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페에 올려진 이 자료 보신적 있으시죠
밀직제학 이성중이 그 아들 휴(携) 로 하여금 ~~~ 이방원(태종)에게 ,,,,보검을 ,,
휴는 국당공의 손자이며 휴의 딸이 바로 하동정씨 정인지에게 출가를 하셨답니다.
1, 이성중 가계도
(17) 천(菊堂公 국당공파(菊堂公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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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경중(敬中)-배중(培中)-달충(達衷)제정공파-성중(誠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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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援)-부(扶)-휴(携)(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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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 (정인지 처)
정인지 ?
* 처부 조후는 정인지의 첫번째 부인의 아버지네요
이런 자료는 조금은 어려울수 있는, 또는 기억하기 어려운 자료일수도 있으나
혹 사업을 하시다던가, 또는 크고 작은 모임들에서 하동정씨 분들을 만나게 된다면
이런 자료 기억해 두셨다가
" 하동정씨 중에서는 그래도 하동군이신 학역재 정인지라는 분이 잴 유명하지, 그분의 부인이
바로 우리 가문에서 출가한 할머님 이시라네 " 라고 ~~~ 정답게 말씀을 드린다면
아마 선대로 부터 이어진 인연들이 후세까지도 좋은 인연으로 이어지지 않을까
라고 생각을 해보게 되네요 ㅎㅎㅎ
태조실록 총서 부분에 나와 있는 내용이네요
전하(殿下)가 대언(代言)이 되었을 때에, 이달충(李達衷)의 아우 밀직제학(密直提學) 이성중(李誠中)이 그 아들 휴(携)로 하여금,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오는 금으로 장식한 보검(寶劍)을 바치게 하니, 전하가 왕비(王妃)와 더불어 앉아서 이를 받았다.


경기도 의정부 자일동 산 143번지 한성판윤 이휴 묘소 사진
이휴(李携)
曾祖는 예문관 대제학(藝文館 大提學) 검교정승(檢校政丞) 諡 문희(文喜) 송암공(松巖公) 諱 세기(世基)
祖父는 월성부원군(月城府院君) 諡 문효(文孝) 국당공(菊堂公) 諱 천
先考는 개국 원종공신(開國 原從功臣) 보국 검교정승(輔國 檢校政丞) 諡 정순공(靖順公) 諱 성중(誠中)
선비 貞夫人 昌原黃氏 貞夫人 晉州柳氏의 三男이다
壬子 1372年 나시어 판 한성윤(判 漢城尹)을 지내셨다
배위는 정부인 청주한씨 판윤(判尹) 諱 상환(尙桓)의 女로 슬하에
2男3女를 두시니 감찰(監察) 諱 효상(孝商)이 長男이요
판관(判官) 諱 효림(孝林)이 次男이다
따님은 민추(閔麤). 최진(崔眕).
세조조 영의정(世祖朝 領議政) 학역재 (學易齋) 하동(洞東) 정인지(鄭麟趾)에게 출가하였다
戊辰 1388年 졸하시니
경기도 의정부시 자일동 산143번지 先考 靖順公 墓下에 配位合附하다
* 한성판윤을 지내신 이휴의 기록을 보시면 학역재 하동군 정인지에게 출가 하였다 라는
기록을 보실수 있을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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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동군이신 학역재 정인지에 대하여
1396(태조 5)~1478(성종 9).
조선 초기의 문신·학자.
세종~문종 대에 걸쳐 한글창제 및 역사·천문·역법·아악 등 각종 제도정비에 기여했다. 본관은 하동(河東). 자는 백저(伯雎), 호는 학역재(學易齋).
아버지는 석성현감 흥인(興仁)이며, 어머니는 진천의(陳千義)의 딸이다. 권우(權遇)의 문인이며, 1414년(태종 14) 식년문과에 장원급제, 예빈시주부·감찰·예조좌랑·병조좌랑 등을 지냈다. 세종이 즉위한 뒤 집현전응교로 등용되어 세종의 집현전 융성책에 맞추어 큰 활약을 했다. 1425년(세종 7) 문과중시에 장원하여 집현전직제학이 되었다. 다음해 세종의 경연관을 지냈다. 1430년 우군동지총제, 다음해 대제학을 거쳐 예문관제학·동지춘추관사·인수부윤·이조참판·충청도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436년 부친상으로 사직했으나 이듬해 기복(起復)되었다. 형조참판과 형조판서를 거쳐 1440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1443년 지중추원사, 1447년 이조판서·지춘추관사, 1450년(문종 즉위)에는 좌참찬이 되었다. 그러나 문종에서 단종 대에는 김종서(金宗瑞)·황보인(皇甫仁) 등의 세력에 밀려 정치적 입지가 많이 위축되었다.
1453년 판중추부사로 있으면서 수양대군에 협조하여 계유정난에 적극적으로 참여해 좌의정으로 발탁되었으며 정난공신(靖難功臣) 1등으로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에 책봉되었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한 후에는 영의정부사로 승진되고 좌익공신(左翼功臣)에 책봉되었다. 1458년 세조의 불서간행에 반대하여 부여로 부처(付處)되기도 했으나 곧 복직되었다. 1465년 70세로 치사를 원했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고 궤장(几杖)을 내렸다. 1468년(예종 즉위) 남이(南怡)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었고, 성종 즉위를 전후하여 원상(院相)에 임명되고 경연영사(經筵領事)가 되었다. 1471년 좌리공신(佐理功臣)에 책봉되었다. 1478년 성종이 그를 왕사(王師)로 선발하자 대간들이 그의 재산을 문제삼아 이의를 제기했다. 성종은 대간의 의견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나, 그해 죽어 왕사로 봉해지지는 못했다. 출처 : 다음 백과사전
정인지 묘(鄭麟趾 墓)
충청북도(忠淸北道)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에 있는 조선(朝鮮) 초기(初期)의 학자(學者) 정인지의 묘소(墓所)로 충청북도 기념물 제 33호로 지정되어있다.
정인지(1376-1478)는 조선시대 초기의 학자이며 정치가(政治家)로서 태종(太宗) 14년(1414)에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세종(世宗) 때에는 집현전(集賢殿)의 직제학(直提學)과 부제학(副提學) 등을 지내면서 훈민정음(訓民正音)을 창제하는 데 공을 세웠다. 또한 김종서(金宗瑞) 등과 고려사(高麗史)를 찬수하고 계유정란(癸酉靖難) 때에는 세조(世祖)를 도와 정란공신(靖難功臣) 중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책봉(冊封)되어 하동부원군(河東府院君)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벼슬은 영의정(領議政)까지 올랐다. 정인지의 묘소(墓所)에는 정인지와 그의 부인(夫人)의 묘를 따로 만들었고 왕릉(王陵)과 비슷한 모양으로 조성되어 있다. 묘의 바로 앞에는 대리석으로 만든 높이 2.5m의 묘비(墓碑)가 서 있는데 비의 갓은 만들지 않았다. 비면(碑面)에는 강희맹이 지은 비문(碑文)이 새겨져 있는데 앞면은 완전하나 뒷면의 글씨는 오랜 세월 동안의 풍화작용으로 읽기가 곤란하다. 비석 앞에는 혼유석(魂遊石)과 장명등(長明燈)이 서 있고 그 좌우(左右)에는 문인석(文人石)과 망주석(望柱石)이 서 있다. 묘소 아래에는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신도비(神道碑)가 있는데 원래의 신도비(神道碑)는 없어졌고 지금(至今)의 비는 1958년에 다시 건립(建立)한 것이다.
문화재명 : 정인지 묘(鄭麟趾 墓)
지정번호 : 충청북도 기념물 33호
분 류 : 묘
수 량 : 1곽
지 정 일 : 1980. 11. 13
소 재 지 : 괴산군 불정면 외령리 산 44번지

정인지 선생 묘소

정인지 부인 경주이씨 묘

인터넷 자료를 살펴보니 정인지 묘는 풍수가 들이 많이들 찾는 다고 하네요
풍수적으로 ~~~~ 연구할만한 자료가 있다고 합니다.
이런 작은 자료 하나 기억해 두셨다가 하동정씨 가문의 좋은분들 만나시게 되시면
좋은 인연으로 사용할수 있는 긴요한 자료가 되길 바래봅니다.
이상 망호정 이승주 였습니다.
2011년 6월 28일
** 혹 궁금해 하는 자료들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길 바람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