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북경.장가계 문학기행 수필
김윤자
여행일: 2004년 9월 6일 월요일-9월 10일 금요일까지 4박 5일
한국문인협회 부이사장이며 월간 수필문학 주간이신 강석호 선생님과 수필문학의 여러 문인들과 함께 중국북경 문학기행을 다녀왔다. 수필문학은 남편이 등단한 모지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 부부가 함께 다녀왔다. 지난 6월 한국문인협회에서 주관한 캐나다 해외문학 세미나에도 강석호 선생님과 우희정 부장님은 함께 다녀왔기에 문인의 길에서 좀더 친숙해졌고 가까워진 계기가 되었다. 20여 명의 문인들도 대부분 수필가이고 시조시인과 본인을 포함하여 시인이 몇 명 있다. 어느 장르의 문인이던 문학이라는 한 울타리 안에서 우리는 금새 친숙해졌다. 인천국제공항에서의 만남에서부터 중국북경.장가계 문학기행 및 돌아오기까지의 자취를 날짜 별로 적고, 중국 곳곳의 명소를 돌아보며 보고, 듣고, 느낀 점을 적어 보고자 한다.
2004년 9월 6일 월요일 인천공항 출발. 북경공항 도착. 천단공원. 장가계로 이동 *인천국제공항 출발 문인들이 오전 7시 30분까지 인천국제공항에 집합하여 9시 40분 중국 북경행 CA 138 에어 차이나 항공에 탑승했다. 긴장으로 새벽 2시 30분에 기상하여 서둘러 나온 탓에 조금은 피곤하나 새로운 세계로 여행을 떠난다는 설레임으로 기분은 상쾌하다. 북경까지의 비행 시간은 2시간이고 중국 현지 시간으로 10시 40분 도착 예정이다. 승무원이 모두 중국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자들이다. 캐나다다 항공에서 본 나이든 여승무원과는 대조적이다. 아시아권의 항공 승무원은 거의 미혼 여성이다. 나는 창가 23A 남편은 23B 부부라고 나란히 앉도록 배려해 주었다. 바깥 풍경이 잘 보이는 좌석인데 하늘이 뿌옇게 구름에 싸여 있어 북경에 이르도록 그리 아름답지는 않았다. 한국 시간으로 10시 30분에 간단한 기내식을 했다. 북경은 아주 가까운 비행거리다. 기내식사 후 곧 예정된 시간에 중국북경공항에 도착했다.
인천국제공항 오전 7시 경 아침 햇살에 밝은 미소로 공항 내 생명의 식물정원 앞에서 *중국북경공항 도착 베이징 공항에 현지시간으로 11시 40분 정시에 도착했다. 한국에서 2시간 소요, 금방 건너왔다. 국내 이웃 도시에 온 기분이다. 아시아권이라서 캐나다와 전혀 다르고 낯익은 풍경들이다. 시차는 한국이 1시간 빠르다. 즉 한국시간으로는 12시 40분인데 북경 시간으로는 11시 40분이다. 시계를 북경 시간에 맞추었다. 북경 공항에서 마중나온 현지 안내원을 만났다. 경북 선산이 할아버지 고향이라는 귀엽고 가냘픈 교포 3세 북경담당 가이드 김홍일님이다. 버스에 오르자 마자 중국과 명소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 주었다. 수도 북경국제공항은 1999년에 오픈된 것으로 국내선과 국제선이 함께 있어 매우 혼잡하다. 하루에 700여 대의 비행기가 이착륙한다. 2008년 세계올림픽 때는 국제선 공항과 국내선 공항을 분리하려고 지금 북경공항에서 가까운 곳에 새로 옮겨갈 국제선 공항을 짓고 있었다. 북경공항에서 시내까지 18.7 Km다. 제일 큰 톨게이트를 지나 1991년에 개통된 공항고속도로를 달려 천단공원으로 향했다. 천단공원까지는 18Km 거리로 40분 소요된다. 가는 길은 환선도로로 거리가 잘 정리되어 있었다. 환선도로는 25.4Km 2원선 도로로 신호등 없이도 한 바퀴를 그대로 돈다. 대사관 거리이기도 하며 한국영사관은 이곳에 있고 한국대사관은 더 좋은 곳에 있다고 한다. 천안문까지 2원선으로 달리고 3원선까지는 시내 중심도로다. 여기서 말하는 2원선이란 한국말로 2차선이란 뜻인 것 같다. 서울과 많이 다르다. 넓은 나라이기도 하지만, 미개발국이다. 도심이 썰렁하고 한산하다. 건물도 사람도 드물다. 북경은 바둑판 모양 도시라고 한다. 북경은 중국 6대 고도 중 제일의 절경인 도시다. 이곳에서는 대학을 학원이라 부르는데 북경에는 270개 대학이 있고 그래서 인테리가 많다. APT의 규모가 수도의 도심에 있는 것으로는 모두 작은 편이다. 안내원 말로는 구형은 작고 신형은 좀 큰 평수로 짓는다 했다. 겉치레가 없는 나라임을 본다. 높은 건물도 그리 많은 편은 아닌데 지금 저 정도는 많이 지은 편이고 올림픽에 대비하여 한참 건설 중이라고 했다. 몇 년 뒤에는 더 발전할 것이라고 한다. 전신이 하얀 유리로 된 직사각형의 특이한 건물을 보았다. 북경은 위도상으로 북쪽인데도 온도가 높아 날씨가 상당히 더웠다.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도심 아파트의 에어컨이다. 특히 우리 나라의 LG 에어컨이 많이 눈에 띄었다.
중국 베이징공항에 도착하여 짐을 찾으며 기다리는 문인들
*천단공원 천단공원은 북경의 남쪽에 있고 1406년에서 1420년까지 북경 도읍시 지은 건물이다. 천단공원의 나무는 다 측백나무고 바닥은 모두 잔디다. 그 옛날 모두 측백나무만 심은 것도 우리 나라 공원과 다른 점으로 공산 국가의 한 부분을 본다. 옥황상제의 위패를 모신 곳으로 황제가 왕위에 오르면 맨처음 들러 옥황상제에게 제사지내던 신성한 공원이다. 옛 그대로의 건물은 아니고 모양만 똑같이 보수하여 고쳤다. 천단 공원에 빨간색, 노란색 모자를 단체로 쓰고 온 중국 여행객들이 촌스럽다. 이것도 공산 잔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곳에서는 기년전 본당과 황궁우, 천심석 이렇게 세가지의 명소가 있는데 동문으로 들어가 남문으로 나오며 순서대로 다 보았다. 기년전 본당 건물은 중국 정통적인 향기가 그윽한 3층으로 보이나 사실은 1층으로 된 웅장한 전당이다. 못을 사용하지 않고 나무만 쌓아서 맞춰 지었다. 기년전의 모든 계단, 돌등 시설물은 9의 배수로 지어졌다. 기년전 내부의 기둥은 4계절을 상징하는 주기둥 4개, 1년 12개월을 상징하는 작은 기둥 12개 그리고 12지간을 상징하는 더 작은 기둥 12개, 총 28개의 기둥이 건물을 받들고 있다. 외부 건물의 색깔도 맨 위부터 청색, 황색, 청색으로 하늘과 땅, 물을 상징하고 있어 그 아름다움이 중후하다. 천단성 본 좌측에는 그림을, 우측에는 악기를 보관하는 건물이 있고 뒤에는 제사음식을 보관하는 부속 전당이 있다. 부속건물들과 기년전의 건물이 페인트 보수가 안되어 좀 허술해 보이나 옥으로 만든 용 조각의 계단 장식은 매우 정교하고 인상적이다. 천단공원에는 놀이 차원으로 종일 카드놀이 하는 자들과 무용 강사 교습, 악기 비파 연주자 등을 볼 수 있다. 기년전 본 건물을 나서면 용 9마리가 승천하는 모습의 구룡 측백나무를 만난다.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그 곁에는 평소에 옥황상제 위패를 모셔놓은 곳이라는 황궁우 전당이 있다. 황궁우 계단은 삼음석으로 되어 있는데 손뼉을 한번 치면 메아리가 한번 나고, 손뼉을 두번 치면 메아리도 두번, 손뼉을 세번 치면 메아리가 세번 들린다는데 하나의 전설이고 지금은 조용할 때 치면 어렴풋이 그렇게 들린다 한다. 처마도 오붓한 형태로 막아서 임금이 말을 하면 벽을 따라 다 들리도록 함으로 백성을 통치했다고 한다. 우리 나라 공원과 다른, 공산 국가의 한 부분을 본다. 지금은 귀를 벽에 대고 그날의 풍습을 흉내내며 사진만 찍을 뿐 아무 말도 안 들린다. 다음으로 황궁우를 나와 천심석天心石에 올랐다. 즉 지구의 중심이라는 뜻을 지닌 곳으로 황제가 맨 처음 와서 기년전에 오르기 전 기도 드리는 곳이다. 약간의 높고 둥근 단 위에 동그란 돌, 즉 천심석이 있고 그 돌 주위도 9조각으로 퍼져 나간다. 9가 하늘에 가까운 최고의 마지막 숫자라고 믿었기에 9의 배수로 돌판을 이어 놓았다. 모두들 천심석에 올라 소원 기도를 올리고 황제의 위패를 모신 분만이 걸어 갔다는 가운데 대리석 길로 거닐어 보며 나왔다. 나오는 길에 황제가 옥황상제 위패를 모시고 걸어가던 단릉교 다리 가운데 넓은 길을 지나가며 황제가 옷을 갈아입는 노란집을 만났다. 천단공원 관람을 다 하고 공원내 잔디밭에서 문인들이 동그랗게 모여 돌아가며 본인소개를 했다. 그리고는 한식으로 점심를 하고 다음 여행지인 장가계에 가기 위해 북경공항으로 다시 왔다.
천단공원 본당 기년전 건물 앞에서 문인들 단체사진.맨 앞줄 좌측 셋째가 본인 김윤자
*장가계로 이동 점심식사 후 다시 오후 6시 20분 장가계행 중국 국내선 항공으로 장가계로 이동하기 위해 북경공항으로 왔다. 기내물 중 술은 물론 물조차도 반입이 금지된다하여 천단공원에서 먹다 남은 생수조차 다 버리고 왔다. 그런 용기가 흉기가 될 수 있다하여 엄하게 단속한다는 것이다. 좀 의아했다. 공항가는 길의 가로수 프라타나스가 우거진 숲의 군락으로 형성되어 울창했다. 공항 앞에는 중국기와 공항기가 펄럭이고 있다. 공항 내부 윗쪽 벽면에는 요번에 세계 문화유산등록으로 등록된 오녀五女산성 사진이 대형 홍보물로 붙어 있다. 중국 아차산에 있는 2천 년된 고성으로 우리나라 고구려 유적지인데 얼마 전에 중국이 자기네 것으로 등록했다. 우리 나라에서 지금 심각하게 다루고 있는 고구려 문제가 바로 저것 때문이라는 안내원의 말을 들었다. 북한은 우리와 같은 민족이면서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는 실정이 안타깝다. 북경에서 장가계까지는 2시간 40분이 소요된다. 한국에 건너온 비행시간보다 더 긴 것으로 보아 꽤나 먼 곳임을 알 수 있다. 장가계는 장씨 집성촌이고 원가계는 원씨 집성촌인데 크게는 장가계 안에 원가계가 들어 있다. 3년 전부터 여행지로 개방했는데 현재는 중국 최고의 여행 명소다. 비행기가 연착하여 공항에서 두 시간을 기다렸다. 그곳은 안개가 많이 끼는 지역이라 비행기 시간을 예측하기 어렵다는 해명이다. 비행기 시간이 언제로 변경될지 모르니 자리를 뜨지 말라고 하여 한 문인이 2만 2천원 주고 산 설익은 대추를 나누어 먹으며 저녁 시장기를 달랬다. 초록 풋대추인데 참 달다. 지금 북경 시간으로 오후 7시, 공항 창문으로 보이는 저녁노을이 장관이다. 드넓은 대륙의 하늘이라서 노을조차 저리도 웅장한 걸까. 지루함을 덜기 위해 온세상 여행사 장구원 사장님이 문제를 내며 맞추면 상품을 주는 게임을 했다. 오장육부의 기관명과 피가 48초만에 우리 몸을 한바퀴 돈다는 등, 또한 '지'자로 들어가는 신체기관 7개를 말하라는 문제를 내었는데 마지막으로 내가 '기관지'를 맞추어 '베이징 화보' 책을 받았다. 오랜 기다림 끝에 CA 1359 에어 차이나 중국 국내선 비행기를 탑승했다. 캐나다에서 탔던 국내선과는 차이가 많다. 문화가 다르니 그러리라 이해하지만 게이트도 30에서 31로 바뀌고 기내식 서비스도 소홀하며 질이 낮다. 자막도 엉켜 제대로 나오지 않고 장가계로 가는 승객이 거의 한국인인데 중국어로만 방송한다. 중국을 배우는 것도 여행이라고 장구원 사장은 말한다. 밤 10시 30분에 장가계 공항에 도착했다. 늦은 밤에 호텔로 들어가 쉬고 싶은데 미리 예약해둔 저녁을 먹어야 한다하여 장가계 식당에 갔다. 무사히 이곳까지 온 것만도 감사하여 우리 일행은 옥수수 모양 질그릇 병에 담겨 나온 토속주로 건배하고 자축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새벽 1시경에야 란천호텔에 여장을 풀었다.
국내선 항공으로 장가계공항에 도착. 장가계 공항에 한국어로 써 놓은 환영 인사 글귀
2004년 9월 7일 화요일 장가계 란천호텔. 원가계 무릉원. 토가족의 삶. 천자산 케이블카.십리화랑
*장가계 란천호텔 란천호텔은 4성급 신축 건물로 장가계에서는 최고로 깨끗하고 좋은 호텔이다. 아침 6시 30분에 모닝콜을 영어로 울렸다. 지난 밤 늦게 도착하여 피곤하나 여행은 언제나 신비로운 것이라서 상쾌한 기분으로 일어났다. 창밖을 보니 아담한 산골 마을 정경과 인터넷에서나 본 우람한 장가계의 산이 운무에 싸여 시야에 들어온다. 한폭의 절경을 펼쳐놓은 수채화다. 기다란 화물 열차도 산 아래 철길로 달려간다. 벌써 마음은 저곳으로 달려가고 있다. 아침 호텔식 뷔폐는 토속적인 중국음식보다 한국음식이 많았다. 흰죽. 야채죽, 감자 당근 볶음 등, 기름진 것이 적다. 조식 후 란천호텔 로비와 안팎을 돌아보고 기념 사진을 찍었다. 안내 데스크 위에 세계 7개국의 시간을 알리는 시계가 벽면에 부착되어 있다. 그 중 'SEOUL 한성' 즉 한국 시계가 좌측 맨 앞에 부착되어 있었다. 이곳에 오는 관광객이 우리 나라 사람이 많다는 것을 암시하기도 하지만 그만큼 중국에서 한국의 위상이 높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호텔 입구의 남자 경비원들 복장은 TV 속에서나 본 인민군 복장이다. 신기하여 사진을 함께 찍자고 다가갔더니 어설픈 표정으로 응해 주었다. 확실히 자본주의의 사람과는 다름을 본다. 폐쇄적으로 살아온 그들의 삶이 밝지 못하다. 오전 8시에 로비에 집합했다. 오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으니 꼭 우산을 가지고 다니라 한다. 이곳의 날씨는 맑았다가도 갑자기 비가 오고 주로 흐린 날이 많다는 것이다. 장가계의 여행을 위해 란천 호텔을 떠나지만 오늘 저녁 다시 이곳에서 하루를 더 유숙한다.
세계 7개국의 시간을 맞춰 걸어둔 장가계 란천 호텔 로비. 한국 시계가 좌측 맨처음
*장가계 속 원가계 무릉원 원가계는 크게 보면 장가계 속에 포함된 일부분이다. 96년도 이전에는 이름도 달랐다. 중국에서는 앞에 성씨를 이름 붙인 지명이 많다. 하지만 계림은 계수나무가 많아서 붙여진 이름이라 한다. 장가계도 장씨 집성촌이라서 붙여진 이름이지만 사실은 장자방이라 알려진 장량의 활약을 기념하여 지은 마을이라고 안내원은 말한다. 장자방 장량은 한고조 유방을 도와 유방이 한나라를 세우도록 도운 공신이다. 묘지가 수요산에 있지만 무덤은 없고 기념비만 있는데 96년 이전에는 허술했다. 오늘 원래는 장가계를 여행하는 날인데 순서를 바꿔 원가계를 먼저 관광하자고 했다. 날씨에 따라 순서를 조정한다는 것이다. 아침으로 보아서는 비가 올 듯 했는데 구름만 낀 상태라서 원가계 무릉원을 보기에 적당한 일기라는 것이다. 장가계 도심에서 무릉원까지는 1시간 정도 소요되어 버스 안에서 이곳 풍경을 충분히 볼 수 있었다. 관광객을 의식해서인지 시가지가 깨끗한 편이고 잘 조성되어 있다. 목욕탕으로 보이는 가게의 상호 속에 변용 한자로 金자 3개를 쌓아서 만든 한자가 들어 있다. 정확히는 모르지만 흥할 '흠'이라 했다. 곳곳에서 변용된 한자를 만난다. 이외에도 女자 3개가 모인 간사할 간姦이 쨍그랑 '쨍', 男자 3개가 모인 고스톱 '고'자가 있다고 죠크로 말한다. 버스 안에서도 우람한 산이 보이는데 최고 높은 산이 1290m라 한다. 2001년 11월부터 이곳 장가계 공항이 완공되면서 관광지로 부각된 곳이다. 1900년도 북경에서 장가계 행 경장철도를 건설했으나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어 관광지로 발전되지 못했다. 장저우에로 불리던 이름도 2002년 7월 이후부터 장가계로 호칭을 바꿨다. 그후 사스로 잠시 중단하다 2003년 8월부터 다시 여행객을 받고 있다. 이곳은 3대 신비로 싸인 곳이다. 중국 3대 비밀 중 하나인 강시가 출현한 곳이고, 나무와 돌이 많은 신비의 땅이다. 4억년 전 바다였고 2억 7천년 전 육지가 되기까지 계속 바다와 모래층의 반복으로 계단층이 형성된 산이다. 지금도 계속 떨어지는 모래알로 그림을 그려 수출하는데 그 그림을 최고 명품으로 친다. 한국인 여행객만도 어제 하루 동안 60에서 70 단체가 들어왔다. 아직 이곳은 질서가 없어 밀고 오르려 하니 같이 무질서 하라, 끼워주지 마라, 한사람 허용하면 2인, 3인 온다고 주지시킨다. 중국어로 거절은 '뿌요' 라며 누군가가 새치기를 부탁하면 그렇게 답하며 고개를 저어 거절하라 한다. 부언으로 식사인사는 중국말로 '치살로마' 어떻게 들으면 한국어로는 심한 욕설 같아 한바탕 웃었다. 또 이곳에는 장애인이 많은데 '천원만 하며 온다' 하며 따라온다. 절대로 주지 마라고 했다. 그 돈을 저녁에 두목이 착취해 가니 차라니 주려거든 먹을 것이나 입을 것을 주라 한다. 장가계는 세계문화 자연유산을 등록되었다. 참고로 캐나다 루이스 호수는 세계문화 자연유산 3위로 그 아름다움이 대단하다는 말을 한다. 란천호텔에서 중한버스로 무릉원이라는 커다란 간판이 피라미드 모양의 건물에 선명하게 쓰여진 최초의 무릉원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오늘과 내일 사용할 카드 4만원 짜리 장가계와 원가계 관광권을 발급하는데 본인 식별을 위해 지문으로 찍어 카드에 넣어 주었다. 지문을 이런 것에 사용하다니 특이한 광경이다. 그 카드를 받아 입장하여 원가계 전용 버스로 환승했다. 앞으로 이런 식의 관광 순환 버스를 6회 갈아탈 것이라 하며 절대로 개인 소지품을 놓고 내려면 안된다 한다. 중국 호남성 장가계 안의 원가계 무릉도원, 중국 송나라 시인 도연명의 작품[도화원기]속의 유토피아가 바로 이곳이다. 무릉원은 이곳의 고유한 지명이다. 도연명이 하룻밤 자고 세상에 나가니 몇 십년이 지났다는 무릉도원. 그곳에 나는 지금 최초의 발을 디딘 것이다. 사실 이번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무릉도원이다. 꿈 속에서나 본다는 무릉도원, 그 이상향 유토피아를 생시에 밟아 본다는 것은 뜻깊은 일이며 큰 감동이다. 무릉원은 토가족이 살던 최초 마을이다. 지금은 번화가로 재래시장 같은 상가와 길가의 과일, 기념물건 장사들이 많다. 세계자연유산이라는 소개 비문이 입구에 세워지고 평일인데도 여행객 줄이 장사진이다. 순환 버스로 산 깊숙히 들어오니 바위산을 뚫어만든 터널을 만난다. 기계로 뚫은 것이 아니고 사람 손으로 뚫어 만든 것이라는데 차 한대가 지나가는 터널길로 입구에 청, 적 신호등 있어 붉은 신호등이 켜지면 서고 녹색 신호등이 켜지면 들어간다.
무릉원 마을 간판.토가족이 살던 곳으로 세상에서 말하는 도연명의 무릉도원 입구
기암들의 장관을 보며 호수 하나를 만났다. 물빛은 녹색으로 캐나다 호수에서 본 빙하물과는 다르다. 자연빗물이며 녹조현상으로 푸른 나뭇잎 빛깔이다. 기둥처럼 솟은 바위 기둥이 산을 이루고 꼭대기 아슬한 절벽에는 나무가 산다. 중간 중간에도 나무가 산다. 그런 산들이 수없이 이어져 태초의 신비로운 산과의 아름다운 만남이다. 무릉원에서 한참을 순환버스로 와서 하차하였다. 위를 쳐다보니 바라보기에도 아찔한 90도 각도의 엘리베이터가 바위 외벽을 오르내리는 아찔한 풍경이 보인다. 저 백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무릉도원 산정에 오른다는 것이다. 그곳을 향해 가파른 계단을 꽤 많이 걸어 올랐다. 백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가파른 산 절벽을 오르면서 수평으로 보이는 산봉우리의 절경을 사진 속에 담았다. 은색 구조물에 꾸미지 않은 버스 모양 엘리베이터를 산 중턱에서 타고 정상을 향해 오르고 있다. 사람의 힘으로는 오를 수 없는 326m의 가파른 절벽을 백룡 엘리베이터로 올랐다. 산 정상에 올라 그때부터 계속 걸어 산속 무릉도원으로 진입했다. 사진기로 다 담을 수 없다는 말에 장가계 풍경을 담은 책을 3천원씩 주고 모두들 샀다. 품어가고 싶은 무릉도원의 절경을 사는 것이다. 걸음마다 눈에 들어오는 비경이 환상적이다. 눈뜬 현실에서 만나고 있다는 것이 믿기 어려운 절경이다. 일반적으로 산에 기암으로 솟아오른 비경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기암 특징이 솟지 않고 산 밑에서부터 기둥 바위로 서 있다는 것이다. 눈 아래는 절벽인데 특이한 바위풍경이다. 바라보기조차 아찔한 천길 아래 낭떠러지 평지의 땅에서부터 기둥처럼 솟아오른 괴이한 바위들이 각기 다른 모습으로 줄 서 있다. 머리 부분과 옆구리 부분에 살아보겠다고 목숨을 매단 나무들이 신선이 걸터앉아 사는 모습이다. 오늘은 비가 온다는 예보를 빗겨나가 흐리고 약간의 안개가 있는 산을 걸으며 관광하기에 아주 좋은 날씨다. 운무에 휘감긴 바위무리의 산이 완전한 무릉도원이다. 산길을 꽤 많이 걷는데도 아름다움에 대한 감탄으로 힘든 줄 모른다. 세계의 비경이라는 바위 터널, 아치형 다리 그 사이로 보이는 천하 제일 풍경은 말 그대로 진풍경이다. 협곡 사이로 비행기가 지나간다는데 보지는 못했지만 상상만으로도 가경이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장가계 산정에서 강석호 선생님 외 문인들 기념사진
산에서 산으로 건너는 5m 정도의 짧은 철다리도 만났다. 이 험준한 산곡에 어떻게 이런 다리를 놓았을까. 산정 비탈진 험로에 길게 줄을 매고 열쇠를 채워 걸어둔 자물통을 보았다. 연인들이 와서 입구에서 자물통을 산 후 이곳에 와서 줄에 채워놓고 헤어지지 말자고 맹세하고는 열쇠는 깊은 계곡에 던져버리고 간다 했다. 채워진 자물통이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것도 큰 풍물이다. 두사람의 토가족 남자가 한화로 만원을 받고 가마에 사람을 싣고는 어깨에 메고가는 애절한 모습도 역시 큰 풍물이다. 산모롱이에서 춤추는 토가족 여인들의 무리도 만났다. 이색 체험 속에서 무릉도원의 아름다운 여행은 계속 이어진다.
중국송나라 시인 도연명의 작품[도화원기]속의 유토피아.수필가인 남편과 산중철교에서
*화룡공원 무릉도원 거의 끝부분 화룡공원에 다다랐다. '화룡' 이라는 이곳 장가계 사람과 말의 동상이 함께 커다랗게 세워져 있는 공원이다. 화룡은 토가족 족장격인 사람인데 명나라 태조 황제 주원장과 거래하여 천대받던 토가족에 대하여 원만한 협상으로 그들 삶을 인정받게 해준 존경받던 인물이다. 그 기념으로 비석을 세운 것이다. 현재는 큰 명물 명소다. 산 아래 건너편 기암도 절경이고 아름다운 이야기가 고인 명소다. 한쪽에서는 토가족 여인들이 모여 손 수공 실내화를 만들고 토가족 장인 아이의 애절한 비파현 선율이 구슬프다. 돈벌이의 일종인지 동전이 담긴 바구니가 앞에 놓여 있다. 길가에는 전통과일을 파는 아낙이 즐비하다. 산중에 제법 큰 기념상품 판매상가도 있다. 토가족 젊은 여인들은 자기들의 민속옷을 입고 함께 사진을 찍으며 돈을 받기도 한다. 맞은 편 산언덕에 있는 '꽃바구니 바위'는 사랑하던 연인이 이별한 후 여인이 바구니에 꽃을 담아와 뿌리고 있는 모습을 닮아 붙여진 이름처럼 애련하다. 전설처럼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가슴에 담고 다음 행선지로 떠났다.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장가계 내의 화룡공원. 화룡이라는 사람의 동상 앞에서 *천자산 케이블카 조금 걸어가니 천자산天子山이라는 기념 돌비가 아담하게 세워져 있다. 뒤편으로는 천자산케이블카가 연신 오르내린다. 여기는 2084m의 고도다. 무릉도원의 산길을 신선처럼 걸어 케이블카 타는 곳에 드디어 도착한 것이다. 오를 때 케이블카를 타면 하산할 때는 백용 엘리베이터를 타고 우리처럼 엘리베이터로 오르면 케이블카로 내려가도록 되어 있었다. 신기한 것은 케이블카를 타러 들어가는 입구에 '어서 오십시오'라는 정확한 맞춤법의 한글로 쓰여진 문구가 붙어있다는 사실이다. 캐나다에서도 이런 유의 한글 안내문을 보았는데 이곳에서도 이런 문구를 보며 가슴이 뿌듯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우리 나라의 관광객이 세계 곳곳에 많이 다님을 알 수 있는 표지로 받아들여진다. 케이블카 한대에 여섯 명씩 타고 하산하는데 아주 천천히 내려간다. 처음에는 천길 낭떠러지를 확인하는 순간 아찔했는데 짙푸른 숲의 물결과 기암들을 구경하며 사진 찍는데 도움 주려고 완만하게 흔들림없이 전선을 타고 흘러감에 무서움이 가시고 사방에 펼쳐지는 비경에 감탄의 탄성을 지르며 내려왔다. 길고 험한 산능선에 어떻게 케이블카를 설치했을까. 신비에 가까운 천자산 케이블카를 돌아보며 다시 순환 버스를 탔다.
천자산 케이블카를 타고 하산하는 중.여섯명 탑승. 아슬하지만 내려오며 본 눈부신 비경
*십리화랑 모노레일 관광 코스로 협궤 코끼리 열차를 탔다. 십리화랑이라 하여 미술품을 전시한 곳인줄 알았는데 그림처럼 아름다운 기암절벽이 십리를 병풍처럼 둘러쳐져 있다하여 십리화랑이라는 명소가 된 곳이다. 걸어서 들어가도 되도록 미니 철로 곁에 인도를 설치해 놓았다. 많은 사람들이 걷거나 모노레일을 타고 산경치를 보며 계곡을 따라 깊숙이 들어간다. 자연과 기계문명이 어우러진 기묘한 풍경이다. 산 계곡에는 물이 없다. 이곳은 비가 내려야 물이 흐르고 그렇지 않으면 물 흐름이 정지된다. 산이 바위라서 물을 흡수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마른 계곡에 자갈돌만 뒹구는 풍경이 하늘 높이 솟은 바위산 풍경과 대조를 이룬다. 저것도 보기드문 진풍경이다. 안내원은 신기한 모양의 바위산들을 큰 소리로 설명한다. 할아버지가 기다리는 바위, 세자매가 나란히 서 있는 바위 등등 신기한 바위들마다 이름을 짓고 있는데 아직은 다 짓지 못했다며 우리보고도 이름을 지어 보란다. 그러면 그 이름을 그대로 부르게 된다고. 아직은 완전히 개발된 관광지가 아님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사람의 발길이 그리 많이 지나지 않은 순수한 땅이다. 세자매봉까지 들어가 내렸다. 그곳은 여느 관광명소처럼 상가가 형성되어 있고 화가가 이 바위산에서 떨어지는 모래와 흙으로 실제로 그림을 그리는 화실이 있었다. 이 그림이 유명한 사석화로 비싼 값에 팔린다는 것이다. 대나무처럼 쭉 뻗어 올라가 서 있는 산줄기들의 잔치 향연 앞에서 기념사진을 찍고 다시 모노레일로 살아있는 명화랑 십리화랑을 감상하며 나왔다.
평풍처럼 비경으로 십리를 둘러쳐진 십리화랑 산 풍경
*금편계곡 순환버스가 조금은 아랫녘인 듯한 곳에 도착하여 내리니 흘려서 쓴 멋진 한자체로 1995년 강택민이라는 이름이 들어간 '장가계' 돌비가 큰 바윗돌에 새겨 세워져 있다. 이곳이 장가계의 원조 마을인 것 같다. 그 돌비를 지나 계곡을 따라 걸어 들어가는 관광 코스다. 이곳에는 약간의 물이 흐르고 작은 낙차의 폭포가 줄지어 늘어서 있다. 인공으로 만든 것이지만 보기 드물게 만난 물이어서 신비롭다. 폭포 위에는 평지로 흐르는 계곡물이 있고 조약돌이 많다. 더운 날씨로 물가에 앉아 잠시 쉬었다. 돌멩이가 닳아 어여쁜 것으로 보아 이곳은 수많은 세월 동안 물이 흘러왔음을 알 수 있다. 무릉도원에 있는 돌이라서 색깔도 고운 복숭아 빛일까. 붉은 줄이 실핏줄처럼 돌거나 전체가 자주색 빛을 띈 조약돌이 많다. 왕복 1시간 이상 산길을 걸으며 발과 눈으로 장가계 무릉도원을 감상했다. 마지막 순환 버스를 타고 다시 인공 바위터널을 지나 맨처음에 들어온 무릉원 마을 입구에 도착했다. 오늘은 해가 나지 않고 구름만 낀 날씨로 서늘하여 오히려 관광에는 큰 도움을 준 좋은 날씨였다. 조금 걷는 정도가 아니라 원가계 무릉도원 산을 완주하여 걸은 셈이다. 온도도 중국 남쪽 호남성이라는 지명의 위도에 비해서는 높지 않은 편이었다. 반팔 티에 겉옷을 걸치고 다녔으니 북경보다 시원한 것이다. 아마 오염되지 않은 산속이라서 그런 것 같다. 모두들 축복받은 날씨였다고 말한다.
우리의 중한버스가 무릉원 마을 입구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장가계 시내로 이동하여 '한방원' 에 들러 무료로 침술을 받았다. 나는 혈액순환 장애로 오른쪽 팔에 두 개, 반대편 왼쪽 다리 발목 부분에 2개 맞았다. 주위 3cm 부근까지 침 효과가 있는 부황 뜨는 식의 침이다.청색과 적색 두가지 침으로 찔러서 놓는 게 아니고 지압으로 눌러서 자극함으로 치료하는 침이다. 일행 모두에게 어깨나 등, 그 사람의 불편한 증상에 맞게 각기 다른 신체부위에 침을 꽂아 주었다. 피로를 풀어준 고마운 손길이었다. 중국은 음식점을 반점이라 부른다. 장가계 도심의 반점에 와서 꽤 좋은 메뉴들로 석식을 했다. 돼지고기 다리 익힌 것이 제일 인기다. 항주에서 작년 여행시 먹은 거지닭 같은 요리다. 비린 맛이 전혀 없는 고소하며 담백한 일품 요리다. 배추 된장쌈, 된장국은 한국과 동일하여 인기다. 도마토가 당도가 높아 달고 맛있다. 무사히 장가계 내의 원가계 힘든 코스의 관광을 마친 것에 대하여 축하하며 녹차를 채운 잔으로 건배했다. 강석호 선생님의 선창으로 축배의 잔을 들었다. 다들 서로를 칭찬하고 자축하며 맛있게 농담을 반찬삼아 식사했다. 이춘미 수필가님의 재미난 농담들은 분위기를 한껏 즐겁게 해주었다.
중국 호남성 장가계 무릉도원 금편계곡 물줄기 환희 *발맛사지 저녁 식사 후 다시 란천 호텔로 돌아와서 편안한 복장으로 3층에 모여 발맛사지를 받았다. 같은 호텔 안에 발맛사지까지 받을 수 있도록 지어 편리했다. 나의 숙소는 707호인데 출입문 손잡이가 첫날부터 고장으로 애를 먹이더니 오늘은 아예 안 열린다. 우리가 발맛사지 받는 동안 기술자를 불러 수리한다 했다. 중국 군인들이 집을 지어 그런 오류가 있다고 안내원은 말한다. 발 맛사지는 한방에 네 사람씩 누워서 받는다. 팁을 미화 5$씩 버스 안에서 일괄 거두어 건네 주었다. 나의 소녀는 스무살 고교 1학년이라고 한다. 남동생이 1명 있고, 어디 사느냐 영어로 물었더니 장가계 산다고, 나의 남편을 맡은 그 옆의 소녀도 장가계 산다고 학교는 안 다닌다고 한다. 약간의 언어는 영어로 통했다. 나이를 묻기에 손가락으로 서로 알려주니 예쁘다며 그보다 젊어 보인다고 작년에 발맛사지 받았던 항주에서의 소녀와 똑같이 말한다. 나도 가여운 소녀에게 예쁘다고, 잘 한다고, 시원하다고 칭찬해 주었더니 흥이 난 나의 소녀는 시냇가에서 빨래질하듯 두들기고, 주무르고, 비벼주고, 시원하게 전신의 피로를 풀어준다. 녹차 한잔씩 미리 가져다 준 것을 마시고 나왔다. 따로이 팁은 주지 말라하여 그냥 나왔다. 현지 안내원의 말로는 한국인들이 와서 팁을 많이 주어 애들 눈만 높여놨다고 불만스럽게 토로한다. 가격도 그전보다 훨씬 비싸졌는데 그 원인이 모두 한국 관광객들 때문이라는 말에 조금은 부끄러웠다. 세계여행을 막을 수는 없지만 알차고 실속있게 자세를 바로 잡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튼 그날 밤은 여정의 피곤이 가시고 편안한 잠을 이루었다.
저녁 식사 후 호텔에서 발맛시지.노련한 솜씨로 피로를 풀어줌.수필가인 남편과 나란히
2004년 9월 8일 수요일 보봉호 유람. 황룡동굴. 장가계 토가족의 삶. 장가계 출발
*보봉호 유람 아침 식사후 호텔 정원에 둥글게 모여 장구원 사장님을 따라 몸을 푸는 체조를 하고 오전 8시에 장가계로 출발했다. 오늘 온도는 23도이고 우리가 가는 산은 30도, 등산하기에는 좀 더울 것이라 한다. 오늘 가는 곳은 산중에 있는 반 자연 반 인공의 보봉호수다. 우리 일행이 모두 문인이라는 것을 안 안내원은 소동파가 악양루에 올라 이 멋진 곳에서 시를 쓸 수 없다고 선언했음을 알려준다. 오늘 가는 곳의 풍광도 그만큼 아름답다는 뜻이다. 중한버스는 우리를 태우고 장가계에서 40분쯤 달려 보봉호 입구의 산길에 내려주었다. 대나무 숲의 인공폭포를 지나 긴 산길과 계단을 한동안 걸어 올라가니 보봉호가 그림처럼 아름답게 전개된다. 유람선이 신선을 태운 듯 산속 초록물결 위를 오가고 있다. 이 호수에는 발이 4개인 도룡농 비슷한 아기고기와 흰새우가 사는데 맛이 좋지만 잡으면 불법이라 한다. 개인이 관리하는 호수로 국가에서 해방되어 일정액을 국가에 지불하고 현재는 홍콩인이 경영하고 있다. 이 물로 수력발전을 일으켜 인근 마을은 정전이 없다. 수심은 최저 72m, 최고 192m로 대단한 깊이다. 거의 인공댐으로 물의 들고 낢이 없다 한다. 원숭이가 살고 있는 우거진 숲과 비경의 바위산으로 굴곡이 진 호수다.
보봉호수의 유람선 전경
보봉호 유람선에 승선하려는 관광객이 장사진이다. 배 한 척에 50명이 승선한다. 줄지어 빙빙 몇 구비 돌아야 탄다. 우리는 다른 팀과 한조가 되어 유람선에 올랐다. 가장 좁다는 협곡의 호숫길을 지나자 배가 지나가는 길에 토가족 처녀가 배에서 홀로 서서 토속의 노래를 원어로 부른다. 구슬프다. 사랑을 찾는다는 뜻이란다. 마음에 들거든 노래로 대구하라고, 그러면 사랑이 맺어진다고 배를 이끄는 사람은 농담을 한다. 배의 모터는 뒷편에 있어 한사람이 그곳에 앉아 조정하고 앞에는 한국말을 잘 하는 젊은 남자가 확성기을 잡고 안내하며 흥을 돋궈준다. 보통 배와는 다르게 엔진이 뒤에 있어 앞이 확 트여 전면의 경치가 한눈에 들어온다. 물빛은 완전히 나무와 동일한 진초록이다. 산세가 어제 원가계 무릉원에서 본 기묘한 모양의 바위로 봉우리와 옆구리 절벽에 붙어사는 나무 풍경이 절경이다.
평화로운 유토피아.보봉호에 승선하여 본 보봉호수의 비경.승객들의 즐거운 시간
그리 멀지 맞은 편으로 건너가서 일단 내려 토가족의 민속춤 공연을 관람했다. 토가족 청년과 아가씨가 번갈아 민속춤으로 관광객의 시선을 집중시킨다. 산자락 아래 넓은 장소에 지붕과 의자로 시설을 잘 갖춘 야외 공연장이다. 남자들은 용감한 무술춤을 추고 여자들은 꽃바구니와 대나무를 들고나와 아릿다운 춤을 춘다. 중앙의 무대에서 헤아릴 수 없이 홀로 유연한 몸매로 도는 여인에게 관중들은 뜨거운 박수를 보냈다. 공연이 끝나고 다시 보봉호 유람선에 승선하였다. 방향은 아까 탔던 선착장과 같으나 승선장과 하선장은 따로이 구분되어 있다. 호수 위 큰 섬을 기준으로 하여 우측으로 돌아 나간다. 나가는 배에서는 양편에 앉은 두팀에게 노래를 부르도록 했다. 우리 문인팀에서는 79세의 이병수 수필가님이 흘러간 노래를 불러 손뼉을 치며 흥겨운 시간을 가졌다. 대단하신 기력이다. 신선이 사는 호수다. 무릉도원의 절경이다. 요번은 산모롱이에 총각 홀로 작은 쪽배에 서 있다. 집의 형상인 배로 보아 호수 위에서 사는 것 같다. 신부의 모습으로 얌전히 호수에 자리한 신부 바위를 지나자 고독한 섬 위에 소나무가 홀로이 큰 키로 서서 승객을 배웅한다. 이 호수에 온 것을 환영하며 안녕히 가시라고 인사를 하는 것이라 한다. 섬의 오롯한 하나의 소나무가 진풍경이다. 어느덧 산언덕에 배는 다다르고 하선하여 기념 단체사진을 찍은 뒤 긴 계단으로 하산했다. 이토록 긴 계단의 정상높이가 호수깊이라는 말에 아찔하다. 걸어 내려도 내려도 끝이 없는 계단이다. 다람쥐 체바퀴처럼 같은 모양의 계단이 빙글 빙글 이어져 있다. 긴 계단이 인공으로 만든 것 치고는 대단하다. 깎아지른 절벽에 아슬한 난간처럼 계단이 붙어있다. 집 나온 아이가 웃통을 벗은 채 계단에 위태롭게 앉아 있다. 중국의 빈곤, 토가족의 빈곤을 본다. 비가 오지 않고 해도 나지 않아 관광하기 좋은 날씨다. 그러나 온도는 예상대로 약간 더운 편이다. 겉옷을 벗어놓고 다녔다. 한동안 어지럽도록 휘어진 계단길을 내려오니 아까 보봉호로 가기 위해 내렸던 곳이다. 대나무 사이 폭포가 장관으로 흐른다. 큰 것과 작은 것의 조화가 아름다운 한폭의 수채화다. 역시 풍경 좋은 곳에는 돈을 받고 사진을 찍으라는 토가족 아이가 진을 치고 앉아 있다. 다행히도 우리 문인들의 비디오 촬영을 담당한 가이드가 명소 곳곳마다 좋은 위치를 찾아 잘 찍어 주었다.
보봉호를 타고 건너온 토가족 전통춤 공연장.수필가인 남편 유기섭님
중한버스로 이동하여 장가계의 차 향기 그윽한 중국 전통 찻집에 들렀다. 골고루 여러 종류의 차를 마시고 점심식사를 하며 우리가 어제부터 지나온 명소를 촬영한 비디오를 관람했다. 다음 순서의 여행지 황룡동굴은 비디오 촬영이 불가능한 곳으로 이것으로 비디오는 끝이며 준비해둔 자료를 삽입해준다 했다. 바쁜 일정으로 다 보지 못하고 서둘러 점심식사를 마친 후 실크제품과 모래, 돌 그림이 전시된 장가계 견사 박물관을 견학했다. 누에고치에서부터 실크제품이 생산되기까지의 과장을 자세히 보고 그 옆의 공간에 전시된 동양화들을 감상했다. 모두 바위산에서 떨어진 돌과 모래만으로 그린 그림으로 대단하다. 이제 무릉도원의 마지막 코스 황룡동굴로 향했다. 생각보다 더운 날씨로, 그리고 걷는 길이 많아 지치고 힘들지만 중국의 시인 도연명이 살았다는 땅 유토피아에 대한 매력으로 발걸음이 가벼웠다.
평화로운 유토피아.보봉호에 승선하여 본 반 자연 반 인공의 거대한 보봉호수의 비경
*황룡동굴 점심 식사 후 2시에 황룡동굴에 들어가기 위해 버스에서 내려 들판을 걸었다. 농로 사이 좁다란 길로 한참을 걸어갔다. 계단을 올라 큰 산 동굴 입구에 서니 황룡동黃龍洞이라는 한자 글씨가 굴문 위에 새겨져 있다. 이때까지만 해도 황룡동굴의 장대함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곳에도 관광객의 줄은 장사진이다. 평일인데도 붐비는 행렬로 자칫 일행의 줄을 잃을 지경이다. 역시 한국인이 대부분이다. 이 동굴은 1983년에 민병이 발견하여 중국정부에 신고해서 3년간 개발공사를 거쳐 1986년부터 관광지로 공개된 동굴이다. 동굴 속에 2.5km 길이의 호수가 있어 유람선 보트를 타고 굴 깊숙히 들어간다. 배는 20명 정원이어서 우리 문인들 일행이 뭉쳐 있다가 배 하나에 다 탔다. 캄캄한 굴속에서 일행의 줄을 놓치면 찾기 어렵다는 안내원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동굴 속에 있는 호수 깊이가 7m-13m로 상당한 규모다. 배가 서로 교행할 만큼 넓이의 폭도 크다. 가파른 바위에 손을 다칠까 절대로 손을 배 밖으로 내밀지 말란다. 동굴 속의 호수라고는 믿기지 않는다. 호수에는 흰 새우와 발이 넷인 아기고기가 산다고 한다. 햇볕도 들지 않는 곳에서 실체의 생명이 산다는 것은 더욱 놀라운 일이다. 보트에서 내려 두 개의 문 앞에 이르렀다. 안내원은 행복문과 장수문 중 어느 문으로 들어가겠느냐고 묻는다. 절대로 만나지 못하니 한곳의 문만 선택하라는 것이다. 대부분은 행복문을 선택했고 더러는 장수문을 선택했다. 다수결로 행복문을 택하여 들어갔다. 자체 전력을 일으키는 관리실을 지어 놓고 직원이 상주한다. 사람이 다니는 길목과 석순 사이마다 환한 조명을 비춰 자연과 인공이 만나 이루는 환상의 향연이다. 석순은 아래에서 자라 올라가는 돌기둥이고, 종유석은 위에서 자라 내려오는 돌순인데 둘이 만나면 석주가 된다. 마른 것은 죽은 것이고 물기가 있는 것은 자라는 것이다. 산 것은 계속 자라고 죽은 것은 그대로 정지해 있거나 쓰러져 눕는다. 동굴 어둠 속에도 삶의 법칙은 엄연히 적용되고 있다. 더러 말라죽어 쓰러지거나 까칠하게 서 있는 것도 있고 촉촉하게 윤기가 흐르는 싱싱한 것도 서 있다. 살아있는 석순과 종유석은 목마르게 짝을 찾으려는 몸짓이다. 둘이 하나되면 위태로운 생의 선상에서 벗어나 하늘과 땅을 잇는 돌기둥이 되고 그때부터는 몸통을 키워 큰 석주로 서는 것이다. 그러나 100년에 1mm 밖에 자라지 못하는 돌순이 만난다는 것은 애련한 기다림이다. 동굴은 4층까지 총 오르내리는 계단이 2000개로 총 걷는 길이가 4km다. 한계단씩 오르며 신비로운 빛깔과 기묘한 모양의 석순과 종유석을 보았다. 신선이 농사 지으며 살았다는 천상의 논밭도 지나고 하늘에서 선녀처럼 내려오는 천선수天仙水의 폭포 물줄기도 보았다. 기이한 일은 물이 내리는 곳에 땅이 파이기는커녕 동글게 솟아오른다. 그것은 물속에 석회석이 많이 함유되어 퇴적되는 현상이라 한다. 바깥 세상에서 보던 것과는 판이하다. 석주의 이름도 다양하다. 독수리와 달팽이가 붙은 생의 줄다리기, 할아버지 마중, 눈에 젖은 설송, 원송이 복숭아 먹기, 드래곤 댄스홀 등 이루 헤이릴 수 없을만큼 홀로 또는 무리지어 있다. 작년 중국 상해 기행에서 가 본 항주의 영산 동굴도 웅장한 규모였고 제주도의 만장굴도 상당히 긴 굴인데 황룡동굴 앞에서는 그 어떤 동굴도 거론할 수 없다. 사람들이 왜냐고 물으면 '말로는 못 하겠소이다. 한번 가 보시면 압니다'라는 답변을 가슴에 새긴다. 사람들은 눈앞에 전개되는 사방의 우람한 벽과 돌순이 빛과 만나 이루는 신비로움에 시선이 고정되고 감탄의 환호성이 긴 호흡으로 날아간다. 미지의 세계로 꿈꾸듯이 내딛는 발걸음조차 무게를 가늠하지 못하고 신선인 듯 가벼움 속으로 난다. 안내원은 줄을 놓치지 말라고 당부한다. 2002년 7월에 동굴 3층에서 한국 관광객 한사람이 길을 잃는 사고가 있었다며 우리의 길목을 챙긴다. 동굴을 드나드는 문이 한곳이 아니고 굴 내부 공간의 규모가 엄청나게 커서 한번 대열에서 이탈하면 찾기 어렵다는 것이다. 드디어 4층, 동굴의 맨 꼭대기 층까지 다 올랐다. 최고의 높이라는 정해定海 석주가 19.2 m의 키로 위용을 떨치고 있다. 몸집이 여리고 가느다란데 살아 숨쉬는 생명으로 넘어지지 않고 첨탑을 쌓아가는 힘이 장엄한 개벽이다. 지하의 우주를 울리는 함성이다. 저 아래 펼쳐지는 돌순 무리의 거대한 잔치가 태고의 영혼을 흔들고 있다. 잠잠한 땅 아래 세계의 체험 속에서 신성한 미로를 유영한다. 해 밝은 세상에서 느끼지 못했던 하얀 진실을 만나고 투명한 두려움을 본다. 동굴 속의 공기가 나쁘다는데 더 영롱해지는 눈망울이다. 건너편 천장 밑에 신선이 거느렸다는 작은 여인들의 돌순이 옹기종기 모여 동그랗게 사랑을 엮는다. 다툼이 없는 평화로운 모습이다. 여기가 황룡동굴의 상부 한계선이다. 이제 내려가야 한다. 숨을 고르고 평정을 찾아 어두운 계단을 잘 걸어가야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길은 여러 갈래라 한다. 완만하게 오랜 시간이 걸리는 길과 가파르면서 빠른 길이 있다는데 험하지만 빠른 길을 택하여 내려왔다. 입구의 환한 빛이 보일 때 처음에 선택하여 들어온 행복문과 장수문이 나란히 붙어 있다. 알고보니 두문은 한곳에서 만나고 있었다. 아까 행복문으로 들어왔으니 요번에는 장수문으로 나가자며 안내원은 우리를 데리고 나란히 열려있는 장수문으로 나왔다. 안내원의 깜찍한 쇼에 우리는 한바탕 웃었다. 정확히 2시간 30분이 소요되었다. 현재시간 4시 30분, 동굴문 앞에서 단체 기념 사진을 찍고 들녘의 길을 거닐어 버스 주차장으로 발길을 옮겼다. 뒤돌아보니 아무렇지도 않은 산이 하나 우뚝 서 있다. 저 산 전체가 동굴인 것이다. 보이지만 않을 뿐 지하에서 지상으로 솟아오른 동굴이다. 그렇다면 우리 나라의 어느 산에도 저런 동굴이 있지 않을까, 저런 보물이 조국 땅 어딘가에도 숨겨져 있지 않을까라는 아련한 생각을 했다. 강석호 선생님은 버스 안에서 중대 발표를 했다. 우리가 걸어 오르내린 계단수가 총 1638개란다. 실제로 한 단계씩 오르내릴 때마다 세어 메모지에 적은 것을 다 합하여 더한 숫자다. 황룡동굴에 있는 계단의 총 갯수는 2천 개지만 우리가 밟은 것이 그렇다는 것이다. 오차범위는 +-5라 한다. 우리의 생애 중 과거와 미래를 합하여 단시간에 최고로 많이 밟은 계단수일 것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목청을 모았다. 장엄한 행군을 한 것을 자축하며 한식 식당에 와서 불고기 정식으로 푸짐한 만찬을 했다. 이것으로 장가계와 원가계 무릉도원 여행은 막을 내리고 아름다운 발자취가 새겨진 중국 호남성 땅과의 인연을 기억 속에 새긴다.
황룡동굴.벽면에는 옛문인들의 글.동굴호수에는 흰새우와 발 네개의 아기고기가 산다는데
중국 북경. 장가계 문학기행 수필(황룡동굴까지)-詩와 창작 2005년 5.6월호.다음호에 계속 연재 |
첫댓글 생생한 중국체험을 하고 갑니다.시인이신데 수필까지 소화해 내시는 문장력...대단하십니다...송화님! 다음호에 이어서 연재되는 글도 기대합니다
드넓은 중국 대륙의 많은 볼거리들이 파노라마처럼 눈 앞을 스쳐가는 것 같습니다. 좋은 글과 멋진 사진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