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토리
십 리가량 반원을 그리며 걷는 바닷길이 근사하다. 테트라포드로 감싸 안은 둑 아래엔 개펄이 저 멀리까지 아득하다. 물이 들어오면 잘방잘방한 물결 위에 물고기가 툭툭 튀어 올라온다. 다리가 길쭉한 물새들이 성큼성큼 걸어 다니고 고니가 한가로이 긴 고개를 등에 떨군 채 잠을 자는 평화로운 정경이다.
긴 세월 서낙동강 하구에 생긴 진우도와 신자도, 장자도, 대마등이 파도를 막아준다. 버티는 둑 옆으로 난 잘 다듬어진 인도와 자전거 다니는 길이 나란하다. 가덕도와 다대포 몰운대가 좌우로 보이고 대한해협을 다니는 배들이 멀어선가 아주 꾸물꾸물 느리게 가는 것이 보인다. 봄이면 보도 옆으로 가꾼 개나리가 흐드러지게 만발한다.
밤에도 다닐 수 있도록 가로등을 촘촘히 세워두고 쉴 수 있도록 편한 긴 의자를 곳곳에 만들었다. 갔다가 돌아올 땐 안길로 들어선다. 솔숲으로 난 오솔길이다. 뽀얀 낮은 등을 길목마다 설치해서 운치가 있다. 꼬불꼬불 휘어지게 낸 흙길이 멋지다. 십 년 전 만들었을 때 어린 소나무 숲이 이제 제법 커서 터널이다.
여기도 쉬는 의자와 화장실이며 운동하는 기구를 여러 곳에 설치했다. 태풍과 큰 파도가 밀려올 때를 대비한 숲이다. 염전이었던 자리를 메워 아파트 단지를 만들면서이다. 1만 세대 1층은 혹시 올 쓰나미로 비워둔 특별한 아파트다. 갈수록 숲이 대단하다. 이젠 또 다른 숲길도 생겼다. 공들인 아름다운 길 외에 울퉁불퉁 길이 나타났다.
넓은 솔밭 가운데로 생겼다. 좋은 길을 두고 그리 다녀서 만들어졌다. 별난 사람들이다. 한가한 도로변 인도에도 벚꽃 나무가 즐비하다. 꽃피고 떨어질 땐 겨울 눈 속을 걷는 기분이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곳에서 사는가 싶다. 텃밭에 갔다 오면서 아내가 이 길로 가 보잔다. 얼마나 꼬불거리고 지루한지 다리가 시큰거린다. 나뭇가지와 잎도 자꾸만 부딪친다.
태풍이 지나고 사람이 득실거려 많다. 무얼 하나 봤더니 모두 자루를 들고 다니며 줍는다. 다리운동 한다고 급히 다녀야지 앉아서 엉거주춤 서성이는 사람들이다. 왜 그럴까 가까이 가 보니 떨어진 도토리를 찾아 헤맨다. 하나하나 닭 모이 쪼듯 하지 않고서 마구 쓸어 담는다. 얼마나 많은지 지천이다.
아내와 주섬주섬 주워서 주머니에 넣었다. 푸른 것도 같이 떨어져 수두룩한데 익은 것을 골랐다. 잠자는 아들에게 전화해서 같이 줍자 했더니 싫단다. 아침 운동 나갔다가 엉뚱한 짓을 하고 있다.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자루를 갖고 와서 많이 거둬야겠다 맘먹는다. 도토리묵을 해 먹을까 생각하며 들떴다. 한 되쯤 되려나.
몇 해 전 불모산 기슭에서 잔잔한 도토리를 한 자루 주웠다. 아름드리 큰 나무인데 알은 되게 작다. 구석구석 박혀 줍는데 숲과 돌 틈이어서 뱀이 나올까 무서웠다. 이걸 어찌 먹나. 방앗간에 가져가니 찧어주질 않는다. 변두리에 가도 꺼려서 찾아 헤매다가 구포 시장에서 가루로 만들었다. 통째 들이부어 여러 번 빻았다. 넓은 통에 넣고 물을 부어 밤새 재웠다.
떠오른 껍질을 건져낸 뒤 가라앉은 가루를 끓여 도토리묵을 만들었다. 덜 우려서 약간 쌉싸름해도 맛나게 먹었다. 등산에서 내려오는 사람들이 등에 무얼 가득 짊어지고 어떤 이는 비닐에 담아 들고 온다. 도토리다. 올해 천지란다. 얼마나 떨어졌는지 두 손으로 퍼 담았단다.
다음 날 아침에 다시 가니 사람들이 곳곳에 웅크리고 줍는다 야단이다. 운동은 저리 가란다. 줍던 그 자린가 했는데 많다. 여기저기 상수리나무다. 솔밭인 줄 알았는데 가운데는 모두 그 나무로 줄을 세웠다. 그러니 한곳에 머물 수 없다. 걸어가면서 많은 곳을 찾으면 된다. 따로 있질 않고 곳곳이다. 그곳이 바로 새로 난 엉성한 길이다.
멀리 산에까지 갈 필요 없이 집 주위다. 이른 새벽 아직 앞도 잘 보이지 않는 숲속에서 꾸물대고 줍는 사람이 숱하다. 세숫대야나 양동이를 들고 온 사람 비닐 주머니나 큼직한 자루를 질질 끌고 다니는 이도 있다. 얼마나 담았는지 무거워서다. 산 중턱을 오르면 대부분 참나무다. 나무마다 열매가 맺히지 않는데 여긴 흔전만전이다.
바닷가 아파트라고 다 방풍림을 하지 않았다. 여긴 참 잘 만들고 사이사이에 알 맺는 나무를 심었으니 감사한 일이다. 그냥 소나무만 잔뜩 심으면 될 걸 어찌 이리 단풍 드는 도토리나무를 심었을까. 거기다 나무마다 열매가 맺히니 놀랍다. 십 리 숲길이 온통 그 밭이다. 집집이 묵 쑨다고 야단법석이다.
요즘은 꺼풀을 벗겨 물에 부풀린 뒤 믹서에 간단히 갈아버린다. 그때가 옛날이다. 나만 싸돌아다니면서 겨우 가루를 만들었다. 몰캉몰캉한 게 검붉은 것이 먹음직도 하다. 파간장에 묻혀 넣으니 몽글몽글 사르르 녹아 넘어간다. 어릴 때 사카린에 섞어 찐 가루를 먹은 적이 기억난다. 빨리 줍지 않으면 다람쥐가 가져가고 눈 덮인다.
세상이 어려울 때 많이 떨어진다는 열매다. 고맙기도 하지 어찌 그럴까. 지금이 그런가. 때맞춰 바닷가 정어리 떼도 몰려온다. 가나안 광야에서 굶주리던 이스라엘 백성이 하늘에서 뿌려준 만나를 주워 먹었다는데 여긴 숲에서 열매가 수북이 떨어진다. 해방 후 육이오 전쟁 무렵 내륙에는 살기 어려워 칡뿌리와 산나물, 송기를 캐고 뜯으며 갉아먹었다.
남은 밥을 개에게 주면 밥은 먹고 도토리는 밀쳐낸단다. 개도 안 먹는 걸 맛있다 먹으니 가관이다. 전에 없이 오래 가는 온 천지 코로나 전염병이고 전쟁이 터지려 들먹거리는 흉흉한 세상이어서 먹거리 정어리와 도토리가 찾아오고 떨어지는가.
첫댓글 나이드신분들만 계신 저희 시골동네 어귀길가에 빽빽하게 떨어져있던 도토리를 봐두고 왔습니다. 올해는 다람쥐나 청솔모 먹이로 냅두고 내년에 꼭꼭 주워가자고 찜해뒀습니다. 풀밭되어버린 밭위 산자락에 아이들 주먹만한 밤들이 떨어져있어서,줍고 또 주웠는데도 지천으로 남겨두고 오기도 했구요. 도토리나 알밤이나....서울에서는 천지없이 귀한대접받지만, 정작 텅빈 시골에선 그냥 한낮 열매일뿐인듯합니다. 샘이 그리 주워오셨다니 부산에서도 귀한대접이네요.ㅋ 맛있게 드세요 도토리묵.
성도님 반가워요.
화창한 가을 날입니다.
단풍도 아름답고 청명한 하늘이 좋습니다.
입동을 지나 소설이 다가오는데도 여긴 한창 가을입니다.
건강 잘 챙기세요.
코로나 조심하세요.
기도합니다.
수고하셨습니다
올해는 도토리가 풍년이었어요
친구가 몇 번 가져다 줘 묵도 여러 번 해 먹었습니다
가을걷이 끝내고 다쳤던 발 깁스도 어제 풀었습니다
소설 다가오는데 어제는 늦여름 같은 기온이 였어요
좋은 글 감사합니다
힘들었던 추수 일이 끝났다니 고생했습니다.
절뚝이던 걸음이 안됐었는데 좋아졌다니 다행입니다.
겨울 전염병이 기승이라니 건강하세요.
맞아요. 올핸 전염병에 전쟁 때문에 치솟는 물가로 불안불안하니,
신도 도우려는지
지천에 과일이 휘어지게 달리고 도토리가 수두룩했어요.
저도 여러번 도토리 묵을 만들어 동네 사람들과 나눠 먹었네요.
일은 많지만, 어릴 때 생각나는 별미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