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 임희숙
너를 보내는 들판엔 마른 바람이 슬프고
내가 돌아선 하늘엔 살빛 낮달이 슬퍼라
오랫도록 잊었던 눈물이 솟고
등이 휠것같은 삶의 무게여
가거라 사람아 세월을 따라
모두가 걸어가는 쓸쓸한 그길로
이제 그누가 있어 이 외로움 견디며 살까
이제 그누가 있어 이 가슴 지키며 살까
아 저하늘에 구름이나 될까
너 있는 그 먼땅을 찾아 나설까
사람아 사람아 내하나의 사람아
뒤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사람아 사람아 내하나의 사람아
뒤늦은 참회를 너는 아는지
▲ 임희숙 /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 Gloomy is Sunday(우울한 일요일) / 임희숙
Sunday is gloomy, my hours are slumberless
우울한 일요일, 나의 시간들조차 방황한다.
Dearest, the shadows I live with are numberless
나의 가장 소중한 그림자들.
Little white flowers will never awaken you
작은 하얀 꽃들조차도 너를 깨우지는 못하리라.
Not where the black coach of sorrow has taken you
슬픔의 검은 조각모음들도 결코 너를 앗아가지 못하리라.
Angels have no thought of ever returning you
천사들조차도 너를 되돌려 놓지는 못하리라.
Would they be angry if I thought of joining you
내가 너와 함께 한다면 그들조차도 화를 내지 않았을까?
Gloomy Sunday
우울한 일요일
Gloomy is Sunday, with shadows I spend it all
하루종일 그림자들과 함께 했던 우울한 일요일
My heart and I have decided to end it all
내 마음은 이미 모든 것을 끝내기로 결심했다.
Soon there'll be candles and prayers that are sad
곧 양초들과 슬픔에 젖은 기도하는 이들이 있으리라.
I know, let them not weep, let them know I'm glad to go
아무도 슬퍼하지 않기를, 나는 기쁘게 떠나 갈테니...
Death is no dream, for in death I'm caressing you
죽음은 꿈이 아니다. 죽음 안에서 내가 너를 버리지 않는다.
With the last breath of my soul I'll be blessing you
내 영혼의 마지막 숨소리와 함께 너의 축복을 빌어본다.
Gloomy Sunday
우울한 일요일
Dreaming, I was on-ly dreaming
꿈을 꾸고 있었다. 나는 단지 꿈을 꾸고 있었다.
I wake and I find you asleep in the deep of my heart,
dear
나는 깨어나 내 마음 깊숙한 곳에서 고이 잠들은 사랑스런
너를 발견한다.
Dreaming, it was lonely dreaming
꿈을 꾸고 있었다. 그것은 너무나도 외로운 꿈이었다.
I felt my heart melt when I dreamt that we two were apart
나는 우리가 서로 떨어졌을 때 심장이 녹아 흐름을 느꼈다.
Far apart, far apart, far apart
사라지고, 사라지고, 사라지고...
Darling, I hope that my dream never haunted you
나의 꿈이 결코 너마저 유혹하지 않기를 희망한다.
My heart is telling you how much I wanted you
나의 가슴은 내가 너를 얼마만큼이나 원하고 있는지 말하고 있다.
Gloomy Sunday.
우울한 일요일.
△ Gloomy Sunday / 임희숙
▒ 굴곡진 삶을 노래한 짙은 감성의 허스키 보이스 [임희숙]
▶ 출생 : 1950년 6월 29일, 서울
▶ 데뷔 : 1969년 데뷔곡 [사람 떠나고]
▶ 학력 : 한양대학교
▶ 경력 : 2007년 아바연합선교회 홍보대사
긴 생명력의 가수 임희숙. 인기 정상의 가수라기보다는 최고의 가창력
을 지닌 가수라는 표현이 합당한 가수이다. 인생의 깊이가 느껴지는 그
녀의 노래들은 절절한 호소력으로 솔, 트로트, 재즈, 가스펠 등 여러 장
르를 넘나들며 대중의 사랑의 받았다.
여자 가수의 인생치곤 고난이 많았던 지라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여러
차례 활동을 중단하는 아픔도 겪어야 했다. 그 때문에 많은 히트 곡 보
다는 범접하기 힘든 뜨거운 가창력으로 스스로를 대중음악사에 중요
한 아티스트로 자리매김됐다.
[진정 난 몰랐네], [나 하나의 사랑의 가고]등 그가 남긴 히트 곡들은
지금도 중·장년층들의 사랑을 받는 불멸의 히트 넘버이다. 두 번의 결
혼 실패와 대마초 사건, 그리고 병마와 싸우며 활동 중단을 거듭했던
평탄치 않은 삶의 여정을 지나온 그녀의 노래 속엔 아픔만큼 삶의 절
절함이 배어 있다.
80년대 중반, 재기에 성공한 이 후 그녀는 방송 출연을 비롯해 각종 공
연과 미사리 등 음악 카페에서 매일 같이 노래를 부르고 있다. 짙은 허
스키에 영혼을 울리는 그녀의 바이브레이션 창법은 흑인 재즈 가수로
착각을 일으킬 정도이다.
임희숙은 한국 전쟁이 발발한 1950년 6월 29일 태어나 조종순씨의 편
모슬하에서 성장했다. 전쟁 중에 부친이 사망했기 때문.재혼한 어머니
는 두 명의 동생을 낳았다.
영화 [개같은 날의 오후]로 주목을 받았던 이민용 감독이 그의 친동생
이다. 활달한 성격의 그녀는 중학교 2학년 때 외국 팝송을 많이 접했는
데 특히 미국 흑인가수 샘 쿡(Sam Cook)의 노래에 푹 빠져 지냈다.
어린 그녀는 짙은 감성으로 사람의 영혼을 감싸주는 외국의 솔가수들의
끈적끈적한 솔이나, 블루스 같은 흑인 재즈성향의 노래가 특히 좋았다.
노래에 관심이 많아진 그녀는 덕성여고 2학년 때인 1966년에 작곡가
손목인과 손석인으로부터 재즈를 배우며 가수의 꿈을 키웠다.
가수로서의 첫 무대는 워커힐이었다. 67년 데뷔 곡 [그 사람 떠나가며]
를 발표하며 워커힐 무대에 이어 TBC TV의 [쇼쇼쇼], [OB카니발] 동
아방송 등 방송에 출연해 팝송을 주로 불렀다.
가창력을 인정받자 CM송까지 부르며 주목 받는 신인 가수로 착실하게
성장을 했다. 1968년 여고를 졸업하고 한양대 연극영화과에 입학했다.
하지만 바쁜 가수활동 때문에 학업을 병행하기 힘들어 1년이 못 되어
중퇴를 했다. 본격적인 음악 활동에 들어간 그녀는 독특한 소울 창법과
남자 같은 화통한 성격 때문에 비슷한 시기에 데뷔한 조영남과 곧잘 비
교되었다.
그래서 생겨난 별명이 [여자 조영남]. 외모를 비하했던 별명이었던지
라 그녀로서는 달갑지 않았지만, 그만큼 대중의 관심이 증폭되었던
증거이기도 했다.
전우중의 곡 [그 사람 떠나고]를 받아 처음으로 음반을 낸 것이 1969년.
당시는 주류 대중음악을 지배하던 트로트가 서서히 대중의 관심 밖으로
내몰리던 시기였다.
미 8군 무대를 기점으로 영입된 솔,록,포크 등 다양한 장르의 기세가 어
느 때 보다 드셌기 때문이었다. 그 해에 미 8군의 [신중현 스페셜 쇼]에
출연한 임희숙은 음악적 코드가 통했던 한국 최초의 소울 가수 박인수
등과 음악적 교류를 했다.
이 때의 활동 때문에 임희숙은 [신중현 사단]에 간혹 포함이 되곤 하지
만 사실 신중현의 곡을 부른 것은 군방송 드라마 주제곡 [슬픈 고백]등
그리 많지는 않았다.
임희숙의 넘치는 끼를 높이 산 신중현은 [님은 먼 곳에]등 자신의 곡을
임희숙에게 주려고 했지만, 이미 작곡가 김희갑으로부터 MBC드라마
[왜 울어]의 주제가를 받아 노래한 그녀는 의리를 지키기 위해 김희갑
휘하로 갔다. 그래서 김희갑곡[진정 난 몰랐네-1970]를 부르게 되었다.
빅 히트가 터진 이 노래는 그녀의 이름을 대중에게 알리는 도화선이 되
었다. 30여년의 세월을 초월해 지금도 소위 중장년층의 [18번]으로 뽑
히는 이 노래는 그녀의 대표곡이 되었다.
또한 여러 가수에 의해 다시 불리거나 리메이크도 됐다. 그러나 솔풍의
가요인 ‘[진정 난 몰랐네]를 처음 불렀던 가수는 임희숙이 아니었다.
김상희였다.
하지만 1967년 맑은 음색의 김상희의 노래는 빛을 발하진 못했다. 임희
숙의 호소하는 듯한 소울 풍의 끈적한 목소리는 3년이 지난 후에야 이
노래를 한국 대중음악사의 명곡으로 되살려냈다.
[사실 저도 노래를 부른 뒤 곧 바로 히트를 터트리진 못했고, 2년 정도
흐른 뒤 뜨기 시작했어요. 음악을 제대로 아는 사람들의 입을 타고 알려
진 경우입니다. 당시 키보이스가 반주를 했고,한 번에 동시 녹음을 했던
기억이 납니다.]
이후 트로트 작곡가인 박춘석과 손잡고 [잊어야할 사람], [잊었을 거에
요(1971)]를 발표해 인기 가수의 반열에 올랐다.
71년 8월, 봉봉사중창단의 이계현이 운전한 오토바이를 타고가다 사고
를 당하기도 했다. 소울 가수로 이름이 난 그녀는 72년 8월,싱가폴 건국
기념 재즈페스티발에 한국 대표로 초청을 받는 영광을 안기도 했다.
또한 [지난날(1974)] [돌아와 주오], [믿어도 될까요(1975)]등으로 꾸
준히 자신의 음악적 위상을 이어갔다. 74년 2월, 경기고, 서울대 법대를
나와 상업은행 본점에 근무하는 은행원 조성윤씨와 결혼을 했다.
하지만 혼인 신고도 하지 않은 채 5개월 만에 헤어졌다.75년 11월, 임희
숙은 종로5가 칠복여관에서 음독자살을 기도해 세상을 놀라게 하는
사건을 벌였다.
운명같았던 시련의 나날도 그녀의 끼를 잠재우지 못했다
두 번째 결혼도 많은 갈등을 안고 있었던 것.더구나 1975년 가요정화운
동이라는 명분의 대마초 파동에도 휘말렸다. 이처럼 이혼, 대마초 사건,
음독 자살 시도 등 개인사의 고난이 한꺼번에 밀려든 이 시기는 그녀의
표현대로 가혹한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을 알게 된 것은 인간적으로 [철이 든 계기]이기도 했다. [사
람이 모질지 못했죠. 워낙 운명이 거칠기도 했지만,돌아 보면 나 자신이
똑똑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큰 원인이었던 것 같아요]
신군부가 들어서면서 해금이 되자 재기 곡 [돌아와 주오]를 발표했지만
예전과 같은 반응을 얻지는 못했다. 그래서 무리하게 출연한 81년 10월
의 TV 공개 방송 [명랑 운동회]는 또 다른 불행의 씨앗이었다.
여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과격한 게임으로 허리를 다치는 불의의 사고
를 당했던 것.척추 디스크는 3년 4개월 동안 활동 중단이라는 좌절의 시
간을 또 다시 안겨 주었다.
그러나 그냥 주저앉지는 않았다.고통을 이겨내기 위해 이때부터 연예인
교회에 나가 신앙 생활에도 전념하며 재즈 피아노를 익혔다. 삶에 진지
해진 그녀는 사랑 노래보다는 영혼을 노래하는 솔과 가스펠을 부르기
시작했다.
하지만 척추 디스크에 이어 왼쪽 다리에도 마비가 오자, 무려 180개의
금침을 몸에 넣는 시술을 했다. 효과를 보았다.
84년 5월, 몸을 추스르고 재기 곡 [내 하나의 사람은 가고]를 발표했다.
작사자 지명길을 통해 받은 가사를 읽어 본 임희숙은 [삶의 무게여]라
는 부분에 반했다.
이 노래는 길고 어두운 터널과도 같은 시련기를 딛고 일어서는 부활의
노래가 되었다. 강렬하면서도 정적인 목소리는 이전에 느낄 수 없었던
삶의 향내가 배여 나왔다.
큰 반응이 있자 신세계레코드와 3년 계약을 이루어졌고 [한국의 티나
터너]로 거듭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작곡가는 시인이자 노래 운동
가로,[제2의 김민기]라고도 불렸던 백창우(현재 시노래 동인 나팔꽃의
리더). 서적 외판원으로 고단한 삶을 살아가던 백창우가 27세 때 만든
노래였다.
시인의 고단한 삶과 그녀의 아픈 과거가 호소력 짙은 보컬과 어우러지
면서 빅히트가 터졌다. 2003년 12월, 시전문 문예계간지 [시인세계]가
국내 유명시인 100명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한 결과, 이 노래는 전체
순위 8위에 랭크되기도 했다.
임희숙은 [음반이 나온 뒤 2년 후에야 작곡가 백창우를 직접 만났다]고
한다. 85년 오준영의 곡을 받아 골든 2집 [상처]를 발표하며 이번에는
트롯가수로도 변신에 성공했다.
86년엔 지명길 곡 [사랑의 굴레]를 히트시킨 골든 3집 음반도 연속으로
발표했다.활발한 활동을 시작한 그녀는 리틀렌젤스 회관에서 열렸던 대
한민국 제 1회 Jazz Festival 공연에도 참가했다.
또한 한때 연극 영화를 전공했던 그녀는 86년 KBS1 TV 드라마 [노다지]
, 87년 영화[토요일은 밤이 없다(송영수 감독)]등에서 주제가를 부르며
특별 출연을 했다.
89년엔 KBS TV드라마 [사랑의 굴레]의 주제가로 인기를 얻고, 그 해
10월 26일 대방동 해군해관에서 선배 재즈 가수 박대식과 재혼을 했다.
91년 6월엔 재즈가수 김준의 록 트로트 곡 [머물수 없는 사랑]을 발표
했다. 자신의 아픈 사랑과 이별의 사연을 담은 이 노래는 제법 성공을
거뒀다.
11월엔 동경 재일 한국인 음성 나환자촌 위문 공연을 갖기도 했다.
94년엔 KBS 2TV 드라마 [남자는 외로워]에서 기지촌 가수로 출연해
만만치 않은 연기 실력을 뽐냈다.
재즈 가수로 변신한 그녀는 95년 1월 김준,정훈희,이동원과 함께 KBS
빅쇼에 출연해 절묘한 4색화음을 선보이기도 했다. 6월에는 KBS 2TV
[밤에 음악사이]에 출연, 굴곡 많았던 자신의 노래인생 40년을 되돌아
보는 뜻 깊은 시간을 가졌다.
친동생인 영화감독 이민용의 감독 데뷔작 [개 같은 날의 오후]에서는
출연료를 받지 않고 콩국수집 식당 주인 포항댁으로 출연을 했다. 당초
출연하기로 했던 김을동이 시의회 선거에 출마하는 바람에 이루어진
첫 주연급의 영화 데뷔였다. 영화의 성공으로 96년 1월 SBS TV 가족
드라마 [엄마는 못말려]에도 출연을 했다.
그 해 3월,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메이플]이라는 고가구점과 카페를
겸한 공간을 오픈해 사업가로 변신했다. 음악은 중단하지 않았다.
그 해 6월, 과천 시민회관에서 재즈콘서트를 개최하고 11월에는 동생이
감독한 영화 [인샬라]에서 사하라사막 현지로케에 동행했다. 밥짓기는
물론 짐꾼 등 온갖 험한 일을 맡아 돈독한 남매 사랑을 과시했다.
99년 9월, 후배 장욱조의 도움으로 첫 CCM음반 [마음으로 사랑으로 영
으로]를 발표했다. 2001년에는 셉씁??린鰥【?독일의 재즈 캄보 살타
첼로와 협연한 것을 비롯, 뮤지컬 [블루 사이공]과 [겨울 나그네]에 출
연 하는 등 폭 넓은 활동을 이어 갔다.
또 2002년에는 병마에 쓰러진 선배 솔 가수 박인수를 돕자는 콘서트를
주도적으로 참여하는 미담을 남기기도 했다.
[왕년의 히트 가수가 아니라 그냥 곁에 있는 가수로 팬들에게 기억되고
싶다]는 그는 대중적 인기보다는 음악으로 오랜 생명력을 지켜오는
흔치 않은 가수다.
그에게 음악은 인기에 영합한 일회성 열기가 아니라 인생을 호흡하게
하는 삶의 전부이다. [과거를 돌아보면 스스로 대견함을 느낄 때도 있
어요. 많은 고통 속에서 일어나 이렇게 노래를 부르고 있고, 아직도 저
의 노래를 사랑해 주는 분들이 있으니 저는 복도 많고 행복한 여자
같아요.]
임희숙 / 진정 난 몰랐네
임희숙 / 뜨거운 안녕
▒ 사랑의 굴레 외 20곡
01, 사랑의 굴레
02, 진정 난 몰랐네
03, 상처
04, 무정한 마음
05, 내 하나의 사랑은 가고
06, 황혼의 엘레지
07, 생각나면 오겠지
08, 돌아와 주오
09, 못다한 말
10, 뜨거운 안녕
11, 애수(愛授)
12, 그대 영혼의 새벽
13, 믿어도 될까요
14, 석양(夕陽)
15, 슬픔이여 안녕
16, 슬픈고백
17, 이별 그 후에도
18, 잊혀진 계절
19, 아름다운 일요일
20, 내 사랑의 이야기
▲ 사랑의 굴레 외 19곡 듣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