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면형의 집 녹나무
북반구에 위치한 한반도는 귤이나 바나나가 귀한 과일이다. 물론 역사서의 기록에 의하면 2천여 년 전에도 제주도에 감귤이 있었다. 하지만 그 감귤은 왕조 시대 조정의 진상품으로 백성들에겐 수탈과 강제 노역의 대상이고 진상 제도 폐지 뒤에도 영농의 대상이 아니었다.
그러나 역사는 우연이자, 필연의 결과물이다. 1898년 프랑스 파리 외방전교회의 에밀 타케 신부(Emile Taquet, 한국 이름 엄택기, 1873~1952)가 조선 땅을 밟았다. 타케 신부는 경상도와 전라도, 제주도를 오가며 선교에 열정을 쏟았다. 그러다 1902년 제주 서귀포 하논본당의 제3대 주임 신부가 되었다. 타케 신부는 하논성당을 한라산이 잘 보이는 하논 분화구와 가까운 서흥동 홍로로 옮기고 13년을 지켰다. 이때에 파리 외방전교회의 동문이자, 일본에서 식물 채집으로 널리 알려진 포리 신부(1847~1915)의 영향으로 같은 길을 걷게 되었다,
타케 신부는 제주도의 식물 1만여 점을 채집하여 표본으로 만든 뒤 미국 하버드대, 영국 왕립식물원 에든버러, 프랑스 파리 자연사박물관, 일본 도쿄대 등에 보내 널리 알렸다.
1907년에는 포리 신부와 함께 한국이 원산지이고 유럽인들이 크리스마스 나무로 좋아하는 구상나무를 한라산 해발 1400m에서 발견했다. 또 이듬해에는 한라산 해발 6백m 지점에서 왕벚나무를 발견하여 제주도가 왕벚나무 원산이자 자생지임을 최초로 밝혔다.
1911년 타케 신부는 이 왕벚나무 모종을 일본의 포리 신부에게 선물로 보냈고, 온주 밀감 14그루를 그 답례로 받았다. 바로 오늘날 제주 감귤 산업의 초석이 놓인 것이다.
타케 신부는 식물 채집으로 받은 보상금으로 성당 일대의 땅을 사들여 농민들에게 감귤 농사를 가르쳤다. 농사짓기 어려운 척박한 땅 제주 농민에게 감귤은 생명과 희망이 되었고 홍로성당이 있는 하논 일대에 감귤밭이 늘어났다. 이로써 해방 뒤 서귀포는 우리나라 최대의 감귤생산지가 되었고, 이 감귤나무를 ‘대학나무’라고도 부르는 연유이다.
타케 신부가 선교와 식물 채집을 하던 제주 서귀포 서흥동 홍로성당이 현재는 ‘면형의 집’이다. 1976년 한국순교복자성직수도회에서 홍로성당 터에 ‘피정의 집’을 세우고 이름을 ‘면형의 집’이라 한 것이다. 면형(麵形)은 글자 풀이로 ‘밀떡’이나 그 의미는 성체(聖體), 그러니까 ‘그리스도의 몸’의 비유적 표현이다. 가톨릭에서는 최후의 만찬 때 그리스도의 말씀대로 밀떡을 그리스도의 몸인 성체로 규정하고 있다. 그리고 미사 때에 이 밀떡으로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성체기념 예절을 갖는다. 또 피정(避靜)은 ‘시끄러운 세상을 떠나서 안정을 찾는다’는 가톨릭의 신심심화(信心深化)이다.
온주 밀감은 중국 저장성 윈저우가 원산이다. 그리고 일본 역사서에 서기 60년경 ‘다지마 모리’가 제주의 감귤을 가져와 심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일본에서 보내온 14그루의 온주 밀감은 옛 제주도의 감귤을 개량한 것임에 틀림없다.
아무튼, 당시 타케 신부가 심은 온주 밀감 14그루 중 1그루가 면형의 집에서 108년을 살다가 2019년 4월에 고사하였다. 그리고 60여 살의 후계목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이 제주 서귀포 ‘면형의 집’에 또 한 그루의 거목이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크고 나이가 많은 260여 살의 녹나무이다. 이 녹나무는 봄에 새잎이 난 다음에 묵은 잎이 떨어진다. 추풍낙엽이 아닌 춘풍낙엽의 상록활엽교목이다. 이 녹나무가 면형의 집에서 어른 주먹 2개 크기의 열매를 매단 밀감나무, 키 큰 워싱턴 야자나무 등을 거느리고 있으니, 잠시 들려 바라보기만 해도 피정이 되는 곳이다. 제주 서귀포에 가거든 만나서 참 좋은 성스러운 나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