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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구원의 문입니다.
본문/요10:7-16절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
나보다 먼저 온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니 양들이 듣지 아니하였느니라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
달아나는 것은 그가 삯꾼인 까닭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나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오늘 한국교회 강단이 큰 문제가 되두대고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론에 대한 왜곡 때문입니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진리를 제대로 알지 못하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교인을 양산헤 내고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신자는 아무리 많아도 주님의 교회로 세상의 진리의 빛을 나타낼 수가 없으며 이런 사람들이 모인 교회는 주님의 교회가 될 수가 없습니다. 한국교회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이 모였느냐를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중요한 것은 진정한 신자가 과연 얼마나 되느냐 입니다.
신자는 교회에 출석하는 날부터 시작되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마틴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간증을 보시면 그는 구원받은 줄로 알았습니다. 왜냐하면 교회에 출석하는 것 만으로 목회자는 강대상에서 다 믿는 자로 보고 설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는 한참 후에 구원받았다고 간증하고 있습니다.
신자는 교회에 출석하는 날부터 되는 것이 아니라 신자는 예수님을 믿는 날부터 시작되는데 믿는다는 것은 단순히 신앙고백하고 사영리 전도지에 나온것처럼 영접기도한번 했다고 해서 구원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고후5:17절이 각자에게 일어나야 합니다. 새로운 피조물로 변화되어야 합니다. 요3:3절의 말씀처럼 성령으로 거듭나는 경험을 해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을 때에 하나님 편에서는 우리를 의인으로 인정해 주시지만 그래서 롬1:17절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고 있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7절)
이것은 믿는자에게 하나님께서 해주시는 마치 법정에서 판사가 당신은 무죄라고 판결하듯이 의인으로 인정해주시고, 우리는 우리편에서 거듭남의 변화를 누려야 합니다. 중생의 축복을 누려야 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아무런 변화가 없는 사람은 구원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적어도 조혜련씨의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다. 그런데 그런 변화가 일어나는 신자는 한국교회 안에 눈씻고 닦고 봐도 너무나 적은 현실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제가 좋아하는 사랑하는 교회에는 이런 일들이 너무나 많이 일어나는 것을 볼 수가 있습니다. 다반사로 일어나는 간증입니다.
한국교회 안에서 이런 변화가 기대하기 어려운 교회의 현실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회개와 함께 해야 합니다. 과거의 지은 모든 죄를 회개해야 합니다. 회개에는 예수님께서 나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를 지시고 모든 피와 살을 찢기시고 무덤에까지 내려가셨다는 사실이 실제로 깨달아야 회개가 나옵니다. 회개는 자백과 함께 의지적으로 죄를 끊는 것입니다. 단호히 과거의 모든 죄에서 돌아서는 것입니다. 그리고 믿음에는 이제 주님을 따라가는 믿음입니다. 말씀대로 순종하는 믿음입니다. 이것이 교회에 처음 나와서 설교를 들을 때 일어날 수도 있고 오래 지나서도 이런 변화가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은 본인의 마음의 자세와 더불어 성령의 역사로 일어나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사실의 의미를 분명히 지적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서 신앙 생활을 한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이 교회 나오고 헌금하고 성경공부하고 기도하고 교회에서 봉사생활 하는 것으로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그러면 우리가 믿음을 갖고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을 뜻합니까?
오늘날 많은 신자들이 신앙생활의 구체적인 내용을 상실하고 잇기 때문에 이에 대한 대답이 궁색하고 신앙생활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고 있습니다. 따라서 신앙생활의 감격을 누리지 못하고 메마르고 무기력한 상태로 전락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주님께서 스스로 나는 양의 문이다. 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주님은 나는 목자다. 라고 하십니다. 이 두 가지 선언이 오늘 진정한 그리스도인 그리고 믿는자의 삶에 대한 해답을 던져주고 있는 말씀입니다.
문이신 예수님
10:1절을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본문에서 양의 우리라고 하였는데 우리는 양들의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당시의 목자들은 개인적으로 양을 몇 마리씩 소유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양들을 재울때는 개인적으로 마련된 우리 속으로 양들을 몰고가는 것이 아니라, 마을 공동의 우리에 맡겨 관리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또 그 공동 우리를 지키는 관리자가 있었는데 본문에서는 그를 문지기라고 묘사하기도 합니다. 3절을 보시면
“문지기는 그를 위하여 문을 열고...”
아침이 되면 목자들이 다시 와서 자기 양들의 이름을 부릅니다. 우리가 개나 애완용 동물에게 그 이름을 붙여서 부르듯, 팔레스타인 지역의 양들에게도 이름을 붙여져 있었습니다. 양들은 자기 목자의 음성을 잘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기 목자의 음성을 듣고 우리에서 나옵니다. 그러면 목자는 다시 자기 양들을 데리고 푸른 초장으로 갑니다.
그러기에 이 “우리”라는 것은 양들의 공동체 생활이 이루어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공동의 장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우리는 문자 그대로 양 무리들의 우리였던 것입니다.
주님은 요한10:1절에서 이 “양의 우리”를 말씀하셨을 때 그분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의 공동체를 생각하고 계셨음에 틀림없습니다. 구약 신앙공동체! 하나님의 백성! 그것은 바로 이스라엘 민족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민족을 부르시고 세우셔서 이 민족을 통해서 하나님의 일을 하기 원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하나님의 계획을 시작하셨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 민족들만 사랑하신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것은 단시 하나님의 사역의 출발점에 불과합니다. 신약에 오면 신앙의 공동체는 좀더 넓어집니다.
즉 이스라엘 민족뿐 아니라 열방의 모든 이방 민족들이 함께 이 하나님의 공동체 안에 들어갈 수 있는 특권을 누리게 됩니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이 신앙 공동체의 이름은 무엇입니까? 구약의 이스라엘 자리를 대신 차지하게 된 것이 바로 신약의 교회입니다.
본문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양이 우리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문이 필요합니다. 옛날 팔레스타인의 양의 우리는 벽으로 된 높은 담으로 되어 있었는데, 문은 하나였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문에는 문지기가 있어서, 그가 통과시켜 주어야 들어갈수가 있었습니다. 이런 광경을 상상해 보십시오. 누군가가 다가와 문이 어디냐고 묻습니다. 그러자 문지기가 대답합니다.
“내가 곧 문이야!”
그 문을 통과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그 양의 우리에 들어갈 수가 없습니다.
10:1절을 보시기 바랍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
양의 우리에 들어가는 문이 단 하나의 문이었던 것처럼, 규약의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에 들어가는 것도 단 하나의 문을 통해서만 가능했습니다. 즉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야만 한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으로 태어나지 않고는 그 백성이 될수 없었습니다. 신약 교회라는 하나님의 백성의 무리 속에 들어가기 위해서도 반드시 통과해야 할 하나의 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영적인 중생의 문입니다.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를 볼수 없느니라....하나님 나라에 들어갈수 없느니라.”(요3:3,5)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문을 통하여 양의 우리에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 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요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나는 양의 문이라.(1,7절)
그분이 문이십니다. 그분을 통해서 들어가지 않는 사람은 모두가 절도요 강도라고 주께서 규탄하십니다. 그러면
여기에서 주님이 절도와 강도를 말씀하시면서 어떤 사람들을 연상했겠습니까? 바리새인들을 생각하셨을 것이 틀림이 없습니다.
때때로 우리는 말씀을 연구하면서 그 시대에 대한 사고를 많이 공부해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세상의 빛이라”고 한 말씀만 가지고도 빛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얼마든지 상상할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상상입니다. 그런데 주님이 이 말씀을 하시면서 무엇을 상상했겠습니까? 이 말씀은 당시의 절기를 배경으로 한 것입니다. 어떤 절기입니까? 장막절 절기에 그들은 광야생활을 하는 동안 구름기둥과 불 기둥으로 인도하셨던 그 불기둥을 연상하는 것입니다. 그때에 주님은 “나는 세상의 빛이라”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한 역사적인 배경을 고려하지 않고서 예수님의 말씀하시는 빛에 대해 주관적으로 상상할수도 있습니다. 주께서는 그 자유까지도 주셨을지도 모릅니다.
오늘 본문에 포함되어 잇는 요10:22절에 보면 “수전절”이라는 절기가 나옵니다.
“예루살렘에 수전절이 이르니 때는 겨울이라”
수전절은 “하누카”라고 하는데 촛불을 켜는 것입니다. 성탄을 기념하는 것이 아니라 하누카 즉 수전절을 지키기 위한 것입니다. 기 절기는 대개 12월 중순경으로 성탄절 직전에 시작됩니다. 요한10장은 바로 이 절기를 배경으로 한 것이라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본문에 절도와 강도라는 것은 당시의 바리새인들이라고 했습니다. 예수님과 더불어 격렬한 논쟁을 벌이던 바리새인 같은 당시의 종교인들을 대상으로 말씀하시고 있다는 사실을 우리가 놓쳤어는 안됩니다.
바리새인들은 종교적으로 열심히 있었습니다. 타의 추종을 불허할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열심은 대단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그리스도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였습니다.
이제 이 말씀을 좀더 실감있게 이해해 보시기 바랍니다.
“나”는 문이다. 이 문을 통과하지 않고 이 문을 들어가려 하는 자는 다 절도요 강도다.“
우리를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기 위하여 우리에게 찾아 오신분! 하나님과 원수된 관계를 해결하시고 하나님과 죄인을 화목하게 하시며,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자녀요 그 백성이 되게 하고자 찾아오신 예수님!
그런데 하나님을 경배하고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고자 힘썼던 유대인, 특히 바리새인들이 그들을 위해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거절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얼마나 슬픈 아이러니합니까? 오늘날 교인들 가운데에는 이런 사람이 없겠습니까? 에수님을 빼놓고 하나님을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 말입니다.
오늘날 많은 교회가 예수님의 메시야되심과 예수님에 대한 우리의 책임있는 삶을 강조하지 않고, 막연히 하나님에 대해서 이야기 합니다. 이것은 우리를 바리새인으로 만들어 버릴 가능성이 많습니다.
바울이 바울되기 전에 가졌던 결정적인 결함이 이것이었습니다. 그는 바울이 되기 전에도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것도 열심히 믿었습니다. 그의 자랑을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나는 팔일 만에 할례를 받고 이스라엘 족속이요 베냐민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요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으로는 교회를 박해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라.(빌3:5-6절)
그래서 하나님이 아닌 예수를 믿는 사람들을 그 땅에서 척결되기 위하여 다메섹까지 쫓아갔던 것입니다. 그는 그 정도로 열심이었습니다.
롬10장을 보면 나중에야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었던 바울 사도가 자기 동족들을 생각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들아 내 마음에 원하는 바와 하나님께 구하는 바는 이스라엘을 위함이니 곧 그들로 구원을 받게 함이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1-3절)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어떤 일을 하셨습니까? 죄인이 의롭다함을 얻어 하나님앞에 올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하나님께서 하신 일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있었던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고 우리를 의롭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의 의를 세우기 위해 힘씀으로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아니하였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열심히 있었으나 하나님의 의를 복종치 않았던 것입니다.
그래서 롬10:4절에서 다음과 같이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리스도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를 이루기 위하여 율법의 마침이 되시니라.
유대인들이 율법을 지키면서도 율법의 완성자로서 찾아오신 그리스도를 향햐여 신앙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래서 구약에서 이런 말씀이 누누이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요5:42절)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율법의 완성자로서 찾아오신 예수님을 향해 신앙의 초점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는 것은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한국교회의 전통적인 교인들 가운데서도 모든 예배와 모임에 열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막상 예수님과 인격적인 관계를 맺지 못하고, 주님과 동행하는 경건의 비밀과 신앙의 비밀을 알지 못한채 살아가는 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주님께서는 다음과 같이 말씀하십니다.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갈 자가 없다. 나를 통하지 않고 이 문으로 들어가지 아니하고 다른데로 넘어가는 자는 절도며 강도이니라.”
요10:9절을 보시면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이 말씀이 우리들에게는 별로 큰 충격이 아니지만 당시 유대인이나 바리새인들에게는 두 가지 면에서 굉장한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첫 번째 충격/ 누구든지
당시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백성 속에 들어가는 사람은 유대인일뿐 이라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서 예수님은 이제 모든 사람을 초청하고계십니다.
“누구든지!”
이 주님의 초청은 우주적입니다. 요한3“16절에 이 사실을 잘 나타내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당신의 주권에 의한 예정이 아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라...”주님께서 세상의 모든 사람을 초청하십니다. 요한복음에는 첫장부터 마지막장까지 모든 사람을 사랑하시고 구원의 길로 인도하시는 그 하나님의 사랑이 나타나 있습니다.
두 번째 충격/나로 말미암아
그들은 지금까지 메시야 되신 그리스도에게 초점을 맞추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고자 애썼습니다. 그러나 주께서 이렇게 선언하십니다. “나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에게도 구원이 없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이 문은 구원의 문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개인적인 체험이 없이는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분명한 응답이 없이는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할 아무런 근거가 없습니다.
여러분가운데 어떤 분은 신앙의 연조를 자랑하는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나는 이 교회 개척멤버다, 라고 말입니다. 나는 모태신앙이다. 나는 이 교회에 어릴때부터 다녔어, 라고 신앙의 경력을 자랑할 수 잇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훌륭한 경력이라고 해도 이것은 하나님 앞에 내세울 수 없는 것입니다. 오직 예수님을 통해서만 됩니다. 저와 여러분 신앙의 연조는 부족해도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님으로 통하여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수님을 경험해야 합니다. 그것은 여러분의 자세에서 시작됩니다. 구원을 희망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사모해야 합니다. 기독교가 진짜 구원의 종교라면 나도 구원을 받아야 하겠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천국이 실제하다면 나도 그 천국에 들어가고 싶다. 주님 함께 하여 주옵소서. 라고 겸손한 마음으로 가질 때에 성령께서 역사하십니다. 그리고 거듭나게 하시고 예수님이 나와 실제적인 관계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예수님을 만나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통해야만 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님을 경험하고 그분과 함께 하시는 삶이 있기를 축복합니다. 아직도 그런 경험이 없으신 분들에게는“나는 양의 문이다”라고 선언하신 그 예수님을 개인의 구주와 주님으로 만날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나는 문이다”라는 이 말씀 속에 우리는 두가지 귀한 교훈을 찾을 수 있습니다.
첫째로 유일한 문입니다.
본문에 보시면 나는 문이다. 라는 의미는 하나밖에 없는 문이라는 뜻입니다.
노아의 방주에 문은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그 문을 열지 않고는 아무도 방주안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그 문이야말로 노아 시대에 살고 있는 모든 사람들의 구원과 멸망을 결정하는 결정적인 문이었습니다. 이 방주에 들어오지 않았지만, 문 밖에서 선한 생활을 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생각해 봅시다. 그런데 그들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그 문을 통해서 방주 안에 들어온 노아의 8식구만이 구원을 받았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도 교회에는 나와 앉아 있지만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유일한 구원의 문을 통과하셨습니까? 방주에 단하나 있었던 그 문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 가운데 예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뜻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으로 예수님을 받아들이고 감사해야 합니다. 노아 시대의 사람들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단 하나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당신은 방주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방주 바깥에 있습니까?”
그리고 다시 질문을 합니다.
“당신은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까? 아니면 아직도 그리스도 바깥에 있습니까?”
이 사실을 행전4:12절에 명확하게 밝히고 있습니다.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또 요한14:6절에서도 분명히 선언하고 계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시비를 겁니다.
“왜 예수님을 독단적으로 하나의 문만 만들어 놓았느냐고?”
그러나 여러분 들어갈 수 있는 문이 있다는 것 만으로 감사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죄로 말미암아 영원히 멸망 받아 마땅한 자들인데 말입니다.
이것이 오늘 멸망 받은 인간들에게 주신 마지막 기회입니다. 우리는 행함이나 노력으로는 결코 하나님 앞에 설수 없습니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이 구원의 좁은 문, 유일한 문을 예비하셨습니다.
“나는 문이다.!!!”
이 문은 아직도 열려 있습니다. 그러나 이 문이 항상 열려 있는 것은 아닙니다. 주께서 잔치집의 비유를 통해서도 말씀하셨듯이 언젠가는 닫히고야 말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 구원의 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습니다.
이르시되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에게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6:2)
바로 지금이 구원의 날입니다. 그러나 잠시 후 이 땅에는 진노의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계6:17절에 보시면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다고 합니다. 우리를 향해 인내하시고 참으시며 구원의 복음을 던지시며 초청하시던 하나님의 역사의 시간을 마침내 진노의 시간으로 바꾸시는 날이 찾아올 것입니다. 이 문이 언제가지나 열려 잇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아직은 누구에게라도 열려 있습니다.,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얻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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