 '86년간 나는 그분을 섬겨 왔고, 그분은 나를 한번도 모른다고 한적이 없는데 내가 어떻게 나의 주님을 모른다고 하란 말인가?' 하고 거절하였다. 군중들은 그를 사자밥이 되게 하라고 외쳤으나, 총독은 경기가 끝났다고 선언했다.
이에 성이 난 군중들은 물러가지 않고 그를 장작더미에 올리라고 외쳐댔다. 할 수 없이 화형에 처했는데 군중들은 '이 사람은 우리 신의 파괴자다. 기독교인들의 아버지다' 라고 외쳤는데 지금 생각하면 기독교인으로서 최대의 찬사가 아닐까?
오늘날에도 그의 순교를 기리기 위해 그가 세웠던 교회 위에 현대식으로 폴리캅 기념교회를 세우고 예배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2. 노회․총회 행사 및 소식
➊ 2013 예수 제자 훈련
-일시/장소: 10.14(월) / 재건대전교회
➋ 2013 진해 지역 햇불회 세미나
-일시 : 10.17(목) 오후12시부터
-장소 : 진해 중부교회
➌ 2013 영남노회 은퇴 목사, 장로 위로연
-일시 : 10.31(목) 오전 11시 30분
-장소 : 대우부페(055-267-7770)
버가모
버가모 교회의 사자에게 편지하기를 좌우에 날선 검을 가진 이가 가라사대 (요한계시록 2장 12절)
이 지역은 선사 시대부터 도시가 형성된 곳이나, 도시의 기원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역사적인 기록에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알렉산더 시대부터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사망하자 그의 막료인 리시마쿠스(Lysimachus)는 버가모가 천연적 요새에 위치하고 있음을 깨닫고 산의 정상에 성을 쌓고 아크로폴리스를 형성 하였다.
리시마쿠스가 죽자 버가모 왕국이 탄생하였고, 이후 버가모는 로마 시대를 거쳐 비잔틴 시대에 이르기까지 산업과 무역의 중심지로, 문화와 의학의 도시로 번영하였다. 이곳의 부의 근원는 농업과 은광, 가축, 양털 직조 그리고 글씨 쓰는 양피지 였다.
양피지는 이곳에서 처음 제조 되었으며, 특히 유메네스 2세(B.C. 197~159)에 의하여 창설된 도서관에는 약 20 만권의 책들이 소장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을 한가운데 있는 붉은 벽돌로 지어진 신전 건물은 기독교가 국교로 채택된 후 버가모 교회로 사용되었다."네가 어디 사는 것을 내가 아노니 거기는 사단의 위가 있는 데라 네가 내 이름을 굳게 잡아서 내 충성된 증인 안디바가 너희 가운데 곧 사단이 거하는 곳에서 죽임을 당할 때에도 나를 믿는 믿음을 저버리지 아니하였도다."(계 2:13)
BC 133년 로마의 속주 아시아의 수도가 된 버가모는 천혜의 중심지였던 관계로 황제신의 숭배를 거절한 기독교인들에게 대표적인 박해의 장소가 되었던 것을 배경으로 말씀한 것으로, 안디바는 버가모 교회의 초대 감독으로 추측 된다. 그러나 속주 아시아의 수도는 후에 세력이 커진 에베소로 옮겨지게 된다.
***** 식사 및 설거지 봉사자
<금주> 이정순, 김공예, 자원자
<다음주> 정지영, 임은득, 자원자
아스클레피움
환자는 이 긴길을 걸으면서 나는 나을 수 있다는 암사를 받는 고도의 정신요법으로 치료를 받았다.
주전 4세기에 세워진 병원으로서 그 후 AD 400년대 까지 약 800년간 소아시아에서 의료의 중심지 역활을 하였다.
세계 최초로 정신요법을 중심으로 한 치료 방법을 써서 일광욕, 운동요법, 맨발걷기 요법, 음악요법 등으로 치료 하였다.
지진으로 대파 되었으나 아직도 그 잔해는 그대로 남아 있다.
아크로폴리스
SERAPIS를 위한 신전이 남아 있으며 비잔틴 시대에는 교회로 사용되기도 하였고 RED HALL에는 오늘날 우리가 볼 수 있는 교회의 유적이 남아 있다. 이 신전 밑에는 SELINUS 강이 흐르도록 설계 되었다.
**** 주일오전예배 /사회자 / 한용균 목사
묵상기도 ᠁᠁᠁᠁᠁ /늘은혜 성가대
예배의 부름 ᠁᠁᠁ / 요15:15
신앙고백 ᠁᠁᠁᠁᠁ / 사도신경
기원 ᠁᠁᠁᠁᠁᠁᠁ / 사회자
※. 찬송 ᠁᠁᠁᠁᠁ / 149장
성시교독 ᠁᠁᠁᠁ / No. 19
찬송 ᠁᠁᠁᠁᠁᠁᠁ / 261장
기도 ᠁᠁᠁᠁᠁᠁᠁ / 김가연 장로
성경봉독 ᠁᠁᠁᠁ / 사사기 3:12-14 (구약.364)
특송 ᠁᠁᠁᠁᠁᠁᠁ / 늘은혜 성가대
라오디게아는 소아시아 프리지아(Phryghia, 성서상의 부르기아)의 수도로 교통의 요지인 리커스 계곡에 위치하여, 부유한 상업도시로서 발전했다.
알렉산더가 죽은 후 셀리우코스(SELEUCID)왕가의 안티오쿠스(ANTIOCHUS) 2세가 그의 부인 LAODICE의 이름을 따서 도시 이름을 라오디게아라 불렀다.
라오디게아는 근처의 히에라볼리에서 흘러내리는 온천물이 이곳에서 만나기 때문에 질병치료에 도움을 주었을 뿐아니라 귓병을 치료하는 특효약과 콜로니온이라 불리우는 안약의 산지로 유명하여 의료도시로서도 명성을 얻게 되었다.
역사상 수차례의 지진으로 인하여, 이 도시의 유적은 대부분, 땅 속에 파묻혀 지금은 황무지화 되어있다.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더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더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 같이 미지근하여 더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내 치리라"(계 3:15~16)
이곳에서 6.5KM 떨어진 히에라볼리의 온천 물이 수로를 통해 라오디게아로 흘러 들어오게 하였다. 라오디게아의 온천 물은 이곳에 도착하면 식어서 덥지도 차지도 않은 물이 되었다. 이 말씀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믿음이 덥지도 차지도 않음을 책망하고 있다.
골로새서에도 라오디게아에 대한 언급이 있는데(골 4:16, 2:1, 3:13~15) 특히 마지막 절의 문안인사에서 라오디게아에 있는 "눔바"라는 여자의 집에 교회가 세워 졌음을 알 수 있다.
설교 ᠁᠁᠁᠁᠁᠁᠁ / “중독 되었는가?”
봉헌찬송 ᠁᠁᠁᠁᠁ / 265장
봉헌기도 ᠁᠁᠁᠁᠁ / 한용균 목사
교회소식 ᠁᠁᠁᠁᠁ / 김가연 장로
※. 찬송 ᠁᠁᠁᠁᠁ / 5장
목화의 성이라는 뜻의 파묵칼레라고 불리우는 이곳은 성서상의 히에라볼리이다. 산위에서 수 천년을 두고 흘러내린 칼슘성분이 바위를 덮어 산비탈을 온통 순백의 덩어리로 변화 시켰으며, 층층이 테라스 모양의 천연 욕조를 놓아 대장관을 연출하고 있다.
더구나 이 온천수는 질병 치료에 도움을 주고 있어서 수천년 동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최초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설한 군주는 버가모 왕국의 유메네스 2세라고 역사가들은 입을 모으고 있다. 이 도시의 번성은 비잔틴 제국까지 계속되었으며 히에라볼리는 기독교의 대교구가 설치되어 기독교 생활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곳에서 사도 요한의 수제자중의 한사람이었던 '파파이스와 골소새 지역에서 활약하였던 '에바브라'가 복음 전파에 힘썼다.
히에라볼리는 석회를 함유한 온천지역에 세워진 도시였다. 석회가 굳은 모습이 마치 목화처럼 생겼다하여 목화의성(파묵칼레)이라 불리워 왔다.
이곳의 뒷산에는 사도빌립 순교 기념교회 유적이 남아 있다. 이 교회는 기독교 역사상 중요한 건물이다. 기독교의 사료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중 하나인 사도 빌립은 말년에 히에라볼리에 와서 전도를 하다가 이 곳에서 순교했다고 한다. 기독교가 공인된 후 5세기 경 이곳에 사도 빌립을 추도하기 위한 교회가 세워졌다.
※. 축도 ᠁᠁᠁᠁᠁ / 한용균 목사
폐회 ᠁᠁᠁᠁᠁᠁᠁ / 성도의 교제
※. 표는 일어 서시기 바랍니다.
**** 주일오후예배 ****
오후3시사회/ 한용균 목사
찬양 ᠁᠁᠁᠁᠁᠁᠁᠁᠁᠁᠁᠁᠁᠁ 주사랑 찬양
기도 ᠁᠁᠁᠁᠁᠁᠁᠁᠁᠁᠁᠁᠁᠁ 이은기 집사
성경 ᠁᠁᠁᠁᠁᠁᠁᠁᠁᠁᠁᠁᠁᠁ 사무엘상 17:45-49(구약.438)
버가모와 사데를 잇는 교통의 요지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B.C. 7세기 경 리디아(Lydia)인들이 거주하며 "펠로피아(pelppia)"라 불렀다.
B.C. 3세기경 SELEUCUS 1세는 이곳에 도시를 세우고 상업과 산업의 중심지로 발전 시켰으며, 한 때 로마와 동맹 관계에 있던 버가모 왕국의 지배 하에 있다가 로마의 속령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 시에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의 하나가 위치하여 크게 번성하였으며 1425년 오토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두아디라의 역사적 중요성은 군사적인 것과 상업 중심지로서의 역할이다. 두아디라는 지형상 훌 륭한 요새라고는 할 수 없으나 지리적으로 길고 넓은 골짜기 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중요한 군사적 요충이 될 수 밖에 없었고 많은 유대인들을 이주시켰기때문에 유대인들의 전통적인 상술과 지리적 특성은 자연히 상업도시로 번성케 했으며, 이때 이미 상인조합(길드/Guild) 조직을 가지고 있었다.
사도행전 16:11-15 에 의하면 사도 바울은 제2차 전도 여행 때에 빌립보에서 '두아디라에서 온 루디아'를 만났다고 되어 있다. 루디아는 자주 장사로서 하나님을 공경하는 여자였다. 현재 두아디라는 과거의 어떤 유적의 흔적도 찾아보기 어렵다. 단지 도시의 한 귀퉁이에 아마도 아폴로 신전으로 보이는 신전 하나와 회랑이 있는 길 그리고 하나의 커다란 비잔틴 교회 기둥들만이 부서진 상태로 그냥 방치 되어 있다.
가족창 ᠁᠁᠁᠁᠁᠁᠁᠁᠁᠁᠁᠁᠁ 하승룡 집사
설교 ᠁᠁᠁᠁᠁᠁᠁᠁᠁᠁᠁᠁᠁᠁ 한용균 목사
모욕을 당한 이유
기도 ᠁᠁᠁᠁᠁᠁᠁᠁᠁᠁᠁᠁᠁᠁ 한용균 목사
찬송 ᠁᠁᠁᠁᠁᠁᠁᠁᠁᠁᠁᠁᠁᠁ 보혈을 지나
주기도문 ᠁᠁᠁᠁᠁᠁᠁᠁᠁᠁ 오직 믿음으로
험준한 산을 배경으로 한 난공불락의 요새로, BC 1200년 경에 세워진 도시로, 그후 수세기가 지난 후 산 기슭에 제2의 도시가 형성되어 고대 리디아(Lydia) 왕국의 수도로 자리를 잡게 되었다.
B.C. 6세기에 전성기를 맞게 되는 크로수스 왕은 서구인들에게 부를 상징하는 왕으로 널리 알려져 있을 만큼 사데는 당시 부유한 상업도시로 직물, 귀금속 생산 및 사금이 유명하였으며 인류 최초로 금화를 만든 곳이기도 했다. '마이다스의 황금의 손' 전설의 근원지이기도 하다.
이 곳에는 아시아 지역의 '다산과 풍요의 여신' 아데미신전이 있었으며 부도덕한 제사의식이 거행되곤 하였는데 사데 교회가 '살아있는 것 같으나 죽은자'(계 3:1)라는 경고를 받게 된것은 교회가 매우 번성하고 활동적인 반면 이러한 '밀교'의 부도덕한 영향을 받았으며 외관상의 일만으로는 완성된 일이 아니라고 충고한 요한은 "네가 어떻게 받았으며 어떻게 들었는지 생각하고 지키어 회개하라" (계 3:3)하며 "흰옷을 입을 것이요 내가 그 이름을 생명책에 반드시 흐리지 아니하고 그 이름을 내 아버지 앞과 그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리라"고 약속했다.
로마 시대에도 이곳은 중심지로서 중요한 역활을 하였으며, 1914년 프린스턴 대학 팀이 발굴을 시작하여 지금도 발굴 작업이 계속 진행되고 있다.
비잔틴 시대에 교회로 사용되었던 교회의 유적은, 거대한 아데미 신전의 뒷편에 있으며, 아데미 신전은 BC 335년 ALEXANDER 대왕에 의하여 재건 되었는데 이 신전은 희랍 시대에 가장 큰 신전 중의 하나로 크기가 약 100 미터 X 50 미터였다.
<수요일 예배 및 기도회 2013. 10.16 저녁7시 30분>
설교자 : 한용균 목사
성경본문 : 디모데전서 4:6-16(신약. 339)
설교 : 이 일을 계속하라
이 지역은 리디아(Lydia) 왕국 시대에 칼라테부스(Callatebus)라는 이름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그 후 B.C. 159~138 페르가뭄(pergamum, 성서의 버가모)의 앗탈로스(Attalus) 2세, 필라델푸스 (Philadelphus)는 동부 진출의 전초기지로 이 지역에 도시를 건립,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빌라델비아라고 명명했다. 이것은 합성어 로써 '형제애'를 의미한다.
주후 17년과 23년에 큰 지진이 일어나 이 도시가 대파 되어 이 도시에는 아무런 고대 유적이 남아 있지 않다. 또한 이미 마을이 들어서 있어 발굴도 불가능하다. 다만 기독교 유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교회 하나가 파괴된 모습으로 나마 남아있다. 이 교회는 비잔틴 시대에 세워져 사도 요한에게 바쳐졌다.
비교적 높은 4개의 도움으로 구성된 이 교회의 벽에는 11세기에 그려진 프레스코 벽화가 희미하게 남아있으나 그나마도 점차 마모되어가고 있어 방문하는 이들을 안타깝게 하고 있다.
사도 요한은 빌라델비아교회는 적은 능력을 가졌지만 충성스럽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곳은 사데, 버가모 그리고 라오디게아와 히에라 볼리 사이에 위치하고 있어 이들을 잇는 중요한 교통의 요지 였다. 이곳은 농업과 가죽제품, 직조업이 주요 산업이며 농산물로는 포도를 재배 하였는데 소아시아 내의 300여 교회에서 쓰는 성찬식 포도주를 무료로 공급하여 형제 사랑을 실천하였다.
지금도 이 곳에 수십km의 포토밭이 펼쳐져 있다. 또 빌라델비아는 아랍인들의 침략속에서도 끝까지 남아있었던 기독교의 마지막 보루였었다.
***** 다음주 예배 봉사위원
주일오전기도 : 이덕기 장로
주일오후기도 : 이세진 집사
주일오후찬양 : 이은기 집사
**** 중보기도하기
"우리의 눈은 기절 초풍할 정도로 놀라 주변의 환상적인 풍경을 더듬어 가지 시작 하였다" 1907년에 최초로 이 지역의 성지를 발굴해 낸, 프랑스의 예수회 회원이자 학자인 JERPHANION 이, 이 갑바도기아 지역에 들어서자 터트린 일성이다.
실로,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이룩 할 수 없는, 오직 하나님의 능력과 자연의 조화로만 이룰 수 있는 이곳은 화산이 일어나기 전에는 강도가 약한 사암으로 되어 있었으나, 화산에 의해 그위로 강도가 강한 검은 용암이 뒤덮여 졌다.
친절하고 사랑스러운 땅이란 뜻을 지니고 있는 갑바도기아는 터키의 수도 앙카라에서 동북쪽으로 약 320 Km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있다. 소아시아 반도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은 과거 화산 활동을 하던 에르지에르 산과 길류 산에서 수 만년 전에 용암과 화산재가 이 지역을 1200 m 나 덮게 되어, 그 후 세월이 흐름에 따라 비, 바람의 침식으로 달 표면과 비슷한 괴상한 모양의 대 걸작품을 형성 했다.
약한 사암과 강한 용암으로 형성된 바위 속에 언뜻보면 아무도 사는것 같이 보이지 않으나 이 지하 도시에 많을 때는 200만 명 정도가 생활했다고 한다. 또한 발견된 지하 교회만도 1000개 정도에 이르고 있다.
여기에 토굴과 암혈을 파고 숨어 살던 초기 기독교인들의 은신처들, 기도처와 신학교, 동굴 교회들이 말로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거대한 모습을 갖고 있어 탐방자 들의 눈을 놀라게 한다. 여기에는 유대인들과 로마 제국의 박해를 피해 숨어 살던 초대교회의 생생한 역사를 볼 수 있다.
박해를 피하기 위해 신앙을 지키려는 자들이 갑바도기아로 이주해 와서 살던 모습, 기독교 자체 내에서 성화파들과 성화를 반대하는 이크노클라스파들간의 종파 싸움을 계기로 성화파들이 박해를 피해 이곳에 비잔틴 예술의 극치를 이루었던 성화들과 동굴 교회를 장식했던 수많은 벽화들이 있다.
이곳은 기독교의 근원적인 모습들, 기독교 성장에서 오는 모순들, 기독교와 타 종교간의 마찰, 그리고 기독교 자체 내의 종파 싸움으로 인한 쇠퇴기와 멸망의 원인들을 잘 설명해 주는 살아있는 기독교 박물관이다.
이곳에 지하 동굴을 최초로 파기 시작한 것은 기독교인들이 아니다. 기원전 1200년 경에 히타이트 제국이 멸망하자 소아시아 반도는 암흑기로 접어 들면서 동부는 투 왕국, 남동부는 신 히타이트 왕국, 서부는 리디아 왕국, 중부는 프리지아 왕국이 차지하며 서로간에 각축전이 벌어졌다.
그 후 기원전 6세기경 중반에 페르시아 제국이 소아시아 전체를 통일 점령한 후 기원전 333년 알렉산더 대왕이 침입 할 때 까지 페르시아 영토였다가 알렉산더 대왕이 죽고 아리아테라우스 2세가 갑바도기아 왕국을 세워 기원전 2세기말까지 독립을 유지하다가, 기원후 17년에 로마 제국의 영토로 편입 되었다.
이같이 수 많은 왕국의 교체과정에서 전쟁 패잔병 들이 소규모로 토굴을 파고 은신해 살아왔다. 그 후 크리스챤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박해가 심해지자 소아시아 반도를 비롯한 각 지역의 기독교인들이 대거 몰려 옴으로 오늘의 역사적 현장을 만들었다.
① 하나님의 손이 성도의 삶과 가정과 생업과 재정 가운데 함께 하시고, 늘 하
나님의 보호와 인도하심 가운데 살아가게 하옵소서.
② 온 성도들이 성령충만하여 주의 뜻을 분별하고 복음에 합당한 생활을 하며
거룩한 삶에 힘쓰고 능력있는 전도자로 쓰임받게 하소서.
③ 교회안 밖으로 회심과 구원의 역사가 일어나도록
④ 질병으로 고통받는 분들의 치유,건강 회복,믿음과 예배생활의 회복을 위하여
⑤ 교회를 멀리 한 성도와 군복무중에 있는 형제, 유학중에 있는 성도를 위해
⑥ 심방을 통해 모든 가정이 축복되게 하소서.
⑦ 담임목사의 목회사역을 위해
괴뢰메 계곡은 천연의 자연 조각품으로 환상적으로 감상하기 좋은 곳이다. 이곳은 데린구유나 카이막카르 지하 도시와는 달리 지상에 있는 바위 동굴 속에 프레스코와 성화들이 교회마다 장식 되어 있다. 성화들이 많이 파괴된 곳도 있으나 토카트르 교회 같은 곳은 거의 완벽하게 보존 되어 있다.
우상숭배를 배척하는 회교인들과 어린이들의 장난으로 초기 성화들이 많이 파괴 되었으나 당시 비잔틴 예술을 이해 하는데는 많은 도움을 준다.
어두운 교회의 천정과 벽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 공생애의 기적들, 최후만찬, 유다의 배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등이 그려져 있다. 사과교회, 집시교회, 토칼르교회, 성 바르바르 교회 등 수 많은 교회 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죽음과 부활등을 주제로 성화가 그려져 있으며, 천정 모퉁이에는 성경 기록자들의 성화도 그려져 있다.
➇ 나라(안보,평화,전쟁 막아주심,경제회복,사회안정)와 북한(무력도발,공산체제,
신앙자유,복음으로 통일)과 한국교회와 재건교단의 신앙의 회복,하나됨,복음능
력회복을 위해
➈ 새로 등록한 교우들이 잘 정착하고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맛보며
경험하게 하소서.
➉ 임신중에 있는 성도와 태아의 건강을 지키시고, 잘 자라서 순산케 하소서.
⑪ 김현우 집사님 장모님(황순옥 권사)께서 신장이식수술후 고신대병원 1인 무
균실에 입원치료중입니다. 빠른 회복과 치유의 역사를 위해서
⑫ 황갑득 성도님게서 미국에 잠시 가셨습니다. 다녀오는 모든 일에 하나님의
도우심과 보호하심이 함께 하도록
***** 2013년 10월 추천신앙도서
예수님이 차려주신 밥상 / 팀 체스터 / IVF / 11,000원
▲ 깊은 우물이라는 뜻을 가진 데린구유와 카이막카르 지하 도시의 형태는 서로 비슷하다. 지하 120m까지 내려가는 대형 지하도시는 현재 8층까지 개방하고 있다.
피난민이 늘어 날수록 더 큰 공간의 넓이가 필요하게 되자 옆으로 혹은 지하로 계속 파 들어가 복잡한 미로를 형성하고 있다. 지하 도시 안에는 평상시에 밖에서 사료를 날라다가 저장해 둘 뿐 아니라 추수한 곡식들이 서늘한 지하 도시에 보관되고, 비상시 음료수를 위해 장기간 저장이 가능한 포도주를 놓아둔 흔적들도 있다.
땅속 깊이 우물을 파서 지하수를 식수로 사용하고 또한 이것을 지하 공기를 맑게 해 주는 통풍 장치로 원용하였다. 동굴 중간 중간에는 외적의 침입을 차단하기 위해 둥근 맷돌 모양의 큰 석물도 놓여 있다.
20,000명 정도 수용되는 이 지하 도시는 주거지로 사용하던 방들, 부엌, 교회, 곡물 저장소, 동물 사육장, 포도주 저장실, 성찬및 세례식을 갖는 장소, 신학교, 지하매장지 등 도시 기능을 완전히 갖추었다.
이곳은 긴급시 타 지하도시로 피신 할 수 있는 지하 터널이 무려 9 Km 까지 연결 되어 있다. 이같은 지하 도시가 이 지역에 36개 정도가 있다. 이 지하 도시에는 일체의 성화가 보이지 않는 것으로 보아 기독교 초기때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 된다.
***** 2013년 10월 요절 암송 요절(사랑) *****
★ “누구든지 하나님을 사랑하노라 하고 그 형제를 미워하면
이는 거짓말하는 자니 보는 바 그 형제를 사랑하지 아니
하는 자는 보지 못하는 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없느니라”
<요한일서 4:20>
지금은 터어키의 안타키야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동양의 여왕'이란 명칭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였다.
스테반 집사의 순교이후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시리아 안디옥 지역에 정착하여 안디옥 교회를 형성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예배를 몰래 드려야 했고 안디옥 도시 동편 실피우스 산 중턱의 동굴교회도 이러한 상황 가운데 형성된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통로의 입구와 길이 4 km 되는 비밀 통로의 모습들을 보면서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던 성도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다.
누가에 의하면 안디옥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들이라고 불리던 곳이며, 초대교회 선교의 출발지라 할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성서 시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안디옥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근거지 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 하였는데 바나바는 먼저 고향인 다소에 피신해 있는 바울에게 찾아가서 그와 함께 1년간 안디옥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한다. 그 후 이곳은 이방인 선교사인 바울의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AD 45-47년 팔레스티나에 기근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워 지자 안디옥 교회는 성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한다.
*****나와 힘을 같이하자....
- E.M 바운즈 목사 -
한때는 하나님께 성실했지만 성공과 물질적 번영에 도취하여 믿음을 잃어버린 왕이 있었다. 한 용감한 선지자가 하나님께 말씀을 받아 이 왕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여호와의 눈은 온 땅을 두루 감찰하사 전심으로 자기에게 향하는 자를 위하여 능력을 베푸시나니 이 일은 왕이 망령되이 행하였은즉 이후부터는 왕에게 전쟁이 있으리이다(대하16:9)’하나님께서 아사 왕의 젊은 시절에는 그의 기도를 들으셨는데, 그가 기도생활과 순수한 믿음을 저버렸을 때 재난과 어려움이 찾아왔다. 로마서 15장 30절에서 바울은 형제들에게 기도를 요청하면서 “나와 힘을 같이하자”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골로새서 4장 12절에서도 동일한 단어가 나오는데, “에바브라가 너희에게 문안하니 저가 항상 너희를 위하여 애써 기도하여”라고 번역은 다르게 되어 있다. 바울은 로마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너희 기도에 나와 힘을 같이하자”라고 권하였다. 이것은 그가 기도의 시름을 할 때 그를 도와서 함께 기도해 달라는 말이다. 여기에 사용된 단어의 의미는 ‘원수들에 맞서 싸움을 시작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이는 ‘승리를 얻기 위해 뜨거운 열정으로 싸움에 임하는 것’을 뜻한다.
▲ 아브라함과 사라가 살던 집
아브라함과 그의 가족은 아버지 데라와 함께 갈데아 우르를 떠나 이곳에 정착했으며 데라는 이곳에서 죽었다. (창 11:31~32)
아브라함의 형제들중 나홀의 집안만 이곳에 남고, 아브라함은 가나안 땅을 향해 떠났다. 나중에 아브라함은 이삭의 아내를 고르기 위해 종을 하란에 보내어서 나홀의 손녀 리브가를 며느리로 맞이한다.
또한 하란은 에서가 야곱을 죽이려 하자 야곱이 하란에 있던 외삼촌 라반의 집으로 피신하기도 한다. (창 27:43~44, 28:10,29:4)
야곱은 라반의 두딸 레아와 라헬을 아내로 맞이하기 위해 14년간 하란에서 데릴 사위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듯 아브라함 가문 4대에 걸쳐 정신적 고향이 되었던 곳이 바로 이곳 하란이다.
하란은 이미 BC 2000년경부터 인간이 거주했다고 비문은 전하는데 설형문자로 된 이 비문에 의하면 '길'이란 뜻의 Harran은 이미 당시에 상업적 도시로 상당히 번성했다고 한다. 또한 바로 구약의 시대에 해당하는 BC 14세기에는 이미 부근 지역에서 가장 중요한 중심도시로 성장했는데 그 이유는 이 도시가 니느웨 (Nineveh) 및 유프라테스강을 연결하는 교통의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에스겔 27:23) BC 1100년경 앗수리인들은 이 부근에서 유목하며 이 도시를 지배하기 시작했다. (열왕기하 19:12, 이사야 37:12)
이 도시는 당시 우상숭배의 도시로 잘 알려져 있었다. 이미 그리스어로도 Hellenopolis 즉 '신들의 도시'로 알려졌던 바와 같이 많은 신전들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도 특히 바벨론 및 앗시리아인들의 '달의 신'인 Sin 신을 숭배했다. 구약에서도 이 도시에 정착했던 아브라함의 조카이자 야곱의 장인이었던 라반이 우상을 숭배했던 사실을 언급하고 있다. (창세기 31:19, 31:32)
오늘날 이 지역에 살고 있는 주민들의 건축양식이 특히 순례객들의 눈길을 끄는데 즉 집의 지붕을 진흙으로 구운 벽돌을 사용, 4~5 m 높이의 원뿔 모양으로 높게 만들었는데, 이것은
***** 비젼... (행26:19)
오스왈드 챔버스의 글 (81)
만일 비전(“보이신 것”)을 잃으면 이는 우리의 책임입니다. 비전을 잃는 이유는 영적으로 구멍이 나 있기 때문입니다. 만일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믿음을 실생활에서 적용하지 않는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비전은 아무 의미가 없게 됩니다. 하늘의 비전에 순종하는 유일한 길은 “최상의 주님께 나의 최선을 드리는 것”입니다. 또한 단호한 결심 가운데 계속적으로 비전을 기억해야 합니다. 기도하는 시간 및 묵상하는 시간만이 아니라 매 순간 매 시간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으로 비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우리의 힘만으로 비전을 이룰 수 없습니다. 비전이 비전을 이룹니다. 따라서 비전이 이루어질 때까지 그 비전이 주는 영감에 의하여 살아야 합니다. 너무 실질적인 사람이 되다 보면 비전을 잃게 됩니다. 처음에는 비전을 보았지만 비전이 이루어지는 것을 기다리지 못하고 실질적인 일에 급히 달려들면 비전을 잃게 됩니다. 또는 비전이 이루어지고 나면 더 이상 비전을 볼 수 없게 됩니다. 따라서 지체되는 비전을 기다리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우리의 충성심을 시험하는 것입니다. 비전을 이루는 것을 망각하고 실질적인 일에 붙들리는 것은 우리의 영혼의 부요함을 잃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보내시는 돌풍을 잘 주시하십시오. 하나님께서 그의 성도들에게 뭔가를 심는 유일한 방법은 돌풍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돌풍을 보내시면 가만히 계십시오. 주님보다 앞서지 말고 기다리십시오.
지금은 터어키의 안타키야라는 이름의 보잘 것 없는 도시에 불과하지만 사도 바울 당시에는 로마의 속주 중의 하나인 시리아의 수도로서, 로마 제국 안에서 로마와 알렉산드리아 다음가는 대도시였다. '동양의 여왕'이란 명칭을 가질 정도로 아름답고 화려한 도시였다.
스테반 집사의 순교이후 예루살렘교회의 성도들이 각지로 흩어지면서 시리아 안디옥 지역에 정착하여 안디옥 교회를 형성하였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박해를 피해 예배를 몰래 드려야 했고 안디옥 도시 동편 실피우스 산 중턱의 동굴교회도 이러한 상황 가운데 형성된 것이다. 허리를 굽히고 겨우 들어 갈 수 있는 통로의 입구와 길이 4 km 되는 비밀 통로의 모습들을 보면서 환란과 핍박 가운데서도 신앙을 지켰던 성도들의 모습을 떠올릴 수 있는 곳이다.
누가에 의하면 안디옥은 예수를 그리스도로 고백했던, 처음으로 그리스도인 들이라고 불리던 곳이며, 초대교회 선교의 출발지라 할 만큼 중요한 곳이었다.
성서 시대 이후에도 상당 기간 동안 안디옥은 그리스도교의 중요한 근거지 였다. 예루살렘 교회는 바나바를 안디옥에 파견 하였는데 바나바는 먼저 고향인 다소에 피신해 있는 바울에게 찾아가서 그와 함께 1년간 안디옥에 머물며 선교 활동을 한다. 그 후 이곳은 이방인 선교사인 바울의 선교 활동의 거점이 되기도 한다.
뿐만 아니라 AD 45-47년 팔레스티나에 기근이 들어 예루살렘 교회가 어려워 지자 안디옥 교회는 성금을 모아 예루살렘 교회를 돕기도 한다.
다소는 지중해로부터 16 Km 내륙에 위치하고 있다. 시드너스(Cydnus)강이 흐르고 타우르스(Taurus)산이 있으며, 이 지역은 실리기아 (Cilicia) 지역에서는 비옥한 땅이다.
다소를 지나 지중해로 흘러 들어가는 Cydnus 강이 있기 때문에 다소는 지중해 연안의 중요한 교역도시가 되었다.
지중해로부터 운반된 물건들은 다소에 모여져 이곳에서 소아시아와 북부지역, 시리아 지역으로 배포되었다.
따라서 다소는 지중해 교역과 상업의 중심지였고, 국제적인 성격을 띤 도시였다. 로마제국 시대의 다소는 실리기아(Cilicia) 지역의 수도였다. 따라서 사도 바울은 다소를 소읍이 아니라고 표현했다. (행 21:39)
다소의 역사
주전 9세기 중엽에 앗수르 제국은 다소를 정복하였다. 그러나 앗수르의 산헤립왕 (704~681)때 앗수르에 반기를 들었다가 이 도시는 파괴되엇다. 바사(Persia) 통치 시대에 다시 재건 되었고 333년 알렉산더 대왕은 다소를 페르샤 제국으로부터 빼앗고 잠시 이곳에 머무르기도 했다.
로마제국이 다소를 통치했을 때 실리기아 지역의 수도가 되었고 로마의 웅변가요, 정치가였던 키케로(Cicero)는 다소의 총독이 되기도 했다. 주전 41년에 클레오파트라는 배로 지중해를 건너 Cydnus강을 거슬러 올라와 다소에서 안토니우스를 만나기도 하였다. (클레오파트라)
로마의 어거스트 황제 (Augustus : BC 27 ~ AD 14) 때 다소는 황금기였다. 이때 다소는 알렉산드리아나 아테네를 능가하는 학문과 문화의 중심지가 되었다. 다소는 스토아 철학의 중심지였고 많은 스토아 철학자를 배출하였다. (Zeno, Antipater, Nestor, Athenodorus 등) 다소 출신이었던 사도 바울도 스토아 철학을 잘 알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Athenodorus는 Augustus 황제의 선생이었다. 그는 황제에게 화가 났을 때 말하거나 행동하기 이전에 Alphabet을 반복해서 외우라고 가르쳤다).
•“하나님의 자녀임을 나타내는 가장 확실하고 분명한 특징은 바로 ‘기도’이다.”- E.M 바운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