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중한 날의 꿈>
TV 브라운관에 갇혀 어린이용에 그쳤던 만화영화. 그러나 이젠 그 한계를 넘어 흥행대작들이 점령하는 여름 극장가에 활력을 불어넣는 애니메이션으로 확장되었다. 아이를 보여주려고 따라갔던 어른이 더 감동을 받고 왔다는 <라이온 킹>이 증명했듯이, 한 차원 높게 어른 세상의 모순을 동심으로 고발하고 해결하는 전설적인 미야자키 하야오 저패니매이션의 품격과 상상력을 음미한 이후 애니메이션은 어른, 아이 구분 없는 강력한 영화형식이 되었다.
일본 지브리와 할리우드 디즈니, 그리고 디지털로 무장한 픽사 애니메이션을 구경하면서, 한국 애니메이션은 뭐하고 있나, 라는 자괴감이 피어오를 만도 하다. 특히 그들로부터 하청작업을 받아 줄기차게 그림 그려주는 일을 했던 장구한 역사를 가진 한국 만화계가 아니던가. 그런 와중에 등장한 <소중한 날의 꿈>은 주목해볼만한 기대작이다. 10여년에 걸친 끈질긴 작업으로 역작을 만들어낸 안재훈감독 (연필로 명상하기 스튜디오)의 성실한 노력이 캐릭터 얼굴 하나하나를 자연스러운 한국인 얼굴로 그려낸 모습만 봐도 감지된다.
70년대 말과 80년대 초, 지방도시를 배경으로 청소년의 일상과 꿈을 복고풍으로 담아낸 이 작품은 소중한 지난 기억을 풋풋한 수채화풍 그림으로 살려낸다. 돌이켜보면 청소년기는 인생의 고뇌와 낭만이 공존하는 응축된 시절이다. 여전히 양육의 대상이지만, 어른세대와 다른 또래문화와 친구사이의 관계를 중심으로 자신을 세워나가며 첫사랑을 겪는 시기이다.
주인공 이랑은 장차 무엇을 할지 구체적으로 잡히는게 없다. 육상부 기대주였지만 뒤처지는 걸 감당할 수 없어 일부러 넘어지는 실수로 체면치레를 하는 꾀도 부리지만 자괴감에 빠져든다. 오래 입으라고 일부러 큰 교복을 사준 어머니, 어머니가 하는 방앗간 심부름을 하며 무력감에 빠져들 뿐이다. 그런데 서울에서 전학 온 수민을 만나 열등감을 느끼면서도 흠모하는 마음을 갖는다. 수민은 세련되고 예뻐 남학생의 인기를 독차지하는데다가 30대 예술가를 사랑하는 조숙한 감수성까지 갖고 있다. 또래와의 연애를 유치하게 여기며 시를 쓰며 30대 죽음을 꿈꾸며, 길가에서 영화 포스터까지 떼어내 방안에 거는 대담함도 보여준다. 큰 연에 몸을 싣고 비행연습을 하는 철수와의 만남은 첫사랑을 예고한다. 어른이 되 무엇을 할지 헷갈려하는 이랑에게 우주비행사를 꿈꾸는 철수의 등장은 새로운 자극이자 갈등을 불러 일으킨다.
“내가 왜 이러는지 몰라/ 도대체 왜 이런지 몰라/ 꼬집어 말 할순 없어도/ 서러운 마음 나도 몰라 (...) 이러는 내가 정말 싫어/ 이러는 내가 정말 미워/ 이제는 정말 잊어야지 오늘도 사랑 갈무리” 나훈아의 <갈무리>를 깔고 질주하는 이랑의 모습이 담긴 장면은 복고풍 코드와 인물의 내면을 절묘하게 조화시킨다.
당시 장안의 화제였던 <러브스토리>는 이랑의 마음을 뒤흔든다. 절절하다가 애절해지는 사랑이야기는 멋진 남자와의 순애보 판타지로 이랑을 사로잡는다. 눈싸움을 하고 눈밭에서 뒹구는 장면에서 여주인공 대신 자신을 대입해 보지만, 그 상대가 철수로 변하면 꿈이 깨진다.
그런 가운데 대사나 상황에서 자연스럽게 번져나오는 유머감각이 영화보기를 흥미롭게 만들기도 한다. 이를테면 이랑과 철수가 상대에게 끌리는 떨림을 감춘채 반말과 존댓말이 뒤섞인 어색한 대화를 하다가 엉뚱한 이야기를 하는 부분이나, 흑백TV 화면으로 재현해 내는 김일선수의 박치기 레슬링 장면 같은 것들은 회고담의 묘미를 되살려낸다. 철수의 삼촌 연구실이 철거대상으로 망가지는 현장에 달려간 이랑이 청각장애인 삼촌과 나누는 우주적 대화는 애니메이션 특유의 판타지 덕목을 몽상적으로 증명해낸다. 뚜렷한 갈등요인을 살려내지 못한 드라마투루기의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이랑이 친구 돈을 빌려 철수와 함께 간 공룡발자국 탐사 여행은 꿈과 흔적이라는 화두를 남긴다. 공룡처럼 모든 것이 사라지지만 그래도 꿈을 가져야 하는 인류의 운명, 빗물 고인 공룡 발자국을 들여다 보는 이랑의 눈에선 빛이 난다. (영어 제목이 <공룡과 나 Dinosaur & Me>라는 점이 의미를 갖는 지점이다)
빵집과 라디오시대 전파사, 그리고 흑백TV, 손으로 그린 대형 포스터가 걸린 시골극장, 서로 치고받으며 생활하는 교실풍경, 시를 읊으며 남자이야기도 하다가 슬쩍 고민을 내비치는 친구와의 시간들...70년대 말 문화코드가 정겹게 다가오는 일상의 풍광들은 어른이 된 관객에게 지나간 소중한 날을 기억해 보며 자신의 본색을 찾으라는 주문을 건다. 하긴 <써니>나 <브라보 마이 라이프>같은 영화에서도 어른이 되 책임감에 지켜 자신을 잃어가는 지친 중년들에게 과거의 꿈을 되찾아 제2의 인생을 열어가는 드라마를 짜나가지 않던가? 그런 취지에서 보면 <소중한 날의 꿈>은 굳이 매너리즘에 빠진 나이든 세대를 보여주진 않지만, 그들의 잃어버린 소중한 날들을 되돌아보게 해주는 치유의 힘을 발휘한다.
팁: 색채표현에서 하늘이나 대지의 색감같은 부분이 미흡하게 느껴지는게 문제이지만, 그간의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또 다른 시작이란 점에서 이를 바탕으로 다음엔 보다 아름답게 해낼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한다.
유지나/2011/06/24
첫댓글 음미할만한 애니입니다. 각고의 노력도 느껴지구요.
웅... 이영화 궁금해요... 오늘 극장에 같는대... 웅... 상영을 이제안하는거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