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언론계의 거목 오강 장기봉 선생 기념사업을 제창하며 '자유 중립 공익' 언론관은 시대적 소명
오강 장기봉 선생은 2008년 8월 28일 향년 82세를 일기로 타계하시기 까지 우리나라 언론사에 큰 업적을 남기신 거목이셨습니다. 1946년 대동신문 기자로 언론계에 진출, 이 신문 정치부장을 거쳐 민중일보 평화신문 연합신문 정경부장 코리아 타임즈 부사장 겸 편집국장, 한국일보 편집국장 합동통신 이사, 동화통신 전무이사, 한국일보 이사를 역임하셨고 약관 28세의 젊은 연세로 서울신문 사장을 역임하신 것은 언론인으로서의 오강이 얼마나 탁월한 인물이었는가를 웅변으로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이 밖에도 오강 장기봉 선생은 국제언론인협회(IPI) 회원으로 헬싱키 IPI 총회와 벨기에 국제신문발행인협회총회, 베를린 국제신문발행인연맹총회 등에 참석하시는 등 다양한 언론외교활동을 펴셨으며 신문회관 감사, 신문협회 이사, 신문연구소 감사 등을 역임하시는 등 우리나라 언론발전사에 많은 업적을 남기셨습니다. 특히 1950년 대한민국 초대대통령 이승만 박사 공보비서관으로 발탁 되신 것을 계기로 외무부 정보과장, 한국전쟁 중에는 미 8군 심리작전부 요원으로 활약하셨는가 하면 유엔총회 한국대표로 관계와도 깊숙이 인연을 맺으셨고 미군정 당시 언론인의 입장에서 러치 미 군정 장관에게 민주 입법의원 구성을 제일먼저 제안 하시어 성사시킨 비화는 시국을 바라보는 형안이 남다르셨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梧岡 장기봉 선생은 특히 인쇄기술의 변화가 곧 한국에도 파급되리라는 것을 외국신문의 공장시찰, 관련서적의 연구를 통해 가장 먼저 파악하고 1965년 5월 6일 한국 최초로 다색도 컬러윤전기를 도입하여 신아일보를 창간하셨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장기봉 선생이 창간하신 신아일보는 1980년 11월 30일 신군부의 언론퉁폐합 조치로 강제 종간되는 비운에 직면했고 그후 오강 장기봉 선생은 국회에서의 증언 등 기회 있을 때마다 신아일보 강제 종간의 부당성을 역설하신 것은 자유언론 창달의 중요성이 무엇인지를 극명하게 대변해 주고 있습니다. 꾸준하게 언론의 길을 걸으면서 자유 중립 공익을 주창 하셨던 오강의 언론관은 우리시대 언론인들의 귀감과 사표가 되었습니다. 오강의 발자취는 항상 대안을 제시하고 새 길을 모색하려는 노력과 형안이 살아 숨 쉬고 있습니다. 권력과 자본의 야합을 단호히 배척하자는 한 시대 오강의 외침은 언론의 영역이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 지를 일깨워 주고 있습니다. 언론이 정권의 나팔수에 지나지 않는 존재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명쾌하고도 엄중한 명제를 제시한 신아일보 창간정신은 바로 우리 언론의 시대적 사명이기도 합니다. 우리 언론은 결코 역사의 방관자가 될 수는 없습니다. 오강 장기봉 선생이 신아일보를 통해 펼치려 했던 언론 본연의 사명을 귀감삼아 정론직필 파사현정의 언론환경을 선도적으로 개선해 나갈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기위해 오강 장기봉 선생 기념사업이 보다 제도적으로 활발하게 추진 되기를 바라며 뜻있는 모든 분들의 동참과 협조를 기대합니다.<정운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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