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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좌도 의병대장 김해
김 해(垓: 24세), 김 기 24세, 김 강 24세, 김 평 24세,
김득렴 26세, 김언구 25세, 김백웅 27세, 김득연 26세,
김득의 26세, 김득숙 26세. 김광원 27세.
경상좌도 의병에는 효려공과 (안동, 오천 예안파)
담암공의(안동 구담) 후손, 양 가문의 후손들이 주축이다.
안동의 근시재 김해는 왜란이 일어나자, 유림의 추대를 받아
경상좌도 의병장이 되었다.
김기는 정재장겸 소모사가 되어 의병을 모으고,
낙금헌 이정백과 금역당 배정길을 좌우 부장으로 삼아 춭정하였다.
종제인 설애 김 강과 극재 김 평 형제와
족손인 도봉 김득렴과
쌍벽당 김언구의 손자 김백웅이 따랐으니,
순식간에 수 만명의 의병이 모여 경상좌도 의진이 편성되었다.
24세 영남좌도 의병대장 휘 해(양간공파‧밀직부사공파)
명종1년(1555)-선조 27년(1593) 조선 중기 문신 의병장. 자는 달원. 호는 근시재.
아버지는 참봉 읍청정 부의 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이다.
1588(선조22) 생원시 2등 9인으로 합격하고 이듬해 증광시
문과 을과 7인으로 급제하였다.
승문원 정자. 예문관 검열에 제수 되었으나, 동료중
사초를 불태운 사건에 연루되어 향리에 내려와 학문에 정진하였다.
1592(선조26)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여러 고을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니,
의병대장에 추대되어 이정백, 배용길을 좌부장으로 삼아
경상좌도의 진을 편성하여 적을 추격하였다.
당교, 용궁, 함창에서 전투를 벌여 적을 크게 무찔러 전공을 세우고
예천 송구촌으로 진을 옮겨 많은 왜적을 생포 또는 참살하였다.
이듬해 밀양으로 내려가는 적을 추격하다가 경주에서 전사하였다.
타고난 자질이 순수하고 총명하여 태극. 음양에 대한
변의와 심성이기에 관한
논설, 치란, 흥망, 천문, 지리, 병법 등에 깊은 조예를 가졌다.
조목, 김성일, 유성룡, 남치리 등과는 도의로 사귀었다
수찬에 추증되어 1892년(고종3) 자헌대부 이조판서 겸 양관대제학,
성균관 좨주에 가증 되었다.
저서는 심의변(深衣辨) 거상의절(居喪儀節). 구익록(求益錄),
행군수지(行軍須知), 서행일기(西行日記), 향병일기(鄕兵日記) 등이 있다.
참고문헌 : 광산 김씨사
영남좌도 의병대장 휘 해 행장
선생은 타고난 자질이 순하고 아름다워 뛰어났고
연원의 학문은 가정에서 배웠다.
퇴계 선생 문하에서 배우지는 못하였으나, 성심으로 사모하였고
선생의 유훈을 연구하며 반성하고 체험하는공부는 날마다 게을리 하지 않았다.
남들은 그의 공부에 끝 간 데를 몰랐으니 태극음양에 대한 변의와
심성이기에 관한 논설과 역대의 치란흥망에 대한 자취 및
천문. 지리. 병법. 악률. 의술. 복서까지 그 연류를 깊이 따졌다.
여러 사람의 주해와 선유의 이론에 의심이 되는 것은 연구하고
같고 다른 점을 분석하였다.
때로는 홀로 깨친 것이 있거나
마음에 개운하지 못한 데가 있으면 곧 기록해 두었다가
조월천, 김학봉, 류서애 등 여러 선생에게 질의하였다.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세수하고 의관을 정제한 다음 사당에 배알하고
계모와 백모에게 매일같이 문안을 거른 적이 없었다.
일찍이 살림집 남쪽에 작은 집을 짓고
주자의 말씀에 따라 근시(近始))라는 현판을 걸었다.
날마다 그 집에서 글을 읽으며
정밀하게 연구하고 깊이 사색에 잠길 때에는 침식조차 잊었다.
선생은 효성이 지극하여
어버이 섬김에 항상 즐거운 낯빛으로 봉양을 하였다.
부모님의 의사를 거스른 적은 한 번도 없이 순종하였다.
선조의 제사 때에는 반드시 정성을 다하여 아무리 몹시 추운 겨울이라도
목욕을 하고 옷을 갈아입었으며 종일토록 꿇어앉아서 신명을 대하듯 하였다.
고을 사람들에게는 온화하고 의리로서 대하여
보잘것없이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도
반드시 공손히 맞이하였으며 벗을 접대함에 오래도록 더욱 공경하였다.
비치 남치리 선생과 서로 서찰을 보내면서 문학상 의문 나는 점을
변론한바가 많았으며 또 송소 권우와 금역당 배용길과는 도의로 사귀어
학문을 강론하여 서로 도움이 많았다.
옛 예법을 더욱 좋아해서 의례 예기 등 책을 되풀이하여 읽고
그 요점을 연구하였다. 그리하여 당시 사대부 집에서 의심나는
예문이나 변통할 절차가 있으면 모두가 선생을 찾아와서 질의하였다.
혼례 중에 세속이 실행하지 않는 절차를 선생은 개연히 실행하였다.
사위를 맞이하면서
사당에 고유하는 의식이며, 딸을 훈계하여 시집보내는 말을 한결 같이
가례와 준용하니, 온 고을이 탄복하고 흠모해 본받는 자가 많았다.
전쟁터에 있을 때에도 국운의 곤란함을 슬퍼하고
왜적의 방자함을 분하게 여겨서 말씀을 하다가도
눈물을 옷깃에 적시고는 하였다.
일찍이 말하기를 가 이미 의병을 모아서 거느렸는 즉
추악한 오랑캐를 쳐 없애기를 기약하지만
군사가 적고 행세가 약하여 성불성을 미리 요량할 수 없었다.
불행이도 지탱해 내지 못한다면 나는 오직 한 번의 죽음으로써
국가에 보답 할 뿐이며 맹세코 구차하게 살지 않겠다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듣자 모두들 얼굴빛이 달라지면서 용기가 더하여 기회에 따라
적군을 쳐부수니 성세가 크게 떨쳐졌다.
순사 김수는 공의 군사가 왜장의 머리를 베어 바치니
온 도내 의병 중에 첫째임을 가상히 여겼고,
의병장 김면은 그의 충의를 떨쳐서
왜적을 마음껏 토벌 한 것은 옛 사람과 비교해도 흔치 않다고 기리었다.
그의 충성스러운 용기와 군략을 설시 한 것은 온 도내에 현저하니
왜적의 충돌을 막고 백성의 삶은 편안케 해서 국가가 중흥하는
공을 이룩할 만 하였는데 필경 도중에 목숨이 꺾였으니
지사(志士)의 천추에 유감이 아니겠는가.
한산 이상정 찬
26세 도봉공 휘 득렴(양간공파 ‧퇴촌공파)
1545년(인조2)-1601년(선조35)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치정, 호는 도봉.
아버지는 장사랑 언련, 어머니는 풍천 임씨.
유일재 김언기의 문인이며 선조 15년(1582) 생원시 2등 21인으로
합격하였다.
선조 26년 임진왜란 때에는 근시제 김해와 같이 창의하며
화왕산에 들어가 크게 군공을 세웠다.
시례의 가문에서 성장하여 문장과 학행이 세상에 저명하였다.
유고가 있으나 전란 중에 불타 없어졌다.
성균진사 도봉공 휘 득렴 유사
공의 휘는 득렴이요, 자는 치정이며, 호는 도봉이니 담암 선생의 주손이시다.
가정실례로 견문과 식견이 뛰어났고 때인즉
유일제 선생이 창도하여 퇴계선생의 학문을
강명할 때에 공이 당내 종질로서
일찍부터 배워 위기(爲己)의 학문을 터득하였다.
동문재현 신오봉, 권노천, 권태일과 도의로 사귀었다.
만력 임오년에 생원시에 합격하였다.
선조 임진년에 창의하여
망우당 곽재우와 함께
하왕산성(창녕)에 들어감에 제명록이 있다.
공이 사가의 보수로 도학이 있는 문하에 들 때
학업을 받았고 확실한 역사에 단서가 있는데
병화로 인해 문적이 탕진되어 증빙이 없고
다만 이 적묘한 기록만 있을 뿐이다.
광산김씨 퇴촌공파보~
25세 쌍벽당 휘 언구(양간공파‧퇴촌공파)
조선 중기 학자, 자는 대명, 호는 쌍벽당.아버지는 종사랑 균이며
어머니는 봉화 금씨이다.
중종 26년(1531) 생원시 2등 21인으로 합격하였다.
천품이 영모하여 학문에 득실 하였고 재예와 행검이 있어
유현의 문하에 종유하며 힘쓰고
유훈(담암공의 유훈)을 받들어
벼슬길에 오르고 현달하는 것을 구하지 않았다.
쌍벽당 김공 묘갈명 병서
병인년 여름 봉화거촌에 거주하는 김두수군이 그의 선조
쌍벽당공의 묘갈명을 받으려고 멀리 나의 서울 집에 찾아왔다.
말하기를「부군(府君)께서 옛 집을 창건한바
여러 후손들이 협력하여 더욱더 크고
새롭게 중수하고자 하는데 또한 아울러 묘갈도 다시 개수하고자 합니다.
묘갈명을 어른께 받지 아니하고 누구에게 받겠습니까.」하였다.
삼가 살피건대 공의 휘는 언구요, 대명은 자이고 쌍벽당은
그의 당호이며 광산은 그의 관향이다.
신라왕자 흥광이 비조이며 고려에 와서 8대에 연이어
평장사를 배출하고 나서 흥성하였다.
조선에 들어와서 약채는 도관찰 출척사를 지내고
예조판서에 증직을 받았고 ,
그의 아들 열은 형조도관좌랑을 지내고 형조참의를
증직 받았으며 호는 퇴촌이니 이분이 공의 5대조이시다.
고조는 달손이며 직장으로 병조참판을 증직 받았고,
증조는 수(洙)로
강화도호부사를 지내고 이조판서를 증직 받았다.
대부(大父)는 용석(用石)으로
성종조 진사에 오르고 점필재, 김종직 문하에서 수업하고
점필재 문하의 십철(十哲: 뛰어난 수제자)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연산 때에 남하하여 안동 구담에 거주하니 호는 담암이요,
아버지는 균으로 습독관을 지내고 호가 죽헌이니
담암의 둘째로 세거지지(世居之地)인
거촌(巨村:봉화)에 이거(옮겨짐) 하였으니
우리 김씨가 봉화에 들어온 것은 이분으로 부터이다.
어머니는 봉화 금씨로 현감인 계가 외조가 된다.
공은 중종 정묘년(1507)에 태어나서 25세에 생원시에 합격하였으니
일찍 성취하였다고는 할 수 없으나
멀리까지 이름이 나는 것을 구하지 아니하고
은거하여 궁행하는 것에 힘썼으니
이것이 곧 준(準)이요, 이것이 곧 적(的)이다.
어찌 당시 전후 화(禍:사화)의 그물이 뜻을 숭상하는 사람들을
구속하는 까닭이 아니겠는가…….
이에 문헌이 증거할 수 없어 그 전말을 기술하는데 어려움이 있으니
자손(慈孫)들의 개한함이 어떠하겠는가…….
보록(譜錄)을 참고하였으나 또한 돌아가신 해가 등재되어 있지 않아
기일(忌日)만 기록되어있다.
공이 수(壽)를 하였는지 여부를 알 수가 없다.
그러나 학문이 돈독하였음과 닦은 행실은
그때 사람이 추중(推重)하게 여겼다고 하니,
소위 명철(明哲)한 것은 그 보신(保身)으로 알 수 있으며
그 유법(선비의 법)을 후손들에게 주어 후손들이 그 유법을 꾀하고자
넉넉한 것을 후손에게 주었음이 아니겠는가…….
공의 묘는 봉화군 북면 잠계리의 계좌의 언덕에 있고 배위는 의인 청주 정씨로
연하여 부(紨)하였으니 군수 희주가 공의 외할아버지이다.
아들 득려가 생원이요,
생원의 아들 백웅은 임진왜란 때 의병제장이었고,
다음 아들은 중증으로 학행이 있고,
백웅의 아들은 석중으로 호가 잠계요,
중웅의 아들은 석견으로 통덕랑이다.
석중은 출계하였고, 김달전은 별제이다.
석중의 아들 유로 승의랑이요, 허는 통덕랑이며,
경은 처사이고, 원은 일찍 죽었고, 무는 호가 은표다.
명에 가로되
사람이 학문을 여김이여! 하늘의 밝은 것을 본받도다.
어찌하여 고금에 궁행이 드문가.
대개 사람이 제물에 가려져 본성을 잃었음이여.
공이 경(敬)을 극진히 잡아 상제가 임함과 같이하였다.
사람들이 추증하게 하였음에 어찌 학문이 없다하겠는가
나의 명이 이 돌에 새겨져 천년제사 지내는 동안 보여지리라.
순철 김철희 근찬
26세 갈봉공 휘 득연(양간공파‧퇴촌공파)
1555년(명종11)-1637년(인조15) 조선 중기 학자. 자는 여정, 호는 갈봉
아버지는 유일재 언기이며, 어머니는 영양 남씨.
서애 류성룡의 문인이며 1592년 임진왜란 때 창의하여
의창을 설치하니 명나라 장수 양호와 장무덕이 감탄하여 공경하였다.
양호의 종사관들이 그의 덕행과 문장
그리고 충의를 칭찬하여 영천과 경주 사이에
비를 세우려 하였으나 그들이 개선함으로 일이 미치지 못하였다.
광해 5년(1612) 생원시 동방생원과 2등 5인으로 합격하고
인조반정 후 나라에서 세 번이나 불러
벼슬을 주려했으나 나가지 않았다.
선영 밑에 집을 짓고 지수정(止水亭)이라는 편액을 달고
경서와 사기를 탐구하고 도의를 강마하여 후진을 양성하였다.
철종 10년(1818) 집의에 추증되고
특별히 교첩(임금이 내린 서신)을 내리어
“도학의 연원이 진실로 순정하고 충훈의 절의가 뛰어나게 갖추었다.”하였다.
저서로 갈봉문집 2권과 지수정가와 산중잡곡이 있다.
지수정가는 한글로 되어있어 국문학의 연구 자료로 연구 중에 있다.
성균진사 증 통정대부 사헌부 집의 징사 갈봉공 휘 득연 장갈
공의 휘는 득연이요, 자는 녀정이니 유일재 선생의 장자이시다.
선생은 품고 있는 도를 시험에 쓰이지 않으시고 오직
후진 교육에만 힘쓰셨다.
공의 자품이 뛰어나 초연하시고 가정에서 배운 학문도
전실(가정에서의 규칙적 생활)하였다.
서애(류성룡) 백담 (구봉령) 한강(정구) 여러 선생님에게
유학하여 학문의 방향을 들었다.
임진왜란에 창의하여
향군(군량을 보급)을 맡으심에 명나라 장수 양경리, 호가
크게 감탄하고 공경하여 증시(贈詩)하되
유자(孺子)와 주정(朱程)을 배웠다고 하고
그의 종사(從事) 장무덕, 진천충, 주공유 3장수가 서문을 증(贈)하였다.
공의 덕행과 문장과 충의를 칭송하였고,
비문 수백 언을 찬(撰)하여 장차 돌에 새겨
공(功)을 기록하려다가,
그들이 개선하여 돌아감으로 일이 미치지 못하였으나
그 수필(手筆) 이첩(二帖)이 집안에 보관되어 있다.
북인이 정권을 잡자 과거를 보려 아니하고 산소의 재실을 지어
지수정(止水亭)이라는 편액을 걸고 문을 닫고 들어앉아
경사(經史)에만 깊이 파고들었다.
생도(生道)들을 가르침으로 낙을 삼고 따분함을 잊으시려
명현(名賢)들과 더불어 도의를 강마함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때로는 수석을 찾아 소풍을 하며 낙계회첩이 있고,
가까운 수려한 풍치 속에 계암 제종(諸宗)과 더불어
화수(花樹)를 베풀고 돈목을 강조하니 남주 사대부가의
종회(宗會)를 반드시 광김(光金)의 유래(由來)있음을 칭송하더라.
인조반정 이후 세 번이나 조정에서 불러도 나가시지 않으셨다.
병자년 난리 후에 술을 마시고 시를 읊는 것으로 세월을 보냈으니
이것이 바로 옛말에 온 세상이 흐려져야만
깨끗한 선배를 볼 수 있다고 아니하겠는가.
공의 문장은 다듬지 않아도 완성되었고 시도 깨끗하고 진실하여
사실에 따라 흥(興)을 부치니 시사유지(詩史遺志)가 있다.
명(銘)하여 가로되, 광산 김씨는 대대로 평장사가 많았다.
담암공은 시골에 숨어서 살았고 유일재는 비로서 빛나게 되었다.
공은 이 가정에서 태어났는데 뛰어난 재주는 옥과 같았다.
따뜻하고 순수한 자질로서 세운 지조가 확고하였다.
결박한 마음이고 명랑한 지식이었다. 효도는 여묘살이에서 볼 수 있고
의리는 참의에서 나타났다. 명나라 사람이 칭찬한 것은 그들이
준 필첩에서 상고할 수 있다. 그만 세상을 잘 만나지 못해
임천(林泉)에 사는 것을 낙으로 삼았다.
와룡산 그윽한 곳에 지수정을 지었네.
옥 같은 사람 숨어사는데 오막살이집이 쓸쓸하구나.
남긴 기풍 살아지지 않고 우리들 후세인을 일깨워 준다네.
이 깊숙한 산 언덕에 4척(尺) 쯤 되는 묘소가 있네.
이 명시를 새겨 후손들에게도 길이 보도록 한다.
세마 이정광 찬장(撰狀) 예조참판 이소 김굉 찬
김득의(得議: 26세)는
갈봉공 득연의 동생으로 형과 겉이 창의하였다.
선조조에 성균생원으로 생부 유일재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김득숙(득숙: 26세)은
득의 동생으로 백담 구봉령의 문인으로
학행이 뛰어났다.
영남좌우도 선비들이 모여 재주를 겨루었는데,
대제학을 지낸 우복 정경세를 제치고 수위에 뽑혔다.
애석하게도 29세에 일찍 졸하였다.
김광원(光源: 27세)은
득의 아들로 호가 석당이다.
학행과 문장이 뛰어나 향천에 올랐으나 벼슬을 하지않다.
임천에 은거하며 영재를 육성하고,
사림을 계도하여 유풍을 진작하니 명사와 이름난 문인들이 많이 나왔다.
담암공으로부터 아들 손자까지 진사가 계속나와
7대 진사집의 문한가로 명성이 높았다.
광산김씨사. 광산김씨 약사.
2023년, 6월.
편집 선국