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 규정은 오직 먼저 거액(擧額 : 擧子의 정원)을 정해야 한다. 거액이 정해지면 온갖 폐단이 없어지게 된다.
생각건대, 과거법은 좌웅(左雄 : 漢 順帝 때)에게서 비롯되었고,홍도(鴻都 : 漢 靈帝 때)에서 모색되었으며, 수 양제(隋煬帝)가 시험했고 당나라 초기(太宗 때)에 완성되어서, 정관(貞觀) 초기에 벌써 향거(鄕擧)했다. 당(唐)나라 시대를 마치고 송(宋)나라와 원(元)나라에 미치도록 그 법이 모두 그대로였는데 명대에 와서 조례가 크게 정비되었다. 지금 청나라에서 쓰는 선거제도는 모두 명대의 유법(遺法)이었다.
우리나라는 옛날에 과거 제도가 없었는데 고려 광종(光宗) 때에 시주(柴周 後周의 異稱) 사람 쌍기(雙冀)가 사신을 따라왔다가 병이 나서 돌아가지 못하고 머물러, 과거법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배웠으나 자세하게 하지 못했고, 본받았으나 정밀하게 하지 못하여 다만 선비를 모아 글을 시험해서 진사를 삼는다는 것을 들을 뿐이고, 그 규모와 절차는 옮겨오지 못했다. 지금 우리나라 과거법이 중국과 같지 않은 것이 열 가지인데, 첫째는 천거하지 않아도 응시해서, 선비가 응시하는 데 정원이 없는 것이고, 둘째는 학사 행정(學事行政)에 관원이 없고 교수가 간여하지 않는 것이고, 셋째는 대ㆍ소과(大小科)에 등이 달라서 공부하는 데에 전일하지 못한 것이고, 넷째는 한 가지 기예로 뽑으므로 요행으로 차지하는 것을 금하기 어려운 것이고, 다섯째는 시각이 너무 길므로 차술(借述)의 여가가 있음이고, 여섯째는 고사, 선발이 정밀하지 못하여 사의(私意)가 멋대로 흐를 수 있고, 일곱째는 시권(試券)을 반포하지 않으니 잘함과 못함을 징험하기 어렵고, 여덟째는 잡시(雜試)가 너무 잦아서 수업할 날짜가 없음이고, 아홉째는 경과(慶科)가 연달아서 요행을 넘보는 문이 열려 있는 것이고, 열째는 명경(明經)을 주로 했으나 선발해서 등용함에는 길이 다른 것이다. 열 가지 그릇된 것이 줄기가 되어 천만 가닥이 착잡하게 서로 얽혀 오늘날에 와서는 무너지고 어지러워 기강이 없어져서 하나의 장난으로 되어, 인재가 일어나지 않으므로 국운은 시들어간다. 나는 과거 폐단은 지금에 무엇보다 먼저 바로잡아야 한다고 생각되기로 대략 들어서 논한다. 거액의 수효는 중국 제도가 있으니, 그것을 본뜨기는 어렵지 않다.
생각건대, 당송 때 주현(州縣)의 거자(擧子) 정원은 상고할 만한 문헌이 없으나, 명나라 제도는 지금 《예부칙례(禮部則例)》에 기재된 것이 바로 그 유문(遺文 : 남아서 내려온 글)을 대략 산삭(刪削)하고 윤색한 것이다. 무릇 17성(省)의 여러 주(州), 여러 현(縣)에 각각 거자의 정원이 있어, 아무 현에 액진생(額進生) 20명, 늠생(廩生) 20명, 증생(增生) 20명이라는 것이었다. 많은 데는 30명이고 적은 데는 10명이기도 한데 각각 문풍(文風 : 문교와 같음)의 쇠퇴와 흥왕(興旺)으로서 많게 하기도 적게 하기도 한다. 세 등급의 학생 외에 또 청생(靑生)ㆍ동생(童生)이라는 명목이 있다. 대개 주ㆍ현에 각각 교관이 있어 가끔 과시하는데, 늠생 이하는 모두 현시(縣試)에 참여하도록 허가하는 인원이고, 오직 액진생 한 등급만이 바로 성시(省試)에 응시[赴擧]할 수 있는 인원이 된다. 그 법이 엄격해서 액진생 이외는 한 사람도 감히 난동(亂動)하지 못하도록 되어 있으니 이것은 진실로 당송 이래로 서로 인습한 본법(本法)이고, 우리나라 풍속 같은 것은 천하에 아직 있지 않았다.
거액의(擧額議)에, “옛적에는 천거만 있었고 과시는 없었는데, 천거에 과시가 있게 된 것은 한 순제(漢順帝)가 좌웅(左雄)의 논의를 따름으로부터이다.” 했다(序官에 보임) 남이 나를 임금에게 천거했는데 임금이 믿지 않고 나를 불러 재능을 시험하더라도 나는 벌써 부끄러운 일인데, 하물며 처음부터 나를 천거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내가 스스로 재능을 자랑해서 유사에게 판다면, 이것은 싱싱함을 외치면서 생선을 팔고, 달다고 자랑해서 외를 파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출발하는 처음부터 그 명절(名節 : 명예와 절조)은 땅에 떨어지는데, 윗사람이 이것으로써 아랫사람을 인도하고 아랫사람은 이것으로써 윗사람을 섬겨서 400년을 내려오며 고치지 못하였으니, 나는 적이 애석하게 여긴다. 한(漢)ㆍ위(魏)ㆍ당(唐)ㆍ송(宋)에서 아래로 명ㆍ청에 미치도록 그 선거법이 비록 같지는 않았으나, 대략 선발한 다음에 천거가 있고 천거가 있은 다음에 시험이 있었던 것은 그렇지 않았던 때가 없었는데, 오직 우리나라의 법만은 천거하지 않고 시험보여 오늘에 와서는 천 가지 병통과 백 가지 폐단이 모두 여기에 연유해서 일어나고 있으니, 이 법을 고치지 않고서는 비록 장량(張良)ㆍ진평(陳平) 같은 지혜가 있다 하더라도 그 폐단을 구해내지 못할 것이다.
문장에 능숙한 자를 거벽이라 이르고, 글씨에 능숙한 자를 사수(寫手)라 이르며, 자리ㆍ우산ㆍ쟁개비(銚銼) 따위 기구를 나르는 자를 수종(隨從)이라 이르며, 수종 중에 천한 자를 노유(奴儒)라 이르며, 노유 중에 선봉이 된 자를 선접(先接)이라 이르는데, 붉은 빛 짧은 저고리에 고양이 귀 같은 검은 건(巾 : 儒巾)을 쓰고서, 혹은 어깨에 대나무창을 메기도 하고 혹은 쇠몽둥이를 손에 들기도 하며 혹은 짚자리를 가지기도 하고 혹은 평상(平床)을 들기도 하여 노한 눈알이 겉으로 불거지고 주먹을 어지럽게 옆으로 휘두르고 고함을 지르면서 먼저 오르는데, 뛰면서 앞을 다투어 현제판(懸題板 : 과거 때 글제를 내거는 널빤지) 밑으로 달려들고 있으니, 만약 중국 사람이 와서 이런 꼴을 본다면 장차 우리를 어떤 사람들이라 이르겠는가?
이리하여 부잣집 자식은 입에 아직 비린내가 나고 눈으로는 정자(丁字)를 모르는 자라 할지라도 거벽의 글을 빌리고 사수의 글씨를 빌려서 그 시권을 바친다. 향시가 이 모양이니 경시(京試)도 이와 같을 것이다. 회시를 보기에 미쳐서는 사람을 사서 대신 들여보내어 짓고 쓰며, 아비를 바꾸고 할아비를 바꿔서 위문(闈門)에 바치는데,봉미(封彌)를 위조하고 관절(關節 : 속칭 軍號라고 이름)을 통한다.
방(榜)을 걸어서 이름을 호창(呼唱)하는 때가 되면 선진(先進 : 선배)이라는 자가 골목에 들어와서 연해 부르면 신은(新恩 : 문과에 새로 급제한 사람)이라는 자는 뒷짐을 지고 나와서 맞이한다. 밀치고 당기며 욕을 보이는데 혹 하늘을 우러러 크게 웃게 하기도 하고 혹은 땅에 엎드려서 엉금엉금 기게도 하며 방게(嗙) 걸음과 부엉이 울음으로 기괴한 형상을 하지 않는 짓이 없다. 끝에 가서는 진한 먹에 붓을 적셔서 먼저 한쪽 눈에 먹칠하여 통령(通鈴)이라 이르고, 다음 양눈에 칠하여 쌍령(雙鈴)이라 이르고, 코에 칠하고 입에 칠하고 눈썹과 수염에 칠한 다음 많은 사람에게 조리 돌려서 웃음거리를 제공한다. 이에 온 낯에 칠해서 먹돼지라 부르며, 흰 밀가루를 뿌려서 회시(灰尸)라고 이르는데, 그런 짓을 당하는 자는 영광으로 여기고, 보는 자는 부러워한다.
만약 중국 사람이 와서 이 거동을 본다면, 장차 우리를 어떤 사람이라 이르겠는가? 우리나라 사람은 한 자밤 되는 상투로써 온갖 교만을 떨지만 나라 안에서의 수치스러운 행동은 이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니 어찌 애석하지 않는가? 지금에 이 폐단을 바로잡고자 한다면, 오직 거액을 먼저 정해야 한다. 거액이 정해지면 재주 없는 자는 스스로 단념할 것이며, 재주 없는 자가 스스로 단념하면 선거가 맑아지고, 선거가 맑아지면 입장하는 자가 적어지며, 입장하는 자가 적으면 간사와 거짓이 용납되지 못할 것이다. 먼저 덕행으로써 선사(選士)를 충수하고, 문학으로써 전형(銓衡)하여 거인(擧人)에 충수한다면, 덕행과 문학 있는 선비가 어찌 부엉이 울음을 하려 하겠는가?
현(縣)에는 교관(敎官)을 두고 성(省)에는 제학(提學)을 두면 과거에 전문(專門)으로 공부할 자가 있을 것이다.
생각건대, 국전(國典)에, “여러 주에 교수를 두고 군ㆍ현에 훈도(訓導)를 둔다.” 하였으니, 이것은 본래 송ㆍ명(宋明) 시대의 유제(遺制)인데 교관은 현재(縣宰)와 같고, 제학(提學)은 감사(監司)와 같다. 제학을 독학자(督學者)라 칭하며, 학정제거(學政提擧)를 또한 학정제독(學政提督)이라 칭하기도 하는데 우리나라에서 양관 학사(兩館學士)를 제학이라 칭함은 본래 잘못된 것이다(學이란 學宮이라는 학이고 學士라는 학이 아님). 과거가 이미 나라의 큰 정사가 되었으니 그 실시의 장황함이 이와 같지 않을 수 없다.
교관사례(敎官事例)에, “교관을 부(部)에서 선발한 후에(吏部에서 선발한다는 것) 본성무신(本省撫臣 : 무신은 우리나라 감사와 같음)의 고시에 나가도록 한다. 고시에 1ㆍ2ㆍ3등이 된 자는 발급한 증빙서에 준해서 부임하도록 한다(공문을 주어서 증빙함). 4ㆍ5등은 돌아가서 학습하도록 했다가 3년 후에 다시 고시를 시행하며(그 고장에 돌아가 진학함), 6등인 자는 그 직을 혁파시킨다.” 했다.
생각건대, 청나라 법에, “각성(各省) 교관을 예부에서 몇 사람 선발하여 각성에 나누어 보내서, 무신(撫臣)으로 고시시켜 높은 등에 합격한 자만을 이에 부임시킨다.” 했다.
또 “초하루ㆍ보름, 선강(宣講)할 때에 여러 학생을 명륜당(明倫堂)에 모아 어제 훈계(御製訓戒)를 공손하게 외게 한 다음에 여러 학생에게 조심해서 따르도록 한다(督撫가 도임하거나, 學政이 按臨해서 先師(공자를 이르는 말임)를 배알하는 날에 그 교관이 여러 학생을 거느리고 宣讀하기를 의식대로 한다). 교관이 통솔하는 데에 법이 없어서, 소속된 생원 중에 군중을 모아, 고시를 방해하는 등의 일이 있으면 그 교관의 관직을 혁파한다.” 했다.
청나라 조훈(祖訓)은 모두 여러 학생을 훈계해서 그 방자한 행동을 금한 것이었다. 군중을 모아서 고시를 방해한다는 것은 곧 우리나라의 난장으로 인해 파장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무릇 제학의 연고(年考)와 독무의 성시(省試)에 이와 같은 일이 일어나면, 본 교관을 조사해서 논죄하였다.
학정 사례에, “제독학정은 17성에 각각 한 사람씩이고 임기는 만 3년이다. 모두 이부를 경유해서 개열(開列)한 다음, 청지(請旨 : 皇旨를 청함) 간용(簡用 : 簡拔해서 임용함)하는데 예부를 경유해서 내각에 전보(轉報)하며 좌명칙서(坐名勑書 : 우리나라의 除官敎旨)를 지어서 발급한다.” 했다.
개열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장망(長望)이고, 청지 간용이라는 것은 우리나라의 낙점 하비(落點下批)인데, 예부에 내리어 내각을 경유해서 이에 칙지(勅旨)를 발급하였으니 그 선발을 신중히 했다. 또 “학정은 이르는 곳마다 사사 편지를 접수하지 못하며, 공적 장소가 아니면 관리와 사ㆍ생(師生)을 접견하지 못한다. 사ㆍ생은 포복해서 영송(迎送)하도록 한다(학정이 고시할 때에 교관과 提調官이 稟議할 일이 있으면 합동해서 面議함이 마땅하며, 한 사람만이 사적으로 보는 것은 허가하지 않음). 오직 교관과 생원(生員)의 범법이 있으면 이에 엄중한 징계를 할 뿐이고, 함부로 백성의 사송(詞訟)을 접수하거나 탐묵(貪墨)해서 법 아닌 짓을 한 자는 독무가 곧 참주(參奏)한다.” 했다. 위에 기록된 두 절(節)은 사정을 막는 것이고, 다음 한 절은 제 권한 이외의 짓을 하는 것을 금한 것이다. 또 “학정이 대동하는 막료(幕僚)는 본성에서 500리 밖에 있는 자라야 맞아오도록 인준한다.” 했다.
건륭(乾隆 : 淸 高宗의 연호, 1736~1795) 때에 하유하기를, “국가에서 급여하는 학정의 양렴(養廉)이 본래 풍족한데 만약 염금(廉金)을 아껴서 이름 있는 막료를 많이 맞이하기를 싫어한다면 그 비루함을 어찌 말하겠는가? 이후로는 각성 학정(學政)은 문자 고열(考閱)을 잘하는 막료를 반드시 많이 택하라. 아주 작은 성이라도 5~6명이 못 되어서는 안된다.” 했다. 제학이 부임하면서 문사(文士)를 많이 대동해서 함께 고시하는 것은 또한 좋은 법이었다.
대ㆍ소(大小) 두 과시(科試)를 합쳐서 하나로 함이 마땅하고, 시험하는 문체도 다르게 하여서는 안 된다. 당ㆍ송 때 과거 제도는 마씨(馬氏 : 馬端臨)의 《통고(通考)》에 자세하지만 대ㆍ소과가 다르다는 것은 없다. 홍무(洪武 : 명 태조의 연호, 1368~1398) 4년 신해(辛亥) 2월에 진사(進士)를 친림 책시(親臨策試)해서 오종백(吳宗伯) 등에게 급제 출신(及第出身)을 차등 있게 주었다. 홍무 17년 갑자년 봄에 과거의 성식(成式 : 확정된 법식)을 반포하여 시행했는데, 3년마다 한 차례 대비하는 것이 이때로부터 일정한 제도가 되었다. 홍무 20년 정묘(丁卯)에 정시(廷試)를 실시하여, 임형태(任亨泰) 등에게 급제 출신을 차등 있게 하사했다.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장원방(狀元坊)을 세워서 정표(旌表)하도록 하였는데, 성지(聖旨)로써 방을 세우는 것이 이로부터 비롯되었다.
살피건대, 명나라 제도에는 대ㆍ소과가 없고 다만 등제(等第)를 주는 데 차등이 있을 뿐이었다. 소과ㆍ대과에 시험하는 기예가 각각 다른 것은 우리나라 법이다.
《열하일기(熱河日記)》에, “중국의 진사에 급제 출신(及第出身)은 1갑(甲 : 과거에 최우등인 것)이 세 사람인데, 장원 다음이 방안(榜眼)이고 그 다음은 탐화(探花)이다. 장원은 바로 한림 수찬(翰林修撰)에 제수(除授)하고 방안과 탐화는 한림 편수(編修)를 삼는다. 2갑이 80~90명인데 제 1인을 전로(傳臚)라 이르며 또한 한림에 제수하고, 3갑 300여 명은 2갑과 더불어 모두 조고(朝考)에 들어가서 혹 한림에 낙점(落點)받기도 하고 혹은 6부 주사(主事)에, 혹은 지현(知縣)에 제수되기도 하고 여기에 참여되지 못한 자는 귀반진사(歸班進士)가 되는데, 우리나라에서 지벌(地閥)을 비교해서 삼관(三館)에 나누어 배속하는 규정과는 같지 않다.” 했다.
시험하는 문체는 두어 가지에 불과한데, 혹 한 가지 기예로써 표준을 취함은 좋은 제도가 아니다. 당송 이래로, 혹 명경(明經)을 주로 하고 혹은 시부(詩賦)를 주로 한 것이 모두 마단림의 《통고》에 자세하다. 홍무 3년 경술(庚戌)에 과거를 열어 선비를 뽑되, 과거 격식을 정하게 하였다. 초장(初場)에는 경의(經義 : 경서의 뜻을 해설하는 것) 일도(一道), 사서의(四書義 : 사서의 뜻을 해설하는 것) 일도이고, 2장에는 논(論) 일도, 고(誥)ㆍ표(表)ㆍ전(箋)ㆍ내과(內科) 일도이며, 3장에는 책(策) 일도를 하여, 정식(程式)에 합격한 자는 10일 후에 기(騎)ㆍ사(射)ㆍ서(書)ㆍ산(算)ㆍ율(律) 다섯 가지를 시험했다. 생각건대, 대ㆍ소과를 나누어서 두 길로 함으로 식견이 얕은 한 가지 기예뿐인 사람들이 요행을 바라고 분주하게 달려드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강경(講經)과 제술(製述)을 나누어서 두 길로 함으로 영달(榮達)한 자는 경서에 어둡고 경서를 공부하는 자는 경서에 거치니,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시부(詩賦)로 선비를 뽑으니 경박하고 간사한 사람이 앞줄에 있게 되고, 망령되고 실상 없는 학문이 온 세상에 가득 차게 되어 그 폐단을 이루 말할 수 없다.
적이 생각건대 1만 호 되는 고을은 그 방리(坊里)를 100으로 헤아리고 1천 호 되는 고을은 그 방리를 10으로써 헤아릴 수 있는데 방리마다 서재(書齋) 하나를 세워서 부자(夫子 : 선생) 한 사람을 앉혀놓고 거기에 수업하는 자가 수십 명이 된다. 어린이(毁齒)로부터 50세까지 사시에 계속되는 학업은 곧 시부(詩賦)나 배우고 항우(項羽)ㆍ패공(沛公)의 일과 신선(神仙)ㆍ창기(娼妓)의 이야기를 조석으로 풍송(諷誦)하며 길게 영탄하는 데에 불과하다. 1천만 명 중에 요행으로 한 사람이 진사가 될 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흰 머리를 휘날리며, 부서진 갓과 해어진 옷으로 낙백(落魄 : 뜻을 얻지 못함)해서 황당(荒唐 : 방종과 같음)하다가 서로 넘어져 죽어가니 천하에 괴란(壞亂)된 법, 잘못된 법으로서 이보다 심한 것이 없는데 무엇 때문에 고치지 않겠는가?
《유산필담(酉山筆談)》에 “청나라 법은 주ㆍ현 학교에 각각 교관(敎官)을 두어서(우리나라에 있었던 훈도와 같은 것임), 달마다 정문(程文)을 고과(考課)하는데, 서의(書義) 한 편(사서의), 배율(排律) 한 수(首 : 5言 68韻), 책문(策問 : 혹 史論) 일도, 율문(律文) 두어 조목(條目 : 刑名을 講함)이다. 4계(季) 고과에는 특별히 경의(5경의)ㆍ배율ㆍ사(史)ㆍ책(策)을 시험하고 우등을 뽑아서 제학(提學)에게 보낸다.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년을 식년(式年)으로 한다. 가령 해년(亥年)에 회시(會試)한다면 자(子)ㆍ축(丑) 두 해에 제학이 과시를 사사로 베풀어서 세과(歲科)라고 부르는데, 소위 3년에 두 번 시험한다는 것이다. 거기에 우등한 시권(試券) 10장을 예부(禮部)에 올린다. 축년(丑年) 가을에 이에 향시(鄕試)를 선시하는데 조정(朝廷)에서 별도로 고관(考官)을 한성에 두 사람씩 보낸다. 또 주현 관원 두어 사람을 동고관(同考官)으로 차출해서(우리나라 법과 같음) 법대로 선발한다. 제 1장은 서의 삼도(三道 : 《논어》ㆍ《맹자》에 각 한 제목, 《중용》ㆍ《대학》에서 각 한 제목임)와 배율 한 수(5언 8운)이고, 제2장에는 경의(經義) 오도(五道 : 5경에서 한 제목씩임)이고, 제3장에는 책문(策問) 오도(제목은 300자를 한정함)이다. 그 다음해 봄에 경사(京師)에서 회시(會試)하여 또한 3장을 고시하는데, 향시법과 같이 한다.” 했다.생각건대, 명나라 제도는 제 1장에 경의 일도, 사서의 일도를 시험했는데, 지금 제도에는 경의를 없앴으니 불편한 듯하다.
또한 명나라 제도는 제2장에 사론(史論) 일도, 사육문(四六文) 일도를 시험했는데, 지금 제도는 경의 네 편, 배율 한 수를 시험하니 역시 불편한 듯하다. 경의와 서의를 반드시 양일에 갈라서 시험할 것이 아니며, 조(詔)ㆍ고(誥)ㆍ표(表)ㆍ전(箋)은 쓰임이 요긴한데 3장 안에 시험하는 데가 없음은 마땅치 않다. 책문 오도는 비록 옛법이기는 하나(당나라 제도로서 序官에 보임) 복잡하니 또한 마땅치 않을 듯하다.
총괄하건대, 한 장에 제목을 둘이나 셋을 내어서 한 사람에게 모두 응시하도록 하는 것은 당나라 이래로 중국 본래의 법이었다. 우리나라는 소과(小科) 제 2장에 경의 한 편, 사서의 한 편을 시험하지만, 경의를 공부한 자가 있고 서의를 공부한 자가 있어서, 한 사람이 두 가지를 다 할 수 없다. 대과(大科) 제2장에는 부(賦) 한 편, 표ㆍ전 한 편을 시험하지만 그 예가 또한 그러하다. 오직 중고(中古) 이전에는 소과 제 1장에 시부(詩賦)를 구편(具編)하는 법이 있었으나 지금은 쓰지 않는 바로서, 모두 좋지 못한 법이었다. 재주가 우수하고 문장이 넉넉한 자는 잠깐 사이에 한 편을 마치고 이에 그 동제(同儕)를 도와 좌우로 수응하여 3~4명에게 대신 지어준다. 이리하여 차술(借述)이 일어나고 요행을 엿보는 자가 생겨나니, 만약 하루에 시험하는 것이 반드시 많은 시간을 써야만 바칠 수 있도록 한다면 이런 폐단이 어찌 있겠는가?
하루에 여러 문체를 시험하면 비록 시간이 많더라도 남을 구원할 겨를이 없을 것이다.
나는 생각하기를, 우리나라 법은 하루에 다만 한 편만을 시험하고 있으니 문장이 넉넉하고 재주가 민첩한 자는 두 편 세 편까지 짓는 까닭으로 차술하는 무리가 항상 수천 명이나 된다. 만약 하루 동안에 시험하는 것이 삼도ㆍ오도라면 굉장한 문사(文詞)와 박흡(博洽)한 학식이라도 겨우 제 일을 이룩할 뿐인데 어느 겨를에 남을 구원하겠는가? 차술의 폐단은 저절로 없어질 것이다. 근세에 몇 사람의 재신(宰臣)이 광주 유수(廣州留守)와 호남안찰사(湖南按察使)가 되어, 도회시(都會試)를 하면서 하루에 세 문제를 아울러 내었었는데, 문장이 능숙한 선비는 좋은 법이라 일렀다.
《필담》에 “부(賦)라는 것은 쓸데없는 문체이니 없애도 좋거니와 표ㆍ전ㆍ사론은 없앨 수 없다. 이제 제 1장에 서의ㆍ경의 각 삼도를 시험하고, 제2장에 배율 두 수와 표ㆍ전 한 수씩을 시험하며, 제3장에 사론(史論) 일도, 책문 삼도를 시험하면 거의 마땅할 듯하다. 과거 규정이 이와 같다면 총명하고 박흡한 선비라야 과시에 응할 것이며, 재주가 거칠고 학식이 공허한 사람은 저절로 기가 죽을 것이니, 과거의 폐단은 바로잡지 않더라도 저절로 맑아질 것이다. 그 덕행과 재간이 훌륭하여 문예로 따질 수 없는 사람은 선발하는 길을 별도로 개설(開設)할 것이며, 무시하여서는 안된다.” 했다.
고선(考選)이 정밀하지 않고 시권(試券)을 반포하지 않으면 선비가 표준할 바를 알 수 없을 것이다.
청나라 법은, 향시(鄕試)에 주고관(主考官) 두 사람을 서울에서 차출해서 보내고 동고관(同考官) 두 사람은 본성에서 뽑는다(우리나라 법과 같음). 회시(會試)에는 주고관이 한 사람이고 동고관은 혹 3~4명이 되기도 하는데, 무릇, 정ㆍ부(正副) 고관이 쓰는 붓은 각각 달라서, 하나는 주(硃)색, 하나는 청색, 하나는 자황색, 하나는 녹색, 하나는 자(紫)색이다. 각자 그 붓으로 비평하여 시권 끝에다 각각 총평을 기록한다. 이미 고시해서 방(榜)을 낸 다음에는, 선발에 합격한 시권과 떨어진 시권을 아울러서 거인(擧人)에게 나누어 보여주어 거인에게 당선과 낙선한 까닭을 알도록 한다. 그러므로 회시에는 본래 정원은 없으나 떨어진 자도 끝내 원망하는 말이 없었다.
3년마다 대비(大比)하는 외에 과시가 있음은 마땅치 않다. 오직 두 해 세과(歲課)에 상전(賞典)이 있을 뿐이다.
《통편(通編)》을 상고해보니 서울에는 승보(陞補)와 학제(學製)가 있고, 향(鄕)에 주시(州試 : 이른바 初擇이라는 것)와 도회시(都會試)가 있으며, 또 절제(節製 : 人日ㆍ삼짇날ㆍ7석ㆍ9일에 泮製가 있음)ㆍ도기(到記 : 봄ㆍ가을에 각 한 차례)ㆍ감제(柑製)ㆍ응제(應製) 등 명색이 있어서 분경(奔競)하는 것이 습관이 되고, 등후(等候)하는 것이 시각을 넘어 모두 선비의 추향을 단정하지 못하게 하고 공부에 전일하지 못하게 하니 빨리 정파(停罷)함이 마땅하며, 그대로 인습하여서는 안 된다.
영락(永樂 : 명 성조의 연호, 1403~24) 4년 병술(丙戌) 2월에 천하의 거인을 회시(會試)하는데, 시독학사(侍讀學士) 왕달(王達)ㆍ세마(洗馬) 양보(楊溥)를 고시관(考試官)에 명해서, 주진(朱縉) 등 220명을 뽑았고, 3월에 정시(廷試)해서 진사 임환(林環) 등에게 급제 출신을 차등 있게 주었다. 영락 7년 기축(己丑) 2월에 천하 공사(貢士)를 회시해서 진수(陳璲) 등 100명을 뽑았다. 살피건대, 3년마다 한 차례 과거하는 제도는 송나라 영종(英宗) 치평(治平) 3년(1066)에 시작되었는데, 송나라 제도와 원(元)나라 제도는 모두 진(辰)ㆍ술(戌)ㆍ축(丑)ㆍ미(未)년을 과거하는 해로 삼았다(오직 송 高宗 紹興 2년ㆍ5년ㆍ8년에는 子ㆍ卯ㆍ午년에 과거를 베풀어서 선비를 뽑았음). 명나라 초기에는 술(戌)ㆍ해(亥)ㆍ자(子)ㆍ묘(卯)년을 혼합해서 쓰다가, 영락 4년 병술부터 다시 진ㆍ술ㆍ축ㆍ미년을 과거 시기로 삼아서 명나라 시대가 끝나도록 다시 고치지 않았다. 우리나라에서는 자ㆍ오ㆍ묘ㆍ유를 식년으로 하는 것이 더욱 이치에 합당하다. 오직 나라에 큰 연고가 있거나 혹은 흉년이 크게 들면 한 해를 물린다.
학정사례(學政事例)에 “학정이 과고(科考 : 두 식년 사이가 두 해인데 사고가 없으면 제학이 이에 과시를 베풀었음)해서 우등한 시권 10장을 뽑아서 과시가 끝나는 날에 전부 해부(解部)에 보내서(그곳 文風을 참작해서 5명이나 10명을 표준함) 두 차례 조사하고, 대신(大臣)이 복감(覆勘 : 재심해서 마감함)하는데, 명제(命題)가 괴벽(怪僻)하거나 문체에 하자가 있는 자는 예에 비추어서 지참(指參 : 지적해서 탄핵함)한다.” 했다. 또 “학정이 세고(歲考)하는 것은 주현 교직 등 관원에게 생원들의 우열을 조사, 보고하는 것인데 각자 사적을 갖추어 적고, 봉해서 보내게 한다. 학정은 그 보고가 확실한가를 직접 살핀 다음, 임기가 만료되기를 기다렸다가 독무(督撫)와 회동(會同)해서 증험하여 상주하는 문서를 갖추어서 그 중에 행의(行誼)가 가장 현저한 자를 택해서 태학에 승진, 입학시키는데 큰 성(省)이라도 5~6명을 넘지 못하고, 중간 성은 3~4명을 넘지 못하며, 작은 성은 1~2명을 넘지 못한다. 그 다음인 자는 학정이 요량해서 포상한다.” 했다.
중국에는 소과(小科)가 없고, 이 공생(貢生 : 각성에서 선발한 생원)을 태학생으로 삼는 것이 있었다. 경과(慶科)ㆍ알성과(謁聖科)와 별시(別試)ㆍ정시(庭試) 따위 과시가 많을수록 그 법제는 더욱 어지러워진다. 경과라는 것은 명ㆍ청(明淸)에서 은과(恩科)라고 이르는 것이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신민(臣民)은 저절로 춤추며 박수칠 것인데 어찌 반드시 과거를 베풀어서 선비를 뽑은 다음이라야 빛나게 태평함을 장식한다는 것인가? 무릇 과거라는 것은 붙는 사람이 한둘이면 떨어지는 사람은 천백이나 되며, 한 사람이 기뻐서 춤추면 천 사람은 눈물을 뿌리는데 그 백성과 함께 즐거워 한다는 것이 어디에 있는가? 경과는 옛법이 아니니 정파함이 온당하다. 거인(擧人)이 2년 동안 수업해서 1년을 분주해도 오히려 총총한데 하물며 병년시(丙年試)ㆍ알성시(謁聖試)와 월과(月課)ㆍ순제(旬製)가 좌우로 시끄럽게 하니 너무 잦지 않은가? 3년 대비하는 외에 모든 과거는 모두 편당하지 못하다. 학정사례에 “특히 은과를 개설하는데, 혹 향시 기일이 가까워서 과고(科考)를 두루 하지 못하겠으면 향시 마치기를 기다렸다가 보충해서 과고를 시행한다.” 했다.
은과는 우리나라에서 이르는 경과이다. 학정 세고(歲考)는 매양 과거없는 해에 하는데, 은과와 서로 상치되면 향시에 방해가 되므로 세과(歲科)를 물려서 거행했다. 명경과(明經科)는 바삐 정파함이 마땅하며, 그대로 할 수는 없다.
적이 상고하건대 우리나라의 제도에 명경과는 본래 아름다운 제도였다. 향시 3장에 제 1장은 사서의 의심나는 뜻과 사론을 시험하고, 제 2장은 부ㆍ표를 시험하며, 제 3장은 대책을 시험했다. 회시(會試)하는 날에 미쳐서는 강(講)한 삼경ㆍ사서의 구두(句讀 : 읽기 편하게 하기 위하여 구절에 점을 찍는 일)에 틀림이 없는 사람만 10여 명을 뽑고, 그 나머지 구두에 조(粗)ㆍ약(畧)을 한 자는 다시 부ㆍ표ㆍ책을 시험해서 그 모자라는 점수(等)를 보충하는데(15分이 되면 급제로 했음), 생획(生畫)이라 일렀다. 생획해서 급제한 자도 매양 20여 명이나 되어 그 규정이 이와 같았던 까닭으로 서울 귀족의 자제는 모두 명경을 익혔고, 사적(仕籍)에 오르게 되면 옥서(玉署 : 弘文館의 별칭)ㆍ전부(銓部 : 吏曹의 별칭)의 문형(文衡 : 大提學의 별칭)ㆍ총재(冢宰) 등을 할 수 있어서 경과ㆍ별시로서 과거에 오른 자와 털끝만큼도 차별이 없었는데 강희(康熙) 연대부터 강경(講經) 규정이 갑자기 엄격해져서 대주(大注)ㆍ소주(小注)와 편제(篇題)ㆍ서사(序辭)ㆍ배송(背誦)하는 것이 예전과 비교하면 3배나 어려웠다.
그리고 토서(土書 : 한글)로 전해(詮解)한 것을 언해라 하는데 한 글자라도 조금만 어긋나면 문득 낙방(落榜)시켰다. 이리하여 경화(京華 : 서울)에 행세하는 선비는 경서 공부를 익히지 않고, 서북도(西北道)의 지벌(地閥) 낮은 씨족과 먼 지역 빈한한 농가 자제가 이 학업을 하다가 정력이 이미 고갈되고 용모가 크게 상하도록 하류에 머뭇거리다가 잡기(雜崎)에로 돌아가고, 주름진 목과 누렇게 된 얼굴로 여전히 낙백(落魄)하며, 조그만 우승(郵丞)과 작은 현으로 명정(銘旌)이나 쓰게 되니 비록 과거에 올랐으나 실상은 온 나라의 천류(賤流)이다.
이른바 3년마다 대비한다는 것은 곧 이 명경에 급제한 사람이고, 관각(館閣)에 출입하며 지위가 경상(卿相)에 오르는 자는 모두 경과 출신이니, 명목과 실제가 서로 맞지 않음이 이보다 심한 것이 어디에 있겠는가? 나는 생각하기를, 과거 규정을 빨리 고쳐서 명경ㆍ제술을 합쳐 한 과목으로 만들며, 대과ㆍ소과를 합쳐 한 길로 만들고 오직 3년 만에 대비하는 것만 남기고, 경과와 절제를 없애면 거의 선거에 법이 있게 될 것이라 여겨진다.
전시(殿試)한 후에 또 조고(朝考)하는 것은 또한 좋은 법이다.
《열하일기》에 “전시에는 책(策) 한 가지만 시험하는데, 과거 방법은 또한 1주야에 반드시 1만 여 언(言)을 지은 다음이라야 격식에 맞으며, 또 그 격식에 하나도 어긋남이 없은 다음이라야 이에 한림(翰林)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향ㆍ회시에 策 五道를 試問하는데, 세 가지는 古策이고, 두 가지는 時務이며, 殿試에는 시무 한 가지만 시문한다). 전시 후에 또 조고가 있어, 조(詔)ㆍ고(誥)ㆍ논ㆍ시(詩)를 시험하는데 다만 하루 안에 마치도록 허가한다. 조고에 낙방한 자를 귀반(歸班)이라 부른다. 그러나 한 번 향시에 합격하면 거인(擧人)이 되어 회시마다 바로 응시한다. 비록 회시에 합격하지 못했더라도 10여 년 후에는 지현(知縣) 한 자리는 얻는다.”(또 앞에 말했음) 했다.
조고법이 매우 좋다. 왜냐하면 정시가 존엄하니 졸렬함이 있더라도 오히려 부끄러움은 없다. 관각대신(館閣大臣)이 조당에 모여서, 혹은 경의를 묻고 혹은 사실(史實)을 물으며 혹은 시ㆍ표를 시험하는데, 그 능치 못한 자는 많은 사람이 모여앉은 곳에서 허실이 바로 탄로되어 평생의 명성이 이 날에 결정될 것이니, 부귀한 집의 어리석은 자식도 생각이 이 날에 미치면 반드시 문간만 바라보고 뒷걸음질을 할 것이다. 내가 일찍이 주이존(朱彛尊)ㆍ모기령(毛奇齡) 등의 문집(文集)을 보니 이 사람들은 모두 굉장한 문사(文詞)와 박흡한 학식으로서 이미 정시를 겪고 또 조고에 응시했는데, 그 명성이 해내에 떨친 것은 모두 이 날에 한 바였으니 또한 좋지 않은가? 그 법이 이와 같은 연고로, 중국에서는 무릇 거인으로 이름하는 자는 모두 능히 9경(經)을 관통하고 전사(全史)를 훤히 통하며 백가(百家)를 섭렵하고 당시의 일을 환하게 알아서 우리나라의 거인과 같지 않았다.
먼저 회시(會試)의 정원을 정해야 성시(省試)와 주시(州試)의 정원도 따라서 추정할 수 있다.
당송(唐宋) 이래로 공거(貢擧)에는 정원이 있어도 회시에는 정원이 없었는데, 아울러 《통고》에 모두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영락(永樂) 2년 갑신(甲申) 2월에 천하 공사(貢士)를 회시하면서, 시독학사(侍讀學士) 해진(解縉)과 황준(黃准)을 고시관(考試官)으로 삼아서 양상(楊相) 등 472명을 뽑았는데, 이보다 앞서 예부에서 회시에 선발할 원수(員數)를 주청(奏請)했다. 임금이 홍무(洪武) 때에 선발한 것이 몇인가를 하문하니 상서(尙書) 이지강(李至剛)이, “과거 때마다 같지 않아서 많을 때는 470여 명이고 적을 때는 30명이었습니다.” 했다. 임금은 “짐이 즉위한 후에 선비를 처음 뽑는 것이니 우선 많은 쪽을 따를 것이나, 다음에는 이것을 예로 하지 말라” 했다.
살피건대, 중국법은 예부터 내려오면서 회시에는 본래 정원이 없었으나, 대개 정식(程式)이 이미 분명하고 감별(鑑別)이 지극히 공정하여 정식에 맞는 자만 뽑고 정식에 맞지 않는 자는 버렸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제도는 만약 정식에 맞는 것만을 표준한다면, 합격한 자만으로는 장차 반열(班列)을 이루지 못할 것이니 그 인원을 확정해서 우리나라 제도대로 할 것이며 중국 제도를 따라서는 안 된다.
중국은 13성이나 되는 넓은 나라지만 회시에서 뽑는 선비가 많아야 300여 명을 넘지 않았고, 적을 때는 30여 명이었다. 위로 당송 때부터 아래로 명나라까지 그 예가 모두 그러했는데, 우리나라는 넓이가 중국의 2성을 당할 만하기에 불과하여 회시에 뽑는 선비는 급제 33명, 진사 200명도 지나친데, 하물며 증광시(增廣試)ㆍ별시(別試)ㆍ정시(庭試)ㆍ알성시(謁聖試)가 혹 해마다 연달아서 끊임이 없고 혹은 1년에 두 번이나 거행되기도 하여 급제 출신이 나라 안에 가득하므로 적은 녹(祿)으로 겨우 목을 추기다가 조금 뒤에 낙직(落職)하여 목[項]이 쭈그러지고 얼굴이 누렇게 되어 종신토록 조용(調用)되지 못하니, 그 선발해서 등용한다는 뜻이 어디에 있는가?
《필담(筆談)》에, “청국법은 세과(歲課)와 향시에 다 정원이 있으나 회시에는 본래 정원이 없다. 정식에 맞으면 뽑아서 구태여 도태(淘汰)하지 않고, 정식에 맞지 않으면 물리쳐서 구차하게 충수하지 않는다. 나라에 경사가 있으면 특히 은과(恩科)를 실시해서 거액(擧額)을, 혹 셋(큰 주와 현)을 증원하고 혹 한 둘(작은 고을)을 증원하나, 그 시액(試額)은 증가하지 않는다.” 했다(우리나라에는 본래 거액이 없고 은과를 증광이라 이름도 또한 잘못임).
회시 정원은 240명을 진사(進士)로 삼고 6분의 1을 뽑아서 급제로 한다. 회시에 진사 240명을 뽑아서 전방(前榜)진사와 합쳐 도시(都試)한 다음, 이에 도회(都會)에 응시하도록 해서 급제 40명을 뽑는다. 문ㆍ무과가 모두 같다.
생각건대, 진사 정원을 증가해서 40명을 많게 한 것은 증광시(增廣試)가 이미 없어져 백성이 적다고 여기기 때문이었다. 회시 정원의 갑절로 성시(省試)를 하고, 성시 정원의 갑절로 주시를 하며, 주시 정원의 갑절을 읍거(邑擧)로 한다. 읍거는 2분의 1을 더해서 읍선(邑選)으로 하는데, 읍선이란 선사(選士)이다. 회시란 서울에 모아서 시험하는 것이고, 성시(省試)란 12성에 나누어서 시험하는 것이고, 주시(州試)란 1성(省) 안에 혹 4주(泗川省)가 있고 혹은 3주(完南省ㆍ武南省)가 있는데, 여러 고을 사람을 합동으로 영솔하는 주에서 시험하는 것이다(지금 4長官의 公都會와 같음). 읍거란 주ㆍ군ㆍ현 각 읍에서 천거한 거인이며, 읍선이란 거인을 처음 선발하는 것이다. 경성(京城) 6부는 부시(部試)로써 주시에 당하고, 상시(庠試)로써 성시에 당한다. 6부에 문학으로 선발하는 선비가 960명인데(이미 地官 條例에 말했음), 3분의 1을 줄이면 거인(擧人)은 640명이 된다.
부시란 6부의 사(士)를 6학(學)에서 시험하고, 6수(遂)의 사를 6부에서 시험하는 것인데, 통해서 부시라고 부른다. 상시란 이미 부시를 거친 다음, 6부와 6수의 사를 다 6학에 모아 3일 동안 개장(開場)하여 상시라 부른다. 중외 거인의 정원 통계는 1천 920명인데, 주시에 합격한 자 960명과 성시에 합격한 자 480명이 모두 경시에 회시해서 240명을 뽑는다. 선사(選士)의 정원은 모두 2천 880명인데 3분의 1을 줄여서 거인의 정원으로 삼는다. 원제에, 식년에 진사 초시(進士初試)가 모두 1천 400명이었는데(한성부에 400명, 경기에 120명, 충청도ㆍ전라도에 각 180명, 경상도에 200명, 강원도ㆍ평안도에 각 90명, 황해도ㆍ함경도에 각 70명), 지금 초시 정원을 정하면서 대개 이것에 비교해서 율을 하였다. 비록 그 수효에 감한 것이 있으나, 회시에 진사 240명을 뽑게 된 것은 예전과 비교해서 증가했음이 있으니 거의 원망이 없을 것이다. 원제에, 식년 문과 초시가 모두 240명이었는데(館試 50명, 한성부 40명, 경기 20명, 충청도와 전라도 각 25명, 경상도 30명, 강원도와 평안도 각 15명, 황해도와 함경도가 각 10명), 이제 신구 진사(新舊進士)를 도시(都試)해서 240명을 뽑음도 이 수효에 의한 것이며(자세한 것은 다음에 있음), 도회에서 40명을 뽑으니 예전과 비교하면 7명이 증가되었다(문과에 본래 33명을 뽑았음). 지금 정한 중외 거인의 정원을 시험삼아 다음과 같은 표를 만든다.
ㆍ중외 거인의 정원
중외 거인의 정원
(단위 : 명)
문과(文科)
선사(選士)
거자(擧子)
주시(州試)
성시(省試)
회시(會試)
경성6부(京城六部)
960
640
320
160
80
봉천성(奉天省)
240
160
80
40
20
사천성(泗川省)
336
224
112
56
28
열동성(洌東省)
168
112
56
28
14
송해성(松海省)
168
112
56
28
14
완남성(完南省)
168
112
56
28
14
무남성(武南省)
168
112
56
28
14
영남성(嶺南省)
192
128
64
32
16
황남성(潢南省)
192
128
65
32
16
패서성(浿西省)
96
64
32
16
8
청서성(淸西省)
72
48
24
12
6
현도성(玄菟省)
72
48
24
12
6
만하성(滿河省)
48
32
16
8
4
총 수(總數)
2,880
1,920
960
480
240
앞에 열기한 회시의 정원은 선발을 반드시 이와 같이 한다는 것이 아니고 합격시켜야 될 수효가 이와 같다는 것을 밝힌 것이다.
생각건대, 대ㆍ소과를 이미 합쳐서 하나로 했는데 거액의 2천 명 미만(1천 920명)과 향시의 500명 미만(480명)은 너무 간략한 듯하다. 그러나 인재의 일어남은 숙속(菽粟)같이 어려워서 총명이 탁월하고 그 유에서 뛰어난 자는 1천만 명 중에 겨우 한둘이 있을 뿐이다. 내가 오랜 세월을 하읍(下邑)에 있었으므로 물정을 자세히 안다. 무릇 과유(科儒)로서 향리(鄕里)에 칭찬을 받는 자가 큰 읍(邑)에도 너댓에 불과하고 작은 읍에는 한둘에 불과하며 궁벽진 곳에는 혹 전연 없기도 하며, 비록 극히 많은 고장이라도 10여 명에 불과하다(광주와 남원 등). 그리고 이른바 과유라는 자도 혹시나 부(賦) 한 가지만을 익혔고 혹 의(義)나 의(疑) 중에 한 가지만 익혔을 뿐이며, 표ㆍ책을 익힌 자는 한 성을 통틀어도 겨우 두어 사람이 있을 뿐이다. 몸에 한 가지 기예만 갖추었으면 문득 실재(實才)라고 일컬어서 따르는 자 수십 명이 이를 우러르고(仰哺) 만약 두 가지 기예를 갖추었으면 드디어 거벽이라 일컬어서 따르는 자가 구름 같이 모여들어 한 샘물을 길어 먹는다.
그 물정이 이와 같은데 정원을 억지로 증가해서 구차하게 충수한다면 어리석고 비루한 사람들은 다 요행을 바라고 좌우로 청탁해서 서로 양보하기를 즐겨하지 않을 것이다. 천거를 주관하는 자도 또한 동쪽도 좋고, 서쪽도 좋다 하여 취하고 버리기에 곤란할 것이다. 정원을 넓힐수록 선거는 더욱 어려워진다. 비유하면 바둑 같아서 큰 읍과 큰 도시라도 바둑을 잘 두는 자는 두어 사람에 불과하며 두어 사람 외에는 떼바둑(隊碁)이라 이르는데, 떼바둑은 한이 없으니 뽑을 수가 없는 것과 같다. 하물며 대과 초시에 정원이 본래 적은 것은 응시할 수 있는 자가 아주 적기 때문이다. 지금 대ㆍ소과에 시험하는 기예가 이미 같다면 성시 정원을 곱절로 한 것만으로도 벌써 많은데 하물며 증가하여서 되겠는가? 성시 정원이 이미 그러하니 거인 정원도 그렇게 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문풍(文風)이 크게 변화해서 인재가 성하게 일어난다면 의논해서 그 정원을 증가하는데, 혹 주시 정원(960명)을 성시 정원으로 고치고 의논해서 주시를 없애더라도 오히려 늦지 않을 것이나 거인의 정원을 증가함은 절대로 불가하다.
이에 본성(本省) 거액(擧額)을 가지고 여러 주에 배정하면, 주에서는 본주(本州)의 거액을 가지고 여러 군현에 배정하는데, 문풍의 우열(優劣)을 비교해서 혹 많게도 혹 적게도 하여, 3년마다 하는 식년에 약간 증손(增損)한다.
처음에는 지난 세 식년의 향시 방목(榜目)을 상고하고, 그 발해(發解)한 인원의 다소(多小)를 보아 정원을 만든다. 가령 전주(全州)와 남원(南原)에 발해한 자가 가장 많으면 그 정원을 가장 많이 주고, 진도(珍島)ㆍ광양(光陽)에 발해한 자가 전연 없으면 그 정원을 적게 주는데, 많아도 열둘을 넘지 못하고 적은 데는 한둘뿐이다.
세 번의 식년을 시행하여 보고 성내(省內)의 공의(公議)를 탐문해서 만약 공평치 못하다 하면 세 번 식년 방목을 상고해서 무릇 정원은 많은데 발해한 자가 적으면 그 정원을 줄이고, 정원은 적은데 발해한 자가 많으면 그 정원을 증가한다.
나는 본래 경기에 살다가 중년에 유락(流落)해서 오래도록 남방에 살았으므로 경기와 호남의 실정을 익히 안다. 시험삼아 주현의 정원을 정해서 다음과 같이 열거한다(뒤의 표 참조).
제주(濟州) 세 읍(邑)은 9년에 한 번씩 어사를 보내서 네 사람을 선발하는데, 그 중에서 한 사람은 급제 출신이 되고 세 사람은 진사가 된다. 생각건대, 제주는 먼 바다 가운데에 있어서 문풍이 발전하지 못했으니 만약 별도로 도과(道科)를 실시하지 않으면 내지와 더불어 재능을 경쟁하기는 어렵다. 이미 도과를 선시한다면 그 도회에 승보(升補)시키는 것은 아울러 정파함이 마땅하다.
ㆍ경기 거인의 정원
(단위 : 명)
봉천성(奉天省)
광주(廣州)
화주(華州)
양주(楊州)
철주(鐵州)
심주(沁州)
광주 12
화주 12
양주 12
철주 4
삼주 5
여흥(驪興) 12
남양(南陽) 4
파평(坡平) 8
이천(伊川) 3
교동(喬桐) 1
죽산(竹山) 4
인천(仁川) 4
고양(高陽) 6
삭녕(朔寧) 2
안성(安城) 4
부평(富平) 4
가평(加平) 2
평강(平康) 2
과천(果川) 5
시흥(始興) 4
포천(抱川) 5
안협(安峽) 1
양성(陽城) 2
진위(振威) 2
영평(永平) 3
김화(金化) 2
용인(龍仁) 5
양천(陽川) 4
연천(漣川) 2
금성(金城) 1
이천(利川) 4
안산(安山) 6
적성(積城) 2
낭천(狼川) 1
양지(陽智) 2
김포(金浦) 4
음죽(陰竹) 2
통진(通津) 4
공 52
공 48
공 40
공 14
공 6
※ 위의 통계는 160명인데, 곧 경기 거인의 정원임.
ㆍ남방(무남성의 경우) 거인의 정원
(단위 : 명)
무남성(武南省)
광주(光州)
나주(羅州)
승주(昇州)
광주 12
나주 12
승주 8
장성(長城) 7
영광(靈光) 6
장흥(長興) 5
능성(綾城) 4
영암(靈巖) 4
보성(寶城) 4
담양(潭陽) 4
함평(咸平) 4
광양(光陽) 2
창평(昌平) 5
무안(務安) 3
흥양(興陽) 3
화순(和順) 4
강진(康津) 3
낙안(樂安) 3
남평(南平) 3
해남(海南) 4
동복(同福) 3
옥과(玉果) 3
진도(珍島) 2
금오(金鰲) 없음
곡성(谷城) 2
압해(押海) 없음
검주(黔州) 없음
공 44
공 38
공 28
※ 위의 통계는 112명임.또한 반드시 거액을 정해서 응시하도록 할 것이며, 행검(行檢) 없고 글을 못하는 자는 함부로 응시할 수 없도록 한다.
경성 6부는 교선(敎選)한 사(士)로 선사(選士)를 삼고 12성에는 여러 방(坊) 교장(敎長) 중에서 선사를 택해 세워서 그 정원에 충수하는데, 덕행으로 근본을 삼고 경술(經術)로 다음을 삼으며 문예(文藝)로 끝을 삼는다.
경성에서 선사하는 법은 이미 지관 수제(地官修制)에 기록했다. 12성에서 선발하는 법은 9취(聚)로써 1방을 삼아서(900호) 교장 세 사람을 둔다. 교장을 선발함에는 오직 덕행과 경술을 보고, 과사(科士)를 선발함에는 반드시 그 문예를 겸해서 보기 때문에 교장이 다 선사가 되지는 못한다.
거자가 두 사람이면 선사는 본래 세 사람을 뽑는다. 혹 한 읍에 거자가 한 사람뿐일 경우에는 선사를 임시로 두 사람을 두고, 혹 한 읍에 세 사람인 경우에는 선사 세 사람 외에 임시로 또 한 사람을 두며, 혹 한 읍에 다섯 사람인 경우에는 선사 다섯 사람 외에 또 한 사람을 임시로 둔다(무릇 奇數인 것은 모두 그러함). 무릇 임시로 두는 것은 반드시 두 사람으로써 한 거액을 당한다.
생각건대, 사람이 사람으로 되는 이유는 덕행뿐이다. 그러나 국가에서 사를 뽑음에는 덕행 외에 도예(道藝)를 겸하여 보므로 공자가 자공(子貢)의 물음에 답하기를 “자기 행동에 부끄러워할 줄을 알고 사방에 사신으로 나가서 임금의 명(命)을 욕되게 하지 않으면 사(士)라 할 수 있다.” 하였고, 또 그 다음 물음에 답하기를 “종족이 효(孝)라 칭찬하고 향당에서 공손(弟)하다고 칭찬하는 것이다.” 했으니, 이를 말미암아 본다면 사(士)를 뽑는 법을 알 수 있다.
식년(式年) 하지(夏至) 날마다 군수와 현령은 향교에 가서 공의를 널리 묻고 권점(圈點)해서 선사를 뽑는다. 선사를 뽑은 다음 또 거기에서 선발하여 거자(擧子)로 삼는다.
식년이란 자(子)ㆍ오(午)ㆍ묘(卯)ㆍ유(酉)년이다. 이해 봄에 신방(新榜)이 이미 나왔으나 거자 중에 궐원이 있으므로 뽑아서 보충하는 것이다.
본읍에 문과 선진(文科先進)이나 혹 진사나 조관이 있으면 으레 이 자리에 참여시킨다. 비록 늙고 병들어서 집에 있더라도 천장(薦狀)을 받음이 마땅하며, 만약 이런 사람이 없으면 읍 안에 나이 50세 이상으로 덕망 있는 사람 여섯을 뽑아서 권점하게 하는데 본관은 그 실정을 살펴서 만약 공론에서 나왔으면 권점에 의해서 시행하고, 만약 사정에 치우치고 공정치 못하여 물의가 있게 되면 모름지기 여섯 사람 외에 다시 아홉 사람을 뽑아 평의(評議)해서 천거를 끝내게 한다. 그런 다음 관에서 또 참작, 결정해서 진사로 삼는다. 만약 서로 무리지어 다투고 송사하여 어지럽게 하는 자는 엄행해서 멀리 귀양보낸다.
거자를 선발하는 데도 여섯 사람이 완전 합의해서 천거하도록 하지만 만약 물의가 있어 의논이 일치되지 않으면, 이에 논의되는 자 몇 사람을 불러서 법대로 시강(試講)하고 또 3장의 여러 문체를 시험해서 능한 자를 거액에 충수한다.
무릇 권점하는 법은 논의되는 자를 열기(列記)해서 그 수효를 선사의 3배로 하여(본읍 선사의 정원이 6명이면 열기한 사람은 18명임), 각각 그 이름 밑에다가 덕행ㆍ경술ㆍ문예 여섯 글자(열기하는 것이 석 줄임)를 적는다. 이에 여섯 사람이 벌여앉아서 혹 동그라미를 그리고 혹은 점을 찍는데, 그 사람의 덕행이 훌륭하면 덕행 밑에다 권점하고 경술이 넉넉하면 경술 밑에다 권점하며, 문예가 넉넉하면 문예 밑에다 권점한다. 여섯 사람이 다 권점한 뒤 그 중에서 점수가 많은 자를 뽑는다. 무릇 유에서 뛰어난 자는 동그라미를 그리고, 선발에 합격하는 정도인 자는 점을 찍는데, 동그라미 하나마다 점수가 2분(分)이고 점 하나는 점수가 1분이다. 지금 시험삼아 방식을 다음과 같이 만든다.
이선수(李選秀) 덕행ㆍ○
경술 ○ㆍ
문예ㆍ○
김상덕(金尙德) 덕행
경술ㆍㆍㆍ
문예 ○○○
무릇 사를 뽑는 법은, 세 가지에 한 점씩을 얻은 자는 선발에 참여할 수 있지만 만약 한 가지에라도 점수가 전혀 없으면 비록 두 가지에 동그라미 여섯을 얻었더라도 선발에 참여하지 못한다. 이선수는 세 가지 모두를 갖추었으므로 선발에 참여할 수 있으나, 김상덕은 덕행에 점수가 전혀 없으므로, 얻은 권점은 비록 같으나 선발에 참여하지 못한다. 비록 문예에도 점수가 전혀 없으면 선발에 참여하지 못하며 경술도 또한 마찬가지다. 만약 세 가지 보는 것이 다 갖추어졌으면 점수를 계산해서 뽑는다.
살피건대, 고요(皐陶)는 사람을 뽑는데 오직 9덕(德)으로 과목을 삼았고, 《주례》에는 빈흥(賓興)하는 데 6덕과 6행(行)을 고찰해서 천거했으며, 한대(漢代)에는 사를 천(薦)하는 데 전적으로 효렴(孝廉)을 숭상했는데, 당송 이래로는 시부로써 사람을 뽑아 덕행은 묻지 않고 오직 재예(才藝)만 보므로, 부박하고 기교한 사람이 항상 앞줄에 있게 되고 돈후박실(敦厚朴實)한 선비는 매양 뒤로 밀려나므로, 풍속은 날로 나빠지고 교화는 무너져서 조정이 분열되고 생민이 도탄에 빠지게 되었으니, 이는 모두 문예를 앞세우고 덕행은 뒤로 미룬 이유이다.
이제 선거하는 과목을 정하는 데 반드시 세 가지 보는 것을 갖춘 다음에 선거 격식에 맞게 한다면, 무릇 총명하고 민첩한 아이가 태어나면 그 부형의 훈계하는 바와 종족의 충고하는 바가 반드시 덕행을 앞세워서 그 선발에 참여되기를 바랄 것이다. 이 아이도 또한 자신의 재예를 돌아보고, 스스로 조심해서 효우(孝友)ㆍ목인(睦婣)하고,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공경하며, 재물에 무심하고 여색을 멀리하기를 힘써 한 걸음이라도 법대로 하며 말을 조심하고 안색을 공경히 가져 오직 종족과 향당에 죄를 얻을까 염려할 것이다. 처음에는 비록 거짓 꾸밈에 불과할 것이나 오래도록 그렇게 하게 되면 습관이 본성처럼 되고 풍속은 교화로 흥기하여 큰 교화가도균(陶勻)하여 끝내는 자연스러운 선(善)이 될 것이다. 그 은미(隱微)한 권한을 교묘히 쓰는 것은 다 말할 수도 없으니 어찌 아름답지 않은가?
혹자는 “수령이 사정에 따라서 청탁을 들어주어, 선거가 공정하지 못하면 어떻게 하는가?”라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오랜 시일을 하읍(下邑)에 있었기에 이런 사정을 알고 있다. 모든 관장이 된 자는 그 고을에서 좋은 명예를 얻지 않으려는 사람이 없을 것인데, 항차 선거하는 큰일에 만약 그 선발한 바가 공론에 합당하지 못하다면 원망이 떼지어 일어날 것이니 수령이 어찌 사정을 두겠는가? 온 고을 안의 공론이 돌아가는 자를 감히 빼버리지는 못할 것이고, 혹 사정을 부린다면 반드시 서로 일장 일단이 있어서 이 사람을 선발해도 좋고 저 사람을 선발해도 좋을 경우에 한할 것이니, 거기에 구애될 만큼 해가 심하지는 않다. 무릇 일을 저해하고 공을 훼방하는 사람은 매양 물방울이 조금씩 새는 것을 가지고 폐단 구멍이라 하고, 강하가 크게 무너져 만회할 수 없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밝은 임금은 이런 근거 없는 논의에 흔들리거나 의혹하지 않을 것이다. 만약 주시에 이런 폐단이 있으면 본목(本牧)으로 고시관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
무릇 선사하는 법은 덕행을 주로 하고, 거자를 선발하는 데에는 문예를 주로 한다. 거자의 선발은 반드시 선사 중에서 한다. 선사하는 처음에 이미 덕행과 경술로써 세 가지 보는 것을 갖추었으니 거자를 선발하는 데에는 오직 문예만을 주로 하여 관에서 시험하고 관에서 선발할 것이고, 다시 여러 사람에게 물을 필요는 없다.
무릇 거자를 선발함에는 나이 20세부터 49세까지로 하며, 만약 나이가 만 50세인 자는 그만두도록 한다. 50세가 되어서 그만둔 자는 치선(治選)으로 돌린다(법이 다음에 있음).
생각건대, 재주가 특이해서 조숙한 자는 15~16세면 선발에 충수될 만하다. 그러나 소년 등과(早年登科)를 옛 사람은 불행이라 하였으니, 20세가 된 뒤에 과거볼 수 있게 함은 고쳐서는 안 된다. 나는 또 생각하니, 사람을 덕으로써 사랑함은 군자의 지극한 뜻이다. 세상에는 굉심(宏深)한 문사(文詞)와 박흡(博洽)한 학식이 있으나, 지기(知己)를 만나지 못해서 궁곤하게 늙는 자가 있다.제왕(齊王)에게 비파를 가져갔으나 조화되지 않았고[齊瑟不諧], 초나라에 박옥(璞玉)을 바쳤다가 발꿈치 깎임을 여러번 당한 것(楚玉屢刑)은 인간 세상에 지극히 원통한 일이다. 그러나 실의(失意)한 늙은 몸으로 옷깃을 끌며, 시정(試庭)에 들어와서 같은 젊은 사람들과 기능을 경쟁한다는 것은 수치심이 있는 자가 어찌 차마 할 바이겠는가? 그 마음가짐이 비루하기가 이와 같다면 국가에서 이 사람을 뽑아서 어디에 쓸 것인가? 50세에 그만두게 하는 것은 단연코 그만둘 수 없는데, 하물며 치선법이 이런 사람을 처우하기에 족함이랴.
한 식년 사이마다 거인은 경서(經書) 두 가지, 역사 세 가지, 국사(國史) 한 가지를 익혀서 식년을 기다린다.
자식년(子式年)에 경서 두 가지는 《시경》ㆍ《서경》이고, 역사 세 가지는 《사기》ㆍ《남사(南史)》(《宋書》ㆍ《南齊書》ㆍ《梁書》에 《陳書》를 붙임)와 요ㆍ금사(遼金史 : 《요사》와 《금사》)이며, 국사는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東史輯成》을 붙임)이다.
묘식년(卯式年)에 경서 두 가지는 《의례》(《예기》를 傳으로 함)ㆍ《주례》(《주례》로 樂書를 대신함)이고 역사 세 가지는 《한서》ㆍ《북사》(北史 : 《魏史》ㆍ《北齊書》ㆍ《周書》에 《隋書》를 붙임)ㆍ《원사(元吏)》이며, 국사는 정인지(鄭麟趾)의 《고려사》(《文獻備考》를 붙임)이다.
오식년(午式年)에 경서 두 가지는 《주역》ㆍ《춘추》(《춘추》는 《좌전》을 씀)이고, 역사 세 가지는 《후한서(後漢書)》ㆍ《당서》(唐書 : 《舊唐書》와 《五代史》를 붙임)ㆍ《명사(明史)》이며, 국사는 《동국통감》(東國通鑑 : 《東文選》을 붙임)이다.
유식년(酉式年)에 경서 두 가지는 《논어》ㆍ《맹자》(《중용》ㆍ《대학》을 붙임)이고, 역사 세 가지는 《진서》(晉書 : 《三國志》를 붙임)ㆍ《송사(宋史)》ㆍ《청회전(淸會典)》이며, 국사는 《국조보감》(國朝寶鑑 : 《國朝名臣錄》을 붙임)이다.
《동사집성》이란 중국 전사(中國全史)에서, 우리나라 사실만 뽑아 모아서 만든 책이다(韓致奫의 《海東繹史》를 가져다가 간략하게 할 것은 깎아내고, 자세하게 할 것은 증보함이 마땅함).
생각건대, 《의례》는 예의 경이고 《예기(禮記)》는 예의 전(傳)인데, 당 태종(唐太宗)이 공영달(孔穎達)에게 명하여 《오경정의(五經正義)》를 지을 때에 예기를 《예경(禮經)》이라 잘못 일렀다. 이로부터 《의례》는 경서가 되지 못했다. 주자(朱子)는 이것을 조심하여 이에 《의례경전(儀禮經傳)》에 범례(凡例)를 작성해서 문인 황간(黃幹)에게 주었는데, 지금 세상에 행하는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가 바로 그것이다. 이제 육경의 학을 본받으려면 그 경서는 《의례경전》을 씀이 마땅하니 바꿀 수 없다.
살피건대, 《주례》는 주공(周公)이 태평을 이룩한 책이었는데, 이 책이 과장(科場)에 쓰지 않았으므로 지금은 버려진 책이 되었다. 《주례》를 읽지 않으면 선왕의 다스림을 이룩한 규모와 절목을 고찰해서 증험(證驗)할 수가 없다. 더구나 지금 《악경(樂經)》이 전혀 없어졌는데, 《주례》 6편 안에 악(樂)을 쓰는 법이 많아 상고할 수 있으니 《주례》로써 《악경》을 대신해서 육경을 갖추는 것도 마땅할 듯하다.
시년(試年) 입추(立秋) 날이 되면 군현에서 거인 명장(名狀)을 포정사(布政司)에 보고한다. 시년이란 향시(鄕試)하는 해로서, 즉 인(寅)ㆍ신(申)ㆍ사(巳)ㆍ해(亥)년이다.
명장의 서식은 “거인 이모(李某)는 연령(年齡) 24, 본관(本貫) 경주(慶州), 본현(本縣) 아무 방 아무 리에 거주, 부 아무, 조부 아무, 증조부 아무, 현조(顯祖 : 이름이 나타난 조상) 아무, 선조조(宣祖朝)에 이조판서”라 한다.
추분(秋分) 날 본주(本州)에서 시험하는데, 3장(場)에 각각 두 가지 기예를 시험해서 그 잘한 자를 본성(本省)에 올린다. 고관(考官)은 모두 이웃 성에서 뽑아온다. 본주란 군현을 거느리는 큰 고을이다.
무릇 고시관은 반드시 세 사람을 갖추는데, 비록 자급이 가장 높더라도 주시(主試)라고 부르지 않으며, 각자 비평을 적어서 등제(等第)를 정한다(법은 다음에 있음).
경기 4주에는 고관(考官)을 조정에서 보내는데 옥당 정사(玉堂正士 : 敎理ㆍ修撰 등)를 임용하고, 사천성(泗川省) 4주의 충주(忠州)ㆍ청주(淸州)에는 공주(公州)ㆍ홍주(洪州) 수령을 임용하고, 공주ㆍ홍주에는 충주ㆍ청주 수령을 임용한다(공주에는 충주, 홍주에는 청주 수령을 임용해서 부근 인사를 쓰지 않음). 완남성(完南省)은 무남성(武南省)과 바꿔서 차임(差任)하며(위의 법 같이함), 영남성(嶺南省)은 황남성(潢南省)과 바꿔서 차임한다(위의 법 같이함), 열동성(洌東省) 3주의 원주(原州)ㆍ춘천(春川)은 기내(畿內) 수령을 임용하고, 명주(溟州)에는 영서(嶺西) 수령을 임용한다(본성의 영서). 송해성(松海省) 3주의 개성부(開城府)는 기내 수령을 임용하고, 황주(黃州)와 해주(海州)는 바꿔 차임한다(위의 법 같이함). 패서성(浿西省)과 청서성(淸西省)은 바꿔서 차임하고(위의 법 같이함), 현도성(玄菟省)은 기내와 열동성에서 차임하며, 만하성(滿河省)은 현도성에서 뽑아온다.
모두 문과 출신으로 박아(博雅)한 명망이 있는 자를 차임해서 보내는데, 모두 공거원(貢擧院)에서 망(望)을 갖추어서 입계(入啓)하며 비점을 받아서 여러 성으로 나누어 보낸다. 그 망을 갖추는 법은 오직 합당한 사람을 열기하여, 혹 다섯이나 혹 여섯 사람을 장망(長望)으로 하며(承旨望筒 같음) 그 중에서 임금이 세 사람을 뽑아 낙점한다.
3장에 각각 두 가지 기예를 시험한다는 것은 제 1장에 경의 일도(卯年에는 2례에서 출제함)와 사론(史論) 일도(酉年에는 晉書 등에서 출제함)를 시험하고, 제 2장에는 시 한편(다음 조에 상세함)과 표ㆍ전ㆍ조ㆍ제(表箋詔制) 중에서 일도(道)를 출제하며, 제3장에는 책(策) 일도와 이문(吏文) 일도를 시험한다(다음 조에 자세함).
경의 일도는 본 식년에 습독(習讀)한 것에서 출제하나, 만약 유년(酉年)을 만났으면 사서에서 출제한다.
그 제차(第次)를 고정(考定)하는 법은 모두 다음 조에 보인다(무릇 하루에 두 가지 기예를 시험하는 것은 시권 두 장을 나누어 바치는 것이고 한편에 연속한 것이 아님).
[주D-001]좌웅(左雄): 한 순제(漢順帝) 때 사람. 효렴으로 천거되어 기주 자사(冀州刺使)가 되자 기탄없이 탐관 오리를 탄핵했음. 그가 과거 제도의 시정을 상소하자 순제는 그의 건의를 받아들였음(《後漢書》 左雄傳).
[주D-002]홍도(鴻都): 한 영제 광화(光和) 원년에 홍도문(鴻都門) 안에 학사(學士)들을 모아 고경(古經) 등을 연구하도록 하였음.
[주D-003]쌍기(雙冀): 후주(後周) 사람. 대리평사(大理評事)로 고려 광종(光宗) 7년에 봉책사(封冊使)를 따라왔다가 병이 생겨 돌아가지 못하고, 광종의 눈에 들어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제수되었고, 다시 1년도 못 되어 문병(文柄)을 잡았음. 광종 9년에 중국 제도에 의한 과거를 건의하여 그 해 5월에 처음으로 과거를 실시했는데 그가 지공거(知貢擧:主試官)가 되었음(《高麗史》 雙冀傳).
[주D-011]도균(陶勻): 왕자가 천하를 다스리는 것. 균은 도기를 제조할 때에 쓰는 선반(旋盤). 물(物)이 순환하는 것을 비유해서 쓰는 말인데, 여기서는 교화가 크게 순환해서 나쁜 것도 좋게 된다는 뜻임.
[주D-012]제왕(齊王)에게 비파를 가져갔으나 조화되지 않았고[齊瑟不諧]: 이 말은, 제왕(齊王)이 음률을 좋아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 객(客)이 비파[瑟]를 가지고 제왕에게 갔다. 3년을 궐문(闕門)에서 기다렸으나 제왕을 보지 못했다. 어떤 사람이, 제왕은 피리를 좋아하는데 그대가 비파를 가져왔으니 조화될 수 없다고 했다는 고사(《韓非子》).
[주D-013]초나라에 박옥(璞玉)을 바쳤다가 발꿈치 깎임을 여러번 당한 것[楚玉屢刑]: 이 말은, 변화(卞和)가 박옥(璞玉 : 갈지 않은 옥)을 캐서 초 여왕(楚厲王)에게 바쳤더니 왕은 돌맹이를 옥이라 한다 하여 변화의 왼쪽 발꿈치를 깎아버렸다. 무왕(武王)이 즉위하자 또 바쳤더니, 속인다 하여 이번에는 오른쪽 발꿈치를 깎았다. 그후 문왕(文王)이 즉위했는데 변화는 박옥을 안고 형산(荊山) 밑에서 울고 있었다. 왕이 사람을 시켜 물으니 “보옥(寶玉)을 돌이라 하고 정직한 사람을 속인다고 하는 것이 슬프다.” 하였다. 왕이 사람을 시켜서 박옥을 다듬었더니 과연 좋은 옥이 나왔다는 고사(《韓非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