결혼식을 보며
남 현 숙
한 떨기 목련꽃 같은 순백의 신부가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계단을 내려온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인생에서 가장 빛나는 순간이 아닐 수 없다. 귀를 간지럽히듯 잔잔하게 울리는 선율 속에 사람들의 탄성과 박수 소리가 스며든다.
친구는 삼십 년 전 그날처럼 남편과 함께 입장해 혼주석에서 딸의 모습을 바라본다. 어떤 기분일까? 웨딩드레스를 입은 딸의 모습을 보는 엄마의 마음을 가늠해본다.
신랑 신부가 입장해 식순에 따라 양가 부모님께 인사할 때 신부는 눈물을 훔친다. 신부 아버지도 나오는 눈물을 애써 삼키려는 듯 고개를 들어 천장을 본다. 신부 어머니인 친구도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친다. 보고 있는 나도 가슴이 뭉클해져 눈앞이 흐려진다. 조용한 장내에서 사람들의 시선은 오직 그들을 향해 있고, 그들을 보면서 어쩌면 자신들의 과거를, 아니면 미래를 보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어느새 타임머신을 탄 듯 과거의 내 결혼식으로 가 있다. 오빠의 손을 잡고 입장하는 내가 있다. 친구의 딸처럼 그때의 나도 순백의 드레스를 입고 단상을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내디딘다. 더딘 발걸음과 달리, 마구 뛰는 가슴을 애써 진정시킨다.
그 순간 어머니는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신랑 신부의 모습을 보며 흐뭇하게 웃고 계시던 시어머니와 달리 무표정한 어머니의 얼굴. 아버지의 빈자리 때문이었을까? 어머니에게만 눈이 내린 듯 새하얀 백발과 대비되는, 어둡게 느껴지던 그 얼굴이 어제 일처럼 선명하다.
나는 어머니가 마흔이 넘어 낳은 늦둥이 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진 않았지만, 사랑만은 남부럽지 않게 받고 자란 것 같다. 어머니는 직접 재봉틀을 돌려 예쁜 옷을 만들어 주셨고, 어느 겨울 지독한 감기에 걸려 온몸이 불덩이처럼 뜨거울 때, 밤새 이마에 젖은 수건을 얹어 주셨다. 사과가 먹고 싶다는 내 말에 어디서 구하셨는지 빨간 사과 한 알을 소리 없이 내 옆에 두고 일하러 가셨다. 그 새콤달콤한 사과를 먹고 난 뒤 감기가 씻은 듯이 나았다. 어머니의 따뜻한 사랑을 먹고 나은 것 같았다.
내가 대학교 다니면서 일하며 자취할 때, 어머니는 농사지은 쌀과 채소를 보따리에 바리바리 싸서 버스로 한 시간 넘는 거리에 있는 나에게 오셨다. 어머니가 오시는 날은 따뜻한 밥과 맛난 반찬으로 어머니 정을 가슴 가득 채울 수 있었다. 하룻밤만 주무시고 가야 한다고 하면 ‘하루만 더, 하루만 더’ 있으라며 어머니를 졸랐다. 옆에 있는 것만으로도 느껴지는 그 포근함이 좋았다.
세월이 흘러 그 옛날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나는 버스로 한 시간이 넘는 거리를 거의 매일 어머니를 뵈러 갔다. 흐르는 세월과 함께 찾아온 병을 이기지 못해 어머니는 누워서 지내는 날이 많아졌기 때문이다. 그 옛날 내가 그랬던 것처럼 어머니는 나를 기다리셨다. 처음에는 힘들다고 자주 오지 말라 하셨지만, 혹시라도 못 가는 날이 생기면 오늘은 안 오냐고 물으셨다.
어머니께 해드릴 음식을 생각하고 음식 재료를 사 가는 것이 나의 작은 즐거움이었다. 내가 자취하던 때 어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따뜻한 밥과 반찬을 해드렸다. 하지만 어머니는 입맛이 없어 잘 드시지 못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어머니가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며 나는 눈물을 삼켜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어머니는 나무토막 같은 몸을 겨우 움직여 장롱 서랍 속에서 둘둘 말아놓은 헝겊 뭉치 하나를 꺼내셨다. 헝겊을 살살 펴니 손때 묻은 빛바랜 금반지가 들어 있었다. 젊은 시절 어머니는 쌈짓돈을 모아 그 반지를 마련하셨다.
“이거, 너 해라…….”
나뭇가지처럼 앙상한 손으로 그 반지를 내 손에 꼭 쥐여주시며 말씀하셨다. 이걸 왜 나에게 주느냐고 하니 손가락이 가늘어져 맞지 않는다며 기어코 내게 주셨다. 어머니와의 이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했기 때문일까? 반지의 무게가 천근만근은 되는 듯 몸도 마음도 무거웠다. 그 얼마 후 햇살 눈부신 가을날 어머니는 하늘로 가셨다.
친구 딸 결혼식을 갔다 온 후, 옛날 생각에 젖어 결혼식 앨범을 보았다. 앨범 속 어머니를 보다가 문득 어머니의 반지가 생각나서 고이 간직해 둔 반지를 꺼내 본다. 빛바랜 반지를 어머니인 듯 손으로 쓰다듬다가 손가락에 끼어 보니 어머니의 온기가 느껴지는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