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들불야학과 항쟁기간 중의 투사회보
증언자: 나명관(남)
생년월일: 1962. 11. 27(당시 나이 20세)
직 업: 용접공(현재 운전기사)
조사일시: 1988. 12
개 요
이 글은 1980년 당시 들불야학 졸업생으로 투사회보 발간 및 궐기대회 등에 참여하며, 27일 YWCA에서 마지막까지 싸우다 구속된 나명관씨 증언이다. 그는 현재 신일교통에 근무하면서 한 노동자로서의 권리를 찾으려 노력하고 있다.
노동자의 삶을 시작하며
나는 지금도 살고 있는 광주시 농성2동에서 태어나 단 한번도 타지생활을 경험하지 않은 광주 본토박이다. 아버지는 농사꾼으로 빈농 중에서도 빈농이셨다. 내가 국민학교에 다닐 때만 하여도 거의 논이었던 농성동에서 10여 마지기의 논 농사를 지었다. 아버지는 그 후 서석고 근방의 논을 모두 팔고 아버지의 고향인 광산군 삼도면에 논을 몇 마지기 사셨다. 그때 농성동의 논을 팔지 않으셨으면 그 후 부동산 열기로 인해 하루아침에 아버지는 많은 돈을 벌고 동시에 힘없는 노동자 신분을 벗어났을 것이다. 내가 중학교 3학년 재학중이던 해에 두 살 위였던 누나의 병치료를 위해서 광산구 삼도면에 있던 논을 모두 팔았으나 결국 누나는 죽었다. 그래서 자급자족하던 식량마저 사먹는 입장이 되었다. 누나의 죽음과 경제적인 어려움 등으로 집안은 나날이 피폐되었다.
이렇게 어려운 상황에서 내가 중학교를 졸업할 즈음에 아버지는 나의 진로에 대하여, "너는 집안의 장남이니까 꼭 고등학교는 진학해야 한다. 어떻게든 보내주마."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집안에서 자라고 아버님이 연로하신 까닭으로 나이에 비해 일찍 세상에 대해 눈을 떴다고 생각된다. 나이는 어렸지만 날로 어려워지는 집안과 나이 어린 동생 네 명이 모두 학생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상급학교 진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부모님을 설득해서 중학교 졸업 후에 광주 직업훈련원 1기로 입학했다.
정규 훈련기간은 1년 6개월로 기숙사 생활을 하면서 용접을 배웠다. 직업훈련원의 생활이 6개월 정도 되었을 때 기술을 남들보다 빨리 익힌 편이었던 나는 '앞으로 남은 1년의 기술훈련은 필요가 없다. 나가서 돈이나 벌어야지' 하는 생각으로 직업훈련원을 그만두었다.
지금 생각하면 건방지고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물론 남은 1년의 기술훈련 기간을 착실히 생활했더라면 좋은 결과가 있었을 것이다. 6개월 정도의 짧은 기술훈련 기간을 마친 나는 '직업훈련원 출신이며 자격증도 여러 가지 가지고 있다'고 큰소리쳐서 아세아 납품업체였던 동신강건사에 들어갔다. 용접일을 했는데 농성동 집에서 출퇴근하면서 한 달 봉급 8만 원을 받았다. 당시 돈으로는 상당히 많은 액수였다. 막상 용접일을 해보니까 내가 배웠던 실력 정도로는 일을 잘 해낼 수가 없었다. 이론과 실기가 다르듯이 정말 힘들었다. 처음에는 큰소리를 쳤지만 기술이 서툴러서 날마다 여러 동료들의 따가운 눈총을 받았다. 한 달만에 그 회사를 그만두고 여기저기를 전전하고 다녔다. 그러다가 당시 K.M사에 근무하던 이종사촌 형들이, "야! 명관아, 다른 생각하지 말고 'K.M사'에 들어와라. 처음 견습공 때에는 5만 원 받지만 3개월 정도 지나면 15만 원 정도 받는다." 라고 말해서 솔깃했다. 나는 K.M사에 들어가 2개월 만에 10만 원을 받고 3개월 만에 14만원 정도를 받았다. 당시 광천공단 내에서 견습공 월급이 그 정도이면 최고 대우라고 할 수 있었다. 원래 성격이 무슨 일을 할 때에 옆사람이 어떻든지간에 열심히 해버리는 나에게 할당된 일의 양은 도급제였기 때문에 오전 10시에 끝내고 퇴근할 수 있었다. 보수도 만족할 만해서 회사생활을 더욱 성실하게 할 수 있었다. 회사 간부들도 나이 어린 내가 빠른 속도로 기술을 익히고 부지런히 일하니까 대견스러워했다. 내가 그처럼 성실하게 회사생활을 하고, 밑에 동생(용관)도 금성기계(주)에서 선반공으로 근무하자 피폐될대로 피폐되었던 집안 형편이 많이 좋아졌다. 50만 원 정도를 은행에 예금해 놓았고 사채도 20만 원 정도 빌려줄 정도였다.
1980년초까지 나와 내 동생이 우리 집안의 경제적 지주 역할을 하였다. 71세에 노환으로 고생하시던 아버지의 병간호와 집안일은 60세 되신 어머니가 하셨다. 나보다 4세 위인 누나는 출가하여 광천동에서 살았는데 워낙 가난한 노동자에게 시집을 가서 별로 좋은 형편이 아니었다. 금성기계에서 선반공 일을 하던 용관이는 18세였고, 지금의 동일실고 자리에 있었던 학산중학교에 재학중이던 용민이는 15세, 송원중학교에 재학중이던 용근이는 12세, 막내인 명화는 11세로 농성국민 학교에 다녔다. 나는 당시 꼭 스물이 된 나이였다. 호적상으로는 18세였지만, 실제로는 20세였던 것이다. 그때도 농성동에 살면서 광천공단에 있던 'K.M사'(말장 신구 제작해서 해외수출)에 계속 근무하고 있었다.
그 무렵 사회적 분위기는 박정권의 독재체제가 10.26사건으로 끝나고 대학내에는 시위가 계속되었다. 1980년 5월초에 회사에서 해고당했다. 당시에 나이는 어렸지만 들불야학에서 2년 동안 배운 것을 바탕으로 '노동자로서 살아야 될 일과 권리를 찾자'라는 생각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한없이 부족하지만 그때 생각에 '나도 이만큼 배웠으면 무슨 일을 해봐야 하지 않을까'라는 식이었던 것 같다. 광천공단 내의 노동자의 생활은 열악하기 짝이 없었다. 한 달 내내 뼈빠지는 작업과 숱한 잔업을 해도 1개월 월급이 12만 원에서 최고 15만 원 정도였을 뿐이다. 이러한 대우와 그외에 열악한 노동조건을 개선해야 한다고 요구하다가 회사관리를 구타한 일이 있었다. 그 일로 회사 동료이면서 1978년도 들불야학 1기로 같이 입학했던 신은주(예명, 병관)와 나는 하루아침에 요즈음 말로 '그만둠'을 당한 것이다.
들불야학에 입학하여
내가 5.18 광주민중항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하게 된 것은 '투사회보'라는 민중언론 담당이었던 유인물제작 작업이었다. 나에게 참여 동기를 부여해 주고 노동 현장에서 깨어 있는 노동자로 만들어준 단체가 노동야학으로서는 처음 생긴 광천동 '들불야학'이었다. 들불야학 동료 중에서 5.18 광주민중항쟁에 같이 참여했던 김성섭, 신은주와 나는 1978년 7월에 1기로 같이 입학했다. 1979년까지는 많은 강학과 학생이 있었으나 10.26 이후 야학 탄압이 계속되면서 점차 그 수가 줄어 들었다. 1980년 2월에 1기생이 졸업할 때 보니 4기생까지 합쳐도 고작 30명 정도 밖에 안 되었다. 남녀 학생 비율도 처음에는 4대 6으로 시작했으나 나중에는 6대 4로 바뀌어졌다. 10.26사건 이후의 야학 탄압은 수업을 정상적으로 하지 못할 정도로 심했다. 학교에서 이른바 '운동권'이라고 낙인찍힌 강학들의 부모에게 별의 별 협박을 하여 강학들을 집에 감금시키게 만들었다. 일부 자취하는 강학이나, '운동권' 명단에서 제외된 강학들이 야학을 꾸려가려고 몸부림쳤으나 정상적인 야학 운영을 하기에는 미력했다. 등사기로 일반 학생들의 교재와는 다른 교재를 만들어 공부했고, 처음에는 광천동 천주교회에 방 1칸을 빌려 사용했다. 학생수가 점차 늘어나자 강학들이 자체기금을 만들어 광천동 시민아파트 다동 5층에 방 2칸을 얻어 이사했다. 그때 단순한 생각에 '돈이 많으니까 얻었겠지'라고 생각 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강학들이 아르바이트를 해서 만든 자금이었다.
신은주와 나는 '해직'을 당하고 할 일이 없었다. 그래서 강학들이, "할일 없는 사람은 학교에 와서 집회도 구경하고 같이 동참하자."는 권유도 있었고 심심해서 가두진출이 시작된 5월 14일 12시쯤에 전남대로 갔다.
집회를 마치고 오후 1시경에 가두진출을 하는 학생들과 동참했다. 정문으로 나가자 전투경찰들이 일차 저지하더니 잠시 후 길을 비켜주었다. 상당한 투석전이 있을 줄 알고 나는 단단히 무장을 했다. 학생시위 수효는 1500명 정도였는데 세 갈래로 갈라져 가두진출을 했다. 내가 있던 시위집단은 광주역을 거쳐서 시청을 지나 법원 앞에 갔다. 법원 앞에서 연좌농성을 지켜보다가 당시 4기 강학이었던 강분희(지금 여고 선생님)를 만나 일상적인 몇 마디 이야기를 했다. 그러다가, "가자. 우리는 학생도 아닌데 여기 따라다니면 뭐하냐.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따로 있겠지. 다리도 아프고 죽겠다." 라고 하면서 신은주에게 동의를 구하자, "맞다. 학생도 아닌 우리가 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라고 말했다. 신은주는 발산(양3동)에 있는 집으로 가고, 나는 광천시장 뒤쪽에서 자취하던 윤상원 형의 집에 갔다. 하는 일이 없는 사람들은 거의 매일 그 방을 우리들의 방처럼 사용했다. 저녁에는 막걸리를 사다가 강학들과 야학 후배들과 마시기도 했다. 그날 저녁에도 막걸리 잔치를 벌였다.
5월 15일에 나는 유인물이 학생들에 의해서만 제작될 뿐 특별히 노동단체나 노동자가 제작하는 유인물이 없었던 것을 생각했다. 아침 일찍 상원 형 방에서 이미 배포되었던 학생들 유인물을 참고로 16절지 크기의 제목도 없는 유인물 한 장을 만들었다. '학생뿐만 아니라 우리 노동자도 정확한 현실 인식이 필요하며, 노동자의 입장을 글로 피력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나는 본문 내용을 현정국에 대하여 설명하고 '전두환이 박정희의 양아들이다'라는 당시에 떠돌던 말을 기술하였다. 또한 '유신독재 잔당들이 다시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의 대를 잇겠다는 현시점에서 이 중요한 문제를 학생들에게만 맡길 것이 아니라 우리 노동자들도 모두 하나가 되어 나아가야 되지 않겠느냐!'라는 등의 주장을 썼다.
정재호 강학에게 필경을 부탁해서 상원이 형 방에 있던 등사기로 2백장 정도 등사를 했다. 때마침 점심시간이 되어 광천공단을 돌아다니면서 1백장 정도를 배포하였다. 유인물 배포하는 일이 위험해서 상당히 겁이 났다. 야학을 같이 졸업 했던 조순임이 노조 조직이 잘되어 있던 '대한콘덴사'에 근무했는데 밖에 나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것을 보고 50장 정도를 왕창 던져놓고 도망쳤다. 여러 회사 앞을 돌아다니면서 10여 매씩 몰래 던져넣은 것으로 무사히 배포를 마쳤다. 다리는 후들후들 떨리고 심장이 사정없이 뛰었다.
5월 16일 강학들과 특별히 약속된 것은 아니었지만 5월 16일 도청 앞 횃불대행진에 참가했다.
5월 18일 일요일은 강학, 야학 학생, 광천동에 거주하는 청년 등 20여 명이 효광여중 운동장에 축구와 야구시합을 하고 오후 야학교실에 있던 광천동 시민아파트에 가니까 강학들이 시내상황을 설명하면서 모든 학생들을 귀가토록 했다. 집에 귀가한 나를 아버지는 감금시켰다.
5월 19일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던 나는 오후에 동생 용관이와 몰래 집을 빠져 나왔다. 광주역까지 간 우리는 시민과 학생이 섞인 5백여 명의 시위대에 끼여 전남대 입구 사거리로 몰려나갔다. 인도에는 구경 나온 시민들도 많았다. 굴다리 부근에서 계엄군과 시위대 사이에 격렬한 투석전이 벌어졌다. 그러나 열세에 몰린 시위군중이, "계엄군이 온다." 하면서 골목으로 도망치기 시작했다. 계엄군은 미처 도망가지 못한 사람들을 잡아 곤봉과 개머리판으로 인정사정 없이 구타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계속 쫓아갔다. 사람들은 몇 대씩 얻어맞은 즉시 그자리에서 푹 고꾸라졌다. 그 사람들을 무참히 밟고 쫓아오는 계엄군을 보면서 표현할 수 없는 공포감을 느꼈다. 전날 계엄 군이 학생들을 무조건 잡아다 죽인다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 같은 민족인데 사람을 죽이기까지 할라디야' 했다. 그러나 눈앞에서 그 잔인한 현장을 확인한 것이다. 다행히 동생과 나는 무사히 귀가했다.
투사회보 제작에 들어가
5월 21일부터 광천동 시민아파트 앞에 있던 4기 교실(현재 점포)에서 들불야학 강학이었던 윤상원 형을 중심으로 투사회보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5월 27일까지 투사회보의 초안 작성, 등사, 배포작업까지 야학의 졸업생, 학생, 강학들이 도맡아서 했다. 강학이던 서대석과 한 조로 묶여 구역과 소방서 쪽 배포를 담당했다.
원래 담력이 약한데다가 19일 계엄군의 잔학성을 목격한 나로서는 무척 힘든 작업이었다. 나는 격렬한 상황이 전개되는 곳보다는 주택가나 사람들이 모이지 않는 곳, 또는 무서워서 시위에 참여하지는 못하고 구경만 하고 있는 사람이 있는 곳에 주로 배포했다. 투사회보의 내용 자체가 그런 사람들에게 광주시내에 어떤 상황 등이 어떻게 전개되고 있는가를 알리는 것이 첫째였기 때문이었다. 솔직히 말해서 내가 배포하는 유인물 내용이 사실인가 아닌가 직접적으로 확인하기는 어 려웠다.
그날 투사회보 배포를 끝내고 집에 들어갔다가 22일까지 꼼짝없이 붙잡혀 있었다. 부모님은 동생 용관이와 내가 야학에 다닌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야학에서 있었던 일을 집에서 이야기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부모님은 '야학'하면 경 찰들이 와서 수색한다는 인식이 박혀 있었다. 그런데다 시내에서 군인들이 젊은 사람들을 보기만 하면 잡아가고, 두들겨패고, 죽인다는 소문을 듣고는 우리를 단속하신 것이었다.
5월 22일은 하루 종일 집에서 꼼짝도 못 하고 있다가 23일에야 집에서 해방이 되었다. 나이는 나보다 2세 더 어렸지만 야학을 같이 졸업해서 생각하는 수준이 비슷했던 용관이는 회사가 휴업상태여서 같이 집에서 나왔다. 먼저 금남로로 가 보았다. 그 곳에는 처참하게 죽은 사망자들을 차에 싣고 다니면서, "군인들이 이처럼 잔인하게 우리 형제들을 죽였다." 라고 계엄군의 만행을 알리는 차량 방송의 사실을 확인하러 나온 시민들로 가득했다. 백운동 외곽도로로 나가니까 시위차량이 많이 있었다. 타고 싶다는 생각에 경찰 순찰차가 오자 손을 들어, "좀 타도 돼요." 하니까 차 덮개 위에 태워주었다. 차 안에 4명이 타고 우리 형제는 차 위에 타고 갔다. 월산동 로터리에 도착했을 때 시민들이 김밥, 요구르트, 우유, 빵 등을 많이 올려주었다. 오전 11시쯤 금남로를 지나 산수동 오거리에서 산장 쪽으로 막 올라갈 때였다. 한 할머니가 주먹밥과 찐계란을 가지고 나오셔서, "이보시오 젊은 양반들! 나쁜 놈들이 우리 손자를 죽였단 말이오. 제발 우리 손자 원수를 좀 갚아주시오." 하며 슬피 우셨다. 지금 우리 동생에게 물어보아도 마찬가지이지만 그때 그 할머 니의 모습은 죽는 날까지도 잊어버리지 못할 것이다. 차에 있던 사람들과 우리 형제는 목이 메어서 할머니가 가져온 것을 차마 먹지 못했다.
차가 광천동 공단 입구에 다다랐을 때, "우리, 야학에 가보자. 분명히 강학이나 야학 동료들이 있을 것이다." 라는 생각에 용관이와 나는 광천동 시민아파트로 갔다. 마침 야학 사람들이 유인 물 등사를 하고 있었다. 제작된 투사회보를 나누어 각자 시위차량에 올라타고 시내 모든 곳에 배포했다.
투사회보 제작 장소가 YWCA로 옮겨지기 전인 24일 오전 김상윤이 경영하는 녹두서점에서 회의가 있었다. 전남대 유인물 제작팀이던 '대학의 소리', 박효선씨가 중심이 되었던 문화팀 '광대', 윤상원 형이 중심이 되었던 우리 '들불야학' 팀들 대표 몇 명이 모여서 '유인물을 하나로 통일하자'고 결의를 하고 편집방향과 작업 분담에 대해서 논의했다.
그날 오후 2시경에 도청 앞 광장에서 있었던 '제 2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에서는 시민, 학생, 재야단체 대표, 노동자들이 나와 계엄당국과 무조건적 타협을 시도하면서 어영부영하는 수습대책위원회의 미온적 태도에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 5명의 지정된 연사 외에도 시민들도 연단에 올라가 연설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어떤 아주머니가 울부짖듯이 연설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그날 나와 같이 참가했던 사람들은 광대패 단원이던 이현주, 태종, 인선, 효석 등이었고 우리 강학들 대부분이 참여했다. 대회 도중에 비가 왔으나 연설은 계속 되었고 마지막에 '전두환 화형식'이 거행되었다. 허수아비에 내가 불을 붙였다.
궐기대회를 마치고 YWCA에 와서 보니까 그날 제작할 투사회보 갱지가 부족하다고 난리들이었다. 물품 보급조였던 나와 김경국은 광주일고 정문 쪽 인쇄소 세 곳에서 우리가 다 가져오지 못할 정도의 많은 갱지를 구하였다. 돈이 없어 후불로 주기로 했지만 인쇄소 주인들도, "투사회보를 만든다."고 하자 순순히 내준 것이었다. 그 뒤부터는 날마다 궐기대회가 끝나면 갱지를 구하러 다니기도 하고 밤을 새워 투사회보 제작을 하는 것이 나의 의무였다. 때로는 너무나 힘들어 동료들에게 떠맡기기도 했다. 윤상원 형이 써준 대자보 초안을 갱지에 여러 장을 베껴서 고등학생이던 김효석과 한 조가 되어 곳곳에 붙이는 확실한 노동자 역할을 하기도 했다.
5월 25일에 독침사건이 있었고, '제3차 민주수호 범시민 궐기대회'가 열렸다.
그날 궐기대회는 '대학의 소리' 팀과 '들불야학' 강학들이 주관하였는데 각계 대표들이 나와서 열변을 토했다. 그때 노동자 대표로 내가 추천되어 '왜 우리 노동자들도 총을 들어야 했는가' 라는 원고 내용을 읽었다. 5.18 광주민중항쟁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노동자들의 결의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이었다. 도청 앞 광장이 사람들로 꽉찬 모습을 보면서 난생 처음으로 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해야 하는 나는 내 차례가 가까워올수록 속이 답답했다. 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를 정도로 연설을 끝냈다. 지금 그때처럼 다시 나서야 한다면 자신이 없지만 내가 생각해도 '조그마한 녀석이 참 용하다' 싶었다. 그날 궐기대회가 끝나고 계엄군의 진압작전이 시작됐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나 하나만 희생되면 된다. 장남이 없으면 차남이라도 장남 노릇을 해야 하니까 너는 참고 집에 가 있어라." 나는 동생을 집에 보냈다. 그래서 부모님은 내가 YWCA에 있다는 것을 알고 계셨다.
5월 26일에는 옷도 갈아입고 또 계엄군 진압작전 소식을 듣고 마지막으로 부모님 얼굴이라고 뵐 생각에 오후 5시쯤 농성동 집에 갔다. 며칠째 잠도 자지 못한 나의 모습은 산적 두목 같았다. 옷은 잉크로 범벅이 되었고 면도를 하지 못해서 수염은 많이 자라 있었다. 어머니는 안 계시고 아버지만 몸이 편찮으신 상태라고 누워 계셨다.
"널 찾으려고 YWCA에 갔는데 너하고 엇갈렸나 보구나." 속옷만 갈아입고 나서 아버지께 큰절을 드리고 나오려는데 아버지께서 눈물을 흘리시면서 "명관아! 어디를 가는 것이냐. 가지 말거라." 하시며 나를 붙잡았다. "엄마 찾아서 금방 올께요." 라고 거짓말을 하며 집을 나섰다. 5월 27일 잡혀가서 죽었다면 그날 아버지께 드린 인사가 마지막이 될 뻔했다. YWCA에 도착하니까 야학 동료가, "명관아, 어머니가 너 만나려고 오셔서 한참 기다리시다가 방금 집으로 들어가 셨다." 라고 전해 주었다. 날도 어두워지고 통행금지 때문에 집에 다시 갈 수는 없었다.
그 시간부터 다음날 오전 9시까지는 공포의 순간이자 한 번 죽었다고 생각되는 시간이라서 그런지 8년이 지난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최후의 만찬
우리는 투사회보를 제작하는 동안 식사를 제대로 하지 못한 상태에서 정 배가 고프면 주먹밥을 만들어 먹곤 하였다. 그러나 너무 긴박한 상황이라 밥을 먹어도 먹지 않은 것 같은 느낌이었다. 때로는 도청에서 식사를 보내주기도 했다.
5월 26일 저녁에는 도청에서 '최후의 만찬'이라는 명목으로 제과점 빵과 음료수 등을 보내왔다. 저녁식사를 그것으로 때우고 투사회보 11호 제작을 시작했다.
새벽 1시쯤 '계엄군이 들어왔다'는 급한 연락을 받고 여자들부터 피신시켜야 한다는 논란이 있었다. 여자들에게 신경을 쓰지 못할 형편이었던 우리들은 투사회보 제작을 중단하고 서한성, 박용준과 어떻게 대처할 것인가를 논의했다. 옷에 잉크가 묻어 시컴시컴한 우리들은, "우리들도 총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총을 들자. 죽기로 싸우자." 라고 결의했다. 그 후로부터 불과 몇 시간 동안에 몇십 년만큼의 경험을 하였고 그때 마지막으로 보았던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10명 정도의 우리 동료들을 박용준이 인솔하여 고개를 숙이고 일렬종대로 도청에 갔다. 실지로는 짧은 거리이지 만 총소리가 심하게 들려오고 칠흙같은 밤거리였기 때문에 멀게만 느껴졌다. 죽음이 무서웠던 우리들은 말이 없이 기어가다시피 하였다.
도청에 도착하니까 윤상원 형이 무기를 나누어주고 있었다. 우리를 본 윤상원 형이 깜짝 놀랐다. 우리들은 나이가 어려서 군대를 가지 않았던 상태였다. 제일 큰 형님이 어린 동생들에게 말하듯이 윤상원 형이, "너희들 총을 사용할 수 있어?" 하면서 여러 번 확인하더니 걱정스럽고 불안스러운 듯이, "이놈들은 안 되는데." 하고 혼자 중얼거렸다. 들불야학에 이름 끝자가 '관'이던 학생이 3명이 있었는데 'Three 관'이라고 불렀다. 야학의 명물이었던 'Three 관' 중 특히 나는 성격이 명랑한 편이어서 '명관'이 하면 말썽꾸러기이고 시끄럽게 악 잘쓰는 아이, 싸움대장으로 유명하였다. 그런 성격이었던 나는 윤상원 형을 만나니 반가운 마음에 장난을 쳤다. 웃으면서, "괜찮아요. 형님, 내가 얼마나 총을 잘 쏜다고요." 하는 내 말에 윤상원 형은 웃으면서도 쉽게 총을 건네주지 못하였다. '어린것들 총을 주었다가 죽으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근심스런 표정을 지으며, "조심해라." 하고 마지막 말을 하면서 총을 주었다.
다시 YWCA로 온 우리들은 서한성에게서 총기 조작법을 배운 후에 각자 배치명령을 받았다. 김성섭, 신은주, 박용준, 강학들은 2층에 배치되고 나와 윤순호는 1층 소심당에 배치되었다. 상당히 안전한 장소에 배치된 우리가 숨소리를 죽이고 있을 때 엄청난 총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창가에서 2층을 올려다보니 김성섭이 있는 곳에 총알이 오가고 있었다. 나는 2층이 모두 점령된 것으로 알았다. 나와 윤순호가 배치된 1층 소심당의 맞은편은 관사였는데 관사 지붕 위에서 보면 우리의 행동을 모두 내려다볼 수 있었다. 우리의 목숨이 아직까지도 살아 있는 것은 한 사람의 기지에 의한 것인데 교전이 계속되고 있을 때 서한성이 와서, "야! 이놈들아, 이러고 있으면 너희들 죽겠다." 라고 하면서 연설할 때에 쓰는 탁자를 끄집어다가 막아주었다. 윤순호와 내가 탁 자를 배경으로 경계를 한참 서고 있을 때 길에 계엄군 1명이 지나갔다. 순간 나는, "형님, 군인이오." 라고 말했을 뿐 사격을 하지는 못했다. 우리가 있던 창가에 기대어 앞쪽만 보면서 가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와는 1미터 정도도 되지 않는 가까운 거리였다. 2층 에서는 교전이 계속되고 있었다.
어느 정도의 시간이 지나자 날이 어슴푸레하게 밝아왔다. 그때까지 우리는 2층의 상황은 전혀 알 수 없었는데 후에 알고 보니 2층이 점령되어 모두 잡혀간 시간이었다. 그런 것도 모르고 우리는 소심당 안쪽 2층 입구 쪽에서 경계를 서고 있었는데, "손 들고 나와라." 하는 소리를 여러 번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날이 밝아오자 미처 철수하지 못한 계엄군을 시민군이 포위해서 나오라고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윤순호에게, "형님 저것들 오늘 죽어버렸네." 하고 좋아했다.
"내버려두어라. 개새끼들."
둘이서 이처럼 잘됐다는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어쩐지 말소리가 이상하다고 느낀 내가 탁자 사이로 밖의 상황을 살펴보았다. 순간 맞은편 관사 지붕에서 계엄군이 2층을 향하여 무차별 난사를 하는 것이 보였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눈앞이 깜깜해져 버렸다. 우리가 경계를 서고 있는 자리는 탁자로 가리워진 상태이고 단 한 번도 총알이 날아들지 않았다. 우리의 존재조차도 우리 스스로 잊어버릴 정도로 아무 일이 없었다. 사격이라고는 총을 받아가지고 연습으로 공중에다 가 두 번 쏘아본 것밖에 없었다. 윤순호는 굳어진 채로 목각인형처럼 서 있고 내가 총을 메고 바닥으로 기어서 YWCA 1층 정문 쪽으로 가서 밖의 상황을 살피려고 고개를 내미는 순간 얼룩무늬가 바로 앞에 보였다. 그 앞에는 2층에서 잡혀온 동료들이 굴비 엮듯이 엮어진 상태로 사정없이 구타당하고 있었다.
그런 광경을 본 나는 다시 와서, "형님, 모두 잡혀 있소. 아무래도 우리는 포위된 것 같구만요. 이젠 어떻게 해야 돼죠." 라고 말하자 윤순호 형은 입술이 파랗게 변하면서 사시나무 떨듯이 떨기 시작했다. 물론 나도 마찬가지였다. 며칠째 잠을 한숨도 자지 못하고 긴장한 상태인데다 확실한 상황을 알고 나자 우리들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부들부들 떨고만 있다가 윤순호 형이, "우리 저 창고로 들어가서 숨어 있자." 라고 제의했는데 우리가 있던 곳에서부터는 5미터 정도의 거리였다. 어떻게 갔는지 모르게 창고 앞에 가서 윤순호 형이 창고 문을 여는 동안에 창문으로 밖의 상황을 한번 더 살펴보았다. 조금 전의 상황과 마찬가지였다. 소심당 안에 있던 창고는 작은 방으로 양쪽에 대형 유리창이 있었고 트로피, 진열장 등이 보관되어 있었다. 창고 안에 들어가 있는데 미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담배를 피우면 금방 잡힐 가능성이 있으므로 절대 피워서는 안 되었는데도 담배를 피웠다.
긴박한 상황이 되자 극도의 공포가 밀려와서 입이 담배를 쫓아갈 정도였다. 창고 문의 문고리가 두 개 있었는데 너무 급해서 하나만 잠그고 나는 숨을 자리부터 찾았다. 나보다 두 살 위였던 윤순호 형이 침착하게, "임마 저 위에도 잠가야지." 하면서 문을 잠갔다. 문을 잠그고 윤순호가 한쪽 구석에 이동식 흑판으로 몸을 가리고 있었고 그 맞은편에 나는 숨소리를 죽이고 차드용 켄트지로 덮고 있었다.
덜덜 떨고 있을 때 윤순호가 있는 쪽 유리창이 쨍그랑 깨졌다. 하마터면 윤순호 형은 기절할 뻔한 상황이었다. 잠시 조용하더니 반대편 유리창이 있는 곳으로 돌아오는 발소리가 들려왔다. '내쪽 유리창을 깬다면 나는 죽었구나' 하는 순간적인 생각 때문에 기역자형으로 배치된 장식장 쪽으로 몸을 숨겼다. 어두컴컴한 상태에서 한 자리에 숨어 있으면 더 좋을텐데 계속 왔다갔다하고 나서는 꼭 미쳐버릴 것 같았다. 계엄군은 이쪽 유리창을 깨고 들여다보고 저쪽 유리창을 깨고 들여다보고 하더니 잠시 조용했다.
"어, 문이 잠겨 있네."
"부숴. 부숴."
하는 말소리와 문을 발로 심하게 차는 소리가 들렸다. 윤순호 형은 안쪽에 있고 나는 바로 문을 등지고 있었다. '아이고메 엄니, 나 좀 살려주시오'라고 맘속으로 빌었으나 도망갈 곳은 없었다. 나는 얼른 윤순호 형이 숨어 있는 곳으로 다가가 숨어 있었는데 윤순호가 있던 자리는 안전한 곳이었다. 물론 군인들이 문을 뜯고 들어와서 흑판을 뒤집어본다면 잡힐 것은 뻔한 일이지만 우선 노출은 안 될 자리였다. 창고 문을 한참 부수더니 열리지 않자 그냥 가버렸다. 군인들이 일찍 문을 열었더라면 기왕에 잡히는 것 그때 일찍 잡혔을 텐데. 나는 도저히 안 될 것 같은 생각에 다시 장식장 위에 올라가서 차드용 켄트지로 덮고 있었다.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있을 때 윤순호 형이 아주 작고 불안한 목소리로, "야! 명관아 내려와. 안 되겠다 자수하자." 하고 완전히 포기했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도 안 되겠다고 결론을 내리고, "그럽시다." 하면서 조심스럽게 내려왔다. 창고문을 살며시 열고서 가만가만 걸어 나갔다. 먼저 걸어나온 나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한 뒤, "형님, 아무도 없소." 라고 말하니 윤순호의 표정이 확 달라졌다. 이심전심으로 나도 그 표정이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를 알 수 있었다. 막상 자수를 하기 위해 나왔지만 아무도 없다는 것을 확인했으므로 도망갈 수 있다는 희망이 느껴졌던 것이다.
그때 2층에서 '우당탕 쿵쾅' 하는 군화발 소리가 들려왔다. 어쩔 수가 없었다. 둘이서 약속이나 했다는 듯이, "자수합니다. 자수합니다." 라고 악을 썼더니 7, 8명의 군인이 총부리를 들이대면서 다가왔다. 손을 뒤로 하여 전기줄을 사용해서 묶더니, "이 새끼들, 대가리 땅에 처박아!" 하면서 개머리판으로 가슴과 등을 사정없이 내리치고 군화발로 마구 찼다. 잠시 후에 또 한 명이 잡혀 나왔는데 YWCA에서 우리와 같이 일을 했던 사람이 아니었으므로 그 사람이 누구인지는 잘 몰랐다. 추측건대 아마 일반 시민군이 YWCA로 파견되었다가 잡힌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잡혀온 한 사람과 우리가 구타당하고 있을때 군인 대위가 오더니, "이 새끼들아 수색을 어떻게 했는데 아직까지도 이런 놈들이 나오는가!" 하면서 군인들을 구타했다. 그 분풀이를 우리들에게도 했는데 서너 대 맞고 나니 아프다는 감각이 없어져버릴 정도였다. 심하게 맞고 나자 건물이 흔들려 보였으며 정신병자처럼 사물을 도저히 분간할 수가 없었다. 묶여서 고개를 숙이고 나오다가 정문 앞에 던져놓은 시신 한 구를 보았다. 총에 맞은 것 같은 시신은 엎어져 있는 상태였는데 이제 와서 생각해 보니 박용준 형인 것 같다. 그 시간까지 우리는 박용준이 죽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우리가 잡힌 시간은 5월 27일 오전 9시경이었다. 총소리가 가끔씩 들려오고 헬기에서는 계속해서, "폭도들은 자수해라."고 권유를 하고 있었다. 그때의 시간은 나에게 시계가 있어서 알 수 있었다.
묶여서 도청으로 이송된 우리들에게, "엎드려 고개 숙여." 하고 명령하더니 우리 등에 올라서서 짓밟기 시작했다. 날이 밝아진 뒤에 많은 외신기자들이 몰려들자 더 이상 구타하지는 않았다.
버스에 실려서 한참 가고 있을 때 갑자기 몸이 오른쪽으로 팍 쏠렸다. 나는 그 순간 '상무대로 가고 있구나'라고 느꼈다. 아니나 다를까 우리가 도착한 곳은 정확히 상무대였다. 광주에서 출생하여 자란 이유로 웬만한 지리는 다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나의 예감이 맞았던 것이다. 차에서 내리니까 먼저 잡혀온 사람들이 굴비 엮듯이 엮어져 수두룩하니 앉아 있었다. 한참 있으니, "너 나와." 하고 나를 지명하였다. 워낙 긴 시간 동안 손이 묶인 채 머리를 땅바닥에 처박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어서 일어서는 순간 어지러웠다. 발목에 피가 통하지 않아 걸음을 제대로 걷지 못하자, "이 새끼야, 왜 비틀거리는 거야, 고개는 왜 쳐들어!" 하면서 나를 구타했다. 책상까지는 얼마 되지 않는 짧은 거리였지만 걸어가기가 너무나 힘들었다. 묶여 있는 상태인 나에게, "네 이름과 생년월일, 집주소를 대라." 하고 말하더니 자기들이 직접 기재하였다. 나는 그들의 물음에 하나하나 대답하는 동안 '내가 지금 땅을 밟고 서있는가 아니면 구름을 딛고 서 있는가' 하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발은 아무런 감각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질문 중에 비틀거렸다고 또 한 번 구타당했는데 숨이 가빠오르는 것만을 느낄뿐 감각이 없었다.
조사가 끝나고 무릎을 꿇은 채로 하루를 지냈는데 그 전날 '최후의 만찬' 때 먹은 빵 한 조각을 마지막으로 식사를 못한 상태였다. 그렇지만 배고픈 줄도 몰랐다. 그날 오후 늦은 시간에 영창 안으로 들어가면서 지금도 기억할 수 있는 형무반장 박춘배한테 5파운드 정도의 곡괭이로 무조건 5대씩 맞았다. 식사도 못 한 상태이고 저녁 늦은 시간이어서 선선한 바람이 불어오자 맞은 부위가 너무나 아팠다. 우리들이 저희 부모 죽인 원수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상부지시에 따라 움직였겠지만 너무나 가혹했다. 그래도 약간의 인정(?)은 있는 것 같았다. 몸집이 큰 사람은 세게 때리고 나처럼 왜소한 사람들은 그래도 덜 때렸다. 그날 밤은 무릎을 꿇고 정좌한 채로 밤을 새웠다.
어머니는 아들을 찾아 다니고
5월 28일 오전 9시에 아침식사를 주었다. 보리쌀만 삶은 밥에 된장국인지 어떤 국인지를 위에 부은 식판을 주었는데 두어 번 떠먹고 나니까 없어져버렸다.
5월 31일이 되자 집에 편지를 쓰라고 하면서 양면지 1장과 몽당연필을 나누어 주었다. 후에 알게 된 사실인데 내가 5월 26일 집에 다녀온 후로 아무런 소식이 없자 어머니는 매형과 함께 망월동과 각 병원 시체실을 돌아다니면서 나를 찾았다고 한다. 원래 성품이 괄괄하셔서 동네에서도 유명한 어머니는 좋으실 때는 한없이 좋다가도 일단 화가 나시면 아무리 달래도 꼼짝도 하지 않으신다. 이런 어머니가 목소리 또한 크셔서 망월동산 전체가 시끄러울 정도로 우셨다고 한다. 지 금도 그때 이야기를 하실 때면 어머니는, "치가 떨린다."고 말씀하신다.
나하고 어릴 때부터 같은 동네에 살았던 '명진'이라는 죽마고우가 있는데 그 친구도 5.18 광주민중항쟁 때 기동타격대원으로 활동하다가 연행되었다. 지금은 아무런 단체에도 가입하지 않고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불도저 운전기사로 일하고 있다. 현재 유동 쪽에서 식당을 경영하시는 명진이의 어머니가 당시에는 YWCA 앞에서 식당을 하셨다. 그런데 같은 지역이었지만 명진이 집에 먼저 연락이 닿았던지 명진이 어머님이 우리 집에 오셔서, "명관이 엄마! 우리 명진이는 이렇게 살아 있다고 연락이 왔는디 명관이 한테서는 연락이 없소?" 하시더란다. "아무래도 우리 명관이는 죽어버렸는갑소. 시신도 찾을 수가 없으니. 명진이 어머니! 우리 명관이가 죽었으면 어째야 쓰것소." 하면서 어머니는 기어이 대성통곡하고 말았다고 한다. 그때 우체부가 오더니, "나명관이가 누구요?" 하면서 편지 한 통을 내밀었다. 어머님이 깜짝 놀라서 편지를 보니 내 글씨가 정확하더라는 것이다. 집에서는 그제야 내가 살아 있다는 것을 지면상으로라도 확인한 셈이었다.
며칠 후부터는 각 사회단체에서 보내온(당시에는 누가 보내온 것인지 몰랐다) 영일식품에서 생산된 무등산 빵을 간식으로 하나씩 나누어 주었다. 물론 처음보다는 식사량이 많아졌지만 굶주린 배를 채우기에는 너무나 작은 량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날마다 간식이 배급되자 모두 좋아했다. 영창 안에 있던 모든 사람들은 투쟁, 평화, 민주 이런 것들의 개념을 모두 잊어버렸고 '내가 무엇을 했는가'조차도 까맣게 잊어버린 상태였다. 인간적인 욕구보다는 오로지 먹을 것만을 생각 하는 동물적 욕구에 가득 차 있었다. 상무대 영창은 1호 방부터 7호까지 있었는데 나는 윤순호와 5호 방에서 2개월 정도 있었다. 1달 반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들불야학 동료인 신은주가 K.M사에 다시 들어가 일을 하다가 잡혀 들어왔다.
오리발을 내밀었으나
나는 1차 훈방으로 풀릴 것이라고 믿고 있었던 상태라서 여러 번 불려가 조사 받는 과정 중에서도,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소. 엄마가 완전히 집에 가둬놓고 못나가게 해서 집에만 있다가 26일날 저녁에 딱 한번 밖에 나왔다가 일이 이렇게 되어버렸소." 라는 말만 되풀이했다. 5월 28일날 새벽에 부채꼴 모양의 영창 각이 진 구석에 있던 화장실에서 바로 옆방에 있었던 김영철씨가 벽에 머리를 부딪혀 자살을 시도했다. 그날 김영철씨가 통합병원으로 옮겨진 뒤부터 나는 투사회보에 관해서는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후에 김영철씨가 병원에서 정상을 되찾게 되자 들불야학과 투사회보에 관련된 조사가 시작되었다. 하필 재수없이 제일 먼저 불려간 것이 바로 나였다. '내일이나 모레면 나갈 것이다'라고 생각했던 나는 무조건 오리발만 내 밀다가 죽도록 매만 맞았다. 발바닥도 매맞아 퉁퉁 부어올랐다. 계속 모른다고 하자 배가 띵띵 부를 만큼 물을 먹였다. 더 이상 버틸 여력이 없었다. 항복한 나는 기왕에 말할 것 다 말한다고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말해 버렸다. 꼬박 이틀에 걸쳐 조사를 받았는데 조사된 원고분량만도 1백 페이지 정도였다.
뺄 사람은 모두 빼고 이야기했는데 무심코 '신은주' 이름을 말해 버렸다. 그래서 당시 'K.M사'에 다시 입사해서 일하고 있던 신은주가 잡혀 들어왔다. 다른 야학 여학생들과 강학의 이름도 말했으나 군인들은 더 이상 잡아들이지는 않았다.
나와 같이 있지 않던 김성섭이 두번째 조사대상이 되어 불려갔는데 내가 조사받았던 내용을 모르고 계속 오리발만 내밀다가 죽도록 매만 맞고 돌아왔다. 나와 같이 있던 윤순호 형은 불려가기 전에 어느 정도의 경위에 대하여 알고 갔으나 내가 자백한 이야기가 사실인지 아닌지를 알기 위한 수사관의 유도심문에 걸려들어 매만 맞았다.
여러 차례의 훈방이 있고 난 후 남아 있는 사람들이 많은 방과 적은 방이 있게 되자 전방이 가능해졌다. 그때부터는 우리를 감시하던 헌병, 형무관들도 훨씬 더 인간적인 대우를 해주었다. 1방에 신은주, 김경국 이외에 몇몇 강학들이 있었는데, '"1방으로 전방 희망하는 사람은 나와." 하는 헌병의 말이 있자 나는 총알같이 밖으로 나가 줄을 섰다.
'은주를 만나면 우리 집안 사정이라도 물어봐야지' 하는 목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야속하게도 은주는 한 번도 우리 집에 가보지 않았다. 1호 방으로 전방하여 나는 내 인생의 중요한 것들을 많이 배웠다. 평생 동안 배우지 못할 많은 것들을 터득한 것이다. 1호 방에 가니까 야학 강학 중 한 명이 전방신고식으로 우선 이상식 교수, 명노근 교수, 윤영규 선생님들께 인사를 하도록 시켰다. 평소 가벼운 목례보다 큰 절을 좋아하던 나는 그 분들께 큰절을 올렸다. 1호 방에는 이런 지식층뿐만 아니라 멀리 해남에서 잡혀 올라온 사람들도 있었고, 폭력배 일제소탕기간에 잡혀 삼 청교육대에 보내질 사람들도 있었다. 나이가 어려서, "그놈 참 또랑또랑하게 생겼다." 라고 사람들로부터 귀염을 많이 받던 나는 감방생활을 여러 차례 하신 교수님들 어깨를 주물러드리기도 하고, 또 심심하면 깡패 대장 형님께, "형님 어떻게 살았소?" 해가면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듣기도 하였다. 중간계층은 존재하지 않고 최고의 양심과 지성인인 분들과 주먹세계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사이를 왔다갔다하면서 나는 삶에 대한 생각들을 정리해 나갔다. 5호 방에 있을 때는 집에도 가고 싶고, 엄마도 보고 싶고, 무서운 마음에 많이 울었다. 그러나 1호 방으로 옮긴 뒤 어른들과 '살아가는 이야기', '왜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야 하는가' 등을 이야기하면서부터는 어느 정도 마음의 평정을 되찾기 시작하였다.
처음 받아본 재판
1심 재판(날짜는 기억할 수 없다)을 받는데 재판관이 이미 정해진 내용을 줄줄 읽고 있었다. 그 전에 검찰관(검사)이 와서 실정을 물어본 일은 물론 없었고 일선 수사관의 조사가 전부였다. 재판장은 물론 검사도 한번도 만난적이 없는 사람들이었다.
'아! 저 사람이 검찰관이구나'하는 정도였다. 그때 우리 동료들은 줄줄이 엮여 있는 상태이고 김영철씨도 재판을 받기 위하여 병원에서 왔었다. 심문이 시작되었다.
"나명관! 총 들었지?"
"예."
"유인물 찍었지?"
"예."
"잘못하였다고 생각하지?"
"아니오."
"왜 잘못하였다는 생각이 안 들지?"
"잘못한 것 같지가 않습니다."
이렇게 꼬박꼬박 대답하자 검찰관이 재심문을 하였다. '기왕 다 불었고, 저희들이 형량을 다 정해 놓고 하는 재판인데 더 이상 거부 할 필요가 없다' 하는 생각을 하였다. 검찰관이, "최후 진술을 하시오." 라고 했다.
"내가 생각할 때는 잘못한 것 하나도 없는 것 같소. 우리가 군인들에게 총을 겨누었다는 그것이 잘못이라면 군인들도 우리한테 총을 쏘았으니 그것도 똑같은 잘못 아니오." 라고 또박또박 내 생각을 말했다. 순간 '잘하면 오늘 집으로 보내줄지도 몰라'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그렇다 치고 나는 집에 늙은 부모님도 계시고 어린 동생들이 넷이나 돼요. 내가 빨리 나가 돈을 벌어야제 동생들 학교도 보낼 것 아니것소. 제발 빨리 좀 보내주시오." 라고 단숨에 말해 버렸다. 검찰관이, "알았다. 그만해라." 하면서 내 말을 가로막았다.
호적상 생년이 1년이나 늦게 되어 만 18세로 미성년자 측에 해당되는 형량을 주었는데 '장기 5년 단기 3년'이었다. 태어나 재판을 처음 받아보는 나는 눈앞이 캄캄했다. 선고공판 때 삭감된다고 했는데 선고 때는 '장기 2년, 단기 1년'이 주어졌다. 군법회의는 고등법원제도가 없는 대신에 형집행관이 서류검사 중 형 면제를 할 수 있는 그런 제도가 있어서 서대석, 신은주 등은 집행유예로 되었다.
선고공판을 받았던 10월 27일 교도소로 이감이 되었다. 그 다음날 1차 석방자 명단을 공개하였다. 그때 기구하게도 '막걸리사건'이 터진 것이다. 교도관이 그 날 석방자 이름을 모두 부른 뒤 가버리자, 한 방에 있던 윤순호, 김성섭과 나는 2심에 나갈 것인가보다 하고 생각하였다. "순호형, 어쩔 수 있소. 그래도 교도소라서 좀더 나을 테지요." 하면서 나갈 줄 알고 꾸려놓았던 속옷 보따리를 다시 풀었다. 그런데 느닷없이 "나명관." 하고 불러서, "어째서 부르요." 하니까, "석방이다. 아까는 이름이 잘못되었다."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영관'이라는 친구가 코가 석자나 빠져서 터덜터덜 들어 왔는데 정말 미안하였다. '저놈한테 미안해서 이 일을 어쩔끄나' 하면서도 우선 좋았다.
석방된 날 다시 지프차에 태워져
다시 상무대로 간 석방자들은, "여기서 일어났던 일을 밖에 나가서 발설할 땐 너희들 다시 잡아들여 싹쓸이 하겠다." 이렇게 시작된 협박조 연설을 장시간에 걸쳐서 들었다. 밖에 나가니 많은 사람들이 마중나와 있었으나 신은주, 서대석 그리고 나만은 찾아온 사람이 단 한 명도 없었다. 아마 우리가 풀려날 것으로는 기대하지 않았는가 하는 생각을 하였다.
우리가 영창생활을 하고 있을때 솔담배가 나왔는데 항상 부족했다. 셋이 있는대로 호주머니를 털어 솔담배 한 갑을 샀다. 담배가 담배인지 솜인지 모를 정도로 맛이 기가 막히게 좋았다. 터덜터덜 걸어서 광천공단 내 'K.M사' 근처에 다다른 우리들은 "오랜만에 막걸리나 한잔 하자"고 하여 막걸리를 2병 비웠다. 우리들은 5.18 전에도 통고무신으로 유명하던 윤상원이나 박관현을 만나면 소주보다는 막걸리를 많이 마셨다. 보리죽만을 먹었던 우리들은 금방 취해서 '이 세상이 내 세상이냐. 네 세상이냐' 할 정도로 되어 버렸다. 김영철 형님 집에 찾아가, "형님 잘 계시니 크게 걱정하지 마십시오." 라고 형수님한테 말씀드리고 나오다가 동생 용관이를 만났다. 면회도 못 하였던 우리는 꼭 5개월 만에 만나 부둥켜안고 한참 동안을 울었다. "어떻게 그동안 부모님 모시고 잘 있었냐?" 하고 묻기도 하였다. 동생이 타고 온 자전거를 같이 타고 집에 갔더니 새까만 두 놈이 대문 앞에 서 있었다. 그때는 가로등이 없어 온 동네가 컴컴했다. 어머니는 분명히 나왔다는 녀석이 밤이 되어도 오지 않자 크게 걱정하고 계셨던 모양이다.
차라리 나오지 않았더라면 그런 걱정은 안 하셨을 텐데 "이놈이 무슨 일이다냐" 하시면서 전전긍긍하고 계실 때 내가 막걸리 한 잔에 취해서 의기양양하게 나타난 것이다. 나는 대문을 지키고 서 있는 놈들에게 말했다. "어째서 왔소?" "자네가 나올 때 도장을 찍지 않고 나왔네. 가서 도장 한 번만 찍으면 되는 일일세." 술이 확 깼다. '아이고 요것, 나올 때부터 아리까리하게 들어갔다 나왔다 염병하더니 확실하게 도로 들어가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럼 쪼깐 기다리시오. 이왕 집에 왔으니 우리 아버지한테 인사나 드리고 갑시다." 하고 말하는 순간, "금방 올 거다." 라고 하면서 양쪽 어깨를 낚아챘다. 술 한잔 먹은 기운으로 사정없이 뿌리치니까 놔주었다. "도망 안 갈 테니 걱정은 마시오."
방에 들어가 병환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께 인사를 드리자, "얼마나 고생했냐?" 하시며 내 두 손을 꼭 잡아주셨다. 조금 후에 들어오시는 어머니께 말씀드렸다. "엄마 나 팬티하고 메리야스랑, 속내의랑 좀 싸주시오." 하고 말씀드리니, "어째 그래. 금방 나온다면서 가져가 뭐 할래." "엄마 그냥 싸주시오. 아무래도 다시 들어갈 것 같기도 하고 못 나올 것 같기도 하고 아리까리 하니까. 그냥 싸주시오. 어째요. 나오게 되거든 거기 있는 사람들 주고 나오지요." 병환으로 누워 계신 아버지가 듣지 못하도록 조용히 둘러대고 나왔다. 형사들은 혹시 내가 지프차를 발견하고 도망가버릴 것으로 추측하고 골목에다 지프차를 숨겨놓고 왔다.
지프차를 타고 다시 지긋지긋한 상무대에 도착하니까 중령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하다. 교도소에 다시 가서 2개월만 더 고생해라 그러면 너는 분명히 나올 것이다." 도착하기 전까지도 '제발 내 생각이 틀려라' 했는데 그 말을 듣자마자 눈앞이 캄캄하였다. 술 한잔 먹은 데다가 머리도 아프고 속까지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였다. 지프차에 태워져 교도소로 가는데 쌍촌동 고갯길 너머 우리 동네가 보였다. '아이고메 언제나 다시 올거나' 생각하니 눈물이 났다. 미칠 것만 같았다. 좌회전을 하기 위해 공단 사거리에서 좌회전 신호를 넣자 나는 운전사의 등을 툭툭 쳤다.
"아저씨!"
"뭐, 왜 그래?"
"기왕에 가는 것 요리 가나 조리 가나 어차피 가는 것은 마찬가진께 시내구경이나 하면서 가게 돌아갑시다."
내 옆에 앉아 있던 수사관이 피식 웃으면서, "야, 금남로로 돌아서 가자." 하였다. 저희도 미안한 마음은 있었는가 내 말을 들어주었다. 내 앞에 솔담배 한 갑을 던져주면서, "야, 양껏 피워라."고까지 했다. 그래서 나는 교도소 들어가면 못 피울 것을 생각해 교도소 도착 전까지 계속 피워댔다.
진짜 교도소에서의 생활
금남로 지하상가 공사하는 것을 보고 좌회전해서 교도소로 갔다. 진짜 교도소란 어떤 곳인가를 확실히 경험하게 되었다. 내 방을 찾아가자 같이 있던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윤순호, 기동타격대장 윤석루, 원갑, 박철(현재 개방대생), 이 금녕 등과 2개월 동안 같이 생활하였다. 바로 우리 옆방에는 상황실장 박남선이 사형을 언도받고 혁수정 생활을 하고 있었다. 면회도 되지 않는 교도소 생활은 상무대 생활의 연장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런 생활이 계속되자 5.18 광주민중항쟁 관련자들이 교도소 안에서 농성을 시작했다. 3일 정도 계속된 농성의 요구사항은 세 가지였다.
1. 면회를 허용해라.
2. 교도소 안에서 자유롭게 우리를 풀어달라.
3. 운동을 할 수 있게 해달라.
식기로 창살을 긁는 등 교도소 안이 아수라장이 되자 교도소 관계자들이 우르르 몰려와 묵살해 버렸다. 특출나게 나서서 말깨나 했던 사람들은 독방에 갇아놓고 그외 사람들은 몇 대씩 맞았다. 워낙 대내외적으로 압력이 있었고 우리들이 단식투쟁에 돌입하자 며칠 후부터 면회가 가능케 되었다.
병환으로 기동도 어려우신 아버지는 면회를 오셔서 계속 우시기만 하셨다. 서너 번째로 면회를 했던 내가 싱글싱글 웃는데다가 상무대 영창에서 굶주리고 살다가 교도소 이감 후 잘 먹으니 얼굴이 뽀얘서 어머니는 지극히 마음이 놓였던 모양이었다. 집에 돈도 별로 없었을 텐데 어머니가 "먹고 싶은 것 좀 사서 넣어 주랴" 하시는 말씀에 나는 먹고 싶은 것을 모두 이야기하였다. 없는 돈에 많은 것을 몽땅 사서 넣어주셨다. 그걸 동료들과 나누어 먹으면서 가만히 생각하니 눈 물이 났다. '집에 돈도 없었을 텐데 노인네가 어디서 돈 꾸어다가 이것을 사 넣어주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 그 뒤로부터 면회오시면 "그냥 500원짜리 사탕이나 하나 사 주세요" 했다. 나는 감옥에 있으면서 철이 들었던 모양이다. 명랑하여 귀여움을 받았던 나는 재소자 중에서 우두머리격인 '지도'라고 쓰인 완장을 차고 다녔던 사람과 가깝게 지냈다. 양동이 집이었는데 창살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서 '형님', '동생' 하다 보니 정이 들었던 것이다. 한번은 교도소 안에서 피부병을 앓았 다.
"형님 어째 근질근질하니 이상하요."
"너 이놈, 옷 벗어봐."
그는 왼쪽 겨드랑이 밑에 발진이 생긴 것을 확인한 뒤 열쇠를 가져와서 나를 밖으로 나오게 했다.
"얼른 나와라. 몸이라도 자주 닦지."
"언제 씻을 기회가 있어야죠."
그는 의무실로 나를 데리고 가더니 주사도 맞고 약도 먹게 해주었다. 세면시간에는 방차례 순서대로 세면을 하였는데 지도하는 형님이, "야, 임마 저리 가서 빨리 목욕해. 또 피부병 걸리지 말고." 하면서 여러 번 목욕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교도소 생활을 하면서 '내 집이다' 하고 편하게 생각한 덕분에 다른 사람에 비하면 즐겁게 지낸 편이었다. 그 전부터 상당히 노래를 잘한다고 평이 난 나는 나서서 노래도 자주 불렀다.
2심이 시작되었다. 일요일날 2심 신청자 명단을 발표했는데 나도 포함되었다. 보편적으로 경험이 있는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일요일에는 다 쉬는데 발표된 것으로 보아서 분명히 내일 석방될 것이다' 라고 하였다. 몇 시간 후에 검찰관이 나를 불렀는데 "내일 보내줄께.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고 부모님 모시고 잘 살아라." "너 저번에 나갔다 들어왔지. 이번에는 확실하게 보내주는 거다. 너희 집에도 연락했으니 부모님도 내일 오실 거다." 라고 했다. 그런 말을 듣고 난 그날 저녁에는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저번처럼 실수가 아니길 바라면서 그저 기쁘기만 했다. 그러나 같이 있던 사람들 중 가석방 대상에서 제외된 사람이 있어서 기쁜 내색은 할 수 없었다.
11월 29일날 집행유예 3년을 언도받고 교도소로 다시 와서 팬티 1장, 메리야스 2장이 전부였던 짐을 꾸려서 교도소 쪽문을 열고 나선 시간은 별이 총총 떠 있는 시간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영치금을 찾기 위하여 조금 늦게 나왔다. 가난한 집 사정을 뻔히 알면서 영치금을 넣어달라고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찾을 영치금이 없었다. 내가 나오는 것을 보신 어머니가 소금을 뿌리셨다. 교회에서 나오신 분들이 성가를 부르고 '들불야학' 강학들도, "명관아! 그동안 고생이 많았다." 하면서 돌아가면서 머리를 한 대씩 쥐어박았다. 조금 후에 동료들이 나와서 또 한차례 석방된 기쁨을 나누었다.
버스를 타고 집에 도착하니 병환이 깊어져 의식이 없으시던 아버지가 나를 알아보시고 "고생했다" 한마디 말씀만 하신 채 다시 의식불명 상태가 되셨다. 아버지는 노환이셨다. 5.18 이전에도 건강하지 못하였는데 어머니 말씀에 의하면 내가 잡혀간 후로 계속 날마다 술을 드셨다고 했다. 경제적 지주역할을 하던 내가 1980년 4월 봉급을 마지막으로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였던 집안은 완전히 피폐된 상태였다. 그동안 천주교에서 생활보조비로 5만 원씩 주었지만 생활을 해나가 기 어려워 집을 담보로 돈을 빌려 사용하고 쌀집 외상값만도 30만 원이 넘었다.
그 쌀집은 막내동생의 친구집이었고 우리집 사정을 잘 알아서 외상으로라도 쌀을 가져올 수 있었던 것이다. 야학 여학생이었던 조선임, 노영란이 가끔씩 집에 들러 일을 해주기도 하였고, 1972년부터 알기 시작했던 지금의 내 아내가 일주일에 한 번씩 와서 아버지 병 간호도 하고 약도 지어드렸다고 했다. 내가 출감한 날도 집에 왔었다.
택시기사로의 새 생활
1981년 1월 3일날 내 생일이라고 친구들과 야학 동료들이 놀러 와서 밤 12시가 조금 넘어 집으로 돌아갔다. 친구들 배웅을 하고 막 돌아오니 어머니가, "명관아! 아버지가 이상하시다."면서 광천동 누나와 서울에 계시던 사촌형님들께 연락하셨다. 몇 시간 후에 아버지는 말씀 한마디 못 하시고 돌아가셨다. 워낙 철이 없는 내게 아버지 제삿날은 잊어버리지 말라고 그러셨는지 내 생일날 돌아가셨다. 아내는 "그 전날 아버지를 뵙고 이상한 생각이 들고 걱정되어 출근 않고 왔소." 하면서 아침 일찍 집에 왔다. 아버지를 고향에 모신 뒤 광주 집에 와서 매형과 친구들, 사촌형님들이랑 술을 한잔씩 마셨다. 그때 많이 취해 기억할 수조차 없는데 내가, "제발 가지 마라. 미칠 것만 같다."며 아내를 잡았다고 한다. 그 후 계속 동거생활을 하다 1987년에야 결혼식을 올렸다.
출감된 후에 몸조리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깨죽 한번 먹어보지 못하였던 나는 아버지 삼오제를 지내고 난 후부터 아프기 시작했다. YWCA에서 잡혀 구타당할 때 척추뼈가 S자 모양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모든 것이 절망적이던 나는 친구들을 만나 날마다 술을 마셨다. 불과 일주일 만에 얼굴이 새까맣게 변할 정도였다.
1981년 2월에 윤형길 선생님 소개로 '무등수지'에 다니게 되었다. 자꾸만 몸이 이상해졌다. 아침에 일어나기 한 시간 전에 동생들이 모두 달려들어 주무르고 해야만 일어날 수 있었다. 제대로 근무를 할 수 없어 윤형길 선생님과 선생님 친구 분이었던 전무님께는 미안했지만 한 달만에 회사를 그만두었다.
병원에 가서 척추뼈가 S자 모양으로 되어버린 사실을 알았지만 수술할 수 있는 돈이 없었다. 거의 2년 정도를 누워서 지내면서 민간요법으로 치료했다. 소변이 좋다는 말을 듣고 소변도 마셨고 쇳가루가 좋다는 말에 쇳가루도 먹었다. 여러 가지 치료를 2년 정도 한 뒤 병원에 가서 다 완치되었다는 것을 확인하였다.
1983, 1984년 2년 동안 딸딸이(경운기)를 사서 막걸리 배달을 하였다. 한 달 수입이 60-70만 원이 되어 처음 딸딸이를 살 때 빚도 갚고 피폐되었던 집안도 다시 안정시킬 수가 있었다.
1985년에 알루미늄 새시공장을 하던 친구의 형이 과자를 공장에서 받아와서 대리점에 넘기는 사업을 같이 하자고 했다. 운전을 할 줄 아는 내가 2톤 반짜리 트럭을 사서 같이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경험 부족으로 장사를 시작한지 꼭 6개월만에 700만 원 정도의 빚을 지고 차까지 몽땅 잃어버렸다. 동생들이 고등학교 2학년, 1년이었는데 학교도 계속 보내지 못할 정도가 되어버렸다. 하는 수없이 택시운전을 시작하였는데 여기에는 그럴 만한 동기가 있었다.
1982년 내가 병으로 아무런 경제적 능력이 없을 때 어머니가 현재 농성동 청기와 주유소 자리에 있었던 보광운수 택시 세차장에서 일을 하셨는데 하루 1교대로 근무하던 운전사의 한 달 봉급이 25만 원이고 하루에 '정당하지 않은 부수입'이 만 원 정도였으므로 실질적으로 한 달 수입 정도가 50만원이 훨씬 넘는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이다. 웬만한 공무원 월급에 비하여 훨씬 더 많다는 것을 알고 나는 '내가 할일은 딱 한 가지다. 인생의 목표를 택시기사로 정하자. 택시 운전을 하여 생활고를 면하자' 라는 생각을 하였던 것이다. 택시 운전사는 5시간 정도 잠을 덜 자고 노력하면 남보다 돈을 곱절 벌 수 있는 직업이다. 아직도 내가 택시운전을 그만두지 못하는 것은 이러한 이유다. 그리고 상당한 묘미가 있는 직업으로, 운이 좋고 노력만 한다면 돈을 많이 벌 수 있다. 그 대신 완전히 기계가 되긴 하지만, 그렇게 하여 지금은 없어진 '이화택시'에서 2년 정도 근무하였는데 빚도 다 갚고, 집안 사정도 많이 좋아졌다.
노조활동을 하면서
연도별로 따져서 1980년부터 1985년까지 오로지 먹고살기 위해서 일을 하였다. 1985년부터는 들불야학에서 배웠던 이론을 사회에 적용시키고 싶었다. 빚도 모두 갚고 내 위치가 확실해진 이화택시 노동조합에서 나는 교육선전부장을 맡았다.
당시 많은 민주화 단체에서 일하고 있던 들불야학 강학들에 많은 자문을 구하기도 하였다. 1987년 6월에 아무런 통보도 없이 회사주가 폐업신고를 냈다. 그때부터 바로 실제 실전경험을 하게 된 것이다.
이화택시는 40명의 기사와 택시가 15대 정도인 영세업체였다. 1987년 6월에 나주시 영산포에서 5명이 사망한 큰 사고가 나자 보험료가 할증되고 회사주에게 경제적인 부담이 생겨 위장폐업 신고를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을 미리 알아차린 노동조합원들은 6월 30일 회의를 하고 7월 1일에 우리들의 입장을 발표한 뒤 오전 근무가 끝난 운전수들로 하여금 모든 이화택시 기사들을 귀사케 하였다.
7일간의 농성 끝에 고용승계는 못하고 취업보장(차를 같이 보냄)을 해주면서 퇴직금을 주는 조건으로 합의를 하였다. 그때 내가 위원장 및 교섭위원의 자격이 있었더라면 그런 식의 합의는 하지 않았을 것이다. 7일 동안 농성 끝에 퇴직금이 제대로 정산이 되면서 해고수당, 즉 생활보조금 명목으로 2달치 봉급 56만 원을 받았다. 그러나 취업이 전혀되지 않았다. 광주시내 택시회사에서는 이화택시 출신의 기사들은 수용해 주지 않았던 것이다.
7월말부터 우리들의 입장을 정리하여 해고싸움을 3개월간 하면서 기노위에 제소도 하였으나 효력이 없었다. 역량도 부족하고 경험이 없었던 우리들은 로케트 회원에 다음가는 30여 명에 가까운 숫자가 '전남 해고동지 복직투쟁협의회'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민정당 도당사무실도 가고 서울에 가서 자문도 구해 어느 정도의 희망이 보였다. 그럴 무렵 광주시내 택시회사에 파업이 일어나 '이때다. 승리는 우리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나 결국 우리들의 패배로 끝났다.
꼭 7개월을 아무런 일도 하지 못하다가 자가용 기사생활을 3개월 동안 했는데 월급 25만 원씩을 받으면서는 집안을 꾸려 나가기가 어려웠다. 당시 친구들과 연합노조를 구성하려고 자주 만나고 있었는데 거기에 들어가는 돈만도 상당히 되었던 것이다.
광산군이 광주직할시로 승격되면서 송정리 택시도 광주시내에서 영업할 수 있었다. 1988년 2월말경에 자가용 기사로 생활이 어렵다는 것을 알고 계시던 선배 한 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지금은 '금상택시'로 불리는 당시의 조양택시 회사에 입사하자마자 새 차를 주었다. 차가 12대였고 사장은 당시 전라남도 경찰국 정보계장이었는데 다행히 이화택시에 대한 정보가 어두웠다. 그래서 나와 같이 열렬히 싸우다가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직을 못 하고 있던 5명의 동료들을 한 명씩 입사케 하여 일단 근무를 하게 하였다. 그 후 이화택시 출신이라는 명칭이 없어진 다음 근로조건이 열악한 그곳을 그만두고 동료 3명이 다른 회사로 이직을 했다. 남은 두 명의 힘으로는 노동조합 결성이 어려웠다. 더구나 거의 모든 기사들이 지입차주이거나 개인택시를 타기 위해 경력을 위조하기 위한 일시적인 입사였다. 노동조합 결성도 어렵고 마지막 한 동료까지 떠나버리자 나도 3개월 근무를 하고 그만두어 버렸다. 집에서 쉬고 있던 나에게 지금 근무하는 신일교통의 한 친구가 찾아와서, "내 고숙님이 신일교통 이사로 계시는데 너의 사정을 말씀드렸더니 한번 찾아 오라고 하시더라."며 권유하길래 한번 찾아뵙고 인사드리자, "나 실망시키지 말고 노동조합이니 노동운동이니 하는 것을 떠나 우선 너희 식구들을 생각해라." 하시면서 6월부터 근무하게 해주셨다. 물론 근무하는 신일교통도 많은 문제점이 있으나 계속 근무하면서 해결해 나갈 생각이다.
노동자의 긍지로 민주주의를 향하여
5.18 광주민중항쟁에 관련된 단체에서 활동을 하기 시작한 것은 택시운전을 하면서부터다. 이화택시회사가 야비하게 위장폐업 신고를 낼 즈음에 지금 YWCA 6층에 있는 '일꾼 마당'에 가입하였다. 가입 전부터 꽹과리를 조금은 칠 수 있던 나는 '노동조합이 활성되려면 문화공간이 활짝 열려야 많은 노동자의 참여가 가능하다. 그런 과정을 통해서 진짜로 노동조합을 자기 것으로 소화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 노동문화다. 당연히 우리들의 손에서 없어지고 지워졌던 문화를 우리 스스로가 찾아야 한다'는 입장이던 '일꾼마당'과 잘 맞았다. 일꾼마당은 마당극도 하고, 사물놀이를 전수해 주기도 했다. 요즈음에는 제대로 활동을 못하는 상태다. 평소 알고 지내던 박남선을 주축으로 정태찬, 김현채 등이 만든 '5자동'에서 가입하라고 자주 연락이 왔었다. 그 당시 '5.18 광주민중항쟁 청년동지회'도 있었지만 별로 가입할 생각이 없었던 나에게 가입 권유를 박남선씨가 했다.
실질적으로 5.18 광주민중항쟁 관련단체에 가입하기는 그때가 처음이었는데 얼마 후에 '5자동'이 없어졌다. 5월 관련단체에 대해 많은 회의를 느끼면서 아무런 활동을 하지 않고 있을 때 윤강옥, 서대석씨로부터 '5.18 민중항쟁동지회' 가입 권유를 받고 가입했으나 적극적인 활동은 못하고 있다.
1980년 당시에 택시 운전을 하였던 기사들과 참여를 원하는 택시 운전수들로 구성된 '5월 민중항쟁계승 민주기사협의회'가 발족되어 그곳에도 지금 가입된 상태다. 그러나 두 군데 모두 공식적 활동은 못 하고 있다.
광주시내에 택시회사가 70여개 정도로 노동조합이 현재 결성된 택시회사는 46개 업체 정도 되지만 80% 정도가 어용이다. 택시회사의 체질개선이 급한 형편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에 대한 일은 내가 아니어도 할 사람이 많다. 우선 내 주위의 일이라도 해결해야겠다. 내 주위의 일도 5.18과 같은 민주화의 밑거름이 될 것이라고 믿는다.
정치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지만 한 나라의 국민으로써 작년 12월 '군부독재 아래서 대통령 선거라는 것이 될 법이나 한가' 하는 회의적인 생각이 많았다. 지금도 그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5.18 광주민중항쟁 때 직접 총칼을 들이댔던 오적들이 진정한 민중혁명이 일어나지 않는 한 계속 집권하리라고 본다. 권력을 잡고 있는 사람은 다른 한 손에 총을 잡고 있는데 이러한 상황에서 단순한 선거로는 정권교체가 어렵다.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부정선거로 들통나서 정치권에서 밀려 났지만 '21세기 과학시대'에 선거란 버튼 하나면 조작이 가능한 것이 아닌가. 획기적인 사건, 예를 들어 10.26과 같은 사건이 일어나지 않는 한 군부독재의 퇴진은 어려울 것으로 생각한다. 민중정부가 구성된다고 하더라도 군부독재의 잔당들이 존재하는 한 다시 정권은 그들에게 넘겨질 것으로 본다. 요즈음 청문회를 보면서 통쾌한 느낌은 들지만 '민주화가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정상이다' 라고 하면서도 또한 6.29선언 이후에도 양심수 석방을 하지 않는 저들의 태도는 정권욕 을 나타내는 것이다. '민주주의'가 무엇인지 모르는 저들의 반성이 필요하다. 우리 세대에서 이러한 정치적, 민족적 비극은 끝나야 하며 우리 자식 세대에게는 물려주지 않아야 할 것이다.
5.18 광주민중항쟁은 역사적으로 정확히 규명되어야 하며, 망월동 묘역은 성역화시켜서 우리 후손들로 하여금 위대한 민중정신을 알게 하여야 한다. 광주사태라는 명칭이 광주 민주화운동, 광주민중항쟁 등으로 명명지워져 기쁘기도 하지만 유족들에게 물질적, 정신적 보상이 충분하게 되지 못한 점도 아쉽고, 참여자의 명예회복도 필요하다. 5월 관계단체들에 대한 한 가지 불만이 있는데 '돈'때문에 제발 싸우지 않았으면 한다. 모두 그 나름대로 크고 작은 고충이 있겠지만 돌아 가신 분들에게 부끄러운 일이며 일반 시민들이 보았을 때는 한심스러운 일이다.
일반 소시민으로서 바람은 우리 자식들은 파업이니 농성이니 하는 노동운동을 하지 않고도 노동자로써 긍지를 가지고 살 수 있는 나라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뿐 이다.
(조사.정리 이명희) [5.18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